'워치만니'가 정리한... 「휴거」에 대한 연구
휴거는 시대 끝 이전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휴거」 (rapture)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3절까지에 있는 「영접하다」 (receive)라는 단어와 일맥상통한다. 휴거되는 것은 스스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휴거되는 것은 주님에 의해 하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거는 특별한 용어이다. 그분은 속히 오실 것이며, 그분이 오실 때 그분은 우리를 받으실 것이다.
휴거의 문제에 대해서는 믿는 이들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이 있다.
(1) 어떤 이들은 구원받은 모든 자들이 대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말한다.
(2) 어떤 이들은 구원받은 모든 자들이 대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3) 어떤 이들은 구원받은 자 중 일부는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며,
일부는 환난 후에 끌어 올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세 학파들은 각각 서로를 이단시하며 서로와의 교통을 단절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이 모든 학파들에는 잘 알려진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 학파에는 다비, 켈리, 토레이, 무디, 브룩스, 제임스 그레이, 게블린, 와이스, 스코필드 등이 있다. (토레이와 무디는 나중에 두번째 학파로 전향)
두 번째 학파는 뮐러, 고오든, 심프슨, 에드만, 무어헤드, 헨리 프로스트, 챔버린, 제임스 라이트, 뉴톤 등이 있다. (뮐러는 첫번째 학파에서 두번째로 전향)
세 번째 학파에는 허드슨 테일러, 로버트 채프만, 로버트 고벳, 펨버, 팬톤등이 있다.
비록 세 학파들 중 어느 학파도 다른 학파를 무시할 수 없다 할지라도 오직 한 학파만이 옳다.
이것을 연구할 때 우리는 공평한 태도를 갖고자 한다.
우리는 '변호사'가 아닌 '검사'가 되어야 한다.
Ⅰ. 첫 번째 학파의 논리들(환난전 휴거)
A. 본 지지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서 장차 노하심이 대환난이라고 말한다. 그 구절은 건지시는 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휴거는 환난 이전이라는 의미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들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9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이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하심은 대환난과 같다고 말한다. 위의 증거가 대환난을 언급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릇되었다. 왜 여기서의 노하심이 대환난의 노하심이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여기서의 노하심이란... 대환난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노하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믿는 이들에 대한 사탄의 징벌과 노이다. 믿는 이들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그들로 큰 고난 아래 처하게 하지만, 이것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노하심 아래서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다.
B. 이들은 예레미야 30장 6절부터 7절까지에서「야곱의 환난의 때」가 대환난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며 이방인들이나 교회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교회는 유대인들이 아니므로 이들의 관념이라면 우리는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단12:1).
만일 온 성경이 이 두 참고구절뿐이라면 대환난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다른 곳들... 예를 들면, 계시록 3장 10절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을 보아야 한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의 예언들은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야곱」이나 「당신의 백성」등이라는 용어들이 있다.
C. 계시록 4장 1절부터 4절까지 이 학파의 주창자들은 (1) 계시록 2장과 3장이 오늘날의 교회 시대를 말하며 (2) 계시록 4장 1절은 교회를 언급하고 (3) 계시록 4장 4절의 이십사 장로들은 교회가 휴거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4) 계시록 5장과 6장은 계속해서 대환난의 시작을 언급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시록 4장 1절은 온 교회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리로 올라오라」고 할 때 요한만을 부르고 있다. 이것은 '밧모'섬에서 일어난 성취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행전 8장 39절에서 빌립이 데려가졌다는 것은 그 또한 휴거되었다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24 장로들이 영화롭게 된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참으로 상식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1) 24 라는 수는 교회의 숫자가 아니고 7과 7의 배수들이(예를 들어 일곱 교회들처럼) 교회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2) 성경에는 장로들이 교회를 상징하는 곳은 없다. 교회 안과 유대인들 가운데는 장로들이 있지만 믿는 이마다 장로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먼저 천사들을 창조하셨고, 다음에는 유대인들을 선택하셨고, 끝으로 교회에 은혜를 주셨다. 어떻게 장로들이 교회로 여겨질 수 있는가?
(3) 계시록 4장과 5장에서 장로들은 보좌들 위에 앉아 있고 금면류관을 쓰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서 계신다. 보좌들과 금면류관들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들인데 그리스도가 영광받기도 전에 교회가 영광을 받을 수 있겠는가?
(4) 어떤 이들은 장로들이 입고 있는 흰옷들이 주님의 의를 가리키며, 주님의 피로 씻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격에는 장로들의 옷들이 피로 씻어졌다고 말하는 기록은 없다. 죄 때문에 우리 옷들은 보혈로 희게 씻음 받을 필요는 있지만 이십 사 장로들은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
(5) 이 장로들은 결코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4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했다. 5장에서 그들은 구원의 노래를 불렀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구속된 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여러 권의 성경 번역본들은 9절의 그 부분을「우리를 구속하신」으로 번역한다. 이러한 번역은 틀린 것이다.「우리를(us)」이라는 단어는 「사람들(men)」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다른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언급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6) 계시록 4장은 교회나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주를 언급하고 있다.
(7) 계시록 5장 8절에 따르면 교회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져올 수 없다.
(8) 계시록 7장 13절에서 만일 요한 또한 교회의 부분이라면, 그것은 교회에게 간구하는 교회가 된다.
(9) 요한이 장로들은 「님」혹은 「내 주(My Lord)」라 칭하고 있으므로 분명히 요한의 지위는 낮다. 만일 이십 사 장로들이 교회라면, 요한은 원로이기 때문에 그는 장로들 중의 장로가 되어야 한다.
(10) '24' 라는 숫자는 문자 그대로 해석된다. 그것은 상징이 아니다. 장로들 중의 하나가 요한과 말했는데 어떻게 교회의 이십 사분의 일이 요한과 말할 수 있겠는가? 숫자들이 확정되어 있으므로 장로들도 확정되어 있다. 이십 사 장로들은 사실상 우주를 지배하는 천사장들이다. 심지어 사탄 밑에도 왕들과 주관자들이 있다.
D. 이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과 17절이 휴거를 언급하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물론 그 구절들은 휴거를 언급하지만 어느 때인가 말하고 있지 않다. 거기서는 휴거의 사실은 언급되지만 휴거의 때는 언급 되어 있지 않다. 이것으로 휴거가 환난 전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E. 고린도전서 15장 50절부터 52절까지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다 부활하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부활의 사실을 언급하지만 휴거가 환난 전에 있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휴거는 환난 후에, 즉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째 나팔에 있을 것임을 증명해 준다. 어떤 이들은 로마 관습에 따르면 나팔이 세 번 불려짐으로 마지막 나팔은 세번째 나팔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릇되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계시하실 때 로마의 방식을 빌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련도 없고 의미도 없다.
(마지막 나팔시의 부활은... https://sylee560225.tistory.com/2186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F. 이들은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 주님이 분명히 교외가 대환난을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으며, 「인자 앞에 선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휴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약속은 조건적이다. 이 약속은 거듭남에 의한 구원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만일 사람이 깨어 기다린 후 자격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깨어 기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약속이 된다. 온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깨어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G. 계시록 3장 10절은 이 사람들은 뒷받침하는 가장 강한 논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것은 조건적인 약속이다. 사람은 이것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이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인내의 말씀」이란 무슨 뜻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주님을 욕하며 그분을 저주하고 그분을 부인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죽이고자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지 않는다. 주님은 그들을 징벌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내하고 있다. 우리는 저항하지 않는다. 진실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인내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믿는 이들이 휴거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믿는 이들이 다 환난 전에 휴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논거라면 온 세상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따라 구원받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이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조건을 잊어버린다. 이곳 계시록 3장 10절에서 주님의 약속은 빌라델비아 교회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빌라델비아가 교회의 대표이므로, 온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당시 소아시아에는 일곱 교회들이 있었지만, 주님의 이 약속은 모든 교회들을 대표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여섯 교회들 안의 이기는 자들은 휴거될 수 없으며 환난으로부터 구원받을 소망이 없을 것이다.
Ⅱ. 첫 번째 학파는 성경적인 기초가 부족하며 많은 근거 없는 가정들을 사용한다.
휴거와 같은 중요한 주제가 가정(假定)들에 근거를 둘 수는 없다.
그들의 가정(假定)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A. 이 학파의 사람들은 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가 교회에 대한 것이며, 계시록 3장 이후에는 다시는 교회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므로 교회는 휴거되었음에 틀림없다고 가정한다. 왕국에서는 그리스도께 인내의 말씀이 없으며 의와 위엄만 있다. 이로부터 이 사람들은 1장부터 3장까지가 이 시대를 언급하며, 4장부터 9장까지는 대환난의 기간을 언급하는데, 그 때에는 교회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교회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비록 교회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4장부터 19장까지에는 교회에 대한 많은 언급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계시록 19장 14절에서 군대들은 교회가 아닌가? 또한 계시록 22장 6절부터 16절까지는 (대환난의 일들은 포함한) 「이것들을」언급한다. 분명히 그것은 교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임을 가리킨다. 만일 그것이 교회와 믿는 이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면 왜 거기에 기록될 필요가 있겠는가? 계시록 5장 9절은 교회를 언급하며, 계시록 17장 6절은 교회인 성도들을 언급한다. 비록 교회라는 단어가 언급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교회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B. 이들은 교회가 휴거된 후에 많은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대환난안에 있는 성도들이 될 것이다.(계 7:9-17을 보라). 그들은 대환난 도중에도 구원받는다. 첫 번째 학파는 이런 가정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를 정당시 할 수 없다. 만일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된다면 이 모든 헤아릴 수 없는 성도들이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도 셀 수 없는 많은 수는 2억을 넘어야만 한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가장 큰 수이다.(계9:16). 오늘날 세계 인구는 18억이다 (역자주 : 이 메시지가 주어질 당시... 7장 이전에 세계 인구의 사분의 일이 죽고(계6:8) 13억이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다고 말할 수 이는가? 이것은 2000년 전체에 걸친 모든 성도들을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C. 대환난의 기간동안 성령은 하늘로 돌아가셨다. 이들은 교회는 성령과 함께한 것이므로 온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 가정한다. 그들은 근거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6절부터 8절까지인데, 거기서「불법의 사람」은 적그리스도와 같고 「막는 자」는 성령과 같다고 본다.
그러나 「막는 자」는 성령을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중에서 옮기다는 구의 어조는 성령을 가리킬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성령은 많은 이름들 그 영, 계시의 영이 있으며 거기에는 예외 없이 항상 영(spirit)이라는 단어가 있다. 비록 「보혜사」가 한번 사용되긴 했지만, 그 문맥은 분명히 보혜사가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다.(요 14:16). 성경에서는 성령이 한 번도「막는 자」로 불리운 적이 없다. 성령은 그 중에서 옮길 수 없다.
성경은 대환난 기간 동안 성령이 없을 것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더욱이 성령이 없다면 어떻게 몇몇 사람들이 대환난 기간 동안 믿는 이들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구원받으려면 성령을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 「그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것은 계시록에서 매우 분명히 말해진다(5:6). 대환난의 때는 엄밀히 늦은 비의 때다(행 2:15~21, 요엘 2:28-31).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이 성취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적들 곧 피, 불, 연기기둥, 태양이 흑암이 됨, 달이 피가 됨 등이 없기 때문이다. 오순절 날에 그러한 이적들이 없었다. 이 모든 다섯 가지 이적들은 대환난 기간 동안-피(첫째 나팔), 불(첫째와 둘째 나팔), 연기(다섯 째 나팔). 해와 달(여섯째 인)-성취될 것이다.
오순절은 축소형에 불과하며, 그것은 단지 작은 미리 맛봄이었다. 베드로는 이것이 그 예언을「성취했다」고 말하지 않고 「이것이…다(This is)」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이것이…다」라는 단어는 그 예언을 성취한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그들이 먹고 있는 동안,「너무 빨리 먹지 마시오. 당신의 음식을 씹어야 소화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자. 다음 날 A가 성경을 읽고 있었을 때 B가 A에게,「당신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야 그것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A는,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너무 빨리 먹지 말라고 말했던 그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대환난 기간 동안 해야할 더 큰 일이 있다는 것을 안다. 성령이 없었다면 어떻게 성도들이 환난의 기간 동안 설 수 있겠는가?
D. 이들은 사복음서에서 「제자들」이라는 용어가 유대인들을 언급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인 제자들에게 「너희는 깨어 근신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학파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므로 어떻든 우리는 다 휴거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사복음서는 제외하고) 서신서들만을 보고 따른다.
그러나 열 두 제자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이천 년 내에(즉 교회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기록된 적은 부분의 서신서들을 제외하고는 그처럼 많은 것들이 왜 과도기(제자들의 시대)에 기록되었는가? 더 나아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제자들」이라 부른다(마 28:19, 행11:26).
E. 그들은 사복음서, 사도행전등이 이방 믿는 이들을 위해 기록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스코필드는 산상수훈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마태복음 28장 20절의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그들(족속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구절과,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잊어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의 근거로 바울의 말만을 사용한다. 그러나 골로새서 3장 16절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를 읽어 보라.
F. 「이 왕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원문 참조). 그들은 왕국 복음과 은혜의 복음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왕국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는 주님이 땅에 계셨을 때와 환난전 때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은혜의 복음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은혜의 복음이 사람이 휴거되기 전에 온 세상과 전파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천국복음은 하나님의 왕국복음과 같다. 사도행전 20장 24절부터 25절까지는 은혜의 복음을 언급한다. 25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말은 앞의 24절에서 언급된 은혜의 복음이다. 사도행전 1장 3절에서 주님은 장차 올 하나님의 왕국의 일들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G.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이 할례의 전파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은 유대인들의 배경에 위배되어 말씀하셨던 것이 사실 아닌가?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은혜시대 또한 주님으로 시작했다.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11장 13절부터 14절, 누가복음 16장 16절, 「그 때부터」즉 그리스도 때부터, 사도행전 10장 36절 37절가지의 「이 구원의 말씀」은 요한의 때부터 시작되었고, 마가복음 1장 1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누가복음 4장 17절부터 19절까지는 은혜의 복음이 「오늘…응하였느니라」(눅 4:21)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 23절은 예수의 때부터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율법의 시대에 사람은 육신 안에서 규례들에 의해 하나님께 나아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시체를 만졌다면 그는 부정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영 안에서와 진실됨 안에서이다. 요한복음 5장 24절부터 25절까지는「곧 이때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들은 「바로 지금」인 은혜의 복음을 말한다.
Ⅲ. 성경에는 교회가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몇몇 참고 구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A.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부터 9절까지를 자세히 읽어 보자. 첫 구절은 주제로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휴거에 대한 것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오심만을 말한 것도 아니고 휴거만을 말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휴거는 공중으로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휴거가 환난 후에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는 암시들이 있다. 2절의 「우리」라는 단어는 바울을 포함하며「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성령(the Holy Spirit)이 아닌 또 다른 영을 언급한다. 「말」은 소문들을 뜻한다.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주님의 오심과 휴거의 날이다. 첫 번째 학파는 주의 날을 대환난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되었다. 비록 구약에서 주의 날이 항상 대환난을 언급한다 할지라도 신약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서 주의 날은 대환난 후와 천년왕국 후의 일들을 언급한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절은 아주 자연스럽게 두 번째 오심과 휴거를 언급한다. 주님이 이미 오셨고 그들은 후에 뒤에 남겨졌다고 말함으로써 데살로니가인들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다. 3절에서 「그것(it: 원문 참조)」은「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이며 「속이는(deceive)」은 ‘위협하는’혹은 ‘협박하는’의 뜻이다. 그러나 휴거 이전에 두 가지 표적들이 있어야 한다.
(1)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의 나타남과 (2)배도 혹은 변절이 그것들이다.
이것은 불법의 사람이 성도들의 휴거 이전에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불법의 아들이 언제 나타나게 될 것인가? 물론 그는 대환난 기간 동안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휴거는 환난 이후여야 한다. 여기에 근거해 볼 때 적어도 교회의 일부분은 환난을 통과해야만 한다.
B. 고린도전서 15장 50-55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 첫 번째 구절은 부활과 변형을 언급하며, 구절들은 부활과 휴거를 언급한다. 이 두 부분은 병행 부분이다. 모든 사람이 이 구절들에 언급된 것들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데 동의한다. 그 시기를 지적하는 어떤 암시들이 있는가? 마지막 나팔을 부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것이 틀림없이 환난 후인 것을 알고 있다. 첫 번째 학파는 마지막 나팔이 환난 전에 울린다고 말하지만 여기에 대한 근거는 없으며 성경의 단 한 구절도 이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마지막 나팔 부는 것은 환난 후에 발생할 것이다. 이 마지막 나팔은 일곱 나팔들 중 일곱째 나팔이다. 마지막 나팔이 환난 전에 울렸다면 마지막 나팔 후에 일곱 개 나팔이 더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것은 막내 아들 후에 일곱 명의 아들들이 더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닝(Janning)씨와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의 나팔이 환난의 나팔이 아닌 교회의 나팔을 언급한다고 말한다. 성경 어디에서 교회의 첫 번째나 마지막 나팔에 대한 어떤 것을 언급하는가? 형제회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것이 로마의 군사 용어로 온 군대가 행진하기전 불려지는 마지막 나팔을 언급한 것으로 바울이 그 용어를 인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은 로마 군사 용어를 빌리지 않으신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나팔이지 교회의 나팔이 아니다. 분명히 이것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들 중 마지막 나팔이다. 더욱이 계시록 10장 7절에서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하나님의 비밀이 마친다. 이 비밀은 교회를 언급한다.
C. 기타 증거들.
(1) 시대의 완결. 이것은 마태복음 24장 3절, 13장 40절, 28장 20절로「시대」는 「이언」과 같다. 대환난은 이 시대의 끝에 있다. 휴거가 환난 전에 일어난다면 이 시대는 삼년 반이 단축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발 밑에 원수들을 굴복시킴.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 25절과 사도행전 2장 35절이다. 이 사건은 실지로 환난 후에 일어난다. 디모데 전서 6장 14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환난 후)까지…지키라」고 말한다. 계시록에서 어떤 구절도 주님이 환난 전에 보좌를 떠나 공중에 오시리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그분이 보좌를 떠나신 것은 환난이 시작된 후이다(계14:14). 만일 그리스도께서 환난 전에 공중에 오시게 된다면 우리는 기다리며 근신하며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
Ⅳ. 비록 성경에는 믿는 이들이 환난 후에 휴거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 이가 환난 후에 휴거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두번째 학파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성경은 어떤 이들이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우리는 몇 가지 논증들을 살펴보겠다.
A. 모든 믿는 이들이 환난 후에 휴거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우리는 깨이거나 기다리거나 예비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이 삼년반의 기간 후에 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삼년, 오개월, 이십구일 동안 온갖 방식의 악을 행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의 매우 중요한 원칙에 모순된다.
B. 만일 모든 사람들이 환난 후에 휴거된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그리스도를 위한 기다림이 아닐 것이다. 그대신 적그리스도를 기다림이 된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가 먼저 오기 때문이다.
C. 교회는 소망을 상실할 것이다. 디도서 2장 13절은, 「복스러운 소망과…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환난을 피하는 축복이다.
D. 두 번째 학파는 비밀스런 휴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이 「내가 도적같이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린다. 도적은 비밀리에 온다. 그는 군대 행진곡을 앞세우고 오지 않는다. 도둑은 가장 좋은 것들을 훔치러 온다.
E. 열 두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에 대하여... 두 번째 학파는 그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첫 번째 학파와는 정반대이다. 그러나 실상은 열 두 제자들이 유대인 남은 자의 대표인 한편 그들은 동시에 또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0장 5절부터 6절까지와 23장 3절은 모두 유대교의 배경이 있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F. 휴거(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오심)와 나타나심(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오심)에는 차이가 없음.
공개적인 휴거가 있다. 에녹의 예언으로 언급된 바와 같이 유다서에서 주님의 오심은 공개적인 휴거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분의 발을 감람산 위에 두시기 때문이다. 계시록 1장 7절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직 공개적인 나타나심만을 믿는 사람들은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학파에 속한다. 그들은 계시록의 오직 한 부분이 성취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17장 이후의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1장부터 3장까지만 이미 성취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미래학파와는 정반대이다. 만일 계시록에 있는 사건들이 과거의 일들이라서가 아닌 학자들이나 역사가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것이다. 성경의 성취는 보통 문자적이다. 예를 들어 동정녀 마리아, 베들레헴 등은 모두 문자 그대로이다. 종종 상징적인 성취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그때에야 설명된다.
Ⅴ. 첫 번째 학파는 성경상의 증거가 결핍되었다.
두 번째 학파는 몇 가지 성경적인 증거가 있지만 많은 오류가 있다.
그럼 성경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A. 계시록 3장 10절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것은 대환난이다. 이 구절은 어떤 사람들이 대환난을 피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첫 번째 학파와 두 번째 학파 모두를 반박한다.
비록 빌라델비아가 은혜 시대에 진실한 교회를 대표한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그 당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수(칠분의 일)만이 환난 전에 휴거될 수 있음을 안다. 더욱이 환난전 휴거는 거듭남, 즉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에만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조건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그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믿는 이들이다 인내의 말씀을 지킬수 있는가」라고 물어 볼 수 있기 바란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환난 전에 휴거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두 번째 학파는 이 구절이 환난전 휴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을 언급하며, 그것은 대환난 기간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을 언급하며, 그것은 대환난 기간 동안 하나님이 환난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집에 불이 났는데 한 방은 손상을 입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 또한 이것은 '고센' 땅에 있는 동안 재앙을 당하지 않은 이스라엘인들과 같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1) 여기에서는 「-을 통해」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으로부터」면하게 되는 것이다. 헬라어 원어에는 면하다(keep)라는 다음에 「-으로부터(out of)」를 의미하는 「에크」라는 단어가 있다(예를 들면,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나온 무리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을 통해서」면하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으로부터」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에크는 「-으로부터(out of)」를 의미한다.
(2)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원문에「지키다」와 「면하다」는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시험의 때는 환난이 아니라 환난의 때이다. 일례로 나는 중일전쟁 동안 상해 북서쪽에 있었다. 나는 해를 입지 않았다. 이것은 그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 때를 면하게 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시기를 원한다면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그것은 죽음과 휴거이다. 빌라델비아 안의 사람들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들은 대환난의 때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대환난의 때로부터 보호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를 죽게 할 수 없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은 교회를 휴거시키는 것이다.
B. 누가복음 21장 36절도 교회 전체가 아닌 일부만이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을 입증해 준다.
누가복음 21장과 마태복음 24장의 기록들은 거의 같지만, 마태복음은 주님의 오심과 환난을 강조한 반면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대환난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에는 질문들(마 24:3)과 또한 많은 비유들이 있다. 누가복음에는 이러한 것들 중 아무것도 없다. 예루살렘에 관하여는 처음에는 A.D. 70년의 핍박이 있고 끝에는 대환난이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21장 8절부터 9절까지는 끝 이전의 일들을 언급한다. 10절부터 19절까지는 믿는 이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20절부터 28절까지는 예루살렘이 어떻게 멸망될 것인지를 보여 준다. 28절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 같다. 29절부터 33절까지는 그러한 일이 있을 것임을 보장해 주는 비유이다. 만일 34절부터 36절까지와 같은 부분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믿는 이들이 환난 후에 휴거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34절에서 어조는 바뀐다. 35절은 오 땅의 일들을 언급한다. 36절은 대환난을 피하기 위한 조건인 깨어 기도할 것을 언급한다. 우리는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망에 의해서든지 또는 휴거됨으로써 된다.
「선다(stand)」는 단어는 능동태로 되어 있지 않고 수동태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인자 앞에 두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휴거를 언급한다. 사망은 축복이 아니다. 우리는 사망을 위해 기도하거나 바라거나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휴거의 조건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들이 다 휴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항상 기도해야 한다. 무엇을 기도하는가? 장차 올 모든 일을 피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의복과 음식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결코 휴거 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대환난의 두려움을 모른다면 그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36절은 「능히(counted worthy)」라는 단어들을 가지고 있다. 장차올 모든 일들을 능히 피하는 것은 은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자격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이 가기를 원치 않는 곳으로 받아들이실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이 맛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에 덫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건들이 매달려져 떠오를 수 없는 고무풍선들과 같다. 따라서 누가복음 21장 36절은 첫 번째 학파와 두 번째 학파로 침묵하게 한다.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1) 첫 번째 학파는 사람의 휴거가 그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기의 침대에 누워 간음을 범한 사람도 휴거될 수 있느냐고 물어 볼 것이다.
(2) 두 번째 학파도 「이 모든 일들」이 대환난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언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장차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이라고 말한다. 방탕함과 술취함은 이러한 생활의 일들이다. 또한 이런 일들에 있어서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어떤 경우에든 그것들로부터 구출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하며 속임 당하지 말아야 한다.
C. 기타 증거들...,
(1) 마태복음 24장 43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은 두 가지 휴거들이 있음을 가리킨다.
(2) 사람들이 다른 곳들로 휴거될 것이다. 즉, 그들은 다른 곳들로 올라갈 것이다.
(a) 계시록 7장 15절은 하나님 보좌 앞에 서는 것을 언급한다.
(b) 누가복음 21장 36절은 인자 앞에 서는 것을 말한다.
(c)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7절은 공중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다 휴거될 것은 아니며 휴거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d) 마가복음 13장 32절은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을 모른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오심이 일곱째 나팔 후에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 이렇게 차이가 있는 이유는 전자가 첫 번째 휴거를 언급하는 반면 후자는 환난 후의 휴거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Ⅵ. 각기 다른 휴거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질문들에 대한 응답들
A. 그리스도의 몸이 조각날 수 없기 때문에 교회의 휴거도 나누어질 수 없다는 논쟁이 있다.
그러나 몸은 사조로서 우리가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다. 우리가 후자에 따라 몸을 해석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오늘날 몸은 이미 나뉘어졌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시며, 바울은 죽었고, 우리는 여전히 땅 위에 남아 있으며, 어떤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B. 또 하나의 논쟁은 휴거가 구속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구속이 은혜에 의한 것이라면 휴거는 사람이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에 기초를 둘 수 없다.
우리가 심판을 피한 것은 이미 은혜에 따른 것이다. 변형(바뀌는 행위, 고전 15:52)과 휴거는 행동에 따른 것이다.
C. 이들은 「교회의 소망을 빼앗아 간다는 것은 잔인하지 않은가?」라고 질문한다.
그러한 소망은 조금도 없다. 그것은 거짓된 소망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D. 이들은 고린도전서 15장 23절이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행위는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 대답은 사람이 바로 이 한 구절 때문에 다른 모든 구절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휴거에 대해 말하지 않고 부활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그 밖으로의 휴거가 아닌 그 안으로의 휴거라고 읽고 있다.
E. 이들은「죽은 자들은 어떠한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환난을 통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너무 쉬운 것 같다.」라고 묻는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어떤 것을 하실 수 있겠는가? 천년왕국 기간 동안 이 사람들은 손실을 당할 것이다(고후5:10).
F. 이들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 52절까지는 우리가 다 변화되리라고 말하는데, 「다(all)」라는 단어는 온 몸(the whole Body)을 언급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참으로 모두를 언급하지만 「동시에 모두」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 죽을 것이지만 같은 날 죽지는 않을 것이다.
G. 이들은「밀과 가라지들 사이에는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밀과 밀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모두가 휴거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다툰다.
그러나 익는 시기는 다르다. 첫열매들과 수확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H.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은 남은 자들이, 「자는 자보는 결단 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이들은 죽은 자들이 일곱째 나팔에 부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활은 환난 후에 일어날 것이다. 만일 첫 번째 휴거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결코…못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휴거가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가?
15절과 17절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들」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매우 귀하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것과 남아 있다는 것이 매우 같은 것, 곧 땅 위에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할 필요는 없다.「남아 있는」이란 단어들은 먼저 죽은 무리가 있음을 가리킨다. 이들은 "바울이 「우리」라고 말했는데 바울이 자신을 두 번째 무리 곧 「살아남아 있는 자들」가운데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것인가?"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표현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을 무리 중의 하나로 포함시키지 않고도 우리의 일상 대화 속에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어떻든 바울은 계속 살지 않았고 남아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우리의 결론은 세 번째 학파가 옳다는 것이다.
어떤 믿는 이들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고, 또 다른 믿는 이들의 무리는 환난 후 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후자는 환난의 시련을 당할 것이다.
[옮긴이 주]
기도의 아버지 죠지뭘러는 처음에는 '환난전 휴거'를 믿었지만, 후에 '환난후 휴거'를 믿었다.
또한 백만명을 전도하였다는 미국이 낳은 전도자 무디도 '환난전 휴거'에서 '환난후 휴거'로 전향을 하였다고 한다.
무디와 동역을 한 R.A 토레이(대천덕신부의 조부)도 역시 나중에 두번째 학파로 전향을 하였다고 한다.
'조지 뮐러'나 '무디'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왜 '환난전 휴거'를 믿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환난후 휴거'로 믿음을 전향하였을까?
그리고 왜 반대로 '환난후 휴거'를 지지하던 자가 '환난전 휴거'를 지지하는 믿음으로 전향하는 자들은 없을까?
우리는 이 점을 가볍게 생각하면 아니된다.
그들이 그래야만 했던 깊은 고민과 그 이유를 성찰하여야 한다.
저는 오래 전부터 '환난전 휴거'를 지지해 왔는데...
인도에서 사역을 하였던 시기, '환난전 휴거'가 성경적 근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부활과 휴거」에 대한 선지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이해를 얻기위해 5-6년간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 간증 글(https://sylee560225.tistory.com/3)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스라엘 농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농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1년 후, 하나님의 은혜로... 이 글을 2000년 경, 피지에서 사역할 당시 읽게 되었습니다.
워치만 니의 '마태복음 연구'라는 책자에 부록으로 삽입되어 있던 「휴거에 대한 연구」라는 이 글을 읽어보게 되었고, 확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휴거'라는 주제에 이러한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한 '워치만니' 형제가 너무 고마웠고, 그의 가르침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워치만 니'는 돌팔이 신학자들과는 결이 다르다.
많은 가짜 목사들이 그를 폄하하고 오해하지만, 그들의 '어의 없음'과 '무지'를 용서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고, 또 워치만니도 그리할테니까...
제발 높이 날아 멀리 좀 보자.
그리고 깊은 바다로 나가 깊은 진리를 건져 올리자.
"어떤 믿는 이들은 환난전에 휴거될 것이고, 또 다른 믿는 이들의 무리는 환난 후까지 남아 있다가 휴거될 것이다."
"후자는 환난의 시련을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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