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이기는 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당초의 계획과 일치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이기는 자들의 원칙 성경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소수의 사람들을 찾아 기본으로 삼고 그런 다음에 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열조 시대의 일은 이것이 참된 것임을 증명한다. 그때 하나님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처럼 개별적으로 사람을 선택하셨다. 후에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렀고, 열조 시대에서 율법 시대에까지 이르렀고, 율법 시대에서 또 은혜 시대로, 은혜 시대에서 왕국 시대에 이르렀으며, 왕국 시대에서 새 하늘 새 땅에까지 미쳤다. 왕국은 새하늘과 새 땅의 서막이다. 율법 시대의 제단과 회막은 은혜 시대의 일을 예표한다. 이것이 소수에서 다수로 이르는 하나님의 역사의 원칙이다. 골로새서 2장 19절은,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결하여" 라고 말한다. '마디'는 '공급'을 위한 것이고 '힘줄'은 '연결'을 위한 것이다. 머리는 마디와 힘줄로 말미암아 온 몸을 공급하고 연결한다. 오직 이기는 자들만이 공급하는 마디이며 연결하는 힘줄이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예표하는데 그 중에 시온 산이 있다. 전자는 전체 교회를 예표하고 후자는 교회 안의 이기는 자들을 예표한다. 예루살렘은 크고 시온은 작다. 예루살렘의 보장은 시온에 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을 언급할 때에는 항상 시온을 말하고 유대인의 실패와 죄악을 언급할 때에는 항상 예루살렘을 말했다. 하나님은 전부터 예루살렘은 짓밟히게 하셨지만 시온은 지키셨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있어도 새 시온은 없다. 구약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의 관계를 말할 때마다 예루살렘의 특색과 생명과 축복과 세워짐이 다 시온에서 온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열왕기 상 8장 1절을 보면,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있고 언약궤는 시온에 있다. 시편 51편 18절에서 하나님은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을 건축하신다. 시편 102편 5절에서 하나님은 시온에 복을 주시고, 선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본다. 시편 135편 21절에서 여호와는 예루살렘에 거하시고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신다. 이사야 41장 2절에서 먼저 시온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런 다음에 예루살렘에게 전하셨다. 요엘 3장 17절에서 하나님이 시온에 거하실 때 예루살렘은 거룩하게 된다. 오늘 하나님은 실패한 교회 안에서 시온 산에 서 있을 십사만 사천을 찾고 계신다(계시록 14장).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항상 소수의 믿는이들로 말미암아 생명을 교회안에 흐르게 하신다. 주님같이 피를 흘려야 생명을 흘러낼 수 있다. 이기는 자들은 교회를 대신하여 이기는 위치에 서고 또한 고난과 수치를 견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은 반드시 스스로 옳다 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반드시 옛 창조에서 나온 모든 것을 십자가로 끊어 버리고 음부의 문(마 16:18)을 처리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상처받게 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 원하는가? 당신은 주님을 승리하시게 하고 자신을 실패에 두겠는가? 당신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복종치 않는 모든 사람을 당신을 통해 처리하실 수 있다(고후 10:6). 이기는 자들의 일 이기는 자들을 살펴볼 때 그들은 반드시 아래의 두가지 일을 주의해야 한다. (1) 전체가 실패할 때 하나님은 소수 사람을 택하여 전체 사람을 대신하게 하신다. (2) 하나님은 소수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게 하심으로써 다수 사람에게 미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민 가운데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그들을 택하셨다(출 19:5-6). 그러나 후에 그들은 시내 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경배함으로 실패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들이 되도록 그분의 명령을 지킨 레위인들을 그분의 이기는 자들로 택하셨다(출 32:15-29).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제사장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 숭배를 하므로 하나님은 레위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소수 사람들에게 먼저 역사하신다. 그런 다음 그들로부터 다수의 사람들에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셨다. 하나님은 먼저 다윗을 다루시고 그를 얻으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해방하여 나라를 이루게 하셨다. 영적인 목적은 영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와 다윗이 조금도 육체를 사용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온전케 하고 육체로 하나님을 돕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다루셨다. 하나님은 먼저 열 두 사람, 백 이십 명을 얻으신 후에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은 소수 사람으로 하여금 다수 사람들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게 하신다. 이기는 자의 원칙은 하나님께서 먼저 소수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심으로써 다수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고 먼저 소수 사람들이 죽음에 서 있음으로 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옮겨 붓도록 그들 마음에 십자가를 심고 가정과 환경 안에서 그들로 십자가의 원칙을 받아들이게 하신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람에게 분배하는 생명의 운하를 필요로 하신다. 죽음에 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함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죽음에 두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생명의 땅에 이르는 길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제사장들은 제일 먼저 물 속에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물 속에서 올라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당일의 제사장들처럼 교회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얻게 하기 위해 먼저 물에 내려가고 먼저 죽음에 들어가며 먼저 십자가의 처리를 받고 죽음 안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도록 우리를 먼저 죽음 안에 두신다.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개척자들이다. 이는 제사장들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언약궤를 메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드시 언약궤를 메고 강바닥으로 내려가야 했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로 중심 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옷 입고 물 속에 내려가야 한다. 제사장의 발은 강 바닥에 서 있어야 하고 어깨에는 언약궤를 메어야 한다. 사지에 서서 높여진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강 바닥은 죽음의 위치로서 편하고 보기 좋은 곳이 아니며 안식하는 곳도 아니다.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화를 내면서 산다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에게서 살 수 없다. 내가 강 바닥에 서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요단 강을 건넘으로 승리하게 된다. 사망이 우리 몸에서 역사할 때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서 역사한다. 내게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죽음이 만들어질 때 생명은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그에게서 역사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생명을 우리 속에 역사하게 하셨다. 죽음이 없을 때 생명이 없다. 강 바닥에서 언약궤를 메고 있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조심하며 떨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하나님이 그들을 멸절시킬 것이다. 그들은 강 바닥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지나가고 자신들은 미말에 버리워 둠을 본다. 그러므로 사도는,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라고 말한다. 사도는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믿기를 바라나 자기들처럼 그들 손에 사슬이 있기를 윈치 않았다(행 26:29). 우리 자신은 아름다운 이름과 형통함과 동정을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가 생명을 얻기 원하는가? 우리는 "주여,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나를 죽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란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렇게 행해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룰 수 있다. 강 바닥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지나간 후에야 나올 수 있다. 왕국이 완전히 임하기 전에 우리는 죽음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요단에서 올라오라"(수 4:17)고 하는 여호수아의 명령이 있게 된다. 우리의 승리한 여호수아는 반드시 우리를 물에서 올라오라고 하실 것이다. 이것은 왕국이 시작될 때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충분히 순종하지 않는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가가 충분치 않은 것이다. 돈과 군사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충분치 않은 것이다(눅 14:25~35).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는 겟세마네에 이를 수 없다. 십자가의 처리를 거치지 않고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부르심 받은 것을 좋아하나 모리아 산의 헌신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편리한 생활을 질투한 적이 없는가?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이기는 자로 강 바닥에 두셨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얻도록 나를 사슬에 매이게 하셨다. 죽음이 내 몸에 역사할 때 생명은 다른 사람의 몸에 역사한다. 이것이 생명의 유일한 운하이다. 우리 몸에까지 흘러온 생명은 바울과 루터의 두 통로를 거친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먼저 우리를 이 생명으로 충만되게 하고 그런 다음 이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흐르게 한다(고후 4:10~12). 하나님의 이기는 자가 할 일은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몸에서 시험을 거친 후에야 우리에 의해 전파될 수 있다. 진리의 빛이 우리 몸에서 생명이 되어야 후에 다른 사람들의 빛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진리를 순종하는 한 무리를 얻기 위하여 먼저 그분의 이기는 자들에게 그 진리를 보이시고 확증하게 하신다. 진리가 반드시 먼저 우리 안에 짜여지고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먼저 믿음과 기도와 헌신의 체험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믿음과 기도와 헌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게 된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먼저 우리로 죽음을 통과하게 하신다. 우리가 먼저 고난을 거치고 고통을 당해보아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려면 먼저 강 바닥에 서 있어야 한다. 교회가 좋은 땅으로 건너가 승리할 수 없는 이유는 요단 강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요단 강 바닥에 서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서 추구하는 마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 속에 진리가 깊이 짜여졌다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도록 끌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 속에 짜여져야 할 하나님의 진리들이 많다. 진리를 우리 안에 짜여지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일 인치(inch) 더 자라게 할 수 있다. 이기는 자는 위로부터 생명을 얻어 몸에 공급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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