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믿는 이들을 다루시는 길
1. 징계와 상급-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믿는이들에게 주신 이생의 징계와 영원 안에서의 구원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첫번째 구분을 보았고 이 메시지에서는 두번째 구분을 보기로 한다. 믿는이들에 대한 징계의 문제는 히브리서에 기재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징계하시며 그분의 징계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보자 징계의 동기와 목적 히브리서 12장 5, 6절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칙질하심이니라』여기서 우리는 징계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징계를 받는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시지 않으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방인을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징계하는데에 힘이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코 이웃집 아이들를 꾸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옷을 단정하게 입든 일을 잘하지 못했든 우리는 그들을 꾸중하지 않는다. 당신의 자녀라야 꾸중할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의 범위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또한 징계의 동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징계하심은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계시록 3장 19절에도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12장 7, 8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그러므로 징계의 범위는 오직 자녀에게만 국한된다. 9절 : 『또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는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받을진대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의 징계를 더욱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10절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느니라』. 이 말씀은 징계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기 좋아해서가 아니고 또한 우리로 고통당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목적은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지나치게 방자히 행동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손으로 그러한 사람을 억누르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책하기를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목적은 그분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 그분은 징계를 멈추신다. 그러므로 징계는 우리가 주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주님께 속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주님은 그분게 속하지 않은 사람을 징계하실 필요가 없다.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야 징계받을 자격이 있다. 형벌과 징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은 그분의 자녀를 형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이 질책하신다 하더라도 이것은 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징계하시는 것이다. 징계의 전일한 목적은 우리로 매일 어리석게 생활하지 않도록 하며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려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은 후에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엄중한 매를 맞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후에는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 실패하고 넘어질 경우 물론 영생을 잃어버리거나 영원히 멸망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께 매를 맞게 된다고 말한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이 땅에서 함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구원받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영영 요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이 방자히 행하고 정욕대로 살며, 임의로 범죄하며, 더러움 가운데 떨어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환경과 가정과 건강에서 혹은 장래 갈 길에서 그분의 손으로 그를 징계하실 것이다. 그의 가정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하게 하거나 그의 몸에 어떤 질병이 생기게 하거나 그의 환경 가운데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형벌을 주려거나 의도적으로 어려움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여 부르심 받은 은혜에 합당히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합당한 인식이다. 어느 누구도 만일 당신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자녀로 보지 않고 개처럼 발로 걷어찰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역사를 보지 못했거나 주 예수님의 역사를 너무 가볍게 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이 영원한 것임을 보여 준다. 동시에 성경은 믿는이들에게 상당한 형벌이 있음도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상당한 형벌이 있음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예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분의 아들답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지옥으로써 우리로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위협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완전히 은혜에 속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거룩함을 추구하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업과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우리로 많은 일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분에게로 돌아서게 하신다. 이것이 그분의 징계의 목적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극심한 징계를 받았다(행 5:1~5). 전에 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았을 때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순절날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도 물질을 드렸다. 차이점은 그들이 약간 헛된 영광을 탐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도박하거나 음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그들이 믿는이들이었음을 증명한다. 만일 그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었다면 아마 장수했을 것이다. 그들이 즉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우리 형제자매였음을 증명한다. 고린도의 믿는이들은 만찬집회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의 몸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주님의 만찬을 대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고린도 전서 11장 29, 3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징계의 손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게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임의로 주의 몸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역사를 보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몸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이 마땅히 그들의 존중을 받아야 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들이 마땅히 서야 할 위치를 보지 못했다. 결국 그들 가운데에는 약한 자도 있고 병든 자도 있으며 죽은 자도 있었다. 그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을 징계하신 것이다. 32절 :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에는 목적이 있다. 그분의 징계의 목적은 바로 장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세상 사람들이 받을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징계는 우리의 구원을 증명하고 우리의 구원을 지켜준다.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들이 자신을 풀어놓고 제멋대로 생활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아무런 제한이 없이 『저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이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로 범죄치 않고 제멋대로 자신을 풀어놓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그분의 징계는 우리의 죄 정함에 대한 일종의 대치이다. 사람들은 죄 장함이 우리로 범죄치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정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징계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징계로 말미암아 믿는이들을 세상 사람들과 구분하신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징계 받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징계는 오늘날의 훈련일 뿐 우리의 영원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린도 전서에는 그리스도인이 징계받음이 오히려 그가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증명해주는 한 가지 좋은 본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극심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구원받은 것이다. 고린도 전서 5장은 한 그리스도인이 간음하는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한 음행은 이방인 가운데도 없는 것인데 이는 곧 자기 아비의 아내를 취한 것이다(1절). 모세 율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분명 이 사람이 필히 멸망하고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고린도 전서는 이 사람이 극심한 죄 곧 하류(下流)에 속한 죄를 범했고 이방인도 범하지 않은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의 권위로 이러한 사람을 사단에게 넘기워 그의 육신을 멸하게 했다고 말했다. 즉 사탄이 그의 몸에 능력을 행사하여 그 사람을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하며 심지어 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한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그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4~5절). 징계는 이생에 관한 것이다. 결코 이것은 영원 구원과 관계된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였다면 『나는 끝났다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 이같이 큰 죄를 범했으므로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큰 죄를 범할지라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잠시 징계를 받겠지만 영원토록 멸망하지는 않는다. 비록 징계를 받아야 하겠지만 영원 안에서는 여전히 구원을 받게 된다. 신약에서 바울은 수차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여기의 「멸하는 것」이나 「잠자는 것」은 다 육신에 관련된 것이지 결코 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영의 문제와 영원 구원의 문제는 주님을 믿을 때 이미 해결되었다. 어떤 사람은 요한 일서 5장 16절에 대해 어렵다고 말하는데 거기서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하여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서 말한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요한 일서 5장 16절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할 정도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세상에서 떠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린도 전서 11장의 죽음과 5장의 「멸하게 함」(부패케 함)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모두 육신의 면을 말하는 것이며 영과는 무관하다. 이 징계는 다 육신에 관계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떤 곳에서 말한 것이 믿는이가 멸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들의 징계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상급과 은사 이제 우리는 세째로 상급과 은사의 차이 혹은 왕국과 영생의 차이를 보기로 하자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은 무엇이고 영생은 무엇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천국을 영생으로 생각하고, 영생을 천국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섞어 천국을 얻는 조건을 영생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삼는다. 그러므로서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을 곧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구별은 매우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천국을 잃을 수 있어도 영생을 잃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상급을 잃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은사는 잃어버리지 않는다. 상급은 무엇이고 은사는 또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사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므로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이다(엡 2:8~9). 또한 상급은 구원받은 후의 우리와 성령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었다. 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얻기에 합당치 않은 은사를 얻게 하였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우리는 성령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관계는 우리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상급을 얻게 한다. 만일 누가 주 예수를 구주를 영접하고 생명으로 영접한다면 이 사람은 즉시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구원받은 후 즉시 그를 그의 앞에 있는 상급을 얻기 위해 경주하고 달릴 수 있는 길에 두셨다(고전 9:24, 빌 3:13~14, 히 12:1).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로 인해 구원받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날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이렇게 행한다면 노정이 끝날 때에 이르러 그는 하나님의 하늘에 있는 영광과 상급을 얻을 것이다(딤후 4:7~8).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우리 노정의 첫 단계이고 상급은 우리 노정의 마지막 단계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상급을 얻을 자격이 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이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 앞에 두신 것은 은사이고 그리스도인 앞에 두신 것은 상급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은사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를 따르면 상급을 얻게 된다. 은사는 믿음으로 얻는 것으로서 세상 사람에게 주신 것인 반면에 상급은 충성과 선한 행실로 얻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구원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생각하고 구원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과 천국을 하나로 보고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행위의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분깃과 사람의 분깃을 둘로 나누었다. 한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고 다른 부분은 천년 왕국에서의 영광이다. 구원은 행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일단 당신이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은 즉시 두번째 것을 당신 앞에 두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구원 외에 내게는 상급이 있다. 네게 줄 장래의 영광과 면류관과 보좌가 있다』 그분은 보좌와 면류관과 영광과 상급을 믿는이들 앞에 두셨다. 만일 사람이 성실하다면 이것들을 얻게 되고 성실하지 않다면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행실이 필요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다만 우리는 선한 행실이 구원받는 일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선한 행실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행실이 나쁘다고 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행실은 상급에 있어 필요하고 면류관과 영광과 보좌의 문제에 있어서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가 소용 없다. 하나님은 결단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허락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아들을 믿는가 안 믿는가로써 그가 구원받을 것인가 멸망당할 것인가를 결정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믿는가 안 믿는가로 그분의 영광을 얻을 것인가 못 얻을 것인가를 결정하실 수 없다. 당신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가 없는가는 당신이 영원히 구원받을 것인가 영원히 멸망받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에게 선한 행실이 있는가 없는가는 당신의 상급과 영광을 얻는 문제를 결정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은 결단코 공로가 있다고 해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없고 또한 공로 없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실 수도 없다. 사람에게 공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결코 공로가 없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직 의지할 데 없고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만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신실해야 하고 수고함으로써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한 행실을 가져야만이 상급을 얻을 수 있다. 결단코 선한 행실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선한 행실이 구원받는 데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선한 행실은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다. 구원의 문제는 당신이 자신의 위치를 회개하기 원하는가 자기의 과거를 통회하며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십자가의 역사를 믿고, 그분의 부활을 당신의 의롭다 하는 근거로 삼는가에 달려있다.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해준다. 행위의 문제는 상급과 관련된다. 행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상급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구원과 왕국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 있다. 성경은 구원과 왕국, 은사와 상급을 완전히 구분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것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교리에 대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상급의 문제에 관하여도 분명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상급의 문제를 구원받지 않은 사람 앞에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다만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은 후, 그 앞에 놓여진 것은 상급이다. 그들은 힘을 다하고 달음질하고 상급을 추구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인 체험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첫단계이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앞에 있는 상을 얻기 위해 달음질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구원을 상급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죄인은 구원을 상급으로 생각해서 행위를 의지하려 하고, 그리스도인은 영광을 은혜로 생각하여 아무 목표없이(어리석게) 생활한다. 행위는 상급에 적용되는 것이고 은혜는 구원에 적용되는 것임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을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로 구분하시고 영생이 있는 자와 정죄받는 자로 구분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상급으로 그분의 자녀를 두 무리로 구분하신다. 구원이 세상 사람을 구분한 것 같이 상급은 하나님의 자녀를 구분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로 구분하신다. 세상 사람에게 있어서는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충성스러운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세상 사람에게 있어서는 구원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의 문제이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상급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의 문제를 지나치게 큰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받지 못하고만을 주목한다. 그들은 행위가 좋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들은 상급을 추구할 여지가 없게 된다. 첫번째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두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우리는 구원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고 이 문제는 요동하지 않으며 주 예수님이 이미 완성하여 이루신 일이고, 오늘 우리가 힘써 추구해야 할 것은 앞에 놓인 상급임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장래 왕국 안에서의 큰 차이는,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광을 얻고 어떤 사람은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상급이 무엇으로 인해 얻어지는가를 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상급이 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구원받는 문제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듯이 상급을 얻는 문제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성경은 구원이 죄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상급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상급이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에 있어서도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당신은 결코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4장 4절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라고 말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있다」는 말은 「일하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다」고 번역할 수 있다. 일하는 이가 상급을 얻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어떻게 해야 상급을 얻을 수 있는가? 상급은 일함으로 얻는 것이지 결코 은혜로 얻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 2장 23절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 구절은 주님이 교회들에게 그분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게 하신다는 것과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리라는 것 혹은 우리의 행위대로 상급을 주시리라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어떻게 갚아 주시고 상급을 주시는가? 우리의 행위대로이다. 물론 이 행위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옷을 피로 희게 씻었을 뿐이다(계 7:14).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 예수를 살아 나타낸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내지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내지 않는다. 모든 자본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모든 능력 또한 그분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 역사하시게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보상과 상급을 얻는 문제가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합당한가에 달려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오늘날 하나님은 자격있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또한 결코 자격 없는 그리스도인에게 상 주시지도 않는다. 고린도 전서 3장 14절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여기서는 그의 일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는다고 말했지 결코 그의 신앙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을 얻는 문제는 일에 달려 있다. 성경은 구원과 상급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믿음으로 아니하고는 사람이 상급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의 행위가 심판대에서 그대로 있고 불꽃 같은 눈의 감찰을 통과할 수 있어야만이 상급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누가복음 6장 35절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상급은 완전히 당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당신의 행위이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것도 당신의 행위이다. 이것들이 있어야만이 상급을 얻을 수 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선한 일을 행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 곳이 없으며, 돈을 빌려주면 형벌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 곳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선대하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 것이라고 말한 곳은 있다. 상급의 문제는 행위로 인한 것이지 결코 믿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당신으로 구원받게 할 수 있을 뿐 상급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 디모데 후서 4장 14절 :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게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여기서 성경은 하나의 본을 말한다. 여기 한 그리스도인은 바울에게 해를 끼치고 그에게 죄를 범했다. 여기서 말한 사람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다. 장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을 받는다. 상급은 바로 천국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많은이들이 구원과 상급의 차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상급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든 사도들이든 상급과 왕국에 대해 말할 때 은사와 영생을 말할 때처럼 근거 없이 말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그분은 빈 말이 아닌 실제를 말씀하고 계신다. 로마서 6장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23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가 영생인 것이 매우 분명한 사실임을 볼 수 있다. 그럼 대체 상급은 무엇인가? 성경은 또한 상급이 면류관이요 보좌요 천국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천국이 바로 상급이다. 성경에서 천국은 세 방면을 갖고 있다. 첫 번째 방면에서 천국은 오늘날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외형 곧 하나님의 주권의 외형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천국이라고 한다. 두 번째 방면에서 천국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는 하늘의 통치와 제한인데 이것도 역시 천국이라고 부른다. 세 번재 방면에서 천국은 상급을 가리켜 말한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천국에 관해 말씀하셨다. 주님의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사람이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계속적으로 상급에 관한 것들을 언급하는데 이것들은 상급과 천국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다 알듯이 팔복(사실은 아홉 가지 축복이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3~6,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10절). 앞의 몇 가지 축복에서는 천국이라는 단어가 두 차례씩 언급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1~12절)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급이 곧 천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시작에서 주님이 어떠어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고서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어떠어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에서 저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구는 우리에게 천국이 곧 하나님의 상급임을 보여 준다. 이 양자는 서로 구분될 수 없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여러차례 상급을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여기서 그분이 다루시는 것이 왕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5장 46절 :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6장 1, 2절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절 :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절 :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4절 : 『너의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6절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절의 마지막 문구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수훈의 주제가 천국임을 시인한다. 이 세 장은 계속적으로 상급의 문제를 언급했는데 이는 천국이 곧 상급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6장 27절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구원받은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행한 대로 상 주시거나 질책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8절).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사람이 갚으심을 얻는 것은 행위에 근거한다. 둘째, 각 사람이 갚으심을 받을 때는 언제인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그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그 때가 바로 이 땅에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때이다. 그러므로 왕국을 시작될 때가 바로 상 주실 때이다. 세째로,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예표가 있다. 변화산상에서의 주님의 변형은 주님이 장래 왕국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을 말해준다. 그 때에 어떤 믿는이는 상을 받을 것이다. 좀전에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6장의 구제에 대한 보응과 기도에 대한 보응과 금식에 대한 보응은 모두 상과 관계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대한 보응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주 예수님이 다만 너희가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살피고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면 기도에 대한 보응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를 말한 문장 앞에서 구제를 언급하고 그 뒤에서 금식을 언급하실 때에도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서 살피고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갚으심은 반드시 장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주님은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면 저가 은밀한 중에 보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신다고 하지 않고 보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은 보신 것에 근거한다. 그분은 눈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상급은 장래에 속한 것이다. 또 계시록 11장 15절을 보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8절 :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왕 노릇 하실 때, 곧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가 바로 온 성도들이 무론대소하고 다 상을 얻을 때임을 본다. 환언하면 왕국의 때가 바로 상을 받을 때이다. 언제이든 왕국이 임할 그 때가 바로 상급을 얻을 때이다. 더 나아가 상급은 곧 면류관을 얻는 것이요 또한 보좌에 앉는 것이다. 한번은 어느 외국 선교사가 나에게 『내가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최소한 왕국은 소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영국 왕에게 그가 면류관을 잃어도 여전히 왕국을 소유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 면류관이란 무엇인가? 면류관은 금으로 만든 모자 같은 것에 보석 몇 개를 박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면류관은 돈만 있으면 얻을 수 있다. 그럼 면류관이란 무엇인가? 면류관은 왕국 안에서의 지위와 왕국 안에서의 영광을 대표한다. 만일 면류관이 어떤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에게 돈이 많다면 금으로 만들 수 있고 내게 돈이 많지 않다면 동으로 만들거나 철로 만들 수 있으며 그것도 없다면 천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장래 당신의 면류관은 크고 내 것은 작을 수가 없다. 당신의 머리 위에는 보석이 몇 개 더 많고 내 머리 위에는 적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 면류관은 그 대표하는 것이 있다. 면류관을 잃었다는 것은 곧 그것이 대표하는 바를 잃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면류관이 곧 왕국의 표징임을 보아야 한다. 보좌는 무엇인가? 성경은 사도들이 열 두 보좌에 앉게 될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마 19:28). 면류관은 이기는 자를 위한 상이고 보좌도 역시 이기는 자를 위한 상이다. 그러므로 보좌도 역시 왕국의 표징으로서 왕국 안에서의 지위와 권위와 왕국 안에서의 영광을 나타낸다. 결단코 면류관을 잃은 사람이 왕국을 얻을 수 없다. 또한 보좌를 잃고서 왕국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보좌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왕국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면류관을 잃어버리는 것도 역시 왕국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보좌와 면류관은 다른 뜻이 없고 다만 왕국을 대표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므로 상급은 곧 왕국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급이 곧 왕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가? 우리가 상을 얻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때이다. 베드로는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벧전 4:17). 그러므로 장래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심판 하시기 전에 그분은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을 심판하시는가?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멸망받을 것인가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영원 구원과 영원 멸망)은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되었다. 당신과 나의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고 영원 멸망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당신과 나의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고 영원 멸망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래 또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왕국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참예치 못하고 매를 맞을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는 심판대를 세우시고 그 심판대에서 그분을 믿는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제 보다 분명한 성경 구절을 두 군데 읽기로 하자. 고린도 후서 5장 10절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모든 믿는이들을 가리킨다.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 여기의 심판대는 원어에서 「베마(bema)」로서 땅보다 조금 높은 단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중국어에서「대(臺)」로 번역한 것은 원뜻에 가깝다. 「베마(bema)」는 가정에서 일을 결정하는 장소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영원히 사는가 멸망하는가는 믿음의 문제이고 , 상과 벌은 행위의 선악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이다. 왕국에 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일들이 더 있다. 당신이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한 가지 문제이나, 설령 당신이 왕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왕국 안에서 당신의 지위의 높낮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만일 당신이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바깥 어두운 곳에서 매를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좋은 행실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으나 주 예수를 믿은 후 우리가 왕국 안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결정해준다. 우리의 영원히 살고 죽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장래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여전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인가 멸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 안에서의 우리의 지위를 결정해준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우리에게 믿는이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분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절들 중에서 고린도 전서 3장이 가장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은 심판대에서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실 것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8절 : 『심는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이 구절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일한대로 상을 얻는가를 말한다. 10절 :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각 사람의 공력은 각 사람이 어떻게 그 위에 세우는가에 달려있으며, 어떻게 세울 것인가는 어떤 재료로 세우는가에 달려있다. 12~15절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기서는 우리에게 이 터 위에 세운 것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얻지만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나 여전히 그는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장래 우리 앞에 심판이 놓여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우리의 멸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을 받을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
2.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왕국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따라 그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때이다. 왕국 안에서 충성된 자는 상급을 받게 되고 충성치 못한 자는 형벌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충성스럽지 않다면 왕국 안에서의 지위가 남보다 낮을 뿐 결코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 못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된 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장래 주 예수님이 다스리실 때, 천국 안에 지위의 높낮음의 차이가 있을 뿐 천국을 잃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국에 지위의 높낮음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별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이 다르고(눅 19:17~19). 그 면류관과 영광도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별과 저 별의 영광이 다르고 왕국 안에서의 지위도 각각 다른 것이다(고전 15:41). 왕국에는 등급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도 있다. 아버지의 뜻을 준행함 그러므로 성경은 영생을 얻은 사람이 왕국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엄숙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는 주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은 주님의 태도에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이는 그의 나라(왕국)에 들어갈 수 있고 어떤이는 그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서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신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주님을 부르며 일도 했지만, 그의 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천국의 상급은 사람의 순종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영생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천국을 잃을 수 있다. 하늘이 통치하는 때는 바로 주 예수님이 다시 오는 때이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왕국을 잃고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절에서 주님이 이 사실을 말씀하신 후, 22절부터는 이 일을 예언의 방식으로 설명해주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장래 심판대 앞에서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신다. 그분은 「그 날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라 장래의 일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일하지만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지 못한다. 심판대 앞에 설 그 날이 올 때,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실 때, 그들은 제일 먼저 빛 비춤을 얻을 것이고 그들의 위치와 생활이 틀렸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주님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구절에서 세 번씩이나 「주의 이름으로」를 언급했기 때문에 그들이 주께 속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 『주여, 주여』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서 있는 자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전도했을 뿐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다. 또한 이 모든 일을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했다. 세 번의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그들의 주님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확실히 구원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여기에서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은 무의미한 것이다. 마태복음 7장은 산 위에서 주 예수님이 아홉 가지 축복을 언급하신 후에 말씀하신 마지막 단락의 말씀이다. 주 예수님이 산 위에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주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 앞에 나아왔을 때, 그분은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5장부터 7장까지를 가르쳐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아라. 만일 너희가 나를 주로 칭한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한다. 너희가 밖으로 나가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지만, 이 일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대치할 수 없다』. 천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어떤 때 사람이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나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만 주라 부르지 말고 행위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은 전혀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는 만일 이 무리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제자들이 이 단락의 말씀을 듣든 듣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무리이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뜻을 좇아 행하든 행하지 않든, 당신은 우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이 된다. 이것은 이 단락의 말씀의 가장 높은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구원받은 사람을 경고하신 것이다. 결코 그분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구원받은 사람을 경고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당신 집에 두 딸과 한 하녀가 있다 하자. 당신이 작은 딸에게 『보라 그 하녀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므로 때려주겠다. 그러니 오늘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똑같이 때려주겠다.』고 말했다면 당신은 이 말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녀는 당신이 낳은 자녀가 아니므로 그를 때려주는 것은 옳으나 당신의 딸은 하녀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녀의 비유를 딸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일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제 네 언니가 말을 안 들어서 때려 주었다. 너도 조심해야 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때려 주겠다』고 했다면 이것은 합당한 것이다. 언니는 비유로 사용할 수 있지만 하녀의 비유를 딸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예로 사용하실리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제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므로 그러한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보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많으며 그들은 너희들과 똑같이 나를 주라 부르고 많은 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왕국 밖에 갇힌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근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라.』 이렇게 할 때만이 믿는이들은 그들이 일을 해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만일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주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성분이 더 이상 없게 된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경고하시고자 한 것이다. 만약 자기의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 온다면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겠다. 가령 오늘 어느 법관의 아들이 운전을 하다가 다른 사람의 차를 치받아 경찰에게 붙들려 법정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하자. 법관이 그에게, 『젊은이는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몇 살이며 본적은 어디인가?』라고 물을 때, 그 아들은 아래에서 『나를 모른다는 말인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몇 마디 답변하겠지만 더 물어보면, 『아버지 왜 나를 몰라 보십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이 때에 법관은 책상을 치면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집에서야 너를 알지만 법정에서는 너를 전혀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왕국의 문제만 보았다면 이것이 왕국의 문제임을 깨달을 것이다. 왕국 안에서는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묻지 않고, 오직 주님을 믿은 후의 당신의 행위가 어떤가를 묻는다. 아마도 당신은 구원받은 후에 큰 열심을 내고 비록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주님 앞에 나와서 그분께 당신의 불법적인 일에 근거하여 왕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해달라고 한다면, 그분은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은 왜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는가? 다음 문구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것은 그들을 영생으로부터 떠나게 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여기서 불법을 행하는 자는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 원칙대로 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은 악한 일을 해야만이 악(중국어 번역에는 불법을 행한 자가 악을 행한 자로 되어 있음-역자 주)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그분이 옳다고 보시는 것과 그분이 안배하신 것을 듣지 않았다면, 당신이 아무리 일을 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악을 행한 자」로 번역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툼과 변론의 여지를 남겨주게 된다. 여기서 말한 것은 악을 행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규칙을 지켰느냐의 문제이다. 규칙은 무엇인가?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든간에 주 예수님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신다. 자기 뜻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참예하지 못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목적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주님을 믿은 사람이 영생을 잃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은 그가 왕국의 지위와 영광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아 일한다면, 우리는 왕국 밖에 갇혀 있게 된다. 우리는 선지자 노릇하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권능을 행하는 것을 대단하게 볼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할 줄 안다면 놀라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대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진하여 그분을 위해 일을 맡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과 일하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큰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일을 좋아하고, 전도하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권능을 행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데에서 깨어날 것이다. 자기 몸을 쳐서 주님의 기쁨을 구함 성경에는 사람들이 멸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 생가하나 사실상 왕국과 상급을 잃는 것을 가리키는 한 구절이 있다. 고린도 전서 9장 23~27절 :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 하나니 저희는 썪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기가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여기서 볼 때 바울까지도 버리워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말한 「버리워짐」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어디로부터 버리워지는 것인가? 지난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려면 문맥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도 전체 문맥을 보기로 하자.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으로 여겨, 달음질하는 이는 많으나 상 얻는 이는 한 사람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이다. 이 구절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상급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이미 주 예수를 믿은 사람만이,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만이 경주장에서 달음질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달음질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얻으라고 하신 상급을 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경주장에 입장할 자격조차도 없다. 성경에서는 구원을 달음질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성경은 사람이 달음질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구원은 일하는 것에 달려 있게 된다. 성경은 상급을 달음질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경주를 우리 앞에 두사 그 안에서 달음질 하게 하신다. 상급은 무엇인가? 25절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 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여기는 상급이 곧 면류관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면류관이 상징하는 것은 왕국과 영광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버리워짐은 구원받지 못한 것을 가리키지 않고 면류관과 상급을 얻지 못함을 가리킨다. 만일 바울이 버리워질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 중 버리워질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상급과 면류관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 모든 사람도 상급과 면류관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26절은 버리워지는 이유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 바울은 허공을 치지 않았고 목표와 향방이 있었다. 그의 목표와 향방은 고린도 후서 5장에서 말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9절)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는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썼다. 경주장에서 그는 어떻게 달음질 하였는가? 그는 자기 임의로 달음질하지 않았고 일정한 목표와 향방이 있었으며 허공을 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시키는 것을 하지 않았고 사람의 필요가 무언가에 따라 하지도 않았다. 만일 필요로 말하자면, 필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온종일 달음질하고 밤에도 달음질해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을 위해 있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있다. 상급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많은 사람이 자기 몸을 상(賞) 위에 두며, 또 많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하나님의 뜻 위에 둔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몸을 자기 통제 아래 두었다.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는 몸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을 속박할 수 없다. 육신에 어떤 자극이 있기만 하면 그는 여러가지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육신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상급과 면류관을 잃어버리게 된다. 비록 이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 사람 자신은 버리워지게 된다.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서 강림하여 이 땅에서 다스리실 때 모든 사람에게 면류관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를 때에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똑같이 영광을 얻게 되겠지만, 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다스리실 때에는 어떤 사람은 그분의 상급과 권위와 영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일에 있어서는 이것이 완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의 행위로 결정됨을 보여준다. 좀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자가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외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할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경에서 면류관은 숫자가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계시록 3장 11절을 보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급과 은사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면류관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구원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빼앗긴다는 것은 구원을 빼앗긴다는 것이 아니라 면류관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나 면류관을 잃을 수 있다. 요즘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하나 실렸는데 그것은 바로 한 나라의 국왕이 그의 왕관을 잃었다는 것이다(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여 공작이 됨)만일 구원 받은 사람이 자기가 소유한 것을 붙들지 않고 주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주 예수님의 이름을 버린다면, 그는 어느 날 면류관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풀어놓고 소유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면류관을 잃게 되고 당신의 면류관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것이다. 계시록 2장 10절의 말씀은 앞의 말씀과 거의 비슷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주님은 생명을 준다고 하지 않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하셨다. 생명은 충성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을 얻은 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생명의 면류관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에 행위가 좋지 않다면 생명은 잃지 않겠지만 상급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함 성경에서 상급에 대해 분명한 곳은 고린도 전서 3장 14, 15절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상실될 수 있는 것과 상실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람이 구원을 한 번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상급을 얻는가의 여부는 오늘 결정할 수 없는 사항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구원받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장래 상급을 얻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신의 터이신 주 예수님 위에 어떻게 건축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공적이 어떠한가에 있지 않고 주 예수님의 공적이 어떠한가에 있다. 그분의 공적이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상급을 얻게 되는가 해를 입게 되는가는 우리의 공적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다. 만일 주 예수님이신 터 위에 사람이 금과 은과 보석 곧 영원히 가치 있는 것으로 건축한다면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사람이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축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상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사람이 상급을 얻을 수도 있고 그의 공적이 불태워질 수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는 문제는 천 구백여 년 전에 이미 해결되었다. 이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과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미 결정되었다. 그러나 상급을 얻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우리의 공적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는 매우 균형잡혀 있다. 구원의 안식은 절대로 주 예수님께 있는 것이고 구원함을 얻는 것도 주 예수님께 달려 있다. 그러나 상급을 얻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당신의 공적이 어떤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믿음뿐 아니라 또한 공적이 필요하다. 이 공적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성령이 이루어내신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상급을 잃을 가능성도 있고 왕국과 면류관을 배앗길 가능성도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왕국 안의 지위는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며 불확실함을 볼 수 있다. 자랑할 만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음 히브리서 3장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다. 히브리서 3장 6절 :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이 구절에서 볼 때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다. 사도는 만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말했다. 이 집과 소망은 무엇인가? 이 복된 소망은 다름아닌 주 예수님이 영광 안에서 다시 오셔서 이 땅 위에 세우실 왕국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고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영광 안에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과 충성된 자들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 주와 함게 왕노릇 할 것임을 알고 이것을 견고히 붙들면 곧 그의 집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주님의 집이다. 우리는 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벧전 2:5). 그러나 장래 왕국 안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는 당신이 얼마나 끝까지 견고히 붙잡는가에 달려있다. 이것은 영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하여는 성경 다른 곳에서도 매우 분명하다. 영원 안에서의 문제는 이미 완전히 해결되었지만 왕국 안에서의 지위와 상급을 얻는 문제는 오늘 당신이 어떻게 붙잡는가에 달려 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더욱 힘씀 또 베드로 후서 1장 10절을 보자.『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만일 당신이 선택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이 부분이 왕국의 소망을 굳게 하는 것에 관해 말한 것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택하심과 부르심이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택하심과 부르심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람이 다시금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우리에게 확실히 말해주기 때문이다(29절). 그러나 베드로 후서에서는 은혜의 부르심만 다루지 않고 택하심도 언급했다. 이 구절은 부르심과 택하심 이 두 가지를 함께 언급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거듭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입는 자는 적다고 말했다(마 22:14).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외에 다른 모든 구절들은 구원받은 이는 많으나 상을 얻는 이는 적다는 것에 관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택하심은 왕국 안에서의 지위를 가리켜말한것이다. 베드로는.『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고말했다. 「이것을」이란 바로 5절부터 7절에서 말한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제절와 인내와 경건과 사랑이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행한다면 언제든지 실족지 않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서로 대구(對句)를 이룬다 앞구절은『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말하고. 뒷구절은『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고 말한다. 11절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성경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영원 안에서야 그리스안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천년왕국 때에 그 안에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천년왕국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계시록 11장 15절은.『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말한다. 이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영원한 연결하여 언급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작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곧 대환난이 시작될 때이다.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기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은 왕국에 들어가게 될 뿐 아니라 넉넉히 그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한다는 것은 이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구원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왕국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를 믿은 즉시 영원히 살고 죽는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믿은 후에 그 앞에 체험들이 놓여 있는데, 곧 장래의 영광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왕국과 면류관과 영광과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들어갈 뿐 아니라 넉넉히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상급과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달음질할 필요가 있다. 장래에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해서는 오늘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는 것임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천년왕국 안에서 그리스도께 어떠한 영광으로 그분이 천 구백여 년 전에 받은 고통에 대해 보상하시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모르겠다. 고난 받는 것과 상급을 얻는 것은 반드시 동등해야 한다. 만일 어떠한 사람이 비천한 데가지 이끌려 졌다면 그의 상급은 가장 클 것이다. 가령 당신 집에 있는 어떤 하인이 어느 날 집에 불이 나서 당신이 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서 당신을 구출하기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었다 하자. 당신은 어떠한 상급을 그에게 주겠는가? 당신은 그에게 '2 센트'를 상급으로 주겠다고 말하겠는가? 결코 그런 일은 없다. 상급은 반드시 고난받는 정도와 동일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그러한 죽음을 당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장래 그리스도께 보상하시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실 것인가?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영광을 얻으실 때이다. 왕국은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상급을 주실 때이다. 그 때에 당신에게도 한 몫이 있다. 당신이 주 예수님이 얻으신 영광을 얻기에 합당한가의 여부는 당신의 생활과 일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영광을 얻기에 합당한가의 문제가 없지만 왕국 안에서는 합당한 자만이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핍박과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다. 만일 우리도 오늘 똑같이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한다면, 장래 왕국 안에서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딤후 2:12). |
3) -왕국에서의 징계 1-
우리는 오는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주님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말한다(히 12:6). 인간은 누구를 사랑할 때 눈이 멀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실 때 그를 징계하신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면 느슨하게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실 때 진지하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징계하지 않으신다. 징계하는 사랑은 그분이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구속을 이루신 그 사랑과 동일하다. 그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이 있고 그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은혜가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 일단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다시 멸망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가 이생에만 있는지 아니면 내세에도 있는지에 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 문제에 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성경은 하나님의 징계가 이생에만 있지 않고 내세에도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이생에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의하면 내세에도 징계받을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꼭 이생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헌신의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자기 뜻대로 살며 많은 불순종의 일을 행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외적으로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고 일을 하며 심지어 기적과 기사를 행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을 쫓아 그것들을 행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현저한 죄와 특별한 과실을 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당신은 하나님의 징계를 발견할 수 없고 도리어 그들은 일생 순조롭고 또 안연히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장래 왕국 안에서 상급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또한 징계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적극적인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에 의하면,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정욕을 좇아 행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자기 뜻대로 행했다면, 이러한 사람은 내세에 징계를 받게 된다. 이것에 대해 성경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징계의 목적은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더럽기 때문에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한 종류의 정결케 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첫번째 종류의 정결케 함은 피의 정결케 함으로써 주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 정결케 되는 것이다. 성경은 피의 정결케함에 관하여 삼백여 번이나 언급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구절만 언급하겠다.히브리서 9장 22절 :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서는 피로 정결케 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1장 3절 하반절 : 『(그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주 예수님이 그분의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심이 있음을 본다. 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신 후에 높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이 성경에서의 첫번째 정결케 하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피에의해 정결케 하심을 얻었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여전히 많은 더러운 사상들과 세상에 의한 더렵혀짐과 육체의 죄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다른 방법으로 정결케 하신다. 이러한 정결케 하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징계와 질책이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서 주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한다. 가지로 더 많은 과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매 맺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고 쓸모없고 장애되는 것들을 제해버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영광을 얻고 거룩케 되고 우리 앞에 놓인 의를 얻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두 노선 곧 두 종류의 정결케 하심을 본다. 첫번째 종류는 주 예수의 피의 정결케 하심이고, 두번째 종류는 환경과 가정과 건강과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결케 하심이다. 만일 당신이 합당치 않은 것을 행하고 끊어버려야 할 것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몸과 환경에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임할 것이다. 내세에서의 정결케 하심이제 문제는 하나님의 이러한 정결케 하시기 위한 징계가 이생에만 있는 것인지 또는 내세에도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성경을 읽는다면, 죽음이 결코 사람을 바꿀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죽음이 우리를 바꾼다고 말한 곳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장래에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임을 안다. 영원 안에서 주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가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영원 안에서 주와 함께 거하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물론 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범죄가 정결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가?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나타나시도록 했는가?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영원 안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다르고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거룩과 공의와 영광에 너무나 합당치 않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더러움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게 된다. 즉 오늘 우리가 좋지 않다면 어찌 내세에 좋을 수가 있으며, 이생에 완전하지 않다면 어찌 내세에 완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변화는 대체 어디에서 일어나게 되는가? 당신에게는 변화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당신이 완전하지 않고 그날에 가서 완전하게 된다면, 그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영원 안에 들어갈 때 당신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및 어린양과 함께 있게 되는데, 그 때 당신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언제 이루어지는가? 사람들의 사상은 죽은 후에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는 육신의 죽음이 우리를 거룩케 한다는 것을 볼 수 없다. 오륙백 년 전에 이러한 교리를 전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죽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없다. 만일 죽음이 그리스도인을 변화되게 할 수 있다면, 그 죽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변화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게으른 종은 부활할 때에도 여전히 게으르고, 미련한 처녀는 깨어날 때에도 여전히 미련한 것이다. 그들의 깨어남은 그들의 게으름과 미련함을 변케할 수 없었다(마 25:1-30). 사람이 이생에서 변화되지 못하고, 죽음도 사람을 변케 하지 못하는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뀌어질 수 있다면, 그 변화는 어느 때 발생하는가? 성경은 내세에 또 한 가지 징계가 있는데, 그 징계가 우리를 정결케 되도록 씻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종들 중에 내세에 질책받을 사람이 있다내세의 징계에 관하여 우리는 누가복음 12장 45절부터 48절을 보기로 하자.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예비치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한 가지 분명히 해 놓아야 할 사실은, 여기서 말하는 종이 주님께 속한 자이고 그리스도인이며 구원받은 사람인가의 여부이다. 여기의 종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로,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분께 속하지 않은 사람을 그분의 종으로 삼지 않으셨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먼저 종이 되고 그 다음에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구약에는 구원받지 않은 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결코 하나님의 종 될 자격이 없다. 신약에서는 모든 종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종은 분명 구원받은 자이다. 둘째로, 윗 문장의 42절은 45절부터 48절에서 말한 종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증명한다. 42절부터 46절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3절과 44절에서 말한 종과 45절과 46절에서 말한 종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여러분은 같은 분류임을 볼 것이다. 43절, 44절의 종이 바로 45절의 종이다. 동일한 사람이 착한 종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종이 될 수도 있다. 이 종은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만일 그 종이 주인이 맡기신 것에 대해 신실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줄 안다면, 주인이 오실 때 그에게 상을 주시고 모든 것을 맡기며 관리하게 할 것이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이르기를, 『주인이 더디 올 것이니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면서 노비를 때린다면, 주인이 오셔서 그의 죄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착한 종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종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한다.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 불행하게도 악한 종이 되었다면, 그의 종말은 어떻게 되겠는가? 46절 :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이 질책은 이생의 것인가, 내생의 것인가? 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은 언제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주인이 올 때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것은 장래의 일이다. 주 예수님은 종 된 자가 충성스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충성스럽지 못한 종에 대해서는 주인이 오셔서 그에게 상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의 죄를 심판하시고 또한 엄한 질책을 하시게 된다. 47절, 48절의 말씀은 46절에 근거한 것이다. 주님께 속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가 장차 당하게 될 일들은 무엇인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알지 못한 사람은 매를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적게 맞는다고 말했다. 어쨌든 매는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알지 못한 사람을 용서하실 수 없다.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알지 못한 사람이 매를 맞을 일을 행한다면, 그는 매를 맞기는 맞아도 남보다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장래 질책하시는 원칙이다. 누가복음 12장 47절 48절은 장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질책을 결정해 준다. 나는 여기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이것은 누구도 전복시킬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않다면, 장래 우리는 질책을 받게 된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에서 말한 것을 전파할 뿐 성경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장래에 질책을 받게 되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 주님께 가서 물어보라. 나는 다만 성경이 말한 것을 말할 뿐이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또한 골로새서 3장 23절-25절을 보기로 하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이 부분의 문맥은 여기서 언급된 사람이 불신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구절들 앞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아내 또는 남편이 되고, 부모와 자녀가 되며, 주인과 종이 되는가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것을 말한 후 바울은 행위가 의롭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불의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보응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있을 것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만일 오늘 우리가 불의를 행한다면, 그날 우리는 불의의 보응을 받게 된다. 만일 오늘 우리가 의를 행한다면 또한 의의 보응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장래 그리스도인이 어떤 처벌과 질책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장래 우리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보응을 받게 된다더 나아가서 우리는 고린도 후서 5장 10절을 보기로 하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공중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다 휴거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이 휴거되는가? 성경에서 볼 때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휴거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는 휴거되지 않는다. 구원받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이러한 심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의 심판이다.이 구절은 장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 것인가를 말해 준다. 그분은 각 사람의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각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선악간에 보응을 받게 된다. 만일 당신이 몸으로 선을 행하면 선한 보응을 받게 되고 몸으로 악을 행하면 악한 보응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이 합당한 사람은 심판대 앞에서 상급을 얻게 되고 합당치 않은 사람은 상급을 잃게 되며 또한 악한 보응을 받게 됨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장래 심판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는 사람들이 장래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도록 사도가 기도한 것이 있다. 디모데 후서 1장 18절 :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그 날에 긍휼을 얻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심판대 앞에 설 때 기껏해야 상급을 얻지 못할 뿐이고 형벌과 징계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듯하다. 『나는 오네시보로가 주님의 심판을 받을 때 긍휼하심을 얻기 원한다. 저가 얼마큼 나를 섬겼고 나와 함께 복음에 참여하였는지... 그 날 심판대 앞에서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면 주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시기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현재 사함을 받는 것이 다 필요할 뿐 아니라 천년왕국의 시작 곧 심판의 때에도 하나님의 질책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것이 필요함을 보아야 한다. 4장에서 또 한 구절을 보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5절에서 바울은 그가 아시아에 있을 때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왕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를 피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이렇게 자기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장래 하나님이 우리 허물을 심판하실 것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다. 성경의 충분한 빛은 우리에게, 구원받은 후에 이생에서 징계를 받아도 돌아서지 않거나 이생에서 제멋대로 행해도 징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장래 심판대에서 상급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확실히 질책을 받게 됨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주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한 일에 대해 말한다. 주님은 인자에게 범한 모든 죄는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한 죄는 결코 사함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죄는 현세에서 사함받지 못할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사함받지 못한다(32절). 성경에서 내세는 왕국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원문에서 내세의 「세(관)」자는 코스모스(cosmos)가 아니라 아이온(aion)이다. 만일 코스모스(cosmo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것은 세상의 조직을 가리켜 말한 것이므로 세상이라고 번역해야 합당하다. 그러나 아이온(aion)을 사용했다면, 이것은 세상의 시간을 가리키므로 시대로 번역해야 합당하다. 그러므로 내세는 오는 세상이 아니라 오는 시대이다. 오늘은 은혜 시대이고 장래 오는 시대는 주님이 오셔서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시대이다. 마태복음 12장의 이 부분을 읽을 때, 당신은 사람의 죄가 사함받는 시기가 두 기간임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이생에서 사함받게 되고 어떤 것은 장래 시대에 사함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징계를 받아 이생에서 사함을 받게 된다. 오늘날 행함이 좋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왕국 안에서 사함을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때 사함을 받았으나 여전히 죄를 범하여 왕국 안에서 사함받지 못하고 도리어 엄한 질책을 받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서의 질책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질책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죄를 범하고서 현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처리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장래에 여전히 질책을 받게 된다. 왕국 시대는 곧 질책을 받는 때이다장래의 질책은 어느 때 있게 되는가? 내가 말했듯이 이것은 내세 곧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어느 시기인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있는 세 시대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오늘날의 시대를 가리켜 은혜 시대라 부를 수 있고, 복음 시대 혹은 교회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오는 시대는 왕국 시대 혹은 천년왕국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는 그 시기가 천 년이기 때문이다(계 20:6). 이 시대가 지난 후에 또 하나의 시대가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이다.성경에는 도합 이 세 시대가 있다. 교회 시대가 은혜 시대인 이유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모든 불의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사람에게 주 예수의 은혜를 가져다 주신다. 이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이다. 오는 시대는 공의의 시대이며, 다시금 영원한 시대는 은혜시대이다. 오늘날과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전적으로 은혜에 대하여 말하지만, 왕국에서는 순전히 공의에 대하여 말한다. 만일 이것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면, 성경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그릇된 것이다. 교회 시대와 새 하늘 새 땅의 시대는 모두 은혜 시대이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하나님이 충성된 자에게 상급을, 범죄한 자에게는 질책을 주시기 위해 특별히 정해 놓으신 시기이다. 이 시기는 특별한 시기이다. 신약과 구약 모두 우리에게 천년왕국의 시기가 하나님이 공의로 사람을 대하시는 때임을 말해 준다. 시편 72편 2절, 85편 10절-13절, 96편 13절, 97편 2절, 이사야 11장 5절, 26장 9절, 33장 5절, 62장 9절, 예레미야 33장 15절, 다니엘 7장 27절을 읽어보라. 신 구약에서 왕국 안에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한 구절을 최소한 이백 여 구절을 찾아 낼 수 있다. 왕국과 새 하늘 새 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매우 분명하게 구분짓는다. 계시록 19장 6절-8절을 보자.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이것은 왕국의 시작임을 주의하라)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 구절들은 신부에게 세마포 옷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비록 주어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의가 있다. 세마포 옷은 믿는이들의 옳은 행실이다. 원문에서 여기의 의는 행함이 있는 의로서, 능동적인 행함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이다. 또 20장 4절부터 6절을 보기로 하자. 『또 내가 보좌를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 구절들은 다스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왕국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며,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만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순교자들만이 왕 노릇 할 수 있고 사탄과 적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만이 왕 노릇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천년왕국을 얻는 것이 값없는 은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행실로 인한 것임을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 물론 다른 곳에서 다른 분류의 사람들이 왕 노릇 하게됨을 볼 수 있겠지만, 계시록은 우리에게 특정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고 주를 위해 순교한 자만이 왕 노릇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특정한 의가 없고 순교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왕 노릇 하는 데 참여할 수 없다. 이것이 천년왕국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여기서 계시록 21장 1절부터 7절까지를 보기로 하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시록 19장과 20장에서 말한 왕국과 21장에서 말한 새 하늘 새 땅은 그 묘사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왕국에 대해 말할 때 여러분은 사람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새 하늘 새 땅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없다. 21장을 1절부터 계속 읽어 갈 때, 당신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음을 본다. 하나님은 그분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전의 하늘과 땅이 다 지나가고 바다도 더이상 있지 않다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임하게 될 것이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분은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실 것이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말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사람은 어떠한 지위도 없다. 많은 것을 말했지만, 이 부분은 모두가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셨다고 말하며 결코 어떤 조건이나 요구를 언급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렇게 좋은 새 하늘 새 땅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라.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이 많은 말을 하신 후에 다음 한 마디로 이제까지 말씀하신 것을 결론 지으셨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무릇 목마름을 느끼고 마실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그에게 주신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는 값없이 당신에게 생명수 샘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은혜에 속한 것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순전히 그분이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다음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여기서 요한이 말한 「이기는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여기서 말한 이기는 자는 계시록 시작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한 이기는 자와 다르다. 여기서의 이기는 자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일반 그리스도인과 다른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계시록 3장의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기는 자를 가리키고 계시록 21장의 이기는 자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긴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생명수의 강물을 마실 수 있는가? 믿음을 통해서이다. 믿는 자는 이것을 얻을 수 있다. 값없이 생명수 샘물을 마시려면 믿어야 한다.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요일 5:4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다 이기는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끼리 비교해 본다면 그들 중에 많은 패배가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이기는 자이다. 무릇 생명수 샘물을 마신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22장은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한다. 1절-5절 :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새 예루살렘성에 있는 한 가지 중요한 항목은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 이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왔다. 생명수이기에 생명나무가 있고 거기서 생명의 과실이 자라나오는 것이다. 계시록 22장에 이르러서 모든 것을 다 말한 후에 한 가지 강조한 것이 있는데, 바로 생명수의 강물이다. 이 생명수의 강은 성을 감돌며 흐른다. 어떻게 우리는 이 생명수의 강물을 누릴 수 있는가? 계시록 끝부분에 이르러서, 왕국이 지나가고 교회 시대도 지나 갔을 때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바꾸어 말하면,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온 것으로 인해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하나의 보좌가 있는데, 보좌 아래에는 하나의 강이 있고 이 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보좌를 그 근원으로 삼는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다. 왕국에서는 어린양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반면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여러 번 어린양의 이름을 언급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22:1),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1:22).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31:2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양을 언급했다는 것은 그때가 은혜시대임을 증명한다. 계시록 끝부분에서는 교회 문제나 왕국 문제나 환난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목마른 자는 누구나 와서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마실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들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오도록 초청한다는 뜻이다. 그때 모든 것은 값없이 얻어질 것이다. 값없는 것은 은혜이다. 우리는 새 하늘 새 땅과 왕국이 별개의 일임을 본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계시록의 이러한 가르침에 근거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은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왕국은 공의로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질책하시는 시기가 왕국 시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모든 것은 다 값없이 주어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문제와 장래 문제와의 관계를 본다. 만일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를 좇아 제멋대로 생활한다면, 오는 시대에 하나님의 질책을 받게 된다. 그러나 만일 오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면, 장래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준 세 시기에 관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세에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스스로 책임 지신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음을 알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왕국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때이다. 만일 오늘 당신이 제멋대로 생활한다면 장래에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영원 안에서의 확고함이 있지만, 일시적인 위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확고함이 있지만, 또한 왕국에서의 위험도 있다. 왕국 안에서 우리는 심한 형벌과 중한 질책을 받게 될 수도 있다. 구원받는 문제는 주 예수님의 역사로 인한 것인 반면에 상을 얻는 문제는 당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구원은 주 예수님의 행위로 인한 것이고, 상을 얻는 것은 당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하고 자신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았다면 상급을 얻게 된다. 우리가 얻은 은혜를 귀히 여기고, 하나님께 경고를 받아 왕국의 상급을 추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
4) -왕국에서의 징계 2-
오는 시대에 왕국 안에서 영생을 얻음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오늘 교회 시대에서 사람이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우리의 메세지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곧 이 영생이 어느 때에 우리가 누리도록 나타나고 발견되느냐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생각과 영은 종종 사망의 공격을 받고 있다. 사탄은 여전히 그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 어느 때가 영생이 완전히 나타날 때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때인가 아니면 왕국 안에서인가? 요한복음 5장 24절~29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이를 기이이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 24절에서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떨어지지 않게 되며, 사람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주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이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9절은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생명」은 조에(zoe)로서 앞에서 말한 영생과 같은 단어이다. 무릇 선을 행한 자는 조에(zoe)를 얻게 되고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 24절은 분명히 우리가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말하는데, 29절에서는 부활할 때에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의 차이점을 보라. 25절에서 말한 것은 교회 시대의 일이다. 여기서는 죽은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은 결과 살아나게 되었다. 28절은, 『이를 기이이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한다. 25절은,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한다. 28절에서는 「때가 오나니」라고 말했을 뿐 「곧 이 때」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장래의 일이지 결코 현재의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장래 무덤에 있는 자들이 나온다고 말한다. 앞에서는 죽은 사람을 말했고, 여기서는 무덤에 있는 죽은 사람을 말했다. 앞의 죽은 사람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고, 여기서 말한 무덤 속의 죽은 사람은 영혼이 죄 가운데서 죽은 사람이 아닌 몸이 죽은 사람을 가리킨다. 모든 육신이 죽어서 무덤에 있는 사람은 장래 두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 때 선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때는 바로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오는 때이다. 마가복음 10장 30절을 보기로 하자.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는니라』. 여기서 주 예수님은 또 한 번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주의해야 한다. 마가복음 10장 30절의 영생은 요한복음에서 말한 교회 시대의 영생이 아니고 장래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생도 아니다. 여기서 말한 것은 내세에 얻게 될 영생이다. 「내세(來世)」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다음 시대 혹은 차기(次期) 시대를 뜻한다. 오늘 이 시대는 은혜 시대이고 다음 시대는 왕국 시대 혹은 천년왕국 시대이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하신 내세에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한 사람이 주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에게 행위로 인한 영생을 알려주신 것이다. 주님은 율법을 지키고 모든 소유를 팔아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막 19:17~21).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은혜에 근거할 뿐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신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율법을 지키고 모든 소유를 팔아야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는가? 이는 마가복음 10장에서 말한 영생이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과 다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의 영생은 행위가 있어야 얻을 수 있고, 요한복음의 영생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 그 젊은 청년이 떠난 후에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기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가』라고 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쫒았나이다 (장래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자 주 예수님은 장래의 일을 그들에게 알려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3~30). 그들은 왕국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좀전에 말한 영생은 왕국 안에서의 영생이다. 왕국 안에서의 영생은 행위로 얻는 것이고 헌신함으로, 주님과 함께 고난 받고 함께 수치받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오늘날의 영생은 이미 해결되었고 영원에서도 영생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왕국 안에서 영생을 갖게 될 것인가의 여부는 당신이 주님을 사랑했는가,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버렸는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가, 세상을 거절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당신은 돈이나 물질이나 가정 혹은 세상 사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가? 주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린다면 오늘날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백 배나 받는다고 하셨다. 오늘 당신이 주님을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린다면 하늘에 있는 은행에서 백 배나 찾아 쓸 수 있다. 이렇게 높은 이자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당신이 일 불을 넣었는데 백 불을 찾을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은행이 있겠는가? 이뿐 아니라 내세에 당신은 영생을 얻게 된다. 마태복음의 많은 부분은 왕국 대신 「영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그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곧 왕국에 들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14절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가라고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만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걸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 구원은 은혜에 속하지 않고 사람의 행위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걷는 그의 공적에 달려 있게 된다. 마태복음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생은 오늘날 우리가 얻은 영생을 가리키지 않고 천년 왕국 안에서의 생명을 가리킨다. 사람이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려면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가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뜻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생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왕국 안에서 영생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당신은 성경 안의 시대의 문제에 대해 분명해질 것이다. 교회 시대에는 모든 것이 다 은혜에 의한 것이다. 교회 시대의 끝 무렵 하나님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왕국 안에서는 오직 주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게 된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천년왕국의 형벌 성경은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특정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행위가 합당치 않고 생활이 경건치 않으며,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며 자의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주 예수님의 수치받은 위치에 서 있기를 꺼려하고, 많은 실수와 죄를 범한다. 만일 그들이 이생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죽은 다음 그날 부활할 때 그들이 단지 주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왕 노릇 하지 못하게 될 뿐이라고만 생각하는가? 주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수치를 당한 다음에야 함께 왕 노릇 하고 함께 영광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딤후 2:12).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들에게는 많은 범죄와 세상을 사랑함과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들이 있다. 세상을 떠날 때 그들에게는 많은 불의와 처리되지 않은 많은 죄들이 남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람이 특별하고도 실지적인 질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까지는 어느 종이 자기 주인에게 빚을 졌는데 주인이 그의 빚을 탕감해 주고 그를 용서해 주었으나 그 종은 자기에게 빚을 진 다른 다른 동관을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처음에 언급한 종은 필히 구원받은 사람일 것이다. 이는 그가 주님의 사하심을 구하고 주님도 불쌍히 여겨 놓아 주고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아무런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온 자들이므로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놓아주시며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신 것이다. 이 종이 그리스도인이므로 그가 만난 일을 장래 우리도 만나게 된다. 그 주인이 이 종을 어떻게 다루었으면 우리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실 것이다. 28절~30절 : 『그 종이 나가서』. 그 종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여기서는 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신은 사함받은 사람이지만 남을 사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을지 모른다. 당신이 주님께 빚진 것은 천만 냥을 그분이 다 탕감해 주었는데 당신은 당신에게 열 냥 밖에 빚지지 않은 형제에게 『내게 갚으라 한 푼도 차이 없이 다 갚으라 다 갚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어떤가? 31절~32절 :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게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당치 아니하냐』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사람이 이미 주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일 것이다. 주인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내가 너를 용서한 것 같이 너도 네 동관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입고 사함받은 사람임을 증명해준다. 그가 다른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그에게 생명은 있는 것이다. 34절 :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붙이니라』. 이미 긍휼이 여기심을 입고 사함받은 사람을 주님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다시 옥졸들의 손에 붙이셨다. 그가 빚을 다 갚을 수 있는가는 모를일이지만 그는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날 주님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지 않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한 대로 대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당신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주님도 당신이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에 따라 당신을 대하실 것이다. 긍휼과 심판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장래 심판대 앞에서 공의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을 안다. 물론 심판대 앞에서는 공의를 말하지만 여전히 긍휼이 있게 된다. 오늘 당신이 사람들을 긍휼로 대한다면 주님도 당신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오늘 만일 당신이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고 남의 실패와 약함에 대해 엄격하게 공의를 말한다면 그날 주님도 당신을 공의로 대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남을 긍휼히 여긴다면 그분도 당신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7절은 이렇게 말한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오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너무나 박정하게 한다. 남을 비판할 때 그는 그 사람의 잘못을 하나하나 자세히 따진다. 남을 판단하고 비평할 때 그는 장래 하나님도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대로 그를 대하실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당신도 헤아림을 받게 된다. 만일 당신이 사람들에게 누르고 흔들어 후히 준다면 주님도 당신에게 누르고 흔들어 후히 주실 것이다.(눅 6:38). 남을 용서하는 자는 사함을 받게 되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고 말했다(약 2:13). 심판조차도 이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일생 동안 남을 긍휼히 여긴 사람이다. 우리에게 실수가 없을 수는 없으나 오늘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도 우리를 처리할 수 없으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손해보기를 싫어하며 남과 다투고 항상 자기에게 많이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적게 준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럴 때 심판의 날에 심판의 주 조차도 어떻게 다룰 수가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당신이 남을 긍휼히 여긴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오늘 당신의 긍휼히 여김은 장래 심판을 이기게 할 것이다. 오늘 당신이 남을 심판한 것 같이 장래 주님도 당신을 그렇게 심판하실 것이다. 당신이 남을 대하듯이 주님도 당신을 그렇게 심판하실 것이다. 당신이 남을 대하듯이 주님도 당신을 그렇게 대하시기 때문에 이 은혜는 의로운 것이다.오늘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가는 하나님이 그 도량대로 당신을 헤아리도록 당신 자신을 위해 하나의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장 13절은『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말한다.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당신의 긍휼은 심판을 이길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의 손에 넘겨져 옥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우리가 진 빚을 다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어느 날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시듯이 남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기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35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부분의 말씀은 불신자에게 하신 것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것으로서 천부와 그분의 자녀와의 관계와 형제와 형제 사이의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단락의 말씀 앞 부분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다. 주 예수님은 일흔 번식 일곱 번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다(마 18:21~22). 이 말씀에 이어서 그 종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만일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장차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옥졸들의 손에 넘기워 옥에 갇힐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베드로가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면 당신과 나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너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만일 우리 각 사람이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천부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구원이 요동치 않는 사실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만일 오늘의 문제를 분명히 해놓지 않으면 장래 왕국 안에서 특정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
5) -왕국 안에서의 지옥불-
성경의 많은 곳은 천년왕국에서의 믿는이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언급했다. 여기서 이것들에 대해 한번 살펴본 후 나중에 최종 결론을 내리겠다. 왕국에 들어가는 것과 왕국 안에서의 큰자와 작은 자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3절은,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제자들은 천국에 관하여 즉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 가에 관하여 물었다. 이것은 구원과 멸망의 문제가 아니라 왕국에서의 큰 자와 작은 자에 관한 문제이다. 주 예수님은 그들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어 4절에서 그분은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다. 3절은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하고 4절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을 말해준다. 3절은 우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4절은 계속 어린 아이가 되고 계속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이것은 왕국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첫걸음을 내디디면 그 다음 걸음도 그렇게 내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당신은 어린 아이같이 되어야 한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계속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여기서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문제를 계속 말씀하신다. 이어서 주님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라고 하셨다. 무릇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해 이러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한 자, 즉 어린 아이 같이 된 자,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는 곧 주님을 영접하는 자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멧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6절). 이 말씀은 남을 실족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손해를 입고 죽음을 당하며 좋지 않은 종말을 보는 것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만일 누가 당신을 죽여서 땅 속에 장사하지 않고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놓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일종의 화(禍)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을 실족케 함으로 장래 입게 될 화(禍)는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7절 : 『실족케 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왕국 안에서의 지옥불 1절부터 7절까지에서의 주 예수님은 일반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는 이제까지 언급한 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8절 말씀부터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이 일을 확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틀린 일일 뿐 아니라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도 심각한 일이다. 8절은,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여기서 「네」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읽을 때, 당신은 「네」가 질문한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주 예수님은 그들과 많은 말씀을 나눈 후에, 그들에게 남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시고 이어서 8절에서는 그들 자신을 가리켜 계속 말씀하셨다. 만일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는 것이 낫다. 네 손이 도적질을 하고 네 발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즉 네게 죄와 정욕이 있다면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8절). 여기서 주님은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를 용납하고 포용한다면 장차 어떤 조우(遭遇)를 당하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장래 두 손과 두 발이 성한 채 영원한 불에 떨어지든지 아니면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생에 죄를 처리하고 정욕을 처리함으로 한 쪽 손과 한 쪽 다리만 가지고 불구인 채로 왕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정욕을 남용함으로 영원한 불에 던지워진다는 것이다. 이 불은 영원한 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원한 불 가운데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그분이 하시지 않은 말씀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손과 발이 자주 죄를 범할 때 그는 천국 안에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된다. 손과 발을 찍어 내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람은 손발을 찍어 내버려도 죄를 범할 수 있다. 발이 없으면 차를 탈 수 있고, 한쪽 손이 찍어 내버려도 다른 쪽 손을 사용할 수 있다. 주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뜻은 사람에게 손발을 찍어 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손을 찍어 버린다 하더라도 당신의 정욕은 제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밖의 육신이 아닌 내적인 정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당신이 찍어 버려야 할 것은 바로 당신으로 범죄케 하는 그것이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온 몸을 청결케 하고 어떤 부분을 찍어 내버려도 영생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한 쪽 손과 한쪽 발을 찍어 내버릴 뿐 아니라 두 손과 두 발을 찍어 내버린다 하더라도 여전히 지옥에 가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잘 다룸을 받지 않은 채 영원한 불에 들어가기 보다는 완전치 않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 편이 낫다. 그 다음 9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이 부분도 역시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정욕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결국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의 영원한 불은 지옥불이다.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지옥불의 형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지옥불의 형벌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받지 않고 왕국의 때에만 받는다. 마태복음 18장이 이렇게 말할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장의 서두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무리를 보셨다는 것을 읽는다. 그러나 그분은 무리를 가르치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남에게 욕하는 자는 형제이다. 그는 다른 형제에게 쓸모없다는 뜻의 라가라고 하거나 미련한 놈 또는 배신자라는 뜻의 모레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형제를 부른 형제는 지옥불을 피할 수 없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모레라고 하지 않아도 지옥에 가기 때문에 여기서 말한 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욕하지 않았어도 지옥에 내려가게 된다. 성경에서 행위의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언급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형제이다. 그러나 형제에게 욕했기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지게 된다. 23절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많은 때 사람들이 당신을 원망하면 당신은 어쩔 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욕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당신은 예물을 드리고자 할 때 조심해야 한다. 만일 어느 형제가 좋지 않게 느껴져서 문득 그러한 느낌을 말해냈다면, 당신은 그것을 분명히 처리해야 한다. 24절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중요한 것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다. 25절 :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당신은 피고와 같고 당신의 형제는 원고로서 당신을 고발하러 간다.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25절). 천국에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여기서 나는 몇 마디 엄숙한 말을 하고자 한다. 서로 사화하지 않은 두 형제나 두 자매는 결코 함께 왕국에 있을 수 없다. 장래 왕국 안에는 사랑과 긍휼이 있을 뿐이다. 오직 서로 사랑하고 피차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만이 천국 안에 있을 수 있다. 만일 내가 호(胡) 형제와 의견을 달리 했다 하자 그것을 이생에서 깨끗이 처리하지 않았다면, 우리 두 사람이 다 왕국 밖에 있게 되거나 최소한 한 사람은 왕국 밖에 있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왕국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오늘 호(胡) 형제와 의견을 달리하고서 장래 두 사람이 함께 왕국 안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왕국 안에서 모든 믿는이는 동심합의 되어 있고 서로간에 어떤 장애도 없다. 오늘 당신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어떤 형제나 자매와 마찰이 생겼다면 조심해야 한다. 결국 당신이 들어가고 그가 밖에 있든지 그가 들어가고 당신이 밖에 버려지든지 할 것이다. 혹은 두 사람이 다 밖에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가 아직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그가 아직 살아있고 당신도 살아 있을 때, 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그와 사화하라는 뜻이다. 주 예수님은 두 대적이 그분의 왕국 안에서 서로 원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는 남을 아주 쉽게 원망한다. 그러나 그 원망은 당신을 밖에 가두거나 그를 밖에 가두거나 아니면 두 사람 다 밖에 가두게 될 것이다. 오늘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아주 자유롭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날에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함께 길에 있을 때에」사화해야 하는데,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그 길은 끝난 것이다. 혹 그가 죽었어도 이 길은 끝날 것이며,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이 길은 끝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가 아직 길에 있고 당신도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해야 한다.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줄까 염려하라』. 재판관은 주 예수님이시다.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라고 했는데 이 관예는 천사이다. 『(너를)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여기서 우리는 형제에게 죄를 범한 사람이 장래 상당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본다. 이 단락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의 옥이 바로 22절의 지옥불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23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23절 이후의 말씀은 22절의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22절은 형제를 모레(미련한 놈)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23절부터 25절까지는 만일 형제와 사화하지 않으면 옥에 갇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25절의 옥은 곧 22절의 지옥불인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멸망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이 회개하지 않거나 자백하지 않고 그에게 사함받지 않은 죄가 있다면,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 이어서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지 생각해 보라. 26절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옥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빚을 다 갚는 것임을 보여준다. 오는 시대에도 사함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호리라도 갚지 않은 것이 있다면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그 다음 구절인 27절부터 30절은 또 다른 단락으로서 그 의미는 대동소이하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구약의 명령은 간음하지 말라이나 신약의 명령은 마음 속에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여자」는 원문에서 남의 아내를 말한다. 간음은 혼인 외에서 발생하는 불법 행위이기 때문에, 남의 아내가 아니면 간음할 가능성이 없다. 만일 남의 아내가 아니라면 그것은 간음이 아니라 음란이다. 성경에서 음란에 대한 형벌은 간음에 대한 형벌보다 중하지 않다. 여기서는 남의 아내에 대해 음욕을 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여기의 「보다」는 단어는 원문에서 포함된 범위가 그리 광범위 하지 않다. 만일 「본 것」이 다 죄라면 이 죄에 떨어질 사람이 너무도 많을 것이다. 원문에서는 「만나다」를 뜻하지 않고 오직 「보다」를 뜻할 뿐이다. 「만나」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이고 보는 것은 의도적으로 주시하는 것이다. 보고 음욕을 품는다는 말 속에는 어떤 목적을 위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여자에게 음욕을 품기 위해 보는 자마다』. 주님이 정죄하시는 것은 우연히 당신 머리 속에 들어온 그런 사상이 아니다. 주님이 처리하시는 것은 우연히 어떤 사상이 머리 속에 들어온 후 음욕을 품기 위해 다시 가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사탄이 당신의 육체를 자극하여 주입해준 어떤 더러운 사상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사탄이 우리에게 어떤 사상을 주입한 후 당신이 다시 가서 보는 이것이다. 우발적인 사상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나 가서 보는 것은 당신 자신의 뜻이다. 돌발적인 사상은 시험이니 가서 보는 것은 시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29절 :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만일 당신의 오른눈이 가서 보라고 했다면 그것을 빼어 내버리거나 제거 하는 편이 낫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만일 당신이 정욕을 제하지 않고 죄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결국 「옥에 갇히게 된다」. 그 다음 30절은 이렇게 말한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뛰어난 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를 처리할 것을 말씀하신다. 만일 죄가 그들에게 남아있도록 허락한다면, 그들이 영원히 명망되지는 않으나 「지옥에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이다.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일에 대해 성경의 다른 곳은 어떻게 말하는가? 누가복음 12장 1절 : 『그 동안에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이것은 제자들이 외식하는 자들이 아닌 주님께 속한 자들임을 증명한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4절~5절 :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분명하다.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번 그리스도인도 「지옥에 던져질 」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즉 그들이 우리 몸에만 역사한다면 어떤 일을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는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 다음 구절인 6, 7절도 여기의 말씀이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증명한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까마귀이지 참새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참새이다. 마태복음에서 말한 들판의 백합화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참새도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참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마 6:26). 이것은 이방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분명히 참새가 「지옥에 던져 넣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의 머리털이 하나님에 의해 세어진 바 되었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그리 상관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주님은 그분께 속한 사람에게, 사람이 우리 몸에 무엇을 하든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도 있다』. 우리는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다루는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 다음에 아주 보배로운 두 구절이 있다. 8, 9절 :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시인하는 이와 부인하는 이로 나뉘어진다. 어떤 사람은 은밀히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주님을 시인함으로써 순교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여기까지 읽을 때 여러분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의 뜻은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해 무슨 해를 입었다면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짓는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 중한 것이다. 그분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다. 1절부터 9절까지를 읽은 후에 당신은 5절의 「지옥에 던져 넣는 것」이 바로 9절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해 보겠다. 한 소년이 밖에서 나쁜 짓을 하고 갇히게 되었을 때 그의 부모나 가족들은 그로 어려움을 피하도록 그것을 대신해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소년은 너무 나빠 부모가 조금만 고통을 주어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부모는 그 아이에게 어떤 고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결국 그 아이를 보석해 내지 않는다. 주님은 믿는이들을 이렇게 대하신다. 만일 주 예수님이 당신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형벌 안으로 떨어진다. 계시록 3장에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있다. 계시록 3장 5절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왕국이 시작될 때, 하나님의 천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판대 앞으로 하나님께 들어올릴 것이다. 거기에 생명책이 있는데 그 책에 기록된 것은 바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다. 거기에는 많은 천사들이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주 예수님도 거기 계신다. 한 천사 혹은 몇몇 천사가 생명책을 읽어갈 때, 주 예수님이 시인하는 이름은 왕국에 들어가게 되고 주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인하지 않은 사람은 천사가 그 이름 위에 표시를 하고 제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된 이기는 자의 이름은 흰색이고 실패한 이름은 검정색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조차도 없다. 어떤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없고, 어떤 사람은 이름이 있었으나 도말되었고, 어떤 사람은 기록될 때나 왕국 안에서나 여전하다. 만일 심판대 앞에서 당신의 이름이 도말되었다면, 이것은 당신이 끝났고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계시록 20장 15절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영원히 불못에 있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책에서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불못에 던지워질 것이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의 일이다. 우리는 계시록 3장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그 이름들이 도말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때 그들은 불못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은 영영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도 위험이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용납하고,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며, 간음을 하고 형제를 욕하며, 사람들 앞에서 고통과 수치와 핍박을 당할 것을 두려워함으로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게헨나에 던져 넣으실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지옥에 던져 넣는 것」은 잠시 우리로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음 성경 다른 곳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있다. 계시록 2장 12절은 우리에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계시록 20장 6절은, 다시 죽지 않고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는 한 무리를 만난다. 둘째 사망은 바로 계시록 20장 끝부분에서 언급한 불못이다. 바꿔 말해서, 실패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그들이 둘째 사망 자체를 당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둘째 사망은 당하지 않겠지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유황 불못의 때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될 때임을 안다. 그 때에 사탄과 세상과 사망은 모두 불못에 던져진다(계 20:10, 14). 동시에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는 불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공공연하게 불못으로 들어가는 때이다. 그러나 천년왕국 때에 실패한 그리스도인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단지 이러한 다루심은 불신자에 대한 것처럼 영원한 것이 아닐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주님은 그들을 부패되도록 내버려두어 불신자들이 받는 것을 받게 하신다. 이것이 계시록 2장에서 말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으리라는 것의 의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한 말씀이다. 이 「해(害)」라는 단어는 그리 좋은 번역이 아니다. 원어의 뜻은 그리 강하지 않다. 우리 말에서 「해(害)」라는 단어에는 좋지 않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당신이 둘째 사망의 상함을 받게 된다. 혹은 둘째 사망이 당신을 한번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크고 흰 보좌로부터 영원한 불목에 들어가기까지가 둘째 사망이다. 그러나 천년왕국 안에는 둘째 사망의 해가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종말은 불태워짐이다 이제 히브리서에 있는 두 구절을 보기로 하자. 히브리서 6장 4절 :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여기에 이런 많은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비췸을 얻었고, 계시된 하나님을 보았으며, 아버지 품속의 독생자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하늘의 은사 곧 유일한 은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았다. 성경에서 은사가 복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고, 단수일 경우에는 유일한 은사로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독생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와 다르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참예한 바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를 얻었으며 성령의 내주하심을 갖고 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 내세의 능력은 바로 천년왕국의 능력이다. 천년왕국에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더욱 흥왕되고, 각종 능력과 기사와 이적이 충만할 것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 내세의 능력이라고 말한 것이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천년왕국에 속한 것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인 것이다. 만일 오늘 이 사람이 진리를 버리고 미끌어지고 넘어졌다면, 다시 그를 회개케 할 수 없다. 이 사람은 많은 역사를 거치고 많은 비를 흡수하였지만, 넘어졌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것들을 내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이 사람의 종말은 다음 세 가지 이다. 첫째로 그는 「버림을 당한다」. 이 버림당함은 바로 고린도 전서 9장 27절의 버림당함이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쓰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왕국 시대에도 나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이 버림을 당하거나 버림이 되는 것은 바로 왕국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저주함에 가깝다」. 그가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받은 형벌이 저주함에 가깝다는 것이다. 셋째로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몇 주 전에 우리는 진여(眞茹)에 있는 땅을 불사르려는 계획을 가졌었다. 그러나 땅을 영원히 불사를 수 있겠는가? 당신은 땅을 오 년 동안 불사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여기의 「불사름」은 일시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불사름」이 있다고 말했으나 다른 곳에서는 지옥불을 피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이 두 부분을 합해 본다면 서로 일치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말한 것들을 얻은 후에 하나님께 좋은 열매를 맺지 않고 도리어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 그는 불살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불사름은 일정 기간 동안만 지속될 것이다. 만일 당신의 밭에 자란 가시와 엉겅퀴를 불사르려 한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겠는가? 국민 학생들도 알듯이 엉겅퀴는 일단 불살라지면 다시 불사를 수 없다. 왕국의 불사름은 길어야 천년이다. 사실상 얼마 동안 불살라지는 가는 당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가시와 엉겅퀴를 많이 내었으면 보다 오랫 동안 불살라질 것이고 적게 내었으면 보다 적게 불살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남았는가? 아직 주 예수의 보혈 아래 두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직 자백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은 일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이 말한 가시와 엉겅퀴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 예수님은 호리라도 갚지 아니하면 거기서 나올 수 없다고 하셨다(26절). 당신은 당신의 모든 빚을 다 갚아야 한다. 모든 가시와 엉겅퀴를 다 불사르는 것이 바로 모든 빚을 다 갚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밭과 같고 그의 악한 행위는 가시와 엉겅퀴 같다. 내가 산 '다섯 에이커'의 땅이 불살라진 후에 '삼 에이커'는 사라지고 '이 에이커'만 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불살라지는 것은 가시와 엉겅퀴이고 밭은 불살라지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아담 안에서 당신의 저주받은 것들 곧 응당 제거되어야 하나 제거되지 않은 것들은 불살라져야 하며,그것들이 바로 지옥불이 태우는 대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불로 태워지지 않는다. 가시와 엉겅퀴가 다 불태워져도 밭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에는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당신에게서 자라나온 것들 당신의 육신 안에서 자라나온 것들은 주 예수님의 보혈을 거치지 않았다면 상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히브리서에 또 한 곳이 있는데, 그것은 10장 26절부터 29절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역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말씀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몇십 불로 소나 양 한 마리를 사서 당신의 속죄제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안 후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그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당신은 그분을 그 많고 많은 소와 양들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 끝으로 『또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는 성령께서는 당신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당신은 그분을 욕되게 하고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배도(背道)하는 사람의 길을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이 구원받았을 가능성도 있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사도는 다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후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더 중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의 종말은 심판과 맹렬하게 타는 불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맹렬한 불이 있음을 본다. 이 외에도 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 있다. 요한복음 15장 2절 :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이 가지는 주님께 속하지 않은 가지가 아닌 주님께 속한 가지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잠시적인 형벌이 아닌 오늘날의 징계일 수도 있다.그러나 6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어떤 가지는 불에 태워질 것이다. 어떤 가지는 싹이 트고 잎사귀를 내지만 과실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지만 과실이 없다. 주 예수님은 그런 가지를 제하여 버리고 밖에 버리워 말라지게 하며 불에 던져 사르라고 하셨다. 여기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불을 통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많은 성경 구절을 본 후에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 문제를 분명히 해놓치 않으면 형벌을 받게 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이 형벌이 어떤 형벌인지를 말해주는데, 이 형벌은 일반적인 것이 아닌 지옥불이다. 그러나 이것은 왕국 시대의 불이지 영원 안에 있는 불이 아니다. 이제 문제는 어떤 종류의 죄가 우리를 그런 지경으로 이끄냐는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무릇 회개와 자백과 처리와 배상을 거치고 주 예수님의 보혈 아래 둔 죄는 심판대 앞에서 결코 우리를 다시 찾지 않는다. 모든 죄는 지나갈 것이다. 가장 큰 죄도 지나갈 것이다. 한 가지 지나가지 않는 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품은 죄이다. 시편 66편 18절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 마음 속에 품은 죄란 무엇인가? 마음은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기관이다. 마음은 당신의 감정을 대표하고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 당신 자신이다. 만일 당신의 마음에서 죄를 좋아한다면 주님은 듣지 않으신다. 당신이 많은 죄를 자백하지만, 어떤 것이 죄인줄 알면서도 마음 속으로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죄로 느끼지 않을 때, 주님은 듣지 않으신다. 이뿐 아니라 만일 당신에게 사람들과 해결되지 않은 무슨 문제가 있거나 아직 용서하지 않은 어떤 일이 있거나 남에게 거리낌이 될만한 일들이 있거나 주님께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일들을 보혈 아래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럴 때만이 그 일들이 지나갈 수 있고 장래 형벌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결론의 말 이제 장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리겠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 영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왕국 시대때의 문제는 하나의 의문점이다. 누구도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왕국 시대의 문제이다.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많은 등급으로 나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신실히 일함으로, 주 예수님과 함께 핍박을 받고 수치를 받고 고난을 당함으로 주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 예수님과 함께 핍박받지 않고 수치당하지 않고 고난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죄가 없고 일생 청결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비록 일에 있어서 그에게 특출한 것은 없지만, 최소한 주님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를 줌으로써(마 10:42) 그들도 상을 얻게 될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얻은 상이 작다는 것 뿐이다. 왕국 때에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이 왕국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그 중 어떤이는 큰 상을, 어떤이는 작은 상을 얻을 것이다. 기타 상급을 얻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리이다. 성경은 그들이 어디 있게 될 것인가를 말하지 않고 단지 그들이 왕국 바깥 어두운 곳에 있게 되고(마 8:12, 22:13, 25:30, 눅 13:28) 하나님의 영광 밖에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록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아직 회개치 않은 죄가 남아 있고 철저히 처리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다. 죄 문제가 아직 처리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잠시 불 속에 넣어져 모든 빚을 다 갚고 나서야 거기서 나올 수 있게 된다. 이 기간은 길어야 왕국 시대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실지로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장래 일에 관하여 아직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일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이미 충분하다. 비록 많은 상세한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직면하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히 말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상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망하게 되며, 어떤 사람은 옥에 갇히게 되고 어떤 사람은 불에 던져져 태워질 것이다. 구원의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앞에서 충분히 보았다. 주 예수를 믿고 의지한 그리스도인의 구원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고 영생의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후부터 죽기까지의 그의 모든 행위의 실패와 성공은 왕국 안에서 그가 받을 것을 결정해 준다. 우리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시다. 한편에서 그분은 구원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 주신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누구도 이 사실을 전복 시킬 수 없다. 다른 면에서 주님은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고 해서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만일 우리가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불사름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만일 주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실 수 없고, 우리의 생활에서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장래 우리를 질책하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분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도록 특정한 형벌로 우리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예비하심도 공평하다. 일단 이러한 것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가르침과 경계를 받았을 것이다. 성경을 읽는 합당한 태도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에 관하여 몇가지 언급 하겠다. 첫째로, 어떤 무리는 오로지 은혜만을 믿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왕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유대인에게 적용시킨다.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고 그들의 책을 읽어본다면, 그들이 왕국에 관한 모든 것들을 유대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은혜에 관한 모든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고, 화(禍)에 관한 모든 것은 다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 모든 무겁고 힘든 것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간에 그분의 자녀를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서신에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없기 때문에 그 서신들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반면에 어떤 무리들은 이제가지 언급된 성경 구절들이 다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죄인에게도 승리하고 패배하는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그것이 달든 쓰든 다 먹어야 한다. 사람들은 은혜에 대해 들을 때에는 기뻐하지만 왕국에 대해 들을 때에는 싫어한다. 그러나 한면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보여 주고, 다른 면에서 공의를 보여주는 이러한 말씀은 균형 잡혀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寓話)가 있다. 한번은 고양이가 독수리를 만났다. 독수리는 고양이에게 하늘은 이런 저런 면에서 정말 좋으니 거기로 데려가 줄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고양이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무엇 때문이니?』『하늘에 쥐가 있니? 쥐가 있으면 가고 없으면 안 갈 거야.』 하늘은 거룩하고, 죄나 세상이나 사탄이 없는 곳이다. 오늘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하늘로 데려가신다면 당신은 거기서 살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오늘 돌이키지 않는다면 합당하게 될 때라야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이미 구원하셨다. 그러나 주관적인 면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역사하시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우리를 채찍질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은혜만 전하고 왕국을 전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손상을 입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손실을 당하며, 왕국이 임할 때에는 더 큰 손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부득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내가 전한 메시지로 인해 나를 더욱 반대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내 말이라면, 나는 그들의 반대를 받아들이고 나 자신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난들 이러한 말이 아닌 사람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마태가 아니고 마가도 아니며 바울도 아니다. 히브리서를 내가 쓰지 않았고 계시록도 내가 쓰지 않았다. 만일 내가 쓴 것이라면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분은 이미 전하셨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셨다. 친구들이여! 성경을 읽을 때 당신은 사람이 무어라고 말했는지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관심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머리 속에 많은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리라고 칭하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것들도 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것은 다 진리이고 그들과 같지 않은 것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성경 근거를 가지고 있어도 그들의 생각이나 관점과 다른 것은 모두 이단이라고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끝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이단」을 말하고 사람의 가르침에 따른 「진리」를 반대할 수 있음을 인해 내 마음이 심히 기쁘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다른 어떤 것도 당신 위에 권위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확히 보기 바란다. 우리는 다른 권위를 모르고 무엇이 신학인지도 모르며, 무엇이 사람의 말이고 무엇이 교회의 유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직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서 무어라고 말했는지만을 알 뿐이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성경 아래 굴복할 수 있을 뿐 그 말씀을 바꿀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자녀들의 운명과 왕국 안에서 우리가 갖게 될 상태를 알려 준다. 이러한 문제들은 장래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이므로 우리는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것을 주의한다면, 이 땅에 살 동안 우리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게 된다. 두번째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직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단을 반대할 수 있고 이단으로는 결코 이단을 반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단 중에 완전한 이단은 없다. 이단은 다 진리에 오류가 더해진 그것이다.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은 옳은 것들에다 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을 추가할 때 곧 이단이 형성된다. 천주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옥의 교리를 전파한다. 오늘 당신이 내가 전한 이 몇 메시지를 읽어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연옥에 관한 교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읽어보았다면 당신은 연옥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이 전혀 옳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이단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천년 왕국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오늘이 연단될 때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표준에 이르지 못하면 천당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연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일단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하나님은 그가 완전히 연단될 때까지 그를 연단시키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교리를 찾아볼 수 없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음부에 가서 연단될 것이라는 말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장래 왕국 안에서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이지 오늘 음부 안에서 연단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둘째로, 천주교의 근본적인 오류는, 그들이 죽은 후에 신부가 기도를 하거나 살아 있을 때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시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성경은 오직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했다. 결코 신부의 기도가 죽은 사람으로 무엇을 탕감받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결코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없다. 셋째로, 그들은 사람이 잘 연단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교리를 뒤집는 것이다. 성경은 천하 인간 가운데 주 예수님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한다(행 4:12). 오직 주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주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징계와 질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결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기 전에 우리의 구원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하나님을 닮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좋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되 내세 왕국 때까지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다. 성경 진리를 깨달았다면 당신은 천주교의 이단을 보았을 것이다. 천주교는 다만 그의 목적을 위해 성경 몇 마디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 진리를 이해했다면, 당신은 연옥의 교리가 은혜의 성질을 망쳐놓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나는 더러운 사람이지만,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을 인해 감사드린다. 구원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그분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죽은 후에 나는 연단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징계가 무엇인지를 안다. 징계는 바로 우리로 그분을 완전히 닮게 하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질책하시는 목적은 나로 그분을 닮고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구원과 무관하며 그분의 가정에서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개신교 안의 이단을 다룰 수 있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는 두 종류의 오류가 발전되고 있다. 첫째는,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사람의 행위는 어떠해도 좋다고 말하는 한 무리의 개신교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한번 죽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그가 죽을 때까지 행위가 좋지 않아도 왕국 안에 있을 수 있으며, 다만 그의 지위가 남보다 낮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가장 큰 손실은 왕국 안에서 지위가 남보다 낮은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은 사람으로 방종하게 하고 제멋대로 행하게 한다. 은혜란 무엇인가? 이 무리에게 있어서 은혜는 느슨함과 방종을 위한 기회이다. 또 한 무리는 사람이 믿은 후에도 구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하루에 서너 번씩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생명책은 기록했다 지웠다 하는 것으로 인해 아주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 전에 어떤 형제는, 만일 한번 믿어서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면 생명책이 엄청나게 두꺼울 것이라고 했다. 내 이름만도 몇 번이나 기록되고 몇 번이나 지워졌을지 모른다. 만일 범죄한 즉시 정죄받고 지옥에 내려가야 한다면,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이 양쪽은 다 극단이다. 이 두 무리는 모두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인도 잠시 「불에 던져질」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형제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영 구원받는다는 한 쪽 진리만 붙잡고 왕국의 징계를 말하지 않는 데 있다. 또 어떤 형제는 만일 우리가 「지옥에 던져진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생이 가변적인 것이며 영영 멸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왕국과 영세(永世), 잠시적인 천 년의 형벌과 영세의 형벌과의 차이점을 보았다면 비록 그리스도인이 장래 형벌받을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그분의 양들에게 주신 영생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볼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영영 멸망하지 않는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천주교의 연옥이 이단이라는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구원과 징계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나사렛 사람 예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생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으나 왕국 때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시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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