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워치만니/11-1 워치만니의 글들

교회의 정통-워치만니

나다나엘(구 요나한) 2022. 10. 10. 09:20

교회의 정통

 

 

인도의 말씀


성경 : 요한계시록 1-3, 22:7,18,19


서신 중에서나 복음 중에서나 요한의 것은 다 마지막에 쓴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은 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행적을 쓴 것이고, 요한의 복음은 『하늘로서 내려와 여전히 하늘에 계시는 인자』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의 서신은 지식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케 할 때 쓴 것으로서 사람을 하늘로 이끌고 가서 하늘에 있는 모든 영원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은 우리를 사람의 테두리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게 한다. 요한이 쓴 글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곧 우리를 태초로 끌고 가는 것이다. 요한의 복음은 태초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고, 요한의 서신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말하며, 요한의 계시록은 우리를 장차 올 영원한 세계로 이끌고 간다.


그의 복음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가 우리 가운데 계실 때 사람들은 그를 잘 알지 못하여 나사렛 예수로만 알았지만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예수가 바로 태초에 계신 그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깊은 내막의 사실이다. 요한의 서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의 직분은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했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서신에서는 특별히 이 두 가지를 제기하여 우리를 태초에 있는 가장 깊은 내막의 사실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세상은 어지러웠으며 로마 가이사(시저)의 잔해는 최고도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요한은 우리를 장차 올 가장 깊은 내막의 상태로 이끌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계시록에는 이 세상의 상태뿐만 아니라 교회의 상태도 나타나 있다. 계시록에서는 교회가 외적으로 가장 어지러울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이 정죄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이 정하신 교회의 길은 어떠한 것인가, 교회의 외형은 역사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상태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내막의 마음과 뜻이다.


성경 안에 두 무리의 일곱 서신이 있다. 첫 일곱 서신들은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쓰신 것, 곧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이다. 하나님은 또 요한을 통해 둘째 일곱 서신을 쓰셨다. 첫 일곱 서신은 정상적인 상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다음의 일곱 서신은 비정상적인 상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은 정상적인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고 요한의 복음은 불분명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므로 진리와 은혜를 많이 언급했다. 요한의 서신도 비정상적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므로 빛과 사랑을 많이 언급했다.


계시록 2, 3장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처하여 공급해 주는 것이다. 바울의 첫 일곱 서신은 교회의 정상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 후 교회는 정상을 벗어났으므로 요한은 계시록에서 다음 일곱 서신들을 쓴 것이다. 첫 일곱 서신은 교회가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를 말한 것이고 다음의 일곱 서신은 교회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말한 것이다. 오늘 참으로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계시록 2, 3장을 보아야 한다. 계시록에서는 오늘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만일 계시록에서 그 길을 찾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첫 일곱 서신들은 마지막 때 전에 쓴 것이나, 나중의 일곱 서신들은 마지막 때에 쓴 것이다. 요한 일서 2 18절에서는 한 시대, 곧 마지막 때를 말하고 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같이 지금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리스도인이 첫 일곱 서신만을 보아서는 마지막 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성경 가운데 특별한 직분을 가진 세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곧 베드로, 요한, 바울이다.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서 거기에서 베드로는 진리를 배반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서 2장에서,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다. 또한 디모데 전서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다(딤전 3:15).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문제는 천히 쓰임받는 데서 벗어나려 하는 것보다도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딤후 2:20-22).


요한의 서신은 요한이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서 그 서신에서 요한은 적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으니 주님의 말씀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했다(요일 4:1-3). 나는 이 문제를 좀더 확실히 해야 할 부담을 느낀다. 교회의 시초부터 지금까지는 한 시대-교회의 시대-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적어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두 가지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오늘 교회의 외형은 황폐되어 있다. 당신이 만일 이 사실을 보지 못했다면 계시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첫 일곱 서신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땅 위의 혼란은 영적 사실에 영향을 줄 수 없고 하나님의 영적 사실은 항상 한결같은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은 혼란되었다. 로마 천주교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한다. 1914년에 개신교에서 조사한 아주 작은 종파 외에 대규모적으로 조직된 교파만도 천오백여 개가 되었는데, 이 많은 교파들도 다 각각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요한, 바울, 베드로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이러한 일들이 이미 시작되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버렸다고 했다(딤후 1:15). 거기에는 에베소 교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가지 구하여야 할 것은, 나는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을 따라 봉사할 수 있는가,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교회의 외형이 황폐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 계시록 2, 3장은 우리의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앞에 구한다면 계시록 2, 3장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알려 줄 것이다. 계시록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이 책이 어떠한 책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이 계시록을 예언(豫言)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일곱 교회도 예언적인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계시록의 특징은 예언의 성질을 띠었다는 것이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예언일 뿐 아니라 일곱 서신 역시 예언이다.


이 책은 예언의 책이므로 사람이 더 가할 수도 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언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이 예언이 이루어져 나타난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계시록의 성질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첫째, 그 책은 예언이요, 둘째, 그것은 예언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진다. 당시 아시아에는 교회가 일곱 개만이 아니었는데 요한은 왜 일곱 교회만을 제기했는가? 그가 밧모섬에서 본 것은 오직 일곱 교회뿐이 었으며, 이 일곱 교회는 능히 모든 기타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곱 성질의 교회를 선택하여 그들에게 예언을 주신 것이다. 이 땅에는 일곱 교회가 있고 하늘에도 일곱 촛대가 있다. 여기에서 기이한 것은 요한이 하늘에 오직 일곱 촛대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일곱 교회만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중경 교회도 끊겨 나가고 남경 교회도 끊겨 나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예언이라는 점이다. 예언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만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일곱 교회는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 여덟 번째 교회는 없다. 이 땅에 교회가 일곱 개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곱 교회가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하늘에 오직 일곱 교회만 있는 것은 이 일곱 교회의 역사가 곧 완전한 교회의 역사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제 1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3). 22장에서도 말하기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했다(7).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예언이 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비록 밖으로는 예언의 옷을 입었지만 그 속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책은 실행을 위한 책이요, 연구를 위한 책이 아니다. 여기의 예언은 다른 예언과 다르다. 이 예언은 준수(遵守)하라는 것이다. 요한과 우리의 공동 원칙은 곧 이 예언을 우리에게 주어 지키게 하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지키지 않는 자가 어찌 계시록을 알 수 있으며 어찌 일곱 교회를 알 수 있겠는가? 계시록 2, 3장을 읽어 보면 이것이 예언을 지키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이 심판의 주님이심을 볼 수 있게 된다. 계시록 1장의 전반부는 계시록 전체의 서문이며 후반부는 2, 3장의 서문이다. 2, 3장은 주 예수님의 계시로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주 예수님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제사장은 긴 옷을 입으므로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 곧 제사장인 것이다. 촛대는 성소 안에 있는 것이며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빛이 주야로 비추게 하기 위해 제사장은 계속 성소에서 촛대를 손질하고 기름을 더한다. 주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모든 교회 가운데로 다니시면서 어떤 촛대에 빛이 나지 않는가를 보신다. 손질함은 곧 심판함이요,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교회 가운데서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의 심판은 영원에서 본 것이다. 요한과 주님 사이는 가장 친밀했고 그는 주님의 품에 있던 자였다( 21:20, 24). 아들은 아버지 품에 있었고 요한은 아들의 품에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주님을 볼 때 죽은 자같이 된 것은 그가 심판의 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를 은혜의 주로 보았으나 현재에는 그를 심판의 주로 보아야 한다. 현재의 심판은 제사장의 심판이므로 계속 손질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이를 때에는 완전히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언젠가 주님의 두려움과 성결에 부딪혀야 하며 이 때에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할 수 없게 된다. 빛은 모든 이유를 제거해 버린다. 빛은 우리를 비출 뿐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성경에서 빛이 비취는 곳마다 사람의 육의 생명을 죽인다. 그 많던 이유도 주님 앞에서는 다 없어지고 요한처럼 땅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된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갈수록 커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 하나님으로부터 일격을 받아야 한다.


서신마다 첫 부분에서는 주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말하고 있고, 그 후의 말씀은 다 주님의 그 어떠하심으로부터 나온 계시이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를 볼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의 계속이므로 십자가를 모르면 십자가의 연장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일곱 서신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끝에서는 다 이기는 자를 부른다.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이기는 자인가? 그는 특수하게 수평선을 초월한 사람인가? 성경 가운데의 이기는 자란 다 평범한 사람이다. 비정상적인 때에 비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이 이기는 자이다. 지금 일반 사람들은 다 수평선 아래에 있다. 이기는 자란 수평선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요, 오직 수평선에 있는 사람이다. 오늘 하나님은 여기에서 이기는 자를 부르신다. 일어나 처음의 정상적인 길로 가자. 하나님의 뜻은 곧은 직선처럼 한 번도 변치 않는다. 오늘날 인간은 타락하고 실패하여 계속 밑으로 내려가고 있지만 이기는 자는 또다시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회복한다.


여기에서 또 두 가지를 볼 수 있으니 첫째, 교회는 금촛대요, 주님은 촛대 사이에 다니신다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데 그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使者)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금속에는 다 뜻이 있다. 철은 정권을 대표하는 것이고, 동은 심판을 대표하며, 은은 구속을 대표한다. 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표한다. 동서 고금을 통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성결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아는 자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속한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금으로 만든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교회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役事)는 다 육의 역사요, 금과 은과 보석, 그 중에서도 금의 역사는 가장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 일곱 서신은 다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쓴 것이므로 바울의 첫 일곱 서신과는 다르다. 바울의 서신 중 빌립보서만은 성도와 감독과 집사들에게 썼으나, 빌립보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는 다 교회에 썼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회에 직접 쓰지 않고-성령은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나-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쓴 것이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이다.


「사자(使者)」라는 이 두 글자는 헬라어로는 「Anggelos」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 2, 3장을 읽을 때 나중 일곱 편지와 첫 일곱 편지의 공통점을 근거로 하여 여러 가지 잘못된 해석을 사자에게 붙이고 있다. 그러면 이 사자는 과연 누구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자는 다 단수이므로 이 서신은 단수의 사자에게 쓴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단수는 단체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편지마다 마지막에는 이기는 자를 불렀으니 그것이 곧 다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 사자는 단체적인 사자로서 능히 전 교회의 소수인 이기는 자를 대표할 수 있는 자이다.


이제 하나님의 길은 달라졌다. 종전에는 교회가 주님 앞에 섰으나 지금은 사자가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촛불의 빛은 별빛보다 못하다. 주님은 꺼지지 않는 별빛을 택하시고 『이는 내 사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별은 주님의 손에 있다. 오늘 주님은 일부분의 사람만을 사자로 보신다. 왜냐하면 오늘 교회의 성질이 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주님은 일부분-사자-만을 보시기 때문에 가히 그들을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종전에 교회의 대표는 지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장로의 직분을 가리켰지만 이제 교회를 대표하는 책임은 영적 사자에게 주어졌다. 이 사자는 어떤 장로나 집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에게 교회의 책임을 지게 하신다. 오늘은 지위나 직분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영적 능력이 문제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책임을 참된 영적 능력을 가진 자에게 부여하신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모든 「종」에게 쓴 것이다. 그러므로 종이 아닌 자는 알 수 없다. 피로 사오심을 받고 사랑의 강권하심으로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계시록을 알 수 없다. 요한이 계시록을 쓴 것은 주후 95(혹은 96)으로서 도미티안(Domitian)이 로마의 가이사였을 때였다. 요한은 열두 사도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죽은 사도로서 사도 시대의 교회는 요한에서 끝이 났다. 요한은 이 일곱 편지를 예언으로 썼다. 오늘 우리는 이 일곱 편지가 예언이었음을 깨닫지만 그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고 있다. 요한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우리는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다.
이제 이 일곱 서신에 나타난 일곱 교회를 하나하나 보기로 하자.

 

(1~4장 중략)

 

5 ,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 요한계시록 2 18~29 -


이제 우리는 계속 두아디라 교회를 보기로 한다. 여기에서 특별히 말해 둘 것은 사도 시대의 교회가 지나간 후 에베소 교회가 출현했으며, 에베소 교회 후에는 서머나 교회가 출현했고, 서머나 교회가 지나간 후 버가모 교회가 출현했으며, 버가모 교회가 지난 후 두아디라 교회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사도 시대의 교회가 지나고, 에베소 시대가 지나고, 환난의 시대가 지나고, 버가모 시대가 지나고, 이어 두아디라 교회가 계속된다.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교회이다. 그뿐 아니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도 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교회이다


앞의 세 교회에서는 다 주님의 재림을 언급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문자상으로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후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뒤의 네 교회는 다 주님의 재림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성경 가운데서 우리가 보는 ‘칠’이라는 수는 완전한 수이다. 칠은 ‘삼’에 ‘사’를 더해서 된 수이다‘삼’은 하나님의 수로서, 하나님 자신이 삼이일(三而一)이시다. ‘사’는 하나님의 창조, 곧 세상의 수로서 사방, 사풍, 사계절 등이 다 ‘사’에 포함되는 것이다‘칠’은 창조자와 피조물을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완전’은 세상에 속한 것이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칠’을 내놓지 않는다. 영원한 세계에서의 완전 수는 곧 ‘십이’이다. ‘를 더한 것이고십이를 곱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더함은 이 세상에서 완전함이요, 창조자와 피조물의 연합은 영원한 완전을 이룬다,)        


칠은 삼과 사를 합한 것이다. 입곱교회는 곧 앞의 세 교회와 뒤의 네 교회이다. 세 교회에서는 주님의 재림을 말하지 않았고, 네 교회에서는 주님의 재림을 말했다. 세 교회가 한 무리이며, 네 교회가 한 무리이다.


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남아 있는 네 교회중 첫째는 두아디라 교회이다‘두아디라’는 ‘향기로운 제사’라는 뜻으로서 곧 여러 제사로서 충만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더욱 중요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그 눈이 불꽃 같다’( 2:18) 고 하셨다. 그 무엇도 그분의 눈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그분은 걷 빛이시므로 그분 자신이 비추는 것이다. 또한 그분은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주석(구리)은 성경에서 심판의 뜻을 갖고 있다.


로마 천주교인 ‘두아디라’


눈은 보는 것이요발은 심판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두아디라 교회를 로마 천주교라고 말한다. 이것은 처음에 세상과 연합한 결과로 산출된 혼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갔다. 지금의 상황은 더 심각하게 되어 이제는 이단과 제사가 충만하게 되었다. 로마 천주교가 얼마나 그들의 행위와 제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다. 미사가 곧 그들의 제사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 천주교는 그 무엇도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라고 하신다( 2:19). 주님은 로마 천주교 안의 실제를 인정하신다. 마담 귀용(Madame Guyon), 타울러(Tauler), 훼네론(Fenelon)은 다 로마 천주교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또 허다한 이름들을 들 수 있다. 로마 천주교 안에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결코 로마 천주교 안에 구원 받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여전히 그곳에서 그분 자신의 백성을 갖고 계시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올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주의해야 할 것은 교화 어떠한 상태로까지 황폐되었는가 하는 표면상의 것이다. 우리는 먼저 니골라당의 행위를 보았고, 후에 그것이 교훈으로 변한 것을 보게 되었다. 지금 교회는 어떠한가? 주님은 여기에서 말씀하시기를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20) 라고 하셨다.


이세벨은 누구인가?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로서 시돈 이방인의 땅에서 취하여 온 사람이었다. 이세벨은 백성을 유인하여 바알을 섬기게 했다(왕상 16:30~32). 바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요 이방인의 신이었다. 그녀는 사람들로 바알의 상 앞에 가서 경배하게 했다.


이제 문제는 다만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치된 것이다. 유대국의 역사가 열왕기상 16장까지 계속되어 오는 동안 누구도 아합처럼 유대(이스라엘)사람을 이끌어 범죄케 하지는 않았다. 아합은 백성을 대규모로 이끌어 이방 싱에게 경배케 한 첫 번째 사람인 것이다. 그가 범한 죄는 여로보암보다 더한 것이다.  


이세벨의 예표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세벨이 누구냐는 것이다
이세벨은 한 여자이다. 계시록 17장의 여자는 바로 로마 천주교를 지적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의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은 여자 역시 로마 천주교다. 자연히 여기에서의 이 여자도 로마 천주교를 대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의 결혼을 합당한 것으로 승인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간음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이세벨은 왕후가 아니요 아합과 이세벨은 간음을 행한 것이다. 간음은 곧 혼란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여기의 이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란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혼란시킨 것이다. 이 여자는 이방신을 가지고 들어왔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간음을 범한 결과는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 신약에서, 예루살렘에서의 회의를 열었을 때 그 회의의 결과는 곧 이방의 형제들을 권면하여 우상의 제물과 간음을 금하라고 한 것이다.( 15:29).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세벨의 간음은 우상을 이스라엘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합은 이세벨로 말미암아 세상과 연합했다. 어떤 곳에서든지 로마 천주교는 정권과 연합되어 있고, 그들은  각 국에 대사(大使)와 공사(公使)를 보낸다. 세상의 중요한 위기 때마다 로마 천주교가 일어나 말한다. 교회와 세상이 연합된 것이 바로 로마 천주교이다. 그들은 제 1 대 교황이 베드로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베드로는“나는 일개 빈궁한 나사렛 예수의 제자다. 이 세상의 영화는 내게 무관하다.”고 말했을 것 같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세상에서 지위가 있으며 사람들의 공경을 받고 있다


로마 천주교가 천여 년 동안 내려온 상태는 야고보서 4 4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큰음란인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정결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많은 교우가 있어 그 사람과 타협한다. 교회가 타협하게 되면 사람이 보기에는 진보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세상이 얻은 것을 교회가 얻은 것은 바로 죄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결과는 우상 숭배였다. 사실이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이 로마 천주교처럼 우상이 많은 곳은 없다. 최고 등급의 우상들은 로마 천주교가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내가 로마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계속해서 느낀 한 가지는 만일 그들이 교회라면 우리가 교회가 아니고 , 우리가 교회라면 그들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둘이 합쳐질 수 있는 중간 지점이란 없다.


가장 주목 할만한 것은 성경에 예언한 일들을 그들이 다 행했다는 것이다. 아버자 상()이 있고, 아들 상이 있고, 사도 상이 있고, 옛 성인의 상이 있다. 그드른 마리아에게 경배하고 베드로에게 경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세벨이 주님의 종을 가르쳐 간음을 행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세벨은 곧 교회가 이방의 신을 가지고 들어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펨버(G. H. Pember)의 저서인 ‘신비(Mystery)’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방의 신을 가지고 들어와 그것들을 기독교의 패에 걸어 놓았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마리아상이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기독교 자체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하다. 희랍에 여신이 있고, 인도에 여신이 있고, 이집트(애굽)에 여신이 있고, 중국에 여신이 있고, 온 세계의 종교에 다 하나의 여신이 있으나 기독교에만은 없다. 어쨌든 여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마리아를 가져온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에는 여신이 없지만 이교도들에게서 그러한 여신 사상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간음에 우상을 더한 것이다.


그녀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길 원했기 때문에 자칭 선지자라고 했다교회는 원래 주님 앝에서 여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교회가 가르칠 권리를 가질 때마다 그것이 곧 이세벨이다. 교회는 할 말이 없으며 바꿔 말해서 교회는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곧 말씀이므로 오직 그분만이 말씀을 갖고 계신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므로 오직 그분만이 말씀하실 수 있다. 교회가 말할 때마다, 그것은 곧 그여자의 가르침이다


로마 천주교는 곧 여자의 가르침이다. 로마 천주교는 “성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지않고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가장 기이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세벨이 선지자 노릇하며 여자가 말한다고 하신 것이다. ‘내 종’이란 개별적인 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세벨은 모든 믿는 이를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로마 천주교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할까봐 성경을 읽지 않는다. 오직 신부만이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그들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로마 천주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바를 결정하는 여자의 가르침이다. 많은 교리를 다 고치고 교회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사람으로 교회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게 한다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사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지않고 교회와 교황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상 로마 제국의 핍박이 있었을 뿐 아니라 로마 천주교의 핍박이 있었다. 로마 천주교가 스페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른다. 그들이 심문할 때에 사용한 형벌은 참으로 잔인 무도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호흡만 남은 상태까지 괴롭힌 다음 정부에 넘겨주어 그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였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사람들로 그들의 겨리를 받아들이게하는 것이었다


유대(이스라엘)에서 오직 한 여자만이 선지자를 죽였으니 그녀가 곧 이세벨이다. 지난 몇 세기동안 얼마나 많은 증인들이 로마 천주교의 손에 죽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들의 규정이 다 옳으며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그들 수중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두아디라의 실패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그들 가운데 용납한 것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1). 그들은 여전히 세상과 연합했고 세상의 행위가 충만했다. 볼지어다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2:22). 그것은 관이 아닌 침상이다. 관 속에 있는 것은 끝난 것이지만 침상에 있는 것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 뜻은 그녀가 일생동안 다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환자가 낫지 않는 한 고쳐질 수 없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된 것이 곧 로마 천주교다.


1926년에 뭇솔리니(Mussolini)와 교황이 협약을 맺은 후 바티칸(Vatican)은 이탈리아에서 분리해 나와 독립국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법정과 경찰도 있었다. 그곳의 로마 천주교 신도는 해마다 더욱 증가되얶다. 그때 중국의 개신교에서 발간하는 신믄은 하나도 없었지만 로마 천주교에는 있었다. 사람수도 개신교보다 삼사 배나 더 많았다. 우리는 계시록 17장에서 이 교회가 어느 정도로 발달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도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 가운데서 나오라고 하신다. 주님은, 그로 더불어 음행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가운데 던지고 또 사망으로 그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2:22~23)- 이 몇 마디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무리들로 말미암아 로마 천주교를 진멸 시키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23).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자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24~25).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비록 이세벨이 있으나 그 외에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할 때 엘리야는 그것을 듣고 낙심했다.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숨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그가 원망할 때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라고 하셨다.(왕상 19:9~18). 이것이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자들’이다.


이세벨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엘리야도 있었고, 로마 천주교가 있을 때 그 안에 주님께 속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에서도 주님을 위해 불에 타 순교한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로마 천주교 안에서 피를 흘렸다. 이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로마 천주교는 여전히 가능한 한 최대의 핍박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그래도 “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 가 있는 것이다.


‘깊은 것’이라는 글자는 헬라어로는 ‘Bathea’이며 그 뜻은 곧 ‘비밀’이다. 이 글자는 로마 천주교가 가장 즐겨 쓰는 글자이다. 그들 안에는 많은 비밀, 혹은 깊은 교리라 하는 것이 있다. 이런 교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요, 이세벨의 말이다. 주님은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시고, 오직 그들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아 지키라고 하셨다“너희들이 아는 ‘나의 도리’를 지키는 것으로 족하다. 이미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26~27). 이것이 첫 번째로 주신 약속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양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모두 다 지팡이가 있어 양이 잘못할 때에는 지팡이로 가볍게 친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라고 말씀하셨다.(41). 그러나 이것은 천년왕국에 열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기에 이것은 여전히 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철장으로 산산히 깨뜨리신다.


하나님이 생산하시는 것은 돌이요, 사람이 생산하는 것은 벽돌이다. 벽돌은 돌과 비슷하다. 바벨탑은 벽돌로 쌓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으로부터 디모데후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모방하는 모든 것을 ‘질그릇’이라 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열국을 목양하고 그들의 질그릇을 깨뜨린다고 하셨다.


‘다스린다’는 것은 원문으로는 ‘목양’이다. 목양이라는 글자는 단번에 다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가 생길 때마다 한 번 살펴보고 한 번 치고 또 한 번 살펴보고 또 한 번 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새 하늘과 새 따에 이르기 까지 계속될 것이다. 왕국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직전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오직 의만이 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철장으로 그들을 목양하여 그들에게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을 다 분쇄한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2:28). 이것은 두 번째 주신 약속이다. 새벽별은 곧 우리가 말하는 계명성이다. 이것은 날이 캄캄하다가 밝아오는 때 잠깐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 후에는 해가 뜬다. 많은 사람이 해를 보게 되지만 계명성을 보는 사람은 적다. 어느날 주님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말라기 4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로운 해는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모든 이가 빛을 보기전에 어떤 이는 잠깐동안 어둠 속에서 그것을 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벽별을 얻는 것이다


날이 아직 새지 않은 때, 그 시간은 정말 어둡다. 그러나 바로 그때 새벽별이 나타난다. 주님이 약속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흑암이 가장 짙을 때 새벽별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그 뜻은 바로 주님을 보고 들림받으리라는 것이다. 해를 보는 때는 낮이다. 그러나 새벽별을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일어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이다.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3:29). 주님은 로마 천주교에 대해 말씀하실 뿐 아니라 모든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나간 세 서신에서도 이기는 자를 부를 때 모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으나, 먼저 귀 있는 자”를 말씀하시고 그 후에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로부터 이 순서가 뒤바뀌어졌다. 이것은 앞의 세 교회가 한 무리이고 뒤의 네 교회가 한 무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무리 가운데 한 가지 동일하지 않은 점이 있다. 종전에는 에베소 교회의 역사가 지나간 후 서머나 교회가 출현했고, 서머나 교회가 지나간 후 버가모 교회가 출현했고, 버가모 교회가 지나간 후 두아디라 교회가 출현했다그러나 두이라 교회가 지나가지 않은 채 사데 교회가 출현한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된다.


사데 교회가 지나가지 않은채 빌라델비아 교회가 출현하며,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나가지 않은 채 라오디게아 교회가 출현한다. 사데가 여전히 있을 때 빌라델비아가 출현하고 빌라델비아가 여전히 있을 때 라오디게아 교회가 출현한다.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는 다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앞의 셋은 다 왔다가 지나간 것이지만, 뒤의 넷은 차츰 나타나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함께 나아간다.     


    

6 , 사데 교회

 

사데 교회        요한계시록 3 1~6 -


우리는 사도 시대에 니골라당의 행위가 있음을 보았고, 또 니골라당의 행위가 있은 후 버가모가 큰 죄를 지어 세상이 교회 안에 흘러 들어온 것을 보았다. 이어서 니골라당 후에 이세벨이 잇었고 그때 우상을 교회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한가지 좋은 점이 잇으니 그것은 두아디라에 이세벨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심판은 그녀를 침상에 던져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어느 날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계시록 17장의 바벨론이 무너질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두아디라의 역사는 이세벨이 우상을 교회로 가지고 옴으로부터 시작하여 심판을 받는 데까지 이른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니골라당으로부터 이세벨의 때까지 계속 하락하고 있어, 하나님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부터 사데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사데’ 는 곧 ‘남은 수’ 이다. 사데, 이 교회는 곧 두아디라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부흥의 역사를 시작 하실 때, 하나님은 거기에서 반응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반응은 곧 사람의 회복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원칙을 기억하기 원한다. 주님께서 두아디라의 상황을 보셨으므로 사데가 온 것이다.


두아디라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계시록에는 서로 대응하는 몇 교회가 있다. 사데는 에베소와 관련되고, 빌라델비아는 서머나와, 라오디게아는 버가모와 관련된다. 오직 두아디라만이 단독이다주님은 사데에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다. ( 3:1)에베소에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은 이’ 라고 하셧고, 사데에서는 ‘일곱 별을 가진 이’ 라고 하셨다.


에베소는 사도 시대 후에 느슨해져서 좋은 것이 나쁘게 변한 것이고,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회복되어 나쁜 것이 좋게 된 것이다. 행위는 있으나 사랑이 없는 것이 에베소이고, 이름은 살았으나 실제는 죽은 것이 사데이다. 이러므로 이 두가지는 서로 대응하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에서 자신을 일곱 영을 가진 분으로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일곱 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어 역사하는 영으로서 그 역사는 곧 생명의 역사를 가리킨다일곱 은 에베소에 있는 사자를 지칭하며 빛을 가리키는 말이다그러므로 부흥의 역사의 절반은 영에 있고 절반은 빛에 있는 것이다.    


사데와 두아디라는 다 개신교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의 긴 시간을 포함한다. 사데는 두아디라와 같이 길지는 않다. 그러나 사데는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와 종교 개혁 이후 교회의 역사를 포함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주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박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내가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1~3).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의심하거나 종교 개혁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교 개혁은 실로 위대한 역사요,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하나님은 확실히 루터를 들어 쓰셨는데, 그는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었다. 루터가 일어난 때가 곧 사데이다. 그의 목적은 전적으로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루터의 역사가 나쁘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다. 좋기는 하나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다


주님의 눈에 그것은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것을 요구하신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눈을 열어 주시기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루터 이후로부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강을 얻게 된 것이다. 루터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볼 수 있도록 열어 주었다. 두아디라에서는 권위가 이세벨의 수중에, 바꿔 말해서 천주교에 있었다문제는 “주님이 말씀하신다.”라고 하지 않고 “교회는 이렇게 말하는 바이다.”라고 한 것이다.


모든 문제를 모회(母會)에서 정한 바라 했고 로마 천주교 사람은 모두 모회의 말을 듣는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자녀’를 사망으로 죽이리라고 하신다. 그들은 모친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자녀라고 하신다. 루터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로마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이 다름을 그 사람 스스로 알 수 있다. 성경이 열려졌을 때 모든 교회는 밝아졌다.


종교 개혁의 한계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개신교가 우리에게 합당한 교회를 보여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와 공개된 성경은 가는 곳마다 국립 교회를 세웠을 뿐이다. 루터파는 허다한 나라에서 국립 교회를 세웠고, 후에 영국에서도 성공회(Anglican Church)가 있었으니 이것 역시 국립 교회인 것이다. 로마로부터 교회의 성질은 변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열린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개신교는 아직 교회가 어떠해야 함을 보지 못했다.


종교 개혁 당시에도 교회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루터는 교회를 개혁한 것이 아니다. 루터 자신도 말하기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그치지 말고 많은 것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루터는 멈추지 않았으나 그들은 거기에서 멈췄고 이갓으로 충분 하다고 말했다. 신앙은 초대로 돌아갔으나 교회는 조금도 고쳐지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로마(세계적)교회가 이제는 영국의 국립 교회로 변하고, 독일의 국립 교회로 변했을 뿐이다.


당신은 보았는가? 종교 개혁은 교회를 초대 교회의 상태로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세계 교회를 국립 교회로 변하게 했을 뿐이다. 두아디라는 교회를 세상에 집어 넣어 정죄를 받았고, 사데는 교회를 국가에 집어 넣어 똑같이 이 정죄를 받은 것이다‘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이다. 종교 개혁은 살았으나 많은 것들이 여전히 죽어 있다.


그 후 장로교 등과 같은 많은 ‘교파’가 발생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면으로는 로마 천주교를 볼 수 있고 한 면으로는 개신교를 볼 수 있다. 개신교 안에서는 국가에 따라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의견과 교리의 차이에 따라 교회를 세웠다. 국가의 한계가 아닌 교리의 한계에 기준을 두고 세운 모든 것이 바로 교파이다. 개신교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으니 그 한 종류는 국립 교회요, 또 한 종류는 사립 교회이다.


여러분은 오늘 영국, 독일 등에서 완전히 국가(정치)와 교회가 연합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마에는 세계 교회가 있으나 영국, 독일 등에는 국립 교회가 있다. 여기에서 국가의 왕과 수장은 교황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들로 자기 말을 듣게 하며 정치에서 왕 노릇할 뿐 아니라, 종교에서도 왕 노릇하므로 국립 교회가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국립 교회가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를 보지 않았다.


그 후 사립 교회가 발생했다. 사립 교회의 설립은 하나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교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뉘어 나오게 된 것이다. 침례를 깨달아 침례교를 세우고, 교회의 장로 제도를 깨달아 장로 교회를 세웠다. 교회의 진리를 깨달아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 두 종류의 개신교는 국립적, 혹은 사립적인 것에 불과했으므로 주님께서는 그 둘이 다 처음으의 뜻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주게 된 것을 굳게 하라( 3:2).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공개된 성경으로부터 얻은 생명을 말한 것이다. 사데의 전 역사 가운데 이러한 것들이 약하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남은 바 죽게된 것을 굳게 하라” 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 이미 성경이 열려졌지만 여전히 사람의 교리가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다네가 가진 것은 온전치 못하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개신교의 역사는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아니다! 개신교의 역사는 부흥의 역사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루터가 일어난 때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부흥된 것은 하나의 커다란 회복이다.


개신교의 한 가지 큰 특징은 곧 ‘회복’이다성령은 어디까지 역사하실지 모른다. 루터가 종교를 개혁하여 루터교가 나왔다. 장로의 진리를 보고 장로교 조직이 일어났다. 웨슬레가 나옴으로써 감리교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세계에는 많은 교파가 있어 1914년에는 천오백여 교파가 있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사데가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때 사람은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 하나님의 축복을 담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축복이 그 정도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하나의 컵과 같다. 사람들은 이곳에 부흥이 일어나 생수가 있으면 이곳으로 오고, 또 하나님의 영이 저곳에서 운행하면  저곳으로 간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하나의 컵을 이용하여 생수가 흘러가지 않도록 지키려는 것이다. 은혜를 지키려는 것은 좋지만 오직 한 컵의 은혜밖에는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1 대에는 충만하다. 2 대에서는 반만 남는다. 3 ,  5 대에 이르면 물은 없어지고 빈 컵만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종파끼리 누구의 컵이 좋은가로 다투기 시작하지만 모든 컵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또 하나의 반응을 하시게 되고 이것이 또 하나의 사데인 것이다.


회복의 역사


부흥의 역사는 모두 이와 같다하나님의 은혜가 올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킬 하나의조직을 설립한다. 결국 단체는 존재하게 되지만 그 내용은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 잔은 깨지지 않는다. 열심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 잔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원칙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웨슬레의 제자는 영원히 웨슬레를 따르지 못하며 칼빈의 제자도 영원히 칼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선지자 학교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 대선지자는 모두 하나님의 광야에서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임재하고 싶은 사라에게 임재한다. 교회의 머리는 그분이요 우리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그 생수의 고귀한 것을 생각하고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여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갈수록 말라 없어지게 된다. 말라 없어진 후 하나님은 광야에서 생수를 주시는 것이다.개신교의 모든 역사는 사데로 대표된다. 회복한 후 또 다시 회복하는, 모든 역사는 회복의 역사이다.


한면으로 회복이 있는 것을 주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또 한면으로 이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는 것이다. 개신교는 계속 회복이 있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기때문에 주님이 불완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이켜 처음을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듣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느냐에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교통)하며 떡을 떼며 기도했다고 말한다.(42). 이것은 사도들이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을 계속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곧 사도들과의 교통이요 그리스도의진리가 곧 사도들의 진리이다. 오직 사도들과의 교통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통이요 사도들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그 외의 교통을 만들어 낼 수 없고 그 외의 진리도 만들 수 없다. 두아디라의 잘못된 점은 바로 자기 자신이 가르침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세벨이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에게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20세기에 와서 무엇이든지 다 발명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가르침만은 발명해 낼 수 없다


영 안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가르침을 발명해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살펴보고, 굳게 지키고 동시에 회개해야 한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3). ‘임한다’는 글자는 강림의 ‘임()’ 이다‘이르리니’ 는 헬라어로는 Epi 이다. 이것은 곧 내가 네 몸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네 곁에 이른다는 것이다곧 네 밖에 이른다는 것이다‘도적같이 이르리니’는 곧 Epi’ 의 뜻을 갖는다. 우리가 여기 있을 때 그는 우리 옆을 지나가 버리신다. 주님은 이 글자를 참 기묘하게 쓰셨다. 이것은 “내가 너를 지나쳐도 너는 알지 못하리라”로 번역되는 것이다.


도적은 와서 천한 물건은 가져가지 않고 언제나 좋은 물건만 가져간다. 주님도 이땅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 가신다. 가장 좋은 이것은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지 주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집에 있어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깨어있지 않으면 내가 너를 도적같이 지나간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주 예수님이 빨리 재림하실 것을 느끼며 그 날이 이제 가까왔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데려감’을 당하기를 귀히 여기고 이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3:4).


야곱의 혈속은 모두 칠십 인이었다.( 1:5). 보통 성경은 매우 많은 사람, 많은 혼을 말한다. 그러나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몇 명”의 이름이다. 주님은 특별히 우리의 이름을 주의 하신다. 주님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옷은 곧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는 그리스도가 우라의 흰 옷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그리스도 앞에, 곧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 14:10).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 19장에서 말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된다. 빛나고 깨끗한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여기에서의 ‘옳음()’ 은 헬라어로 ‘다수(多數)’ 의 의미를 갖고 있다.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으니 그들의 행위는 깨끗하다. 그들은 주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합당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5). 이것은 이름을 기록하느냐 기록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분깃이 있고 주님이 인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깃이 없다.


이름은 다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나 주님이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따로 표시해 놓아 분깃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영생의 문제가 아니요, 주님과 함께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기록되어 있으나 분깃이 없는 이것이야말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주님 앞에서 흰옷을 입게 하시기를 구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흰옷을 입었지만 주님 앞에서도 흰옷을 입었는가?          


             

 

 

7 ,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3:7-13, 23:8-11, 20:17, 고전12:13, 3:28


여기에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계통표를 그려 놓았다. 제일 첫 단계는 사도 시대의 교회를 대표한다. 에베소는 이미 느슨해진 교회이지만, 에베소 교회가 사도 시대의 교회를 이어 온 것임을 주님께서 승인하시므로 여전히 같은 선 위에 있다. 그리고 서머나가 와서 다시 이어 갔다. 서머나는 참으로 고난을 받은 교회였다. 칭찬도 없고 책망도 없다. 서머나 이후 발생한 한 가지 사건은 버가모가 온 것이다.버가모는 사도 시대의 정통을 이어가지 않고 세상과 연합하여 곁길로 갔다.


그는 서머나 교회에 이어 내려왔지만 사도 시대 교회의 정통을 계속한 것은 아니다. 버가모로부터 커다란 전환이 있은 후 두아디라가 버가모에 이어 내려왔다. 그는 사도 시대와 같은 직선이 되지 않고 버가모와 일직선이 되었다. 사데는 두아디아로 부터 나와 전환했다. 그러나 그의 전환은 회복의 전환이었다. 두아디라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고, 사데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된다.


사도 시대 정통으로의 전환


이제 제기되는 것은 빌라델비아로써, 빌라델비아는 사도 시대의 정통으로 전환한 교회이다. 빌라델비아의 전환은 성경에 나타난 처음의 위치로 전환한 것이다. 회복의 전환은 사데에서 시작하여 빌라델비아에서 완성되었다. 이제는 사도 시대와 같은 직선이 이루어진다.빌라델비아는 사도 시대 교회의 계속이다. 이후의 라오디게아는 읽을 때 다시 보기로 한다. 이제 우리는 시간을 좀 들여서라도 무엇이 빌라델비아인지 보기로 하자. 빌라델비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기를 원한다.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은 책망이 있고 둘은 책망이 없다. 책망 받지 않은 두 교회 중 하나는 서머나요, 하나는 빌라델비아이다. 오직 이 두 교회만이 주님의 눈에 든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주님이 빌라델비아에 하신 말씀이 서머나에 하신 말씀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서머나의 고난이 유대교였고 빌라델비아에도 유대교가 있다서머나 교회에서는 주님이 ‘시험을 받게 하리니’ 라 하셨고, 빌라델비아에서는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  라고 말씀하셨다.( 3:10).


주님은 이 두 교회에게만 면류관을 말씀하셨으니, 서머나에게는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 하셨고, 빌라델비아에게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았지 못하게 하라” 고 하신 것이다이 두 교회에는 두 가지 공통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같은 직선-사도시대 교회의 정통적 선상-에 있는 것이다. 사데 교회도 하나의 회복이었지만 불완전하고 미흡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의 회복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회복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가 서머나 교회처럼 책망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칭찬도 받은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곧은 직선은 하나의 선택받은 선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선택하신 것은 빌라델비아라는 것이다. 빌라델비아는 서머나의 회복에서 시작하여 사도 시대의 정통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지키고 순종하라는 것이다.


버가모와 두아디라의 전환이 너무 컸기 때문에 비록 사데가 훌륭하게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복은 완전치 못했다. 비록 회복의 길은 길었지만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빌라델비아는 완전한 회복이다. 이것을 우리는 완전히 알기 바란다.


‘빌라델비아’는 헬라어 두 글자를 합한 것으로 그 한 글자의 뜻은 ‘서로 사랑함’ 이고 또 한 글자의 뜻은 ‘형제’ 로서, 곧 ‘형제를 서로 사랑함’ 이라는 뜻이다. ‘형제를 서로 사랑함’ 은 곧 하나님의 예언이다.


제사는 두아디라의 특징이며 로마 천주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회복은 사데의 특징이며 개신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의 완전한 회복이 있을 때 비로서 주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은 사람은 물을 것이다. “이것이 도데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는 역사상 어디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는가?” 이것은 가볍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미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서 니골라당의 행위와 니골라당의 교훈을 언급한 바 있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제사장 계급을 대표했는가도 지적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레위 지파만이 제사장이 될 수있었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다 제사장이다. 베드로전서 2장과 요한계시록 5장에서 분명히 피로 사온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니골라당은 특별히 제사장 직분을 만들어 냈다. 평신도는 세상에 가서 직업을 갖고 세상의 일을 하고, 평신도 위의 사람은 와서 제사장 노릇을 하며 영적인 일을 관리하는 것이다.여기에서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이 중간 계급이다


유대인에게는 유대교가 있었고 니골라당은 행위로부터 교훈에 이르렀다. 신부 계급을 볼때 그것은 바로 영적인 일은 그들이 하고 세상 일은 우리가 하도록 한 것이다. 안수는 그들의 일로서, 그들만이 축복을 할 수 있다. 나 스스로는 어떤 일을 묻지 못하고 그들에게 부탁하여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사데에 와서 상태는 향상되었다. 신부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성직 제도가 생겨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개신교에는 매우 엄격한 국립 교회와 산만한 사립 교회가 있다. 그러나 당신은 국립, 사립을 무론하고 그들 가운데 중간 계급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전자는 성직 제도요 후자는 목사 제도이다. 이러한 일종의 제사장 계급의 제도는 그를 신부라고 칭하든지, 성직자라고 칭하든지, 혹은 목사라고 칭하든지 간에 다 주님께 거절 당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버가모의 니골라당의 교훈을 변용하여 계속한 것이다. 비록 개신교 내에 신부라 칭하는 사람은 없지만 성직자와 목사는 원칙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사역자(Worker)라고 고쳐 불러도 여전히 그러한 위치에 선 것이고 동일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나는 이미 많은 성경의 근거를 들어 우리가 다 제사장임을 말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다툼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다 제사장 노릇을 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왜 영적 권위가 신부와 같은 한 무리의 중간 계급의 수중에만 있다고 말하는가? 다시 또 말하거니와 피로 구속받은 사람은 다 제사장이다. 피로 구속받은 사람의 수가 곧 제사장의 수이다.


왜 주님은 빌라델비아를 책망하시지 않고 칭찬하시는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계급의 시작이 버가모에 있었고 실행이 로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관리하는 교황이 있고 그들을 다스리는 대신과 바티칸의 고관 등등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너희들은 다 형제니라’ 고 말씀하신다( 23:8). 우리는 마태복음 20 26절과 23 8절을 주의해야 한다. 성경에 ‘목사’ 는 있으나 목사 제도는 없다. 또한 이 글자의 원문은  ‘목자’ 라는 뜻으로서 ‘목동’ 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선생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도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23:9-10). 그러나 우리는 로마 천주교에서 신부의 ‘아버지’ 와 개신교에서 목사의 ‘선생()’ 을 볼 수 있다. 19세기에 하나의 대부흥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가운데서 형제를 서로 사랑하고 중간 계급을 없앤 것이다. 이것이 빌라델비아이다.


형제회(The Brethren)의 형성   


1825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몇 성도들은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 어떤 교파를 막론하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했다. 이 사랑은 교파의 담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사람이 분열시켜 여러 갛래고 나누었으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성경을 읽으면서 한 사람이 집회를 주관하는 제도나 한 사람이 설교를 하는 제도는 성경에 합당치 못한 것임을 벌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에 주일마다 집회하고 떡을 떼며 기도했다.


1825, 곧 천 여 년의 로마 교회와 몇 백 년의 개신교 이후, 제일 처음으로 회복된 것은 성경에 나타난 단순하고 자유롭고 영적인 예배였다.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사람이 불과 두 명에 지나지 않았고 후에도 사오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성도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비천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셨고 성령의 안위가 있었다. 그들은 두가지의 분명한 진리의 입장에 서 있었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오직 하나라는 것이다. 둘째, 신약 성경 안에는 성직 계급이 없으며 사람이 말씀의 사역자를 세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온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이 어떤 교파에 속했든지 따뜻하게 환영했고 그들에게서는 나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다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자유롭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승천하신 주님이 각종 은사를 교회에 주신것은 성도릉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직 계급의 두가지 죄-제사와 설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형제회의 발전 


그들은 이 원칙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형제로서 환영했고, 동시에 성령이 세우신 모든 말씀의 사역자들에게도 이 원칙을 열어주어 봉사하게 하였다. 이때 성공회의 성직자인 다비(John Nelson Darby)는 비록 그가 성직 제복을 입고 있었으나, 자기 교회의 위치가 성경에 합당치 못함을 인정했으므로 항상 ‘형제들(the brothers)’ 과 함께 모이고 있었다. 다비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요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다비는 능력있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고난을 달게 받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알고, 육체를 심판하는 영적인 사람이었다. 1827년에 그는 정식으로 성공회를 벗어나 성직자의 제복을 벗고 한명의 단순한 형제로써 다른 ‘형제들’ 과 함께 모였다. 본래부터 있던 ‘형제들’ 이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다비가 정식으로 그들 가운데 들어오면서부터 하늘의 빛이 홍수같이 쏟아져 내려왔다.


여러면에서 다비의 역사는 웨슬레와 유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회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일세기 앞의 웨슬레에게는 이 국립 교회를 담대히 벗어나려는 느낌이 없었고, 일세기 후의 다비에게는 계속 성공회에 있을 수 없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심과 전심을 다함과 충성심은 둘에게 공통된 점이었다.


그 해에 벨렛(J. G. Bellet)도 와서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도 깊고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 단순하고 성경적인 집회에서 크게 감동을 받고 아래와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한 형제가 내게 말하기를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함께 모인 성도들은 주님의 명령을 좇아 자유롭게 떡을 뗐다. 또 사도의 본을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주님이 떠나실 때 주신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마땅히 매 주일을 분별해야 한다.’ 고 했다.


벨렛은 또 말했다.
“언젠가 내가 한 형제와 같이 길을 갈 때 그 형제가 내게 말하기를‘내가 믿는 바로는 주님의 우리에 대한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제자의 자격으로 모이며 어떤 설교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우리 전부를 온전케 하시기를 의지하고 성령이 임의로 우리 중의 누구든 선택하여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가 이 몇마디 말을 할 때 내마음은 빛을 보았다.그 날은 내 생일과 같은 날이었고 형제가 된 첫날이었다.” 형제들은 이렇게 점차 모이게 되고, 점차 계시를 얻고, 점차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일 년이 지나 1828년에 다비는 ‘교회의 성격과 합일(The Nature and Unity of the Church of Christ) 이라는 한 권의 소책자를 출간했다. 이 한권의 책은 ‘형제들’ 이 출간한 수천 권의 책중에서 첫 번째 책이었다. 다비는 이 책에서, ‘형제들’ 에게는 어떤 새로운 교파나 교회 연합회를 설립하려는 의사가 없음을 표명했다.


그는 말했다첫째로, 분열된 단체들의 형식적인 연합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연합을 모색하는 개신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바로는 이러한 연합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게 연합한 단체는 결코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로마의 연합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단체 안에서는 교회 생활과 말씀의 능력이 완전히 상실된다. 더욱이 영적 생명의 합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진실한 합일은 오직 성령의 합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야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의 완전한 근거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포함하지 않고서 완전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집회는 없다. 왜냐하면 이 집회는 이 축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 집회의 성질은 이 축복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함께 모인 곳에 축복을 위한 그분의 이름은 거기에 기록된다.
 
나아가서 합일은 교회의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익을 취하고 증진시키는 합일은 교회의 합일이 아니며 교회의 본질과희망을 부인하는 일종의 연합에 불과할 뿐이다.교회의 합일은 곧 성령의 합일이다. 이 합일은 성령안에서만 되는 것이므로 오직 영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완전케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을 기다리고, 성령의 교훈을 따라 기다리며, 성령의 생명을 따라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 만일 그들이 선한 목자가 어디에서 양떼를 치는지 안다면 그들로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게하라. 


또 다른 곳에서 다비는 말했다.  우리의 상(table)은 주님의 상이요 우리의 상이 아니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모든 자, 곧 곤고한 죄인, 도피하여 주님을 찾아와 피난처로 삼는 자, 자기 속에 안식을 갖지 못하는 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식을 얻는 자를 받아야 한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영국의 가이아나(Guiana)와 이탈리아에서 동시에 역사하시어 동시에 똑같은 모임이 일어났다. 1829년에 아라비아에서 또 모임이 있었다. 1830년에는 영국의 런던, 플리머스(Plymouth), 브리스톨(Bristol)에서 다 모임이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많은 모임이 있었다. 이어서 미국의 많은 곳에서도 모임이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많은 모임이 있었다. 곧 세계 각지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러한 모임을 시작했다. 비록 표면적인 연합은 없었으나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었다.


형제회의 특징


이러한 ‘형제들’ 이 일어난 데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그들이 호칭과 직위를 버리고,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지위를 버리고, 학위가 있는 사람은 학위를 버리고, 다 같이 세상과 교회에서의 계급을 버리고 단순히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피차 형제가 되었다는 것이다‘아버지’라는 말이 로마 천주교에서 상용되고 ‘선생’ 이라는 말이 개신교에서 상용되어 온 것 처럼, 이제는 ‘형제’ 라는 말이 그들 가운데 상용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끌림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자연히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몇 십 년 동안에 하나님은 많은 은사를 그분의 교회에 주셨다.
하나님은 다비(J. N. Darby)와 벨렛(J. G. Bellet) 외에도 많은 ‘형제들’에게 특별한 사역을 주시어 그분의 교회가 공급을 받게 하셨다. 고아원을 설립한 뮬러(George Muiier)는 믿음의 기도를 회복했다. 일생동안, 그의 믿음의 기도는 백오십 만 번 응답되었다. 모세 오경을 주해한 매킨토시(C. H. Mackintosh)는 예표에 대한 인식을 회복했다. 무디(Moody)는 전세계의 책이 다 불타 버린다 해도 그에게 한 권의 성경과 모세 오경 주해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했다.


(James G. Deck)는 우리에게 좋은 찬송가를 많이 주었다커팅(George Cutting)은 구원의 확신을 회복했다. 그의 저서중의 하나인 ‘구원, 확신, 기쁨’은 1930년에 이미 삼천 만권이 팔렸으며 성경 외에 가장 판로가 큰 책이 되었다. 켈리(William Kelly)는 많은 주해를 쓴 사람이었는데, 스펄전(C. H. Spurgeon)은 켈리에 대해 “그의 생각은 우주처럼 크다”고 말했다. 그랜트(F. W. Grant)는 십 구, 이십 세기에 있어서 성경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앤더슨(Robert Anderson)은 근대에서 다니엘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트레젤스(S. P. Tregelles)는 유명한 신약 문헌 학자였다. 밀러(Andrew Miller)의 교회사는 모든 교회사 중에서 가장 성경과 일치하는 책이다. 채프만(R. C. Chapman)도 주님이 크게 쓴 사람중의 하나였다. 이들이 다 당시의 ‘형제들’ 이었다. 이 외에도 더 자세히 적는다면, 형제들 가운데 주님에 의해 위대하게 사용된 사람이 족히 천명은 될 것이다.


형제회의 공헌        


우리는 이제 그 ‘형제들’ 이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그것은 주님의 피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만족케 하는가구원의 확신이 약한 성도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열납됨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열납될 수 있는가구원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떨게 믿는가 등이었다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어떤 시대에도 복음이 그들보다 더 분명한 적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교회가 온 세상을 얻을 수 없으며, 교회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교회의 소망은 세상적인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처음에 성경에 있는 여인을 해석하여 주님의 다시 오심이 교회의 소망임을 보게 했다.


그들은 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열어 우리에게 왕국과 환란과 들림받음과 신부(新婦)를 보여 주었다.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장래 일의 불과 몇 퍼센트밖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들은 우리에게 죄의 법이 무엇인가, 해방이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이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되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을 주목함으로 매일매일 변화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또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교파의 죄악과 그리스도의 몸의 합일, 성령의 합일이었다. 또 그들이 보여준 것은 유대교와 교회의 분별이었다.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서는 이 차이가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우리에게 다시 이 분별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또 우리에게 중간 계급의 죄악을 알려주었고 하나님의 자녀는 다 제사장이요 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고린도 전서 14장의 집회의 원칙의 회복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말씀 전하는 것은 한 사람의일이 아닌 두세 사람의 일이요, 말씀을 전하는 근거는 성직 수임식에 있지 않고 성령의 은사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만알 우리가 그들이 회복한 것을 하나하나 나열한다면, 오늘날 순수한 개신교에 그들이 회복하지 않은 진리는 하나도 없고, 더 회복해야 할 진리도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팬톤(D. M. panton)은 서슴없이 말했다“ ‘형제들’의 운동과 그 중요성은 종교 개혁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이다.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 “하나님의 자녀 중에서 진리를 가장 바르게 해석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라고 말했다. 헨리 아이언 사이드(Henry Ironside)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은 형제들을 알든 모르든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다 ‘형제들’ 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운동은 종교 개혁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빌라델비아의 역사가 종교 개혁의 역사보다 더 크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 개혁이 우리에게 주지 못한 것을 빌라델비아가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교회의 문제를 ‘형제들’의 운동이 해결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도 거의 다 회복시켰다. 그러므로 이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개신교보다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형제들’ 운동이 종교 개혁보다 더 유명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종교 개혁은 칼과 창으로 이루어졌고 ‘형제들’ 운동은 전도로 이루어졌다. 종교 개혁을 위해 많은 사람이 유럽 전쟁에서 죽었다.


종교 개혁이 유명해진 다른 이유는 정치와의 관계이다. 많은 국가가 종교 개혁을 하여 정치적으로 로마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정치와 관계 없는 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어려웠다.  ‘형제들’은 두 가지를 보여 주었는데, 그 하나는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인 세계, 즉 정신 세계요, 다른 하나는 ‘형제들’ 이 말하는 이름, 곧 기독교의 세계이다. 그들은 정신 세계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개신교가 대표하는 기독교의 세계도 벗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신교를 광고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죄악의 세계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세계에서도 나온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교회이기 때문에 나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이 중시한 것은 형제요, 서로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었다. 주 예수님은 하나의 교회가 나오리니 그 이름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말씀하셨다.


교회 안에는 오직 형제만 있음 


이제 계시록을 보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3:7). 빌라델비아는 형제가 서로 사랑함이다. 하나니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무엇을 칭찬하셨는가? 그분과 그들 가운데 있는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과 중간 계급을 완전히 완전히 제해 버린 것을 칭찬하셨다.


나는 이 기회에 몇 마디 더 말하고 싶다. 교회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교회안에는 자매가 하나도 없다. 여기 우리가 앉아 있을 때 다 형제요 자매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자매들은 물을 것이다“나는 누구입니까?” 다 형제다. 왜 우리가 형제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세계에 많은 사람이 있으나 그들은 우리 형제가 아니다.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다. 주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20:17)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장의 그는 아버지의 독생자요, 20장의 그는 아버지의 맏아들이다. 1장에서 하나님에게는 오직 그 아들만이 있었지만, 20장에 와서는 그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는 자연히 맏아들이 되고, 우리는 다 형제들이 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는 맏아들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다 형제다. 남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형제가 되는 것같이 여자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형제가 된다. 여자가 여성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한 생명을 받음으로써 형제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서신은 다 형제에게 쓴 것이요 자매에게 쓴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은 자매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오직 형제만 있을 뿐이다. 그 생명으로 인해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었다. 신약 안에 있는 ‘자녀(Sons and daughter)는 다 ‘아이들(Children)’ 로 번역되어야 한다. 원문을 보면 고린도 후서 6 18절을 제외하고는 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당신은 보았는가?교회에서는 모두가 형제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언젠가 상해에 있을 때 나는 미장공인 어떤 형제에게 밀했다“가서 몇 형제를 불러오시오” 그가 물었다“남자 형제를 데려올까요, 여자 형제를 데려올까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매라 부르는 것은 개인에 대한 호칭일 뿐이요, 교회 안에 남녀의 구별은 없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자유자도 없고 종도 없다. 그가 주인이기 때문에 더 많은 생명을 받는 것도 아니요, 그가 종이기 때문에 적은 생명을 받는 것도 아니다나느 전에 어떤 형제가 내게 한 말을 기억한다“정부 관리들에게 말씀을 들려 주기 위해서는 보통 집회하는 곳은 별로 좋지 않으니 특별한 곳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느 말했다“당신은 장차 어떤 간판을 달 생각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아닌 관청 교회이다. 교회 안에는 고관이나 상류 계급이 없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형제다.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것이 영광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이런 구별이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종도 자유자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다고 했다.( 3:28). 교회는 그러한 구별 위에 선 것이 아니고 형제의 사랑 위에 선 것이다.


다른 곳과 같이 여기에서도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셨다. 여기에서 그분은“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 라고 말씀하셨다.( 3:7). 거룩함은 그분의 생명이요, 그분 자신이 곧 거룩함이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참이요 그분은 곧 하나님의 실제요, 하나님의 실제는 곧 그리스도이다. 그분의 손 안에는 열쇠가 있다. 여기에서 내가 부탁하는 것은 이 한가지를 주의하라는 것이다.


사데가 일어나 주님을 위해 간증할 때 땅에 있는 군왕들은 그를 도와 전쟁을 했다. 유럽 대륙에서 수십 년, 영국에서도 수십 년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의 운동은 어떠 했는가? 그들은 세력도 없었고, 배후에서 돕는 자도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햇다. 이것은 곧 권위를 의미한다.(성경은 다윗을 왕이라 칭했다). 이것은 무력의 문제가 아니요, 광고의 문제도 아니요, 문을 여는 문제인 것이다.


영국의 한 신문의 편집자는“나는 이렇게 많은 형제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그들이 그렇게 빨리 성장할 줄도 몰랐다.” 고 말했다. 당신이 만일 전 세계를 여행해 본다면 각처에 많은 ‘형제들’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진리를 아는데 있어서 깊은 점도 있고 얕은 점도 있지만 형제의 지위는 같은 것이다. 이런 상태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성전 건축을 위한 회복의 밑거름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3:8). 이것을 읽을 때 우리는 자연히 스룹바벨이 돌아온 이후 어느 선지자가 한 말을 기억하게 된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4:10). 여러분은 작은 일의 날을 멸시하지 말라. 이것은 곧 성전을 건축하는 날이다. 성경 안의 큰 예표는 바로 성전이다. 다윗이 왕 노릇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가 되었다. 그 후에는 나뉘어져서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나뉘어질 때 동시에 우상이 일어났고, 간음을 했고, 결국에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되었다. 누구나 바벨론으로 간 것이 곧 두아디라-로마 천주교-의 예표임을 인정하고 있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로마를 예표하기 때문에 교회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 되었던 곳에서 돌아온 후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몹시 미약하게, 한 무리씩 한 무리씩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성전을 건축했다. 그것은 ‘형제들’의 운동의 예표와 매우 유사했다. 거기에는 많은 유대인, 곧 옛 성전을 본 노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제 이 성전의 기초 세우는 것을 직접 보면서 크게 울었다. 그것은 이 성전의 영광이 솔로몬 때의 영광에 비해 너무도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 “너희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지 말라. 이것은 회복의 날이다. 주님은 여기서도 같은 말슴을 하셨다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오늘 세상에서의 교회의 간즈은 처음의 오순절과 비교 할 때 정말 작은 일의 날에 불과한 것이다.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 하였도다(3:8). 주님은 그들의 두 가지를 인정하셧는데,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은 것과 주님의 말슴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교회 역사 가운데 그 어떤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슴을 ‘형제들’같이 안 때는 없었다. 마치 큰 홍수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처럼 빛이 많았다. 내가 상해에 있을 때, 어느 날 저녁 한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자기가 배 안의 요리사라고 했다. 나는 그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보통 전도사 중에서도 그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 같앗다. 그렇다! 그들의 한 가지 특징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이었다.당신이 만일 그들 중의 한 작은 형제를 만나 본다면, 그가 많은 선교사들보다 더 명확한 것을 알고 있음을 볼 것이다.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음 


주님께서는, 네가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1825년 이후 ‘형제들’이 말하기를, 다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감리교에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 보면 그는, “나는 감리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장로교에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 보면 “나는 장로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침례교에 다니는 사람은 “나는 침례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또 성결교에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 보면 “나는 성결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외의 많은 이름을 붙여 자기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하나의 이름만으로 자기를 부른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기도하고’ , ‘내 이름으로 모이라 ( 16:26, 18:20)고 하셨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이름만을 가질 수 있다. 화이트필드(Whitefield)는 말했다. “모든 이름은 다 버려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높여지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은 일어나서 바로 이와 같이 했다.


주님의 예언과 같이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가장 존중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들의 중심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항상 이런 구절이 있었다“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분별해 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언젠가 기차안에서 만난 한 성도를 기억한다. 그는 나에게 어느 파의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나는 단지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세상에 그런 그리스도인이 어디 잇습니까‘나는 단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나는 어느 파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야 의의가 있죠.”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나는 단지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무 의의가 없습니까? 당신은 어느 종파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야 의의가 있단 말입니까? 나는 다만 그리스도인인 것에 만족할 뿐입니다.” 그 날 우리는 좋은 교제를 가졌다


당신이 보아야 할 한가지 일은,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주님의 이름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파 이름을 넣어야 하고, 기어코 주님 이름 외에 또 한 이름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우리의 태도가 완고하다고 생각지말라. 주님은 여기에서“너희가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내 느낌이 옳다면 다른 모든 이름은 다 그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배반’ 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과 똑같은 글자다나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다른 이름을 원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그리스도의 이름을 존중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 칭함받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빌라델비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형제들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달리 구별 짓는 이름이 없었다. 그들은 형제들일 뿐이요 ‘형제회 교회’ 가 아니다.


열린 문을 두심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3:8).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열린 문’ 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보통 “네가 만일 성경대로 행하면 문이 곧 닫힐 것이다. 주님께 순종하는 일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문을 닫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특별한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엇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사실이었다. 전세계의 어떤 사람들도 성경 강연으로나, 전도로나, 그들처럼 기회를 많이 가진 적은 없었다. 유럽, 미국, 아프리카에서 다 그러했다. 인간의 지지와 구호와 광고와 보조가 없어도 그들은 항상 많은 기회가 있어 일핳 수 있었고 일을 위한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9). 의문의 율법, 물질적인 성전, 세상에 속한 약속을 말했다. 주님은 어떻게 말씀 하시는가“내가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 유대교는 ‘형제들’의 손 안에서 파괴된다.


전세계 각지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고 그들이 있는 곳에서 유대교는 실패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유대교의 중요한 힘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3:10). 이것은 19절의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함” 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인내(참음)’ 라는 두 글자는 명사로 사용되었다. 오는은 그리스도의 인내의 시대이다. 오늘 주님은 주님을 조롱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시지만 그분은 인내할 뿐이다. 어느 날 심판이 올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분이 참으신다. 오늘 그분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이다. 그분은 여기에서 명예 없는 비천한 사람이요 나사렛 사람이요 목수의 아들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그분은 나의 인내의말씀을 지키라”고 하신다.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10). ‘시험 할때’는 원문으로는 ‘시험할 시각’이므로, 이 구절의 원 뜻은 “내가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시각이라”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중경(重慶)에서 “내가 너로 폭탄을 맞지 않게 해주마.” 라고 말한다면 그 뜻은 바로, 네가 중경에 계속 있어도 폭탄을 맞지 않게 해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내가 그 시각에 너를 지켜 주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시각 전에 너를 성도(成都)로 떠나게 하리라는 것이다.


온 세상이 시험을 당할 때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대환란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 환란을 당하지 않는다.그 시각이 오기 전에 우리는 이미 들림받게 되는 것이다. 전체 성경 가운데 단 두군데에서 들림받는 것에 대한 약속을 말했다. 하나는 누가복음 2136절이고, 하나는 계시록 3 10절이다.오늘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이 날을 허송 세월 하지말고 빌라델비아의 가는 길을 배우고 주님께서 우리를 모든 시험에서 건져내시기를 구해야 한다.


경고의 말씀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1). 주님은 ‘내가 속히 임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두아디라는 지나가지 않고 사데도 지나가지 않고 빌라델비아도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는 곧 ‘나의 말씀’과 ‘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잊지말고, 주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빌라델비아의 모두가 다 면류관을 갖고 있다. 다른 교회에서는 면류관을 얻는 것이 문제이나, 여기에서는 그것을 잃는 것이 문제이다. 주님은 너희들이 다 면류관을 갖고 있다고 하신다.


신약 전체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자기의 면류관이 있는 것을 알았는데 그는 곧 바울이다(딤후 4:8). 또 교회 가운데에서는 빌라델비아만 자기의 면류관이 있음을 안다. 이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빌라델비아로부터 나오지 말며 네 위치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빌라델비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이러한 경고를 하실 리가 없다. 또한 이런 위험성은 상당히 실제적인 것이므로 주님은 이런 엄중한 지시를 하신 것이다. 그들의 위험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위험성은 곧 그들에게 있는 것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있는 것을 지키라고 하신다. 그들의 위험성은 진보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퇴보 하는데 있다.


그들이 주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까닭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이름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험성은 그들이 사랑과 충성심을 잃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실제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 이십 년 후 ‘형제들’은 분열 되었다. 그들의 분열은 ‘폐쇄회(Exclusive) 와 ‘공개회(Open)’ 의 두 파로 나뉘어진 것이었고, 그 두파도 또 많은 파로 갈라졌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에서도 이기는 자를 부르신 것이다.


이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하고, 또 매우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실패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 어떤 분열이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문제가 생길 때 사람은 자기 교만이 생긴다.사랑이 없거나, 혹은 적을 때 사람은 율법을 주의하게 되고 절차를 강조하고, 흠을 잡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문제가 생길 때 사람은 교만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 질투하여 시기와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성령은 합일의 능력이요 육은 분열의 능력이다. 육이 해결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열되고 만다.


형제회의 부족


그 외에 ‘형제들’ 의 부족은 교회의 ‘지방입장과 경계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소극적인 면, 곧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보았지만 교회의 적극적인 면, 곧 교회가 얼마나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얼마나 지방의 입장과 범위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본 것이 부족했다. 로마 천주교는 이 땅에서 하나의 연합 교회의 합일에 주의를 기울였고 ‘형제들’은 이상적인, 하늘에 있는 하나의 영적 교회의 합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보지 못했고, 보았어도 완벽하지 못했다. 서신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한 지방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합일도 곧 한 지방 교회의 합일이요, 연결도 곧 한 지방 교회의 연결이요, 온전케 함도 또한 한 지방 교회의 온전케 함이요, 치리(治理)도 한 지방 교회의 치리인 것이다.


언제든지 교회의 합일을 말할 때는 두 종류밖에 없다. 로마 천주교는 땅 위의 모든 교회의 통일을 말했고 형제회(the brethren)는 하늘 위의 영적 합일을 말했다. 결국 전자는 외면적인 합일에 불과했고, 후자는 이상적인 합일로서 사실상은 분열된 것이다.둘 다 성경에 나타난 각각의, 그리고 모든 지방 교회의 합일에 주의하지 않은 것이다


‘패쇄회 형제들(Excluscive Brethren)’ 은 각 지방의 일치된 행동을 요구하여 결국 지방의 경계가 무너져 연합회적인 착오에 빠지게 되었고‘공개회 형제들(Open Brethren)’각 모임의 독립적 행정을 요구했으므로 결국 한 지방에 허다한 교회가 있게 되어 공리파, 곧 각각의 회중을 독립된 단위로 인정하는 착오에 빠지게 된 것이다.


‘패쇄회 형제들(Exclusive Brethren)’ 은 지방의 경계를 초월했고‘공개회 형제들(Open Brethren)’ 은 지방의 경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교회, 곧 한 지방에 한 교회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는 것을 잊은 것이다.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은 다 이런 종류의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오늘날에 와서 성경의 지방 교회에 대한 말씀이 영적 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형제들’은 교회를 세울 때 지방 교회보다 작은 교회-‘가정 교회’ 가 그 중의 하나임-를 세운다. 그러나 성경에는 각지가 연합된 교회는 없고 한 지방에서 각각 회중이나 집회 단위로 독립적으로 선 교회도 없다.


여러 지방에 한 교회가 있는 것이나, 한 지방에 여러 교회가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지방에 한 교회인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많은 지방에 한 교회가 있는 것은 성경에서 요구하는 합일을 나누는 것이다.


당시 형제회(the Brethren)의 문제는 곧 성경의 지방에 대한 가르침에 분명치 못한 것이었다. 결국 다른 지방의 형제들과 연합된 연합회식의 합일을 꾀한 사람들은 그 지방 형제들과의 분열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집회를 하나의 단위로 취하여, 같은 집회에 있는 형제들과는 문제가 없는 형제들도, 그 지방의 다른 집회에 있는 형제들과의 분열은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다.성경에 나타난 지방에 대한 가르침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 분열되었다.


하나님은 비 실제적인 각 지방의 연합을 원치 않으시며 하나의 집회를 단위로 합일의 범위를 삼는 것-그것은 지나친 자유요, 지나친 방종이요, 제한이 없고 배움이 없는 것이다- 도 원치 않으신다. 단 한 가지라도 뜻이 맞지 않으면 금방 다른 집회를 시작하고 두세 사람이 독립되어 하나가 되는 것도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한 지방에는 오직 하나의 합일이 있어야 한다.이것은 육적으로 방종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제한인가!


‘형제들’ 의 운동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방’ 에 대한 빛은 갈수록 더 밝아진다.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역사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우리는 다만 역사(history)를 기다릴 뿐이며 그럴 때 밝아질 것이다. 만일 주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 절대적이고 겸손해진다면 우리는 긍휼을 힘입어 지키심을 받아 잘못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 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3:12). 빌라델비아에서는 형제들이 서로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이상 추방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다.


기둥이 제해져 버리면 성전은 설 수 없다. 빌라델비아는 하나님의 성전을 서게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완성될 때 빌라델비아의 사람들은 주님에게 돌아오고 하나님을 만족케 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3:13) 아무쪼록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깊은 마음과 뜻을 감추지 아니하시고 이미 그의 길을 우리 앞에 너무도 분명하게 보이셨다는 것이다.         


      

 

 

 

8 ,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 14~22-


이제 우리는 마지막 교회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로마 천주교와‘형제들(the brothers) 의 운동을 보았다. 이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형제들’ 의 운동이다. 두아디라는 완전히 실패했다. 사데는 두아디라보다 조금 좋았지만 주님은 여전히 책망하셨다. 오직 빌라델비아에는 한 마디의 책망도 없었고, 주님의 약속은 빌라델비아에 있었다(그러나 빌라델비아에서도 이기는 자에 대한 부르심이 있다).


만일 이것이 우리 사람이 쓴 것이 라면 빌라델비아까지 쓰고 더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일곱 교회 가운데서 교회의 상태를 예언하고 계시므로 라오디게아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라오디게아는 어떤 교회를 지적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라오디게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으로 여기서 공과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교회의 일반적인 황폐한 상태로 여긴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예언이 있다.


일반 사람의 의견과 풍속


라오디게아도 다른 교회들과 같이 특별한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은 두 글자를 합한 것으로서 '라오(laos)' '일반사람'의 뜻이고 '디게아(dicea)' '풍속', 또는 '의견' 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의 뜻은 곧 일반 사람의 풍속, 혹은 일반 사람의 의견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는 한 가지는, 교회는 이미 실패했고, 이제 교회는 일반 사람의 의견이나 풍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에서 우리는 형제들을 보았고 서로 사랑함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일반 사람을 보고 의견과 풍속을 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자녀가 빌라델비아의 위치에 서지 않으면 넘어지고 실패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데로 돌아갈 수 없다. '형제들' 의 진리를 본 사람은 심지어 그가 원한다 할지라도 개신교로 돌아갈 수 없다. 결국 그가 빌라델비아에 굳게 서지 못할 때 그는 빌라델비아에서 라오디게아로 후퇴하는 것이다.


로마 천주교에서 나온 것은 개신교라 불리우고, 개신교에서 나온 것은 바로 '형제들' 이라 불리우며, 빌라델비아에서 나온 것은 라오디게아라고 불리운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나오고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라오디게아도 빌라델비아에서 나온다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한 교파의 잘못된 상태를 발견하고 그것을 라오디게아라고 말하는것이다. 그것은 착각이다. 잘못된 교파는 사데이지, 라오디게아가 아니다.


각 교파는 개신교다. 교파는 라오디게아로 변할 자격이 없다. 오직 빌라델비아가 실패할 때 비로소 라오디게아가 될 수 있다. 라오디게아의 상태는 사데의 상태와는 다르다. 빌라델비아의 달콤한 맛을 보았으나 지금은 하락한 것이 라오디게아이다. 근본적으로 많이 갖지 않은 것이 사데이고, 성령 안에서 영적 풍성을 지키지 못할 떄 라오디게아가 되는 것이다.


이 하락은 어떠한 하락인가? 우리는 에베소로부터 정상적인것 가운데 비정상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을 본다. 버가모에서는 발람의 교훈을 보고 두아디라에서는 이세벨을 본다. 그리하여 그 안에 중간 계급의 뿌리가 생기는 것이다. 사데는 우리에게 공개된 성경을 주었으나 사데 자신도 하나의 중간 계급을 만들어 냈다. 빌라델비아에서는 우리는 오직 형제만을 볼 수 있으니 거기에는 평신도를 정복하는 계급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께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것에 순종한다. 그러나 언제든지 형제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위치에 서지 않을 때 형제의 위치는 일반 사람의 위치로 떨어지게 되고, 여기에 라오디게아가 오는 것이다사데에는 권위가 목사 제도에 있다. 빌라델비아에는 권위가 성령께 있다. 성령은 말씀과 주님의 이름으로 권위를 잡고 모두 다 서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권위를 잡는 것은 성령도 아니고, 목사 제도도 아닌 일반 사람이다. 일반 사람이 권위를 잡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다수의 사람들이 권위를 잡는 것을 말한다. 다수의 의견이란, 다수의 의견만이 의견으로 받아지며 다수가 지지하면 그것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이다.


바꿔 말하자면 신부가 그들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목사가 그들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성령이 그들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들 자신의 다수의 의견이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제아닌 사람이 온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형제의 위치에 서지않고 육적인 뜻을 따르는 인간의 위치에 서서, 모두 찬성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하나님의 뜻 안에서만이 빌라델비아를 볼 수 있다. 언제든지 형제의 사랑이 없고 육을 따르는 인간적인 의견이 있을 때 당신은 거기서 라오디게아를 보는 것이다.


빌라델비아의 하락 


주님은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말씀하신다.( 3:14). 주님은 아멘이시다. 아멘은 곧 ‘됐다’ , ‘가하다’ 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이루신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이루시며 이루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땅 위에 계신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간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만물 중에서 주님이 머리이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5~16) 사데는 이름은 살았으나 실제는 죽은 것이고, 라오디게아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것이다.


에베소에 대해서는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고 하셨고, 라오디게아에 대해서는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다.주님은 그들을 다시는 쓰지 않으시며 그들은 다시는 아멘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것이다. 지식은 충만하나 능력은 없다. 그들이 더울 때는 빌라델비아였으나 지금은 식어졌다. 빌라델비아가 하락하면 라오디게아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빌라델비아에 있던 사람만이 이런 상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3:13). 앞에서 나는 ‘형제들’ 의 운동이 종교 개혁에 비해 더 위대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종교 개혁은 다만 양적 개혁이었으나 ‘형제들’ 의 운동은 질적 개혁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회복한 것이었다. 그 능력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이 ‘형제들’ 은 행위 면에서나 진리 면에서 그 어떤 사람들보다 강했고 그들 중의 요리사조차도 개신교의 선교사보다 진리를 더 알고 있을 정도였는데, 결국에는 교만에 떨어졌다“너희들은 다 못하지만 우리는 다 한다”  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개신교에는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유명한 스코필드(Scofield) ‘형제들’ 가운데 가서 배웠다. 널리 알려진 집시 스미스(Gipsy Smith)도 그들 가운데 가서 유익을 얻고 그들의 교리를 가지고 가서 전했다. 전 세계의 사역자, 학생, 전도자와 성도가 그들의 도움을 얻었고 빛을 얻었다. 그들의 책을 통해 도움을 얻은 것은 다 해아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다 마음으로 인정하는 바 이지만 온 세계에서 ‘형제들’ 처럼 성경을 가르친 곳은 없었다.


결국 ‘형제들’에게 교만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학생은 다 다른 사람의 선생이다.” 라고 말했다. 그들은 극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그들 중에는 자칭 영웅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다. 가장 현저한 결과는 곧 자만하고 자족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의 유익을 구하였으나, 또 다른 이들은 모든 것이 지식에 불과하여 스스로 높다 하고 스스로 크다 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교만한 빌라델비아가 곧 라오디게아요, 라오디게아는 하락한 빌라델비아라는 것이다. 결국 그들 집회의 많은 곳에 행위와 가르침의 문제가 생겼다. 라오디게아의 특징은 곧 영적 교만이다. 역사적으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것을 이미 이루셨다.


교만한 빌라델비아


우리는 오늘 빌라델비아를 볼 수 있고 라오디게아도 볼 수있다. 이 둘은 교회의 위치에서 매우 비슷하다 차이점은 빌라델비아에는 사랑이 있고 라오디게아에는 교만이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외면적으로는 분별이 없으나 라오디게아는 교만한 빌라델비아인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많은 일들을 다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그들 중의 어떤 형제가 말했다. “우리 가운데서 찾을 수 없는 영적인 일이 있는가?” 어떤 형제는 새 잡지를 보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새로운 것을 준단 말인가? 우리에게 없는 것이 그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말하면서 잡지를 보지 않고 돌려보냈다. 또 어떤 형제는 말했다“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빛을 주셨으니 우리는 만족한다. 만일 다른 것을 읽는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이다.” 또 한 형제는 말했다“우리가 갖지 않은 것이 그 무엇이냐?” 또 한 형제가 말했다“사람들이 가진 것을 우리는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 우리에게 즉시 떠오르는 것은 주님이 여기에서 지적하신 나는 부자라’ 는 말씀이다. 우리는 라오디게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대서양의 한 섬에 몇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태풍이 불어와 집이 많이 부서지고 ‘형제들’ 의 집과 집회소도 무너졌다. 몇 시간 후에 정부의 구제보다 먼저 전 세계의 ‘형제들’ 이 이십만 파운드를 보내왔다. 그들 가운데 확실히 형제의 사랑이 있었으나 그중에는 교만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개신교는 라오디게아가 될 자격이 없다. 사데는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내가 이십여 년 사역을 하는 동안 교파의 목사나 교사 중에 그들 자신이 신령한 것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들은 항상 부족하다고 말한다. 실패하고 약한 개신교는 사데요, 라오디게아가 아니다. 라오디게아의 특징은 오직 영적 교만인 것이다.


개신교에는 많은 죄가 있다. 그러나 영적 교만은 없다. 오직 하락한 형제들이 말하기를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하는 것이다. 오직 하락한 빌라델비아만이 라오디게아로 변할 수 있다. 영적 풍성에 대해서 사데는 자신에게 없음을 잘 안다. 항상 자기들의 말은“우리의 열심은 부족하다. 열심 있는 교우들은 다 가버렸다.”는 것이다.


풍성한 것은 빌라델비아의 상태이지만 풍성을 과시하는 것은 라오디게아의 표시이다. 오직 라오디게아만이 과시 한다. 빌라델비아의 위치를 떠난 사람이 사데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형제를 개신교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다만 라오디게아로 갈 수있다. 라오디게아도 사도 시대의 정통을 이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도로부터 이어진 선을 넘어선 것이다.


그들은 지식만 있고 생명은 없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높다 하고, 스스로 크다 하는 사람들이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7). 확실히 그들은 나는 부자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과시할 만한 이유가 있다. 나도 그들 가운데 과시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 좋은 느낌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알 수 있어도 자신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좋다고 말하지만 자기 자신은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일은 과시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일은 자랑하고 스스로 부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돈이 날아가거나 액수가 변하는 일은 없지만 영적인 일은 과시하는 즉시 사라진다.


누구든지 자신이 강하다고 말할 때 그의 강함은 사라진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그 자신은 몰랐다. 자신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것을 알 때 그의 얼굴의 빛은 사라져 버린다. 당신이 자신의 성장을 모른다면 당신은 복있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잃는 것이다. 당신에게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은 좋으나 당신 자신이 영적 권위가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은 좋지않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고, 사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도 매우 많지만 결국 하나님의 빛 속에서 볼 때 그들은 눈멀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인 것이다그러므로 이것이 이 공과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라오디게아는 자신의 부요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우리는 우리의 성장을 원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그것을 알기는 원치 않는다.


주님은 ‘네 곤고’를 말씀하셨다.  ‘곤고’는 로마서 7 24절에서 바울이 말한 ‘곤고’ 와 똑같은 글자이다. 주님은 여기에서“너는 로마서 7장의 바울과 같이 영적으로 곤고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내 눈으로 볼때 가련한 자이다.” 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래에서 왜 그들이 곤고하고 가련한지 그 이유를 말했다. 그 하나는 가난한 것, 또 하나는 눈먼 것, 또 하나는 벌거벗은 것 때문이다.


가난한 면에 관해서는 주님이 그들에게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고 하셨다.( 3:18). 그들은 교리 면에서 부요하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가난하다. 반드시 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 쓸모 없다. 그들의 실패와 약함은 곧 믿음이 없는 데서 기인 한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시련받은 믿음은 곧 불로 연단한 금이라고 했다(벧전 1:7, 역자주).


말씀이 부족할 때 당신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말씀이 풍성할 때 당신에게는 믿음과 듣는 말씀이 서로 조화되어야 한다. 당신이 들은 말씀이 실제적으로 유용하게 되기 위해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 한다. 당신이 고난중에서 믿음을 훈련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부요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고 말씀하셨다( 3:18). ‘흰옷’ 은 전에 계시한 바와 같이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의 흰옷은 요한계시록의 여러 곳에서 언급된 흰옷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이 때묻지 않은 옷과 같이 흰 것이다.하나님은 그들이 계속 그의 앞에서 행하기를 원하신다. 벌거벗은 자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구약 성경에서 옷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없다. 제사장은 제단 앞에 설때 하체를 노출할 수 없었다.고린도후서 5장에서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 되지 않으려 함이라 . 그러나 여기에서의 문제는 옷을 입고 안 입고에 있지 않고 오직 흰가 희지 않은가에 있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 10:42).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한 턱 내는 것이 ‘흰’ 것이 아니다. 우리 단체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그보다 더 비열한 동기에 의해 행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불결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오직 깨끗한 동기와 깨끗한 목적을 갖고 주님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신다. 여러 활동이 있고 여러 마음이 있을 때 당신의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다 깨끗치 못하다는 것이다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 부끄럼이 없게 하라.


세 번째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3:18). 이것은 알약’ 이 아닌 ‘고약’ 이다. 고약을 사서 눈에 바르는 것은 성령의 계시다. 성령의 계시가 있을 때 당신은 비로서 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론을 너무 잘 알아도 성령의 계시가 줄어들 수 있다. 많은 때 이론은 하나의 생각에서 또 다른 생각으로 전해지지만 영적인 눈은 보이지 않게 된다.


허다한 사람들이 타인의 빛속을 걸어가고 있다. 나이 많은 형제들이 그렇게 하므로 당신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어떤 사람이 내게 이러이러하게 알려 주었다”. 고 말한다. 만일 그 사람이 당신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이론은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이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것을 틀렸다고 하시며 반드시 성령의 계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 친구에게 내 대신 복음을 들어달라는 편지를 쓸수없다. 이와 같이 인간의 손으로 전해 주는 것은 내게 오는 순간 끝나는 것이며 하나님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소경이라고 했다. 영적인 일은 당신이 많이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허다한 때 이론이 많아지고 지식이 많아져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배울 것은 곧 안약을 사는 것이다. 오직 내 자신이 보는 것만이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은 이미 얻은 것의 근거요, 다시 보는 것의 근거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19). 위의 많은 말씀들이 다 책망이다.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책망하며 징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열심을 내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 회개하라. 제일 첫째로 회개하라. 회개는 개인의 일일 뿐 아니라 교회의 일이다


이기는 자에 대한 주님의 약속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3:20이 문은 무슨 문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 이 구절을 복음 전하는데 죄인에게 쓸 수도 있으나 오래 써서는 안 된다. 이 성경 구절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것이요, 주님이 죄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지적한 것이 아니다.


이 문은 교회의 문이다이 문은 단수이기 때문에 주님은 교회를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교회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문 밖에 서 계신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문 밖에 계신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 이것은 정말 큰일 날 일이다. 주님이 교회 문 밖에계시다니 도데체 이 교회는 어떤 교회란 말인가? 주님은 여기에서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주님의 이 말씀은 모든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문은 교회의 마음의 문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 ‘누구든지’ 라는 네 글자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문을 여는 것이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에는 두 노선이 있다. 그 하나는 성령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이요, 하나는 주관적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요, 하나는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객관적 진리를 지나치게 중시한다면 그는 구름을 탄 사람처럼 실제가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항상 주관적인 면에 서서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만을 주시하고 항상 자기 내부만을 본다면 그는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사람은 다 이 두 진리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 하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또 하나는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여 나를 완전케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형제회(the Brethren)의 가장 큰 실패는, 곧 객관적 진리를 너무 중시하고 주관적 진리를 경시한 것이다. 빌라델비아가 실패하면 곧 라오디게아로 변한다. 그의 실패는 객관적 진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 객관적인 것이 너무 많고 주관적인 것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만일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간다” 고 했다. 이 뜻은 바로 객관이 주관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 뜻은 다시 말해서 내가 너의 모든 객관적인 것을 주관적인 것으로 변케 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두 방면의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네가 내안에 거하면 나도 네안에 거하리라” 고 말씀하셨다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0). 주님은 여기에서, 네가 만일 문을 열면 내가 너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곧 교제요, 이것이 또한 기쁨이다. 우리에게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고, 교제로 말미암은 기쁨이 샘솟는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 앞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1). 많은 사람들이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중에서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한다. 이기는 자의 다른 약속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주님의 라오디게아에 대한 약속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앞에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에서 주님은 자기 자신의 어떠하심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기면 너와 내가 함께 앉으리라” 고 하셨다.


“나는 각종 각양의 승리를 거친 후에야 아버지와 같이 보좌에 앉게 되었다 너희들도 이겨야만 나와 함께 앉으리라” 여기에서 이기는 자에 대한 가장 높은 약속이 있다. 왜 그런가? 교회는 여기에 와서 완성 되었다. 이기는 자는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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