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워치만니/11-1 워치만니의 글들

깊은곳과 깊은곳이 서로 부름

나다나엘(구 요나한) 2020. 6. 25. 19:55

『주의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시 42:7).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막 4:5-6).

 

『그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로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39:1-6).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1-4).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흔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 하더라』(행 5;1-5).


시편 42편 7절의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는 말은 「깊은 곳과 깊은 곳이 서로 부른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깊은 곳은 오직 깊은 곳의 외침으로 인하여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얕은 것은 결코 깊은 것을 만질 수 없고 외면적인 것은 결코 내면적인 것을 만질 수도 없다. 깊은 곳은 오직 깊은 곳과 서로 부를 따름이다.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깊은 곳을 만질 수 없다. 당신의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깊은 곳을 만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깊은 곳은 오직 당신의 깊은 곳과 반향(反響)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당신이 어떤 지방에 가서 말씀을 들을 때 당신이 가장 깊이 만지는 것은 사람의 깊은 속에서 나온 것 뿐이다. 만약 어떤 것이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받은 도움은 얕은 것에 불과하고 이면적(裏面的)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곳의 중요성을 보아야 한다.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은 결코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깊은 곳으로부터 유익과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당신의 깊은 속에서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영적인 일에서 남을 도우려면 반드시 무언가가 깊은 속에서 나와야 한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깊은 곳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만약 당신의 말씨가 깊은 속에서 나온 것이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이상(理想)을 얻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즐겁게 하고 일시적으로 흥분케 할 수 있더라도 사람의 깊은 곳을 만질 수는 없다. 오직 깊은 곳만이 깊은 곳을 부른다. 얄팍한 말씨는 결코 남의 깊은 곳을 만질 수 없다.

 

 

깊은 속에 있는 뿌리

 

말씀을 전하거나 들을 때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주 예수님이 말한 씨 뿌리는 비유 안에 들어 있다.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 가에,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밭에 뿌려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받는 사람의 네 종류의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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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서 주 예수님은 흙이 얕은 돌밭, 곧 위에는 흙이고 아래는 돌인 밭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밭에 뿌려 진 씨는 매우 빨리 자라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즉시 말라 버린다. 뿌리란 무엇인가? 뿌리는 밑으로 자라는 것이다. 잎이란 무엇인가? 잎은 땅 위에서 자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보이지 않는 생명을 뿌리라 하고 보이는 생명을 잎이라 말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보이는 생명은 있으나 보이지 않는 생명이 매우 결핍된 데 있다. 바꿔 말해서, 감추인 깊은 속의 생활이 부족함을 말한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 중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생명의 부분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밖의 좋은 행위를 주의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밖의 좋은 행위 외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얼마나 되는가?

만약 당신의 모든 영적 체험을 다른 사람이 다 알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뿌리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미덕을 사람 앞에 다 보이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떠한 것이 밑에 있는가? 만약 당신의 모든 체험이 드러나고 나타난 것이라면 당신의 모든 것은 위로 자란 것이지, 밑으로 뿌리박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잎만 있고 뿌리가 없는 흙이 얕은 사람이다.

영적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한면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몸의 생명이 있어야 함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또 한면으로 지체인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분량이 매우 개인적인 것임을 보아야 한다. 이 점은 나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이며, 마땅히 지켜야 할 부분이다. 만약 이 부분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의 지체로서의 특징을 잃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 특별한 용도가 없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주신 당신의 특징을 드러내고 나타내려 할 때, 당신은 곧 메마르게 된다.

 

주 예수님이 산 위에서 가르치신 것은 매우 특별하다. 주님은 한면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시며 공개적인 것임을 말씀하시고, 또 한면으로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고 기도할 때에 은밀한 가운데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한면으로는, 은밀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공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감추어져야 하고, 나타나서는 안 될 많은 미덕들이 있어야 한다. 깊은 속에 감추인 것이 없이 사람 앞에 나타난 것만 있는 사람은 연단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 여러 해 된 우리 자신에게 다른 사람이 모르는 체험이 얼마나 되며 다른 사람이 아는 것 외에 내게 남아 있는 체험이 얼마나 되는가를 우리의 눈이 열려서 볼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기를 간구 해야 한다.

 

 

깊은 곳의 체험

 

바울은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말한다. 바울이 고린도 후서 12장을 쓴 것은 자신에게는 무익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한 것이다. 바울이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한 것은 부득불 말한 것이다. 형제 자매여,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를 조금 받을 때 나팔을 불어 즉시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면 자신에게 유익된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말했는가? 그것은 바울이 사도인 것을 의심하고 기독교의 기초에 대해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불 말한 것이다.

바울은 모든 계시를 사람에게 말해 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이 사람은 바울 그 자신이다)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말했다.

십사 년 전의 체험을 이제야 말한 것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칠 년 동안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바울은 십사 년 동안이나 감추어 두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십사 년 동안 바울의 이러한 체험을 알지 못했다. 십사 년 동안 사도들은 바울의 이러한 체험을 알지 못했다. 바울은 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십사 년 전에 체험한 것, 곧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을 우리에게 말해주면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라고 말하고 그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라고 말했다. 이제까지도 그러한 체험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뿌리로 남아있다.

형제 자매들이여, 뿌리는 중요한 것이다. 당신에게 바울의 사역이 있으려면 먼저 바울의 뿌리를 얻어야 하고, 바울의 생활을 가지려면 먼저 바울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바울의 밖의 능력을 가지려면 바울의 내적인 체험을 가져야 한다. 오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영적인 것들과 특별한 체험이 보존되지 않는 데 있다. 조그마한 체험만 있어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생활에서 감추인 부분이 없고 모두 사람 앞에 생활하는 것이 바로 뿌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깊은 곳에 이끌리기 위하여 바울의 체험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얕은 생활

 

이사야 39장은,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들고 그 글과 선물을 보낸 것을 말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보전하지 못했다.

성경의 기록은 『히스기야가 사자로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화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라고 말한다. 히스기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병이 나았을 때 하나님에게서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나게』(사 38:8)한 징조를 받고 치료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고 자랑했다.

히스기야가 사람에게 궁중 보물을 보인 것은 그가 십자가의 다룸을 받지 않았고 천연적인 생명이 다룸 받지 않은 것을 말해준다. 히스기야의 뿌리가 밖으로 드러났음을 밝히 볼 수 있다. 히스기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바벨론 사람도 알았고, 히스기야에게 있는 것을 바벨론 사람은 알았다. 히스기야에게는 뿌리, 곧 보이지 아니하는 생명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했다. 이것은 남에게 보인만큼 자신은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당신의 생명이 사람 안에 진설(陳設)된 만큼 당신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숙한 일이다.

오! 자기의 체험을 말하지 않기를 참지 못하고 한번 말하면 통쾌하게 말하려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궁중 보물을 사람들에게 보인 것과 같다. 어떤 형제는, "많은 형제들이 병들었다가 나은 후에 간증을 할 수 있었읍니다. 나도 죽음에는 이르지 않는 병을 앓다가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받는다면 다음 간증 집회에서 할 말이 있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형제는 무엇 때문에 고침을 얻으려고 했는가? 간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체험을 추구한 것은 자기가 할 말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다. 오! 이렇게 얕은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보게 하며,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

 

 

간증을 하되 자신을 드러내지 말것

 

그렇다면 우리는 간증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바울도 간증을 했고, 역대로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간증을 했다. 우리도 마땅히 간중을 해야 한다.

그러나 간증하는 것과 자기의 체험을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간증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말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간증을 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부득불 말하는 것이지 식사 후에 차 마시며 한담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많은 경우, 한담하는 말이 영적인 보배를 잃게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에는 마땅히 간증을 해야한다. 그러나 당신이 간증을 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방면에서 도움을 받게 해야 한다.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바울도 간증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임의로 말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십사 년 전의 일을 계속 감추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십사 년 전의 체험을 말할 때에도 그들에게 모든 것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십사 년 전의 일을 언급했을 뿐 그들에게 과정을 말해주지 않았고 단지 계시를 얻었다는 것과 은밀한 말을 들었다고 말했을 뿐 어떤 말을 들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삼층천은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의 보물은 무엇이며 우리의 은금과 향료와 모든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는 금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은은 십자가의 구속에서 나온 것이며 향료는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음으로 흘러나온 것임을 알아야 하고, 왕국에 관한 모든 것이 보물이며, 하나님과 주님으로부터 얻은 주님의 모든 역사가 우리의 무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교리나 성경의 가르침이나 신학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통에서 얻은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왕래하고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음으로 얻은 것들을 임의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간증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많은 영적인 체험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영적인 체험들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고 나타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도 간증을 하셨지만 그분은 말을 많이 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간증하는 것과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분은 병자를 치료한 후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특별히 마가복음에서는 한번뿐 아니라 여러 번 분부한 것을 볼 수 있다. 한 번은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막 5:19)고 분부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간증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일을 뉴스처럼 남에게 말한다면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뿌리가 없다고 한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은밀한 보물이나 생명의 체험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많은 체험을 보류해 두어야 한다. 만약 보류해 두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람 앞에 보물을 놓으면 노략당하여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메마름은 드러남과 함께한다. 당신은 간증을 하더라도 바울처럼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해야한다. 사탄의 공격은 특별히 사람이 나타날 때 다가온다. 모든 나타남은 우리로 하여금 손실을 받게 한다. 병이 치료된 사람 중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간증한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간증한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다시 병이 들게 된다.

어떤 사람이 간증한 후에 같은 방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뿌리가 덮힌 사람을 보호하며 뿌리가 나타난 사람은 보호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간증을 하라고 하시면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것을 마땅히 감추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추인 그것을 보호하시며, 또한 그것은 당신의 누림이 된다.

우리의 봉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지만 그러한 일을 다른 사람이 듣도록 선전하는 재료로 삼아서는 안 된다. 당신이 그것을 나타낼 때 당신의 봉사에서 즉시 사망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나타낸 만큼 잃게 된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를 계수했을 때 사망이 들어왔다(삼하 24),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드러냄으로부터 구원받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추인 모든 것을 가지고 나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움직이셔야 우리가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형제에게 말을 하라고 하셨을 때 그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만약 억누른다면 지체의 율(律)을 위배하는 것이다.

지체에게는 교통하는 율이 있다. 당신이 그 율을 억누르면 통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소극적이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생명을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일만을 말하여 말이 많고 나타내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공격을 받게 한다.

우리는 한면으로 몸을 알고 몸의 흐름을 알아야 하고, 또 한면으로는 주님 앞에서 남이 모르는 많은 체험, 곧 우리의 감추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 모든 뿌리는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깊은 속을 향하고 밑으로 뿌리를 박는다면 결국 당신은 깊은 곳과 깊은 곳의 서로 부름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 속에 깊은 것이 있을 때 사람의 깊은 곳이 만진 바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 속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다른 사람도 도움을 얻게 되고 빛을 받게 될 것이며 그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깊은 곳은 깊은 곳을 만지며 서로 부른다. 당신에게 깊은 곳이 없다면 당신은 단지 표면적인 봉사로 사람의 외면적인 감동을 얻을 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오직 깊은 곳만이 깊은 곳을 부른다.


워치만 니

 


출처: [열두 광주리 가득히 1, "깊은 곳과 깊은 곳이 서로 부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