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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6] /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요나한 2016. 2. 10. 10:40

 

 

[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6]

/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박사 학위가 몇 개씩 있더라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요 3:1-21)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와 니고데모]

 

 

(1절)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한복음 3장은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찾아와서 예수님과 대화한 내용이다. 니고데모는 ‘백성들을 정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니코’는 정복한다는 뜻으로 계시록 2장의 니골라당이라는 단어에도 쓰인 말이다. ‘데모’는 백성이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데모크라시는 백성들이 다스리는 정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큰 이름이다. 백성들을 정복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아버지는 그를 낳고 이름을 크게 지어주었다. 그 이름 때문인지 그는 성공해서 유대인의 관원이 되었다.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으로 공회원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정도에 해당되며 미국으로 말하면 상원의원이다.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헬라어로 ‘아르콘’은 공회원의 일원이었다는 뜻이다. 공회원은 인원수가 약간씩 달라지기도 했지만, 보통 71명 정도였다. 그들은 조상들의 율법에 대해 정통하고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또 종교 의식을 집전할 수 있는 특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어떤 죄나 형벌에 대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나이 드신 분이었다. 이는 문맥 중에서 알 수 있다.

 

이런 분이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다. 낮에도 찾아올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지위가 있는 사람이 밤에 왔을까? 아마도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사려가 깊고 신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운 것도 있고 소심한 것도 있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는 담대하지 못했기에 밤에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과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자.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피조물 가운데 특별한 존재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뭔가 배우고 싶어 왔지만, 예수님은 학문으로 지식을 증가시켜서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거듭남이란 정말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문제는 하나의 영역이 바뀌는 문제인 것이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고 아주 훌륭한 이스라엘 백성의 선생이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뭔가를 더 배우고 지식이 많아지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새로운 출생으로 다시 한 번,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수양이나 도덕 함양이 아니라, 출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땅에서부터 났는데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하늘로부터 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생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야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선행을 하고 수행을 하고 지식을 많이 배우고 도를 닦으면 조금씩, 조금씩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배우고 개선하고 노력하고 수도하다 보면 조금씩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관념이 많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많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신다. 하늘로부터의 생명, 위에서부터 오는 생명을 얻어야 한다. 이는 ‘born again’, 즉 새로 태어나는 문제이다. 기독교는 뭔가를 많이 배우는 종교가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종교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오늘날 유감스러운 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이 비밀을 모르는 것이다. 그저 많이 알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새 생명을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선생 소리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해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의 외인(外人)이다. 하나님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라면 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창조자와 피조물 관계밖에 안 된다. 그런데 거듭나면 우리가 원래 갖고 있지 않았던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생명이고, 2장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이다. 이런 기적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있다. 그럴 때 우리 속에 변화가 생긴다. 이것은 생명으로 인한, 새로 태어남으로 인한 변화이지 무엇을 배워서가 아니다. 우리 속에 새로운 것이 들어온 것이다. 하늘에 속한 어떤 것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타 종교와 예수 믿는 도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나 불교나 회교나 다른 종교는 그 사람이 그 종교에 가입했다 해서 변할 것이 없다. 상태를 개선해보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믿는 도는 그들 안에 있어서는 안 될 죄를 제거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생명을 준다.

 

(5-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3절과 5절은 비슷한 말씀의 반복이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먼저, 물은 침례의 물이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과 주님의 사역을 함께 놓으신 것이다. 이 침례의 물은 우리의 육체를 끝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에 와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 즉 당신의 육체는 죽기에만 합당하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다들 요단강으로 가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무용한 것이고 죽기에만 합당한 것이고 끝나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끝내신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곧 율법의 목적이다.

 

옛 창조는 물로 끝내고 성령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성령은 새로 싹트는 새로운 출생을 의미한다.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선포했다. 물과 성령이 여기서 합한다.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거듭난 사람은 새 생명을 얻는다. 왜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거듭나고 변하는가? 내가 교훈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 생명의 물이 새로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육이 아니라, 예수 믿고 새 생명을 얻었기에 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생명이 우리를 조절하고 통제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옛날에 좋던 것이 싫어진다. 그런 것이 있어야 정상이다. 예전에는 싸워서 지고 나면 복수하고자 했다. 되로 받았다면 말로 줘야 속이 시원했다. 어떻게 해서든 퍼부어주어야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은 후에는 그렇게 하려고 할 때마다 속에서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 악한 말을 많이 듣고도 입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 심지어 그런 말을 들어도 그냥 맘이 기쁘고 이상하게 속이 편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생명이다.

 

6절 말씀은 육과 영이 분명 다르다는 말씀이다. 육으로 난 것은 모태에 백 번을 들어갔다 나온다 하더라도 여전히 육이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을 말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태어나는 일은 ‘성령으로 나는 것’을 말한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육으로 나서 육의 본질을 가진 사람이 되었듯, 거듭날 때 성령으로 나서 영의 본질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성령은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영 안에 들어오며 우리의 죽은 영은 살아나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접할 수 있으며 예배할 수 있다.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모든 성경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거기서 우리 죄를 위해 아들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우리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멸망치 않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고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오직 믿음’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행위나 자백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기도나 회개를 조건으로 삼는데 이는 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다. 우리의 노력, 공로, 눈물, 심지어 자백까지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을 주장해서 옛날에 좋아하던 모든 습관들을 점점 제거시킨다. 여러분이 좋지 않은 과거의 습관들을 자꾸 행하면 이 새 생명은 그것을 반대하고 저항한다. 이 생명이 이길 때까지 여러분을 괴롭힌다. 이 생명은 이기는 생명(overcoming life)이다. 그래서 죄와 사망을 이긴다. 부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여러분 모두 옛 생명으로 살지 않고 주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살아가며 이 생명에 신실한 자들이 되어서 날마다 생명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것이 큰 문제이다. 가장 큰 죄인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장래를 기다릴 것도 없이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사랑하심으로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는데,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는데, 그 사랑을 거절하고 그 증거를 받지 않을 때 그것은 어떤 죄보다도 큰 죄이다. 멸망하기 합당한 죄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어떠한 복음인가!

 

‘정죄’란 말도 원문에는 ‘심판’(judgement)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하늘의 법정에 기소되어 있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여러분은 과거에 기소되어 있었다는 것을 아는가? 여러분을 기소한 검사가 누군지 아는가? 모세의 율법이다. 재판장은 누구이신가? 하나님이시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다 기소당하고 결국 다 심판받아 지옥에 가게 되어 있다. 법률적으로 말하자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 ‘불구속기소’ 상태 혹은 ‘도피’ 상태라고 하겠다. 언젠가 잡히면(죽을 때) 심판받고 지옥 갈 운명이다.

 

하나님은 극도로 거룩하시고 죄를 극도로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날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은 죄들에 대해서 빛 가운데서 낱낱이 심문하시고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시고,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는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21절)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당시 니고데모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진리를 좇는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참 빛으로는 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진리를 행한다면, 진리를 좇는 자들이라면 내게 올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모든 성경은 율법까지 포함해 한 분 예수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고, 예수를 믿도록 돕는 말씀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하지 않는 자들은 실상 악한 자들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빛을 향하여 나아간다. 자신이 아무리 부끄럽다 해도, 자신의 누추함이 드러난다 해도,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이 무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간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날 때 감사하는 법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뻐한다(빌 3:9)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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