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한계시록

7-4 제 4 장 일곱 인의 재앙

나다나엘(구 요나한) 2013. 11. 7. 20:33

 

 

 

 

4 장 일곱 인의 재앙 요한계시록6:1~8:5

 

 

 

 

요한계시록 6장에 나타난 여섯 인의 재앙이 벌써 끝나가는지 아니면 지금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장차 올 환난 날에 이루어질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그것들이 벌써 끝나거나 아니면 지금 이루어지는 도중에 있다는 증거가 여기에서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52절 말씀이 그것을 선언한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그러나 57절에 보면 어린 양이 나아와서 그 책을 받아들었다. 그 이후로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지 않고 2000년이나 기다리나 계신다는 말이 가능하겠는가?

 

 둘째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는 한 지금 유대인들에게 애정을 쏟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물론 7 1~8절 어간에 이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의식하기 시작하시며, 또한 그들을 택하여 종으로 삼으신다. 그러나 7장에 나오는 이 부분은 여섯 인을 뗀 다음에야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섯 인을 떼기 이전시대가 바로 교회시대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지적해준다.

 

이 두 가지 증거로부터 우리는 여섯 인의 재앙이 벌써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지금 이루어지고 잇는 과정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 첫째 인과 흰 말(6:1,2)

 

왜 네 생물들을 통해서 말 한필이 나올 때마다 소리를 지르도록 했는가? 아마도 네 필의 말이 나왔기에 네 생물들을 통해서 소리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면 흰 말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세 가지의 해석이 있다.

 

1. 적그리스도라는 해석

그것이 적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19장에 이를 때까지 결코 흰 말을 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둘째로 마태복음서 24장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환난 때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가운데 네 가지가 본문에 나오는 흰 말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상징하고 있는 것은 거짓 그리스도일 수 밖에 없다.

셋째로 활은 있지만 화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기고 또 이기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에 상징될 수 없다.

 

2. 국제 평화협정을 뜻한다는 해석

이 해석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흰색은 의를 상징하는 색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흰 옷을 입고 그리스도는 흰 말을 탄다. 따라서 이것은 의를 통해 이룩되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로 화살 없는 활은 평화의 상징이다. 이렇게 국제 평화는 의로운 세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해석

이것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해석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19장에서 흰 말을 타신 분이 그리스도로 언급된 것을 보아 6장에서도 그것을 그리스도로 해석함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둘째로 다른 세필의 말에게도 하나님께서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면 첫 번째 말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이에 누구에게 면류관을 주시겠는가?

셋째로 이기고 또 이기실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

넷째로 그리스도께서 면류관을 쓰기 전에 활을 집어드실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화살없는 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그가 벌써 살을 당겨 마귀에게 치명상을 주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면류관을 주신 것이다.

다섯째로 네 필의 말들을 비교해서 생각해볼 때 6 4절에서만 다른이란 말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첫 번째 나온 말과 나머지 세 필의 말 사이에 서로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섯째로 하나님 계획의 우선권은 그의 아들로 하여금 이기도록 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김은 바로 복음의 승리를 뜻한다(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오라 말한 것이 고대 어떤 사본에는 가라 되어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생물 자신들이 명령조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생각한 세 가지 해석 가운데 어떤 해석이 옳은가? 세 번째 해석, 즉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며 또 그렇게 결론을 맺고 싶다.

 

 

. 둘째 인과 붉은 말(6:3,4)

붉은 색은 피를 상징한다. 그리고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 함은 전쟁을 뜻한다.

 

첫 번째로 나온 흰 말은 활로써 이기고 또 이기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하는 전쟁이다. 하지만 붉은 말은 칼을 가지고 싸우는데 이것은 육박전이다. 그리고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는 말은 그것이 이념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바로 전쟁을 위한 전쟁임을 증명한다. 서로 죽이는데 목적을 둔 전쟁은 성경에서도 가장 악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죽음과 파멸과 멸망을 초래할 뿐이다(7:2, 8:10, 25:15~21, 26:25).

 

 

. 셋째 인과 검은 말(6:5,6)

검은 색은 기근을 상징하는 색이다(14:1~3, 4:8,9 ; 5:10). 성경에 보면 밀과 보리가 보통 한 되 두 되씩 되어 팔리는 장면이 나타난다. 저울은 원래 값비싼 물건을 다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것이 곡식 낱알 한 개라도 다 계산되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밀과 보리를 다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마태복음서 20 2절에 보면 하루의 품삯이 한 데나리온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사람이 하루 종일 일한 대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일반적으로 밀과 보리 가격이 차이는 12의 비율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것이 1 3의 비율로 상승되어 있다(왕하7:16과 비교해보라).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마 말라: 감람유와 포도주가 주식이 아니기 때문에 식사 외의 시간에 그것들이 소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은 기근이 심한 때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비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지나간 2000년 동안에 전쟁과 기근과 지진 발생의 횟수와 영역이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사건의 강도가 매우 높다는 점과 그 재난들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들을 요한계시록의 성취를 한층 가속화 시키고 있다 하겠다.

 

 

. 넷째 인과 청황색 말(6:7,8)

여기 나오는 청황색이란 말은 마가복음 6 39절과 요한계시록 87, 그리고 94절에서 푸른색으로 번역된 같은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다. 푸른색은 초목의 색이다.

 

그런데 이런 청황색의 출현은 바로 병드는 일이나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청황색의 말을 탄 사람이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음부는 지하에 있는 불가시적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음부는 사망이 쓸어버린 것을 담는 쓰레받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붉은 말이 가지고 있는 칼과, 검은 말이 몰고 온 기근, 그리고 청황색 말이 내리는 재앙, 여기에다가 지상의 야수들이 합세하여 지상인구의 4분의 1을 몰살시킬 것이다. 땅의 짐승들은 하나님이 가장 잔혹한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의 방편이었다(21:6, 왕하2:24 ; 17:25).

 

 

. 다섯째 인과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의 탄원(6:9~11)

성경은 종종 일곱이란 숫자를 넷과 셋으로, 또는 셋과 넷으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셋은 하나님의 수요, 넷은 인간의 수이다. 넷에 뒤이어 나온 셋은 인간이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나아감을 뜻하고, 셋에 뒤이어 나온 넷은 인간이 좋은 위치를 버리고 저속한 차원으로 타락하는 것을 암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를 생각할 때에 먼저 유사한 세 교회가 나오고 그 다음에 네 교회가 출현한 것을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거기에서는 형편을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것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곱 인을 뗄 때에는 처음의 네 가지 인을 한 그룹으로, 그리고 그 다음 세 가지를 또 다른 그룹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형편은 일곱 교회에서의 형편과는 전혀 다른 것 같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씀하려고 하는 의도는 2000년 동안에 걸쳐서 교회가 핍박받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려고 하는데 있는 것 같다.

 

(9)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포함한다. 또 본문은 신자들이 규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음을 보여준다(1:2, 6:9, 12:17). 어떤 사람은 저희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구절 말씀은 구약성도들이 받은 핍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목적이 예수님의 증거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저희의 가진 증거라는 말은 똑같이 예수님의 증거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저들도 여기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에 틀림없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성경은 제단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씀한다. 하나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황금으로 만든 분향소이다. 어떤 산 저명한 학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제단이 다 분향소로 변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는 타당성이 없는 것같다. 오히려 여기 나오는 제단을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약적 모형에 따르면 아무도 벗은 몸을 가지고서는 제단에 올라갈 수 없다(20:26). 이것은 벗은 몸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부활의 몸으로 덧입지 않은 사람은 벗은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고린도후서 5 4절 말씀은 우리가 집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라 증거한다(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즉시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황금 분향소 아에 설 수 없다.

 

둘째로 성경에서 제단을 말할 때에는 항상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을 뜻했다. 황금이나 같은 특별한 수식어를 붙일 때에는 그것을 바깥 마당에 서 있는 제단과 구분하기 위해서 황금 분향소라고 한 것 뿐이다.

 

셋째로 모든 희생제물의 피는 제단 밑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다(29:12, 4:7, 5:9).

 

넷째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그리고 생명이란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 영혼이란 뜻이다(17:11,14). 제단 아래는 땅 아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제단은 십자가를 상징하며 십자가 밑은 바로 당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제단 아래는 지구의 중심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낙원을 뜻한다(12:40). 우리는 그것을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니시며라고 말씀한 사도행전 2 27절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라고 한 민수기 16 32절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육체와 연합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거니와 또한 부활체를 가지지 않고서는 영원한 불 못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로마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고 , 또 죽임을 당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 자신도 핍박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심지어 최근에 와서는 현대판 로마라고 볼 수 있는 소련이 셀 수 없이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이것은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방법인데 요한계시록 37절에서는 주님이 자신을 거룩하고 참되신 분으로 교회에 소개하고 있다고 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들이 여기에서 그렇게 불렀음을 발견하게 된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그와 같은 표현이 본서에서 여러번 발견된다(8:13 ; 13:8,14 ; 14:6 ; 17:2). 그것은 이 땅을 집으로 생각하며 모든 소망을 이 땅 위에 두고 사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3 10절 말씀 의하면, 장차 온 세상에 거하는 그들을 하나님이 시험하실 것이다.

 

또 여기에 나오는 기도는 스데반의 기도와 다르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지만, 여기서의 기도는 심판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성도들은 죄인들을 고소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9:12). 하나님이 핍박자들을 심판 하실 때 성도들을 신원하여 주실 것이다.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접한 자들에게 의롭다 하시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말한 칭의는 구원적 칭의와는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좌에 앉으사 성도들의 승소판결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판결이 내려지기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유일하게 이 표현은 효과가 한꺼번에 휴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이 기다림 속에는 계속되는 핍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기 하라: 대 환난 때에 아주 큰 학살이 있을 것이다. 7 13~1절까지의 말씀은 정치적인 핍박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17 6절 말씀은 종교적인 박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받는 핍박의 방법은 때로는 죽음이다.

 

제단 아래라는 말은 속죄제물로써 죽은 것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번제물의 결과로써 죽은 것을 뜻한다(40:6, 10, 29, 7:7, 10, 18, 대상6:29 ; 16:40 ; 21:29, 대하29:18).

 

인간은 속죄제에 관심을 돌리지만 하나님께서는 번제에 우선적으로 마음을 두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 속죄제물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생명 얻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또 번제물이 되지 않으셨더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순종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제물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작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바울은 자기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고 싶다고 했다(2:17, 딤후4:6). 그의 생애를 통해서 바울은 산 제물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모든 순교자들은 왕국에 들어가 통치하게 될 것이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린다(20:4).

 

첫째로 요한계시록 3 21절에 기록된 대로 이기는 자들이다. 이 사람들은 보좌에 앉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목베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611절 말씀이 증거한다(그들은 지금 부활한 상태에 있다).

셋째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611절에서 말하고 있는 동무 종들과 형제들을 가리킨다(이들도 역시 부활했다).

 

 

. 여섯째 인과 큰 지진(6:12~17)

성경 가운데 특별히 요엘서와 마태복음서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 땅에 큰 변동과 지진이 있을 것을 예고해주고 있다. 대변동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 전에 일어날 것이고, 큰 지진은 그의 재림과 더불어 발생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대환난 이 전에 있을 것이고, 후자는 대환난 이 후에 있을 것이다. 요엘서 3 16,17절까지의 말씀과 230,31절 까지의 말씀은 주의 크고 두려운 날, 즉 대환난 이 전에 일어날 일들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또 한편 마태복음서 24 29, 30절의 말씀은 대환난이 지나간 다음에 있을 일들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섯째 인은 대환난 이전에 있을 상황을 설명한다고 보겠다.

 

(12)~(14)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우리는 이 부분의 말씀이 벌써 다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아직 그 가운데 하나도 성취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약 백년 전에 호주에서 요한계시록 6 15절과 16절 말씀을 사람들이 제현하는 듯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리하여 이 부분의 말씀이 이미 성취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6 14절에 묘사된 말씀은 역사적으로 아직 그렇게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 따라서 그 말씀은 앞으로 성취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

 

총담 같이 검어지고: 유대인들과 아랍사람들이 사용하는 천막은 검은 삼베로 만든다. 그래서 이와 강은 표현이 나온 것 같다.

 

하늘의 별들이……땅에 떨어지며:  이 별들은 운석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별들은 지구 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그 별들이 어떻게 지구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지구 위에 떨어진다기 보다는 지구 방향으로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15), (16)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르 가리우라: 이 부분은 그들의 양심이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나타나셨음을 그들이 의식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양심에 평강을 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진로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다. 산과 바위를 의지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함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

 

 

. 이스라엘 자손의 남은 자(7:1~8)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뽑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영적인 교회가 바로 그들이다. 이 단원에서는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아남은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또 그 다음에 나올 단원에서는 휴거된 천상교회의 형편을 보여주고 있다(7:9~17).

 

성경 말씀 그대로라면, 대환난은 삼년 반 동안만 계속될 것이다. 나머지 삼년 반은 일반적인 환난이나 시련에 지나지 않느다. 아마도 다섯째 나팔이 대환난의 시작이 될 것이다.

 

(1)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구약성경에 보면 바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번 나타난다. 예를 들어, 요나시대에 하나님이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대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했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1:13, 11:15, 13:24 ; 22:22 ; 49:36 ; 51:1 말씀과 비교해보라). 더욱이 마태복음서 7 25절 나타나고 있는 바람이 불어라는 표현은 일종의 시련을 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이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했음을 보아 이 땅 위에는 고요함이, 또 바다 위에는 잔잔함이, 그리고 나무 위에는 나뭇잎이 펄럭이느 소리 한 점 들리지 않았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보전하기 위하여 인쳐주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인을 뗄 때에 일곱 나팔이 등장하며, 또 첫째 나팔을 불 때에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변하게 될 것이다.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이 천사는 누구인가? 헬라어로 천사란 말 속에는 사자라는 뜻이 포함된다. 천사들이 종종 사자로 불리긴 했지만, 사자란 말은 주로 인간에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다른 천사 말이 유별나게 여러번 사용되었다. 다른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나머지와는 질적으로 틀리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한 것 같다.(8:3 ; 10:1~3 ; 18:1). 상기한 성경 말씀을 참고해볼 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존재가 그와 같은 위엄과 영예를 가질 수 있겠는가? 팬톤(D. M. Panton)다른이란 말이 아주 의미깊은 표현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그 말이 다른 부류혹은 다른 종류 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호와의 사자 구약적 표현은 아주 특별한 명칭으로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되었다( 16:7~14 ; 22:1~13 ; 32:24~30, 13:16~18). 여기에서도 주님은 사자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적 명칭이다. 주께서 머지않아 구약적 배경으로 돌아오실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3)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치기까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인식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그는 구약시대에 가지셨던 그 위치로 돌아오시려고 한다. 물론 교회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 본서가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을 종으로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자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책임을 맡고 있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이 인은 하나님께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의 손에 위임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고상한, 그리고 최고의 인격이시다. 그러므로 바로 왕이 요셉의 손에 어인을 맡겼듯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당신의 인을 맡기신 것이다.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이 땅에 발생할 모든 일 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권세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어떤 일을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 7 1~3절까지의 말씀은 바람에 대해서, 그리고 8 6~9절까지의 말씀은 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바람과 불은 가장 밀접하게 관련성을 갖는다. 폭풍 후에 맹렬한 불길이 이는 법이다.

 

(4)~(8)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첫째로 144,000명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제 칠일 안식교 신자들은 자기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율법을 가장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에 자기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들이야 말로 바로 혈통적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류를 통해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1) 만일에 2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이스라엘 자손들이란 말이 문자적으로 설명된다면 7 4절에서 발견되는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2) 5 5절에 언급된 유다지파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볼 때 그것이 만일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어떤 교단이 어느 지파에 소속할 것인지 과연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4)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어떻게 교회가 열 두 지파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가?

(5) 7 9절에서 모든 나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7 4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 한 나라를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6) 7 9절에서 나오는 큰 무리는 감히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7 3,4절에 언급된 이마에 인맞은 사람들은 144,000명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면 교회 가운데서 구원받는 성도들이 144,000명 밖에 없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144,000이란 수는 12,000 12를 곱해서 만들어진 숫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할 것이다.

(7) 6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임금들 문자적인 해석을 취해서 된 것이라면 7 4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어찌 한 미족으로 생각될 수 없겠는가?

(8) 요한은 이 큰 무리가 어디로부터 오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라고 장로 중 하나에게 대답했던 것이다(7:13,14). 그러나 7 4~8절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구인지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9) 요엘서 2 2~27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메뚜기 재앙을 피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9 3,4절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 자들만 메뚜기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맞은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의심없이 증명되는 있는 셈이다.

(10) 마태복음서 25장에 언급된 양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착한 일을 행한 사람이다(25:32~40). 지극히 작은 자는 유대인인 수도 있고 또 이 땅에 남아있는 다른 신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지극히 작은 자 이스라엘이 장차 모든 민족들에게 시금석이 될 것이다.

 

둘째로 144,000명은 교회가 아니라 다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 무리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먼저 7 4~8절 사이에 있는 말씀을 보면 단지파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에스겔서 40~48장까지는 장차 왕국이 도래할 때에 일어나게 될 장면을 예언해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단지파는 북쪽 변방에 위치할 것으로 되어 있다(48:1).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여기에서는 단지파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이것이 단피자의 사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단과

뱀의 밀접한 관계성을 제시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야곱이 자기의 열 두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 단에게 주었던 축복의 말씀을 회상해 볼 수 있다(49:16~18). 16절에서 단의 존재성을 확인하고, 17절에서는 단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다가 18절에 가서 야곱은 갑자기 기도를 시작한다. 그가 이렇게 이렇게 기도한 것은 다른 아들들에 관해서 예언할 때에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장차 저지를 단의 행위가 너무나 위험한 것임을 예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환난 때에 단지파는 적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으로 인맞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1)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 위에서 다스리게 될 유대인들이다. 12,000 12배수로서 12 10 을 곱한 숫자이다. 이 숫자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원한 완전성을 상징하는 수이다.

(2) 마태복음서 25 40절에 언급된 지극히 작은 자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고난받는 유대인들이다.

(3) 마택복음서 2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끝까지 참는 자들의 일부 유대인이다.

(4) 장차 성령이 물 붓듯 부어 임하게 될 유대인들이다. 이른 비는 사도행전 2장에서 이미 풍성하게 내린 바 있고, 앞으로 늦은 비가 쏟아지게 될 것이다( 2:28,29). 요엘서 2 30절에 언급하고 있는 피와 불은 첫째 나팔을 불 때에 일어나게 될 현상과 일치한다. 그리고 연기 기둥은 다섯째 나팔과 부합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일은 여섯째 인과 다섯째 나팔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

(5)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있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세 언약을 세우실 때에 그 언약을 믿는 유대인들이다(31:31~34)

 

 

. 들림받은 천상교회의 모습(7:9~17)

이 단원은 우리들에게 천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큰 무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이것이 모든 교회를 상징한다고 단적으로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받은 대다수를 포함한 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들은 먼저 휴거된 사람들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많은 성도들, 그리고 땅에 남아서 아직 변화받지 못한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구성된 무리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휴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오직 교회가 휴거된 다음에 나타날 천상교회의 모습을 개괄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것이 휴거된 천상교회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숫자이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다(7:9). 첫 번째 휴거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 차례의 휴거로 말미암아 집대성한 무리임에 틀림없다.

둘째로 이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42절에 보면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다는 말씀만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보좌 앞에 서있다는 사실로 보아 그들이 하늘에 막 도착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셋째로 7 14절에 언급한 대환난이 요한복음서 16 33절에 언급된 말씀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셀 수 없는 큰 무리 속에는 여러 세기에 걸쳐서 핍박받은 모든 성도들을 다 포함한 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었을 것이고, 또 상당수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사람들일 것이다. 부활성도가 최초로 휴거한 성도들의 숫자보다 많을 것이 당연하다.

 

7 9~17절 까지의 말씀이 최초의 휴거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영원까지의 기간을 말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우려보자. 그리고 7 15~17절 사이에 묘사된 말씀은 21 3~7절 사이에 나타난 장면과 똑같은 말씀이다.

7 9~17절까지의 말씀이 특별한 것이 아닌 일반적이 휴거를 말하고 있는 것 뿐이지, 영원한 축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묘사되 말씀과 장면이 모든 교회의 동시적 휴거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거대한 무리가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고 오직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l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일곱째인을 떼기 전에 휴거가 있을 것을 암시해주는 말씀이다.

 

이 큰 무리는 어떤 사람들이가? 그들은 과거 2000년 동안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이다. 이주장에 대한 적극적인 논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그것을 증거한다.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은 대체로 성경에 그 숫자를 명시해놓았다. 예를 들어, 열 두 지파라든지 또 애굽으로 내려간 사람의 수가 70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애굽에서부터 출애굽한 사람들이 가령 몇 명이었다는 숫자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또한 민수기에서 많은 숫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윗이 자기 백성의 숫자를 세어보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따른 한 가지 일이다. 세대는 계속 바뀌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한 사람들의 숫자는 끊임없이 계산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7 1~8절 사이에 지적된 바와 같이 그들은 항상 숫자를 가진다. 초대교회에도 처음에 열 두 사도가 있었고 그 다음에 70명의 제자로 증가되었다가 후에 성도들이 120명에서 3000명과 5000명으로 각각 증가하되,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다(2:47). 그러나 여기 7 9절에서는 능히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선언한다.

 

약간의 수학적 계산을 해봄으로써 우리는 이 큰 무리가 삼 년 반 동안 있게 될 대환난으로부터 나온 사람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가장 큰 숫자가 둘을 일 만 배해서 또 거기에다가 일 만 배 한 수, 2억이라는 수이기 때문인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수가 되기 위해서는 마병대의 수로 나타나는 2만 보다 훨씬 더 큰 숫자이어야 할 것이다(9:16).

 

(2)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출처가 그것을 증거한다(7:9). 5 9절과 10절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이 사람들이 바로 선택받아 하나님께 모여든 이방인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환언해서 그것이 교회란 말이다.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한다(15:14~19). 교회시대에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을 것이다. 주를 믿으면 이방인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저들도 얻을 수 있다. 저들도 역시 구원받을 자로 생각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유대인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또 이방인의 구별이 없을 것이 확실하다.

 

(3) 6 17절에서 질문한 “누가 능히 서리요?”하는 자격문제가 그것을 증거한다. 7 9~17절 사이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당도하여 서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교회에게만 휴거를 약속하셨으며, 또 교회 외에는 아무도 능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돌리실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실 것이다(11:25:26). 그러므로 여기있는 큰 무리는 로마서112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며 또 그들을 교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24장로들이나 네 생물, 그리고 144,000 성도들에게는 누구에게도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피로 씻어 깨끗하게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데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는 아직 이 엄청나게 큰 무리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교회를 제외하고서 감히 누가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휴거된 천상교회의 모습이라고 봄에 틀림없다.

 

(7) 천사들의 태도를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이 맨처음 한 말이 바로 “아멘”이란 응답이었다.(7:12).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때의 기쁨이 거기에 있었다(15:7).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좌와 어린양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천사들의 기쁨이 얼마나 충만했으면 그토록 기뻐하고 또 찬양을 거듭거듭 드렸겠는가?

 

(8) 그들이 입은 옷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깨끗하게 된 것이다(7:14). 이것은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다.

 

(9) 7 15~17절 사이의 말씀은 21 3~7절까지 기록된 말씀과 매우 비슷한 영원세계의 장면이다. 그리고 21 7절에서 말하는 이기는 일은 바로 승리하는 신앙을 뜻한다(5:4). 왜냐하면 그 앞절에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21:6).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흰 옷을 입었다 함은 그들의 행동이 깨끗했음을 의미한다(7:9). 왜냐하면 옷들이 보혈로 씻어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7:14). 그리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었다 함은 그들의 승리르 상징한다( 23:39~43).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했다. 그들이 초막절을 지킴은 하나님께서 잠깐 동안 자기 백성들과 함께 머물러 거하신다는 뜻을 가진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이것이 천년왕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14)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엿느리라: 여기에 나오는 큰 환난은 삼년 반 동안 있을 대환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초기에 그 대환난은 아주 비통한 나팔 소리와 더불어 시작될 것이다. 다섯째 나팔이 바로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8:13 ; 9:1).

 

그러나 7 9절 말씀은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휴거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해준다.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 비통한 일곱 나팔의 재앙을 경험하지 않고서 보좌 앞으로 나왔음에 틀림없다.

 

(2) 대환난은 사단이 이 땅으로 추방당하기 전에 시작될 수 없다. 사단은 다섯째 나팔을 불 때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9:1). 그리고 마흔 두달 동안의 무서운 상황이 전개되기 전에 세상을 정복하며(13:5), 남자 아이는 이미 보좌 앞으로 들림받게 된다(12:5). 이 남자 아이가 비록 7 9절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다른 한편 그 큰 무리의 일부에는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3) 일곱째 대접이 쏟아질 때에 왕국이 임할 것이다. 왕국시대에 우리는 하늘에서 성소를 더 이상 보지 못하며 대신에 에스겔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 땅위에 그것을 보게 된다. 대환난 기간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하지만 7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종들이 밤낮으로 그를 섬기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4) 대환난 기간 동안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7 9절에 언급된 큰 무리들이 이미 큰 환난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7:14). 이 큰 환난은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 사이에 있게 될 대환난과는 다를 것임에 틀림없다.

 

(5) 11 1절에 의하면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7 9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하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예시된 대환난이 그 당시에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성소가 보이지 않는데(21:22),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바로 성소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은 새로운 도성의 중심이 되신다. 312절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대하여 언급한 말씀을 보면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 하리라”는 표현이 발견된다. 이유인즉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소가 되기 때문이다.

 

(6) 성경은 특별히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성도가 있을 것을 지적한다(21:36, 3:10)

 

(7) 7 9절에 언급된 이 사람들이 사실상 삼년 반 동안의 대환난을 경험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열방들이 성전을 짓밟았을 때 그들도 함께 죽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11 2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보면 교회가 거기에 포함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7 9절에 기록된 그 무리가 삼년 반 동안의 대환난을 겪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8)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삼년 반 동안의 대환난은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관련. 다니엘서 12 1절에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한 말씀과 또 마태복음서 24 6~18절까지의 말씀은 유대 백성의 동정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초적인 목적은 대환난을 통해서 유대인들을 돌이키려 하심에 있다. 예레미야서 30 7절에 기록된 “야곱의 환난의 때”는 분명히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환난의 목적을 여러번씩 교회와 관련지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1 9절 말씀과 2 9, 10, 그리고 13절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복음서 16 33절 말씀에 따르면 환난은 지상에서 교회가 받을 분복처럼 되어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장기간의 고난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환난은 요한계시록 7 14절에 나타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 2 22절에 기록된 그 큰 환난은 7 14절에 나오는 환난과 전혀 다르며, 또 요한계시록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잇는 삼년 반 동안의 환난과도 같지 않다. 사도행전 14 22절에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 이 땅 위에서 겪게 될 공통적인 경험을 참고적으로 말한 것 뿐이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리라: 여기에서 옷이란 말이 복수로 되어 이다. 그리고 이 옷은 성도들의 의를 상징한다. 우리들의 의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그 옷(단수)은 의를 상징한다(61:10). 또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23:6).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이다(고전1:30).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이 옷은 보혈로 씻음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의 옷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입는 옷으로서 우리는 그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승리의 상징인 바 자신의 의의 옷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입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또 요한계시록 3 18절에서 말씀하고 잇는 그 흰 옷은 값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값을 주고서 살 수 없는 우리의 구속을 뜻한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또 저주받을 성도는 한 사람도 없다(5:24). 또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서서 자기의 행위에 따라 재판받지 않을 사람도 없다(고후5:10).

 

성도들의 옷은 이미 씻어 깨끗함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환난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이것은 앞 절에 대한 귀결절 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간과해주셨기 때문에 섬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16), (17)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 두 절 말씀을 이사야서 49 10절 말씀과 비교해보라(또 사 49:6과 행 13:47, 그리고 사49:8과 고후 6:2과 비교해보라).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기대하는 모든 것들이 다 충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거룩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더 이상 해나 달과 같은 빛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21 25절에 낮이란 말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새 땅에는 여전히 밤도 있을 것이다. 새 땅에 밤이 있을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우리가 거기에서 더 이상 눈물 흘릴 필요가 없음을 암시해준다.

 

7 9~17절 까이에 언급된 무리와 또 12 1~11절 까지의 말씀 속에 나타난 남자 아이로 상징되는 그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첫째로 7 10절 말씀에 의하면 그 무리는 어린 양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1211절 말씀에 따르면 저들이 어린 양의 피를 인하여 이김으로 남자 아이에게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7 0절에 언급된 저들은 보좌 앞에 서 있으며, 12 5절에 말씀한 그 남자 아이도 휴거되어 보좌 앞에 있다고 했다.

 

셋째로 7 10절에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으며, 12 10절에서도 그 구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왔다고 했다.

 

넷째로 7 1~8절에 HAUS EN 지파가 인맞은 것을 말씀하고 있고., 12 1절에 보면 그 여자가 머리에 열 두 별이 달린 면류관을 쓰고 있다고 했다(열 두 별이 달린 면류관은 열 두 사도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요셉이 꾼 꿈에서 열 N 별들이 분명히 열 두 지파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7 11절에서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장면을 목격했으며, 12 10절에서는 하늘에 큰 음성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여섯째로 7 9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부활의 몸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12 5절에 말씀하고 있는 남자 아이도 부활체를 소유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12 5절에 기록된 “올려 가더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환상을 해석하는 해석 원리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사도행전 13 33, 34 나타난 설명에 따라 우리는 이것이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부활의 몸을 가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부활하지 않은 상태는 벗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고후5:2,3, 20:26 ; 28:42).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을 확실한 사실로 증거하고 있다. 또 고린도후서 15장은 부활을 확실한 사실로 증거하고 있다. 또 고린도후서 5장은 부활에 관한 사실들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당장에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신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것인 미래에 분명하게 있을 사실이다. 요한계시록 4 6절에 보면 유리바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5장에 가서야 거기에 서있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15:2). 사도행전 2 34절 말씀은 다윗이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또 사무엘상 28 13, 14절까지의 말씀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왔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그들은 아직 부활체로 옷입지 못했음을 지적 해준다. 오직 주님 홀로 하늘레 올라가신 분이며 또 하늘에 계신 분이다(3:13). 하늘로 들림받아 올라간 에녹과 엘리야 마저도 지금은 그 어느 곳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직 변화된 몸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로 7 15절에서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되며, 12 12절에서는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거한다는 헬라어는 장막을 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 요한복음서 1 14절에 나오는 “거하시매”라는 말도 사실상 헬라어에 있어서는 장 친다는 뜻이다.

 

여덟째로 7 9절에 언급된 사람들은 이긴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사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승리 자들에게 약속한 것이 바로 흰 옷이며, 또 대환난의 시련을 겪지 않을 것이 인내의 말씀을 지켰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과 또한 가지는 종려나무가 항상 승리르 상징한다는 점이다. 12 5절에 언급된 그 남자 아이 역시 익니 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가 철장을 가지고 열방을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 나팔과 인과 대접

인은 은밀하게 떼어졌다. 그러나 나팔은 공개적으로 울렸다. 구약성경에서 나팔을 불 때에는 참으로 엄숙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본서에서 재현되고 있다(그러나 110절과 4 1절에서 만은 “나팔소리 같은”이라고 했음에 주의하라).

 

일곱 인으로부터 일곱 나팔이 나오고, 또 일곱 나팔로부터 일곱 대접이 나온다. 일곱 나팔은 서로 질서 있게 계속되는 반면에 그 기간이 매우 길다. 9 10절에 기록된 다섯째 나팔과 같은 경우 그것이 다섯 달 동안이나 계속된다. 그리고 9 15절에 묘사된 여섯째 나팔의 경우 적어도 13개월이나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9 15절에 나타난 년, , , 시라는 말들을 참조). 10 7절에 나타난 일곱째 나팔은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그 날”이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11 15절 말씀에 의하면 일곱째 나팔은 일곱 대접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일곱 대접은 일곱째 나팔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곱째 인으로부터 나오는 일곱 나팔과는 다르다. 그 때에 나팔들은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며, 일곱째 나팔이 울린 다음에는 더 이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도표를 그릴 수 있다.

 

일곱 인을 모두 떼기까지는 약 2천년이 걸린다. 그리고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는 그 책의 내용을 아무도 볼 수 없다. 또 일곱째 인이 일 곱 나팔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책의 기록들은 여섯째 나팔이 울린 이후까지 비밀로 간직될 것이다. 결국 일곱째 나팔이 울리자 마자 왕국이 도래한다. 그 때에 비로소 새로운 약속이 공개되며 하니님께서 세상을 위하여 준비한 축복이 나타난다( 31:31~34 ; 33:14, 15). 인과 나팔은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들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일곱인의 재앙은 지구의 사분의 일을 해칠 것이고(6:8), 또 일곱 나팔의 재앙은 지구의 삼분의 일을 손상시킨다는 점이다(8:7).

 

일곱째 나팔은 첫째 대접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가 일곱째 대접과 함께 끝마친다. 이것은 로마서 46 25절과 26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요한계시록 11 15절 말씀은 일곱째 나팔과 끝을 말하는 것으로 그때에 왕국이 홀연히 임할 것이다.

 

11 15~18절이 말하고 있는 “주의 진노”와 15 1절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조해 봄으로써 우리는 일곱 대접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을 떼는 일은 하늘에서 은밀하게 진행 되었다. 그러나 나팔들이 크게 울린 것은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청하라는 선언으로 생각된다. 한편 대접을 쏟은 사실은 소리없이 내용을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인을 떼는 것은 복음시대에 있을 기근과 지진, 그리고 전쟁과 같은 수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 기원을 알지 못하지만 신자들은 그 재앙의 원인을 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그것이 은밀하게 떼어진 것으로 보인다. 나팔이 울린 사실은 시대가 교체된 것을 지적해준다고 보겠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대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7장에 이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을 맞게 되며 이긴 자들이 하늘로 휴거하게 된다. 그리고 8장에 가서는 전쟁이 선포된다. 나팔은 관심을 촉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대접은 진노를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진노의 잔을 발견하는가 하면 여기에서는 진노의 대접을 찾아낼 수 있다. 진노의 대접은 진노의 잔보다 훨씬 더 잔혹한 것임에 틀림없다.

 

일곱 나팔의 재앙은 진실로 고통스럽다. 다음에 나오는 몇 가지 사실들을 한번 심사숙고해보자.

 

(1) 요한계시록은 원래 상징의 책이 아니다.

(2) 나팔 부는 일은 은밀한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의도를 내포한다. 장차 있게 될 모든 것을 나팔소리로 알린 것이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부활이 있게 된다. 이 나팔은 진실로 다른 어떤 나팔 보다 기적적이다.

(3) 일곱 나팔이 인류에게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4)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든지 아니면 주의 오심을 말하든지간에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왜 신약의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문자적인 것이라면 어찌해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재앙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인가?

(5) 교회 시대가 지날 때 하나님은 이제 구약적 위치로 돌아 오실 것이다(7). 따라서 모든 심판은 문자적으로 수행된다( &:15). 이사야서 11 15, 16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열방들을 심판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날과 같게 하시랄.” 그러나 이 때에는 그 때보다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서 23 7,8절의 말씀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내신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구원을 말한 예언의 말씀이다.

(6) 출애굽기 34 10절에서 말한 기적들의 가장 완전한, 그리고 최종적인 성취는 일곱 나팔이 울리게 될 바로 그 순간에 있을 것이다.

(7) 신명기 28 59절에 언급된 모든 재앙들은 아주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와 같은 기적적인 사실들을 종종 보게 될 것이다.

(8) 주님은 인자의 날이 노아나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7:26~28). 노아시대에 하나님은 하늘의 창문을 넓게 열어 비를 쏟으셨고, 롯의 때에는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듯 유활불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심판에 해당한다.

9) 하나님은 자신이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증명하실 필요가 있었다. 많은 다른 재앙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해버린다. 그러나 물이 변하여 피가 될 때 그것도 삼분의 일만 변화된 것을 볼 때 그들은 그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죄악이 관영할 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마태복음서 24 21~28절 사이에 기록된 그 큰 환난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그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들을 혹독하게 핍박할 것이다. 이 환난은 다섯째 나팔과 더불어 시작되어(9:1~11), 일곱째 나팔이 출현할 때까지 계속된다. 요한계시록 3 10절에 말씀한 시련이 온 세상에 오는 반면에 마태복음서 24 21~28절까지에 예언된 큰 환난은 유대인들에게 임할 것이다. 전자는 첫째 나팔이 울릴 때 시작되고 후자는 가장 빨라야 다섯째 나팔과 더불어 시작된다.

 

 

 

. 일곱째 인과 침묵(8:1, 2)

 

(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침묵이 있었다. 온 우주가 그렇게 고요한 것은 때가 바뀌기 때문이었다.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천사들이 시위하고 서잇는 동안에도 24장로들은 여전히 앉아 있었다. 일곱 천사들에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혹자는 가브리엘이 일곱 천사들 중에 하나로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팔은 전쟁은 상징한다(고전 14:8, 3:6, 19:16).

하늘의 뜻은 벌써 나팔 불 준비가 다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팔을 불도록 명령하시기에 앞서 수행해야 될 한 가지 일을 지금 기다리고 계신다. 그 한 가지 일이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는 일이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일은 곧 8 3~5절에 기록된 사실이다. 기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지금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

 

 

 

. 일곱 인을 뗀 후에 보여진 천상의 모습(8:3~5)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여기 나오는 다른 천사는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그는 제사장이시다. 모든 성도의 기도들은 이 천사가 드린 향과 더불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상징하는 이 향이 없이는 어떤 신자의 기도도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향내음을 통하여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된다.

 

왜 여기에서 주님은 제사장으로 호칭되지 아니하고 천사로 불리는가?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말한다(2:16). 신약성경 속에 포함된 서신들을 보면, 저자들이 신자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말할 때마다 그들은 항상 주님을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2:17).

 

그가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천사들은 사람보다 조금 더 고등하게 지음받았다. 창세기 18 2절과 16, 그리고 22절에 나오는 “사람들”이란 말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천사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써 아브라함과 매우 친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9 1절에 사용된 “천사들”이란 말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소외감이 있다. 그러나 창세기 19 10절과 12, 그리고 16절에 나오는 “사람들”이란 말은 롯을 돕는 바로 그 천사들에게 사용되었다. 요한계시시록 8 3절에서 주님을 천사로 표현한 이유는 때의 변화를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복음시대에는 그리스도가 더 이상 인자의 신분으로 계시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제사장으로 남아 계시지만 지금은 다른 천사로 나타나신 것이다.

 

여기 나오는 성도들은 분명히 시련을 겪고 있다.

 

구약시대에 향은 반드시 제단 불로 붙여져야만 했다. 다른 불은 허용되지 않는다. 제단은 주의 십자가를 상징하며 향은 기도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기도는 오직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상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기도는 다른 불, 즉 제단에서 취하지 않은 불을 가지고서는 결코 드려질 수 없다. 십자가 없이도 기도 또한 있을 수 없다.

주의 공로를 말한다. 연기만 피워 올라갈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향이 아니고서는 어떤 기도도 하나님 면전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5) 천사가 향로르 가지고 단 위에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우리들은 이 성도들이 무슨 내용의 기도를 드렸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확신하기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지금 그들이 분명히 받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나타난 성도의 기도들은 다섯째 인을 뗄 때에 제다 아래에서 들려왔던 그 탄원의 소리와 일치한다. 그들이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18:1~8).

 

기도가 있는 곳에 곧 응답의 역사가 나타난다. 땅에 던져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