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료 창고(Archive)/7-2 간극이론

간극이냐 아니냐에 대한 창세기 1:1-2의 연구

나다나엘(구 요나한) 2023. 3. 26. 16:05

간극이냐 아니냐에 대한 창세기 1:1-2의 연구

David F. Reagan

원문이 있는 곳: http://www.earnthebibe.org/gap_or_not.htm

 

서론

거의 40년 전, 필자는 테네시 주의 Knoxvie에 있는 한 독립 침례 교회에서 성장했다. 그 당시는 스코필드 관주 성경이 대세였고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씩 소지하고 있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구를 봉독할 때 스코필드 성경의 쪽수도 같이 명시해 줄 정도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독립 침례교회들 간에 무수한 분열과 말다툼이 생기기 전이었고 대다수가 창세기 1:1과 1:2 사이의 간극을 믿던 시절이었다.

오늘날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스코필드 성경에서 약점을 너무 많이 찾아낸 나머지 책을 갖고 있는 게 송구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스코필드가 주장하는 세대주의를 가운데에 두고 사람들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 우리는 회개와 주권 구원이라든가 다른 여러 교리들을 발견하여 이단을 판단하는 잣대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간극 이론은 1960년대에는 사람들이 뭔지도 몰랐던 집단인 탈레반 수준의 인지도에 겨우 머물러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성경을 진지하게 믿는 독자로 하여금 창세기 1:1과 1:2 사이의 간극에 대해 더 섬세한 관점으로 바라보길 촉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진행하기에 앞서, 필자가 의도하지 않는 저술 원칙을 먼저 몇 가지 밝히도록 하겠다.

  • 누군가가 간극과 관련하여 필자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고 해서 이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주제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거론이 거의 된 적 없는 단단하고 어려운 교리이다. 재창조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양 진영은 자기 주장을 지나치게 강경하게 고집해 왔다. 그러나 이 주제가 교제 중단과 분리의 사유까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최후의 수단은 더 중요하고 진짜 양보 불허인 교리를 위해서 아껴 두도록 하자.
  • 필자는 필자의 논지를 현대 과학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과학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6천여 년 전의 6일 창조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유일신 하나님의 천상 거처와 이 땅은 원창조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으며 재창조를 거쳐 존재한다는 것을 덧붙여 믿는다. 성경은 이 땅이 그때 너무나 처절하게 파멸된 바람에 지표면에 사실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도 진술한다.
  • 필자는 타인의 말과 글을 인용하여 논리를 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오로지 성경만을 인용하지 타인의 생각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오류를 범한다면(충분히 그럴 수 있으므로)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대해 필자가 이해를 잘못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다 거짓말쟁이이다(롬 3:4). 이 글은 고대 사람들이 재창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오로지 성경적인 가르침을 부지런히 찾은 조사 자료이다.
  • 필자는 성경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나 그리스어의 어휘, 문법을 거론하면서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두고 흠잡을 분도 있을 줄로 안다. 하지만 원어의 의미를 따지는 일은 영어 의미를 따지는 일만큼이나 어렵긴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논지의 모든 근거를 킹 제임스 성경 영어 본문만으로 한정할 것이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어는 독자가 개인적으로 원한다면 찾아보기 바란다.

 

문제의 핵심

현재 성경대로 문자적인 창조를 믿는 진영(이를 믿지 않는다면 이 글을 읽을 필요조차 없다)에서는 창세기 1:1에 대한 해석이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먼저 하나님의 명료한 말씀을 읽어 본 후 해석에 들어가도록 하자.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1. 한쪽에서는 이것이 6일 창조를 모두 요약하는 일종의 주제문이라고 가르친다. 그 논리대로라면 진짜 창조는 2절에서 어둡고 텅 빈 지구에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2. 또 한쪽에서는 1절도 5절까지 계속되는 첫째 날 창조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이 모두 첫째 날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3. 그 반면 이 글에서는 사뭇 다른 견해를 펴고자 한다. 창세기 1:1은 땅의 원시 창조이고 1:2는 그 땅이 파멸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후의 6일 창조는 사실상 재창조로 귀착된다. 물론 그 ‘둘째 창조’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우주의 기원인 것은 맞다.

 

이 교리의 중요성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너무 강경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필자는 이 교리가 분리 사유가 될 정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이 교리를 공부하고 깨달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사실 이 구절 하나면 충분하다. 하나님께서 언급하셨다면 그것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기록해 놓으셨다면 이는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필자의 이런 결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 글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연구한 결과물 역할만을 충실히 할 것이다.
  • 기원 문제는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을 진리 아니면 오류 중 하나로 가르는 거대한 전쟁터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쩌다가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 우주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런 부류의 모든 질문에는 인본주의적인 답변과 성경적인 답변이 존재한다. 그런 질문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갖냐에 따라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하나님을 부수적인 역할만 하신 분으로 격하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면 어떤 것이든 중요할 수밖에 없다.
  • 만약 하나님께서 예전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께서 지금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더욱 값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분은 태초부터 사람에게는 실패 후에도 또 다른 기회를 계속해서 주셨으나,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인간의 지식의 한계

인간의 지식은 어떤 분야에서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지 모르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부터 감춰 놓으신 것이 있다고 분명하게 진술한다.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계시된 그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 이것은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29:29)

 

이 구절로부터 우리는 세 종류의 지식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 힘만으로 스스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유추된 것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아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다면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께 순종하는 마음을 북돋우기 위해서이다(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 그 외에 인간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럴 수 없는 것도 있는데, 다음 성경 구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행적을 이해하는 수준을 그분께서 어떻게 의도적으로 제한해 놓으시는지를 보여준다.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셨고 또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정하여 두셨으므로 아무도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 낼 수 없도다.” (전 3:11)

 

인간이 스스로 알아 낼 수 없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거나 아니면 그냥 그분만의 비밀로 간직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는 정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계 10:3-4에서 비밀의 영역으로 남은 일곱 천둥의 음성 같은). 성경 공부의 초점은 인간이 직접 찾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기로 작정한 것들을 향해 맞춰져야 한다.

인간의 지식이 가장 제한되어 있는 곳은 다음 다섯 경우가 아닐까 한다.

  1. 위로는 하늘의 높음이요,
  2. 아래로는 땅의 깊음이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사람이 위로 하늘을 잴 수 있고 아래로 땅의 기초를 찾아낼 수 있을진대 나 또한 이스라엘의 씨가 행한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 31:37)
  3. 뒤로는 과거요,
  4. 앞으로는 미래이다.
    “너희는 옛적의 이전 일들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나니 나는 하나님이라. 그것을 다시 생각 속에 두라. 내가 처음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터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 46:9-10)
  5. 속으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어리석은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자기 마음을 드러내기를 기뻐하느니라.” (잠 18:2)

 

인간의 지식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먼저 고찰한 이유는 기원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 외에는 도저히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모든 과학 연구 결과들은 한결같이 증명할 수 없는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 적용되는 각종 자연 법칙들이 그때부터도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효할 거라는 가정이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만물이 예전부터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지속된다는 균일설이라는 오류이다. 성경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3:4-5)

 

필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이전 세상이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 확신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세상에 대해 알려 주고 계시는 면모는 그야말로 미량에 불과하다. 하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곳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지만 정보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는 창을 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개방해 주시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그 순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립되어 피조물들이 잔뜩 거주하는 커다란 세상을 감지하게 된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빛깔, 한번도 들은 적 없는 소리, 한번도 누린 적 없는 영광을 체험한다. 우리는 그 세상에 대해서 사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섬광 같은 짧은 시간 동안의 감상만으로도, 이 모든 세상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크심을 인지하기에는 충분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히 1:2)

 

주된 반론

이 글의 궁극적인 집필 목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필자는 간극에 대한 전형적인 반론들에 대해 하나씩 차례대로 답변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 어디에도 간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곳이 없다.”

일면 맞는 말이다. 필자가 찾아본 바로도 성경에서 단 한 구절로 간극을 명료하게 선언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교리들에 대해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사람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몇 살인지 단일 구절로 설명한 곳이 어디인가? 아니면 환란 전 휴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단일 구절이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훈계 위에 훈계를, 줄 위에 줄을,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씩 얹으며 성경을 공부하라고 가르치신다(사 28:10). 상당수의 교리들은 영적인 것들을 영적인 것과 비교하는 방법으로(고전 2:13) 차곡차곡 쌓아 가야 하는 것이 원래 맞다. 그러니 이 반론은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둘째, “성경은 전체 창조 과정이 6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못박는다.”

이것이 원창조와 그 파멸 가능성에 맞서는 가장 유력한 반론이라 여겨진다. 특히 두 구절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기 때문이니라.” (출 31:17)

 

이 구절의 위력을 필자는 잘 안다. 간극 반대자들에게 이 구절이 그토록 강력한 반대 근거로 와 닿는 이유는 그들이 간극 지지자들에 대해 사실이 아닌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가령, 필자는 현재 하늘에 있는 별들이 간극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믿지 않는다. 당장 이유를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그 당시의 우주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작았다고 믿는다. 또한 원래 세상의 파멸 규모는 심히 거대해서 만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시 만들어져야만 했다고 믿는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6일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 맞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그 전에 세상이 존재했음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창조하다’(create)와 ‘만들다’(make)의 차이를 또한 주목하기 바란다. 상기 구절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6일 동안 ‘만들었다’고 진술하지 창조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는(창 1:1)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고 진술한다. 성경을 주의 깊게 공부하면서 이러한 차이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성경은 뭔가를 생성하는 동작에 대해서 ‘창조하다’(create), ‘만들다’(make), ‘조성하다’(form)라는 세 단어를 사용한다. 모두 영어에서 매우 쉬운 기초 단어에 속한다. 이들은 의미가 비슷하며 어감 면에서 서로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창 1:1) 세상을 만드셨으며(창 2:2) 또 세상을 조성하셨다(시 90:2). 그래서 이들이 서로 완전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단어이며 한 의미의 서로 다른 면모를 미묘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음 용례들을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창조하다’와 ‘만들다’는 일반적인 창조 문맥에서 쓰였다(창 2:3-4; 5:1; 6:6-7). 세 단어(창조하다, 만들다, 조성하다)는 모두 사람의 창조 문맥에서 쓰인 적이 있다(창 1:27; 2:7; 5:1). 세 단어들의 공통된 발상은 무언가를 최종 완성된 상태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용법상 중요한 차이점도 발견된다.

  • ‘창조하다’는 없던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동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원을 강조하고 창조자라는 주체를 부각시킨다. 이 단어가 쓰인 예는 창 1:1, 21, 27; 시 89:12; 사 42:5; 엡 2:10; 계 4:11; 10:6이다.
  • ‘만들다’는 부품이나 원료를 조립하고 짜맞춰서 최종 결과물을 내는 동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과정을 중요시한다. 창 1:7, 16, 25, 31; 2:2, 22; 3:1을 보라.
  • ‘조성하다’는 모양이나 구성을 부여함을 뜻한다. 그래서 결과물에 초점이 맞춰진다. 창 2:7, 8, 19; 욥 26:13; 시 90:2; 94:9; 95:5를 보라.

 

성경에서 이 단어들이 제각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예의주시하라. 이들은 같은 대상에 대해 쓰일 수는 있으나 문맥별로 같은 행위의 제각기 다른 면모를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곳에서는 그 차이가 사소할지 모르나 어떤 곳에서는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은 부품을 조립하여 의자를 만들 수는 있으나, 나무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단어 선택의 차이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6일 동안 ‘만드셨다는’ 진술은 그 기간 동안 하늘과 땅을 처음으로 존재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있는 땅을 멸하고 새것을 창조하실 거라고 예고한 종말 부분을 찾아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 구절들을 보라.

  • “한 세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4)
  •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벧후 3:7)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 (벧후 3:13)

 

베드로후서와 여타 다른 성경 구절이(사 65:17; 계 21:1-5) 분명하게 가르치는 바와 같이 지금 있는 하늘과 땅은 훗날 완전히 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를 대체할 것이다. 이 문맥에서도 ‘창조’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어떤 것은 영속성을 띠고 있는지 그에 대해서 전도서 1:4는 “땅은 영원히 있다”라고 진술한다.

옛 땅이 파괴되고 새 땅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은 여전히 땅이며 땅 자체는 영원히 존재하는 셈이다. 이것이 성경 신자의 관점에서 본 전도서 1:4의 의미이다. 여러분 주변의 성경 교사 아무에게나 이 구절에 대해서 한번 질문을 해 보기 바란다. 대부분이 이 구절의 ‘영원히’는 그냥 굉장히 긴 시간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줄 것이다. 간극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그 기간은 숫제 6천여 년이 된다. 성경에서 ‘영원히’의 의미는 물론 혼동을 일으킬 때도 있으나 우리가 그 의미를 우리 구미에 맞게 너무 손쉽게 단정지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함을 필자는 확신한다.

결론을 내자면 이렇다. 출 20:11과 31:17에서 모든 것이 6일만에 만들어졌다는 진술은 창 1:1과 1:2 사이의 간극을 부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원창조 세상은 지금 세상이 훗날 파멸될 수준과 거의 같은 강도로 파멸되었다. 그러니 만드는 것을 넘어 창조라는 말이 들어가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셋째, “간극은 무신론적인 지질학과의 타협이다.”

과거의 간극 주장자들이 자신의 신념과 현대 과학을 절충해서 가르친 경우가 많았던 건 사실이다. 간극으로 지질학적 연대기를 설명하고 화석과 공룡 뼈대의 존재까지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분야에 있어 현대 과학에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성년 창조설(아담이 아기가 아닌 성인으로 곧바로 창조된 것처럼, 창조 직후부터 이 땅도 오래 된 것처럼 보이게 형성됐다는 것)과 노아의 홍수만으로 우리가 지금 관찰하는 지질학적 구조물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 대한 근거가 미약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이론을 거부할 빌미가 되지는 못한다. 필자가 언급하는 간극은 과학과의 타협안이 아니라 성경 교리이다.

 

넷째, “창세기의 문장 구조 자체가 간극이 틈탈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반론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대체로 창세기 1:2의 전반부에 시선을 집중한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의 영어 원문은 And로 시작하며 was라는 평이한 be 동사가 이 문장의 술어이다. 그러니 이 문장은 창세기 1:1의 진술에 대해 바로 다음 1:2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형태일 뿐, 간극의 가능성은 문장 구조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반론의 요지이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려던 그 찰나에 땅은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 반론에 대한 가장 간단한 답변은 이 구절의 문장 구조를 창세기 4:2와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이브가 또 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지키는 자였으나 가인은 땅을 가는 자더라.” 두 구절이 얼마나 유사한지 영어 문장을 살펴보자.

  • 둘 다 앞 문장이 명사로 끝난다. (하늘과 땅 / 그의 동생 아벨)
  • 다음 문장은 둘 다 And로 시작한다.
  • 앞 문장에서 나왔던 명사가 또 반복된다. (땅 / 아벨)
  • 그 문장도 was로 끝난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 양을 지키는 자였으나)

 

그렇다. 창세기 4:2의 문장 구조는 창세기 1:1-2와 사실상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시점이 하늘과 땅이 창조되던 첫 순간과 반드시 일치해야만 한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아벨도 갓 태어나자마자 양을 지키는 자 노릇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우리는 아벨이 태어난 시점과 그가 직업을 갖게 된 시점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음을 자연스레 가정하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2의 문장 구조도 땅의 원창조와 그 상태 사이에 간극이 들어갈 틈이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다섯째, “아담보다 지구에 먼저 살았던 사람은 없다.”

아담이야말로 첫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면서 간극을 반박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고전 15:45)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고전 15:47)

 

답변은 간단하다. 지구에 최초로 살던 존재들은 물론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이든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존재일 수는 있으나 사람은 결코 아니다.

 

여섯째, “아담 이전에 이 땅에 죄와 사망이란 있을 수 없다.”

아담이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을 최초로 들여온 장본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롬 5:12. 고전 15:21-22도 볼 것)

 

그러니 아담이 있기도 전에 이 땅에 죄와 사망, 세상의 파멸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반론의 요지이다.

아담의 타락이 ‘이 악한 세상’(갈 1:4)에다 죄와 심판을 가져온 것은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들’(히 1:2)을 만드신 분으로 성경에 선언되어 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므로 현 세상 말고도 여러 세상들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세상들이 등장한다.

  1. ‘그때의 세상’(벧후 3:6):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2. ‘옛 세상’(벧후 2:5):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 번째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
  3. ‘악한 현 세상’(갈 1:4): 그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4. ‘다가오는 세상’(히 2:5):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시키지 아니하셨느니라.” (히 6:5도 볼 것)

 

이 현 세상에 존재하는 죄와 사망이 아담이 동산에서 지은 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담이 죄 자체를 존재하게 한 것은 아니다. 뱀은 아담보다도 먼저 반역하여 이브를 유혹하고 있었다. 또한 이전 세상이 죄로 인해 먼저 파멸 당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원창조에 대해 제기되어 온 주된 반론들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성경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니 모두 허점이 있고 반박 가능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반론만을 방어했을 뿐 아직 재창조를 직접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지구 초창기의 역사를 알려주는 증거 세 군데를 고찰하도록 하겠다.

  1. 성경이 창조 과정에 대해 진술하는 증거
  2. 땅의 상태에 대한 증거
  3. 마귀론에 근거한 증거

 

 

창조 과정 자체가 암시하는 증거

하늘과 하늘들

창세기 1:1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나님은 분명하게 진술한다. 이 하늘은 보다시피 단수이다. 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성경이 영어로 온전히 보존되었음을 믿는 신자와 히브리어 학구파 추종자 사이에 분리가 생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문맥에 따라 하늘이 될 수도 있고 하늘들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현대에 나온 대다수의 영어 역본들은 창세기 1:1의 하늘을 복수로 번역했다. 하지만 성경을 믿는 관점에서 창세기 1장과 하늘들에 대한 교리를 연구해 보면, 이 단어는 단수여야만 유일하게 올바른 번역이 됨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에 앞서 창세기 1:1과 2:1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1:1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2:1로 가면 성경의 선언은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로 바뀐다. 땅은 2장에서도 여전히 단수이지만 1:1의 하늘은 2:1에서 하늘들이 된 것이다. 하늘들이 추가로 창조됨으로써 최종적으로 하늘이 몇 개가 된 셈인가?

성경은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경험을 회고하는 고린도후서 12:2에서 하늘의 개수에 대해 가르쳐 준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노니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의 하늘이며 가장 높은 하늘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하늘이 세 개 존재한다.

이 하늘들은 서로 층을 이루어 건축되어 있다(암 9:6). 이는 노아의 방주가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창 6:16).

  • 첫째 하늘은 지구의 대기권으로, ‘하늘의 열린 궁창’(창 1:20)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가까이 접하는 하늘이며 상부의 둘째 하늘에 대해서도 개방되어 있기(양 하늘 사이에 뭔가 막히고 차단된 게 없이) 때문에 그렇다. 이 하늘은 6일 창조의 둘째 날에 창조되었다. (창 1:6-8)
  • 둘째 하늘은 별들이 존재하는 우주 공간이다. 성경에서 ‘하늘의 궁창’(창 1:14-19)이라고 불렸으며 역시 6일 창조의 둘째 날에 창조되었다. (창 1:6-8)
  • 셋째 하늘(고후 12:4)은 그냥 하늘 내지 하나님의 하늘(살전 4:16)이라고 언급됐다. 어떤 곳에서는 ‘하늘들의 하늘’(느 9:6; 시 148:4)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뒤에는 ‘낙원’(고후 12:4)이라는 표현도 쓰였다. 이 하늘은 창세기 1:1에서 가장 처음에 창조되었다. 그때는 하늘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창세기 2:1에서는 ‘하늘들’인 반면 1:1에서는 그냥 ‘하늘’인 것이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하늘들 사이의 구분이 없었다. 창세기 1:1의 하늘은 6일 창조 동안에 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존재한 하나님의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성령의 움직임

성령의 활동 중 하나는 ‘새롭게 함’이다. 뭔가를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보내어 “지면을 새롭게 하셨다” (시 104:30).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하신 일이기도 하다(딛 3:5). 그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2에서 파멸된 땅에 대해서도 그분은 정확하게 같은 맥락의 일을 하신 셈이다. 그런데 새롭게 만드는 일은 뭔가 옛 것이 이미 존재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6일의 규칙성

성경의 6일 창조 기록을 살펴보면 각 하루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르시되”로 시작하고(창 1:3, 6, 9, 14, 20, 24) “그 저녁과 아침이 [몇]째 날이니라.”로 끝난다(창 1:5, 8, 13, 19, 23, 31). 이 규칙에 따르면 6일 창조의 첫째 날은 1:3에서 시작되며, 1절과 2절의 사건은 그보다 전에 있었다.

 

채우라는(replenish) 명령

사람은 창조되고 나서 ‘땅을 채우라’(replenish the earth)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replenish는 가장 보편적으로는 ‘다시 채우다’라는 뜻이다. 그렇다. 히브리어는 그냥 ‘채우다’도 되고 영어로도 일부 문맥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번역되기도 한다는 것 역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의미가 헷갈리기 쉬운 곳에서는 역시 성경에 확실한 해답이 있는 법이다. 이 문제의 해답은 창세기 9:1에 있다. 뒤 단락을 보면, 그 말씀은 홍수로 인한 파멸이 끝난 후 노아와 그의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명령이며 명백하게 다시 채운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 명령은 창세기 1:28의 명령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며 이는 replenish의 의미도 서로 동일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첫째 날의 분량상의 불균형

만약 창세기 1:1-2가 6일 중 첫째 날에 포함되어 있다면, 다음 사건들도 첫째 날에 전부 일어났다는 논리가 된다.

  1. 하나님의 하늘의 창조
  2. 천사, 그룹, 스랍 같은 하늘의 영적 존재들의 창조
  3. 땅의 창조
  4. 땅의 기초가 놓일 때 천사들이 노래한 것 (욥 38:4-7)
  5. 땅 위의 물들의 창조 (창 1:2)
  6. 물들 위에서 하나님의 영이 움직임
  7. 빛의 창조 (이 순서대로라면 앞에서 천사들은 암흑천지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뜻임)
  8. 어둠에서 빛이 분리됨

 

아무리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여 어떤 방식으로나 역사하실 수 있다 하더라도 첫째 날에만 이렇게 많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겨우 한두 가지 창조만 행해진 다른 날에 비해 일관성이 없으며, 이야기 전개에 있어 불균형을 초래한다.

 

땅의 상태에 대한 증거

형태가 없음

창세기 1:2에 따르면 땅은 ‘형태가 없었다.’ 마치 이 모양도 되고 저 모양도 되는 아메바처럼, 이렇다할 특정한 모양을 갖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간극이 없고 이것이 땅의 창조 직후 원시 상태를 나타내는 진술이라면, 땅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단번에 완전히 창조되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된다. 간극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땅은 셋째 날이 되기까지는 완성도 되지 않았으며(창 1:9-10) 하나님도 그때에서야 보기 좋았다는 말씀을 해야 한다(10절).

그렇다면 이는 불완전한 창조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무언가 일을 하면 거기에 나중에 어떤 것도 더해질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다(전 3:14). 간극을 배제한다면 이 구절은 땅의 창조에다가는 적용할 수 없어진다.

 

거주자가 없음

창세기 1:2는 땅이 ‘비어 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대해 “헛되이 창조하지 않고 거주하게끔 조성했다”고 말씀하신다(사 45:18). 그렇다. 창세기 1:2의 진술은 원창조의 성격에서 어긋나 있는 것이다.

 

빛이 없음

창세기 1:1-3을 간극을 배제하고 순서대로 그대로 읽는다면, 하나님은 땅을 어둠 속에서 창조하셨다. 심지어는 창조 후에도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다.” (2절) 성경에 따르면 땅의 기초가 놓일 때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했다”고 하는데(욥 38:7) 그들은 암흑천지 속에서 노래한 것일까? 이 혼동은 현재의 땅 이전에 땅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쉽게 해소된다.

 

파멸에 대한 묘사

위에서 열거한 땅의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 단계라기보다는 뭔가 끔찍한 이변 내지 파멸의 결과에 더 가깝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심판을 묘사하는 문맥인 다른 구절을 찾아보면 이것이 더욱 명확해진다. 창세기 1:2와 예레미야서 4:23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 창세기 1:2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
  • 예레미야서 4:23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빛이 없고’

 

예레미야서 4장이 묘사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난 큰 전쟁(19절)이 야기한 파멸이다(20절). 동일한 단어가 하나님의 창조도 묘사하고 하나님의 파멸도 묘사하는 데 동시에 쓰일 수 있을까? 정반대 방향으로 일어난 역사의 결과가 동일할 수가 있을까?

비슷한 예가 나훔서 2:10에서도 발견된다. 이 구절에서도 역시 죄악으로 인한 전쟁과 파멸이 야기된다. 이를 묘사하는 단어 역시 ‘비어 있음’(void, empty), ‘피폐함’(waste), ‘검음’(blackness) 따위이다.

물론 예레미야서 4:23과 나훔서 2:10은 창세기 1:2의 사건을 가리키는 문맥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점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의 동일하다시피한 유사한 표현이 어떻게 한 곳에서는 창조 결과를 묘사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파멸 결과를 묘사할 수 있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깊음의 표면

창세기 1:2는 방대한 양의 물이 지구를 에워싼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지혜(예수님의 예표)는 그때 거기서 깊음의 표면에다 한계를 정하셨다(잠 8:27). 이 물은 나뉘어져서 첫 두 하늘 아래에 있는 바다들을 채우는 한편 우주 공간 너머로 둘째 하늘 바깥쪽도 감싸게 되었다(창 1:6-8). 이렇게 바깥에 있는 물은 성경에서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시 148:4).

물에 잠겨 있는 땅의 표면은 노아의 홍수에 대한 묘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방주가 물들의 표면 위로 올라갔으며”(창 7:18). 그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2는 유사한 파멸을 겪은 원창조 당시의 지구에 대한 묘사라 볼 수 있다. 이는 노아의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앞으로 땅을 결코 홍수로 멸하지 않으실 거라 하신 약속(창 9:8-17)과 호응 관계를 형성한다. 규모는 다를지언정 그분께서 땅을 물로 심판하신 적이 두 번이나 있으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 정도는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물난리를 겪을 때마다 이게 또 지구 멸망의 징조는 아닌지 공포에 떨게 되었을 것이다. 미래에 그분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땅을 멸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불을 사용하시지 홍수는 다시는 동원되지 않을 것이다.

 

기쁨이 없음

욥기 38:7에 따르면 땅의 기초들이 놓일 때(4절) 하나님의 아들들(천사)이 노래하고 기뻐 소리질렀다고 나온다. 그런데 창세기 1:2가 말하는 땅의 상태로부터 기뻐할 만한 근거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 땅은 그저 형태도 없고 비어 있고 어두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욥기의 장면이, 하나님께서 드디어 땅에 대해서 보기 좋다고 말씀하셨던(창 1:9-10) 6일 창조의 셋째 날이 될 수도 없다. 땅의 기초가 놓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기 38장은 6일 창조 이전의 시점이어야만 말이 된다.

 

마귀론에 근거한 증거

지금까지 우리는 간극에 대한 주된 반론들에 대해 답변하였으며 창세기 1:1-3의 진술은 간극을 저변에 깔고서 읽어야 논리가 성립함을 보여 왔다. 그러나 간극에 대한 가장 큰 증거는 마귀론에서 발견된다. 이제부터는 여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시간 전개상으로

만약 6일 창조 이전에 다른 창조와 파멸이 없었다면 마귀는 나이 면에서 인류보다 절대로 5일 이상을 앞설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음 사건들이 6일 창조의 첫째 날부터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는 날 사이의 기간에 반드시 끼여 있어야만 한다.

  • 루시퍼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으로서 하나님을 섬김 (겔 28:11-15)
  • 교만으로 인해 루시퍼가 타락함 (사 14:12-15)
  • 사탄을 따르던 천사들도 타락함 (마 25:41)
  • 마귀들(devils)이 생겨남. (참고로 많은 성경학자들이 타락한 천사들과 마귀들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 마귀와 그의 천사들에 대해 영존하는 불이 예비됨(마 25:41). (이 불은 사탄이 타락하는 바람에 그 필요성이 생김으로써 예비되었으나, 사람의 타락과는 무관하게 그보다 훨씬 전에 생긴 것이어야만 한다. 이 불이 애초에 사람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과, ‘사람’”을 대상으로 예비되었다고 성경의 진술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은 이 장소에 정녕 불청객으로 동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와 타락 사이의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 아담이 창조되고서 셋이라는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130년이다. (창 5:2-3)
  • 아담이 타락하고서 셋이 태어나기까지 그 사이 기간 동안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고(창 4:1-2), 그들이 자라 성인이 되었으며(특별히 긴 시간이 흘렀음) 서로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고(창 4:2)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렸다(창 4:3-4). 그리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고(8절) 주의 앞을 떠나서 자기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16절). 따라서 아담 부부가 에덴의 동산에서 머문 기간은 짧을 수밖에 없다.
  •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추방 당한 것은 특별히 생명 나무의 열매까지 먹고서 영원히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창 3:22). 그들이 그 열매를 먹지 못한 것은 자명하다. 이 역시 동산 체류 기간이 짧았음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 모든 마귀의 역사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인간이 생각하기에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왔음을 감안한다면 그런 가정은 매우 부자연스러우며 가능성이 희박하다.

끝으로 생각해 볼 것은 사탄이 ‘저 옛 뱀’(계 12:9; 20:2)이라고 일컬어졌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아담보다 겨우 5일밖에 더 많지 않은 존재에게 이 칭호가 과연 어울릴까?

 

사탄이 세상에 대해 주장하는 권리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언급하셨고(요 12:31) 바울은 ‘이 세상의 신’이라고 언급했다(고후 4:4). 사탄은 어떻게 해서 그런 칭호를 얻었으며, 이를 언제 얻었을까?

누가복음 4:5-6을 보면 사탄은 이 세상의 모든 왕국들이 자신에게 넘겨졌다고 예수님께 으스댔다.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나님 한 분만이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만 대답하셨다(눅 4:7-8). 세상 왕국들이 마귀에게 죄다 넘어갔다는 주장 자체는 주님께서도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는 언제부터 유효했던 것일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사탄이 에덴의 동산에 나타나 있을 때부터 이미 그는 뱀이었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사탄이 전부터 세상을 통치해 왔다면 그는 언제부터 그 권한을 행사한 것일까?

사탄이 최초로 하나님께 반역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서 14:12-15을 보면, 마귀는 자기 왕좌를 하나님의 별들 위로 높이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13절). 왕좌를 높이려면 당연히 왕좌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왕좌란 왕이 있는 곳, 그리고 그 왕이 다스리는 왕국을 수반한다. 사탄이 타락하기 전에 그가 다스리던 왕국은 하나님의 별들보다 아래에 있고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보다 아래에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땅밖에 없다. 사탄은 하나님께 반역하기 전에는 땅에 왕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땅에 대한 권리를 무엇을 근거로 주장하는지가 설명된다. 창세기 1:2 이전의 땅은 루시퍼의 통치 영역이었으며 땅을 다스리는 것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였다.

 

사탄의 최초 특성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8:44)요 ‘처음부터 죄를 짓는다’(요일 3:8)고 성경은 말한다. 이 ‘처음’은 어떤 시점을 가리킬까? 6일 창조의 시작을 가리키는 처음임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간극이 없고 마귀가 6일 창조의 첫째 날에 창조된 것이라면 그는 원천적으로 죄짓는 자요 살인자로 창조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성경적으로 모순이요 있을 수 없는 설정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말이 된다.
  • 둘째, 성경은 마귀가 초기에 완벽한 형태로 창조되었으며 나중에야 불법이 발견되었다고 분명하게 진술한다. (겔 28:15 참고)

그는 창조되던 날에 완벽했지만 우리가 ‘처음’이라고 부르는 그 창조의 시점에서는 죄짓는 자요 살인자였다. 그러니 그는 자신이 창조되던 시점과 창세기 1장이 다루는 세상이 창조되던 시점의 사이에 죄에 빠지고 타락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시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간극뿐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귀들의 기원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소재는 약간의 추론이 동원되며 핵심적인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을 잘 생각해 보자.

  • 마귀들이란 사탄을 따르는 악한 영이다.
  • 마귀들은 단순히 악한 천사와는 다른 존재인데, 왜냐하면 천사들은 몸이 있는 반면 저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사실 마귀들은 그런 몸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항상 지닌 것 같다. (눅 8:30-33 참고)

그렇다면 이 마귀들이란, 아담 이전에 이 땅에서 살다가 나중에 하나님께 반역하여 육체를 잃고 이 땅을 떠돌게 된 영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들은 그렇게 정처 없이 방황하다 최후의 심판 때 영원히 멸망할 운명인 것이다. 예수님과 마주친 마귀들은 주님께서 ‘때가 되기도 전에’(마 8:29) 자신들을 괴롭히기라도 하시려는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설령 마귀들의 정체가 이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의 기원은 여전히 창 1:1-3 사이의 문맥에 있어야 함은 틀림없다.

 

결론

하나님은 원창조와 땅의 파멸에 대해 성경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할애하여 다루지는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제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믿는 신자들 사이에 분열이 생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경을 수 년간 연구한 결과 필자는 현 세상 이전에 무언가 사건이 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이 먼저 생겨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그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는 결코 없겠지만 그런 시기가 있긴 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고하다.

 

영적 적용

간극을 믿음으로써 성경을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풍부하다. 이를 열거하면서 글을 맺는다.

 

창조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시작한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형태를 조성하고 코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했다(창 2:7). 사람은 죄 없이 완벽한 상태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출발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순으로 창조를 명령하셨지, ‘땅과 하늘’이 아니듯이). 그의 주변 여건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에덴의 동산이 그의 관할이었고 그에게는 합당한 협력자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매일 그의 상태를 점검도 하셨다. 이 순간이 얼마나 환상적이었을까?

 

죄와 파멸

그런데 창세기 1:2이 심판의 결과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파멸의 장면을 묘사하듯이, 사람도 금지된 열매를 먹는 바람에 하나님과 높은 권세를 누리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의 상태는 당시의 땅의 상태와 영적으로 일치한다.

  • 그의 삶은 형태가 없다. 사는 목적과 방향을 상실했다. 정처 없이 떠돌면서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향해 헛걸음을 할 뿐이다.
  • 그의 삶은 비어 있다. 그저 허무하고 헛될 뿐이다.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 마음에 계시지 않는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이다.
  • 그의 삶은 빛이 없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암흑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이 세상의 신에 의해 철저히 가려지고 말았다(고후 4:4).
  • 그의 삶은 기초가 없다. 하나님의 진리 위에서 굳건히 서는 대신, 위에서 쏟아지는 물의 홍수 속에 잠기고 만다. 그는 수면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재창조

사람은 단순한 개선만으로는 회복될 수가 없다.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만 한다. 그는 구원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다(엡 2:1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 5:17). 옛 것들은 다 지나가고 모든 것들이 새로워진다. 원창조 당시의 땅이 그렇게 된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의 옛 생활은 지워져 없어진다. 그분께서는 사람의 이런 재창조 시점을 진짜 시작으로 간주하신다.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물들의 표면 위를 움직인다. 성령이 움직임으로써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찔림을 받고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거절은 곧 영원한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은 사람의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딛 3:5). 아버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선언하심으로써 그 빛은 사람의 영과 혼을 향해 비춘다. 그에 덧붙여 성령은 사람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그의 생각의 “영을 새롭게 한다.”(엡 4:23)

이 모든 교리 고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독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인의 구주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은 살면서 자신이 죄로 가득 찬 가운데에 있고 그 때문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 적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여러분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여러분의 그 빚을 갚으셨다. 여러분이 할 일은 죄에서 돌이켜서 그분을 여러분의 영원한 구주로 믿는 것뿐이다. 만약 그렇게 한 적이 없다면 지금 즉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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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youtu.be/SewgZ96ur8w
2. https://www.kjvbible.org/thedeba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