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워치만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1)

요나한 2016. 6. 19. 08:05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1)

앞에서 우리는 창세기 2장의 여인이 바로 에베소서 5장의 여인이고 또한 계시록 12장의 여인임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한 여인을 보겠다. 바로 계시록 21장과 22장에 있는 여인이다.

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과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비록 그 사이의 간격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일치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여기 계시록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온다. 창세기에 생명나무가 있고 여기에도 생명나무가 있다. 창세기에서 강물이 에덴으로부터 흘러나오며, 계시록에서도 생명 강물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온다. 창세기에 정금과 진주 (베델리엄)와 각종 보석(호마노)이 있고 계시록에도 정금과 진주와 각종 보석이 있다. 창세기 2장에 아담과 아담의 아내인 하와가 있고, 계시록 21장에도 어린양이 있고 또한 어린양의 아내가 있다. 이 어린 양의 아내가 바로 새 예루살렘이며,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서 영원한 목적을 이루신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은 타락했고, 따라서 사망, 질병, 고통, 저주가 들어왔다. 그러나 계시록 21장에 이를 때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더이상 사망이나 슬픔이나 애곡함이나 고통이 없다. 왜냐하면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본다면, 창세기 1장부터 3 장과 계시록 21, 22장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들은 시간의 영역의 두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우리는 네 명의 여인을 보았다. 창세기 2장의 하와, 에베소서 5장의 아내(교회), 계시록 12장의 이상 중의 여인, 계시록 21장의 어린 양의 아내이다. 이 네 명의 여인은 사실상 한 여인인데 다만 그녀의 역사가 네 단계로 나뉘었을 뿐이다. 그녀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을 때에는 하와라고 불렸고, 그녀가 땅에서 구속함을 받고 그리스도를 표현했을 때에는 교회라고 불렸다. 그녀가 큰 용에 의해 핍박을 받았을 때에는 하늘의 큰 이상 중의 여인이고, 영원 미래 안에서 완전히 영광을 얻었을 때에는 바로 어린양의 아내이다. 이 네 명의 여인은 하나님께서 영원 과거와 영원 미래 사이에서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세기 2장의 그 여인은 하나님이 영원 과거 안에서 마음속에 정하신 한 여인이다. 계시록 21장의 그 여인은 영원 미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한 여인이다. 이 두 여인 사이에 다른 두 여인이 있다. 한 명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비하신 교회이고, 다른 한 명은 마지막 시기에 사내아이를 해산한 그 여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네 명의 여인은 한 여인의 역사의 네 단계이다. 한 단계는 영원 과거 안에 있고, 그 다음의 두 단계는 영원 과거 와 영원 미래 사이에 있고, 마지막 한 단계는 영원 미래 안에 있다. 이 네 여인이 비록 서로 다르지만, 함께 모아보면 여전히 같은 여인이다. 어린양의 아내는 에베소서 5장의 그 여인이다. 주 예수님이 곧 어린양이시므로 에베소서 5장의 여인이 어린양의 아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그 여인은 하와와 같고, 하와는 또한 계시록 21장의 어린양의 아내와 같다. 이기는 이가 전체 교회 일을 대신한 후에 계시록 12장의 그 여인은 계시록 21장 여인을 이끌어 올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영원 미래 안에서 틀림없이 사탄을 완전히 처리하고 통치권을 가진 한 여인을 얻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실로 어린 양을 위해 아내를 얻으실 것이고, 그분의 목적은 성취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계시록 12장의 여인이 어떻게 21장의 여인이 되는지를 보겠다.



바벨론의 멸망

계시록 17 1-3절과 21 9-10절에는 두 여인이 있는데, 하나는 큰 음녀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신부라 불린다.

17
1 :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대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1
9 :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17
3 :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21
10 :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령이 사람을 감동시켜 성경을 쓸 때에 특별히 두 여인을 지적하여 대조를 이루도록 쓴 것은 우리에게 분명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이다

먼저 음녀에 관해 보기로 하자.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언급된 음녀는 바벨론이다. 그녀가 한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그녀의 길을 기뻐하지 않으셨는가? 바벨론이 대표한 것은 무엇인가? 바빌론의 원칙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계속 바벨론을 처리하고 계신가? 왜 바벨론이 심판을 받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어린양의 아내가 나왔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사 우리로 하여금 성경 안의 바벨론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보게 하시기 바란다

'
바벨론' 이라는 명사는 '바벨'에서 파생되었다. 우리는 마땅히 성경 중에서 바벨탑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바벨탑의 원칙은 바로 땅에서 하늘까지 닿도록 건축하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벽돌로 바벨탑을 쌓았다. 벽돌과 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돌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벽돌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벽돌은 사람이 발명한 것이며 사람의 산물이다. 바벨론의 의미는 사람이 자기의 방법을 사용해서 하늘과 직통하는 한 탑을 세우는 것이다. 바벨론이 대표하고 있는 바는 인간의 능력이다. 바벨론은 거짓 기독교를 대표한다. 거짓 기독교는 성령으로 권위를 갖도록 하지 않으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지도 않고 사람의 노력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한다. 모든 것이 사람이 구운 벽돌이고, 모든 것이 사람의 행위이다.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천연적인 재능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로 주님께, "주여, 당신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능력으로 영적인 일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땅에서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통하는 한 다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까지 직통하는 한 탑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없다. 어떤 이는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서 조금만 신학을 공부하면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벽돌이다. 어떤 사람은 매우 총명 하여 약간의 도움을 받고 약간의 지식을 축적하게 되면 즉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벽돌이다. 어떤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그를 청하여 교회에 사무를 보도록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벽돌이다. 사람의 능력으로 하늘까지 통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벽돌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사람을 위한 지위가 없다고 다시한번 강조해야 한다. 하늘에 속한 것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며, 땅위의 것은 결코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 사람의 문제는 바로 사람이 심판 아래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재와 같고 진흙과 같음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사람은 높이 세우려고 하지만, 하늘은 사람보다 훨씬 높다. 사람이 세운 탑이 아무리 높아도 사람은 여전히 하늘을 만질 수 없고, 하늘은 여전히 사람 위에 있다. 사람이 아무리 기어오르고, 아무리 높이 세운다 해도, 그리고 설령 그가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여전히 하늘을 만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계획을 파괴하신 것은 바로, 사람 자신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데 있다.

구약에서 이 바벨의 원칙을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일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후에, 첫 번째로 범죄한 사람은 아간이었다. 그럼 무슨 죄를 범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7:21)." 바벨론은 시날 땅에 있었고, 시날을 언급하는 것은 바로 바벨론을 가르켜 말한 것이다. 바벨론의 외투 한 벌이 아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 것이다. 무엇을 가르켜 아름다운 외투라고 했는가? 아름다운 옷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 입는 옷을 말한다. 사람은 아름다운 옷을 입으며, 자신을 단장하고,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조금 더 돋보이려고 한다. 바벨론의 옷을 탐했던 것은 바로 치장하고, 체면을 세우고,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아간이 범한 죄이다.

신약에 와서 교회가 시작될 때에 첫 번째로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성경은 그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무슨 죄를 범했는가? 그들은 성령을 속였다. 그들은 그다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을 지극히 사랑한 것처럼 가장했다. 그들은 자원함으로 기꺼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면서도, 사람 앞에서 완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날의 옷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원칙은, 실지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고, 사람 앞에서 사람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그런 척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하나의 위험은 바로 외면적으로 신령한 모양을 가장하는 것이다. 수많은 영적인 태도들이 다 위선적이며 , 수많은 긴 기도들도 위선적이며, 수 많은 기도하는 듯한 목소리도 위선적인 것이다. 실지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외면적으로 그렇게 가장하는 이것이 바벨론의 원칙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을때,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원칙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들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위선을 행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신부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위선적인 일은 음부의 원칙에 따라서 한 것이지, 신부의 원칙에 따라서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 앞에서 외식하는 데에서 구원될 수 있다면, 이것은 위대한 일일 것이다. 바벨론의 원칙은 사람 앞에서 영광을 얻을려고 외식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 사람의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시날 산의 외투의 죄이고,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범한 죄이다. 거짓 헌신이 죄이고, 거짓된 신령함도 죄이다. 무릇 참된 예배는 영과 실재로 드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원한다

계시록 18 7절에서는 바벨론의 또 하나의 상황을 말한다.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그녀는 왕후의 지위에 앉았으며 완전히 과부의 모습을 잃었고, 조금도 주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그녀는 정결함을 잃어버렸고 합당한 목표를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원칙이며, 이것이 바로 부패한 기독교인 것이다.

18
장에서는 또한 바벨론에 그녀가 사치스러운 누림을 얻는 한 무더기의 물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을 깨워야 한다. 한 면으로 우리는 과학의 발명들을 신뢰한다. 우리는 필요할 때 많은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다. 마치 바울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전 7:31)."고 말했듯이 우리의 목적은 다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다. 그러나 모든 사치스러운 향락은 다른 문제이다. 모든 사치품들을 거절하고, 육체로 과도한 누림에 빠지게 하는 일체의 것들을 거절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우리는 물건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사치라는 것이다. 의복, 음식, 거처 등을 막론하고 과분하거나 필요를 초과한 것은 바로 바벨론의 원칙이다.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만, 필요 이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의 원칙에 따라서 생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욕에 따라서 생활한다면 바벨론의 원칙 아래 있게 되며,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미 바빌론의 원칙을 보았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함께 섞인 것이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위장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며, 사람의 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혼란한 기독교이자 또한 부패한 기독교이다. 우리는 바벨론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계시록 18 4절을 보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 6 17-18절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바벨론의 성질을 띤 어떤 일에도 참여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섞여 있는 것, 사람의 재능과 하나님의 일이 함께 섞여 있는 것, 사람의 의견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섞여 있는 모든 상황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바벨론의 성질을 띈 어떤 일에도 참여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의 영의 깊은 것들에서 그들 스스로를 바벨론과 분별시키고, 바벨론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바벨론과 함께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바벨론은 바벨탑에서 시작되었고, 나날이 그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최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계시록 19 1- 4: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 가더라. 24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하나님이 음녀를 심판하시고, 그녀의 모든 일과 그녀의 인격과 음녀의 원칙을 모두 산산이 흩어버리실 때에, 하늘에서는 할렐루야의 찬양이 터질 것이다. 만약 신약 안에서 오직 계시록에만 몇 번의 할렐루야가 있는데 ,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 바벨론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8
2절부터 8절까지의 한 단락에서는 바벨론의 멸망하고 심판받은 원인을 말한다. 즉 바벨론의 죄행과 그녀가 받은 심판의 결국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심판은 장래에 하나님이 집행하시겠지만, 영적인 심판은 오늘 우리가 집행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수많은 영적이지 않은 것들을 교회 안으로 가져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도 사랑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할렐루야라고 외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바벨론의 원칙은 혼란이요, 부정함이다. 그래서 음녀라고 부르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몇 군데 성경 구절을 사용해서 바벨론의 일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대단히 증오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18절에서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19 2절에서는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라고 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원칙을 대단히 증오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 존재 안에 절대적이지 않은 부분이 얼마나 많이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절대적이지 못하고, 어중간한 모든 부분이 다 바벨론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주사 우리로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절대적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심판할 수 있게 하시기 원한다. 우리가 이와같이 우리 자신을 심판할 때에, 바로 우리가 바벨론의 원칙을 증오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된다.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밖에서 영광을 구치 않고, 그리스도 밖에서 존귀를 구치 않게 하시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가 바벨론의 원칙 안에서 살지 않고, 절대적인 사람이 되고자 기뻐 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계시록 19 5절에서는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고 한다. 계시록 안에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하늘의 선포이다.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서",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등은 하늘의 선포이다( 18:4, 19:5).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19 5절에서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데에는 그 원인이 있다. 한 면으로는 큰 음녀가 이미 심판을 받았고, 또 한 면으로는 어린양의 혼인날이 이르렀기 때문에 보좌 위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과거부터 일을 해 오셨고 오랫 동안 일을 하셨는데, 그것은 찬미를 얻기 위해서이다.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은 성도들 가운데 그분의 기업을 두었다고 하셨다. 무엇이 성도들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기업인가? 사람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드릴 수 있겠는가?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오직 한가지는 바로 찬미이다. 찬미는 바로 하나님이 성도 가운데서 얻으신 기업이다. 하늘에서 음성이 있어서 선포하기를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며, 더욱 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얻기 원하시는 바를 얻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보좌에서 음성이 있어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선포했고, 그러므로 우주에는 수많은 화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19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한 면으로는 보좌 위에서 나는 선포하는 소리가 있었고, 또 한면으로는 수 천만 무리의 화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요한이 그 소리를 들었는데,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허다한 무리의 소리이며, 마치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고 큰 뇌성과도 같았다. 여러분이 폭포에 가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어보고 큰 바다의 파도 치는 소리를 들어본다면, 많은 물소리가 얼마나 큰지 알 것이다. 뇌성은 굉장히 큰 소리이다. 이 강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와 그 웅장한 소리로 모두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다! 하늘 위에서는 선포가 있고, 우주 가운데는 화답이 있고, 모든 소리마다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적인 일 "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이 발생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선포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서 당신이 왕이 되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신이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마음의 뜻은 바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11 15절의 말씀을 보자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여기에서 '우리 주'는 하나님을 가르켜 말하고, '그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가르켜 말한다. 그러나 '(he)'라는 대명사는 매우 기묘하게 사용되었다. 위에서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라고 했으므로 그 아래에서는 마땅히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실 것이라고 해야 맞는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는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신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곧 그리스도가 통치하심이고, 그리스도가 통치하심은 곧 하나님이 통치하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하나님이 왕되심이 바로 그리스도가 왕되심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셨고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셨기 때문에, 그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다

19
7절에서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이다. 이 구절은 계속해서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왕 국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얻기 원하시던 그 '단체적인 사람', 그 영원한 하와를 이미 얻으셨다.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으며 아내도 예비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찬양해야 할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통치권을 얻으셨기 때문에 할렐루야를 외쳐야 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영원 과거 안에서 예정하신 것을 이미 얻으셨기 때문에 할렐루야를 외쳐야 한다.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이 얻기 원하시는 것은 반드시 어느날 그 분이 얻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때가 이르면, 아내는 이미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가 자신을 자세히 살펴 볼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신 앞에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흠 없이 세우실 그러한 날이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기억하기 바란다. 어제와 오늘, 얼마나 많은 연약한 사람들이 있었는가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얻으시려고 정하신 것은 그날 반드시 얻으실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그날이 이를 때 어린양의 아내는 예비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을 그분께 돌려야 하며, 할렐루야를 외쳐야 할 것이다

7
절을 다시 보기로 하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우리는 여기에서 어린양의 신부를 말하지 않고, 어린양의 아내를 말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21 1-2 절을 보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하신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9장에서 말한 아내가 예비되었다고 한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천년왕국 이전이다. 21장에서 말한 신부가 예비되었다고 한 것은 언제를 가르켜 말하는 것인가? 천년왕국 이후이다. 새 예루살렘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비로소 어린양의 신부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천년왕국 이전에 어린양의 아내가 이미 예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19장에서는 어린양이 그를 신부로 취했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면 음녀가 멸망했고, 앞을 바라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이므로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 사이에는 천 년이 놓여 있고, 천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여인이 실지로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는 것은 천년왕국 시대가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이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될 일이 있다. 12장에는 사내아이를 가진 한 여인이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자녀들이 있는데, 어떻게 19장에서는 오직 아내만이 있고 나머지 수많은 자녀들과 사내아이는 보이지 않는가? 어떻게 그 한 여인과 그 한 사내아이와 다른 수많은 자녀들이 여기의 어린양의 아내가 되었는가?

우리는 분명해지기 위해 사내아이 원칙을 보아야 한다. 사내아이가 전체 교회를 대표해서 모든 것을 성취했음을 기억하라. 계시록 19장에서 아내가 이미 예배되었다고 선포한 것은 이기는 이들을 보고서 말한 것이다. 교회의 온 몸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부가 되며, 그날이 되어야 완전히 예비될 것이다. 그러면 1천 년 전에 어린양의 아내가 이미 예비되었다고 말 했는데, 이것은 무엇이 예비되었단 말인가? 이것은 이기는 이가 예비 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기는 이 외에 다른 사람은 아직 예비되지 않았다. 이기는 이가 다 예비되었으므로 아내가 이미 예비되었다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이가 자신을 위해서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온 교회를 위해서 성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온 몸이 영광을 얻는다고 했다(고전 12: 26).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기는 이는 온 몸을 대신해서 사탄과 전쟁을 한 것이다. 그들의 승리는 온 몸으로 유익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19장에서 말한 예비되었다는 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이기는 이가 생명 안에서 성숙했기 때문에 예비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기는 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예비되었기 때문에 온 몸이 예비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 사실의 귀중함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다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추구와 모든 성장은 다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한 것이다. 각 지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모든 것은 다 몸 전체를 위한 것이다. 당신의 귀가 들었는데 당신은 듣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귀와 몸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입이 틀리게 말하면 당신이 틀리게 말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입과 몸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이들이 얻은 것은 바로 몸 전체가 얻은 것이다. 우리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므로,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신 모든 것은 다 교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머리로부터 유익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몸으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우리가 주님이 성취하신 것을 얻는 것처럼 다른 지체가 얻은 것을 우리도 얻는다. 하나님은 이기는 이가 다 예비된 것을 보실 때, 온 교회가 예비된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비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또 아내가 예비되었다고 말한 것은 특별히 아내의 옷을 가르키는 것이다. 19 8절에서는 말하기를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슨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두 종류의 옷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주 예수님으로서 그분이 우리의 옷이다. 다른 하나는 여기에서 말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주 예수님이 우리의 옷이 되시고, 우리의 의가 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옷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다. 우리 각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벌거벗은 채로 갈 수 없고 이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세워질 때에, 우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어야 한다. ''는 원문 에서 복수로 나타나 있으며, '의들(righteousnesses)'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하나의 의를 말하며, 이 모든 의로운 행실들이 우리의 세마포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부터 한 벌의 세마포 옷 - 성도들이 의로운 행실로 단장함 - 을 준비해 가는 것이다

시편 45편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두 종류의 옷이 있음을 볼 수 있다. 13절에서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만들어졌도다."라고 말한다.( 원문직역/ 한국어 성경에서는 '금으로 수 놓았다'고 번역 되어 있으나 이것은 금으로 만들었다고 번역해야 한다 그 의미는 금으로 된 것, 금을 쳐서 만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14절에서는 '수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라고 했다. 13절의 옷과 14절의 옷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13절의 옷은 금으로 만든 것이지만, 14절의 옷은 수놓은 옷이다. 계시록 19장에서 말한 세마포 옷은 수놓은 옷이지 금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무엇이 금으로 만든 것인가? 주 예수님이 금이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의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우리에게 입혀진 옷이며 금으로 된 것이다. 또 다른 옷은, 우리가 구원받은 날로부터 계속 수놓아 온 옷이다. 이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다. 다시 말하면, 금으로 된 옷은 하나님이 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만, 수놓은 옷은 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금으로 된 옷을 주셨다. 이것은 주 예수님 자신이며, 우리의 행위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이 그분이 우리에게 다 만들어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수놓은 옷은 우리의 행실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성령이 매일 우리 안에서 한 땀 한 땀 수놓으신 것이다.

수를 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본래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한 조각의 천이 있었는데, 실로 어떤 것을 수놓음으로써 본래의 천과 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일하시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조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놓는다는 것의 의미이다. 우리는 금으로 만들어진 한 벌의 옷을 입어야 할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의해서 수놓아진 옷을 입어야 한다. 이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조성되시고,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표현되실 것이다. 이 수놓아진 옷이 바로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다. 이러한 수놓아짐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날마다 수놓아지고, 하나님이 "예비되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는 무엇을 가르키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복음서 안에는 많은 의가 있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연고로 향유를 쏟아 부은 것도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의인데, 아마도 이것은 세마포 옷의 수많은 씨줄과 날줄의 한 가닥일 것이다. 또한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다른 많은 여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연고로 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공급했다. 이것 또한 의이다. 주님의 사랑에 의해 마음이 감동 됨으로써 외적으로 어떤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의이고 세마포 옷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수놓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표시, 즉 주님을 사랑함으로 갖는 표시가 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수천만 바늘 땀 중의 한 땀이다. 성경은 누가 단지 냉수 한 그릇을 어린아이에게 주더라도 상을 얻게 된다고 했다. 주님을 사랑함에서 나온 것이 바로 의이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나 행함을 갖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의이다.

계시록 7 9절에서는 이 옷은 흰 옷이라고 말한다. 흰 옷은 바로 어린양의 피 안에서 정결케 되고 희게 된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죄는 반드시 피로 씻어야만 희게 되고, 우리의 행위도 피 안에서 깨끗하게 씻어야 희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가지 행실도 본래부터 흰 것은 없다. 설령 우리에게 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섞인 것이지 순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 안에서 원치 않을 때도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다소 인내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한 두 마디 불평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보혈의 씻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들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하며, 또한 우리의 의로운 행실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도 주님의 보혈이 필요하다

우리는 영원히 흰 옷을 만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99%의 흰옷을 만들었다 해도 여전히 1%의 혼합물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전적으로 흠이 없을 수 없다. 설령 주님을 사랑함으로 나온 좋은 행위일지라도 여전히 피로 씻어야 한다. 예전에 어느 영적인 사람이 말하기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해서 흘린 눈물조차도 피로 씻어야 한다고 했다. , 회개하여 흘린 눈물조차도 보혈의 씻음이 필요하다니! 그러므로 계시록 7 14절에서 말한 그 흰 옷은 어린양의 피로 씻어서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고, 우리의 안팎으로 온전히 순수한 것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면 알수록, 얼마나 자신이 더러운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가장 뛰어난 행동과 가장 뛰어난 의도에도 오염물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피의 정결케 함이 없이는 희게 될 수 없다

여기의 옷은 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광채가 있다(19:8). 광채가 있다는 것은 밝은 빛을 낸다는 것이다. 흰 것은 점점 흐려지고, 옅어지고, 평범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옷은 단지 희기만 할 뿐 아니라, 빛이 난다.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희었지만, 그녀에게 광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죄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순수한 것이었을 뿐이지 거룩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흰 것만이 아니라, 또한 빛을 내는 것이다. 흰 것은 수동적인 것이고 정지해 있는 것인 반면, 빛나는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하며 결코 평탄한 길을 사모해서는 안된다. 고난의 날들은 우리로 하여금 빛을 내게 할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당신이 볼 때 죄가 없고 거의 모든 것이 합당하고 모든 것이 다 좋지만, 어떤 광채도 없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좋은 것은 평범한 선이며, 비록 그들이 희기는 하지만 아무런 빛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 무리의 성도들은 자주 시련을 통과하고, 자주 고통을 당하며, 그들은 몇번이나 곧 넘어 질 것 같았으나 여전히 서 있다. 일정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 그들의 성품 안에서 빛이 발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단지 흴 뿐 아니라 또한 빛난다. 순결할 뿐 아니라 광채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심으로 우리를 희어지게 하시며 또한 빛을 내도록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광채를 발하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온갖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채를 발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흰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빛나는 것이다. 고난을 두려워하고, 곤란함을 걱정하고, 앞길이 평탄하기를 바라며, 일이 쉽게 성사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빛을 잃게 한다. 고통과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빛을 낼 수 있다. 쉽고 평범하게 생활하는 사람은 희게 될 수는 있지만 결코 빛을 낼 수는 없다

이 옷은 세마포로 되어있다. 성경에서 양모와 세마는 다르다. 양모는 주 예수님의 일을 가르키고, 세마는 성령의 일을 가르킨다. 이사야서 53 7절에서는 주님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양모가 구속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세마포 옷에는 구속의 성질이 없다. 세마포에는 피가 없다. 이것은 식물에서 나온 것이며 성령이 사람 안에서 일하여 산출된 것이다. 이 세마포 옷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소유 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 자신의 의로운 행실을 갖기 원하심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기 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안에서 많은 의들을 갖기 원하신다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19:8)." 모든 행실과 모든 외적인 의는 은혜로부터 온 것이다. " 그에게 허락하사...." 이 행실은 성령이 사람 안에서 일하신 결과이지, 천연적인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앙망하며, " 주여 당신이 나에게 허락하소서. 내게 은혜를 주소서."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옷은 은혜를 입음으로 소유하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가! 이 옷이 우리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는 이 옷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오직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여 도피하려 하며, "주여 당신이 나를 해방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기도를 바꾸어야 한다. " 주여 당신이 나에게 힘을 주사 이 짐을 감당하게 하소서. 당신이 나로 능히 이 짐을 질 수 있게 하소서. 주여, 나를 희게 하시며 빛나는 옷을 입게 하소서."

19
9절에서는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또한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하셨다. 무엇을 기록하라고 했는가? 요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했다. 천사는 또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했다. , 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권리보다 더 큰 특권이나 지위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이것이 그분의 참되신 말씀임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중요시하고, 기억해야 한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과 신부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신부는 은혜를 입은 한 단체 - 새사람 - 이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수많은 개인들 - 이기는 이들 - 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왕국 시대를 언급하는 것으로서, 청함을 입은 자들은 주님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유일하고 특별한 교통을 누릴 것이다. 주님은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하셨다. 부디 하나님이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이 특별한 교통을 누릴 수 있게 하시 기 원한다. 우리를 겸손하게 그분의 갈망을 만족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또한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우리로 왕국을 위한 이기는 이가 되게 하시기를!


새 하늘과 새 땅

이제 계시록 21 1절을 보기로 하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여기서 다시 우리는 거리를 두고 창세기의 맞은 편에 서 있다. 창세기 1장의 하늘과 땅은 본래 하늘과 땅이지만, 이 구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창세기에는 바다가 있었지만 여기에는 더이상 바다가 없다

2
절에서는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다. 19장에는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아내가 예비되었다는 선포가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하고 기다리는 것처럼 예비되었다고 말했으며, 또한 실제로 이 땅이 내려왔다. 우리는 이미 계시록에 많은 선포가 있음을 보았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11 15절의 선포이다. 그런데 왜 11 15절에서는 "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리로다."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그 일이 모두 이루어진 후에 말한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지점에서 말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 한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향해 분명한 전환이 있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선포하실 수 있다. 19장에도 한 선포가 있다. 그 내용은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아내도 예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그 출발하는 시점에서 선포한 것이다. 그것은 이기는 이가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신부를 대표할 수 있고, 이 한 무리가 그분 앞에서 이미 예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내가 예비되었고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르렀다'라는 말씀은 실제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진다. 계시록 21 2절에서는 요한는 분명히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이것은 신부가 예비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지 19장에서 선포된 예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미 예비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에베소서 5 26절과 27절로 되돌아 와야 한다. "이는 곳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라는 말씀은 계시록 21장에서 이루어졌으며, 이제는 한 신부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께 드려지기 위해서 예비되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말씀은 이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은 우리에게, 왕국시대 마지막에 온 교회가 모두 그러한 단계에 이를 것임을 말해준다. 오늘날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도 그 날에는 모두 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에 정하신 표준이 너무 높아서 '교회가 어떻게 그 단계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에 교회가 그 위치에 이를 것임은 분명히 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에베소서 5장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는 왕국 이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계시록 21장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비로소 그 표준의 도달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서는 한 무리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성도들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있게 되고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21
3절에서는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황이 어떠한 가를 보여 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한 축복 아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적극적인 축복을 언급하고 있다. 그 아래에서는 더이상 이런저런 소극적인 것이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한 적극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축복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 안에서의 축복은 바로 이 말씀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 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모든 영원 미래 안의 누림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다. 솔로몬은 일찍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라고 했다(왕상 8:27).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의 거처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그분의 거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보좌가 새 예루살렘 안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은 바로 그 여인이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동산과 한 여자를 보았다. 그 이후에 여자는 죄를 범했고, 하나님은 그녀를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했을 때에는, 여인과 거룩한 성이 하나이고 더이상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이 그 여인이기 때문이며, 또한 어린양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인과 거룩한 성은 하나이다. 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는 새 예루살렘에 세워지고, 하나님 자신이 그 여인 안에 거하시며, 전능하신 이가 그 여인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밖에 얼마나 큰 세력이 있고, 얼마나 큰 시험이 있는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탄의 악한 세력이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을 것이며, 사람도 더 이상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녀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안의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다. 무릇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실로 하나의 큰 축복이며, 이것보다 더 크고 더 귀한 축복은 없음을 알 것이다

3
절 후반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당신은 여기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알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만일 하나님의 임재를 멀리 떠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영원 미래 안에서 가장 높은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고, 영원 미래 안에서 가장 좋은 축복을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이다

4
절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눈물을 흘린 적이 있겠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 축복 -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는 - 을 받을 것이다. 사망은 온전히 타락의 결과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이상 사망이 없고 최후의 대적도 끝날 것이다. 애통은 마음이 아픔이고 우리 속의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애곡하는 것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며 외적인 표시이다. 고통은 우리의 신체적인 고통이다. 하나님은 옛것, 즉 눈물, 사망, 애통, 애곡, 고통과 같은 몇 단어를 종결지으신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것들이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지나갈 것이다

5
절에서 말하기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은 우리가 다 새 창조이지만, 여전히 옛 창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 가서는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다 새 창조로 변할 것이다. 내면이 새롭게 될 뿐 아니라 외면도 새롭게 변할 것이고, 주위의 만물도 다 새롭게 될 것이다. 이것을 곧 영원이라고 부른다. 새창조는 우리를 위한 것이고, 오직 새 창조 안의 모든 것만이 비로소 우리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다. 이사야 6장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한 고통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또 하나의 고통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다 그 날이 이를 때 주위의 모든 것들이 새창조일 것이며, 그 날은 절대적으로 영광스러운 날이다

21
5절에서는 계속해서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얼마나 좋은지! 하나님은 요한에게 말씀을 전하셨고 또한 그에게 기록하게 하셨다. 기록된 말씀은 일점일획도 폐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신실하며 참되다! 우리의 최종적인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는 것이다

6
절에서는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모두 이루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일은 종종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분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하신다. 처음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궁극적으로 완성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은 알파이시고 모든 것을 시작하신 분이시다. 창세기 1 1절에서는 말하기를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과 연한과 만물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만물의 시작이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또한 오메가이시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고 또한 실패할 것이지만, 그분은 오메가이시다. 사람이 이것저것을 말할 수 있지만 마지막 한 마디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셔야 하며, 그분이 시작하신 것을 이루셔야 함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탄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던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이 처음에 정하신 알파이실 뿐 아니라 또한 결국에 이루시는 오메가이심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목적이 이뤄지지 않은 채로 놔두지 않으신다. 교회가 체험적으로 어떠한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 교회는 조금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으며, 더욱이 영광으로 옷 입고 그분의 아들 앞에 세워 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에 있어서, 진리에 있어서, 실행에 있어서 많은 다른 점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들에게서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바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가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때때로 우리는 탄식의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를 "아마 2000년을 더 기다려도 이루어 질지 모르겠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메가이다"라고 하신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분 앞에 서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얻게 되실 것이다. 그분은 물을 사용하시거나 불을 사용하셔서라도 반드시 영광스러운 한 교회를 얻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지할 수 없다. 그분은 반드시 그분의 만족을 얻으실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약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냉담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강퍅 할지라도, 어느날 하나님은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부실 것이며, 그 분이 우리로 도달하기 원하시는 표준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오메가이시다! 하나님은 하시려고 한 바를 끝까지 하시며, 얻기 전까지는 늦추지 않으실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자. 그분이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6
절에서는 계속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것은 구속에 강조점을 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주었다. 목마르다는 뜻은 바로 하나님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부족한 것은 마치 물이 부족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생명샘의 물은 목마른 자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7절의 말씀을 주의한다. 여기에 특별히 보배로운 한 가지 일이 있음을 찬양한다. 바로 '이기는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이기는 이는 계시록 2, 3장의 이기는 이와는 다르다. 계시록 2, 3장의 이기는 이는 교회의 일부분이지만 여기의 이기는 이는 '목마른 자'와 연관되어 있다. 상반절에서는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못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했고, 7절에서는 계속해서 "이기는 이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무릇 생명샘의 물을 마시는 자들은 모두 여기에서 말한 이기는 이들이고, 이 이기는 이들은 생명샘의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과 분별되는 것이다. 여기의 이기는 이는 요한일서의 이기는 이와 같다. 요한일서 5 4절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주님에게 속한 사람은 믿음이 있고, 주님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다.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즐거움과 기쁨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게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모두는 다 이기는 이다. 왕국 시대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내아이가 되었지만, 새 예루살렘 시대에는 전체가 다 이기는 이이다. 새 예루살렘에서의 문제는 단지 당신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믿음이 있는 자가 곧 이기는 이다

그 날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더이상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의 것들은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소극적인 방면이다. 또한 적극적인 면이 있는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3)",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7)"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지위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또한 백성이다. 백성일 뿐 아니라 또한 아들이다. 하나님은 영광 안에 들어오는 수많은 아들들을 얻기 원하신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을 찬양하자.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영원 세계에 있어서 이 보다 더 높은 축복은 없을 것이다

8
절에서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다. 영원한 세계에서의 축복은 하나의 사실이며, 영원한 세계에서의 형벌도 하나의 사실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가하시는 형벌은 다시 거둘수 없으며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경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