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워치만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2)

요나한 2016. 6. 19. 08:1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2)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이제 우리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보겠다
계시록 21 9-1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7
13절에서는 천사가 그 큰 음녀를 요한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을 광야로 인도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볼 때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요한의 안목에서 볼 때, 음녀는 광야, 즉 생명이 없고 열매가 없는 황량한 곳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웅장한 예배당과 훌륭한 예배 의식과 그곳에서 사람의 뛰어난 재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벨론에서 나온 이 모든 것은 모두 광야에 있는 것이고 모두 버려진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천사가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요한에게 보여주려고 할 때에는 요한을 크고 높은 산으로 이끌었으며, 거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그에게 보여 주셨다. 요한는 크고 높은 산에서 신부를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만일 하나님의 그 영원한 이상을 보기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크고 높은 산으로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영적인 크고 높은 산에 있지 못한다면 이러한 이상을 볼 수 없다. 광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하시려는 바를 볼 수 없다. 모세가 요단 강변에 이르렀을 당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그에게 비스가 산 정상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만 비로소 이상을 볼 수 있고, 계시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평범하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무슨 큰 죄를 범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낮은 위치에 서 있는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우리에게 모두 교리요 지식일 뿐이다. 우리는 영적인 등반을 해야 하고, 영적인 달성을 갖기를 소망해야 한다. 우리는 높은 산을 오르기를 바라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할 때 새 예루살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반드시 얻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과거에 정하신 것을 영원 미래에 반드시 얻으실 것이다. 먼저 왕국을 가져오는 이기는 이가 있어야 하고, 그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올 이기는 이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누가 이기는 이가 될 수 있느냐이다. 이기는 이가 되려면 반드시 계시가 있어야 한다. 계시가 없으면 어떤 것을 가르침으로 받기 쉽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지식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오직 계시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계시를 얻으려면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하며 평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산을 오르는 것은 우리의 힘을 들여야 하는 것이므로 매우 힘들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서는 최고봉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성취를 주시어 우리가 낮은 평지를 벗어나도록 구원하시기 원한다. 구원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들은 필요 없다고 여기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낮은 생활에서 구원하셔야 하고,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야 한다. 우리가 높은 산 위에 올라갈 때, 우리는 계시를 얻게 된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보고서 한가지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데, 그것은 천사에게 경배한 것이다( 22: 8). 그의 어리석은 행동은 매우 재미있다. 요한은 12 사도 중에서 가장 나중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의 지식과 행함과 사랑과 체험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요한은 두 번이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그는 두 번이나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했다. 한번은 여기에서이고 또 한번은 19 10절에서이다. 요한은 이러한 행동은 "그리하지 말고( 22: 9)"라고 천사가 말한 것처럼,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은 잘못된 행위였으나 반면에 합당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상을 본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상을 주사, 우리로 높은 곳에 올라가서 새 예루살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이 다른 것을 위하지 않고 이 이상을 이루는데 드려지게 하시기를 바란다.

천사가 요한에게 말하기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21: 9)"고 했다. 천사는 어린양의 아내를 요한에게 보여준다고 했는데, 그 이후에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1:10)." 요한이 본 것은 어린양의 아내 곧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었다. 그 아래의 말씀은 그 성의 모습, 곧 어린양의 아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성의 모습은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그 성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세 전에 얻기 원하셨던 그 단체의 사람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고, 영적인 모습이 어떠한지를 말하고 있다.

이 성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하나님은 그 단체의 사람이 어디로 가게 되는가를 주의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 단체의 사람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주의 하신다. 장래의 문제일 뿐 아니라 또한 근원의 문제이다. 어린양의 아내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땅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어떤 죄지은 사람이 나중에 구원 받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지은 일이 없고, 회개할 필요가 없고,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의 성경에서는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부분을 보여주고 있으며, 에베소서 5장에서 언급한 그리스도 앞에 세워지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약 안에는 특별히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교회를 예표하는 리브가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노종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24:3-4)"고 했다. 리브가는 요단 강 서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삭의 본토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단체의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토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에 교회도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 11절에서 말하기를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했다. 누가 형제들 인가? 형제는 같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에게서 출생한 자들이다. 우리가 한 면으로는 주님의 보혈에 의해 산 바 되었고, 또 한 면으로는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출생 하였으니, 얼마나 주님께 감사한지! 그리스도인의 역사에는 두 면이 있다. 하나는 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오신 역사이고, 다른 한 면은 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한 역사이다. 죄의 역사를 말할 때에는 밖에서 사온 바 되었지만, 죄없는 역사를 언급할 때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은 죄를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분깃은 죄의 시작도 죄의 역사도 없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 이것은 마치 교회가 지금까지 한번도 이 땅에 있었던 적이 없고 처음으로 이 땅에 내려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한 면에서 우리 안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부분, 곧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성은 17 장에서 말한 그 성과 크게 다르다. 그 성은 큰 성이라고 부르지만, 이 성은 거룩한 성이라고 부른다. 바벨론의 특징은 위대함에 있지만 새 예루살렘의 특징은 거룩함에 있다. 그리스도인 들 중에 위대한 것을 취하는 사람이 있으나 또한 거룩한 것을 주의하는 사람도 있다. 위대함을 주의하는 것은 바벨론의 원칙이고, 거룩함을 주의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원칙이다. 무엇을 거룩이라고 부르는가?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만이 거룩하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이 의미는 그리스도가 그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우리 또한 그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뜻이다. 오직 그 하나에서 나온 자들이라야 거룩하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야 가치가 있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만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새 예루살렘이 될 수 없다. 휴거의 관건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왜 어떤 이는 남아 있게 되는가? 그것은 수 많은 부분들이 그리스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로 가지고 갈 수 없다. 어느 것도 하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 땅에서 나온 것은 모두 땅에 남겨져야 하고 오직 하늘에서 나온 것만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


(1)
거룩한 성의 빛

21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말한다. 벽옥은 계시록 4장에서 이미 한번 언급되었다. 즉 요한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마치 벽옥과 같고 홍보석과 같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벽옥은 바로 요한이 본 보좌 위의 하나님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벽옥이 의미하는 바는 보여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보좌 앞에 서서 보는 하나님은 마치 벽옥과 같다. 이것은 이 땅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에 가서 인식할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에서 인식하는 하나님은 모호하고 투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그 성 안에는 벽옥과 같은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이 의미는,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내려 올 때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고, 그분을 더 이상 오해하지 않게 되고, 더 이상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새 예루살렘의 빛은 투명하여 수정과 같이 정결하며 이물질이 조금도 혼합되지 않은 것이다. 그 날에는 모든 것이 다 투명하여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2)
거룩한 성이 포함한 사람들

12-14
절을 읽어보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12문이 있는데 문에 12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12지파 이름들이라 동편에 3, 북편에 3, 남편에 3, 서편에 3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12사도의 12이름이 있더라."

'단체의 사람'이 포함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여기에서 12문 위에는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12기초석 위에는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은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몇 군데 성경 구절들을 더 보면서 이 사실을 증명해 보자. 13 28-29절에서는 말하기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리 잔치에 참석하리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포함하고 있는 바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고, 또한 동에서, 서에서, 남에서, 북에서 오는 성도들이다. 이 두 무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뿐 아니라, 또한 반드시 함께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11 8-10절를 보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 성은 바로 새 예루살렘을 가르켜 말하는 것이다. 오직 이 성만이 기초가 있는 성인데,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건축하시는 성이다. 13절에서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사람들이다. 16절에서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했다. 여기의 '저희' 13절에서 말한 '이 사람들'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의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분깃을 소유하게 된다. 아벨부터 그 이후의 구약의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성, 즉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셨다. 그들에게는 다 그 성 안에 분깃이 있다. 더 나아가서 39-40절을 보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구약의 성도들을 기다리게 하셨고 그들은 아직 그 성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얻도록 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게 하셨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이 모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2 11-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 역자 주)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1절부터 13절까지에서는 '너희'라는 대명사가 사용되었으나 14절에서는 '우리'라는 대명사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너희'라고 말할 때에는 에베소 성도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만, '우리'라고 말할 때에는 유대의 성도와 에베소의 성도들을 함께 가리킨 것이며,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을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고,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다시 15절를 읽어보자.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여기의 '' 13 절에서 말한 ''과 마찬가지로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가르켜 말한 것이지 사람과 하나님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 이 둘을 한 새사람으로 만들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이방 성도와 유대 성도들을 가르켜 말한 것이고,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을 가르켜 말한 것이다.

16
절에서는 말하기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했다.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뜻이다. 17-19절에서는 말하기를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를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다. 에베소 성도들은 더 이상 왜 외인이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

20- 22
절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는지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거처는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 안에 있으며 우리도 그 안에 있다. 결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 안에 포함될 것이다


(3)
성과 성문과 성곽

이제 계속 계시록 21장을 보기로 하자. 우리는 여기의 성곽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12절에서는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라고 했다. 15절에서는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고 말한다. 17절은 "그 성곽를 척량하매 144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한다
원래 하나님이 에덴에 동산을 세우셨을 당시에는 뱀이 그 동산으로 들어와서 하와에게 말할 수 있었으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동산 주위에는 성곽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본래 아담으로 하여금 이 동산을 지키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이 이 동산의 성곽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지키지 못했으며 사탄이 들어왔다. 이제 새 예루살렘은 어떠한가? 새 예루살렘에는 성곽이 있다. 성곽은 한 면으로는 포함하는 것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거절하는 것이다. 성곽은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성 밖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있다. 성곽이 있으면 성 안과 성 밖이 구별되고 분별된다. 새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이 얻기 원하시는 새사람이다.이 새사람은 하나님 앞에 있고, 외부와 분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뱀은 또 다시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이제는 성곽이 있고, 구별되었고, 분리되었다. 그러므로 뱀이 다시 그 안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광경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먼저 언급된 것이 성곽이다. 그러므로 분별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다. 분별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잃게 된다. 반드시 하나의 경계선 -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육에 속한 것인가를 구별짓는 - 이 있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은 분별되어 있고, 하나의 경계선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바벨론에서 나온 모든 것은 거절해야 하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보호해야 한다. 성곽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탄이 가장 미워 하는 것이 바로 성곽이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곽을 건축하려고 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 등이 와서 온갖 방해를 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한 손으로 무기를 잡고, 한 손으로는 성곽을 건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자와 전쟁하며, 어떻게 분별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이 성에는 12문과 12기초석이 있다. 기초석 위에는 어린양의 12 사도의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이 성 안의 모든 것이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왕국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미 에베소서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말씀을 보았다(2:20). 그 뜻은 바로 사도들이 얻은 계시가 새 예루살렘의 기초임을 말한다

문은 출입을 위한 것이다. 왜 문 위에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가? 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셨다( 4:22).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에게서 배웠다. 율법도 이스라엘에게서 얻은 것이고, 구속도 이스라엘에게서 알았고, 구원도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문 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성은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세 문씩 있었다. 문은 출입하가 편리한 곳에 내게 되는데, 이것은 곧 이 성이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이 성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마음 중심에 있는 걸작품이다

문 위에는 또한 문을 지키는 자 - "문에 12천사가 있고(21:12)" - 가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전에는 그룹들이 생명나무를 지켰지만, 이제는 생명나무가 성 중앙에 있고 천사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다. 천사들은 시종드는 영이며(1:14), 그날에 천사들은 교회의 발 아래에서 순종하게 될 것이다. 계시록 21 15절에서는 말하기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고 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금으로 대표하고 있다. 금갈대를 자로 하여 척량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 성이 하나님의 표준에 의해서 적합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고, 그날에 우리가 척량될 때 하나님의 표준에 적합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16
절은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타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고 말한다. 성경 중에서 장, , 고가 같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성전 안의 지성소이다. "그 내고의 속이 장이 20규빗이요 광이 20규빗이요 고가 20규빗이라( 왕상 6:20)." 장과 광과 고가 똑같다. 성경에서 오직 성전 안의 지성소와 새 예루살렘 성만이 장, , 고가 똑같다. 바꿔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 안에서 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지성소가 되는 것이다. 본래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와 같이 하도록 지시하면서 말하기를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 대상 28:19)."고 했다 여기에서 성전 안의 모든 것은 계시에 따라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 시대에서는 이 새 예루살렘 성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고, 이 성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며, 한 가지라도 하나님 외에 것은 없다

21
17절에서는 "그 성곽을 척량하매 144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의 척량이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러면 언제 사람의 척량과 천사의 척량이 같아지는가?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부활시에는 사람이 천사와 동동된다고 하셨다( 20: 36). 144 규빗은 사람의 척량과 천사의 척량이 같아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성의 모든 것은 다 부활 안에 있는 것이다. 주께 감사한다. 성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이 다 부활 안에 있다. 모든 죽은 것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다 성 밖에 있다. 무릇 부활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모두 성 안에 있다. 부활의 의미는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죽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지만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비록 죽음을 거칠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사망이 묶을 수 없는 것, 사로잡을 수 없는 것을 바로 부활이라고 부른다. 우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십자가를 거치면 끝나버리지만,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사망이 만질 수 없는 것이다

요한이 이 성에 대해 기록할 때 사용한 숫자는 바로 12이나 12로 이루어진 숫자들 - 12, 12기초석, 12사도, 12지파 등 - 이다. 16 절에서는 일만 이천 스타디온을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문 중에서 사용하신 숫자는 이와 같지 않다. 하나님은 '일만 이천 스타디온'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천의 열 두 배가 되는 스타디온'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12라는 숫자를 사용하셨다. 성곽의 척량은 144 규빗으로서 12 곱하기 12이다. 이로써 12는 영원 미래에 관한 숫자임을 알 수 있다. 12는 성경 안에서 가장 귀한 숫자이다. 계시록 전반부에서 우리는 많은 7, 즉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교회, 일곱 천사 등을 보았지만, 후반부에서는 많은 12, 즉 위에서 언급한 12문을 볼 수 있다. 7은 완전을 의미하고, 12도 완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같지 않다. 7 3 더하기 4로 이루어졌고, 12 3 곱하기 4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3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숫자이며, 4는 피조물을 대표는 숫자이다. 예를 들면 4바람, 4계절, 4생물이다. 3 더하기 4는 하나님과 사람, 창조자와 피조물의 연합을 의미한다. 이것은 얼마나 완전한가! 그러나 더해진 것은 빼낼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으므로 이러한 완전함은 영원한 것이 못된다. 새 예루살렘에 이르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더이상 7이 아니라 12이다. 더이상 3 더하기 4가 아닌 3 곱하기 4의 관계이다. 곱한 것은 완전히 연합된 것이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하나로 섞인 것이 바로 12라는 숫자인 것이다. 완전한 하나가 12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여 하나가 될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은 더이상 나뉘어지지 않을 것이다


(4)
정금, 보석, 진주

이 성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18절에서는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벽옥에 대해 보았다. 성의 빛이 마치 벽옥과 같았는데, 그 의미는 성의 영광이 바로 우리에게 보이는 하나님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있을 때, 보좌 위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있지 않으시며, 또한 사람이 알 수 없는 분도 아니시다. 성곽의 기능은 성의 안과 밖을 구별짓는 것이다. 성곽이 벽옥으로 건축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빛 안에서 보는 것이 분 별이라는 것이다. 분별의 참된 근거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보는데 있고,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무엇인가를 보는데 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대해서 모호하고 분명치 않다면, 그 결과는 분별을 잃게 되는 것이다

18
절를 읽어보자.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다시 말하면, 성 안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정금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 하나님이 새 창조 안에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모든 하나님께 속한 사람 안에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어떤 부분이 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육에 속했고, 모든 것이 천연적인 것에 속했으며, 조금도 영적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이후에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정금이다. 우리 안에는 정금에 속한 부분이 있고, 우리 안의 일부분은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안에 정금이 있으나 또한 이물질이 섞여 있다. 그렇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지만 또한 하나님 외의 많은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분이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일의 대부분은 이 이물질을 감소시키는 것이며, 무엇을 더하는 증가의 일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은 더욱 하나님을 얻으려고 하고,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려고 하고, 더욱 그리스도를 알려고 한다. 그렇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하나 다 중요하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더 얻어야 하고, 성령의 충만을 더 얻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더 알아야 한다. 반면에 또 하나의 일이 있다. 이것은 바로 얻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일은 바로 우리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로 하나님은 날마다 이 일을 하고 계신다. 십자가는 감소시키는 도구이다. 십자가가 하는 일은 바로 제거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더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찌꺼기들이 있고,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섞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자신에게서 나온 어떤 것,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는 것 등을 보여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에게서 제거되어야 할 것이, 증가되어야 할 것보다 많고 많음을 보게 될 것이다. 특별히 혼적인 사람은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일하심은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당신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의 특징은 바로 이금이 순금이고, 조금도 이물질이 섞이지 않는 것이며,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로 배우게 하시는 공과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다 찌거기라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정금 외에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다 찌꺼기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다 찌꺼기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금이고, 새 예루살렘에 있는 것은 다 정금이며, 찌꺼기가 없다.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들이 다 십자가 위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정금이라고 말씀하신 것만이 바로 정금이다. 어떤 이물질도 하나님의 일 안에 섞일 수 없다

계시록 21 19-20절을 보자.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 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이러한 보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보석과 정금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금은 화학 원소이나, 보석은 화학 원소가 아니라 일종의 화합물이다. 정금은 원소로서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실 때부터 정 금이었고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다. 보석은 몇 종류의 원소가 땅 속에서 수 천년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열과 압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석이 대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이 사람 안에서 압력을 가하고 불로 태움으로 나온 것이다. 성령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은 바로 계속적으로 우리를 단련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각양의 체험을 갖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분 앞에서 보석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석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다루심을 받아 산출된 결과이다

이것은 마치 이삭의 체험은 금이지만, 야곱의 체험은 보석인 것과 같다. 이삭은 아들로 태어났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출생했으며, 그는 한번도 고통을 받은 적이 없었고, 큰 실수도 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다. 그는 수많은 고난을 받았고, 수많은 혹독한 시련을 통과했으며, 하나님의 손이 계속 그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날을 거듭하고 해를 거듭하면서, 야곱 안에 그를 하나의 보석으로 조성시키는 일을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정금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조성하시는 생명은 보석이다. 날마다 수많은 환경안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보석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조성되게 하신다. 한 면으로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제외하면 구원받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는 우리가 주님을 5, 10년을 따르면서 계속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처리를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느 정도 성령에 의해서 우리 안으로 조성되어지며, 우리 안에는 주님에 의해서 완성되어진 한 부분이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보석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이 왜 당신을 불 속에 넣고서 태우시는가를 의아해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은 만나는 일마다 다 좋은데 당신은 만나는 일마다 하나하나 다 순조롭지 못하다. 다른 이들이 당신을 오해하고, 심지어 당신을 공격하는 등 당신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특별히 많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계속 당신을 불태우고, 성령이 계속 일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당신 안에 조성시켜서, 당신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계시록에는 한 종류의 보석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보석이 있다. 어떤 것은 옥수요, 어떤 것은 황옥이요. 어떤 것은 비취다. 이런저런 각양 보석이 불로 완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것을 단번에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일을 통해서 비로소 얻으신 것이다. 보석은 하나님이 창조시에 당신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당신이 새 창조가 되었을 때 얻은 것도 아니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당신을 태움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보석은 한 물질이 계속 불을 통과할 때, 그 불이 어떤 종류의 공법으로 가해짐으로, 어떤 광물질이 그 안에서 녹아서 어떤 종류의 보석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 불을 다른 공법으로 태우면 다른 종류의 광물질이 그 안에서 녹아서 다른 보석이 된다. 보석이 대표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얻었고, 그 이후로 성령이 날마다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으로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가 아니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여러 가지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여 우리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그 분의 생명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여 어느 단계에 이를 때 우리로 맺게 하는 것이다. 보석은 성령이 환경을 통해서 우리의 몸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주실뿐 아니라, 날마다 우리 몸에서 다른 한 사람 -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 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당신은 구원 받은 날 하나님의 성품을 얻었고, 나 또한 구원받은 날 하나님의 성품을 얻었다. 그도 구원받은 날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며 차별이 없다. 그러나 그후에 하나님은 당신을 어떤 환경에 두사 당신으로 어떤 체험을 하게 하시고, 어떤 시련을 받게 하시고, 어떤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며, 어떤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 당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조성하시고, 당신을 황옥 같고 옥수 같고, 홍보석 같고 자정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 한 종류의 보석이 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금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석이 되는 것은 각기 다른 모습이다

성령이 환경을 통해서 우리 몸에서 형성하는 것은 영원히 존재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많은 다루심을 받을 때, 그는 그것을 통해 많은 공과를 배울 것이다. 이것은 그의 탁월한 성품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성품은 수 10년이 지나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영원 미래까지 지속된다. 그가 얻은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보석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10 , 20 년간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그들에게 조성하시는 어떤 부분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누어주신 것만이 아니라, 더욱 그들 자신이 그것으로 변한 것이다. 수년 동안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수많은 시련과 많은 체험을 통하여 성령이 그들에게서 일종의 생명을 조성해냈다. 무릇 그들을 아는 사람은 모두 어떤 것이 그들 안에 완성되었음을 안다. 그들에게는 다만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이 그들 안에서 일하여 변화시킨 생명도 있다. 그들은 교환된 생명을 살 뿐 아니라 또한 변화시킨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석이다. 보석은 바로 성령이 우리를 그와 같은 모양으로 불태운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이러한 보석으로 충만하다

여기에서 단지 교리만을 주의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신학을 조금 더 아는 것으로 족하고, 성경의 교리를 조금 더 아는 것으로만 족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큰 유익이 없고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서 불로 일하여 나온 그것만이 소용이 있다. 무릇 불을 거치지 않은 것들은 다 조금만 문질러보면 떨어질 것이다. 한번 문질러서 떨어지는 것은 영적인 가치가 없다. 이것은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반드시 우리가 읽은 것을 우리 안에서 태워야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보석은 다 불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보석이 나오려면 반드시 불이 있어야 한다. 불이 없으면 결코 보석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의 시련을 거절할 수 없고, 성령의 다루심을 거절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손이 각 방면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 원망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얼마나 즐거워하지 않을 때가 많고, 속박됨이 없이 잠시라도 해방을 누리기를 소망했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시는 손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날 그분이 우리를 보석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더욱 우리 안에서 우리가 특별한 성품을 가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일하시고 계신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분이 허락하신 여러 환경들을 통해서 조성하시는 것인데, 이것을 보석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교리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소용이 없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태우심으로 나온 것만이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불로 태워져서 어떤 실재를 가질 때 그가 말하는 메시지는 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체험으로 아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태우심으로 나온 것이 바로 보석이다. 그렇지 않으면 풀이나 나무나 짚에 불과한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어느 나이든 노인 앞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참으로 주님과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임을 느낀다. 어떤 생명이 그 안에서 그의 특징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 앞에서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 그보다 더 큰 일이 있고, 또 어떤이 는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풍성한 생명이 있고, 그에게는 성령이 연단하시는 일이 있고, 그의 특유의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은 그가 불의 연단을 통해 조성되어 보석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오직 고개를 숙이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이러한 것이 있기를 원합니다." 말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의 연단을 거쳐서 나온 그것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보석이 있다. 보석이 없다면서 새 예루살렘은 건축될 수 없다. 하나님은 보석을 가지셔야 하고, 보석의 성품을 나타내는 한 무리의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박한 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원한다! 오직 성령이 우리 생명 안에서 일하신 것이 있어야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21
절에서는 " 12문은 12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라고 했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정금과 보석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진주가 있다. 진주는 불로 연단되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진주는 바다의 생물이 상처를 받아서 점차 굳어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주는 사망에서 나온 생명을 뜻한다. 진주는 주 예수님이 구속과 관계없는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해방하신 생명을 대표한다

마태복음 13장 안에서 말한 진주는 누구를 가르키는가? 그것은 교회를 가르켜 말한 것이고, 주님 자신이 죽음 안에서 만들어 내신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모든 것을 버려서 이것을 얻기 원하셨다. 진주의 의미는 적극적인 것이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건축하기 원하시는 교회요, 한 새사람이다. 그 안에는 죄나 구속의 문제가 없다. 그분은 이 진주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그분의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리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 예루살렘에서는 진주는 문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모든 것이 여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그 생명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온 것, 곧 구속과 관계없는 그분의 죽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 12절은 우리에게, 영적인 건축은 마땅히 금, , 보석을 재료로 사용하고, 나무, , 짚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여기에는 정금, , 보석이 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는 정금, 보석, 진주가 있고 은은 없다. 계시록 21장에서도 새 예루살렘 안에는 정금, 보석, 진주가 있을 뿐 은이 없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정금, 보석, 진주, 이 세 가지는 에덴 동산 안에 있었고 새 예루살렘에도 있다. 다시 말하면, 정금과 보석과 진주, 이 세 가지는 영원 과거에서부터 영원 미래에까지 이른다

하나님은 결코 영원 안에 은이 있도록 정하시지 않았다. 은은 구속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할 것을 아셨고, 구속이 필요할 것을 아셨지만, 이것이 그분의 영원한 계획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일 안에는 구속이 있지만, 그분의 영원한 계획 안에는 구속이 없다. 새 예루살렘에는 에덴 동산과 마찬가지로 은이 없는데, 이는 영원 미래 안에서는 죄의 흔적조차 없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은을 경시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은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구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은이 없을 수 없다. 오늘날 만일 은이 없다면 구속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전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속은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이 은을 볼 수 없다. 구속이 그 성 안에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죄의 역사를 도말하시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더 이상 구속이 필요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타락할 수 없는 견고한 반석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우리 안에는 죄와 관계없고 구속이 필요 없는 한 생명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고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 자신에게 구속이 필요 없으신 것처럼, 그분의 일부분의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구속이 필요 없다. 그러므로 영원 안에서는 은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오늘날에는 구속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죄가 있지만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구속이 필요없는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느날 우리는 완전히 이 생명에 의해서 살 것이고, 죄의 역사까지도지나갈 것이고, 구속의 은도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락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구속도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왕국도 하나님의 목적이 아님을 보아야 한다. 타락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도중에 발생된 일이다. 구속도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타락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온 것이다. 왕국도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타락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타락이 있기 때문에 구속이 있고, 타락이 있기 때문에 왕국이 있다. 이것들은 단지 보완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구속과 왕국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구속이 없다면 영원토록 타락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며, 왕국이 없다 해도 또한 타락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으로 타락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영적인 노선은 곧으며, 이 하늘에 속한 노선은 직선이다

21
21절에서는 계속해서 "성의 길은.... 정금이더라."고 말한다. 성의 길은 교통을 위한 장소이다. 그 성의 길은 정금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영적인 목욕을 한 사람도, 하나님과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발을 씻어야 한다( 13:10). 우리가 세상 길을 갈 때에는 먼지로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문제가 발생함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날에는 어느 것도 우리를 더럽힐 수 없으며, 어느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있어서 문제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영원 안에서는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을 것이며, 모든 생활이 다 거룩하게 될 것이다

21
절 마지막에 또 한 구절이 있다. 그 성은 "맑은 유리 같은 정 금이더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상황들이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장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투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가식적인 것들이 있어서는 안되고, 많은 가면이 있어서도 안되며, 고의로 사람 앞에서 칭찬을 얻기 위해서 외식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 가식, 가면, 외식 등은 모두 불투명한 것이다. 실지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은데 도리어 좋은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불투명한 것이다. 많은 때에, 우리의 언어와 행동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다. 말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 걸음을 걷는 것도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 일을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 많은 것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다 불투명한 것이다. 이러한 인공적인 것과 모방하는 것은 다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으로서 생활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진실로 영적인 것은 다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속박하는 성결은 성령 안의 성결이 아니다. 모든 연기와 모든 외식함은 다 제거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일들을 자백하기를 배워야 하고, 자신의 죄를 덮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득죄했으면 마땅히 득죄한 사람에게 자백해야 한다. 그 죄를 변명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불투명하지만, 장래에는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 안의 거리는 마치 투명한 유리 같아서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인다. 언젠가 우리는 이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투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체 가장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5)
성 안의 성전과 빛

21
22절에서는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얼마나 귀한지!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 안에 성전이 있었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성전 안에 들어가야 했다. 성전은 특별히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해 놓은 장소로서, 사람은 거기에 가야만 비로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성의 전이 되시기 때문에 성전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왕래가 직접적이고, 대면하여 하는 것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특별한 장소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성전 안에 휘장이 있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휘장이 이미 갈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우리의 영과 실재로 그분을 경배할 수 있다. 또한 그 날에 가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당신이 있는 곳에 계신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그 날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고,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그 성 안의 성전이 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성소 안에 사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담대히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지성소 밖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23
절에서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위에서 말한 성전과 연관된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 안의 성전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계심으로 해나 달의 비침이 필요 없는 것이다. 구약의 성전에는 바깥뜰이 있었고 그 곳에는 해와 달의 빛이 있으며, 성소에는 등대와 빛이 있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해와 달의 빛이 들어갈 수 없었고 또한 등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비추었다. 새 예루살렘은 해나 달의 빛이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비추는데, 이것은 바로 성 전체가 지성소임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장래에 지성소가 될 것이다

"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되시고 어린양이 등이 되신다. 여기 새 예루살렘 안에도 여전히 간접적인 어떤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빛이신 하나님이 등이신 어린양을 통해 비추신다. 이것은 구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어린양을 통해 그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이며 심지어 영원에서 그러하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등을 통하지 않고서는 빛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여하간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그분을 볼수 있다.

24
절를 보자.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열조 시대 와 율법 시대와 은혜 시대 안에서 얻으신 사람들은 그 날에는 하나로 합쳐져서 신부로 그리스도께 드려지며, 왕국 시대 말까지 살아서 사탄의 미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와서 열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부활의 몸을 가지며, 그들은 아들과 왕이 된다. 새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혈육의 몸을 갖는다. 그들은 열국이 되고 백성이 되는 것이다. 땅의 왕들은 열국의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다

구약에서 성막은 다음과 같이 배열되어 있다. 성막은 중앙에 위치해 있고, 동쪽에 세 지파가 있고, 서쪽에 세 지파가 있고, 남쪽에 세 지파가 있고, 북쪽에 세 지파가 있다. 이것이 민수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도 하나님의 장막과 같다. 동서남북에 각각 세 문씩 모두 12문이 있다. 성막 사면에 12지파가 있었듯이 새 예루살렘 사면에 만국들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라는 말씀은 땅의 만국 백성들이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새 예루살렘으로 걸어갈 때 성의 빛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뜻이다

여기의 '영광'은 땅의 왕들의 영광을 가르킨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왕으로서의 영광을 그 성에게 드릴 것이다. '영광'은 창세기 31 1절의 '영광'과 같은 뜻으로서 각 지방의 가장 좋은 소산물을 가리키며, 다시 말하면, 새 땅에서 이 땅의 왕들이 땅에서 생산한 가장 좋은 것을 예물로써 그 성에 드린다는 것이다

25
절에서는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고 말한다. "성문들은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여기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시대에도 밤과 낮의 구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국들은 그들의 낮에 성에 들어온다. 그러나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성 안에는 밤의 어둠이 없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부활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곤치 않으며 주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26
절에서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돌아오겠고"라고 한다. 이 말씀은 24절에서 말한 왕들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 땅의 왕들은 그들 자신의 영광을 성에 드릴 뿐 아니라 또한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그 성에 드릴 것이다.

27
절를 보자.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속된 것'의 원문의 뜻은 '평범한 것'이다. 무릇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다 평범한 것이다. 육체에서 나온 것은 다 평범한 것이다. 사람에게 속한 것이나 육체에 속한 것은 다 그 성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성령에게서 나온 것만이 들어갈 수 있고, 다른 것은 일체 들어갈 수 없다. '가증한 일'은 성경에서 특별히 우상숭배하는 것을 가르킨다. '거짓말 하는 자'는 사탄과 관계된 자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사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우상과 관계를 맺은 것들과 죄를 범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 성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 안에서는 두 종류의 거민들이 살게 된다. 하나는 피로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천년왕국을 통과하여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바로 새 땅 위에서 백성이 되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이름도 역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 안에서 살지 않고 단지 성을 출입할 수 있을 뿐이다


(6)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는지를 보아야 한다. 21 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12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과실을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우리는 2 7절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낙원에 심겨져 있음을 본다. 여기에서는 성 안에 있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낙원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창세기를 회상해 보아야 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남자를 만드셨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얻기 원하시는 교회를 예표하는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그들 부부 두 사람을 에덴동산 안에 두셨다. 거기에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와 동산이 있음을 보았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들어왔고, 그들은 타락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내셨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 안에 누가 있는지 보았는가? 어린양이 있다. 그분은 바로 창세기 2장에서 아담으로 예표되었으며,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있다. 어린양의 아내는 창세기 2장에서 하와로 예표되었고, 그녀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 새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 양의 아내이고 또한 낙원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아담과 하와와 에덴 동산, 세 개의 실체가 존재했으나,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는 두 실체 어린양과 성만이 존재한다. 이 성이 바로 신부이자 또한 낙원이다. 여인과 에덴동산이 하나로 된 것이다. 창세기 안의 그 여인은 쫓겨날 수 있었으나, 계시록 마지막에 와서 이 여인은 쫓겨날 수 없다

아마 어떤 사람은 영원 안에 마귀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염려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원 미래에 이르면 하나님 자신이 친히 거룩한 성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세우신 것은 울타리가 없고 잘 파수되지 않은 동산이었으므로, 뱀이 들어올 수 있었고 죄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지막에 얻으실 것은 보호하기 위한 성이고, 이 성은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인은 낙원과 하나로 결합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나눌 수 없고, 따라서 이 여인은 쫓겨날 수 없는 것이다

22
1절에서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라고 말한다. 창세기에는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그 중 두 개의 강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 고통을 받았다. 바벨론은 비손 강 위에 건축되었고, 니느웨는 힛데겔 강 위에 건설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두 강에 의해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안에는 오직 하나의 강이 있고, 이 강은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기쁨을 얻게 한다. 시편 46 4절에서는 "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라고 말했다. 이 강은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 강물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22:1) 흘러나온다. 여기의 보좌는 단수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한 보좌 위에 앉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하나님의 통치권이 하나라는 뜻이다

22
2절에서는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12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12라는 숫자가 사용되었다. 12 가지 실과를 맺고 또한 달마다 그 실과를 맺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해 만족하고, 영원토록 만족하고 달마다 실과를 맺는다는 뜻이다. 영원 미래 안에서,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를 알고, 끊임없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한순간도 이러한 공급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달마다 그 실과를 맺는다는 것은 후퇴가 없다는 뜻이다. 이 시대에서는 슬프게도, 남자의 나이가 20세부터 60세까지는 높이 평가되지만, 60세 이상은 더 낮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27:3, 7). 이것을 가르켜서 퇴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영원 미래 안에서는 퇴보가 없고 달마다 실과를 맺는다

새 예루살렘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 때에, 우리는 매달 새로운 체험을 갖기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20년 전에 경험했던 특별한 한번의 체험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을 것이고 오늘 우리를 더 이상 도울 수 없을 것이다. 5년 전에 경험했던 특별한 한번의 체험도 역시 신선하지 않을 것이고 오늘 우리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날의 생명나무의 실과로 살아갈 수 없고, 달마다 계속 새로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받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받아야 한다. 달마다 한번씩 실과를 맺을 뿐 아니라 또한 달마다 다른 실과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단지 어느 한 부분을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주님의 각 방면을 인식하기를 배워야 하며 각양의 실과를 맺어야 한다

2
절에서는 계속 말하기를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했다. 실과는 생명을 대표하고, 잎사귀들은 나무의 옷으로서 외적인 행동을 대표한다. 주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까닭은 단지 잎만 있고 실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외적인 행위만 있었을 뿐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만국 사람들에게 죄가 없고, 사망이 없고, 고통도 없고, 저주도 없을 것이며, 또한 마귀도 없을 것이다. 이 무리들, 즉 만국의 백성들은 그 중앙에 위치한 성에서 계속 살게 된다. 주 예수님의 잎사귀가 그들을 치료하였다는 뜻은 바로 주님의 행위가 그들의 본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얻은 것은 생명나무의 실과이며, 그들이 얻는 것은 생명나무의 잎사귀이다. 그들은 주 예수님의 행위를 본받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만국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길이 있고 생명수의 강과 생명 나무가 있다. 이 세가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길이 있는 곳이면 생명수의 강이 있다. 생명수의 강이 있는 곳이면 생명나무가 있다. 즉 활동이 있는 곳이면 거기에 반드시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우리의 모든 행동, 모든 처신은 생명수의 흐름과 생명나무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길은 사람이 활동하도록 제공된 장소이며, 활동하려면 반드시 생명나무 -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가 아닌 -에 근거해야 한다. 생명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 그 결과 성령의 생명강물이 흘러 나오게 된다. 생명이 흘러 나오는 곳이 우리의 길이요, 우리의 거리이다. 만일 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 만일 주님의 생명과 그 영 안에 생명수 강의 흐름이 없다면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지혜를 사용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궁리한다면, 우리가 심은 것은 생명나무가 아니라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의 생명의 움직임에 따라 행한다면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생명수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모두 생명나무에 근거하며, 그 결과는 생명수의 강이 되는 것이다


(7)
세세토록 왕 노릇 함

3
절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으며"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창세기 3장은 완전히 지나갔고 영원히 다시는 저주가 없을 것이다. 창세기 3장에 들어온 모든 것을 한 단어로 함축시켜 표현하면 저주이다. 죽음도 저주의 일종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사망이 없을 것이다. 모든 죄의 역사는 다 지나갈 것이고, 사람은 충분히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절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라고 말한다. 여기의 상황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셨던 때와 같지 않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보좌가 그 안에 있다. 이제는 동산이 바로 성이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 되었다. 또 계속해서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고 한다. 하나님의 종은 영원 미래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는 영원 안에서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의 종으로서 섬길 것이다

4
절은 말하기를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고 한다. 일은 교통을 가져와야 한다. 참된 봉사는 바로 교통이다. 단지 봉사만을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교통해야 한다. 그들은 그분을 섬겨야 하고 또한 그분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 우리는 지난 날 얼마나 많이 이렇게 하나님을 보기도 전에 주님의 일을 해 버렸던가!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보고 난 이후에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하고 나서 끊임없이 후회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교통이 아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바란다. "하나님이여, 당신과 교통이 없이 일하는데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일을 다 마친 후 당신과 교통없이 일을 하는 데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일을 하고 나서 교만하고 자만하고 자족하는 데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이러한 교통이 없는 일에서 구원하사 우리가 일을 다 한 후에 당신과의 교통이 끊이지 않게 하시고 당신과 친밀한 교통을 갖게 하소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과 교통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들을 보면 즉시 그들이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간증이다

5
절에서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했다. 흑암은 지나갔다. 등은 사람이 만든 빛이고, 햇빛은 자연적인 빛이다. 모든 인위적이고 천연적인 것들은 소용이 없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분명치 않고 보이지 않을 때가 있으며, 심지어는 일을 다 해놓고서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5
절의 마지막에는 가장 중요한 한 마디가 있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시의 목적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사람이 통치권을 얻었다. 이것은 천년왕국 안에서의 일이 아니다. 이 부분의 성경 - 계시록 21, 22장은 - 천년왕국의 일을 말하고 있지 않고 영원 안의 일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영원 미래까지 다스릴 것이며 영원 무궁토록 통치할 것이다.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관리하고 사탄을 멸하도록 하셨다. 이제 사람은 통치권을 얻었고 사탄은 이제 불못에 던져졌다. 하나님은 그분이 친히 지으신 사람에 대해서 목표하신 바가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한 면으로 사람이 그분을 닮도록 하셨고, 또 한 면으로는 통치하는 것을 사람의 일로 정하셨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정금으로 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한 신부가 있는데, 각종 보석이 모두 그녀 안에 있고 어느 한 가지도 부족한 것이 없다. 그녀는 참으로 티나 주름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완전히 거룩하며 흠이 없다. 그녀는 참으로 영광을 입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한 영광스러운 교회가 여기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들의 일은 무엇인가? 영원토록 통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받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일은 수 없이 방해를 받았으며, 그래서 마치 하나님의 일이 파괴된 것 같고 성공할 수 없는 것 같았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신다! 여기에 한 무리가 있고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정금으로 가득하다. 진주가 가득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고, 보석이 가득한 것은 성령이 하신 일이다. 그들은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도 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흥회를 열어야 하는 가? 신학교를 세워야 하는가? 아니면 가정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위대 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것을 비할 때 너무나 부족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한다. 우리가 이 이상을 보고 모든 대가를 드릴 수 있게 하기를 원한다. 사람이 이상을 보면 즉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상을 주사 그분이 무엇을 하시며,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보여 주시기 바란다. 대체 그분은 어떤 사람을 얻기 원하시는가? 대체 그분이 얻기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이것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큰 소리로 외칠 것이다. "나는 너무 작습니다. 나는 이전에 너무나 자신을 주의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서 일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그분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큰 능력으로 운행하셔야 나는 비로소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이 큰 이상이 우리를 쓰러뜨려야 한다. 또한 이 이상이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의 이와 같은 상황이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이상을 주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보았다면, 우리는 온 존재를 드릴 것이며, 우리는 전체가 변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기는 이가 되느냐 아니면 실패자가 되느냐의 두 가지 선택 가운데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기도를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이기는 이가 될 수 없다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양의 큰 목자가 되신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의 능력과 권위로 우리를 붙드시고 이끄사, 우리로 하여금 오늘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그분께 속하고, 영원토록 그분께 헌신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섬기고, 영원토록 그분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한다 주님이 우리를 오늘부터 영원까지 은혜로 대하시기를 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