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활과 심판

4-7 휴거와 환난 - 워치만니

요나한 2016. 5. 8. 22:43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있지만 결코 온 교회가 다 환난을 통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 있다. 아래의 몇 구절의 성경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 약속>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널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시록 3 10)

 

여기서 먼저 한가지 결정해야 할 것은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가 과연 무엇인가이다. 

이때는 바로 대환난의 때이며 이것은 성경을 읽는 자마다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험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의 성경은 우리에게 온 교회가 다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성립되지 않음을 보여주고온 교회가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성립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한 무리의 사람 (인내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 대환난을 면하리라는 것이다. 

온 교회가 다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 구절을 대하면 어려움울 당하게 되고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온 교회가 다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도 이 구절을 대하면 그들의 입이 닫혀질 것이다.

 

이 구절의 성경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한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교회였다. 비록 소아시아의 이 일곱 교회는 교회를 대표한 일곱 시대였지만, 이 일곱 교회는 또한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일곱 지방교회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나머지 여섯 교회에는 이 약속을 주지 않았으며 특별히 이 약속을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것으로 보아 이 약속은 제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주님이 두아디라에게 "내가 또 그에게 샛별을 주리니" 라고 한 것이 휴거의 약속인 것 같지만, 분명한 휴거의 약속은 오직 빌라델비아에게만 주셨다. 만일 휴거의 약속이 일곱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약속은 온 교회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휴거의 약속은 모든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보아 휴거에는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휴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구원받고서 영생이 있는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휴거의 약속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 전에 휴거되는 것은 구원받고 영생이 있는 것 외에 다른 조건이 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인내의 말씀은 일반적인 인내가 아니다인내의 말씀이다. 일반적인 인내가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인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랫동안 인내하시며 자신이 권세를 얻을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셨다. 그분은 오늘 조급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반대와 핍박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받으신다. 오늘 사람들은 그분을 반대해도 그분은 하늘에서 우뢰를 발하여 보복하지 않으신다. 오늘 그분은 자신의 주권과 지위에 서서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하나님이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시기까지 기다리시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내이다.

 

우리는 오늘 그분과 함께 인내해야 한다. 요한이 이 일곱 교회에 서신을 쓸 때 순서대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이라고 말했는데, 이 한 마디 안에서 세 가지 곧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 땅에서 환난과 참음에 동참할 수 있다면 장래에 왕국에 동참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켜야만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다. 만일 온 온 교회가 다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다면 온 교회가 다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인가? 무릇 오늘날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세상에서 재물이 있고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도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 오늘 명성을 얻으려고 하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오늘 모든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휴거의 약속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지금 그분의 왕국을 기다리시며 그분은 또한 함께 기다리며 함께 인내하도록 그분의 믿는 이들을 불러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 응당 합법적인 권리를 거절하고 사람들의 멸시와 반대를 견디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의 지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지위와 같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시험할 때에 주님이 그들을 지켜 시험을 면케 하실 것이다.

 

온 교회가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기서의 지킨다는 것이 휴거가 아니라 그들이 환난을 통과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지킬 따름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오늘 여기 한 집이 있는데 불행히도 불이나서 오직 주방만 남고 다른 것은 다 불타 버렸다. 집이 불탈 때 하나님은 집 안에 한 부분을 남겨서 당신을 불에 타지 않게 하시지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집에서 나오도록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라"는 의미는 대환난 때 당신을 지키지만 결코 당신을 거기서 나오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헬라어는 당신이 당신이 환난을 통과할 수 있도록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안에 있지 않도록 지키시는 것임을 주의하기 바란다예를 들어 교회라는 의미는 '불러서 나온즉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있다시험에서 지킨다는 의미의 원문은 당신을 데리고 나온다는 의미가 있다문자적으로 본다면 벗어난다는 의미이다환난 안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나온다는 것이다.

 

시험을 벗어나도록 지키심을 받는 것과 시험의 때를 벗어나도록 지키심을 받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시험을 벗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시험의 장소를 떠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시험만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그러나 시험의 때를 벗어난다는 것은 시험의 때조차 보지 못하는 것으로 시험의 장소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시간도 없는데 하물며 공간이 있겠는가사람은 시험으로부터 건져질 수 있다그러나 그 시험의 때를 피하도록 지킴을 받은 사람이 환난을 통과할 가능성은 없다.

 

어떤 사람이 시험에서 지켜진다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의 고센 땅에 있을 때와 같다고 말한다비록 하나님이 크게 애굽인들을 벌하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그러나 성경( 3:10)은 근본적으로 그때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만일 성경이 여기서 네 시험에서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면 환난을 통과하는 것이 가능하며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다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따름이다그러나 성경은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고 말한다그때를 도무지 만나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환난을 통과한다는 말인가그러므로 우리의 친구들이 말한너를 환난에서 넘어지지 않고 해를 받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시험의 날을 면할 수 있는가오직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휴거되는 것이다사람이 죽게 되면 환난은 그에게 임하지 않으며 또한 휴거되어도 환난이 그에게 임하지 않는다여기서의 지킨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지켜짐인가물론 휴거이다만일 어떤 믿는 이들이 오늘 살아있는데 하나님이 설마 그들을 죽게하여 보호한다는 말인가결단코 그럴 수 없다계시록 3 10절은 비록 분명하게 휴거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휴거를 추론하고 있다이 한 구절에서 휴거가 환난 전에 있는 것이 아니며 환난 후에 있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이 그들을 지키어 환난을 통과하지 않게 하실 것인데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의 상태가 오늘 하늘의 그리스도와 달라서는 안 된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인내의 때이다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 응당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받으셨던 것을 받아야 한다.

이러해야만 휴거의 자격이 있다.

 

 

<두 번째 약속>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 36)

 

이 구절은 온 교회가 다 환난 전에 휴거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누가복음 21 36절의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누가복음 21장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누가복음 21장과 마태복음 24장은 다 장래에 있을 일들을 예언하고 있다.다만 누가복음에서 주의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훼파되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도 비록 예루살렘이 훼파될 것을 말하고 있지만마태복음에서의 강조점은 주님의 재림이다예루살렘은 주후 70년 로마 타이터스 장군에 의해 훼파되었다누가복음은 이때 예루살렘이 훼파될 것을 말할 뿐 아니라 대환난 때 예루살렘이 특별히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힐 것을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훼파될 것이라는 예언은 장래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주후 70년에 훼파된 것은 단지 유대인에게 미리 맛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따름이다누가복음은 한 면으로 타이터스의 때를 가리키며 한 면으로는 또한 대환난의 시대를 가리킨다즉 한 면으로 타이터스 장군의 수하에서 유대인들이 받게 될 고난을 말하고 또 한 면으로는 대환난의 때에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손에 당할 고난을 말한다그러므로 마태복음은 휴거와 심판을 다루고누가복음은 반대로 대환난을 중시한다.

 



 마태복음 24 3절에서 제자들은 주님께  3가지를 묻는다.


1. 언제 이 일이 일어나는가, 즉 언제 예루살렘이 훼파될 것인가

2. 주님이 강림할 때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가

3. 세대의 마지막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가

 

누가복음 21 7절은 다만 제자들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라고 질문한 것만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이 언제 강림하시는 것과 이 시대의 마지막 일을 전혀 묻지 않는다. 이로 보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중시하는 것은 각각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이 중시하는 것은 주의 강림이고 누가복음이 주의하는 것은 장래의 대환난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환난이 어떠할 것인지를, 한 면으로는 타이터스 때의 환난이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 주며 한 면으로는 대환난 때에 형편이 어떠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누가복음 21 8절에서 16절은 마지막 이전의 일이다. 17절에서 19절은 그들이 받아야 할 고난이며, 20절에서 28절은 예루살렘의 두 차례의 훼파가 한 번은 타이터스의 때이며 한 번은 대환난의 때를 포함함을 말한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았는가? 이 단락의 성경을 근거하면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다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왜냐하면 이 단락의 성경은 예루살렘이 어떻게 될 때 여러분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있으려면 그들이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 한다.  "이런 일이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원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29절부터 33절까지의 주님은 이러한 일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증하시며 말씀하시는 것 같다. 만일 말씀이 33절에서 멈추었다면 어떤 그리스도인도 휴거되지 못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환난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33절 이후에 주님의 어조는 바뀌어지는데 앞의 어조는 마치 다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것 같다. 34절에서 36절까지는 어조가 갑자기 바뀌어진다. 이곳의 범위는 확대되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땅에 임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4~ 35) 


피할 길이 있는가? 있다. 36절은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들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출구인데 바로 휴거이다.(뒤 문장이 증명함) 누가복음 21장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이 두 차례에 걸쳐 훼파됨과 그리스도인이 통과해야 할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휴거된다면 34절의 말씀은 필요치 않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환난을 통과한다면 36절의 말씀 또한 공허한 것이다.

그러므로 34절에서 36절을 볼 때 휴거는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은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만이 휴거된다는 것이다.

 

피해야 하는 것은 장래의 대환난인데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오직 두 가지의 방법 뿐인데 하나는 죽는 것이고 하나는 휴거되는 것이다. 주님은 장래의 일을 피할 것을 약속하셨는데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약속하시기를 "인자 앞에 서도록" 이라고 말씀하셨다. '선다'는 것의 원문은 '놓여진다'는 것이다. 당신이 인자 앞에 설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당신은 인자 앞에 놓여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휴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휴거임에 틀림없다. 죽음은 축복이 아니다. 설마 누가복음 21 26절의 소망이 죽음이라는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온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의 주장은 21 20절에서 28절의 말씀과 충돌되는데, 이는 명백하게 환난을 통과하는 광경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36절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온 교회가 다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36절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환난 전에 휴거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깨어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나이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36절의 행위가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주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깨어 기도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조건적이다. 이렇게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36절의 행위가 있는 자라야만 주님의 면전에 있게 될 것이다. 뿐만아니라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고 하는 것은 하루하루 기도하며 간구하며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원문에서는 뒤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늘 깨어 기도하는' 뒤에 마땅히 ;(콜론)을 붙여야 한다.  즉 늘 깨어 기도하며 주께 '주여 나를 이 모든 일 곧 대환난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늘 깨어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깨어 기도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환난을 벗어나도록 기도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의식(衣食)을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영성을 위하여 육체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만일 이 세상이 가증스럽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께 이 세상을 벗어나도록 구원해 달라고 주께 간구하겠는가? 누가 죄를 사랑하면서도 죄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겠는가? 누가 돈을 사랑하면서 부자가 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장차 올 환난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여, 나를 장차 올 환난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 이러한 기도가 있기를 바란다.

 

"인자 앞에 서도록" 이 한 마디의 원문은 "인자 앞에 설 자격이 있도록" 이다. 유감스럽게도 '자격' 이 중국어에서는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은혜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행위의 문제이다. 휴거되고 안 되고는 자격이 있고 없고의 문제이다. 만일 당신이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인자 앞에 둘 자격이 있는 사람이며 휴거될 자격이 있다고 여기실 것이다. 무엇을 자격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휴거 시키실 수 없으시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은 정말 괴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천국에서는 영원히 기도해야 하고 영원히 성경을 읽어야 하며 영원히 찬송해야 하는데 이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천국에서는 여러 가지 오락도 없는데 이것은 무의미 하지 않는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충분히 영적이지 않고 하늘에 속하지 않으므로 하늘로 휴거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우화에 매가 고양이에게 말했다. "하늘은 참 좋단다. 태양은 참 좋고 달도 참 밝고 높은 산의 눈은 아주 보기 좋단다." 그러자 고양이가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는데 하늘에 쥐가 있니?" 고양이의 생각은 하늘에 만일 쥐가 없다면 그렇게 좋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자녀, 재산, 지위, 명성에 불과하다면 천국은 그에게 아무런 흥미가 없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오늘 주님에 대하여 아무런 열정이 없으며 하늘의 일에 대하여 아무런 흥미가 없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싫어하신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직 당신의 무심함과 원치 않음으로 인한 것이다.

 

지난 해 여름 어떤 형제가 온 교회가 다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중에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하자, 있다고 말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중에 간음을 범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하자, 있다고 말했다. "가령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가 영화를 보는 중이고 간음을 범하는 중이라면 설마 그도 즉시 휴거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도 즉시 휴거 된다면 이것은 어떠한 가르침인가? 주님은 이러한 사람은 휴거 되기 합당치 않다고 말했다. 휴거는 자격이 있고 없고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땅의 이러한 일들을 붙잡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휴거를 강요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를 들어 수소 풍선은 위로 올라갈 수 있지만 돌 하나를 붙들어 매어 두면 그것은 올라갈 수 없다그러므로 휴거는 생명이 있고 없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당신을 붙잡는 어떤 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어야 한다주님은 "너희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이 어떤 것에 붙잡혀 있지 않은지를 물으신다.

 

이 구절(36)은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온 교회가 다 환난을 통과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온 교회가 다 환난을 통과하는 것도 아님을 보여 준다주님은 여기서 하나의 약속을 주셨는데누구든니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휴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만일 다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면 이 구절은 소용이 없고 공허한 구절이 된다환난 전에 휴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이 약속을 주신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 구절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친구들은 '장차 올 이 모든 일' 이 대환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34절의 34절의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가리킨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늘 깨어 기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방탕과 술 취함 등의 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디를 잃어버렸는데 '장차 올' 이라는 말이다. 34절의 일이 장래에 비로서 있을 것인가, 현재에 있는 일인가를 묻고 싶다. 34절의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전적으로 오늘날의 일이며 오늘 벗어나야 할 일이지 어떻게 장래까지 기다려서 벗어나는가. 또한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격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응당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36절에서 말한 '장차 올 이 모든 일' 은 대환난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장차 얼 일은 오늘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온 교회가 다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주님이 "너희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다만 이상의 두 가지 큰 근거만을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최소한 계시록 3 10절과 누가복음 21 36절에서 어떤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임을 말해 준다. 어제 읽은 성경은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말하고, 오늘 읽은 성경은 하나의 출구가 있다고 말해 준다. 대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읽은 성경은 소수의 믿는 이들이 환난 전에 휴거될 것임을 말한다. 우리가 만일 더 자세히 마태복음 25장을 읽고서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를 믿는 이로 보았다면 다섯 명의 어리석은 처녀도 믿는 이임을 알 것이다. 휴거 되는 이들이 믿는 이고 남겨지는 이들도 믿는 이다.

 

 

<여러가지 근거들>


만일 누가복음 21 36절의 출구가 없다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휴거는 하나의 비밀스런 일인데 이는 성경에서 주님이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24:43, 살전 5:4). 이것은 주님의 오심이 비밀스러우며 분명히 드러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 방면으로 말한다면 그날이 당신에게 도적같이 임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오심이 공개적이라는 것이다. 한 방면으로 말하면 비밀스럽고 한 방면으로 말하면 또한 공개적이어야 하는데 주님이 두 번 오시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만일 소수의 믿는 이들이 환난 전에 휴거되고 대다수의 믿는 이들이 환난 후에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두 종류의 성경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외에 계시록 12 5절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휴거 된다고 한다. 14 3절에서 그들은 보좌 앞에 있다. 누가복음 21 36절은 인자 앞에 선다고 한다. 이것은 다 하늘로 휴거 되는 것이지만 어떤 곳의 성경 말씀은 공중으로 휴거 된다고 하는데 데살로니가 전서 4 17절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와 같은 것이다. 마태복음 25 10,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역시 공중에서의 일이다. 계시록 14 14절에서 16절의 추수 역시 공중에서의 일이다. 만일 휴거가 다 환난 전에 있거나 혹은 다 환난 후에 있다면 이 두 종류의 성경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소수의 믿는 이들은 환난 전에 휴거 되고 대다수의 믿는 이들이 환난 후에 휴거될 것이라는 것이 실로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부분이 이치가 맞지 않게 된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가 오실 기한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한 방면으로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가 오실 기한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 면으로 일곱째 나팔이 불려질 때, 즉 마지막 나팔이 불려질 때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하고 한 방면으로는 또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 "너희가 생각지 못한 때에 인자가 오리니"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휴거가 오직 한 번이라면 어떻게 그분이 언제 오시는지 알지 못하겠는가? 

이는 성경이 이미 일곱 번째 나팔이 불려질 때 그분이 오시리라 했기 때문에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나타난 때부터 삼 년 반을 계산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왜 그날과 그 시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는가? 이것은 어떤 사람은 환난 전에 들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난 전에 휴거 되기 때문에 아무도 언제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환난 후의 휴거는 누구든지 다 언제인지를 알 수 있다.

 

 나는 감히 휴거가 이 두 번밖에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따른다면 휴거는 이렇게 분별되는데 한 면은 알지 못하고 한 면은 알 수 있는 것이며, 한 면은 비밀하고 한 면은 공개적인 것이며, 한 면은 사람이 볼 수 없고 한 면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편견이 있다면 이러한 성경의 말씀들은 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된다. 

                                                                                                                                                           

한국복음서원에서 발행한 워치만니 전집, 주제별 진리 연구기록 - [휴거와 환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