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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권위의중요성

요나한 2016. 11. 5. 08:18
권위의 중요성

하나님의 보좌는 권위에 세워짐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비롯되고 하나님의 보좌는 권위에 세워진다. 만물이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창조되었다. 또한 땅 위에 모든 법칙이 권위에 의해 지탱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하지 않고
그분의 권위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권위는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역사를 대표한다. 능력에 득죄할 때에는 비교적 쉽게 사함을 받아도 권위에 득죄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 득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함받기가 용이하지 않다.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이 권위이시고 또 세상 모든 권위는 모두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이다. 권위는 우주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서 권위보다 더 승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의 권위를 알지 않으면 않된다.


사탄의 유래

사탄이 사탄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맞서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
배역은 사탄이 타락한 원인이다.
사14:12~15 와 겔 28:13~17, 두 단락 모두는 사탄의 범죄와 타락을 말하는데, 이사야 14장은 사탄이 하나님의 권위를 범한 것을 말하고, 에스겔 28장은 사탄이 하나님의 성결을 범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범하는 것은 배역의 문제로서 하나님의 성결을 범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하다. 죄는 행위의 문제로서 쉽게 사함을 받지만 배역은 원칙의 문제로서 사함받기가 쉽지 않다. 사탄은 하나님보좌위에 자기보좌를 세우려 함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범했다. 그러므로 사탄의 원칙은 자고함이다. 죄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타락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 한다면 결코 권위를 범해서는 않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탄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사탄의 원칙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에서 원칙상 사탄의 편에 서 있으면서 교리적으로 그리스도 편에 서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악한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 전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결코 사탄의 원칙대로 섬길 수 없다. 그리스도의 원칙이 올때 사탄의 원칙이 끝나게 된다. 현재 공중에서 사탄은 여전히 분수를 넘어 행동하고 있다. 그는 계시록 끝에 가서야 완전히 내쫓길 것이다. 우리가 사탄의 원칙으로부터 흠없이 우리 자신을 깨끗이 씻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마태복음 6:9~13까지의 주님의 기도에는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말씀이 있다. 시험은 사탄의 역사를 가리킨다. 또 "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라는 말씀이 있는데, 악한자는 사탄자신을 말한다. 그 다음 주님은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말씀하셨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선포이다. 왕국과 권세와 영광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가 사탄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왕국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귀한 사실을 보는데 있다.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기를 배워야 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훔칠 수 없다.
사탄이 땅의 만국을 주님께 보여 주었지만 주님은 천국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권위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을 하나남의 권위 아래로 이끄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권위를 만나지 않고서 어떻게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권위를 만지지 않고서 어떻게 사탄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우주 가운데 모든 다툼은 권위의 문제임

우주 가운데 다툼의 중심은 누가 권위를 얻게 되는가에 있다. 우리는 권위가 하나님께 있음을 주장함으로 사탄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 위치에 두고 하나님의 권위를 지지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권위를 만지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기본 인식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권위를 깨닫기 전에 그는 이 땅위에서 교회를 완전히 제해 버릴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그는 발( 사람의 능력) 로 가시채( 하나님의 권위)를 차기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땅에 엎드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다메섹 성의 아나니아의 지시에 순복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권위를 만났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회심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까지 인식했다.

바울은 총명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인 반면 아나니아는 무명한 작은 한 형제였다. 성경은 그의 이름을 한번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권위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찌 아나니아의 말을 들었겠는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권위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메섹 성의 무명한 작은 형제에게 순복할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권위를 만난 사람은 권위와만 관계를 맺을 뿐 권위와 연관된 사람과는 관계를 갖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권위에 대해 생각할 뿐 사람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태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권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권위에 순복하기 전에 사람을 만진다면 우리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먼저 권위의 문제를 만지고 그 다음 그 사람에게 순복한다면 ,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옳은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교회로 말미암아 우주 가운데 그분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안에 있는 동역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권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하기 때문에 그분은 가장 큰 힘을 사용하여 그분의 권위를 지키신다. 눈이 멀었거나 스스로 옳다했던 우리들은 어느 때인가 적어도 한번 하나님의 권위에 부딪혔다. 우리가 부서질 때만이 비로소 순복하게 되고 , 순복할 때 하나님의 권위를 알기 시작한다. 또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만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표 권위에 순복하게 된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요구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라는 것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큰 요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헌신하는 것이나 자기희생이 아니라 순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삼상15장)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사람을 패배시킨 후 아말렉 왕 아각을 불쌍히 여기고 또 좋은 소와 양들과 모든 좋은 것들을 아까워하고 이것들을 죽이는 대신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에게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가름보다 나으니" 라고 말했다. 여기서 언급된 제사는 번제로서 죄와 무관한 향기로운 제사이며
( 속죄의 제사는 향기로운 제사라 하지 않았음) 하나님의 열납하심과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듣고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러한 제사속에도 자아의 뜻이 섞여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듣고 순종하는 것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뜻을 높이는 것이다.
권위의 건너편에는 순종이 있다. 순종하려면 먼저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여 순종하려고 해서는 않된다. 오직 영 안에 살아야만 순종할 가능성이 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최고의 표현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어떤 사람은 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면서 기도하신 것이, 그 잔 마시기를 두려워하는 주님의 악한 육신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칙상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삼상 15:22와 일치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 최고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우리 주님의 순복은 십자가의 못 박히심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그분이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 원함 )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겠습니다 또는 내가 그 잔을 마시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다만 듣고 순종했을 따름이다. 그분은 "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말씀하셨지만 ( 마26: 39) 거기에는 그분 자신의 주장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이지만 잔 (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 그분은 삽자가에 못박힐 필요가 없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 잔과 하나님의 뜻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분명해질 때 이 잔은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잔으로 변했고, 잔과 뜻은 하나가 되었다. 뜻은 권위를 대표한다. 이같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온 순복은 곧 권위에 대한 순복이다. 만일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권위에 순복할 수 있겠는가?

또한 주님은 "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으랴" 라고 말씀하셨다 (요 18:11).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관심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분은 잔을 마심( 즉 , 구속을 위해 못박힘 )이 곧 하나님의 뜻이심을 깨달으셨을 때 "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고( 마 26: 46) 즉시 순종하셨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주님의 죽으심은 권위에 순복하는 최고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높지 않다. 주님은 그분의 십자가 ( 제사를 드림 )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욱 관심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가 희생하고 자아를 부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문제이다. 기본적인 원칙은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 만일 배역의 원칙이라면 제사를 드리는 것까지도 사탄에게 즐거움과 영광이 될 것이다. 사울이 소와 양을 제사로 드렸지만 그가 사탄의 원칙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제사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권위를 뒤집는 것은 곧 하나님을 뒤집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한다. (삼상15:23)

주님의 일을 하는 , 하나님의 종 된 우리들에게 첫번째로 부딪치는 것은 바로 권위의 문제이다. 사람이 권위에 부딪치는 것은 구원과 같이 실제적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깊은 공과이다. 우리가 어느 때인가 권위에 부딪치고 권위에 의해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할 수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권위를 만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만일 권위를 만났다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제한을 받게 되고 하나님께 쓰임받기 시작한다.


주님과 바울이 받은 심판

마태복음 26장에서 주 예수님이 붙잡혀서 두 종류의 심판을 받으셨다. 그분은 대제사장 앞에서 종교적인 심판을 받고, 빌라도 앞에서는 정치적 심판을 받으셨다.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으셨을 때 주님은 이 세상의 다스림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답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을 때 주님은 답변하셔야 했다. 이것은 권위에 순복하는 문제이다. 또 바울이 사도행전 23장에서 심판을 받을 때,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것을 알고난 후에는 즉시 그에게 순종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 우리들은 얼굴을 맞대듯 권위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뜻의 원칙, 곧 권위에 순복하는 원칙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사탄의 배역의 원칙, 곧 하나님의 뜻이 없어도 일하는 원칙안에 있게 될 것이다. 오! 이것은 실로 큰 계시가 필요하다.

마 7:21~ 23 에서 주님은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능력의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 이 일에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출발점으로 하여 스스로 주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다. 이것은 육체의 활동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일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불법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이것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근원이 되셔야 한다. 일은 사람이 가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 사람이 그에게 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비로소 천국 권위의 실재를 체험할 수 있다.


권위를 보는 것은 큰 계시임

우주 가운데에는 두가지 큰 일, 곧 구원에 이르도록 믿는 것과 권위에 순복하는 것인 신뢰와 순종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의 정의가 불법이라고 말해준다 ( 요일 3: 4). 롬 2:12에서의 "율법없이" 라는 말은 "불법적인"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불법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곧 죄이다. 범죄는 행위의 문제이고 , 불법은 태도와 마음의 문제이다. 현시대는 불법의 시대이다. 세상은 불법의 죄로 가득하며 불법의 사람까지 곧 나타날 것이다. 동시에 권위는 이 세상에서 점점 더 지위를 잃어갈 것이다. 종국에는 모든 권위가 전복될 것이고 오직 불법만이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가운데에는 두가지 원칙, 곧 하나님의 권위의 원칙과 사탄의 배역의 원칙이 있다. 우리는 배역의 영을 가지고 배역의 길을 가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배역적인 사람이 말씀을 전할 수 있을 지라도 사탄의 원칙이 그 안에 있기때문에 사탄은 그를 비웃을 것이다. 봉사는 언제나 권위를 섬기는 것이다. 대체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가? 순복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반드시 언젠가는 권위에 대해 기본인식을 가져야 한다. 전기에 한번 감전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 결코 전기를 부주의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한번 하나님의 권위에 부딪쳐 하나님에 의해 엎드려진 후에는 눈이 밝아져서 자신 뿐 아니라 남을 분별할 수 있게 되어 누가 불법적인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우리를 배역의 길에서 구원해 주시기 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알고 순복의 공과를 배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합당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권위와 순복", 한국복음서원, 1장 권위의 중요성 」
출처 : 워치만 니
글쓴이 : arc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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