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 폴 워셔 2002년 몽고메리 청소년 복음집회
https://youtu.be/ols1AVYfn0I?si=XuM7oKR1eATVa2uy
좁은 문, 좁은 길
원제 : 젊은이들을 놀라게 한 충격적 메시지
폴 워셔
이 시간에 여러분과 이곳에 함께 한 것이 저로서는 크나큰 특권입니다.
더 이상 말하기에 앞서 주님께 기도로 나가고 싶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오늘 이 곳에서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고 여러분이 이해 못할 일들이 너무 많지만 저는 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저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젊은이들에게 설교하고자 합니다. 저는 마치 다시는 설교하지 않을 사람처럼 설교할 것이며, 여러분이 오해할 일들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노엽게 할 일들을 말씀드릴 것이고 여러분이 부정해 버릴 일들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말씀드릴 일들에 대해 당신은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녁 이곳에서 말씀드리는 내용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버리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설교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더 큰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성경이 말해주기 때문에 설교는 저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저는 큰 곤란 가운데 있는 것이며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채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제 말이 진리라면 두려워하고 떨어야 하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제가 오늘의 성경 본문을 올바르게 해석했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곤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곳에서 결정해야 할 유일한 문제는 우리 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이 거짓 선지자인가? 아니면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도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아버지, 아버지. 저는 여러 가지로 너무나 작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십니다, 주님. 당신은 아십니다. 그러나 오 존귀하신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드린 것은 다른 불 밖에 없을지라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수 있다면. 이 모든 소란한 활동들 가운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이 죽은 뼈들이 살아난다면, 오 주여.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간구 드립니다. 주님, 그들이 열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성경의 진리를 보게 하소서. 그들 위에 숨을 내쉬소서. 회개를 주소서. 믿음을 주소서. 그들을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주님,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위해 이 일을 하소서. 주여, 그렇게 하소서. 아무도 공로를 가로채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하나님의 법궤에 손 대지 못하게 하시고 그런 일을 하는 자를 엎드러져 죽게 하소서.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 행하소서. 제발. 그 외에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습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것 외에 이 자녀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아멘.
마태복음 7장부터 보겠습니다. 성경이 있으신 분은 함께 읽읍시다. 마7:1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곳에 서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존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괜찮게 느끼는지, 세상이 여러분 뜻대로 굴러가는지, 여러분의 재정이 건실한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를 잠 못 들게 하는 문제는 딱 하나입니다. 아침 내내 저를 괴롭게 만든 문제는 딱 하나, 바로 이것입니다. 백 년 내에,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옥에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의 사역지가 미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서 설교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 기독교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불경건한 문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셨으면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고 너무 많은 성인들이 자신들이 일생에 한 차례 기도[영접기도]를 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것이라 믿도록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하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 그들 역시 세상적입니다. 자기들끼리 비교할 때는 마음에 아무 거리낌도 없습니다. 그들은 주변의 동료들 대부분도 자기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들을 즐거워합니다. 육감적인 옷을 입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행합니다. 세상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너무 사랑하긴 하지만 오 주여, 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이냐구요? 우리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나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그리스도인이냐구요? 예수 그리스도께 내 마음에 들어와 달라고 기도하고 요청했던 일이 내 인생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복음주의와 개신교에 있는 가장 큰 이단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에 들어와 달라고 기도로 요청하기만 하면 그가 반드시 들어오신다는 가르침임을 아셨으면 합니다. 성경에서 그런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50년 전까지 침례교의 역사에서 그런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사실은 구원은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회개를 동반합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 거룩함 가운데 자라나는 것,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되길 원하지 않는 것, 세상을 닮지 않는 것, 미국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하듯 하지 않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말합니다. [청중들의 박수]
왜 박수를 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소리나 듣자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박수 받자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게 말합니다. “오, 저는 당신을 따라 루마니아에 가고 싶어요.” “당신을 따라 우크라이나에 가고 싶어요.” “당신이 설교하고 교회를 세운 페루의 정글에서 나도 설교하고 싶어요.” 그러면 제가 말합니다. “아니요, 당신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갈 거예요.” 저는 말합니다. “아니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죠?” “거기서라면 당신은 교회에서 출교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쓸데 없이 까다롭게 구는 것이 아닙니다.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미국 기독교가 거의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면 얼마나 큰 사랑이 필요한 줄 아십니까? 이런 곳에 다시는 초청 받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큰 값을 치르는 것인지 아십니까? 인기를 잃는 것이요? 왜 그 일을 하는지 아십니까? 돈을 많이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해서도 아닙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성경을 보려 하는데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봤으면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신을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합니다. 성경과 비교하십시오. 어떤 젊은이가 목사나 청소년 사역자에게 와서 말합니다. “내가 구원 받았는지 확신이 안 서요.” 그 사역자는 판에 박힌 대답을 할 것입니다. “당신 생에 예수님께 마음에 들어와 달라고 기도로 요청한 일이 있습니까?” “그럼요.” “진지했나요?” “글쎄, 잘 모르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사탄에게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 말하십시오. 성경책 뒤에 기록했나요? 의심이 들 때마다 사탄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성경책 뒤에 구원 받을 때 전도자가 했던 말과 날짜를 기록해 두었습니까?”
교회가 이런 미신에 점령당했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너 자신을 시험하라! 성경의 빛에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살펴보라. 너희가 그리스도인인지 스스로 시험하라.
지금 당장 여러분을 흩어지게 해서 이 도시의 집집마다 두들기고 다니게 해 본다면 무슨 일을 만나게 될지 아십니까? 이 도시의 사람들 중 최소한 99%가 자신을 신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집집마다 두드려 보십시오. 제가 구원 받고 고향에 돌아가 문을 두드렸을 때 무슨 일을 만났는지 아십니까? 우리 마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들 중 85%는 교회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도 거룩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섬김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분리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열방 가운데 복음이 선포되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여, 그들은 구원 받았습니다.
왜 그들이 구원 받았습니까? 설교하기보다는 성경 공부를 더 했어야 하는 어떤 전도자가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집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었는지 다음 번에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이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놀라게 했으니 이제는 성경을 보기 원합니다.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좁은 문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역사적으로 남침례교인은 다음 사실들을 깨닫는 일에 다른 교단들보다더 앞서나갔습니다. 즉 오직 한 문, 한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가 계시며 그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답이 있지 않습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단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해 왔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세상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뿐이며 그것이 모든 것임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는 문제를 성경이 말해 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채 태어났고 하나님을 미워하며 결코 하나님을 찾아 나오지 않을 사람들이기에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모든 율법을 깨뜨렸습니다. 당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점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당신이 오직 죄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지서에서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누더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입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잠깐만이요. 하나님은 아무도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들이, 사도들이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당신에게는 오직 진노,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만이 남아있다고 말입니다. 당신의 반역과 죄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설교하면 즉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워하실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워하셔야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낙태를 증오합니다. 거룩한 것을 사랑한다면 거룩하지 않은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미국인들은 이 사실을 잊었습니다. 당신이 하기 좋아하는 많은 일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부흥을 위해 기도합니다. 청소년들의 모임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전에 당신은 텔레비전에서 하나님이 절대로 혐오하시는 프로그램들을 봅니다. 그러고는 왜 성령님이 그곳에 임하시지 않았는지, 왜 거짓 불과 거짓 흥분을 만들어내야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며, 나무에 달려 죽으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는 것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들어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오늘 이곳에서 구원 받는다면 그것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시관을 그분의 머리에 씌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옆구리에 창을 찔렀기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 받는다면 그 이유를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가 여러분의 죄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죄와 여러분에게 부어져야 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독생자에게 부어졌습니다. 누군가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누군가 죽어야 했습니다! 자기 독생자를 짓밟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 그분이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가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지 보여주는 표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지 보여주는 표지이며,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진노 아래서 값을 지불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강력한 구원의 능력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좁은 문으로 가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가복음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폴 형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오시라고 기도로 구해 구원 받았습니다.”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누군가를 따라 마법의 주문을 반복해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구원 받은 것은 당신의 죄들을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랬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깝다. 때가 찼다. 이제, 너의 남은 생을 죄를 회개하고 나를 믿는데 사용하여라.
회심은 예방주사가 아닙니다. “오, 그건 전에 했어요. 회개했어요. 믿었어요.” 친구여, 문제는 당신이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남침례교인인 우리는 여러분이 유일한 문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 가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교합니다. 하지만 우리 남침례교는 뭔가를 잊었습니다. 청소년 사역자들과 목사님들, 모두 내 말을 듣기 바랍니다. 부모님들, 우리는 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복음은 문이 좁다고 말할 뿐 아니라 길이 좁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군가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기도하도록 인도하고, 그리고는 그들의 남은 생을 세상과 똑같이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제 말을 부정한다면 당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통계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갤럽이나 바나의 것이나,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설문조사를 보더라도 미국 교회의 도덕성을 멸망할 미국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건 통계입니다. 종교적인 해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그저 통계입니다. 통계라구요.
신학자나 철학자나 사회학자가 한결같이 수많은 책을 펴내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교회 안에서도 낙태가 바깥 세상에서만큼 편만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혼도 마찬가지로 편만합니다. 음행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 이 자리에 음행을 행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마약을 하면서도 청소년 모임에 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보고 행하면서도 여전히 청소년 모임에 오고, 그들 스스로를 속죄 받은 자, 구원 받은 자라 믿습니다.
이들에게 해주는 말은 ‘그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데 단지 육적일 뿐입니다. 그것은 수십년 전 남침례 신학교가 아닌 침례 신학교에서 시작된 교리입니다. 그 교리는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육적인 그리스도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잠깐만요. 폴 형제. 고린도전서 3장을 보세요.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바울은 말했어요.”
네, 그랬지요. 바울의 말의 의미를 알려면 성경 전체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들의 문제 중 하나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이 기독교 캠페인 티 셔츠 등 뒤에 씌어 있는 상투적인 문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부분이 성경이 아닌 작곡가들로부터 왔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의 대부분은 성경이 아닌 문화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성경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인생을 살면서 계속해서 육적이고 악하고 죄 된 삶을 살 수 있다고는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본성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를 사랑하시고 훈계하시며 살피시고 돌보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제 마음이 찢어지는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여, 위선자가 되지 맙시다. 숨지 맙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최소한 여러분의 모임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청소년 모임에 나옵니다. 모든 모임에 참여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사악할 대로 사악합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빛이 없습니다. 세상이 하는 모든 일을 그들도 합니다. 그래도 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여러분,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옥의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으로 가는 좁은 문이 있을 뿐 아니라 좁은 길도 있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은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주된 표지 중 하나는 그가 좁은 길로 걷는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미국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접기도를 한 번 했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구원을 의심할 때 무슨 말을 해 줍니까? 영접기도를 한 일이 있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 가르칩니까? 너 자신을 시험하라. 너 자신을 성경의 빛에 비추어 믿음 가운데 있는지 시험하라. 그리스도인은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죄가 있으며, 만일 그가 죄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걷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제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신은 삶의 스타일로서 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 의의 길에서 벗어난다면 아버지께서 당신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가 당신을 훈계하실 것입니다. 그가 당신을 그 길로 되돌려 놓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좁은 문을 통과했다고 고백하면서도 넓은 길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고등학교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육적이고 사악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성경은 여러분이 끔찍하게, 끔찍하게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기 생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말해주며 보낸 사람에 대해 염려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염려합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 말고, 그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말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잊어버리고 믿지 않는 사실은 구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며, 참으로 회심한 사람, 성령의 권능으로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에서 좁은 문과 좁은 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5절을 살펴봅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어떤 현명한 사람이 오래 전에 말해주었습니다. “폴,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는 당신에게 최고의 진리를 말해주는 사람이오.” 미국에서는 우리가 너무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꾸짖지 못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잘못되었다고 말해주지 못합니다. 목회자들과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이 거짓말에 동참했습니다. 감정 상하게 하기를 싫어합니다. 구도자 친화적(seeker friendly)이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우리를 찾으시는 이(seeker)는 오직 한 분이시며 그 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이 교회에서 같은 편이 되어야(friendly) 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사람들의 태도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깨달아야 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최고의 진리를 말해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특징적인 표지는 그가 언제나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들려준다는 점입니다. 그는 절대 당신의 일을 망쳐놓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박수 치게 만들 것입니다. 뛰게 만들 것입니다. 아찔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는 계속 즐겁게 해 줄 것이며 당신의 교회를 예수 놀이공원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독교를 제시하고 당신이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다음과 같은 중대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결코 들어보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역사하시는가? 나는 거룩함 가운데 자라가고 있는가? 내가 참으로 거듭났는가?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성경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소수만이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당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참으로 알 수 있습니까? 누군가 그렇게 말해줬기 때문에요? 영접기도를 했기 때문에요? 당신이 믿었기 때문에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당신이 믿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모든 사람들이 믿는다고 말하는데 말입니다. 당신이 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당신이 구원 받았음을 아는 것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아십니까?
50년 전까지 침례교의 신학이 당신이 구원 받았음을 아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해왔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삶이 변해 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의 길로 걷는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구원 받았음을 압니다. 당신이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불순종으로 이 길에서 벗어났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오셔서 그 길로 돌려놓으십니다. 당신이 참으로 거듭났다는 가장 큰 증거 중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이 당신의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육감적인 세상, 육감적인 교회가 시키는 대로 옷을 입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처럼 행동하도록, 세상과 같은 냄새를 내도록, 세상과 같이 말하도록, 세상이 듣는 것을 듣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달라지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이 구절과 성경 전체를 적용해서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열매로 압니다! 열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살펴보십시오. 당신이 걷는 길을 살펴보십시오. 당신의 말을 살펴보십시오. 당신 마음의 소망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이 그곳 어딘가에 계십니까? 아니면 그분은 단지 여러분의 인생에 덧붙여지는 장신구에 불과합니까? 그분이 수요일과 주일에만 행하는 무언가에 불과합니까? 그분이 지적인 동의의 대상입니까? 그분이 장신구입니까 아니면 인생의 중심이십니까? 당신이 맺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세상과 같아 보입니까? 세상처럼 행동합니까? 세상이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즐거움을 누리십니까? 죄를 사랑하고 즐길 수 있습니까? 반란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열매로 그들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시킬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을 잠시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며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그가 말씀하십니다. “무화과에서엉겅퀴를 얻겠느냐?” 여러분이 대답합니다.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은 농부가 아니라 목수입니다. 하지만 무화과 나무에 가시가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묻겠다. 가시나무에서 좋은 열매, 무화과 나무 열매를 얻겠느냐?” “절대 아니죠. 예수님. 그건 완전히 어이없는 이야기입니다. 제 말은 무화과 나무에서 가시를 얻을 수 없고, 가시 나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무시하세요. 미쳤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내 제자라고 부르면서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 혹은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겠느냐?”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제가 늦어서 이 강단에 뛰어 올라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지도자들이 저에게 화가 나 말합니다. “폴 형제, 이곳에서 설교할 기회가 귀하게 여겨지지 않아 지각하신 겁니까? 제가 말하겠지요. “저를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왜요?” “고속도로로 운전해 이곳에 오는 동안 타이어가 펑크나 차에서 내렸습니다. 타이어를 교체하는 동안 큰 너트가 떨어졌고, 제가 고속도로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걸 잡으러 달려나갔습니다.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너트를 집자 마자 일어섰는데 10야드 앞에서 30톤의 벌목 트럭이 시속 120마일로 달려와 나를 쳤고 그래서 늦었습니다.”
요새는 아무도 논리학을 공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여기에는 오직 두 가지 논리적 결론이 있을 뿐입니다. 첫째, 제가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니면 둘째, 미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폴 형제, 그건 절대로 말이 안 돼요. 폴 형제, 벌목 트럭처럼 큰 것과 부딪히고도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벌목 트럭과 하나님, 누가 더 큽니까?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하면서도 영구적인 변화가 없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생각해 볼 문제가 더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 말이 사실인 것을 압니다. 여러분의 생을 헌신하고, 헌신하고, 또 헌신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청소년 모임에서 이런 일에 불길이 치솟았다가도 교회에 돌아가면 한 주 반 정도만 지속되던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면서도 “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어.”라고 말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속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감정이었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 역사하셨습니까? 당신의 인생에 역사하고 계십니까? 열매로 알게 됩니다. 열매로 알게 됩니다.
이제 19절을 봅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기서는 히브리 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언성을 높입니다. 글을 쓸 때라면 고딕체로 쓰거나 대문자로 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달리 했습니다.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 그들은 그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잠언에서 히브리식 병렬법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악인은 망하리라. 크게 강조하기 위해 같은 일을 방법만 달리 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구절에서 하고 계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들이 걷는 길로 그들을 알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리고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들어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예수님은 언젠가 온 세상에 임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 여러분에게도 임할 수 있는 그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못합니다. 저는 제 마음에도 너무나 쉽게 속습니다. 그러나 속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속지 않으시는 분, 그분은 현대의 기독교 문화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리고는 계속해서 21절을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믿음의 고백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아십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셨습니까? 연구하십시오. 나에게 다가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나를 주로 고백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주여 주여’라는 고백을 할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그들 중의 하나입니까? “주여, 주여.”
다시 한 번 히브리 문학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주여 주여’라고 말했습니다. ‘주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은 “심판이 오는구나. 차라리 그를 주라 고백하는게 낫겠다”라고 이제 막 결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단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여’라고 말하며 돌아다닙니다. 연주자들이 연주할 때 앞에 나와 ‘주여’라고 말하며 춤을 춥니다. ‘주여’라고 노래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게서 떠나가라. 나는 너를 결코 알지 못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가장 친절하고 애정 넘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빌리 그래함은 성경을 믿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다수가 멸망할 자들인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도 집회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중 단 5%만이라도 구원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작년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자기 아들이 무슬림에 의해 순교를 당한 어머니를 방문하느라 나이지리아에 있었습니다. 북나이지리아에서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을 때 그 고백 때문에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어떤가요? 오, 치루는 값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삶을 성경의 빛으로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은 주님을 아십니까? 주님을 아십니까? 그분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 되어 있습니까?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지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다시 가르치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학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교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가르침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무도 더 이상 교리를 공부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를 듣고 티 셔츠 뒤에 씌어진 문구를 읽고 싶어할 뿐입니다. 진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진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증거, 즉 당신이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이 삶의 스타일로서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오,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군요”라고 말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믿음의 증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 하는 믿음의 고백은 당신이 거듭났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조지 바나를 말하는 듯-역자 주]는 전체 미국인 중 65 내지 70%가 구원 받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지구상 가장 불경건한 나라가 말입니다. 하루에 4천 명의 아기를 죽입니다만, 주여, 우리 중 70%는 거듭난 자들입니다. 당신이 가진 믿음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 삶의 스타일로 압니다. 당신이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할 때는 성령님이 오셔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개인적으로,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통해 견책하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길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당신이 만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목사이고 여러분은 14살짜리 아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새벽 한 시에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우리 교회 교인인 당신이 공원이나 모퉁이에서 불량배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말하겠습니다. “이 차를 타거라.” 저는 당신을 당신 아버지에게 데려다 줄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는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말할 것입니다. “자식을 그런 환경에 방치하다니 아버지로서 직무유기요.”
여러분이 이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직무를 유기하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만일 당신이 죄를 즐길 수 있다면, 만일 당신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만일 당신이 언제나 세상에 속해서 세상의 일들을 할 수 있다면, 만일 당신의 영웅이 세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만일 당신이 그들처럼 보이고 그들처럼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만일 당신이 그들이 하는 것과 똑 같은 일들을 행한다면, 오 사랑하는 여러분, 제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께 속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22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여러분은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아시는 것입니다. 내일 백악관의 문으로 걸어가 모든 사람에게 제가 조지 부쉬를 안다고 말한다고 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조지 부쉬가 나와 “나는 폴 워셔를 압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저를 들여보내 줄 겁니다.
예수를 아노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질문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아십니까? 이 절에서 예수님이 멸망할 자들에 대해 뭐라고 묘사하시는지 보십시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셨습니다. 헬라어 아노미아-‘아’는 부정의 전치사, ‘노모스’는 법-는 ‘법 없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해 보겠습니다. 내게서 떠나가라.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을 껴안고 말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정말로 잘 들으십시오! 내게서 떠나가라. 나의 제자라고 주장하고 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아. 그러면서도 너희는 마치 내가 너희에게 순종해야 할 법을 준 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구나!
이것은 북아메리카 기독교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누군가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누군가 우리가 행해야 하는 혹은 행하지 말아야 하는 일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소리칩니다. “율법주의자!”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게서 떠나가라. 나를 주라 부르면서도 내가 법을 준 일이 결코 없었던 것처럼 사는 자들아.
오늘날의 미국 기독교에서는 문을 지나가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세상처럼 살아라, 그래도 괜찮다 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그저 육적인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입니다. 잘못된 전도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방학 중 성경학교에서 구원 받은 수 없이 많은 자녀들이 15살이 되면 대부분 세상에 들어가 마귀처럼 살아갑니다. 그리고 30세쯤 되면 돌아와 삶을 다시 헌신 합니다. 그들은 이제 막 구원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주라고 인정한다는 이유로 그가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탄도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당신의 삶은 변화하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까?
이어서 두 가지 사람들, 두 가지 기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아십니까?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반석과 모래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반석 위에 당신의 삶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모래 위에 세운다면 당신은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고 당신의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니며 역사는 저를 지지합니다. 이 구절이 그런 식으로 해석된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습니까? 두 가지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있는데 그는 천국에 갈 것입니다. 나쁜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가 나쁜 이유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이며 그는 지옥에 갈 것입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지옥에 갑니다. 행위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행함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냅니다.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다른 기초 위에 집을 짓는 두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원 받은 사람과 멸망한 사람입니다. 멸망한 사람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기초를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을 형성하고, 세우고, 유지하는 모습을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침례교인인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다 떠나서 단순히 이 구절을 가지고 말해봅시다. 당신은 당신의 결혼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고 있습니까?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르고 있습니까? 재정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분리되며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니요, 어떤 것에도 예라고 못하겠어요. “나는 예수를 고백해요. 그는 나의 구세주예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줬어요.” 오, 나도 압니다. 제 지인인 레오나르도 레이븐힐은 생전에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침례교회에서 한 번만 설교합니다.” 저도 많은 장소에서 한 번만 설교합니다. 저는 오늘 이곳에 여러분을 경탄케 할 만한 어휘들을 들고 나올 수도 있었고 여러분을 이 방에 붕붕 떠다니게 할 만한 일들을 설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웃게 만들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있었고 여러분을 울게 만들 개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저는 여러분을 너무 사랑합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에 세상에는 자신을 구원 받았다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구원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구원 받았어. 보라구. 우리 청소년 모임의 나머지 사람들도 다 똑같아 보인다구.” 여러분의 모임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우리 부모님과 비슷하다고.” “우리 교회의 어른들, 집사님들이나 목사님과 비슷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주님이 오시는 날의 심판은 그 사람들에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 질문은… 나의 자녀들… 여러분은 제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가 자라날 때 언젠가 한 설교자가 그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해주길 기도합니다. “이제 그만!”
계속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 마지막 날에 여러분의 인생이 타오르는 불,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귀중한 젊은이들, 그 마지막 날에 여러분의 고백이 유효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구원 받으셨습니까? “나는 내가 구원 받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구원 받았다고 느껴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라는 구절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까? 성경의 증언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엄마, 아빠, 목사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구원 받았다고 말해줬기 때문에 나는 내가 구원 받았음을 알아요.” 이 말을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은 콘서트에서 뛰지 않습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기독교 캠페인 티셔츠를 입지 않습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부모가 옳지 않다고 느껴질 때도 그들을 공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뭐뭐뭐를 하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여러분을 미치게 합니다. 이건 소년 소녀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자기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육감적인 옷을 입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옷이 얼굴을 감싸는 보조수단이라면 하나님은 그 옷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의 옷이 몸을 위한 틀이라면 그것은 육감적인 것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선지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그의 말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생을 정글에서 보냈습니다. 제 생을 안데스 산의 추위 속에서 보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앤드류 마이만이라는 어린 소년이 단지 “나는 두렵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어요. 제발 나를 죽이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그를 부인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소리 쳤다는 이유로 무슬림으로부터 배에 다섯 발의 총을 맞고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그는 피를 많이 쏟으며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티 셔츠를 입고, 수련회를 간다는 이유로 근본주의 기독교인이 되어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거룩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경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 자리에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확신 가운데 나오게 된다면, 저 자신이 성령님의 확신 가운데 나오게 된다면 우리는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져 울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입고, 세상처럼 행동하고, 세상처럼 보이고, 세상과 같은 냄새를 내고, 우리가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것은 예화들과 이야기들과 기괴한 소설들뿐이기 때문입니다. 오, 우리가 우리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그분께 달려가 그분을 즐거워하며 사랑하도록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빛을 비추시기를!
오, 하나님께서 선교사들을 일으키시기를! 저는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과 같은 일들을 바라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안전과 보장과 멋진 집을 바랍니다. 차와 명예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제 아들에게 바라는 것과 같은 일들을 기대합니다. 어느 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을 붙들고 그 깃발을 아무도 꽂은 적 없는 언덕에 꽂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것 말입니다. 비록 그 일이 내 아들의 생명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가 18살이 되었을 때 제가 젊어서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한다면! “나는 산들과 정글로 들어갈 거예요.”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너는 갈 수 없다. 너는 제정신이 아냐. 그건 전쟁이야. 넌 죽을거야.” 나는 갈거예요. 그 아이가 배낭을 꾸릴 때 저는 기도하며 말하겠습니다. “가거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길. 내 아들아, 만일 네가 죽는다면 나는 너를 저 위에서 볼 것이며 너의 죽음을 귀히 여기겠다.”
오, 하나님,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오, 하나님. 저는 평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영화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젊은이들이 구원 받기를 바랍니다. 구원 받은 이들이 더 이상 당신이 미워하시고 뱉어내시는 주변의 문화적 기독교를 두리번 거리기를 그만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는 예수님을 따르겠어요”라고 말하기를 원합니다.
오, 하나님. 청소년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지혜와 사랑과 담대함과 분별의 영을 채워 주시기를. 귀하신 하나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역자들을 일으키시길 기도합니다. 이 어린 아이들을 보면 제 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하나님. 이안을 구원하시고 그를 일으키셔서 최악의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보내소서. 오, 하나님. 이곳에서 선교사들을 일으키소서. 선교사들을 일으키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설교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과 전도자들을 일으키소서. 오, 하나님. 이곳에서 역사하소서. 역사하소서. 제발. 제발. 제발.
이제 모두 머리를 숙입시다. 오늘 밤 “폴 형제, 나는 거짓된 삶을 살았어요.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했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처럼 보이고, 세상 같은 냄새를 내고… 폴 형제, 이런 기독교는 지쳤어요. 신물이 나요. 나는 구원 받고 싶어요. 구원 받고 싶어요.”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폴 형제, 나는 구원 받고 싶어요.” 아멘. 또 있습니까? 아멘. 아멘.
잠시 뒤에 초청이 있을 것입니다. 일어서신 분들을 내려가서 만나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제 앉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시는 분들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에서 찾고 있습니까? 저는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미국의 교회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 오직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에 전적인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격렬하고 무서운 박해입니다. 미국의 교회를 구원할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오, 저는 여러분이 말씀으로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좋아요. 내 부모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나아가 찾아내고 순종하십시오.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할까요?” 말씀으로 나아가 찾아내고 순종하십시오.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모든 생각, 말,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십시오.
일어서라고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나와 서약하고서도 그 서약이 2분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쳤기 때문입니다. 제가 발행하는 잡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노라고 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 온 마음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상담이 필요하시다면 “폴 형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십시오. 잠시 뒤에 초청할 테니 앞으로 나오되 서약을 하기 위해서는 나오지 마십시오. 서약을 하고 싶다면 당신이 앉은 그 자리에서 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면 여러분의 목사님께 하십시오. 여러분의 청소년 사역자에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서약이 지속되는지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만일 그 결심이 지속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해 주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지난 이틀 동안 구원을 얻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이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 결심이 참된 것이라면 지속될 것입니다. 만일 몇 주 후에 여러분이 세상으로 돌아가 세상처럼 살고, 세상처럼 행동한다면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번 주에 이곳에서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했습니다. 감정뿐입니다. 만일 무언가를 진정으로 주님께 얻었다면 지속될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 여러분을 너무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합니다.
모두 일어납시다. 여러분이 방금 내렸으나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결심에 대해 상담이 필요하시다면 앞으로 나오십시오. 제가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일어선 사람들 중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해요”라고 말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금 바로 내려가 여러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다른 상담자들과 함께 돌아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5분짜리, 10분짜리가 아닌 무언가를 여러분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밤새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상담자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밤새 머물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귀하신 하나님, 오 주여.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여, 지난 밤에 있었던 일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진실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지난 밤에 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서약을 하려는 사람들을 보았으며 지난 밤에 일어난 일들 중 많은 것이 당신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에는 젊은이가 간증하는 것과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결심들 중 진실한 것이 얼마나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결심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는 얼마나 많은 결심들이 장차 진정한 것일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직 시간과 영원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발, 제발 역사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구원,영적성장(N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은... (0) | 2024.04.23 |
---|---|
크리스천의 여러 계급 (수정분) (0) | 2024.04.19 |
'백성의 언약'과 '아들의 언약'에 대하여 (0) | 2024.04.15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인... ①'의'와 ②'거룩함'에 대하여 (0) | 2024.04.14 |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고전 1:2)들이 유업으로 얻는 거룩한 나라이다. (0) | 2024.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