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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언약'과 '아들의 언약'에 대하여

요나한 2024. 4. 15. 08:14

3. '백성의 언약'과 '아들의 언약'에 대하여

 

1) 언약의 종류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아브라함과 세우시면서 이 약속은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영원한 언약의 주요 내용은 겔 37:27과 같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백성의 언약(사 42:6)이었다. 사도바울은 갈 3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설명하면서 그 약속을 얻을 자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바울은 갈 3:29 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약속을 유업으로 얻을 자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롬 10:13).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의 약속(갈 3:22)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져 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참 아브라함의 자손일진데, 그럼 "그들 모두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을 소유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렇지가 않다고 갈 4장에서 설명하였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으니 육체를 따라 난 자식과 약속을 따라 난 자식이 있었다. 즉 계집종으로부터 난 이스마엘이 있었고 자유하는 여자로부터 난 이삭이 있었다(갈 4:22). 둘 다 아브라함의 자식이었지만 유업을 얻을 자와 못 얻을 자가 있었듯이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들은 육신에 속한자이며(고전 3:1-3)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5:50). 왜냐하면 이 약속은 조건들을 행하여야만 얻을 수가 있는 조건적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앞에서 다루지 아니하였던 하나님의 비밀한 약속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후 7:1에서 사용된 '약속'이라는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개념이다. 즉 '약속들'인 것이다. 이 약속들을 소유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영과 육을 온전히 깨끗이 하여야 한다고 바울은 강조하였다. 이 약속들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첫번째 약속은  '백성의 언약'이다.  또한 두번째의 약속은 다윗왕을 통하여 솔로몬에게 주어졌던 영원한 왕권의 약속이었으니... 이는 '아들의 언약'(대상 17:12-13)이었다. 대하 13:5에서는 이를 소금의 언약이라고 하였다. 

 

즉 첫 번째 약속은 너희(단체적)를 백성으로 삼겠다는 것이며 두 번째 약속은 너(개인적)를 내 아들로 삼겠다는 것이다. 첫 번째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졌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어 지파에 따라 땅을 배분 받았다(수 21:43).

 

그리고 사사기를 지나서 다윗의 왕국이 세워졌다(비록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는 아니었지만...) 첫번째 언약이 이루어진 이후 두번째 언약이 등장하였다. 이 두번째 언약은 다윗 왕을 통하여 솔로몬 왕에게 조건적 언약(대상 28:6-7)으로서 주어졌다.

 

그러나 두번째 언약은 솔로몬 왕의 실패로 (그의 왕국은 영원하리라는 약속은 있었지만...) 그 약속이 지속되지를 못하였다. 두번째 언약은 솔로몬 왕 개인에게 주어졌던 것으로서 한 개인의 실패로 "네가 내 아들이 되리라"는 언약은 깨어졌다. 또한 그 후 이스라엘인들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를 않음으로 하나님은 떠나시고 결국 나라는 둘로 분열이 되었으며 이방나라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수 백년이 흐른 후에는 이스라엘은 언약의 사자(말 3:1)로 오셨던 예수그리스도를 은 30냥에 팔음으로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이 완전히 파기되었다(슥 11:10, 12, 16).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하나님과 세웠던 백성의 언약은 깨어지게 되었다. 주님은 육적 이스라엘과 옛 언약을 파하신 후에는 영적 이스라엘하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

 

이 새 언약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또한 이 피는 히 13:20에서 영원한 언약을 위한 피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일 때 그를 부르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창 12:3)을 주시고는 그를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로 인도하시었다(창 12:6). 그리고 그에게 약속하셨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이와 같이 '세겜' 땅은 약속을 간직한 땅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 약속을 주신지 500여 년이 지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에 인도하였다.

 

여호수아는 죽기 직전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주리라 약속되었던 '세겜'땅 그 곳에서 백성들과 더불어 언약을 세웠다(수 24:25). 그는 언약을 세울 때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례와 법도를 말하였다. 그리고서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을 세웠다(수 24:26). 아브라함이 말하던 같은 상수리나무에서 여호수아도 단을 쌓았던 것이다. 물론 그 단에는 언약의 피가 흘렀을 것이다. 상수리나무와 돌(단)과 피는 무슨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돌단과 여호수와의 큰 돌(단)은 세겜땅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워졌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세워질 참 약속의 땅인 이방(세겜)에서 교회(단)마다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십자가(상수리나무)가 서게 될 것을 예표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겜땅은 약속의 땅의 중심이었으며 또한 상수리나무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창 35:8) 장사되었으며 사울의 시체도 상수리 나무아래에서(대상 10:12) 장사 되었다. 그리고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도 상수리나무에서(삼하 18:9) 죽었으며 블레셋의 골리앗은 '엘라' 골짜기에서(삼상 21:9) 죽었다.  '엘라'의 뜻이 상수리나무(참나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수리(도토리)나무는 죽음과 연관이 많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는 실로 가장 큰 죽음의 나무였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도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과거 모든 제단들의 종결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음의 나무와 제단의 돌을 볼 수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주님의 시신은 그 당시(또 지금까지) 세인의 눈에는 마치 버린 돌과 같이 보여졌을 것이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같던 그 돌은 모퉁이의 머릿돌이(마 21:42) 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견고한 큰 돌이(사 28:16) 되었다. 생명수가 나오는 그 돌은 하나님 집을 세우는 기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3:11). 우리는 그리스도의 견고한 터 위에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건물이 되어가고 있다(엡 2:20).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사 8:14) 되었다.  

 

세겜과 상수리 나무에 대하여 더 알아보자.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서 장자권은 그에게 주어졌다(대상 5:1-2). 또한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권은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에게 주어졌다(창 48:17-20). 따라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진정한 장자는 에브라임인 것이다( 31:9).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세겜' 땅은 장자인 요셉과 또 에브라임에게 주어졌다(수 24:32,21:21, 왕상 12:25). 요셉이 묻힌 땅은 원래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로부터 은 100개를 주고 산 땅이었다(창 33:18-20). 그 후로 이 땅은 요셉의 기업(에브라임의 땅, 수 21:21)이 되었으며 그 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요 4:3-6).

 

그리고나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얼마되지 않아 이 곳을 지나가셨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이심을 공개하셨다. 한 여인뿐만이 아니라 방문하신 그 동네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게 되었다(요 4:42).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셨다(마 16:13).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16:20).

 

이는 3년 전 사마리아 동네에서 취하셨던 태도와도 사뭇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큰 이유는 야곱의 자손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49:6).

 

이와 같이 예수님은 흑암에 처한 이방 땅에 있는 이방인들의 빛으로 오셨으며 그들을 백성의 언약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사 42:6-7).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사마리아(반 이방인)에서는 공개하시고 유대인들에게는 아니하셨다. 또한 유대인들과는 옛 언약을 폐하셨으며 자신을 구주로 믿는 이방인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으며(히 10:9)  그 내용은 사 49:8과 같이 백성의 언약이었다.

 

그리고 이 새 언약도 옛 언약과 같이 조건적 언약으로 주어졌다. 여호수아가 백성과 언약을 세울 때 그들이 지켜야 할 율례와 법도를 주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새언약을 세우실 때 우리가 지켜야 할 조건을 주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 계명이었던 것이다.

 

 

 

2) 백성의 언약과 아들의 언약  

 

 

바울이 설명한 두 가지의 약속이 사도요한에 의하여 다시 반복하여 설명되었다

21:3에서 첫번째 약속인 백성의 언약을 다루었으며 21:7절은 두 번째의 약속인 아들의 언약을 다루었다. 사도요한은 하늘로 올라가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보았으며 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계1:1)라고 하였다. 바울도 그가 전하는 모든 복음의 내용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갈 1:12). 사도바울이 설명한 두 언약은 50여 년이 지난후 사도요한에 의하여 계시록 21장에서 설명된 두 언약과 내용이 같음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계 21:3은 백성의 언약으로서 이는 성도들이 얻을 기업임을 이미 살펴 본 바 있다. 즉 그들은 제사장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 백성의 언약은 단체적인 약속인 반면 이기는 자가 소유하게 될 아들의 언약은 개별적이다. 계21:7에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것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어진 후 새롭게 되어진 만물(계 21:5)이다. 그리고 그들은 보좌에 앉아서 세세토록 왕노릇을 한다(계 22:5)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1> 우리 인간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 보좌 곁에 앉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 약속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하신 약속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고 가장 큰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두 번째의 약속에 있다. 

솔로몬 왕에게 이 약속은 조건적 언약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상 28:6-7)대로 살지를 못함으로 두번째 약속은 파기(9절)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약속은 예수님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으며 이 약속은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에 의하여 설명되어졌다. 어떻게 이 약속이 회복이 되었으며, 누가 이 약속을 소유하게 되는지와 또 그 조건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이 땅에서 가장 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여호와 앞에서 온갖 가증한 악을 행하였다(왕상 11:1-11). 왕 자신의 우상숭배는 후대의 왕들과 또한 모든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의 위가 영원하며 내 아들로 삼겠다는 약속은 파기되어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의 때에 나라는 둘로 찢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12 지파중 10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왕상 11:26)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왕상 12:20). 두번째의 약속을 영원히 소유할 기회가 솔로몬에게 주어졌으나 영적타락과 향락에 빠짐으로 귀한 언약(대하 13:5)은 일시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 두 번째 약속의 회복
      그 약속은 주님에 의하여 회복되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때 하늘로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3년후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를 올라가셨을 때, 주님은 저들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이 때 다시 한번 빛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라는 소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한 말씀을 이 때 하셨던 것이다.   

      솔로몬과 예수님은 다 다윗의 자손이었다. 솔로몬 삶은 부도덕과 방탕에 치달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삶인 반면에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100 % 이루신 숭고한 삶이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심(요 6:39)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 분은 "아들이 되리라"는 두 번째의 약속을 얻기 위한 조건을 완벽하게 이행하신 것이다. 솔로몬의 실패로 파기 되었던 두 번째 약속이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된 것이다. 솔로몬의 실패는 후대의 모든 왕들을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지만..., 예수님의 이김은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또한 솔로몬에게 약속되었던 보좌의 자리로 이끄신다.

    • 두 번째 약속으로 이끄심
      히 1:5 에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으며, 또한 히 2:10 에서는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라고 하신다. 즉 주님은 맏 아들이(히 1:6) 되셨으며 이기는 자들은(계 3:21) 형제로서 대우해 주시겠다는 과분한 말씀이시다. 이와 같이 주님은 두번째 약속을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회복시켜 놓으시고는 우리를 그 자리로 초청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럼 과연 누가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있는 것인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고(롬 8:15) 성경은 말한다. 또한 우리는 양자가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언약과 영광으로 나갈 수 있다(롬 9:4).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다.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었던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렀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속한 자면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으로(갈 3:29)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약속을 손에 쥐는 자는 약속에 따라 난 아들(갈 4:23) 이어야 한다(롬 9:7). 아들의 약속을 소유할 자는 이기는 자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21:7>

    • 왜 아들의 언약이 솔로몬 왕에게 주어졌었나?
      아들의 언약은 다윗 왕을 통하여서 솔로몬 왕에게 주어졌었다이 약속이 주어졌던 경위는 다음과 같다광야에서 모세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의 장막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실로와 세겜이라는 곳에 세워졌었으며다윗왕의 때에는 기브온 산에(대상 21:29) 모셔 놓았었다그러나 기브온 산에 세웠던 여호와의 장막 지성소 안에는 여호와의 법궤가 없었다왜냐하면 그 법궤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다윗 성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다(대상 15:1).   

      그 당시 다윗은 자신이 거하는 성 안에 장막을 치고 그 곳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기 자신은 백향목의 궁궐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법궤는 휘장 밑에 모셔 놓았기 때문이었다(대상 17:1). 그래서 그는 여호와를 위한 집을 짓고자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을 하였다.   

      "네 아들중 하나를 세워서 나라를 견고케 하며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후로 다윗 왕은 그의 평생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집 건축에 사용되어질 재료들을 모아서 비축하였다(대상 22:1-5). 이와 같은 다윗왕의 준비가 없었더라면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기는 자도 새 하늘 성전의 기둥이 되고 그 집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하여서는 이 땅에서 다윗 왕처럼 부지런히 재료를 준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① 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② 재료를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장막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졌다. 그 금과 은과 보석은 모두 다 이집트에서 갖고 나온 것이었다. 이집트는 세상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집 건축에 필요한 금과 은과 보석을 공급할 수 있는 장소임을 기억하자. 금과 은과 보석들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얻은 것이었다. 우리도 현재 세상에서 잠깐 종살이를 하고 있다. 누구나 조금 살다가는 영원한 본향으로 떠나야 한다. 잠깐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정말 소중하다. 왜냐하면 금과 은과 보석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로 사는 이 시간은 정말 귀하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입으셨던 몸과 동일한 육체를 입고 우리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렸기 때문이다.
    솔로몬 왕은 왕의 자리에 나아간지 7년 만에 하나님의 집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바쳤다.  
    이기는 자들도 이와 같이 하늘 성전을 지어드려야 한다. 우리는 현재 이 땅에서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성전이다. 또한 이기는 자들은 장차 새하늘 성전이 기둥이 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2>   
     
    현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훌륭히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은 장차 새하늘 성전의 기둥으로 세워질 것이다. 과거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이 거주하심으로 하나님 영광의 빛이 나타났으며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번제물이 올려졌다. 이기는 자들은 세상에 진리의 빛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 영광의 빛을 발하는 자들이며 자신을 번제물로서 단에 올려 놓는 제단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현재 이러한 제단의 삶을 사는 자들은 장차 새하늘 성전의 기둥으로 사용되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으로 사용되어질 이기는 자들을 결국 아들의 언약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필요를 만족시켜 드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주를 위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주님께서 어떤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이러한 삶을 요구하신다(막 8:34). 그러나 십자가를 짊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손과 발에는 역시 주님처럼 상처(갈6:17)가 남겨진다.

 

《그러나 왜 솔로몬 왕은 약속을 소유하지를 못하였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명과 규례를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상 28:7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된 후 초기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하시었었다. 그는 일천번제를(대하 1:6) 드리기도 하였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헌당식을 할 때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대하 7:1) 응답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을 주실 때 제시하신 조건을 살펴보자. 대상 28:7에서 "만일 나의 계명과 규례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날과 같이 하면 ..." 이라는 것 이었다. 이는 "현재는 잘 하고 있으나 끝까지 변치 않고 잘 하면..."이라는 단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인내하여 계명과 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방탕과 우상숭배에 빠져 약속을 놓치는 실패한 자가 되어 버렸다.   


이기는 자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 우리도 장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장성한 자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탄을 대적하는 자리에 설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구원 밖에 이해를 못하는 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크리스챤으로서 아버지의 필요를 공급하여야 한다. 이기는 자는 마귀를 짓밟아 이김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부류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12:11)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이 손수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다스리기를 원하셨음이다. 우리가 단지 우리의 구원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좋은 것이나 너무나 사람 중심적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단지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사탄을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농사를 통하여서 소수가 될지언정 한 부류의 이기는 아들들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실 것이다.

 

 

 

이기는 자에 대하여...

 

사탄을 이기는 무기: ① 어린 양의 피, ② 자기의 증거하는 말 (12:11)

 

① 어린 양의 피: 이 피는 우리에게 사용 되어진다.

계 7:14에서와 같이 우리의 옷은 어린 양의 피에 씻겨지기 때문이다. 사데교회의 이기는 자들은 그들의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 한다. 이 흰 옷은 성도들이 입는 옷이다(계19:8). 비록 성도들의 옷은 때가 묻어 더러워질 수도 있겠으나 이기는 자는 그 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백옥과 같은 깨끗함을 항상 유지하는 자들이다(계 3:4-5) 마귀를 대적할 때 우리를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깨끗한 삶이다. 

 

② 자기의 증거: 증거의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과(계 21:4) 다른 하나는 자기를 증거하는 말이다. 우리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다. 눈이 너무 부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달빛은 쳐다 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빛은 너무 강렬하여 우리가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달빛은 태양 빛의 반사이다.

이기는 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자들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았다.).  이기는 자들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빛을 발산하는 자들이다. 예수님과 흡사한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나를 본 받으라고 하면서 자신을 증거를 할 수가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삶의 자세: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함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최초의 선교사로서 뽑혀졌던 이유이었다(행 15:26). 그들은 선한 목자이셨던 주님처럼(요 10:11) 맡겨진 양떼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선한 일꾼으로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살 때 십자가를 짊으로서 십자가를 진 흔적이 몸에 남게 된다(갈 6:17). 마치 주님의 손과 발에 남겨진 상처와 같은 이러한 흔적이 몸에 남겨지는데, 이러한 흔적은 옥에 갇히기도 하며, 매도 수없이 맞고, 죽을 뻔도 하고, 태장을 맞고, 돌로 맞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은 가운데 교회를 염려하나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아버지를 찬송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남겨지는 것이다(고후 11:23-31).

 

 

이스라엘 결혼 풍습에는 신부의 결혼지참금이라는 것이 있다.

신부는 결혼을 위하여서 이 지참금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 흔적은 장차 신부의 지참금으로 사용되어질 것이다.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은 주님과 닮은 사람을 신부로 맞기를 원하고 계시다. 지상에 살면서 십자가를 진 흔적이 몸에 남겨진 사람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 상처는 장차 새 예루살렘성에서 살게 될 신부의 영원한 지참금으로 인정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