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원,영적성장(New)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인... ①'의'와 ②'거룩함'에 대하여

요나한 2024. 4. 14. 17:27

1. 의에 대하여

 

 

1) 두 종류의 음식

육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음식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지구상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가장 주된 관심은 먹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림자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 사람은 또한 영적 존재이다. 영적 존재인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음식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직후( 2장의 끝) 곧 바로 그들을 실과가 있는 동산의 나무로 데리고 가셨나 보다.

 

히브리서 5장 끝부분은 두 가지 영적인 음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어린 아기가 먹는 젖이요 다른 하나는 장성한 자가 섭취하는 단단한 식물이다. 12절은 너희가 예수를 믿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면 지금쯤은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너희는 아직도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라는 한탄의 말이다. ''은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인 교리인데 초보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13절에서 단단한 식물은 '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음식은 2,000년 전의 문제였을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6:1-2에서 그리스도 도의 초보적인 교리 6가지를 나열하면서 "이제는 이로부터 떠나서 완전한 데로 나갈지니라"고 권면하였다. 완전한 데로 나가기 위하여서 우리는 단단한 식물인 '의의 말씀'을 섭취하여야 한다. 단단한 식물인 의의 말씀을 섭취함으로 얻어지는 효과는 우리가 시력을 얻어 성도의 기업을 보게 된다(1:18). 히브리서 저자는 초보적인 교리를 떠나는 대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약속( 6:13-17)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6:11-12). 이스라엘인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이전에  그들의 음식은 광야의 만나에서 그 땅의 새 소산물로 바뀐 것과 같이 우리에게 강한 힘을 공급하는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한다. 6:2 '완전한 데'라는 것은 히 6:12 '약속을 기업으로 얻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6:11-12)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하여 40년간을 광야에서 지내었는데 이 기간을 음식의 관점으로 살펴보자.>

 

 

 

애굽에서 430년간 머물면서 큰 민족이 되었던 이스라엘인들은 유월절 다음날(15) 그동안 머물렀던 라암셋( 47:11)을 떠났다. 3일 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선 이스라엘인들이 직면한 큰 문제는 먹을 음식과 물이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추의와 더위를 막아 주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또 만나로 먹여 주시는 40년 간의 광야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는데 이는 복음의 빛(고후 4:4)을 예표한다. 또한 구름기둥의 보호를 받았는데 구름의 주성분은 물이다. 물은 말씀을 의미한다( 5:26). 광야기간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함을 받았는데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나옴'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모세라는 이름은 이를 예표한다. 광야의 기간은 실로 물의 기간이다. 광야에는 농사를 지을 밭과 논도 없었으며 고기를 잡을 바다도 없었고 일을 할 수 있는 공장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 가지의 만나를 먹는 일이었다. 하나는 물리적인 만나였으며 다른 만나는 영적인 만나 즉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듣고 배우는 것이었다.

 

모세로 시작된 율법시대는 침례요한으로 마쳐진다( 16:16). 요한은 요단강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써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즉 물의 기간은 침례요한으로 마쳐지고 예수에 의하여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단은 분리(separation)의 장소이며 변화의 시기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물의 흐름이 끊어져 물에서 성령으로 변화가 되었으며, 구세대에서 신세대로 교체(regeneration)가 된 이스라엘들만이 그곳을 건넜기 때문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인들은 실로 물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구름기둥() 아래에서 모세(2:17, 17:2)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었던 것이었다. 40년간의 광야기간이 끝날 때쯤 그들은 새 세대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는 물에서 거듭난 것을 예표한다. 새 세대만이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을 의미하는 모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수와'(이름의 뜻: '여호와는 우리의 구원이시다') 의하여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밟게 된다.

 

그리고 삼일을 지나서 즉 첫달 15일 날에는 약속의 땅의 새 소산물을 먹으니 그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치었다( 5:11-12). 이 날은 정확히 애굽의 라암셋을 떠난지 4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땅의 새 소산물 즉 단단한 식물로부터 힘을 얻어 여리고 성을 공략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음식을 바꾼 이후에 그 땅에 거하는 모든 적들을 하나씩 하나씩 물릴 칠 수가 있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과 마귀들의 유혹과 우리 자신과 싸워 이기기 위하여서는 우리에게 힘이 필요하다. 어린아이의 음료인 젖으로는 안 된다. 단단한 식물을 섭취하여야만 한다. 음식이 바뀌어야 한다. 엄마의 뱃속에서 태아는 광야의 만나처럼 필요한 영양분()을 아무 노력도 없이 주는 대로 얻었다. 엄마의 양수(물의 기간)안에서 젖을 공급받아 사람의 모습으로 갖추어진 후 아기로 태어났다. 태어난 후 어느 시기가 되면 음식은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기는 성장을 할 수가 있다. 단단한 식물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먹는 음식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심고 거두고 빻고 씻고 불에 가열하여 조리하는 과정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은 우리에게 힘을 준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새 소산물을 먹자 그 다음 날부터 만나가 끊겼음을 기억하자. 고린도전서 3 1-3절에서 아직도 젖을 먹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불리워진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이며, 또한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전 15:50).

 

우리가 요단을 건너 약속에 땅에 서 있음으로 인하여 물의 기간을 지난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도 6가지 초보적인 교리의 범위에서만 맴 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단단한 식물인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하며, 이후에는 성도의 의인 흰세마포( 19:8)로 자신의 수치를 가려야 한다. 이 옷은 제사장의 옷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옷을 입은 후에는 성소 안의 진설대로 나아가 제사장의 음식인 누룩없는 떡인 진설병(진리의 말씀)을 먹을 수가 있다. 진리의 말씀으로 채운 후에는 등대로 나아갈 차례이다. 부단히 기름(성령충만)을 공급받아야만 진리의 빛을 발할 수가 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생명을 내려 놓아야 한다. 생명을 내려 놓음으로 모든 것이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주님처럼 부활생명으로 나아와 올 때 지성소 여호와의 법궤 안에 간직된 감추어진 만나를 드디어 얻을 수가 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이기는 자만이 그 곳에 들어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음식을 얻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감추어진 만나는 이기는 자에게만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2:17).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영원한 영광의 반열인 왕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이 거저 은혜로 제사장이 되고 왕이 된다는 가르침은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를 누구나 다 들어갈 수가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모세와 아론 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제사장들이냐 우리들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제사장들이다"라고 하면서 향로에 자신들의 무지와 교만함을 담았다가 그 불로 다 타 죽었던( 16:35) 250여 명과 같이 앞 뒤를 분별 못하는 자들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를 막았었던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따라서 누구나 다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 언약궤'의 언약에 나아가는 데에 까다로운 조건을 내 세우셨다. 그 조건은 막 10:38과 같이 주님이 마셨던 '' '침례'인 것이다. 2,000년이 지난 오늘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누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또는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을 수가 있겠냐"고 여전히 묻고 계신 것이다.

 

 

2) 두 가지의 의

히브리서 5 13절에 의하면 단단한 식물은 '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요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의'이다. 결론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고 '우리의 의'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데 관련이 있다. 이 두 가지 ''의 차이점과 연관 관계를 알아보자.

 

고전 1:30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고 증거한다. 이 구절은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①구원과 ②의와 ③거룩함과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우리 구원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이다. 예수의 피를 마음의 문설주에 발랐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3:10에서 바울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서 우리를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피가 의롭다. 마음의 문설주에 피가 묻혀져 있는 사람은 거저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 밤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그 피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여지기 위하여 발라졌던 것이다. 즉 피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는 이유는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 피가 의로운 것이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의이다. 문설주에 피를 바른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의 구원도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달려 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때 그의 피가 우리에게 발라진다. 구원의 조건은 간단하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모든 자들은 다 구원을 받는다( 10:13). 구원에 이르는 일차적인 조건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이 조건이 영원한 구원으로 활성화되려면 순종하는 믿음(히 5:9)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까다롭다. 성경은 예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고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7:21). 또한 마5:20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역하실 당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셨다(13:22-28). 또 한 번은 주님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적이 있다( 19:24). 그 때 제자들은 심히 놀라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의아해 한 적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구원을 이야기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 크리스챤들이 너무 많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의와 관련이 있다. 그럼 예수의 의와 우리의 의와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고후 9:9-10를 통하여서 두 가지의 의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예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거저 주어진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도 거저 얻어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의를 값없이 '주시는 이'시다.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마음의 문설주에 발라짐으로 우리의 겉 단장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은 속 단장이다. 그 분의 의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형태로 주어진다. 하나는 ''로서 다른 하나는 먹을 '양식'으로 주어진다. 예수는 생명의 떡이시다. 양식은 우리 몸 안에 들어와서는 분해·소화되어 에너지 즉 힘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힘을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떡이신 것이다. 이 떡은 우리가 마귀를 이기며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 또한 그 분의 의는 씨앗으로 주어진다. 씨앗은 받아 먹는 것이 아니라 수확을 얻기 위해 심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의 의가 씨앗으로 심어지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결국 '예수의 의'가 우리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 '우리의 의'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듯이 우리에게서도 열매를 찾으실 것이다. 오직 열매를 맺는 나무만 충성된 자라고 인정받아 하나님의 나라로 들이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15 8절에서 우리가 과실을 맺을 때에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절대 이유이다.  '예수의 의'가 우리의 마음()에 심어져서 '우리의 의'로 열매를 맺게 됨을 기억하자. 즉 예수의 의는 원인(씨앗)이었고 우리의 의는 결과(열매)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의 말씀'이 단단한 식물이다. 구원과 관련이 있는 '예수의 의'는 건물의 기초와 같고 그 위에 '우리의 의'에 해당하는 건물을 지어야 한다. 건물을 짓되 나무나 풀과 같은 재료가 아니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야 한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집을 짓는다. 우리의 의로써 건물을 올리는데 이는 상급과 관련이 있다. 그럼 여기서 '우리의 의'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해 볼 시간이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6 13절에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써 하나님께 드려라"하고 권면하였으며, 16절에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의 종으로 드릴 때 의에 이르느니라" 라고 증거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것이 우리의 의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 것이다. 즉 순종으로 의에 이르고, 또한 의는 거룩함으로 연결된다(19). 예수의 피는 문밖에 발라졌다. 하나님께 보여지기 위한 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의를 양식으로 먹고 또 씨앗으로 심는 것은 마음의 문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역사이다. 내적인 열매로 맺어지는 우리의 의는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한 것이다. 지금은 의의 말씀을 전파하여야 할 때이다. 마치 노아나 침례요한처럼 말이다. 노아는 어둡고 냄새나는 세상 가운데서 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벧후 2:5). 또한 침례요한은 의의 길로 와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다( 21:32). 그리고 바울도 의의 말씀과 심판에 대하여 담대히 말씀을 전하였다( 24:25).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승천한 에녹은 아마 인류역사상 최초의 종말을 외친 자이었다( 14-15). 그는 하나님의 이름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인류역사가 시작할 무렵에 벌써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외친 종말복음의 선구자이었다.

 

 

<두 가지의 의는 두 가지의 옷으로 설명 되어진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구원의 옷이며 우리의 의는 의의 겉옷이 된다. 이사야서 61 6-10절은 제사장이 입는 두 가지의 옷을 설명한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참 이스라엘인이다( 3:29). 평범한 이스라엘인이라면 예수그리스도의 의인 구원의 옷만을 입어도 되겠지만, 제사장의 반열(6)이라면 구원의 옷 뿐만이 아니라 의의 겉옷을 입고 있어야 함을 사 61:10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의의 겉옷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거룩한 옷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옷을 입지 않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28:43). 제사장이 입는 의의 겉옷(흰세마포)은 성도들이 입는 흰세마포(19:8)의 그림자이다.  흰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 혹은 성도들의 의이다. 즉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심어져서 우리에게 우리의 의가 열매가 맺혀질 때 그 흰세마포가 우리에게 입혀지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사데교회 가운데서 흰세마포를 입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세어 보았다(3:4-5). 그의 눈에는 그 옷이 보여졌음이 분명하다. 그 옷은 2,000년 전의 옷 일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옷이기도 하다.

 

 

<흰 세마포에 대하여>

 

● 성경에서는 크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두 종류의 옷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주 예수그리스도 자신이다(13:14). 이는 예수의 보혈(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가죽 옷처럼)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의 의인 옳은 행실로 입혀지는 옷이다(19:8).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이후부터 한 벌의 세마포 옷을 마련하기 위해 의로운 행실로 계속 수를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본래는 비어 있고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한바늘 한바늘 자신의 의로 부단히 수를 놓아 어느 날 한 벌의 옷이 완성될 때 그 빛나는 옷은 수놓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세워질 때에 우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어야 한다.

 

● 주님을 사랑하여 향유를 쏟아 부은 것도 의요, 주님을 사랑한 연고로 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물질적인 공급을 하였던 요한나의 행위( 8:3)도 의요, 냉수 한 그릇을 어린아이에게 대접하였어도 ''인 것이다. 즉 주를 사랑함으로써 비롯되어진 것은 다 ''로 계수된다.

 

● 이 옷은 우리 자신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 자신은 이 옷을 만들어 낼 수는 없고 단지 재료를 하나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이 옷을 입은 자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음으로 보아, 이 옷을 입는 자는 주님과 특별한 교통을 누리게 됨을 알 수 있다. 3:17-19 "나는 부요한 자라고 하나 네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눈에 안약을 발라 네 벌거벗었음을 보고 불로 연단한 금과 같은 대가를 지불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2. 거룩함에 대하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두 과정은 칭의와 거룩함이다. 전자는 믿음의 역사요 후자는 성령의 사역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하기 전 날은 유월절이었다. 이 유월절날 밤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인들과 갈라지게 되었다. 그 날 이스라엘인들이 취하였던 모든 행동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 날밤에 이스라엘인들이 행하였던 일은 구원의 두 과정을 예표한다.

 

첫째,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그 피로 인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첫 소생을 칠 때 이스라엘인들은 해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 양의 피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마음의 문에 바를 때 구원을 받는다. 피는 밖으로 보여지기 위한 것이었다. 즉 피는 하나님께 보여지기 위한 것이었다. 피는 생명이며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의롭다. 이 피를 소유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이 피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입는 구원의 옷 즉 '예수그리스도의 의'인 것이다.

 

둘째, 피를 문에 바른 다음 그들은 문을 닫고 무교병과 어린양과 쓴나물을 먹었다. 피는 바깥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안의 일이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이는 내 몸이니 주님의 몸을 먹으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먹는다 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이 떡은 누룩이 없는 떡이다. 거룩하신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우리의 삶도 거룩한 상태가 되어야한다. 쓴나물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받는 고난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11:26)을 의미한다. 또한 어린양을 먹되 애굽의 풍습에 따라 물에 삶아 먹지를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구워서 먹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삶의 패턴을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원하시는 방법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두 번째 과정은 하나님께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한 것이다. 이 과정은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심어져서 우리의 의로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이다. 앞에서 충분한 설명을 이미 하였음으로 자세한 생략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