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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니의 글] 아가서(노래중의 노래) 강해

요나한 2022. 9. 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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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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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중의 노래(도입의 , 제목, 단락구분) 

 

 

도입의 


 1.     아가서 1 1절은 "노래 중의 노래는 솔로몬의 노래입니다라고 번역할  있다 노래는 솔로몬을 말한 것이다그러므로  책에서 주님의 위치는 왕이다주님은 여기에서 부활하고 승천한 위치에서 계신다다윗은 골리앗을 죽였고 원수를 이겼는데이것은 십자가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솔로몬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유익을 얻어 평강의 왕이 되었는데 그는 부활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그러므로 주님은  책에서 솔로몬 왕의 위치에서 계신다우리는  분의 솔로몬 왕과 교통하고 있는 것이다전쟁은 이미 지나갔고그분은 영광을 얻으신 분이요  권능을 가지신 그리스도이시다이것이  책의 시작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이다 책에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와 같지 않고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의 관계와 같다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다윗이 대적을 이겼기 때문인데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사랑한 것은 솔로몬 자신 때문이었다어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주님의 십자가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때문이기도 하다십자가는 주님이 승리하여 왕이 되신 것이며부활은 주님 자신이다처음에는 스바 여왕이 단지 솔로몬의 업적을 들었을 뿐이었지만나중에 그녀는 솔로몬 자신을 보았다그녀를 매혹시킨 것은 솔로몬이었다(왕상 10:6~7).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단같이 다윗을 사랑해야  뿐만 아니라 술람미 여인 같이 솔로몬을 사랑해야 한다 책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왕이심을 알게 한다.

 

2.     술람미 여인의 체험은 개인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결코 단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성경에서 여자는 주관적인 방면의 체험을 나타낸다그러므로  여자가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인 믿는 이가 주님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단체적인 교회가 주님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모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주님과 만족스러운 교통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말한다.

 

3.     책의 중심은 영에 속한 교통이다그러므로  책이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는가에 관계없이여기에 기록된 역사는 오히려  노선으로 이어져 있다 책은 단편(斷片)적이고 지엽(枝葉)적인 역사가 아니며흩어져 완전하지 않은 일화가 아니다 책의 중점은  나아가 주님을 추구하고 따르는 사람의모든 영적인 상태 일생에 체험할 단계들과 최후에 도달해야  경지(境地)이다귀용 부인이  '영성의 흐름'이나  루이스 여사가  '영적 생명의  단계' 모두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4.      책은  이미 구원받고 추구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그러므로 구원받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책이 주의하는 것은 죄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믿는 이에 대한 문제이며주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속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결코 사람이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가를 말하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사모하고 추구하여 주님을 얻는가를 말한다믿음을 말하지 않고 다만 사랑을 말한다 책의 깃발은 '사랑'이다. " 사랑이  위로 ()로구나"( 2:4). 이것이 우리의 구호이다.

 

5.      책은  권의 ()로서시적인 문체와 언어의 자구(字句) 사용해  영적인 역사이다그러므로 많은 부분이 속으로 깨달을  있을  말로 전할 수가 없다

 

6.      책과 마태복음은 믿는 이와 주님과의 관계의  방면을 말한다직분으로 말하자면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인데이것은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이다교통으로 말하자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부부(夫婦)관계인데이것은  책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이다.

 

7.      책이 가장 많이  단어는 '사랑'이다 단어의 용법은 아주 여러 종류인데단수복수남성여성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것과 다른 것이 있다예를 들어, '누이' 원문에서 여성적인 사랑이다. '사랑하는 ' 원문에서 남성적인 사랑이다. 1 2, 4, 4 10 모두 '사랑하는 ' 가리킨다. '사랑하는 '  '사랑' 단수이며 '다윗'이라 부를 수도 있는데왜냐하면 '다윗'  '사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2 4절의 '사랑' 보편적인 것을 가리킨다. 2 7, 3 5, 8 4절의 '사랑' 여성적인 사랑이다. 51, 16절의 '친구' '사랑'으로 하는 것이 적합하며좋은 배우자와 상대되는 남성과의 사랑이다.

 

8.  책을 해석하는 몇 가지 원칙

(1) 모든 단락의 해석은 반드시  책의 중심 사상-영에 속한 체험- 노선과 연관지어야 한다.

(2) 모든 어구(語句) 의의(意義)  면으로는 이곳에서 말하는 것과 통해야 하고  면에서는  노선(영적인 체험) 연결되어야 한다.

(3) 주님이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를 해석하실 어떤 곳은 그분이 상세하게 해석했고 어떤 곳은 그분이 상세하게 해석하지 않으셨다 책의 해석도 그와 같다.

(4) 단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있어서  면으로는  글자 자체로부터 해석을 구해야 했고  면으로는 성경 안의 역사적 용법에 따라 해석을 구해야 했다

(5)  책에서 신랑과 신부를 언급할 항상 다른 많은 것을 사용해 비유했다그것의 특징은 모두 우의(寓意)적이고그것의 비유는 모두 상징적이다우의는 아주 쉽고 분명하다그러나 상징적인 것을 이해하려면 숙고할 필요가 있다그러므로 상징적인 말은 모두 성경 안의 용법과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야만 비로서 분명해질  있다우의(寓意) 상징(象徵 성질은 어떤 때는 같고 어떤 때는 완전히 다르다우리는 그것의 차이점에 관계없이 그것이 무엇을 가리켜  말인지를 물어야 한다상징은  우의가   없는 어떤 것을 가져다 준다예를 들면계시록 1 15절은,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라고 말한다우리는 발이 우의로서 행동을 가리켜  말임을 안다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는  말은 상징으로 금방 명백해질  있는 것이 아니다.
 


 
  : 아가서(雅歌書)

(1:1)"솔로몬의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 입니다"(원문에는 '()'자가 없음). 솔로몬은 일찍이 노래 일천다섯 수를 지었는데(왕상 4:32), 그의 많은 시구(詩句중에서 가장 좋고 가장 귀한 것이  노래이다그러므로 이것은 노래 중의 노래라고 말할  있다지성소는 거룩한   거룩한 곳이며 예수님은   왕이시요 (중의 주이시며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이다전도서는 공허함 중의 공허함이요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이다.

 노래(아가서) 전도서는 서로 대조적이다전도서는 방황의 생활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방황으로부터 안식을 얻는 것을 말한다전도서는 사람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지 못함을 말하고 노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을  있음을 말한다전도서는  아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고 노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전도서는 대상을 잘못 찾았고 길도 틀렸으므로 결과가 공허 중의 공허함이고 노래는 찾는 것이 옳고 길도 옳으므로 결과도 좋다.



1단락 : 처음의 추구와 만족(1:2~2:7)
1. 
사모함(1:2~3)
2. 
추구함(1:4)
3. 
교통함(1:4)
4. 
침궁의 계시(1:5~7)
5. 
왕의 말함(1:8~11)
6. 
여인의 말함(1:12~14)
7. 
왕의 칭찬(1:15)
8. 
여인의 대답(1:16~2:1)
9. 
왕의 대답(2:2)
10. 
여인의 찬미와 누림(2:3~6)
11. 
왕의 부탁(2:7)

2단락 : 자아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2:8~15)
1. 자아를 벗어나라는 부르심(2:8~15)
2. 
실패와 회복(2:16~3:5)

3단락 : 승천의 부르심(3:6~5:11)
1. 새창조(3:6~4:6)
2. 
승천의 부르심(4::7~15)
3. 
사랑의 생활(4:16~5:1)

4단락 :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5:2~6:)
1. 부활 후의 십자가와 여자의 실패(5:2~6:3)
2. 
장막 안의 생활(6:4~14)

5단락 : 하나님의 역사(7:1~13)
1. 
일하는 사람과 장비됨(7:1~9)
2. 
주님과 동역함(7:9~13)

6단락 : 육체의 탄식(8:1~4)
1. 
육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탄식(8:1~4)
2. 
휴거 되기 (8:5~14)

 

 

 

 

아가서(雅歌書)

(1:1)"
솔로몬의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 입니다"(원문에는 '()'자가 없음). 

 

솔로몬은 일찍이 노래 일천다섯 수를 지었는데(왕상 4:32), 그의 많은 시구(詩句중에서 가장 좋고 가장 귀한 것이  노래이다그러므로 이것은 노래 중의 노래라고 말할  있다지성소는 거룩한   거룩한 곳이며 예수님은   왕이시요 (중의 주이시며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이다전도서는 공허함 중의 공허함이요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이다.

 노래(아가서) 전도서는 서로 대조적이다전도서는 방황의 생활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방황으로부터 안식을 얻는 것을 말한다전도서는 사람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지 못함을 말하고 노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을  있음을 말한다전도서는  아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고 노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전도서는 대상을 잘못 찾았고 길도 틀렸으므로 결과가 공허 중의 공허함이고 노래는 찾는 것이 옳고 길도 옳으므로 결과도 좋다.

 

 

 

1단락 처음의 추구와 만족(1:22:7)

이 단락은 이 책의 요점이다. 영에 속한 체험의 원칙이 다 여기에 있다. 이 단락은 이후에 체험할 것에 대한 한 폭의 그림이다. 이후에 배울 것은 결코 새로운 공과가 아니며, 한 차례 한 차례 지나면서 더 깊이 배울 뿐이다.

 

이 책의 영에 속한 체험은 매우 평온하고 순조로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체험들이 다 이 단락에 있다. 처음의 헌신과 처음의 계시는 모두 매우 평온하고 순조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의 헌신과 나중의 계시는 반드시 확실하게 믿을 만한 것은 아니며, 반드시 불을 통과해야 한다. 이 단락은 영에 속한 체험에 대한 한 폭의 그림이며, 이후로 하나 하나 시험하여 그것으로 실재가 되게 해야 한다. 처음의 체험은 결코 깊지 않으며, 두 번째 체험은 더 전진되고 더 믿을 만하다. 그러나 사람이 두 번째 체험을 할 때에는 결코 첫 번째만큼 달콤하지 않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여전히 이전에 체험한 것이다. 깃발은 사랑이다.

 

이 단락의 체험은 '영성의 흐름'에서 말한 빛과 길 같고, '영적 생명의 네 단계'에서 말한 부흥 단계와도 같다. 이것도 우리 개인의 체험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 사모함(1:23)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2절에서 추구하는 '입맞춤'은 결코 아버지가 우리의 목을 안고 입맞추는 것이 아니다( 15:20). 왜냐하면 그러한 입맞춤은 용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님께 속한 모든 사람은 이미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주의하는 것은 곧 믿는 이와 주님 사이의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사해 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 노래는 결코 우리에게 한 사람이 어떻게 하여 죄인의 위치에서 변하여 믿는 이가 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고, 한 믿는 이가 어떻게 하여 굶주리고 목마른 위치에서 만족한 위치에 이르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비로소 이 노래가 왜 이같이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첫 번째 부르짖음이 생명을 얻고서 얼마나 지난 뒤에 있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르짖음이 구원받은 한 사람이 성령에 의해 일깨워진 후에 주님에 대해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긴 상태임을 안다. 그녀의 마음이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그의 입으로 내게 입맞추기 원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녀는 결코 ''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심중에는 단 한 분의 ''가 있는데, 곧 그녀가 추구하는 '그분'이다. 이전의 그녀와 주님과의 관계는 보편적인 것에 불과했으므로, 그녀는 매우 불만족스럽게 느꼈다. 그녀는 이제 주님과 보다 개인적인 왕래를 갖기 원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입맞춤', 즉 사랑의 개인적인 표시를 사모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과 입맞출 수 없으므로, 이것은 개인적인 표시이다. 또한 유다가 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 입맞춘 것이 아니고( 26:49), 그 여인이 한 것처럼 그의 발에 입맞춘 것도 아니며( 7:38, 45) '입으로 나에게 입맞춘'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사랑의 표시이다. 지금의 보편적인 것은 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없다.

 

 

나는 이제 개인적인 것, 다른 사람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모든 진보의 시작은 이러한 요구가 속에 있는 데에서 비롯된다. 영성(靈性)의 양성은 배고프고 목마른 추구와 영원히 나누어질 수 없다. 만일 한 믿는 이의 안에 아직 성령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러한 평범한 상황에 불만족하여 개인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이 주님과의 친밀한 체험을 갖게 한다는 것은 영원히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추구는 곧 나중에 있게 될 모든 체험의 근원이다. 우리에게 만일 이러한 배고프고 목마른 마음이 없다면, 아래의 모든 기록은 시적 의미를 지닌 노래에 불과할 뿐, 결코 솔로몬의 노래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내게 이러한 추구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이상(異象)을 얻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게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한 이상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시를 얻어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것 때문에 나는 그의 입의 입맞춤을 사모하는 것이다.

 

참으로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아름답다. 성령은 나에게,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으며, 사람을 흥분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사랑만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람이 자신을 쏟을 만하다고 여기는 해 아래의 어떤 것도 당신의 사랑만 못하다. 나는 보았고, 나는 알았다. 해 아래의 어떤 것을 당신의 사랑에 비할 수 있겠는가!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당신 자신은 기름 부음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기름을 바르며, 당신은 성령으로부터 각종 기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향기를 맡을 뿐 아니라 우리도 당신의 향기를 맡는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어디에서 들은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 본 것도 아니며 우리가 영문도 모르게 당신의 향기로운 기름의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동시에 당신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우리를 매혹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부터 이미 하나님이 나왔음을 생각합니다. 참으로 기름은 이미 쏟아 부어졌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이미 죽으셨음을 생각합니다! 참으로 기름이 이미 부어졌습니다! 오 예수, 이 이름은 정말로 귀합니다! 그러나 누가 예수의 이름 안에 있는 향기를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당신 자신(기름)으로 인해, 당신의 이름(쏟아진 기름)으로 인해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당신 자신 때문이요,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당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사랑할 수 없고, 우리는 어떤 능력을 사랑할 수 없으며, 다만 인격이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매혹된 것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비록 여기 있을 때 우리가 아직 당신의 향기를 충분히 맡지 못하지만, 우리가 맡은 것으로 이미 당신을 사랑하기에 충분합니다. 주님의 품격에 대한 계시가 사람으로 하여금 찬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게도 합니다. 모든 사람의 주님을 사랑하는 시발점은 곧 주님의 품격을 보는 것이다.

 

'처녀들'은 곧 '숨겨진 자들'( 83:3)이요 '규수(閨秀)'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녀들은 이 여자의 동반자들이다. 그녀들도 똑같이 정결하고, 똑같이 주님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영에 속한 길을 가는 사람은 실로 그녀 한 사람만이 아니요 그녀는 처녀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 추구함(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달려간다'의 원문의 뜻은 '뒤쫓아 따르다'이다. 우리가 비록 원함 이 있고 기꺼이 따르고자 해도 우리는 추구하는 능력의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추구의 능력은 결코 성령이 우리 안에 한 덩어리의 능력을 나눠 주어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밖에서 그분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매혹시키는 능력이 바로 추구하는 능력이다. 만일 주님이 참으로 나를 매혹시킨다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쉽겠는가!

 

당신이 만일 나를 매혹시킨다면,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리라"('따라 달려간다'는 것은 즉시 원한다는 뜻이다). 빨리 달려 쫓아가는 능력은 주님의 매혹시키심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사람도 자신을 의지해 주님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배워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주님께 나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매혹시킴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이가 된 후에도 여전히 빨리 달려가 주님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매혹시킴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는 이 개인과 믿는 이들과의 관계도 본다. 매혹당하는 것은 나이지만 '당신을 따라 달려가는' 것은 '우리'이다. 침궁으로 이끌어 들여진 것은 ''이지만,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이다. 만일 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다른 사람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 교통함(1:4)
"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그녀의 기도가 있은 후에, 우리는 그녀가 곧 응답-'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을 얻은 것을 본다 '침궁' '은밀한 곳'( 91:1)으로 잠자는 방이다. 당신이 만일 어떤 사람과 친분이 상당히 두텁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그를 당신의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이 그녀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은 교통의 시작이요 계시의 기점(起點)인 것이다. 그 침궁 안에서 그녀는 이전에 맛보지 못한 교통을 맛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사실도 본다.

 

여기의 ''이라는 말은 우리가 아직 주님을 남편(사랑의 대상 : 역자 주)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 먼저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인식해야 함을 보여 준다. 헌신의 생활은 항상 사랑의 생활 이전에 있고, 만족된 체험은 항상 헌신의 절차 뒤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인데, 우리는 그녀가 이미 그녀의 왕을 인식했다는 것을 본다. 이제 왕은 침궁의 체험을 그녀에게 주려고 한다.

 

이제 처녀들은 고개를 들고 장래의 전도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 앞길이 무한량(無限量)함을 안다. 침궁의 체험이 시작되면 사랑의 생활에는 만족스런 소망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하나님이 일단 역사를 시작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1:6). 그러므로 그녀들은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장래에 있을 것들에 대한 말이다. 그녀들은 지금 체험이 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것이다. (포도주를 찬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잠언 23 35절을 참조할 수 있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는 마땅히 "그녀들이 정직함 안에서 당신을 사랑한다."로 해야 한다. 그 뜻인즉 그녀들의 이러한 사랑은 선한 양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딤전 1:5).

. 침궁의 계시 (1:5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과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원문 참조). '예루살렘의 딸들'은 어떤 류의 사람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시()이므로 여기의 예루살렘은 결코 땅 위의 예루살렘이 아니고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이 처녀들이 하늘의 예루살렘 영역 안에 있는 한, 그들은 틀림없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녀들을 딸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그녀들은 하나님이 낳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다지 추구하지 않으며 아주 냉담하고 모호하며 마음대로 하는 한 무리의 사람일 뿐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녀들은 구원받기는 했지만 간신히 구원받은 사람들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그녀가 침궁에 있은 결과, 먼저는 자신이 검다는 것을 보았다. 추구가 없으면 볼 가능성조차 없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았다. 그녀는 아마도 이 검음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 검음은 검게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검은 것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사랑하는 자 안에서 자신이 열납받는 것도 본다. 그러므로 그녀는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라고 말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열납받는 것을 가리킨다.

 

"계달의 장막과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계달' '암실'이라는 뜻이다. 계달의 장막과 같다는 것은 외면이 검고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휘장'이 만일 세마포로 만들어졌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킨다(계시록 19 8절에서 말한 의()는 성도가 성령으로 인하여 갖게 되는 의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는 구약이므로 성도의 의를 가리킬 수 없다). 이 휘장은 당연히 성전 안에 있는 것이다. '솔로몬의 장막과 같다'는 것은 내적 아름다움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는 말이다.

 

"해가 나를 쬐어 내가 검으니 나를 쳐다보지 말라 나의 어머니 형제가 나에게 화내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아 내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네"(다비 역).

 

''는 원문에서 하나의 전문관사이다. '쬐어 검다'에서 '검다'라는 글자가 원문에는 없다. 그녀는 하나님이 침궁에서 빛 비추셨기 때문에 이미 자기가 검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이 그녀의 그때의 심경(心境)이다. 성령이 사람을 깊이 처리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여전히 다른 사람 앞에서 가리기를 좋아한다. 성령에 의해 더 깊은 부분까지 처리를 받은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는 사람 앞에서 어떤 것도 덮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때에야 그녀가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 같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기꺼이 "그 해가 나를 쪼이므로 나는 검습니다."라고 시인한다.

 

"나의 어미의 형제가 나에게 화내어". 여기서 '아비'라고 말하지 않고 '어미'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의 '어미'가 약속의 원칙 곧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 26절에서 28절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삭처럼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되었다. '나의 어미의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을 말한다.

 

'형제'는 객관적인 방면을 대표한다. 이러한 어미의 형제들은 교리적인 방면에서 아주 역량 있고, 객관적인 방면에서 아주 강하며 또한 비교적 권위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침궁의 가르침이 있으며 일에 변화도 있기 때문에, 어미의 형제들이 그녀를 경시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화를 내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아 내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네". 앞에 말한 포도원은 복수로서 사람의 손으로 조직한 것이다. 뒤에 말한 포도원은 단수로서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것이다. '그들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네'는 이전의 일이다. 그녀는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고 하나님의 처리하심을 받은 후에 이전 일의 공허함, 즉 사람이 그녀에게 위임한 것을 했을 뿐 하나님이 그녀에게 하도록 정하신 것은 하지 않았음을 보았다.

 

7절에서, '사랑'은 동사이다. '양을 치다' '양을 먹이다'로 하는 것이 더 낫다. '얼굴을 가리움' '장소를 잃고 유리하는'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녀는 침궁에서 이미 외적인 일이 공허한 것임을 보았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양식과 안식임을 보았다. 왜냐하면 먹이는 것은 양식을 중시하는 것이고 누워 쉬는 것은 안식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늘 이후로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양식과 안식이다. '안식'은 완전한 안식이다. 왜냐하면 정오는 완전한 때-"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4:18)-이기 때문이다. 정오에 이른 것은 완전한 위치에 이른 것이다. 태양이 정오에 이르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정오에서 오후 세 시까지 이르렀다. 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시작부터 한 번에 그렇게 많은 것이었지 조금씩 증가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동무'는 주님의 동무이다. 그러나 양은 주님의 양 떼가 아니고 주님의 동무의 양 떼이다. '얼굴을 가리다' '창피를 당하다'이다. 그녀는 아직 양무리 밖에 있다. 그녀는 부득불 주님께, "당신은 왜 나에게 어디에서 양식을 찾아 얻으며 어디에서 안식을 찾아 얻는지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나는 줄곧 양식과 안식을 추구했으나 동쪽에서도 찾지 못했고 서쪽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동무의 양 떼 곁에서 장소를 잃고 유리하는 사람처럼 그들의 비웃음과 비평을 받았습니다. 주여! 당신은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 왕의 말함(1:811)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그녀가 침궁에서 본 세 가지는 (1) 아담 안에서 검고 사랑하는 자 안에서 아름답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처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외면적인 일의 공허함을 보았다. (3) 영적인 필요를 느꼈다. 그러므로 이때에 주님은 그녀에게 추구로 말미암아 응답을 주셨고 칭찬하고 약속을 주셨다.

A. 왕의 응답(1:8)
왕은 그녀를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고 불렀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이 말의 어조는 마치 왕이 약간은 그녀를 꾸짖는 듯한데 그 뜻은 그녀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르라". '양 떼의 발자취'는 한 면에서 오늘날 믿는 이들의 발자취로서 한 무리가 서 있는 위치, 즉 교회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가리킨다(오늘날 양은 비록 많지만 무리를 짓지 못하고 교회의 위치에 서 있지 않다). 당신이 어디에서 양식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가? 또 한 면에서는 이 오랜 세월 동안 이미 죽은 성도를 가리킨다. 그들이 양식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당신도 양식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자취'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방목' '목양'은 같은 단어로 '먹이다'는 뜻이다. '어린양'은 양이 아니며(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양이기 때문임), 양 떼도 아니고(왜냐하면 그녀는 양 떼 밖에 있으므로), 그녀보다 더 어린양이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어린양)를 먹일지니라". 이것은 사람이 양식과 안식을 추구하고 있을 때에 일상생활 중에서 염소 새끼에 대한 본분을 잊고 염소 새끼의 문을 닫아 버릴까 염려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을 주의한다. 양식과 안식을 추구할 때에도 어린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본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문을 닫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의 양식과 안식은 여전히 어린양을 먹임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의 '목자'는 복수로서 작은 목자, 즉 주님 휘하의 목자들을 말한다. '장막'도 복수이다. 주님의 뜻은 그녀가 많은 목자들 곁에서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 사이에서 어린양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면에서 그녀는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과 믿음과 기다림과 의지함과 하나님의 뜻을 구함과 전심으로 기도함 등을 따라야 하며, 또 한 면에서 그녀는 일상생활 가운데 그녀보다 더 어린 믿는 이를 돌보는 데 본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추구하고 있을 때에도 일상적인 본분을 느슨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B. 왕의 칭찬과 약속(1:911)
'
준마'는 원문에서 좋은 말()이란 뜻이다. 솔로몬 당시의 말은 모두 애굽으로부터 왔다(왕상 10:2829). 9절에서 10절은 그녀의 천연적인 아름다움이요,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 구절에서 여섯 가지, (1) (2) (3) 머리카락 (4) (5) 금사슬 (6) 은을 박음을 말한다. 이제 하나씩 보기로 하자.

 

(1) (). 성경에서 말에 대해 유일하게 취하는 것은 그것의 빠름이다. 시편 147 10절은 "말의 힘이 크다"라고 말한다. 바로의 병거의 '준마'는 많은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이라는 뜻이다. 영적인 의미로는 그것의 빠름을 취한다. 말은 천연적인 면에서 빠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은 힘이 세기 때문에 빠르다. 여기의 '빠름' 1 4절의 '빨리 달림'은 아주 대조적이다. 빠르긴 빠르나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빠를 뿐이다.

 

(2) . 사람의 아름답고 추함은 두 뺨에 달려 있다. 뺨은 가장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3) 머리카락. 뺨의 아름다움은 땋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드러난다. 머리카락은 천연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천연적인 능력으로부터 온 것임을 볼 수 있는데, 그 뜻은 그녀가 아직도 천연적인 방면에서 좋다는 것이다.

 

(4) . 목의 장식은 그녀의 천연적인 온유함을 가리킨다. 목은 원래 곧은 것인데, 그녀에게는 장식품이 있으므로 그녀가 천연적인 온유함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진주 목걸이가 없는 목은 모두 곧은 목이다). 9절은 그녀를 말에 비유했고 10절은 그녀를 말에 비유한 이유를 말한다. 그녀의 천연적인 능력과 온유 때문에 그녀가 빠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녀가 비록 침궁의 계시와 영적인 추구를 갖고 있지만, 그녀의 천연적인 빠름, 즉 천연적인 능력과 온유가 여전히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천연적인 빠름 때문이다. 9절과 10절에서 그녀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천연적인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것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질 수 있다. 아래의 두 가지는 하나님이 그녀를 위해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가 하리라"는 왕의 약속이다. 성령은 여기에서 삼이일(三而一) 하나님을 생각했다.

 

(5) 금사슬. 금으로 사슬을 만들려면 반드시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한다. 금사슬은 가장 정교한 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가장 정교한, 그런 종류의 표현이다. 또한 '사슬'은 원문에서 면류관 같은 것으로, 둥글며 금사슬의 면류관 같다. 금사슬로 땋은 머리카락을 대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 생명, 영광에서 나온 것으로 그녀의 천연적인 능력을 대체한다는 의미이다.

(6) 은을 박음. 혹은 '은받침'이라고도 번역한다. () '구속'을 의미한다. '은을 박아 넣다'는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에 근거하여 금사슬이 땋은 머리를 대체하는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대체한다는 뜻이다.

 

. 여인의 말함(1:1214)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A. 항상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1:1213)
12
절에서 솔로몬의 상은 성경이 특별히 제기한 것이다(왕상 4:2223, 10:5). '왕의 상에 앉았을 때'는 믿는 이가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풍성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밀가루로서 이것은 주 예수님의 생명, 주님 자신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기 요리로서 이것은 주님의 일, 주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왕의 상에 앉았을 때'는 우리가 음식을 먹으며 누리고 있을 때를 가리킨다. 우리가 왕의 식탁 앞에 올 때마다, 그것은 늘 양식을 얻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열납하신 제물 곧 하나님이 기뻐하신 그 역사를 받아들인다(그러므로 구약의 제물에는 남겨 두어 사람으로 먹게 한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열납하신 제물을 먹는가? 하나님은 주님의 죽음을 보시면 곧 제물-속죄-을 보신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이 단지 대체일 뿐 아니라 연합임을 본다.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곧 향기와 찬미를 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열납하신 제물이 곧 우리가 누리는 것임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헌신하고 찬미할 수 없다. 우리가 누리는 것과 하나님이 얻으신 것이 같다는 것을 본다면, 자연히 나도 기름이 흘러나올 것이다(나도 기름의 흘러나옴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먼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주님께 드린다. 먼저 누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헌신이 있을 수 있다.

 

13절의 '몰약'은 고난 받음, 즉 십자가를 의미한다. 주님이 곧 돌아가시려 할 때, 어떤 사람이 그분께 고통을 의미하는 식초를 마시게 했다. 주님이 죽으신 후에 니고데모는 죽음을 의미하는 몰약으로 주님의 몸에 발랐다. ''이라는 이 단어는 이 책에서 모두 솔로몬이 없을 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영적인 의미에서, 주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고 또 이 세상에도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 '양 가슴', '양 가슴 사이'로 번역해야 한다. 양가슴은 성경에서 모두 '믿음과 사랑'을 가리킨다(살전 5:8).

 

12절과 13절은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12절의 상에 함께 앉음은 당연히 함께 먹는 것이다. 함께 상에 앉는 조건은 문 즉 안의 문을 여는 것이다( 3:2021). 안의 문을 열지 않으면 함께 상에 앉을 수 없다. 그러므로 12절에서는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따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몰약'은 죽임당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지 않을 때 믿음과 사랑을 사용하여 지켜야 하는데, 이것이 안의 교통의 시작이다. 우리가 참으로 침궁으로 인도되고, 참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참으로 헌신한 후에, 우리는 그분과 내적인 교통을 갖기 시작한다. 마음 문을 열면 그분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참된 헌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래야만 비로소 고난 받고 죽으신 한 분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의 믿음과 사랑을 사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B. 외적으로 그리스도로 옷입음(1:14)
14
절에서, '봉선화'(鳳仙花)는 손가락에 물들이는 꽃으로 유대 여인들이 몸에 지녔던 것이다. '엔게디'는 유대의 지명으로, 글자의 뜻은 '어린양의 샘'이고, 다윗이 피신했던 땅이며 광야의 지방이다( 15:6162, 삼상 23:29). '포도원'은 마땅히 '포도밭'으로 번역해야 한다. 포도의 끝은 보이지 않고 포도밭은 꽃이 없는 곳이다. 이 포도밭은 광야에 있는 것으로, 만일 그 가운데 한 송이 꽃이 있다면 매우 돋보일 것이다.

 

14절의 범위는 13절보다 크다. 봉선화 한 그루는 광야의 포도밭 가운데 있는 것으로, 특별하게 나타나고 돋보이는 그리스도의 특수함을 가리킨다. 몰약은 마음에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볼 수 없으므로 안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녀의 장식품이 되었고 그녀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이것은 밖으로도 그리스도를 인정했고 그리스도를 나타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사람 앞에서 봉선화요, 그녀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 왕의 칭찬(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5절의 "어여쁘고 어여쁘다" '아름답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보라! 너는 아름다운 나의 사랑하는 자라! , 너는 아름답구나! 네 눈은 비둘기의 눈 같구나!" 여기의 칭찬은 그녀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 그녀가 아름답다고 말한 것은 격려요, 두 번째로 그녀를 칭찬한 것은 그녀의 눈이 비둘기의 눈과 같기 때문이다. '비둘기의 눈'은 사실적인 면에서는 아름답고, 영적인 의미로 말하면 영에 속한 안목을 가리키며, 기능으로 말하면 한번에 한 가지 사물밖에 볼 수 없는 단일한 것이다. 그녀는 이미 계시, 즉 영에 속한 안목을 얻었다. 그녀는 이미 몰약을 가슴에 품는 단순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왕이 이렇게 그녀를 칭찬한 것이다.

 

. 여인의 대답(1:162:1)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16절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 당신은 아름다운 나의 사랑! 나의 기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 뜻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쁘다는 것이다. 이것이 왕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러요". 여기에서 이 여인은 이미 앞에서 그녀가 찾았던 안식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에는 안식이 있고 또 목양이 있다. 푸른 풀은 양의 침상이요, 눕는 것은 안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2)와 상합(相合)한다. 앞의 잔치에는 비록 안식이 있지만 먹는 것에 주의했다. 여기의 침상에서는 먹는 것도 있지만 주로 주의하는 것은 안식이다. 목자에게 만일 능력이 없다면, 양은 푸른 풀밭에서 계속 먹으려고 할 것이다. 목자에게 능력이 있다면, 양은 푸른 풀밭에서 누울 수 있는데, 그것은 즉 만족이 있고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17절의 '소나무' '잣나무'이다. 백향목은 높고 크고 견고하며, 성경에서 그것은 모두 지극히 영광스런 인성을 가리킨다. 성전 안의 많은 것들이 주로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요, 또 많은 것들이 잣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잣나무는 '죽음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서 나오므로, 잣나무는 주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대인의 무덤 곁에는 모두 잣나무를 심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안식을 얻는다. 푸른 풀은 모두 살아 있고 모두 생명이 있어서 양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곳에 비로소 안식이 있다. 우리의 보호는 주님의 영광스런 인성과 주님의 죽으심에 있다. 솔로몬 성전 안의 주된 두 종류의 나무는 백향목과 잣나무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조화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은 백향목과 잣나무 사이에 거하신다. 우리가 지금 안식할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2 1절은 마땅히 1 17절에 이어져야 한다. 이 말은 왕이 한 말이 아니고 여자가 한 말이다. 만일 이 말이 왕이 한 것이라면, 조금 해석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왕이 한 말이라면, 다음 구절에서 여자를 백합화라고 하는 것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샤론'은 평원이다. '장미' '수선화' 혹은 '야생 장미'라고도 한다. 이 꽃은 유대에서 아주 천한 것이다. 골짜기 중의 백합화는 일반적인 것이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골짜기의 백합화이지 화분의 백합화가 아니다. 사람이 보살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살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스스로를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하는데, 이는 왕이 1 15절에서 그녀를 칭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1 16절과 17절에서 한 면으로는 왕을 찬미하고, 또 한 면으로는 안식을 말했다. 이제 자신에 대해 말할 때에는 다만 들판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할 뿐이다. 그 뜻은, ''라는 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에 의해 돌보심을 받는 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 왕의 대답(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2절의 왕의 뜻은 그녀가 골짜기 가운데의 백합화인데 있지, 골짜기에 있는가 가시밭에 있는가의 비교에 있지 않다. 왕은, 이 여자는 백합화요 다른 것은 가시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가시'는 성경에서 볼 때, (1) 아담이 타락한 후에 사람이 소유한 천연적인 생명이다. 첫 번째 근거는 창세기 3 18절인데, 거기에 있는 가시는 스스로 자라 나온 것이지 씨를 뿌려서 자라 나온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근거는 가시덤불이 있어서 불태워지나 가시는 타버리지 않는다( 3). 불과 빛은 가시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은 가시를 사용하시지만 가시를 소모시키지는 않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장래에 모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사람을 처리하고 이방인을 처리하실 때, 하나님의 어떠함으로 하시지 사람의 천연적인 생명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간증은 사람의 자본을 쓰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하나님 자신의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것을 사용치 않으시고 자신의 것을 사용하신다. (2) 천연적인 것으로부터 자라나온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태복음 13 7절의 가시처럼 죄악의 자연스러운 결과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6 8절에는 가시의 자람이 있는데, 그 의미는 자기의 뜻을 따라 과실을 맺는 것으로 결국 불살라지게 된다.

 

'여자'는 복수이다. 이 여자들은 예루살렘의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죄악에서 난 사람이 아닌 백합화 같은 그분의 사람을 찾으신다. 주님은 그녀가 죄악 중에서 생활하는 그런 무리와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주위가 모두 죄악의 생활이고 모두가 천연적인 생명이지만, 그녀는 그녀들과 다른데 이는 그녀가 믿음(백합화)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여기에서는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런 죄악의 생활 환경 중에서는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X. 여인의 찬미와 누림 (2:36)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3 : "남자들 중 나의 그이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분의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분의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원문 참조).

 

이제 그녀도 왕을 죄인과 비교한다. '남자들'은 사랑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이요, 사람이 사모할 만한 것이요( 3:16), 사람의 마음에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믿는 이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풀'을 주의해야 한다. '사과나무'는 원문에서 '불수감나무'인데, 항상 푸르고 겨울에도 낙엽이 지지 않는다. 겉모양은 석류같고, 맛은 귤 같으며 약간 레몬 같기도 하다.

 

남자들은 일반적인 나무일 뿐이다. 그녀의 사랑하는 이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1) 그분은 수풀 가운데 계시지만 중심 되는 나무이시며, 따라서 높고 크다. (2) 그분의 그늘은 영원히 쇠하지 않는다(항상 푸르므로 감싸 주고 보호해 준다). (3) 그분은 열매를 맺는다(많은 것들은 푸르지만 열매 맺지 못한다). 그분은 높고 크며 동시에 그늘이 있고 또한 열매도 맺는다. 그녀는 여기에서 이미 주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심을 보았다.

 

앞에서 그녀는 이미 주님께 완전히 돌아왔다. 이것은 그녀의 간증인데, 즉 입으로 주님께 대해 하는 말이요, 여러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다. 그녀는 그분이 더 나은 포도주라고 말할 뿐 아니라 이제는 더 나은 포도주를 칭찬하고 말해 내었다. 그녀는 그때에야 세상의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본다. 교회 안에는 나는 바울에게 속한 자요 혹은 아볼로에게 속한 자(이것은 육체임)라는 분쟁이 없다(고전 3:34). 이제 주님이 그녀의 눈에 가득하다. '심히 기뻐하였고' '즐거워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분의 그늘에 앉아'는 높여지고 들림받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분의 그늘에 앉아서 기뻐하였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마치 들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 나무 그늘과 1 6절의 햇볕에 쬐는 것은 서로 대조된다. 여기에는 안식이 있다( 91:1). 과실은 달다. 여기의 먹는 것과 1 12절의 먹는 것은 조금 다른데, 거기서는 주님 자신에 중점을 둔다. 여기의 과실은 칭의, 거룩게 됨, 평강, 성령 강림 등과 같이 주님의 역사와 생명이 우리를 위해 얻게 한 것을 가리킨다. 한 면에서 그녀는 그분의 임재와 즐거움을 느끼고, 또 한 면에서는 그분이 그녀를 위해 이룬 것을 누린다. 우리는 이 맛을 볼 때마다 달다고 느낀다.

 

1 4절은 '달려간다'고 말한다. 1 8절은 '따른다'고 말한다. 1 12절부터 14절에서는 아마도 그녀가 앉아 있으나 그것을 말하지 않고, 1 16, 17절에서도 아직 그것을 말하지 않으며, 여기에 이르러서야(2 3) 정식으로 그녀가 '앉아서' 그분의 임재를 누린다고 말한다. 1 16절과 17절에서 그녀는 이미 안식을 얻었는데, 여기서는 다만 정식적으로 서술한 것뿐이다.-즉 그녀가 1 16절과 17절에서 얻은 것과 누린 것을 말한 것뿐이다. 1 16절과 17절은 역사이고, 여기는 서술이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4). 여기의 '잔칫집' '포도주의 집'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그 뜻은 마음껏 기쁨으로 환호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여기의 '인도하여'는 두 번째의 인도이다(첫 번째는 1 4절임). 여기의 잔칫집과 실과의 누림은 왕의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잔칫집은 잔치를 하는 곳으로 기쁨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처음의 헌신이 있고서 십자가의 길을 거쳐 주님이 당신을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을 보게 되면, 당신은 자연히 포도주의 집으로 이끌려지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왕이 침궁으로 이끄는 것은 계시를 위한 것이며, 왕이 포도주의 집으로 이끄는 것은 시원케 함을 위한 것, 즉 왕의 임재의 시원케 함을 위한 것이다.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다"는 곧 사랑의 깃발을 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사랑이다. 깃발은 당신이 행한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시이다. 우리의 깃발은 사랑으로,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사랑뿐임을 나타낸다. "당신이 나에게 건포도를 주어 내 힘을 부축해 주고 사과로 나의 마음을 소생시켜 주오 내가 사랑으로 인해 병이 났기 때문이라오"(5, 원문 참조).
'
시원케 함' '소생시킴'으로 번역해야 한다.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는 것은 기뻐서 힘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무디(D. L. Moody)가 기뻐서 참을 수 없으므로 주님께 그치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과 같다.

 

이 구절은 구하고 되살아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님 앞에서 여전히 좋다. 그러나 죽은 것같이 땅에 엎드러지는 것이 오히려 옛 성도의 주님 앞에서의 체험이다. 여기에서 그녀가 누리는 것은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한 것이다. 주님을 누릴 수 있는 분량도 주님이 힘을 주셔야 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본 것은 너무 많고 누릴 분량은 부족하게 된다. 이 질그릇은 이런 분량을 갖고 있지 않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그녀가 누릴 수 있는 분량을 넓혀 준다.

 

"그분의 왼손이 내 머리 밑에 있고 그분의 오른손은 나를 안는구나"(6, 원문 참조). 왼손이 머리 밑에 있다는 것은 그녀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손으로 안는 것은 사람을 안는 가장 자연스런 자세이다. 여기서 중점을 두는 것은 사랑의 보호요 사랑의 부축이다. 여기서는 능력의 부축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부축에 중점을 둔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데에는 주님의 은혜의 부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ⅩⅠ. 왕의 부탁(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7절의 '노루'는 다비의 번역본과 미국 표준역의 각주에 따르면 모두 '영양(羚羊)'(다수의 작은 영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국 흠정역과 미국 표준역본의 본문에는 '암사슴'(다수의 암사슴)으로 되어 있다. '암사슴'은 영국, 미국, 다비 등 세 종류의 번역본에서는 모두 '붉은 암사슴' (다수의 암사슴)으로 번역했다.

 

'부탁'은 명령이며, 따라서 왕의 어조이다. 1 2절부터 2 6절까지에서 영에 속한 체험은 일단락 지어졌다. 주님은 그분의 제자가 여기에서 쉬기를 원하신다. 여기에 이르렀을 때, 아마도 마땅히 도달해야 할 고요함과 평범함과 평온함에 이른 것이다. 침궁으로부터 포도주의 집에 이르는데, 믿는 이가 순조롭게 포도주의 집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으므로, 주님은 그녀가 잠시 멈추기를 원하신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고 일에 상관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녀들에게 그녀를 격동시키지 말라고 하신다.

 

사슴의 본성은 쉽게 놀라는 것이다. 왕이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그녀가 이미 사랑하여 병이 났으니 다시 무엇을 하게 하지 말고 조금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손안에 있으니 너희는 다시 와서 그녀를 놀라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그녀의 일에 참견한다면, 무익할 뿐 아니라 그녀가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땅히 이 시기가 지나갈 때까지, 또 그녀 자신이 두 번째 추구를 가질 때까지 쉬어야 한다. 그녀를 놀라게 하지 말고, 그녀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녀가 너무 혼에 속했기 때문에 그녀를 도와야겠다고 생각지 말라. 그녀가 여기까지 공과를 배우면 조금 멈춰야 한다.

 

사랑이 정점에 달했다. 그러므로 왕은 여기에서 잠잠해야 한다( 2:20). 그분(주님)은 묵묵히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3:17), 이것은 주님이 안식 가운데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제1단락의 결론의 말>

 

(1)  그녀가 앞의 한 장에서 본 것은 십자가이지만, 그녀는 아직 부활의 왕성함과 부활의 능력을 보지 못했다.
(2)
첫 단락에서 첫 번째 위험은 그녀가 너무 내적인 교통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3)
십자가의 순종과 헌신의 결말과 경중(輕重)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녀가 아직 시련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실제적으로 십자가를 져보지 않았고, 실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보지 않았다.
(4)
또 한 가지 위험은, 그녀가 비록 임의로 행동하는 것의 잘못은 보았지만 아직 역사하시는 주님이 일보다 크시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그녀는 비록 포도원지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보았으나 여전히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5)
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그녀가 이전의 많은 때에 주님께 그녀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만 생각했지 그녀에게 주님이 마땅히 어떠한 위치에 서 계셔야 하는지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이미 주님의 수고의 열매를 얻었으나 아직 주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수고의 열매를 얻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그녀는 이미 주님을 얻었으나 주님은 아직 그녀를 얻지 못했다).
(6)
1단락에서는 단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할 뿐, 나는 아직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는다.

 

 

 

2단락 자아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 (2:83:5)


. 자아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2:815)
여기서는 그녀의 죄악이나 실패를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는 영적인 노정에서 반드시 체험해야 할 단계이다. 그녀에게는 결점이 있는데, 이것은 그녀가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마땅히 도달해야 하나 이르지 못한 방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A. 부활의 능력(2:89)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8절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듣기를 기뻐하고 임재의 즐거움을 기뻐하지만, 사랑하는 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없고 아직 실제적인 순복이 없다.




9절의 '영양(羚羊)'은 다비의 번역본과 미국 표준역본의 각주에 모두 '영양(단수의 어린 영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국 흠정역과 미국 표준역의 본문에는 모두 '암사슴(단수)'으로 되어 있다. '어린사슴'은 다비, 영국, 미국 등 세 종류의 번역본에서 모두 '어린 수사슴(단수)'으로 번역했다.


주님이 사슴으로 비유된 유일한 곳은 시편 22편으로, 아침의 사슴을 말한다. 성경학자들은 모두 이것이 칠 일의 첫째날 아침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인정한다. 아침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부활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요, 영적인 생명의 새로운 기점이며 새로운 하루이다.


8절부터 9절은 부활의 왕성함을 말한다. 성경에서 산과 언덕은 어려움과 장애를 가리킨다. "그분이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달려 넘어오는구나". 이것은 어떤 큰 것이나 어떤 높은 것도 그분을 막을 수 없음을 말한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이미 부활하셨고, 그분은 이미 모든 어려움과 장애를 이기셨다. 어려움과 장애는 모두 지난날에 속하고 그분은 이제 다른 날 안에 사신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러한 어려움과 장애는 모두 그분의 발아래에 있을 뿐이다. 그분이 뛰어넘으시기만 하면 어려움과 장애는 모두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주님이 그분의 부활 능력으로 나타나 활력 있게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장에서의 그녀의 체험에는 결코 이러한 것들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뛰어 보았지만, 그녀는 아직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은 이제 그녀가 이 공과를 배우기 원하시므로, 그녀를 향하여 소리를 발하며 부르시는 것이다. 그녀가 주님과 매우 친밀하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알기란 매우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결점은 그녀와 주님 사이에 벽이 있다는 것인데, 벽이 그녀를 속에 가두고 주님은 밖에다 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이 벽의 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의 벽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벽이라고 말하는데, 그 뜻인즉 나와 나의 주님의 벽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 이 벽이 그 속에 그녀와 그녀의 주님을 가두고 세상과 기타의 모든 것은 밖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때에 그녀는 주님과 안에서 교통하며, 안식도 있고, 그 안에서 기쁘고 통쾌한 나날을 보낸다. 그녀는 항상 자기의 마음 안에서 그녀의 주님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개의치 않으며, 모든 형제자매를 개의치 않으며, 모든 일상적인 본분을 개의치 않고, 많은 시련을 개의치 않을 수 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세상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녀는 단지 교통의 달콤함을 알 뿐, 결코 일의 능력과 전쟁의 흉악함을 알지 못한다. 산 위에 세 개의 초막은 있는데 산 아래의 한 무리의 죄인은 잊어버렸다. 주님은 산에서 그녀와 함께 계시고, 귀신은 산 아래서 죄인과 함께한다. 그녀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으나, 그녀의 '초막' 안의 생활은 죄인으로 하여금 귀신의 능력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의 기쁨만 찾는다. 이것이 그녀의 벽이며, 이것이 믿는 이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내주하심을 깨달은 이후에 갖는 하나의 위험이다.


우리는 결코 영적인 면에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님이 벽 뒤에 있다는 뜻은, (1) 주님은 앉아 있지 않고 서 계시는데(앞에서 주님은 앉아 계신다), 주님이 움직이실 준비가 되셨다는 것이다. '서는 것'은 움직이기 전의 준비이다. '앉는 것'은 안식하는 문제인 반면에 '서는 것'은 어떻게 일하는가의 문제이다. (2) 주님이 밖에 계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를 밖으로 이끌려고 하신다. 부활의 능력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넘을' 수 있으므로, 그분을 벽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녀는 안에서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닌 밖에서 주님으로 그녀를 인도하시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붙잡는 것이 필요치 않고, 주님으로 그녀를 붙잡으시게 해야 한다. 그녀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믿음을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주님을 따라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주님의 임재의 느낌을 의지하지 않고 살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사람은 비록 벽이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자신을 위하여 창문을 남겨 놓으신다. 만일 큰 창문이 없다면 작은 창살 틈이라도 있다. 헌신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항상 하나님이 그를 빛 비추실 방법이 있다.


벽은 나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나로 하여금 주님을 못 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창문과 창살을 남겨 놓고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신다. 벽의 의미는 당신이 주님은 안에 가두어 놓고 세상 사람은 밖에 가두어 놓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이제 그녀를 구원하시려고 그녀에게,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의 임재가 있을 수 있으며, 혼자 그녀 안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더 깊다. 주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주님의 임재는 기도할 때 뿐 아니라 공장에서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벽 밖에서의 태도는 어떠하셨는가? 서서 활동을 기다리셨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 계속 자신의 기쁜 느낌만 주의하는 사람은 비록 주님의 태도를 보았어도 분명하지 않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도 깨닫지 못한다. 반드시 주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다.


B. 부활의 풍성(2:1013)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나와 함께 가자"(10). 주님은 여기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일어나 나가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것은 여기의 체험이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그러한 체험을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단지 계속 이와 같이 하면 당신은 외부와 접촉할 수 없고, 일단 접촉하면 안식을 잃게 된다. 오늘 이후로 당신은 '산을 달리고 언덕을 넘는' 임재를 얻어야 한다. 귀용 여사(Madame Guyon) "이전의 임재는 지방과 시간의 문제였으나, 현재의 임재는 지방과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은 주의 임재가 있음을 믿을 수 있고, 안의 느낌에 의해 좌우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11절에서 주님은 이미 함께 가자고 그녀를 부르셨으므로, 과거의 체험과 현재의 사실을 모두 그녀 앞에 진열해 놓으실 것이다. '겨울'은 메마르고, 춥고, 성장하지 않고, 시련을 당하는 시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앞 단락의 체험에서 주님은 이미 그녀를 인도해 오셨다. 사망과 같은 각종 시련과 추위와 메마름에서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그녀를 인도해 오셨다. 주님은 아주 분명한 임재로 그녀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겨울을 지나게 하셨다.


 ''는 결코 봄비가 아닌 겨울비로, 당신을 춥게도 할 수 있고 눈으로 변할 수도 있다. 겨울비는 사람을 가두어 두며, 사람으로 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비는 틀림없이 시련을 가리키는 것이다( 67,  7:2527). 주님은 우리에게, 과거의 너희의 그 많은 시련이 느낌에서의 임재로 인해 이미 지나갔다고 말씀하신다. 겨울비에는 두 방면이 있는데 (1) 현재의 십자가가 이미 지나갔음을 말하고(시련이 이미 지나간 것을 가리킴), (2) 주님의 십자가가 이미 지나갔음을 말한다




(주님의 십자가의 역사는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계속 죽음의 방면을 주의할 필요가 없음을 가리킨다). 12절과 13절에서 주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는 뜻은, 이제 너는 마땅히 부활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은 죽고 부활한 것으로, 너는 이제 부활의 경지(境地)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두 구절은 모두 부활의 광경인데, 이는 이것이 겨울 이후의 봄이기 때문이다. 만일 겨울을 말하지 않고 봄을 말했다면, 단지 '살아 있음'일 뿐이겠지만, 먼저 겨울을 말하고 나중에 봄을 말했기 때문에 '부활'인 것이다. 주님은 그녀에게, 그분의 부활 안에 이렇게 많은 것이 있으니 다시는 겨울의 죽음과 차가움과 메마름과 건조함을 주의하지 말라고 알려 주신다.


''은 아름다운 장식이요, ''는 노래하는 소리이다. 꽃은 땅에서 피어나는 것이며 새는 하늘에서 노래하는 것이다. 꽃은 예술이요, 새는 음악이다. 마태복음 6장에 따르면, 꽃과 새는 모두 하나님이 특별히 돌보시는 것들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이 노래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도록 그들을 돌보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반구의 소리'는 마치 찬미의 소리와 같으며, 사랑을 표시하는 소리이다.


'무화과나무 열매'는 겨울 열매이다. 즉 죽음을 거친 열매요, 죽음을 거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열매로서, 십자가와 시련을 거치고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열매가 바로 이 열매인 것이다.


포도나무는 막 발아하여 꽃이 핀 상태로 현재의 상황이다.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는 것은 결실의 약속이 충만하며 결실에 아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포도나무의 꽃은 아무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이미 열매를 맺은 것이다. 다른 나무에 핀 꽃은 꽃이 피었다고 해서 반드시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 핀 꽃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부활의 위치이다. 모든 죽은 것은 이미 다 지나갔다. 앞에 무한한 희망이 있다.


주님은 부활의 풍성에 근거하여 그녀가 나갈 것을 권하신다. 그녀는 단지 느낌에서 즐거움만 고려해서는 안 되고, 이제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 지금은 소극적일 때가 아니라 적극적이어야 할 때요 나가야 할 때로서, 세상에서 그분의 생명을 나타내야 한다.


C. 십자가의 부르심(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14절에서, 이전에는 단지 그녀의 눈이 비둘기 눈과 같다고 했으나 이제는 그녀 자신이 비둘기라고 말한다. 주님은 그녀가 이르러야 하는 위치에 근거하여 그녀를 그렇게 부르신다. 만일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다면, 그녀는 참으로 성령의 생활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녀를 이같이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 틈'은 갈라져서 생긴 틈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십자가를 의미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녀가 아는 십자가가 충분히 깊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에서 시적인 말을 사용하여 그녀에게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 뜻은, 위에서 말한 부활의 능력과 풍성을 이제 네가 본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얻고, 나중에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 빌립보서 3 10절과 아가서 2 8절부터 14절은 서로 부합된다. 이 십자가는 완전히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분은,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얼굴과 소리는 다른 곳에서는 나타낼 수 없고 여기서만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모형()이 완성할 바이다.


주님이 첫 번째 단락에서 만족스러워하시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 번째 단락에는 헌신이 있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는 뜻이 있는데, 지금은 마치 그녀를 십자가로 인()치려는 듯하다. 얼굴은 사람이 보는 것이요, 소리는 사람이 듣는 것이다. 얼굴과 소리 모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 나타나야 한다. 여기의 강조점은 십자가와 하나 됨(연합됨)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녀의 십자가가 되었다.


여기에서 나타난 아주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체험상으로 십자가의 생활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거쳐야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듣고 보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이 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거쳐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곧 부활이다.


주님의 뜻은, 그녀가 다 좋으나 여전히 경박(輕薄)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중하고, 헌신의 범위가 얼마나 크며, 주님의 약속 안에 어떤 뜻이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전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어야 한다.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소리는 한 면으로는 기도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찬미이다( 2:14). 첫 번째 단락은 거의 모두가 여인의 갈망과 추구로서, 그녀는 줄곧 왕을 얻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거기서 왕은 단지 그녀의 눈이 비둘기 눈과 같다고 말했을 뿐이다. 많은 찬미가 다 왕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단락은 '여인의 왕'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왕이 중심으로서, 그녀는 마땅히 왕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단락은 여인이 어떻게 중심이 되는가이고, 지금은 왕이 어떻게 중심이 되는가이다. 여인은 단지 왕에게 예속되었을 뿐이며, 그녀는 응당 왕의 마음을 만족케 해야 한다(그녀는 이미 왕을 얻었고 만족을 얻었다). 지금은 여인이 왕을 사모하고 왕을 감상하는 때가 아니라, 왕이 그녀를 감상하고, 그녀를 보고, 그녀를 사모하는 때이다.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나를 위했으나,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한다.


이제 주님은 그분의 수고의 공로를 얻어 그분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신다. 주님은 이제 그녀가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암시하신다.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오도록 부르셔서 그분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가 자신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느낌에서 벗어나며,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그녀를 일으키신다. 주님은 그녀가 부활 능력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그녀에게 주는 정결한 새 창조를 나타내며 십자가의 생활을 살아 내기를 원하신다. 이제는 그녀가 포도주의 집에 있을 때가 아니고 마땅히 주님을 위하여 생활해야 할 때이다.



일어나서 무엇을 하는가? 일어나서 중심을 바꾼다. 그 뜻은, 오늘 이후로 주님을 더욱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살 때 다름 아닌 부활 능력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생활을 살아 내어 주님으로 감상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는 결코 우리 개인의 누림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께 속한 모든 사람을 감상하시는 것이다.


"네 소리가 달콤하고('부드럽고' '달콤하고'로도 번역할 수 있다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이것은 결코 그녀의 소리와 얼굴이 천연적인 면에서 달콤하고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음으로써 생긴 달콤함과 아름다움으로서, 곧 그녀가 십자가의 죽음 안에 있음으로써 높은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위 틈'이 갈라졌기 때문에 그녀가 숨을 수 있는데 이것은 연합을 나타낸다. '은밀한 곳'은 완전히 내적인 문제로, 이것은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합쳐서 말한다면 완전한 연합이다.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확실히 승천을 가리키는데,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다( 3:34). '낭떠러지'를 어떤 사람은 '높이 오르다'로 번역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를 수 없는 곳'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것이 승천 곧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곳임을 보여 준다. 낭떠러지는 높고 험준한 곳으로 보통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곳이다. 낭떠러지는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것은 에베소서 2장의 '하늘에 앉히시니'(6)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체험을 주의한다. 주님은 항상 십자가의 생활과 승천의 생명을 요구하신다. 주님이 여기서 그녀의 소리가 달콤하고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완전히 십자가와 연합했기 때문이다. 그 뜻은, 그녀가 여기서 십자가의 처리를 받고 죄악과 천연적인 것을 벗어 버렸다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나온 모든 죄악과 천연적인 것이 모두 처리되었다. 오직 부활한 것만 남았고, 모두 새 창조 안에 있다. 이것이 곧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의 달콤한 소리와 아름다운 얼굴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매일 매일 십자가의 처리를 받음으로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부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생명을 잃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부활 생명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아담에게서 온 많은 것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문제는 얼마나 얻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잃었는가이다.


주님은 즉시 그녀의 소리가 달콤하고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씀할 수 없으시다. 주님은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녀가 밖의 것을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14절의 '…이다'는 원래 십자가가 있은 후에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가 잃는 곳이다. 부활을 거친 사람만이 비로소 잃을 수 있다(죄인에게는 생명이 필요하므로 부활을 전하고, 믿는 이에게는 잃는 것이 필요하므로 십자가를 전한다).


D. 장애를 제거함(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15절의 이러한 말들이 사랑하는 자가 한 것이라면 2 13절의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에 이어진다. 여기의 '우리' 2 12절의 '우리'는 어조가 같다.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명령조이다. 큰 여우는 전적으로 열매를 먹지만, 작은 여우는 기회만 있으면 포도나무 가지를 꺾는다. 큰 여우가 열매를 먹으면 당신이 다시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지만, 작은 여우는 당신으로 하여금 열매 맺을 가능성조차 없게 한다. 만일 이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부활 전의 십자가의 생명과 부활 후의 승천의 체험이 모두 작은 여우에 의해 망쳐질 것이다.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함이라"(원문 참조)는 막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할 때로서 아직 완전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부활의 표현이 시작되고 승천의 체험이 시작되려는, 부주의할 때를 틈타 그들이 와서 이러한 것들을 망쳐 버릴 수 있다.
무엇이 작은 여우인가? 옛 생명의 작은 표현과 습관과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모두 작은 여우이다. 꼭 큰 죄는 아니더라도, 작은 우매(愚昧)함이 지혜와 영광을 파괴시킬 수 있다( 10:1). 작은 여우는 포도나무 뒤에 숨어 있으며, 조심하지 않으면 포도나무가 그것에 의해 망쳐져 버린다.


주관적인 방면에서 주님을 따르는 첫 발걸음을 방해하여 결국 포도나무로 열매 맺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작은 여우이다.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아직 견고하게 서지 않았으므로 이 작은 여우를 잘 막아야 한다.

작은 문제(작은 여우)를 처리하는 것은 여인 혼자서 할 수 없고 왕 혼자서도 할 수 없으며, 여인과 왕이 협력해야만 한다.


. 실패와 회복(2:163:5)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16절에서, 여인은 이미 왕의 태도를 보았고, 왕의 부르심을 들었고, 완전히 연합되었음을 본 후에 이같이 대답하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앞 단락에서 그녀가 이미 가졌던 체험을 돌이켜 본다. 이미 그녀의 마음을 만족케 한 한 가지 일은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하는 자의 어떠함을 그녀는 이미 분명히 알았다. 그녀 자신도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가 중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의 체험을 회고해 본다(여기서는 그녀가 중심이다. 6 3절에서는 왕이 중심이지만, 아직도 그녀 자신에게 강조점이 있다. 그러나 7 10절에서는 왕이 유일한 중심이시며, 그분이 계실 뿐 그녀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그녀가 한 말은 틀리지 않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얼마나 실망시키는 답변인지! 문제는 이 말이 좋은가 나쁜가에 있지 않고 그녀가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들었느냐에 있다. 이제 갓 헌신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결코 그녀가 주님께 어떠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어떠해야 하는지만 관심한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중심 삼으며 그분이 중심이신 것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녀에게 한 가지 느낌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는 것이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비록 여기에서 일의 문제를 말했지만, 아직도 주님이 양 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는 중시하지 않고 주님과 백합화의 관계만을 중시한다. 백합화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주님 자신이 심은 것이요 주님 자신의 일이다(시편 45편은 백합화의 노래이다). 주님은 한 무리의 사람 가운데서 그분의 양 떼를 목양하신다. 그녀가 뜻하는 것은, 나는 백합화이며, 주님이 나를 목양하시니 나는 주님만 있으면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중시하는 것은 여전히 나를 위한 그분이다. 그녀의 말에는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만족케 할 수 없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새고 그림자가 사라질 때에 베데르산의 영양(羚羊)과 어린 수사슴처럼 돌이켜 오려무나"(17, 원문 참조) '영양(羚羊)은 다비의 번역본과 미국 표준역본의 각주에서는 모두 단수의 '어린 영양'이다. 그러나 영국 흠정역본과 미국 표준역본의 본문에는 모두 단수의 '암사슴'으로 되어 있다. '어린 사슴'은 다비역, 영국, 미국 세 종류의 번역본에서는 모두 단수의 '어린 수사슴'으로 번역했다. '베데르산'은 분리의 산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녀에게 그림자가 있음을 시인한 것이다. 그녀는 은연 중에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없다는 것도 시인했다. 그녀는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충분히 깊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십자가의 부르심과 승천의 요구와 부활의 표시의 중요성을 알지만, 그녀 자신이 이러한 것들에 미치지 못함도 안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기서 주님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그녀는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어느 날 날이 밝아지고 그림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에게 돌이켜 올 것을 요구한다. '돌이켜 오라'는 이 단어는 한 면으로 그녀의 미치지 못함과 그녀가 사랑하는 자의 부르심에 응하여 곧 일어나 달려갈 수 없음을 나타내며 또 한 면으로는 그녀가 사랑하는 자의 임재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함께 놓고 볼 때, 그녀는 사랑하는 자의 임재를 원하지만, 그녀의 장소 곧 벽 안에서의 임재를 원한다. 그녀는 여전히 안의 느낌을 주의하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자기 느낌으로 누릴 수 있는 임재를 원한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와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임재를 갖고자 하는 원함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느낌상의 즐거움은 추구하지만 부활의 움직임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메마른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가며 어느 환경에나 가는 그러한 공과를 그녀는 아직 배우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녀는 큰 계시를 얻었는데, 곧 그녀가 결코 주님과 모든 곳에서 계속적인 임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래 그녀는 단지 그녀 안에서만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고 느낌상으로만 임재를 살아낼 수 있었다. 원래 그녀가 누리는 주님의 임재도 이곳에만 있다. 그녀는 이 임재가 가장 높고 유일하며, 이것 이외에는 다른 임재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녀의 일과 가정과 세상 안에서 그녀는 아직 주님과 함께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이전에는 그녀가 몰랐는데 이번의 계시를 통과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됐다. 그녀는 단지 자신 속에서의 임재만 갖고 있을 뿐 다른 임재는 아직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러한 무소부재한 임재를 얻으러 갈 능력이 전혀 없다. 그녀는 아직 이러한 무소부재한 임재의 귀함을 느끼는 공과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가서 얻을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가서 요구할 능력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도 '베데르'의 고통은 맛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주 냉정하게 빨리 돌이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이 갈 수 있는 곳에 그녀가 갈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과 함께 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는 모른다. 그녀는 단지 벽 안의 그러한 임재만으로 만족스러워한다. 그녀는 아직 주님과 함께 그곳에 갈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곧 주님께 구하여 '베데르산의 영양과 어린 수사슴'처럼 그렇게 빨리 돌이켜 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결코 주님이 그녀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녀를 이끌어 그녀가 베데르산(분리의 장애)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베데르산을 그대로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주님이 밖에서 물러나실 때 그녀 안의 느낌에서의 임재도 잃게 됐다. 주님은 결코 그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느낌에서 그분은 분명히 그녀를 떠났다. 주님은 그분의 임재를 세상의 환경 가운데로 가져갈 수 없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 안의 느낌에서의 그분의 임재를 잃게 하심으로 그녀를 가르치신다. 2 17절의 시간이 얼마나 긴지는 우리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 이후에, 우리가 만일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다면, 우리의 느낌에도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다면 느낌으로도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가장 친밀한 임재를 느낀 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 체험을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주님이 그분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시면, 당신도 당신의 목적에 이를 수 없다. 당신이 만일 그분의 새로운 은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옛 은사도 잃게 됨을 볼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이 아직도 1 13절의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찌 3 1절의 체험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원문에서 1 13절과 3 1절에는 모두 ''이라는 글자가 있다). 여전히 그녀는 밤새도록 이전과 같이 주님을 그녀의 가슴 사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밤에 주님이 계시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녀는 느낌상의 임재를 귀히 여긴다. 그녀는 차라리 벽 안에 숨어서 이러한 느낌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차라리 세상의 환경으로 향하지 않으며, 주님으로 하여금 그분 혼자 일하고 흥미를 갖게 하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차라리 주님과 그녀의 연합이 완전한 하나가 아닌 것이 낫고, 주님이 그녀 밖에서 활동하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제 그녀가 귀하게 여기는 느낌을 제해 버리고 그녀로 느낌(비록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에서 주님의 임재를 잃게 하여 밖으로 나가 주님을 찾도록 유인하신다. 이것이 여인을 밖으로 나가도록 하는 첫 번째 이끄심이다.

3 1절의 ''은 복수(1 13절의 ''은 단수임)로서 며칠 계속되는 밤이다. 마치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숨은 것 같다. 이것은 완전히 그녀의 예상 밖의 일이다. 주님의 목적은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느낌에서의 교통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그녀가 그분이 얻기를 원하시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유인하시는 것이다. 그녀는 느낌에서의 주님의 임재를 잃었기 때문에 주님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지식이 없고 체험도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우매하여 여전히 주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가서 그녀의 마음이 사랑하는 것을 찾는다(1절부터 3절까지에서 세 차례나 이 말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분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 "내가 내 마음이 사랑하는 그이를 찾는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느낌에서의 임재를 찾고 있을 뿐임을 알지 못한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는 결코 그 보이지 않는 것이 가짜임을 알지 못한다.

누가복음 15 20절의 '일어나서'는 아버지를 향한 것이고, 여기의 '일어나서'( 3:2)는 아들을 향한 것이다. 이 책 3 1절에서의 찾음은 침상에서의 찾음이다. 그 뜻은 그녀가 아직도 그녀의 그 잘못된 위치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 있는 주님을 아는 것이 첫걸음이다. 이것은 이 책에서 말하지 않았다. 이미 첫걸음을 인식한 이상, 마음 안의 그리스도, 즉 느낌에서의 교통-내실과 포도주 집-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후에는 여전히 환경의 제한을 받지 않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녀는 첫걸음과 두 번째 걸음은 보았으나 아직 세 번째 걸음은 보지 못했다. 그녀의 침상 곧 그녀가 안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 그녀가 안식하는 곳에 문제가 생겼다. 주님은 이제 그녀의 이 안식을 흩트러뜨리려고 오셨다. 아직까지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의 체험을 얻지 못한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이 그녀를 인도하여 이 안식을 얻게 하신다. 그러나 이 안식을 이미 얻은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이 그녀를 이끌어 더 진보하게-주님과 함께 산을 뛰며 언덕을 넘게-하신다. 주님은 이제 그녀로 하여금 안식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던 침상에 그분이 계시지 않음을 느끼게 하신다.


그녀는 이제 일어나기로 결심한다. 이제 그녀는 믿음의 진보 없음과 느낌에 있어서 무언가를 잃은 것을 보았다. 일어난다는 뜻은 더 이상 침대에서 잠자지 않고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제 그녀로 장소에 제한이 없는 안식과 시간에 제한이 없는 안식을 배우게 하신다. 이전에 그녀는 장소에 국한된 안식과 시간에 국한된 안식을 비할 데 없이 좋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주님이 한 발 더 인도하실 때, 장소와 시간에 국한된 안식이 완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일어나서 이 안식을 벗어 버리고 처한 환경에서 안식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녀가 일어나서 '성중에 돌아다녀야'한다고 말한다(당초에 이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켰다. 오늘날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모든 하늘에 속한 것을 가리킨다). 그녀는 모든 하늘에 속한 일에서, 하늘에 속한 것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아내려 한다. 아마도 그녀는 시간을 들여 성경 안의 많은 말씀을 읽어 보았을지 모르고 혹은 다른 사람의 책도 보았을지 모르며 혹은 영적인 사람의 집회에도 가 봤을지 모른다. 그녀는 다 해보았고, 이럴 뿐 아니라 '거리나 큰 거리'에도 가서 찾았다. '거리'는 길가로 보통 길이며, '큰 거리'는 넓은 길이다. 이러한 장소는 모두 성안의 거민(居民)이 왕래하는 곳이며, 그들이 교통하는 곳이다. 이러한 곳은 그들이 은혜를 받는 방법인데, 이는 주님이 길이시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평소에 교통을 갖고 은혜를 얻는 방법을 그녀가 모두 적용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아마도 죄를 자복함, 회개, 기도, 금식, 집회, 성도와 왕래함, 믿음과 의뢰함 등이 모든 것을 포함할 것이다(죄인을 찾는 것은 큰 길이나 작은 골목에서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길과 큰 길 밖에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걸어갈 작은 길이 없다. 세상 사람은 자주 작은 골목을 걸어가지만, 영적인 방면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곳에서도 그녀는 주님을 찾지 못했다.

주님이 일부러 자신을 감추시고 사람으로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게 하실 때, 사람이 그것을 회복할 방법을 찾기란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서 그녀는 한 가지 공과를 배우는데, 곧 주님은 우리가 침상에 있도록 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밖으로 가서 찾아야 한다. 만일 기도가 기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며, 성경 읽기가 성경 읽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며, 고요한 것도 고요한 것을 위한 것이 아닌 주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라면, 그녀는 이러한 종류의 기도, 성경 읽기, 고요함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그것들을 모두 떠나야 비로소 주님의 임재를 얻을 수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녀는 이제 이미 그녀의 침상을 떠나 하나님의 자녀와 왕래하고 하나님의 길을 붙잡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숨기는 것이 없고, 체면도 돌아보지 않으며 결코 밖의 많은 일로 안의 공허함을 가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조화됨으로 그녀의 영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을 배운다. 이전에 그녀가 은혜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침상이었다. 이제 그녀는 성()중을 여행하며 많은 길과 거리를 찾아다닌다. 그녀는 비록 아직 그녀의 주를 만나지 못했지만, 주님은 결코 성 바깥에는 계시지 않는다. 비록 그녀가 걷는 이러한 길들이 그녀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길들은 여전히 그녀가 걸어야 할 길이다. 조금 후에 그녀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현재의 모든 문제는 시간 안의 문제인 것이다.

3절의 '행순하다' '떠돌아다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파수꾼들은 하나님이 영혼을 지키도록 위임하신 사람을 말한다( 13:17). 그들은 성중에서 계속 걸어다니는 자들이고 영적인 일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자들이다. 아마도 이전에 그들은 이 여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 여인이 비록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직분을 지키는 곳에서 의외로 이 여인을 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들은 내 마음이 사랑하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길이나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뿐이다. 주님을 만나려면 여전히 당신 자신이 주님이 계신 그곳에 가야 한다. 당신을 대신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파수꾼은 결코 없다. 파수꾼을 찾은 사람이 반드시 주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모두 직접적으로 주님을 대해야 하고, 주님의 처리를 받아야 한다. 지키는 사람이 비록 필요하지만, 때로는 쓸모가 없다. 당신이 주님의 처리를 받을 때, 만일 당신이 그들을 지나치게 의지한다면, 합당한 길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만일 마음이 사랑하는 자가 인도해 주시는 길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떠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당신은 이 여인과 같이 그들을 떠나자마자 당신의 마음이 사랑하는 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성중에 돌아다니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주님이 계신 그곳에 인도하지는 못한다. 비록 거리도 필요하지만, 그것도 그녀로 주님을 만나게 인도하지는 못한다. 주님은 그녀가 한 길을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파수꾼 모두 그녀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구나"(4). 이번에 그녀가 사랑하는 자를 만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그녀가 성 중에 돌아다닌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녀가 걸은 거리와 큰 거리가 모두 옳다고 말하는 것도 결코 아니고 그녀가 파수꾼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시인한 것이 완전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배워야 할 공과가 많다. 그녀는 주님의 마음에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의 수중에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그녀가 다시 주님을 만난 것은 그녀가 완전함에 이르렀다는 표시가 아니며, 주님은 그녀가 이 정도의 시험밖에 견딜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녀는 완전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녀가 마음에서 절실하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여기에서 기꺼이 그녀를 만나 주신 것이며, 이번의 시험은 이것으로 일단락 짓고, 이러한 날이 지난 후 다시 그녀를 인도하여 전진하게 하신다.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지 못한 사람의 추구는 많은 불순물과 온전치 못함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것을 다루실 시간이 없다. 이 초보적인 체험 가운데에서 비록 그녀의 추구가 모두 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은 기꺼이 찾는 자로 하여금 만나게 하신다. 에스겔이 말한 것같이 물을 척량함으로 건너가게 하신다( 47:35). 주님이 마치 이 단락을 척량하고 그녀로 하여금 가게 하신 것 같다. 이 단락의 노정은 주님이 척량하신 것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를 붙잡고 …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제 그녀는 그녀가 잃은 것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마도 전번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꼭 붙들지 않아서였다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그분을 꼭 붙잡는 것이다. 전번에는 그녀가 충분히 깨어 있지 않아서 그분이 가 버렸다고 느꼈으므로 이번에는 아주 깨어서 그분을 지키는 것이다. 그녀는 비록 자기가 마땅히 나와서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느낌에서는 그분의 임재를 구하고 마음에서 사모하고 있다. 나오는 공과는 배웠지만, 믿음의 공과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일어나기는 했으나 아직도 그분과 함께 가지는 못한다. 그녀는 아직도 그분으로 자유롭게 가시도록 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도 믿음의 생활에서 주님의 임재를 오래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여전히 이것을 붙잡는다. 그녀는 결코 느낌에서의 임재는 반드시 주님으로 자유롭게 오고가시게 해야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분이 기쁠 때 우리는 느낌에서의 임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분이 기쁘지 않으실 때 우리는 그분을 자유롭게 해드리고 다만 믿음으로 그분과 그분의 모든 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느낌에서의 임재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할 뿐 믿음의 길과 생활은 여전히 모른다(아마 그녀가 이미 들어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분을 붙들고 가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나온 붙잡음이 자신에게 손해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영에 속한 추구는 주님을 자유롭게 해 드릴 수 있으며, 혼에 속한 것은 비록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 주님의 임재일지라도, 자기를 위해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을 다루신다. 그러므로 비록 그녀가 아직 배우지 못한 공과가 많이 있고, 아직 모르는 일이 많이 있지만, 주님은 오히려 기꺼이 그녀를 만나 주시고 그녀에 의해 붙잡힌 바 되어 끌려가신다. 왜냐하면 현재의 다루심 가운데서 그녀가 통과한 것이 충분히 좋고, 그녀가 받은 시험도 충분히 크며, 그녀의 추구도 충분히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영과 혼을 분리시키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서 그녀를 탓하지 않으신다.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비록 안에는 그녀 자신의 혼합물이 있지만, 여전히 주님은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그녀로 다시 한 번 주님의 임재를 잘 누리도록 하신다. 주님은 이제 그녀의 어미 집으로 들어가 그녀를 잉태한 자의 방에 이르셨다. 만일 '어미의 집'이 은혜의 원칙이라면, '나를 잉태한 자의 방'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은혜의 원칙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녀를 대하신다(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는 정욕 가운데 잉태되었고 죄악 가운데 출생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 안에서 잉태되고 은혜 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시적인 방면에서는 주님을 이끌어 친밀한 곳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녀는 여자이므로, 어미의 집과 나를 잉태한 자의 집은 그녀의 가장 좋은 곳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또 한 단락이 끝난다. 그녀는 여기에서 다시 주님의 임재를 잘 누린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여전히 피동적이시다. 이 여인은 어떻게 주님으로 자유를 갖게 하는지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상당한 공과를 배웠다. 여기에서 그녀는 또 얼마의 시간을 보낸다(아마 몇 개월이 지날 것이다). 붙잡는 힘이 가장 강한 때는 첫 번째로 주님을 잃었다가 다시 얻었을 때이다.


5절에서 주님은 또 분부하신다. 이번에 그녀가 받은 시련은 아주 크므로 주님은 그녀에게 한동안 고요한 시간을 주신다. 주님의 뜻은, 이 사람은 내가 다루고 있으니 너희가 그녀를 도울 필요 없고 너희가 가서 그녀를 격동시킬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여기에서 배운 공과는 아주 실재적인 것이며, 뒤에서 그녀에게는 참으로 큰 진보가 있게 된다.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2장에서 말한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풍성과 십자가의 생활을 그녀는 이미 상당히 배웠음에 틀림없다(비록 절대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녀가 앞의 세 가지 공과를 상당히 잘 배웠으므로, 다음에 주님의 그러한 칭찬이 있다.

 

 

3단락 승천의 부르심(3:65:1)

. 새 창조(3:64:6)

 

앞 단락에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의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라고 말했다. 주님이 그곳에서 아주 오랜 시간 계신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곳이 주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곳임을 나타낸다. 비록 그녀의 붙잡음이 좋지 않은 성분을 함유하고 있지만, 그곳은 여전히 주님이 가실 수 있는 곳이다. 그 뜻은, 모든 것이 사랑에서 나오고 모든 것이 은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일단 자신의 헛됨을 보았으며,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배운 공과가 얼마나 되는지를 누가 알겠는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가르치시므로, 우리가 배운 공과는 무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어미의 집에서 주님과 함께 한동안 고요함 가운데 머물고 '나를 잉태한 자의 방에 이르렀을' 때에, 그녀는 틀림없이 배웠을 것이며, 두 번째 단락에서 배워야 할 공과를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녀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므로, 그녀에게 능력을 주사 주님이 여기에서 그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두 번째 단락과 같은 이러한 체험이 한 번만이 아니라 아마도 여러 차례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이러한 체험을 반복하여 계속 기록하지 않는다. 비록 반복적인 실패와 반복적인 처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패이든 처리를 받는 것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분은 항상 사랑 안에서 계획하시고 은혜 안에서 부축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은 유사한 체험을 볼 필요가 없으며, 그녀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쇠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적극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단락에서 그녀에게 전에 없었던 진보가 있음을 즉시 보게 된다. 그녀의 생명과 생활이 첫 번째 단락에서 보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3 6절부터 11절에서 우리는 입을 열어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여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자가 말하는 것도 아니며, 제삼자가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은 한 방관자(傍觀者)의 입을 빌어 이 여자에 대한 그분 자신의 관찰을 표현하며, 이 여자가 앞 단락의 다루심을 거친 후에 어떠한가를 나타내고, 그녀의 어미 집에서 배운 것과 여러 차례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해 낸다(3 4절까지의 이 단락은 그녀의 역사를 포함한 것으로, 어미의 집에서 아주 고요한 가운데 배운 체험이다).

 

A. 완전한 연합(3:611)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왕이 레바논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6절에서 우리는 그녀가 조금씩 광야(거친 들-방랑을 뜻함)의 생활을 벗어나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 광야는 방랑하는 장소이다. 그녀는 이제 광야로부터 조금씩조금씩 올라오는데, 한 발 한 발 광야의 생활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안식으로 들어간다. 성경에서 방랑하는 광야는 모두 애굽에 인접한 남방에 있고, 가나안은 북쪽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올라온다'는 단어를 사용했다(남방으로부터 올라와 애굽을 떠났음). 이것은 단 번에 된 일이 아니고, 한 발씩 한 발씩 진보하고 조금씩조금씩 표류하는 생활에서 벗어남으로 모든 세상의 영향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믿는 이에게 주신 기업에 이르는 것이다. 그녀는 어미의 집에서 이미 광야의 노정으로 들어갔다(그녀가 광야에서 한 체험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겪은 것임). 이제 그녀는 하늘에 속한 생활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녀는 무엇과 같은가? "연기 기둥과도 같고". '연기 기둥'은 불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2:30). '연기 기둥'은 성령의 능력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사도행전 2 3절과 4절에서 성령의 강림은 이와 같이 나타났다). 연기는 원래 흩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서 연기 기둥으로서 요동치 않는 것을 본다. 그녀는 광야로부터 올라왔는데, 마치 기둥과 같은 연기였다. 이것은 그녀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음을 말한다. 비록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여기에서는 뜻밖에도 그녀가 기둥이 되었다. '기둥'은 안전하고 확실하며 안정된 것이다(계시록 3 12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것은 나갈 수 없음을 나타낸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말한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향기롭게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미 주관적인 방면에서 십자가의 체험을 가졌다. 이것은 그녀에게 빌립보서 3 10절의 체험이 있다는 것이다.

 

'향기롭게 한다'는 것은 먼저 들이마시고 나중에 향기를 내뿜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먼저 안에서 체험하고 난 후에 다시 발하는 것이다. 한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입고, 다른 한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유향'은 향기를 강조한다(몰약은 죽음을 가리키고, 유향은 당연히 부활을 가리킨다). 유향은 주님의 생활을 가리키는데, 특히 주님의 기도 생활 즉 그리스도의 미덕, 하나님이 향기로 보시는 그것을 가리킨다. 매우 기묘한 것은, 주님은 먼저 사시고 나중에 죽으셨으며, 우리는 먼저 주님의 죽음을 갖고 나중에 주님이 땅에서 사신 것 같은 그런 생활을 갖는다(먼저는 몰약이고 나중이 유향이다).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장사'는 여기서 단수인데, 마태복음 13 44절과 연결하며 볼 때,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몰약과 유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 즉 그분이 그녀에게 팔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음을 말한다. 그분은 상인으로서 값없이 줄 수 없으므로 그녀는 대가를 지불하여 얻어야 한다(마태복음 13 44절에서 주님은 사시고, 여기서는 주님이 파신다). 그녀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함으로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는다. '향품'은 마치 몰약과 유향을 보충하는 것 같다.

 

7절과 8절에서, 7절의 '' '침상'으로 번역할 수 있고, 8절의 '두려움' '경고'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의 대답은 아주 기이하다. 6절의 질문은 여자가 어떠한가를 묻는 것이고, 여기의 대답은 왕이 어떠하다고 답변하는 것이다.

 

'침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솔로몬의 승리를 가리킨다. 침상은 밤에, 즉 흑암이 권세를 잡았을 때에 쓰는 물건이다. 흑암이 권세 잡았을 때에는 안식할 수 없지만, 솔로몬은 여전히 그의 침상에 있을 수 있다. 밤에 결코 경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침상에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승리를 말하며, 그가 흑암의 권세를 이겼음을 말한다.

 

침상의 주위에는 육십 인의 용사가 있는데, 각기 허리에 칼을 찼다. 칼이 그들의 허리에 있고, 그들 모두가 전쟁에 능하며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중의 용사이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솔로몬의 침상은 야간의 경고에 잘 대처하도록 예비되었음을 뜻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는 대처할 방법이 있고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원수가 솔로몬을 요동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승리의 안식 안에서 이러한 용사는 솔로몬의 능력을 대표하는데, 그것은 솔로몬에게 모든 대적을 처리할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그에게 여전히 침상이 있는 것은 그의 승리가 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질문은 여인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고, 답변은 솔로몬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으로 여인과 솔로몬의 연합을 나타낸다. 솔로몬의 것이 그녀의 것인데, 이것이 연합이다. 이것은 이 여인의 어떠함과 그리스도의 승리가 함께 연합된 것으로, 우리가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어떻게 누리는지를 말해 준다. 그리고 오늘날 여전히 많은 천사가 그리스도의 승리의 전쟁을 위해 언제든지 잘 예비되어 있다(승리는 이미 있고, 그들은 승리를 유지한다. 그분은 이미 왕이 되었으며, 이제는 그분의 승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9절과 10절은 대답의 두 번째 부분이다(7절의 '보라'(원문 참조) 9절부터 10절까지를 포함한다). 침상은 그분이 밤에 쓰는 것이다. ( : 일인승 가마)은 그분이 낮에 쓰는 것이다. 만일 침상이 그분의 안식을 말한다면, 연은 분명히 그분의 여행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침상이 그분의 안식하시는 거처를 말한다면, 연은 틀림없이 그분의 교통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침상이 원수에 대한 것이라면, 연은 틀림없이 친구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일인승 가마이지 결코 차가 아니다. 만일 차라면 바퀴의 능력을 사용하지만, 가마는 사람이 들어야 한다. 우리가 언약궤의 역사를 상기해 보면, 언약궤는 달구지를 사용해 운반할 수 없고 고핫의 자손이 메었는데( 4:15),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서 행동하시는 것은 그분께 속한 사람을 통하여 그분이 운반되어지시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 가마는 레바논 나무(당연히 백향목임)로 만들어졌다. 나무는 인성을 가리킨다. 레바논 나무는 고귀한 품격의 인성을 가리킨다.

 

"그 기둥은 은이요". 이것 역시 그분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방면에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분을 사람 앞에 가져올 수 있다. 주관적인 방면에서는 십자가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육체에 대한 여지가 없을 때까지 역사해야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를 표현해 낼 수 있다.

 

"바닥은 금이요".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가 거듭날 때 얻은 신성한 생명, 즉 우리가 십자가와 완전히 연합할 때 비로소 온전히 얻게 되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유일한 근거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 이외에 다른 지위가 없다.

 

"자리는 자색담이라". 그분은 왕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권위를 얻으셔야 한다. 모든 권위는 반드시 그분의 어깨 위에 있어야 한다. 그분은 반드시 왕의 지위를 얻고 그곳에 앉아 왕이 되셔야 한다.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발 아래 깔린 것이 연의 바닥 위에 깔린 것이다. 그 뜻은 모든 성도들이 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방금 한 질문은 "광야(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였다. 그러나 대답은 또다시 "솔로몬의 연 …"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믿는 이와 주님과의 연합을 말한다. 앞의 대답은 솔로몬의 원수 앞에서의 문제를 말한 것이고 이제는 솔로몬의 친구 앞에서의 문제를 말한 것이다. 앞에서는 솔로몬의 능력을 말했고, 이제는 솔로몬의 영광을 말한다. 앞 단락은 솔로몬의 능력이 여자의 능력임을 보여 주고, 이 단락은 솔로몬의 영광이 여자의 영광임을 보여 준다.

 

, 기둥, 연의 바닥, 자리, 사랑은 모두 솔로몬의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다 그녀의 것이다. 그럴 뿐 아니라 그 안의 솔로몬도 그녀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녀의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이것은 큰 연합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마디 말은 우리에게 이 여인과 솔로몬이 얼마나 하나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이렇기 때문에 물을 때에는 여자의 어떠함을 물었는데. 대답할 때에는 오히려 왕의 어떠함에 대해 대답한 것이다.

 

3 11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당한 사랑의 관계가 발생한다. 시작할 때에는 친구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약혼을 했다. 3 11절의 '혼인' '약혼'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시온의 여자들아'는 아마도 이기는 자를 대표할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다른 사람의 체험에 동정을 표할 수 있다. 여기의 '면류관'은 결코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며, 천년 왕국 안의 면류관도 아니다. 이 면류관은 결코 권위(왕 노릇)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이 면류관은 솔로몬의 많은 면류관 중에 그의 어머니가 더해 준 것이다. 이 면류관은 그의 혼인을 위하여 그에게 준 것으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안에 두 종류의 면류관이 있는데, (1) 영광의 권위를 대표한다. (2) 즐거움을 대표한다(살전 2:19). 여기의 솔로몬의 면류관은 두 번째인 즐거움의 면류관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면류관은 그가 장가들려고 하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왕이 이 여자를 얻는 것은 마치 면류관 하나를 더 얻는 것같이 그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다. 그 뜻은 오늘 이후로 그는 이 여자를 마치 귀한 면류관처럼 여기고, 그는 그녀로 말미암아 자랑하며, 그녀는 그에게 영광을 더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다른 해석이 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것을 얻기는 어렵다. 다 일리는 있으나 영적인 노선과 연결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견해에서 비교해 본다면, 인류를 가리켜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그분의 육신의 어머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사람 가운데서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

 

여기서부터 이 여자와 왕의 혼인 관계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혼인의 사랑과 즐거움은 완전한 연합 이후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과의 혼인의 누림은 주님과 체험적으로 연합된 후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제삼자의 말은 여기에 이르러서 그친다.

 

B. 새 창조의 아름다움(4:15)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앞서 이렇게 많은 체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왕은 이전에 말한 한 마디를 다시 한다. "보라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원문 참조). 이제 왕은 아주 안심하고 그녀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녀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3 6절부터 11절의 체험을 갖고 그녀와 왕의 완전한 연합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칭찬을 자기를 위해 보류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분은 이제 아주 온당하게 그녀를 칭찬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왕이 이 단락에서 칭찬하는 말은 모두 일곱 가지이다. 이러한 칭찬의 말들은 사람이 주님과 완전히 연합된 후에, 또 십자가가 무엇이며 부활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 후에, 그녀에게 외면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표현임을 나타낸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칭찬의 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가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준다.

 

(1) 비둘기의 눈 - 영적인 안목을 나타냄
사람이 영적인 진보를 위해 필요로 하는 첫 번째 것은 영에 속한 안목, 즉 영적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다. 비둘기는 전일하며 동시에 영에 속한 견해를 갖고 있는데, 이는 성령이 비둘기 같기 때문이다. 눈이 매우 단일하며 영적인 안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매우 큰 한 가지 위험은 우리의 영적인 안목에 수건이 없다는 것이다. 수건은 가리는 것이다. '너울(수건) 속에 있는'이 뜻하는 것은 당신이 영적인 안목을 갖고 있고 영적인 일을 볼 수는 있으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모든 것을 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비둘기의 눈을 가졌을지 모르나 수건은 부족할 수도 있다(모든 본 것들을 가볍게 말해 내기가 매우 쉽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너울 속의 눈은 보통 사람이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뜻은, 당신의 눈이 세상을 향해 가려져 있으므로 그들은 당신에게 영적인 안목이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과 같게 여긴다는 것이다. 믿는 이의 어리석음과 실수는 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본 것을 마구 세상 사람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만일 영적인 안목이 없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도 반드시 매우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얻은 성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얻는 비둘기의 눈도 반드시 많게 된다. 결단코 비둘기 그 자체와 당신이 무관할 수 없으며 당신은 비둘기의 눈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실된 빛 비춤은 모두 성령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많은 때에 이 빛 비춤은 세상 사람 앞에서는 가려져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이 여자의 첫 번째 아름다움이다. 나는 우리가 영적인 안목은 모두 그리스도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주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적인 안목조차도 그분이 칭찬하시는 것이다.

(2) 머리카락 - 헌신과 순복을 나타냄
성경에서 머리카락은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았다. 삼손의 몸에 있는 머리카락은 그의 헌신을 가리키며,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쓰시도록 남겨 놓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능력이 있었다( 16:17).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헌신이 사람 가운데서의 우리의 능력이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이 얼마나 많고 완전하며 깨끗한가가 바로 사람 가운데서 나타나는 우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 준다. 거룩하게 분별하여 헌신하는 것이 모든 능력의 근원이다. 성경에서 머리카락이 갖고 있는 또 한 가지 의미는 자신을 가리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카락과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모두 이러한 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순종의 위치에 서서 어떻게 인간적이고 천연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감추고 하나님으로 표현되시게 하는가를 배운다는 뜻이다.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염소는 대부분 흰색이다. 길르앗산 기슭은 염소가 많은 곳으로 풀이 매우 풍성한 곳이다( 50:19, 7:14). 염소는 성경에서 특별히 속죄제로 사용됐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길르앗산 기슭에 있는 한 무리의 염소처럼 그렇게 많았다. 이것은 상징이다. 그 뜻은, 그녀가 배불리 먹은 것은 제물이 되기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당신의 헌신과 순복은 어느 곳에서 나타나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먹이심을 받고 하나님의 양식을 얻는 것은 모두 헌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순복이다.

 

(3) (치아) - 받아들이는 능력을 나타냄
이는 음식을 씹는 도구이다. 여기에서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식을 받아들이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그분은 일찍이 우리를 위해 다양한 양식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양식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받아들이는 능력은 결코 어린아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이는 이것이 우의(寓意)적인 것으로 성장한 자만이 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왜 양 무리를 말하는가? 양 무리는 반드시 풀을 먹는다. 당신 안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양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어떤 것이 있어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양털'은 성경에서 육체에 속한 생명 혹은 육체에 속한 열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양털 옷은 입을 수 없다( 44:17). 성경에서 흰 세마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의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이미 그의 천연적인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그녀의 이가 털 깎인 한 무리의 양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뜻은, 그녀의 받아들이는 능력이 천연적인 능력의 자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님 앞에서의 추구와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모든 것에서 혈기의 열심을 의지할 수 없다. 자기의 노력을 사용하고 자기를 따를 때, 이것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이()가 아니다. 방금 털을 깎고 목욕을 한 양은 아주 깨끗하고 단정하다. 여기의 목욕은 그녀의 추구하는 목적이 깨끗게 되기 위한 것임을 뜻한다.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그 뜻은 단정하다는 것이다. 즉 받아들이는 능력이 일률적이며,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영적인 일에는 믿음이 있고 물질적인 일에는 믿음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없고 물질적인 일에서는 믿음이 없다면, 쌍태를 낳은 것이 아니라 새끼를 잃은 것이다. 쌍태를 낳고 새끼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완전한 받아들임이다. 천연적인 이는 모두 한 쌍이다. 그녀의 이가 모두 각각 쌍태인 것은 그녀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조금도 가지런하지 못함이 없다는 것이다.

 

(4) 입술 - 표현을 의미함
만일 이가 받아들임을 위한 것이라면, 입술은 반드시 표현을 위한 것이다. 만일 이가 양식을 위한 것이라면, 입술은 틀림없이 이미 소화한 것을 표현해 내기 위한 것이다. 새 창조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안목과 헌신과 받아들임을 주의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말함도 주의하신다.

 

'홍색실'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구속을 가리킨다는 것이며( 2:21), 또 하나는 권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27:2829). 한 면으로는 입술이 정결케 함을 받았다는 표시이고( 6:67), 또 한 면으로는 모든 표현이 다 왕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으로, 입술이 왕의 권위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시편 12 4절의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와 같지 않다. 반드시 구속을 통과한 입술이어야 하고, 자신을 주님의 권위 아래 복종시키고 자기의 뜻대로 말하지 않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말이 있을 수 있다(4 3절의 두 번째 구의 ''은 원문에서 ''로 되어 있고, 이가 입술 앞에 서술된 것은, 만일 먹는 것이 틀리면 말해 내는 것도 반드시 틀리다는 것을 가리킨다).

 

(5) 두 태양 - 외면적인 아름다움
'
두 태양' '두 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뺨은 사람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곳이다. 우리의 모든 외면적인 표현은(즉 희로애락 등)다 뺨에서 나타난다.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이 석류는 하나 전체가 아니고 이미 쪼개진 것이다. 성경에서 석류는 생명의 충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것의 알맹이는 너무 많고 모든 알맹이가 달콤한 즙과 붉은색으로 충만하며 또 달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이의 이러한 외면적인 아름다움이 그가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케 된 데에서 옴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세상의 눈에는 가려져야 하는데, 이것이 너울 속이 의미하는 바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도 좋은 명성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은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이지 나타남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타나야 하는 곳은 오직 주님 앞이다. 휘장 안에서 문을 닫는 이것은 믿는 이의 생활의 영원한 원칙이다.

 

(6) 목 - 의지의 굴복을 나타냄
목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낸다. 사람이 지나치게 자기의 뜻대로 행하고 너무 강퍅하고 교만할 때 성경은 '목이 곧다'라고 말한다( 3:16, 원문 참조). 그러므로 여기의 목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의지가 굴복됨을 나타낸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가 굴복되는 것을 그 사람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신다. 여기서 두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의 굴복된 의지가 어떠한가를 나타낸다. 첫 번째는 "네 목은 … 망대 같고"이다. 망대의 첫 번째 뜻은 곱사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이 곧지 않은 사람은 곱사등이이다. 성경에서 곱사등이는 사탄의 압제를 받아 눈이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13:11, 16). 목이 망대 같다는 것은 그녀가 이미 해방받았고, 사탄의 묶임이 없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망대의 두 번째 뜻은 견고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의지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견고한 단계에 이르렀고, 세상도 사랑하지 않으며, 사탄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다윗의 망대 같고"이다. 이 망대는 보통 망대가 아닌 다윗의 망대 같다. 이 망대가 다윗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 여자의 의지는 견고하고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의지가 완전히 다윗에게 순종하는 경지까지 인도된 것이다. 그녀의 견고함은 그녀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데 있고, 그녀의 해방도 그녀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두 의지가 그리스도에 의해 빼앗긴 바 되는 것의 중요함을 안다.

 

이 망대의 용도는 무엇인가? 군기(軍器)를 모아 두기 위한 것이다. 모든 영적 전쟁은 의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안에 모아 둔 군기(軍器)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방면으로 믿는 이의 의지를 보호하여 대적에 의해 탈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주로 군기는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여기서 언급한 것이 방패와 등패(藤牌)임을 본다. 우리는 방패와 등패가 모두 방어를 위한 것임을 알 것이다. '일천'은 우리에게 충분히 많음을 말해 주며 '용사'는 충분히 강함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뜻은 그녀가 다윗의 뜻에 기꺼이 완전하게 굴복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윗의 뜻을 준행하는 데 있어서 견고하기가 망대와 같다. 그녀는 엄밀하게 방어벽을 쳐서 대적으로 그녀의 이러한 굴복하는 의지를 탈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7) 두 유방 - 우리의 감정의 장소를 나타냄
'
두 유방' '양 가슴'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의 거룩한 감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님을 두 팔로 껴안는다. 우리도 여기에서 주님의 친근하심을 느낀다. 우리도 여기서 그분으로 우리를 친근케 한다. 믿음과 사랑은 우리와 주님이 연합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사랑과 믿음이 합해지는 것으로 한 사람의 몸에는 양 가슴이 있다).

 

'노루'는 두려움과 겁이 많고, 부끄러워하며 쉽게 놀라며, 감각이 예민하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지키는 거룩한 정감이다. 이것은 공개적인 것이 아니며, 느낌이 충만한 것으로 우리가 조심하여 지켜야하며, 마구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소홀히 하면 아주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어떠한 모양의 노루인가?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이 한 쌍의 노루는 한 어미가 낳은 것으로 크기가 같다는 뜻이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이 같이 자라야 함을 의미한다. 믿음이 크고 사랑이 작거나 사랑이 크고 믿음이 작으면 주님으로부터 아름답다는 칭찬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자를 주님은 아름답다고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에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중요함을 본다( 5:6, 딤전 1:5, 14, 5). 영적인 실제의 방면에서는 사랑이 크고 믿음이 작거나 혹은 믿음이 크고 사랑이 작을 가능성이 없다. 크면 크고 작으면 작고,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데 이는 양 가슴이 한 쌍의 노루요 한 어미의 쌍태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노루는 "백합화 가운데서 먹는다"(원문에는 '먹는다'는 단어만 있지 ''이라는 단어는 없다). 믿음과 사랑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생명의 성질(性質)이 서로 조화되는 환경 안에서 양육을 얻고 자랄 수 있다는 뜻이다. '백합화'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돌봄과 약속과 청결함을 뜻하며, 믿음과 사랑이 이러한 환경 안에서야 비로소 양육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백합화는 가시 가운데에도 있을 수 있으나 믿음과 사랑은 세상(가시) 가운데서 발아(發芽)할 수 없다. '백합화'는 하늘에 속한 경계를 뜻한다.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속한 경계 안에 산다. '백합화'는 하나님이 주신 청결함인데, 이것은 부끄러움 없는 양심을 뜻한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믿음과 사랑이 새어나가 버린다. 믿음과 사랑은 오직 깨끗한 양심 안에서만 자랄 수 있다. "백합화 가운데서 먹는 …"은 주님이 양육하시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2:16). 믿음과 사랑이 자라려면 주님이 양육하시는 곳에 있어야 한다.

 

C. 여인의 더 깊은 추구(4:6)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3 6절부터 11절은 그녀와 주님과의 연합을 보여 준다. 4 1절부터 5절은 우리에게 연합이 산출한 것, 즉 주님으로 만족을 얻으시게 하고, 주님으로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보실 수 있게 하는 것을 알려 준다. 첫 번째 큰 단락에서는(1:22:7) 대부분의 여자가 왕을 찬미하는 것이고, 왕이 여자를 칭찬하는 말은 아주 간단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여인은 자신에 대해 아주 많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아직 깊은 체험을 하기 전에, 또 주님의 깊은 처리를 받기 전에는 항상 자기의 영적 상태나 자기의 진보나 자기가 얻은 것과 같은 자신의 체험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동시에 그녀는 주님의 사랑이나 주님의 허락하심이나 주님이 어떻게 그녀의 기도를 들어 주셨는가와 같은 그녀와 주님과의 교통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자신과 주님 사이의 일을 말하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녀는 결코 삼층천의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매번 십사 년이 지난 후에 말할 수가 없다. 그녀가 주님의 처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언어는 그녀 자신의 천박함을 드러낸다. 그녀가 광야를 거쳐 나온 후에야 우리는 그녀의 말이 많이 없어진 것을 본다. 그러므로 3 6절부터 11절은 제삼자가 말하는 것이고, 4 1절부터 5절은 왕이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체험과 그녀와 왕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그녀는 이제 이미 충분한 분량에 이르렀으므로 이러한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녀는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들을 수도 있다. 사실상 오직 말하지 않는 사람만 들을 수 있다. 그녀는 십자가를 거쳤으므로,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느낌을 통제하는가를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와 성령 안의 제약은 주님의 칭찬을 들으나 격동되지 않을 수 있고, 주님의 칭찬을 들으나 교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자신이 약하다는 느낌이 그녀 안에서 일어나고, 그녀로 하여금 십자가의 더 깊은 역사가 더욱 필요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것은 이전과 얼마나 다른지! 그러므로 우리는 제삼자가 그녀의 체험을 말한 후에 그녀가 결코 그들이 제기하지 않은 체험을 보충하여 말하지 않은 것을 본다. 왕의 칭찬 이후에도 그녀에게는 일부러 겸손한 것도, 그녀의 선함을 드러내려는 말도 없다. 그녀는 아주 안정되어 매우 간단한 한 마디 말을 할 뿐이다.

 

"내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으로 가서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갈 때까지 머물리라"(원문 참조). 그녀의 간단한 말로부터 우리는 그녀가 현재의 상황과 장래의 필요를 느꼈음을 본다. 그녀는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갈 때까지 머물리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완전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느낀다. 그녀는 그녀의 날이 아직도 밝지 않았고 아직도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녀는 왕의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상태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녀와 주님과의 하나가 사실이 아닌가? 그녀의 생활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인가? 성령의 관점과 그리스도의 칭찬은 우리에게, 그녀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아주 깊고 높은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 준다. 그녀와 주님 사이에는 전혀 간격이 없고, 주님도 그녀의 불완전함을 찾지 못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편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성장하고 완전한 믿는 이는 주님 앞에서 조금의 그림자도 없고, 주님의 아침 빛 가운데서 전신을 목욕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은 여전히 안에 그림자가 있고 아침이 이르지 못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본다. 완전한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낀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정결케 될 필요를 느낀다. 비록 그녀가 주님의 칭찬을 들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영적인 생활의 날이 아직 밝지 않았고 그림자가 아직도 지나가지 않은 것이 마치 그녀의 오늘날과 이전에 그녀가 광야에서 표류하던 때가 구분이 없는 것같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날이 아직 밝지 않고 그림자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을 때에 나는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에 가서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갈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가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겠다.

 

믿는 이에게 있어서 체험적으로 날이 밝고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야 비로소 있게 된다. 현재 그녀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에 머무는 것이다. 그녀의 말의 뜻은, 주님이 비록 나를 칭찬하시고, 성령이 비록 나와 주님이 완전히 하나라고 인정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나의 약함과 패괴함과 간교함과 쓸모 없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완전함에 이르기 전에는 나는 종전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며, 주님의 영에 속한 생명을 취해야 한다. 내가 광야를 떠날 때에는 몰약으로 내 자신을 향기롭게 했지만, 이제 나는 몰약의 산으로 가야겠다. 이전에는 유향으로 내 자신을 향기롭게 했지만, 이제 나는 유향의 언덕으로 가고 싶다. 만일 몰약과 유향이 나를 향기롭게 한다면 나와 주님이 더 완전한 연합을 가질 수 있고 주님이 나를 아름답게 보실 수 있으므로, 이제 후로 나는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으로 가서 머물려고 한다. 만일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 받으심이 나로 광야의 생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오늘 이후로 나는 십자가와 더 깊은 연합을 가져야 한다. 나는 나의 아침 빛이 나타날 때까지 기꺼이 더 큰 고난을 받고 더 깊은 죽음을 체험하기 원한다. 만일 내가 주님의 생명을 의지하여 삶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수 있다면, 오늘 이후로 주님이 내게서 옛 창조로부터 나온 것을 하나라도 발견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네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거절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의지하기 원한다.
내가 이전의 체험과 오늘 이후로 있을 체험을 비교한다면, 이전에 소유한 몰약과 유향은 향기 방울로 사람을 적시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 이후로 몰약과 유향은 산과 언덕과 같다. 오늘 이후로 나의 뛰어남, 나의 능력과 원대한 안목,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함, 세상에서 더욱 멀리 떠남(산과 언덕은 높음과 초월을 뜻함)은 모두 주님의 죽음과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야 한다.

 

. 승천의 부르심(4:715)
4
1절에서 5절은 여자의 외면적인 표현을 말하며, 7절에서 15절은 여자와 왕의 내면적인 관계를 말한다.

 

A. 부르심(4:78)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이것은 왕이 한 말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인식은 이것이 승천을 가리켜 한 말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이미 더 깊고 더 완전하게 십자가와 부활을 본 후에, 왕은 그녀에게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전에 왕은 다만 그녀가 아름답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녀가 온전히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녀의 모든 흠이 다 십자가로 제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리를 받을 때 하나하나 없어진 것이다. 오늘날 그녀에게 남은 것은 하늘에 속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이요, 완전히 부활의 새로운 경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온전히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다.

 

8절은 마땅히,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으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으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부터 사자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 보자꾸나"로 번역해야 한다. 두 번째 큰 단락에서 왕이 그녀에게 요구한 두 가지는, 첫째로 일어나라는 것이고, 둘째는 와서 그분과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처리를 받았을 때 그녀는 이미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의 행동과 역사에 있어서 그녀는 아직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주님이 이미 요구하신 이상 그분은 결코 수준을 낮추려 하지 않으신다. 때로 우리가 그분의 때를 지연시킬 수 있고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그분은 결코 그분 자신의 부르심을 바꾸지는 않으신다. 우리가 처리를 거친 후 그분의 시기가 성숙될 때, 그분은 다시 "오라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주님은 그녀를 승천하라고 부르신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레바논을 떠나라는 말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레바논으로부터'라고 믿는다. '-로부터'라는 단어는 비록 '떠나다'로 번역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분명히 시()적인 용법이며, 또한 의미상으로 우리는 레바논을 떠나야 한다는 어떤 이유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뒤의 문장에서 우리는 여자의 새로운 체험의 일부분인 레바논의 향기와 레바논의 흐르는 시내를 본다. 여기의 레바논은 백향목을 산출해 내는 높은 산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그것은 백향목의 고귀함을 뜻한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높은 산은 땅을 초월한 하늘에 속한 곳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의 부르심은 승천의 부르심이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는 이에게 승천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라는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승천의 이상이다.

 

믿는 이의 위치는 반드시 산꼭대기여야 한다. 비록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정하신 위치는 여전히 하늘에 속한 산꼭대기이다. 그곳에서 하늘은 매우 가까우며 또한 하늘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곳에서 땅은 매우 멀고, 땅을 떠나 있다. 여기의 세 개의 산꼭대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하늘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체험도 다른 고봉(高峰)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높은 곳이 다만 한 곳이 아니며, 많은 곳에서 묶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아마나'는 진리라는 뜻이다. 많은 때 우리는 여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고, 우리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가 실제 되시는 고봉에 거할 수 있다.

 

'스닐'은 부드러운 갑옷이다. 이것은 당연히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군복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의 의미는 전적으로 전쟁을 위한 것이다. 많은 때에 우리는 반드시 하늘에 속한 전쟁의 안목으로 충만하여 아래의 일을 보아야 한다.

 

'헤르몬' '소멸시키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 마귀의 일을 모두 멸하셨다(요일 3:8). 우리는 많은 때에 전쟁을 주의하지 않은 채 이 승리자의 고봉으로부터 모든 세상에 속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승천의 고봉은 많고 승천의 위치도 매우 광활하여 그 안에서 우리는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장소가(12) 곧 원수가 있는 곳임을 보여 준다(6). 산꼭대기에서 걷고 산꼭대기에서 볼 때 사자 굴과 표범의 산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땅은 사자가 두루 다니는 곳이고 세상은 표범이 삼키는 곳이다. 그러나 사자의 굴은 하늘에 있고 표범의 산도 하늘에 있다. 우리가 무엇이 승천인지를 아직 체험적으로 알지 못할 때, 우리가 만난 것은 이 땅에서의 원수의 역사일 뿐이다. 우리가 승천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후에, 우리는 원수가 계속 머무르고 있는 곳에 머무르려고 한다. 우리는 원수의 공작을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원수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사자에 대하여 성경에서 주의하는 바는 포효(咆哮)이므로, 그것의 일은 위협하는 것이다. 표범에 대하여 성경이 중시하는 바는 교활하고 매서운 것이므로 그것의 일은 삼키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를 승천의 위치로 부르고 나서 결코 오늘 이후로는 무엇이든지 다 좋은 시절이고 아름다운 경치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비록 이것이 고봉(高峰)의 생활일지라도, 여기서는 사자와 표범이 이전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에베소서 1장과 2장을 모르는 사람은 6장의 영적인 전쟁을 알지 못한다. 승천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원수의 실재와 원수의 접근을 보게 된다. 비록 이러할지라도 주님은 우리가 여기서부터 내려다보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산꼭대기는 진리요, 우리의 산꼭대기는 군복이요, 우리의 산꼭대기는 여전히 파멸을 이기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일은 오직 하늘에 속한 경계 안에서만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땅에 속한 일도 하늘에 속한 안목으로만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늘이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많은 때에 우리는 하늘로부터의 내려다봄이 없으므로 우리가 땅의 안목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다름 아닌 혼란임을 어찌 알겠는가? 땅의 가장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하늘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히 작은 일일지라도 분명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의 내려다봄도 사자의 굴과 표범의 산으로부터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대한 관찰에서 원수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이 일이 사자 표범과 어떤 관계에서 발생한 것인지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산꼭대기의 안목을 가진 사람은 원수가 이 일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땅'의 고봉으로부터 내려다보는 사람은 동시에 원수의 득실을 고려하는 관점을 반드시 겸하여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전쟁에서 첫째는 위치요, 둘째는 안목이다. 그 위치가 없으면 원수의 정체를 보지 못하고, 하늘에 속한 안목이 없으면 대적의 궤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고 전쟁을 할 줄도 모른다.

 

이것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부르심이다! 참으로 크고 감탄할 만한 부르심이다! 천연적으로 말한다면, 한 연약한 여자가 산에 올라가고 최고봉에 이르는 것만도 어려운 일인데, 왜 또 사자의 굴과 표범의 산에 가야만 하는가?

 

여자가 이 부르심을 들은 후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B. 소리 없는 대답(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나를 격려하는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나를 격려하는구나"(9, 원문 참조). 여기서 왕은 처음으로 그녀를 신부라고 부른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마음이 왕과 완전히 일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야 비로소 왕은 그녀가 자신()을 위탁할 수 있는 사람임을 본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녀와 왕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서로 몫을 나누어 책임질 수 있는데, 이는 그녀의 사랑이 보통 사람 이상의 수준에 이르렀으며 또한 순결함이 혼인 관계를 갖기에 충분한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숱한 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몸에서 표현되는 것은 모두 새 창조로서 왕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신부의 가장 주요한 조건은 왕이 마음껏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왕은 그녀를 아무것도 보류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데, 이는 그녀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완전히 사랑스런 상태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왕은 또한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녀와 그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게 하는 자와 거룩케 함을 받은 자가 다 하나에서 났기 때문이다( 2:11). 아브라함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이고, 이삭의 아내도 그의 본가의 자매였으며, 후에 야곱과 에서는 각각 다른데, 한 사람은 이방 여자를, 한 사람은 어머니 집의 자매를 아내로 취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그분과 같은 생명을 가진, 한 분 아버지로부터 나온 사람이다.

 

"네가 나를 격려하는구나". 네가 나를 격려해 너를 사랑게 하고 친근케 하며, 또 나를 격려해 너에 대해 만족케 하며 너를 이끌고 전진케 하는구나. 너는 나의 요구에 응답함으로 또한 나를 격려했다. 네가 나를 격려했는데, 이는 너의 눈이 나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네 눈으로 나를 한 번 봄으로써 너는 이미 기꺼이 나를 따라 함께 가겠다는 표시를 했다.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는 항상 눈으로 말하는 것이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다. 일찍이 주님 자신도 한 번은 베드로에게 눈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22:61) 외인들은 눈으로 하는 말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사랑은 눈의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다. 네 눈으로 나에게 너의 뜻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또한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도 나에게 너의 응답을 보여 준다. 목의 구슬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복하는 것을 나타낸다(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하나님께 대한 성령의 가르침에 순복하는 것과 성령이 네 몸에서 네게 이룬 도덕적 성취로 말미암아 나를 격려하였으며 나로 너를 사랑하게 했고, 내가 너를 이끌어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C. 내적인 관계(4:1015)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10). 마치 이전에는 그분이 그녀의 사랑을 칭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사랑은 생겨 나오는 것으로 양 가슴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매혹시키시는 것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땅에 두시고 사람이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도록 요청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이제 사람이 그리스도께 매혹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그 요청에 응답한 것과 같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해 내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그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다. 여기의 사랑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낸 사랑에 대한 사람의 응답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답례와 같다.

 

이 사랑은 믿는 이가 계속적인 헌신을 하고 계속적인 처리를 받은 후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완전하게 나타난다. 어느 날 주님이 참으로 그분의 믿는 이가 체험상으로 땅의 일을 생각지 않고 완전히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야, 그분은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2절에서 여자가 왕의 사랑을 찬미할 때에는 단지 그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왕이 여자를 칭찬할 때, 그분은 그녀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훨씬 낫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믿는 이가 주님의 사랑을 감상하는 것은 주님이 믿는 이들의 사랑을 감상하는 것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주님의 사랑이 귀하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깨달을 수 없다.

 

주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키는지를 느끼실 수 있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안다.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삼상 20:41). 다윗으로 상징되는 우리 주님의 사랑은 이같이 뛰어난 것이며, 우리의 주님은 모든 일에서 으뜸의 위치에 거하신다.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서조차도 항상 으뜸의 위치에 거하신다.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이제 이 여자도 왕의 기름을 갖고 있다. 왕은 성령의 기름 바름을 얻었고 이 여자도 성령의 기름바름을 얻었다. 아론의 머리에 있는 기름은 옷깃에까지 흘러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기름이 아니고 기름의 향기이다. 그 뜻은 성령의 기름 바름의 효능을 얻었다는 것이다. 향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코로 냄새 맡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향기이다. 우리는 도대체 향기가 무엇인지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좋은 믿는 이에게서 당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그러나 결코 그에게서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곧 그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당신에게 주는 일종의 특별한 영적 느낌을 발견한다. 당신은 이 느낌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말하기 어려운데, 이것이 바로 향기이다. 이것은 성령께 순복하는 생명이 내는 결과로서 이 향기는 세상 사람이 소유한 어떤 미덕보다도 뛰어난 것이다. 많은 때에 우리는 믿지 않는 이가 어떤 점에 있어서 믿는 이보다 더 낫다거나 혹은 한 믿는 이가 천연적으로 어떤 장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성령을 따르는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과는 영원히 비교할 수 없다.

 

11절의 '향기(香氣)'는 마땅히 '향미(香味)'로 번역해야 하며, 위의 향기와는 다르다. 이 세상의 모든 향품과 천연적인 향품 가운데에는 여자에게 있는 기름의 향기와 견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그녀의 입술로 꿀 방울을 떨어뜨리게 한 것이다. 꿀은 달콤한 것으로 쇠약한 사람을 충분히 소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달콤함은 결코 짧은 시간 내에 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의 채집과 내적인 노동과 신중한 보관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결코 한담이나 웃기는 말이나 경솔한 말이 아니라 달콤하며 사람을 소생시키는 말이다. 그녀의 말은 결코 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같지 않고 벌집에서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꿀과 같았다. 이것은 일종의 가장 느리게 떨어지는 방울이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해야 할 말을 계곡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일에 관계된 것이나, 그들의 이같이 말하는 방식은 그들이 더 깊은 은혜의 역사를 통과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그녀의 입술에서 얼마나 천천히 달콤한 꿀이 떨어지는가를 주의할 뿐 아니라 그녀 안에 보관된 것이 무엇인지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라고 말한다. 혀 위는 사람이 음식을 삼키는 곳이고 혀 아래는 사람이 음식을 저장하는 곳이다. 이 뜻은 그녀 안에 이러한 것들이 저장되어 있고 이러한 것들이 매우 풍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식량이 유여함을 보여 준다. 꿀은 연약한 사람의 소생을 위한 것이고, 젖은 어린아이를 먹이기 위한 것이다. 그녀 안에는 이러한 풍성이 저장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혀 아래의 음식을 언제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토로(吐露)하지는 않는데, 그녀는 안에 얼마만큼 있으면 밖으로 얼마만큼을 내놓는 그런 사람과 같지 않다. 꿀과 젖이 여전히 혀 밑에 있으며, 전부가 그녀의 입술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의복'은 모든 외면적인 태도, 행위, 동작, 교제, 오락, 예의와 기타 바깥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하는데, 왜냐하면 의복은 사람의 몸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하는 곳이 레바논이기 때문에, 그녀가 비록 세상에서 행하지만 그녀의 의복에 레바논 향기가 배어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그녀의 외면에서 무의식중에 세상보다 높고 세상과 멀리 떨어진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2절에서 '동산'은 마땅히 '화원(花園)'으로 번역해야 한다(4 12절의 '화원', 13절의 '과수원', 16절의 두 개의 '동산', 5 1절의 '동산'은 모두 복수이다. 4 15절의 '동산' ''은 모두 복수이다). 성경에서 화원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의 최초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즉시로 화원을 세우신 것을 본다. 화원은 일반적인 재배를 위한 땅과 같지 않으며, 밭같이 특별한 경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전일(專一)하게 아름다움을 위한 곳이요 누림을 위한 것이다. 그 안에 나무가 있지만 결코 목재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과일나무가 있지만, 그 목적은 여전히 실과를 얻는 데 있지 않다. 그곳의 중점은 화초에 있다. 화초에서 얻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화초를 심는 것은 기쁨을 인해서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이 여자가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를 만족시키는 위치에 도달했는가를 본다. 이제 그녀는 그녀의 존재가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일반적인 화원이 아니라 잠긴 화원으로서 그곳의 우물과 샘조차도 잠겨져 있고 봉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그녀가 전일하게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기쁨만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화원이지만 결코 공원은 아니다. 그녀는 잠긴 화원이므로 그 안의 모든 아름다움은 뭇 사람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소유한 모든 것은 사랑하는 자의 기쁨을 위한 것일 뿐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는다. 민수기 19 15절에서는 장막 안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무릇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도 부정하니라"고 말한다. 뚜껑이 열려 있는 그릇이 의미하는 바는 공개적이고, 어떤 영향도 다 받으며, 전일하게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 없고, 무엇이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오늘날의 믿는 이가 조금 더 닫고 조금 더 덮는다면, 우리의 사역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잠겼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전일하다는 것이다. 우물이든 샘이든 다 여러 외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13절과 14절은 마땅히 "네 싹은(복수) 석류의 과수원 같아 귀한 각종 실과와 봉선화와 나도나무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桂樹)가 있으며 또한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 있더라"로 번역해야 한다. 이 동산은 비록 화원이지만 결코 실과가 부족하지 않다.

 

'네 싹'. 주님은 성경에서 몇 차례 그녀를 싹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고 사망을 이긴 부활의 능력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이다(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과 같다). 그녀의 이러한 생명의 능력은 석류 과수원과 같다. 석류는 실과가 매우 많음을 뜻한다. 이것은 이 여자가 부활 능력으로 충만하고 부활의 실과로 충만하다는 뜻이다. 또한 앞 문장에서 우리는 그녀의 두 뺨을 석류에 비유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석류의 용도가 실과로서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한 것임도 안다. 이곳은 석류 과수원인데, 이 화원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열매 맺음도 있다는 말이다. 이 화원에는 한 가지 실과만이 아니라 각양 각색의 귀한 실과가 있다.

 

그 다음의 화초는 중점이 색깔에 있지 않으면 향기에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모든 유향목과 향품을 말했는데 이것들은 한 믿는 이가 그리스도를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후 9:8, 1:911). (전반부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를 가리키고 후반부의 향기와 화초는 성령의 은혜를 가리킨다).

 

"너는 레바논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라"(15, 다른 번역).

 

우물과 샘은 모두 화원의 관개(灌漑)를 위한 것으로, 화초와 수목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우물은 생수의 저장을 나타내며, 샘은 생수의 흐름을 나타낸다. "우물이 깊다"( 4:11)는 것은 그 저장의 역량을 나타내며, 샘은 생동적으로 계속 흐르는 것이다. 우물과 샘은 모두 화원 안에 있다. 에덴 동산에는 네 줄기의 강이 있었는데, 모두 동산을 적시기 위한 것이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한 줄기의 강이 있으며, 새 예루살렘은 한 동산으로 된 성으로서 물은 모두 화원의 관개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역은 화원을 더 좋고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역은 결코 화원 고유의 것이 아니라 레바논 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이 없으면 성령의 강림도 없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16:7). 오늘날 모든 영적인 관개(灌漑)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는 데에서 비롯된다.

 

 

. 사랑의 생활(4:165:1)

 

A. 신부의 반응(4: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앞 단락은 새 창조의 아름다움(15)과 여자의 더 깊은 결심(6)과 승천의 위치에 있는 여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며, 왕이 그녀에 대하여 어떻게 만족하고, 그녀와 왕 자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만족스러운 지를 말한다.

 

16절에서 그녀의 반응에는 두 방면이 있다. '북풍'은 차갑고, 매섭고, 살을 에는 듯하며, 뼛속 깊이 들어온다. '남풍'은 따뜻하고, 온화하며 사람을 상쾌하게 한다. 여자는 왕이 그녀를 하나의 화원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며, 또한 성령이 그녀 안에 많은 열매와 많은 은혜를 주었다는 것도 안다. 이제 그녀는 결코 환경이 순조롭기만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능히 그리스도의 향기를 낼 수 있도록 잘 준비되었다. 그녀는, 모든 문제가 내적인 것이지 결코 밖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일 안에 있는 것이 향기라면 바깥 환경이 남풍이든 북풍이든 다 그 향기를 날리게 할 뿐임을 알았다. 그녀는 이미 이러한 수준에 달했다. 그녀는 이미 환경 안에서 살지 않고 오히려 어떤 환경에서든지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녀는 만일 안에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다면, 밖의 것은 그녀의 뜻에 따라 환경이 안배될 수 있음을 안다. 그녀는 이미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2),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1:20). 여기 이 부르짖음은 그녀의 순복의 표시이며 또한 믿음의 표시이다. 남풍과 북풍은 성령이 믿는 이를 훈련하기 위해 안배하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환경이다. 그녀는 자신을 성령의 훈련에 맡겼다. 비록 남풍은 사랑스럽고 북풍은 무섭지만 하늘에 사는 사람에게 이것들은 결코 두 가지의 다른 모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어떠한 환경이든지(환경은 성령의 지배를 받음) 그녀로 하여금 성령의 은혜를 나타내게 할 뿐이라는 것을 깊은 곳에서 안다. 그녀는 여기서 특별히 환경 가운데 온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앙망한다.

 

그녀는 성령에게 표시할 뿐만 아니라 종전과 같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미 그녀 안에 많은 향기로운 꽃이 심겨진 이상 성령이 바람을 불게 하여 이러한 꽃들의 향기를 날려야 한다는 태도이다. 나의 주님이 이왕 나를 그분의 화원으로 삼아 은혜를 주셨으니 나로 하여금 성장하게 하여 과실을 맺어 그분으로 이 화원에 와서 여기서 산출된 과실을 누리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녀의 첫마디는 '나의 동산'이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다음 구절에서 '그의 동산'이라고 말한다. 나의 동산이 곧 그의 동산이다. 모든 것은 다 그분을 위한 것이므로 실과도 그분을 위한 것이다. 원래 성령의 열매는 결코 성도의 장식품이 아니며, 믿는 이의 자랑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비록 믿는 이의 몸에서 열린 것이지만, 오히려 주님의 누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이렇게 조건 없이 주님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것을 다시 주님께 드린다.

 

B. 주님의 대답(5: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5:1). 이 동산은 비록 주님의 것이지만, 이 구절의 말로 볼 때 주님은 항상 그분의 동산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요청을 해야만 비로소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번의 헌신이 비록 우리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지만, 계속적인 헌신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주님으로 그분의 동산에 들어가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속했다고 여기면서 스스로 만족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주 이 사실을 반복해서 자신에게 말해야 하며, 반복해서 주님께 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주님이 그분의 동산에 들어와 계시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매번의 헌신을 다 받아들이신다. 여자가 한 번 요청하면 주님은 곧 대답하신다. 내 말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응답받기 쉬운 기도일 것이다. 주님은 모든 것이 다 그분께 속했다고 여기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적어도 여덟 번이나 '나의'- 나의 몰약과 향료 … 나의 꿀송이와 꿀 … 나의 포도주와 젖 …'-라는 말을 하신다. 그분은 악한 사람의 금전과 창기가 번 돈 외에는 모두 받으신다( 23:18). 여기의 뜻은 다름아닌 누림이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주님은 참으로 그분의 지위를 얻으셨는데, 이것은 첫 번째 단락에서는 얻으실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분은 비로소 얻으셨으며, 자신의 수고의 결과를 얻고 보신다.

 

우리는 여기의 헌신, 여기의 받아들임이 일반적인 헌신, 일반적인 받아들임과 다르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전의 헌신은 자신을 주님의 손에 넘기고 완전히 그분께 드려 그분으로 우리 몸에서 어떤 것을 행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의 헌신은 주님이 어떤 것을 행하신 후이며, 결코 주님의 손에서 어떤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역사로 가득하며, 따라서 이 기쁨과 결과와 영광은 마땅히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열매와 향기의 헌신이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의 받아들임도 이와 같다. 이전의 받아들임은 주님이 기회를 잡아 시간을 들여 씨를 뿌리기 위함이었으나, 현재의 받아들임은 씨를 뿌리기 위함이 결코 아닌데, 이는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은 완전히 누림을 위한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마치 황무지 같이 개간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것을 주님의 손에 드려 주님으로 역사하시게 하여 아름다운 화원으로 개간케 했다. 현재의 문제는 이 화원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있다. 체험이 있는 믿는 이는 나중의 헌신이 처음보다 더 어렵지만 더 영광스럽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헌신만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수고의 결실을 얻게 한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먹으라 마시고 많이 마시라". 여기의 친구들과 사랑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님은 지금 구주와 주의 자격으로 여기서 화원의 모든 것을 누리고 계시므로, 친구와 사랑하는 자는 틀림없이 여기서 함께 누리고 계시는 삼일 하나님을 가리킬 것이다(만일 죄인을 가리킨다면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으며 만일 믿는 이라면 헌신한 자신은 아닐 것이고, 헌신한 사람의 친구들일 것인데, 여기서는 주님의 완전한 누림을 말하므로 믿는 이는 그 안에 있을 수 없다).

 

 

 

4단락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 (5:26:14)
 

. 부활 후의 십자가와 여자의 실패(5:26:3)

 

A. 부르심(5:2)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 몸은 잘지라도 내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그분이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나에게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있다 하는구나"(5:2 다른 번역).

 

여기에 이르러서 그녀 자신의 일과 생활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그녀는 마치 잠자는 사람처럼 활동도 없고, 행위도 없고, 계산도 없고, 발버둥치는 것도 없고, 힘을 내는 것도 없으며, 근심도 없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안식한다. 십자가가 모든 죄악을 처리했을 뿐 아니라 모든 혈기도 처리했다. 이제 죄가 역사하지 않고 자아도 움직이지 않으며, 겉사람 전체가 이미 고요한 상태에 이르렀다. 행동이 있더라도 그녀 자신은 오히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며, 그녀는 마치 방관자와 같을 뿐이다. 사실 그녀는 이미 잠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녀에게 움직임이 없고, 생각이 없고, 믿음이 없고, 취하는 것이 없고, 생활이 없으며,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 생명이 그녀 안에 있으며, 부활한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녀 안에 거하시며, 또한 그녀 안에 살고 계신다. 겉사람은 비록 조용하지만 속사람은 오히려 약동한다. 우리는 여기서 속사람과 겉사람이 절대적으로 다른 것임을 본다. 겉은 잠잘 수 있으나 속은 깨어 있으며 조금도 잠자려는 뜻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바울이 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와 일치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의 표현이다.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 안에 있는 이런 사람은 매우 민감하며, 깨어 있고 느낌이 가득한데, 다시 말해서 그녀는 주님의 매우 작은 음성과 움직임까지도 모두 느끼는 것이다. 이 속사람은 영원히 잠자지 않으며, 언제든지 주님의 음성이 있으며, 그녀는 즉시 듣고 이것이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음성임을 안다.

 

주님은 이제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주님은,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 나에게 열어다오"라고 말한다. 이 노래에서 주님은 가장 먼저 자신을 왕으로 나타내셨는데, 이는 그분이 마음 가운데서 보좌를 얻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후에 그분은 그녀가 그녀 안의 벽을 벗어나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가도록 이끌기 위해 부르는 자가 되셨다. 후에 또다시 그분은 얼마나 그녀와 완전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을 신랑으로 나타내셨다. 이제 그분은 여기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계시하신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묘사한 그림인가? 이것은 그분 자신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곳에서 그분의 머리에는 참으로 이슬이 가득했다! 동시에 우리는 그 밤에 그분의 머리에 밤이슬이 있었음을 본다( 22:44). 그러므로 그분은 여기서 자신을 늘 간고를 겪은 사람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전에 우리가 본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연합도 보았다.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보았고,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자아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도 보았다.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도 보았고 십자가의 본받음도 보았다. 한 믿는 이가 이러한 것들을 거친 후에는 아마도 이것이 최고의 체험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오늘 이후로 그녀는 걸음마다 부활과 영광 안에서 길을 간다. 이 믿는 이가 아직 배우지 못한 십자가의 또 다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 방면에 관하여, 그녀에게는 약간의 체험이 있으나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비록 십자가의 고난을 알지만 십자가의 고난이 포함한 것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은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비록 그녀가 이미 십자가의 모형을 알지만, 그녀는 결코 이 모형이 그녀를 어떤 모양으로 인치는지는 모른다. 주님이 이제 그분의 믿는 이를 부르시는 것은, 그녀가 이전에 거쳐보지 못한 십자가의 체험이나 혹은 그녀가 이전에 매우 얕게 거친 십자가의 체험을 거치라는 것이다.

 

겟세마네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 싫어 버린 바 되는 것과 이 싫어 버린 바 됨에서 산출된 모든 것이다( 53:4).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의 속죄의 방면은 분명히 알지만, 그분의 십자가에는 여전히 외면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된 방면이 있다. 이것으로 인해 그분은 극도의 수치를 당하셨다. 그분이 이전에 받은 많은 고난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기 때문에 여전히 영광스런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분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싫어 버린 바 되신 것처럼 보이며 그분이 당하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치심과 학대인 것 같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이것은 그분에게 가장 큰 수치가 되었다.

 

십자가의 속죄의 방면에서 주님은 우리와 연합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십자가의 다른 방면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교통을 갖기를 원하신다. 과거에 우리가 만난 문제는 죄악과 세상과 사탄과 천연적인 것에 불과했다. 우리가 비록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모형을 만나긴 했지만,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됨과 사람에게서 수치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체험이 깊지 않기 때문에 전혀 낯설을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문을 두드리며, "나에게 열어다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뜻은, 다시 한번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다시 한번 밤이슬로 가득한 주님을 영접해 달라고 믿는 이를 부르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며, 여전히 십자가의 더 깊은 오해와 수욕을 배워야만 한다. 그분이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근거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말한다. '나의 비둘기'는 성령의 성품을 말한다. '나의 완전한 자'. 이것은 그녀의 성결과 정결과 헌신을 말한다. 그러나 그분이 결코 '신부'를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그녀가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그녀가 신부가 되어 완전히 연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을 향해 이렇게 열어 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 이미 자신을 열어 주님을 왕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는데, 이제 주님은 그녀 자신을 열어 그분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이제 주님은 그녀를 이끌어 그분과 함께 고난 받고 그분의 죽음을 가장 깊은 방법으로 배우도록 하신다. 그렇지 않을 때 주님은 억지로 그녀가 가기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문을 두드리고 간청하시면서 믿는 이가 자원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B. 책임을 전가함(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2절의 이러한 부르심은 많은 믿는 이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에 수욕의 방면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체험은 심지어 아주 깊다고도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십자가를 위하여 약간 고난도 받고 핍박도 당하고 사람에게서 수욕도 받아 보았겠지만, 그들은 줄곧 십자가는 그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생명이요, 그들의 능력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가 참으로 그들에게 수욕이 된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는 그들로 세상의 명성을 잃게 할 뿐 아니라 영적인 명예도 잃게 하며, 그들은 뜻밖에도 사람에게서와 하나님에게서 조차도 싫어 버린바 된 자로 보여 진다. 하나님은 그들로 시련을 거치게 하시고, 친근한 사람의 위로와 동정을 얻지 못하게 하시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치심을 당하고 학대받는다고 생각하게 하신다. 세상에 속한 수욕은 아마도 그들이 이전에 받아보았겠지만, 영에 속한 수욕은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이러한 오해로 생긴 수욕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깊은 느낌을 갖게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1:24)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부르심은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가? 또 얼마나 잔혹한가? 그러므로 이 부르심을 듣는 사람은 위축된다. 그녀는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아닌가? 나는 지난날에 나의 생활과 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했다. 이제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나로 하여금 오해를 받게 하시며, 사람 사이에 있는 나의 아름다운 이름을 빼앗아 가시고, 사람에게서 수치를 당하게 하시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얻으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그녀가 생각한 것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는 가 였음을 보지 못한다. 그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박탈하심에 이르러야 하는데, 즉 자신의 선한 마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가 모두 제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박탈하심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가 반드시 깊은 단계까지 역사해야 하는데, 즉 당신이 단 마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분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으로 자신의 영광을 돌보시게 하는 단계에까지 십자가로 더 깊이 역사하게 해야 한다.

 

부르심을 들은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일을 돌아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그녀는 자신이 인식한 십자가로 인해 사람들을 이끌어 그녀에게 와서 주님의 길을 배우게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과거의 십자가의 체험은 그녀로 하여금 생명의 운하가 되게 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그녀를 따르게 했다. 만일 그녀가 이 새로운 부르심을 받아들여 십자가에 의해 수욕받는 위치에 이끌려진다면, 그녀의 일의 위치와 일의 기회를 더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과거의 십자가의 체험은 사람을 그녀에게로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오늘 이후의 십자가의 체험은 사람을 그녀 앞에서 더 쫓아 버리지 않겠는가? 오늘 이후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서 주님의 길을 배우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이 그녀로 하여금 주저하게 하며 앞으로 못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라고 반응한다. 나의 모든 외면적인 행위 가운데,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옛사람과 옛사람의 모든 행위를 벗어 버렸는데 어찌 내가 이전에 벗어버린 옷을 다시 입는 것처럼 이제 일어나서 십자가의 외롭고 부끄러운 방면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오해를 받아야 하는가? 십자가의 체험이 이미 옛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벗어 버릴 정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십자가의 양면-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 부활을 알고 십자가도 알지만 다 소극적인 방면에 불과하다. 십자가가 어떻게 옛 창조를 처리하는가만 주의할 뿐 결코 십자가가 어떻게 새 창조를 처리하는가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십자가가 사람으로 하여금 벗어나게 하는 역사만 보았을 뿐 십자가가 사람으로 어떻게 들어가도록 역사하는 가는 결코 보지 못했다. 아마 그녀는 이러한 적극적인 역사는 부활 방면의 일이라고 여기면서 오해를 할지도 모르나, 이것이 십자가의 일이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십자가는 적극적인 방면에서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받음과 오해의 모형을 새 창조 위에 인친다. 주 예수님의 생명은 원래 새 창조의 생명인데, 아직도 우리가 그분의 몸에서 십자가가 그분에게 준 고난 받는 모형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는 목욕하여 온 몸이 주님 안에서 이미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걸어갈 때 세상과의 접촉에서 묻은 먼지와 더러움도 늘 씻어내므로 이미 정결하게 되었다. 나는 반드시 나의 정결함을 지켜야 하며, 진보가 없이 퇴보하는 것 같으므로 다시는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반드시 그녀의 정결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 보았을 뿐, 오히려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문을 열므로 더럽혀지는 것은 참된 더럽혀짐이 아님을 보지 못했다(다시 옷 입고 다시 더러워져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옛사람을 입고 다시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틀림없이 사람의 오해의 옷을 입고 오해의 더러움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의 책임 전가는 좋은 것이지만,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얻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상황은 그녀가 자신의 체험에 이미 만족하고 빌립보서 3 10절의 완전한 체험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여기서 또 '자아'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과거의 체험 때문에 하나님의 일과 영광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지위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녀의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녀의 현재의 영적 상태를 바꾸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흩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다. 모든 영적인 진보는 다 현재의 질서가 바뀌는 데에서 온다. 이것이 바로 대가를 지불함이다. 영적인 안일을 탐하면 항상 더 높은 부르심의 동기를 거절하게 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편안히 거할 때, 양심도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에 대해 송사하지 않는다. 많은 영적인 체험 또한 참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우리는 시간을 들여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목적에 이르려고 추구하지 않는다. 낡은 것에 따른 모든 생활은 항상 새로운 것을 그다지 힘써 추구하게 하지 않으며, 항상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평안함을 잃기를 원치 않게 한다.

 

C. 문을 열어 드림(5:4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4절의 '마음이 동하여서'는 마땅히 '심장이 동하여서'로 번역해야 한다. 그 뜻은 가장 깊은 곳의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문제는 결코 거절하는 데 있지 않고 육체의 약함을 표시하는 데 있다. 그녀의 의지는 이미 완전히 주님께로 돌아섰다. 이러한 지연의 표시는 그녀의 천연적인 인품을 나타낸다. 안에는 문제가 조금도 없는데 밖에 힘이 조금 부족할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새롭게 간청하심으로 그녀를 격려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참으로 마음이 강퍅하다면, 주님은 이렇게 하려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라고 한다. 이것은 부르심을 위한 것이지 타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손은 이전에 그녀의 손을 잡았거나 그녀의 머리 밑에 있었던 손이다. 이 손은 못 박힌 자국이 있는 손이다. 주님은 이러한 손으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요청하시는 것이다. 문틈으로 손을 들이민다는 것은 주님이 그분의 힘을 다해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손으로 그녀에게 그분 자신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손은 그분의 마음을 나타내며, 그분의 손은 그분 자신을 계시한다.

 

모든 영적인 체험은 다 그리스도에 의해 매혹된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의 계시를 보아야만 비로소 그의 현재의 안일한 상황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다. 참으로 주님을 본 사람은 심장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감동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참으로 어떤 사람이 교리에 감동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주님께 감동된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녀는 곧 일어나 문을 열었다. 주님이 그녀를 매혹시켰기 때문에 이전에 능력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처럼 수욕의 십자가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문을 여는 손-믿음과 순복-에서는 자연히 몰약의 방울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 안에는 주님의 죽음의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죽음의 향기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그 죽음을 통과한 생명이 그녀의 손에서 마치 호수 물이 넘치듯이 그녀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할 뿐 아니라 그녀의 의지의 빗장이 주님의 죽음의 향기에 적셔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D. 숨음(5: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주님의 처리를 받아 본 체험이 있는 사람이 순복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없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순복한 후에야 비로소 있는 것이다. 당신이 순복할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불순종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느끼게 하신다(사람의 초보적인 체험에 있어서는 가르침이 순복 전에 있고, 주님은 순복하기까지 그를 가르치신다. 체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르침이 항상 순복 후에 있으며, 그로 불순종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 느낌에 있어서 그녀는 이제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다시 가 버렸다고 느낀다. 이전에 그녀는 우매했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를 잃었다. 그녀의 현재의 이 고통은 영 안에서의 고통이다. 그녀의 영은 이제 흑암에 둘러싸인 것같이 빛이 없다. 그녀는 그분이 부르시며 말씀하실 때 주님을 향해 나아갔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분이 말을 할 때에 그녀의 혼은 이미 그분을 향해갔다.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므로 자신을 증오하는데, 이는 그녀의 내면과 달리 그녀의 외면이 무력해져 있기 때문이다. 왜 그녀는 밖의 거짓된 거절로 그녀 안의 그분의 영광의 얼굴빛을 감추게 하였는가? 그녀는 이제 할 수 없이 찾고 부르지만 오히려 그분은 보이지 않고 대답지도 않으신다. 여기의 찾음과 과거의 찾음은 다르다. 이것은 큰 길과 거리에서의 찾음이 결코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의 찾음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는 뜻밖에도 쓸모없는 것 같다.

 

E. 상처받음(5: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이번에는 결코 그녀가 그들을 찾거나 그들에게 묻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녀를 만나는데, 그들은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큰 변화를 거친 사람이 왜 오늘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잃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그녀를 도우려 했겠지만, 오히려 그들의 말은 그녀에게 더 큰 타격이 되었고 더 아픈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위로받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얻은 것은 상처뿐이다. 펜 루이스 여사가 인용한 좋은 성경 구절이 있는데,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69:26)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그녀의 어려움을 처리할 줄 몰랐다. 그들은 주님이 만일 자신을 감추셨다면 틀림없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여기며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내적으로 받은 타격이 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하는 것이 그녀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로 그녀를 더욱 친 것이다. 이때에 그녀는 참으로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69:20)라고 말할 것이다.

 

'웃옷' '수건'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녀의 고통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사람은 그녀를 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녀를 위로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그녀의 일을 우스운 일로 여긴다. 주님 안에서 지키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 뜻밖에도 그녀를 덮어 주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녀의 일을 사람에게 공개하여 그녀로 수건을 잃게 하고 가릴 것이 없게 하여 사람 앞에서 그녀의 수치를 드러낸다. 그녀의 실패는 믿는 이 가운데 공개적인 소문이 되었다. 그녀는 실로 욥처럼 그녀를 도우려는 친구들을 만나지만, 다 그녀를 정죄하는 친구들일 뿐이다.

 

이 한 무리의 파수꾼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영성으로 말한다면, 틀림없이 그녀를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때에 영적인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단안(斷案)이 잘못될 수 있다. 형제들의 우리에 대한 태도는 비록 많은 때에 잘못된 것이지만, 이것은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실패를 느끼게 하려고 허락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와 주님 사이가 주님의 뜻에 따라 전진한다면, 주님에게는 자연히 우리의 형제들을 처리할 방법이 있으시다. 우리가 만일 실패하면, 그것이 비록 아주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보다 더욱 심하게 형제들로 우리를 다루게 하신다.

 

F.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도움을 구함(5: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8절의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는 마땅히 '내게 사랑병이 있구나'로 번역해야 한다. 그녀가 영적인 사람 가운데서 도움을 얻지 못할 때 그녀는 이제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서 도움을 구한다. 그녀가 이같이 주님께 득죄하고, 주님의 얼굴빛을 잃었다고 느끼며, 의지할 곳이 없을 때, 그녀는 예루살렘의 여자들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는 이제 실패했으니 만일 할 수 있다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실패에 대한 그녀의 느낌이 이렇게 깊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주님 안의 어린아이조차도 그녀를 도울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결코 그들이 어리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며, 그들과 주님과의 교통이 반드시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므로 그녀는 '너희가 만일 만나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녀들이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깊이 후회하는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녀들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혹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자기의 기도는 통하지 않고 이제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녀가 전달하려는 한 마디는 '내게 사랑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미 앞에서 한 번 했으나, 거기의 상황과 여기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거기서는 그녀가 교통 안에서 아주 사랑스럽게 흐를 때였으나 지금은 고갈되어 있는 때이다. 느낌이 충만할 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별로 희귀하지 않지만, 사면이 어둡고 느낌이 없을 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것은 그녀가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실로 큰 진보를 가졌음을 증명한다. 그녀는 이미 어떻게 환경을 다스리는지를 배웠고, 자기의 느낌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도 배워서 안다. 지금의 사랑병은 결코 사랑에 취해 배불러서 난 것이 아니고 사랑에 굶주려서 난 것이다.

 

G. 예루살렘 여자들의 대답(5:9)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이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신들에게 비록 주님 안에서의 깊은 체험이 없고 새 창조의 생명으로 충만하지도 않지만, 이 여자가 '여자 중에 지극히 아름다운 자'인 것을 알아볼 수는 있다. 자신은 비록 얻지 못했지만, 새 창조의 겸손과 성결과 영광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비록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얼굴빛을 잃었지만, 여전히 여자 중에 아름다운 자이다. 그녀는 결코 그녀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원래 그리스도를 온전히 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비교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비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들의 눈은 아직 그분이 절대적인 분임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분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여인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그것뿐이겠는가?
이 말은 또한 이 여자들이 비록 예루살렘 사람이긴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계시를 얻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단지 그녀로부터 반사된 빛만 얻을 뿐이다.

 

H. 사랑하는 자에 대한 여자의 인상(5:10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하구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다비(J. N. Darby)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의 뜻이 추호도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부가 여태까지 신랑의 완전함을 이야기할 때, 그분은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여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그녀 자신의 느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지 절대로 그분에게 직접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이 그녀에 대해 말할 때에는 오히려 아주 자유롭고 아주 완전하게 그녀가 어떠한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여기의 그림이 얼마나 합당하고 아름다운지!"

 

하나님은 그녀들의 질문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표현케 하는데, 즉 그녀가 이전에 얻었던 계시가 다시 한번 그녀 안에서 빛을 발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당초의 위치로 회복시키려 했다. 한 가지 매우 기묘한 일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계시가 어떤 때에는 비록 혼미해질 수 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여자는 여전히 예루살렘 여자들의 교사요, 그녀의 실패는 그녀들의 승리보다 낫다.

 

10절에서 그녀는 먼저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어떠함을 일반적으로 말했다. '희다'는 원문에서 '빛이 밝게 비취는 그런 종류의 흰색'이다. 이것은 그분의 청결함과 그분이 얼마나 죄에서 멀리 떠난 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흰색은 창백한 흰색이 결코 아니라 희고도 붉다. 이것은 그분이 생명이 충만하고 능력이 충만한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윗도 얼굴빛이 붉은 사람이었다 -삼상 16:12). 우리는 그분의 일생에서 그분이 얼마나 능력과 생명이 충만한 사람으로 나타났는지를 본다. 열두 살 때 성전에 나타나신 이래로 오늘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때까지 그분은 남을 돕는 일에서 역량이 부족하게 나타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뛰어나다'는 원문에서 '()를 받치는 자' 혹은 '들어올려진 기()'를 뜻한다. 여기의 뜻은 그리스도는 천만인 가운데 높이 올려진 기, 즉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이시며, 우리의 기대는 곧 그분이시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또한 기를 받치는 자이신데, 그 뜻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라는 것이다. "대적이 홍수같이 몰려올 때 여호와의 영이 한 기()를 일으켜 그를 대항하리라"( 59:19, 다비 역). 그곳의 기는 십자가를 가리켜 한 말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기를 받치는 분으로서 죽임당한 어린양이심을 가리킨다. 그분이 어디를 가시든 천만 인이 모두 그를 따르려 하며, 그분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일반적으로 말한 후에, 그녀는 이제 세세하게 주님이 그녀에게 주신 계시와 인상을 말하려 한다.

 

11절의 '정금 같고'는 그분의 신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2:9).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세우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그분 안에 있지 않다. 이렇기 때문에 "머리를 붙들지 …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된다( 2:19).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그분의 영원한 능력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자신을 태고 적부터 항상 있는 자로 나타내실 때, 그분은 그분의 머리털이 희다고 말씀하신다( 1:14). 그러나 여기서는 그분의 영원히 쇠()하지 않고 패()하지 않는 능력을 말하므로, 그분의 머리카락이 검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성경은 사람이 쇠패하고 변한 것을 말할 때, 그의 머리카락이 반백(斑白)이라고 말한다( 7:9). 그러나 우리 주님께는 반백(斑白)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 13:8)'.

 

12절의 눈은 사람의 표정 특히 친밀한 표정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사람의 말과 서신도 비록 의사를 전달할 수 있으나,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 사이의 의사 소통 수단이다. 눈의 표정은 가까이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의 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바로 눈이다. '시냇가'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적셔짐을 말하며, '젖으로 씻은 듯하다'는 그것이 희다는 것을 말하며, '아름답게 박혔구나'는 그것의 단정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눈은 그분이 우리를 향해 나타내시는 표정인 것이다. 믿는 이가 볼 때 주님의 두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이 아름답다. 즉 활력으로 충만하며, 조금도 고갈되지 않음이 마치 시냇가에 있는 것 같으며, 흑백이 분명한 것이 젖으로 씻은 듯하며 아름답게 박힌 것은 정당한 시선을 가진 것으로, 그분은 안목이 분명치 못하여 사물을 잘못 보실 수 없다는 것이다.

 

13절에서, 그분의 두 뺨은 일찍이 사람의 수욕을 받아 보았고(50:6) 사람의 희롱도 받아 보았다( 27:30). 그러므로 믿는 이가 그분의 두 뺨을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이 아름답고 향기롭게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입술'은 곧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들은 얼마나 청결하며 동시에 몰약즙과 같이 향기로운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45:2). 사람이 그분을 칭찬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씀( 4:22)을 진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몰약즙은 은혜를 나타낼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나타낸다. 그분의 입술에서 떨어진 것은 모두 몰약즙이므로, 그분의 말씀하심에는 그분의 죽음에 근거한 은혜의 말씀이 아닌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분이 하신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 평안히 가라"( 7:48, 50) 혹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6:47), "일어나 … 걸어가라"( 2:9) 등의 말씀은 모두 그분의 죽음에 근거한 것이다.

 

14절의 '노리개'는 열왕기상 6 34절의 '접다'와 같은 뜻이다. '접는' 목적은 그것이 벗겨지거나 잃어버린 바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금 노리개'의 의미는, 주 예수님의 행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결코 도중에 빗나가거나 잃어버린 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행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관()은 금으로 되어 있다. '황옥'은 구약에서 몇 차례 사용되었다. 에스겔 1 16절과 다니엘 10 6절이 바로 그중 두 가지 예()이다. 이 구절들은 모두 견고함을 보여 준다. 에스겔 1장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결국 정권을 잡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다스림의 수레바퀴(황옥으로 만들어짐)는 여전히 도는 것을 본다. 다니엘 1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몸이 마치 황옥 같음)가 여전히 세상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황금 노리개와 황옥은 다 주님이 하신 일의 견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은 반드시 '심장'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이 구절의 몸은 5 4절의 '심장'(원문 참조)과 같은 단어이다. 그 뜻은 주님은 또한 매우 깊은 느낌을 가진 분이시라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전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상아'는 결코 보석과 같이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상아를 얻으려면 적어도 고난을 받거나 죽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의 그분의 백성에 대한 이러한 느낌, 즉 그분이 일찍이 고난받고 죽으심으로 큰 대가를 치르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새기는' 것은 정교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분의 모든 느낌은 천박하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청옥'에 대해 성경은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말한다( 24:10). 이러한 청옥들이 주위에 박혀 있다는 것은, 그분의 느낌이 우리를 만질 때 어떻게 하늘의 지배를 받는가를 말해 준다.

 

15절의 ''은 성경에서 행동을 가리키고, '다리'는 그보다 서는 것을 가리킨다. '화반석'은 성경에서 여러 번 '세마포'로 번역되었으므로 여기서 그것은 그분의 의를 나타낸다. '기둥'(원문 참조)은 안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서의 뜻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우리 주님은 그분이 세우신 의이기 때문에 요동하실 수 없음을 말한다. 무릇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은 다 그분에게서 끊임없이 이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여자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 강론할 때, 그녀는 세 번 금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그분의 머릿속의 생각, 손의 행위, 발아래의 안정됨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다스리셨다. 그분은 완전히 순복한 사람이셨고 또한 완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킨 사람이셨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그분이다.

 

"그분의 형상은 레바논 같고". 그분은 땅을 초월한 분이요, 높은 곳에 사는 분이다. 그분의 모든 것은 하늘에 속한 사람과 같다. "그분의 탁월함은 백향목 같고"(다른 번역). 그분은 사람이지만 영광을 얻으신 사람이다. 백향목이 얼마나 높이 모든 나무를 초월하는가를 보라. 이와 같이 그분은 유일하게 영광 받은 사람이시다.

 

16절에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을 말한다. 원문에서 입은 일반적인 입이 아니라 입맛이다. 여기의 '' 2 3절의 ''(원문 참조)은 같은 단어이다. 이것은 입술과 크게 다르다. 이 맛은 주 예수님의 중보의 역사를 말한 것이다. 그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을 먼저 맛보고 나서 다시 우리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먼저 그분 안에 저장하신 후에 다시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보의 역사이며 매우 달콤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를 거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까지 말할 때, 듣는 사람의 마음은 뜨겁지 않을 지 모르지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뜨겁게 감동된다. 우리가 이전에 걸어왔던 길과 우리가 인식한 주님을 재음미할 때, 우리는 "그분은 전체가 사랑스런 분입니다."라고 외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어떤 것을 언급해도 전체가 다 사랑스럽다.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여! 이분이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니, 내가 그분을 찾는다고 너희가 이상히 여기겠느냐?

 

주님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인식한 주님을 말하는 것이요, 그녀가 주님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녀와 주님과의 연합이 도대체 어떠한 교통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녀가 열린 얼굴로 거울을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보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니 영광 위에 영광이러라.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하려 할 때에 빛이 이미 그녀의 혼을 비췄으므로, 그녀의 어조는 그녀가 얼마나 느낌으로 충만했는지를 나타낸다. 그녀는 마치 거기서 외쳐 노래하면서, "그분은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I. 예루살렘 여자들의 문제(6:1)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이러한 간증을 듣고 나서 함께 가서 찾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여기서 그녀들은 새 창조 안에서 새 창조의 새로움으로 충만한 한 사람을 본다. 여기서 그녀가 자랑하고 그녀가 인식한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전하고 말하는 그리스도와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능력이 있고 매혹하는 힘이 있다. 그녀들은 여전히 그녀를 칭찬해 '여자 중에 지극히 아름다운 자'라고 부른다. 동시에 그녀와 함께 가서 찾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녀들의 문제는, 네가 그분이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분이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다음에 거듭된 그녀들의 질문은 '어디로 돌이켜 갔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여자와 그녀의 사랑하는 자 사이에 간격이 있으므로 그분이 돌이켰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가리킨다. 그녀들의 뜻은, 네가 이전에 그분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우리도 이제 그분을 찾고자 하는데, 그분이 어디 있는지를 네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녀들은 참으로 이 여자가 언급한 사랑하는 자와 다른 사람의 사랑하는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J. 여자의 대답(6:23)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2절에서 원래 이 여자는 이러한 어린 여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들의 간구로 인하여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분의 인격을 묘사한 후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할 때, 그녀는 갑자기 빛을 얻고 분명해져서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그녀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자기 동산'은 그녀 자신이다(4:16, 5:1). 그녀는 갑자기 분명해졌으며, 그분이 결코 다른 곳에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고 음부로 내려갈 필요도 없다. 주님은 그녀를 멀리 떠나지 않으셨고, 그녀의 입에 계시며 그녀의 마음에도 계신다. 그분이 비록 그녀가 순복을 더디할 때 돌이켜 가 버리신 것 같지만, 이것은 그녀의 느낌에서 그분이 사라지심으로 그녀로 하여금 느낌에서 그분이 숨었을 때의 고통을 조금 느끼게 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분은 그녀의 마음에 계신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이 다만 한 면으로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열고, 또 한 면으로는 자기의 실패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분의 임재가 그녀에게서 멀어진 것같이 느껴졌을 때, 그녀는 조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분은 여전히 그분 자신의 동산에 계시며 합당한 때가 되면 다시 새롭게 나타나신다는 것을 믿어야 했다. 그녀가 비록 소외를 느끼고 그분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도,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그곳에 잠기듯이 안식해야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녀 자신의 신실함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혈기의 열심으로부터 나온 추구는 결코 그녀를 회복시킬 수 없으며, 또한 많은 때에 갈수록 혼돈하게 된다. 믿는 이의 추구하지 않음은 항상 믿는 이의 생명에 큰 상처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믿는 이가 혈기로 추구하는 것은 믿는 이에게 더 깊은 상처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회복의 방법은 결코 여기에 있지 않다.

 

우리는 여기 여자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첫 번째가 그녀의 간증임을 본다. 그녀는 결코 자신이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므로 충성된 주님을 위하여 간증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매혹되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와 같이 자기의 주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바라보자"( 12:2)이다. 그분의 어떠하심, 그분의 은혜, 그분의 역사, 그분의 성실,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 자기도 모르게 잃었던 빛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거의 절망적인 가운데에서도 의외로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을 도왔다. 비록 그녀 자신은 이미 교통을 잃은 것 같으나, 그녀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분의 귀함을 알고 그분과 교통을 갖기를 원했다. 그녀의 말함이 비록 이전의 계시이지만, 믿는 이가 서로 주님을 이야기할 때 주님이 어찌 옆에서 조용히 듣지 않으시겠는가? 그녀가 비록 굶주렸지만 다른 사람은 그녀보다 더 굶주렸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배부르게 하여 만족시켰을 때, 자기도 모르게 그녀 자신도 만족케 되었다. 여기서 당신은 다시 한번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서 벗어났는지를 본다.

 

그녀의 병의 증상은 곧 영 안의 어두움과 가라앉음이었다. 그녀가 주님께 매혹되어 자신에서 벗어날 때, 그녀의 병의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가 분명해질 때 그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느낌에서 그분이 멀리 떠난 것처럼 여겼으나, 오히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그분이 여전히 그분의 동산에 계심을 발견했다. 이 동산은 단수이므로 그녀 자신을 가리키며, 아래의 동산은 복수이므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그녀의 말의 뜻은 그분이 내 마음 안에와 모든 성도들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도 복수이므로 같은 뜻을 갖고 있다. '향기로운 꽃밭'은 앞에서 한 번 사용되었는데, 두 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뜻은, 주님이 그분의 동산 안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실과를 먹는 동안 또한 그곳에서 그분의 믿는 이를 감상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믿는 이들의 마음 가운데서 그들을 목양하시며, 또한 그곳에서 그분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백합화 곧 일체 순수하게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모으신다.

 

3절에서 그녀가 이것을 보았을 때, 그녀는 비록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녀와 주님 사이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체험이 지금보다 더 얕았을 때, 그녀는 교통의 느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분께 속하였다"(2:16)라고 말했다. 그녀의 마음이 달콤한 느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녀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다르다. 느낌이 이전만큼 그렇게 많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깊게 주님이 여전히 그분 자신의 동산에 계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라고 말하며, 그로 인해 또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근거는 느낌이었으나 현재의 근거는 바로 믿음이다. 그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기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졌다.

 

그분은 여전히 예전과 같이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신다"(2:16). 그분이 이전에 어떠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처럼 그분의 양무리를 먹이신다. 그분이 이전에 그곳에서 그분의 양 떼를 먹이셨다면, 그분은 현재도 그곳에서 그분의 양 떼를 먹이신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이 영원하고 견고한 주님을 앙망하며 기복이 심한 자신의 느낌을 따르지 않는가를 배웠다. 평소에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실패했을 때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 장막 안의 생활(6:414)

 

A. 사랑하는 자의 칭찬(6:49)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그녀가 이러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님이 그녀에게 그녀에 대해 만족하신다는 표시를 하고자 하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금 이 아가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긴밀한 연합을 갖는다는 것이다. 연합의 목적은 교통이며, 교통은 동일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자가 왕에게서 본 모든 것은 여자가 왕 안에서 체험한 것이다. 왕이 여자에게서 보는 것은 왕의 생명이 여자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 가이다. 그러므로 왕의 칭찬은 믿는 이가 주님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이렇게 많이 얻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4절에서 주님은 이제 하늘의 성소의 관점에서 그분의 믿는 이를 보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장막 안의 일이다. 주님이 일찍이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을 말씀한 적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이 이전보다 더 제한적이므로 그분은,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라고 말씀하신다.

 

'디르사'는 왕궁이 있는 곳이다(왕상 14:17).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도시이다. 디르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 하늘의 성소를 대표하고, 예루살렘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이제 여기서 우리의 하늘에 속한 본질과 우리의 성소 안의 생활을 살펴보고 계심을 본다. 그 예루살렘 안에는 곱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그 디르사 안에는 어여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는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이 믿는 이는 오늘날 이미 장래의 성소의 어여쁨과 고움을 나타낸다.

 

'엄위함' '무서움'으로 번역될 수 있다. 군대가 전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이며, 승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깃발이다. 만일 전쟁에 진다면 풀이 죽고 기가 꺾여 깃발을 내릴 것이다. 그러므로 기치를 벌이는 것의 의미는 승리의 영광이다. 여기의 뜻은, 그녀가 주님 앞에서는 어여쁘고 고운 것이 마치 하늘의 성과 같이 견고하고 성소같이 고요하며, 또한 대적과 세상 사람 앞에서는 그녀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장막 안의 생활은 주님 앞에서의 생활일 뿐 아니라 대적 앞에서의 생활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거하는 하늘은 여전히 대적이 와서 공격하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에게 단지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만 있고 전쟁의 성질은 없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셨다. 하늘에 속한 전쟁은 주님 앞에서 한 번도 잊혀진 적이 없다.

 

믿는 이는 마땅히 사랑스러워야 하지만, 엄위하기도 해야 한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주님 앞에서는 그의 사랑스러움을 잃었으며 대적과 세상 사람 앞에서는 그의 엄위함을 잃었다. 사람이 참으로 우리를 두려워하는가? 성경은 자주 주님을 엄위하신 분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거룩함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승리한다면, 많은 때에 당신은 대적이 물러나고 세상 사람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믿는 이들은 오히려 그들의 엄위함을 희생시켜 사람과 귀신에게 그다지 무서운 존재로 보지 않게 되었다.

 

5절의 전반부는 일종의 시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굳셈, 곧 눈에 나타난 애정을 본다. '나를 놀래니' '나를 이기었으니'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주님은 결코 믿는 이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고 도리어 속으로 격려하고 칭찬하신다. 그분이 어떻게 수로보니게 여인을 거절하셨으며( 7:2529), 어떻게 이틀을 더 늦추어 유대로 올라가셨으며( 11:57), 어떻게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 32:10)고 말씀하셨으며, 어떻게 야곱으로 자신을 가게 하라고 하셨는가( 32:26). 그분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절의 말로써 사랑을 격려하고 계신다. 여기의 '보다'라는 단어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표시일 뿐 아니라 사랑의 견고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은 여기서 마치 그분의 약함을 나타내시는 것 같은데, 이 약함은 그분이 여러 차례 사랑하는 자 앞에서 나타내신 것이다. 그분은 여기에서 암시적으로, 그분이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얼마나 의지할 것이 없고, 정복당하고, 저항할 수 없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무릇 주님이 거절하는 것 같고, 늦추는 것 같고, 사양하는 것 같으며, 여기서 대항하여 이길 힘이 없으신 것 같음을 인식하는 것이 주님의 길을 아는 사람이다.

 

5절부터 7절에서 '머리카락'은 여전히 헌신의 능력을 말한다. ''도 여전히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장막 안의 두 뺨'(원문 참조)도 이전에 말한 대로 감추인 아름다움을 말한다. 여기의 칭찬은 4 1절에서 3절까지의 칭찬과 같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1)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여자가 지연시키는 실패를 할 수 있고 그녀의 죄가 흑암의 죄일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예전같이 그녀를 대하신다. 주님은 그녀의 의심, 즉 주님이 그녀를 대하시는 것이 아마도 변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해 버리려고 그녀에게 똑같은 말을 다시 한 번 하시는 것이다. 매번의 실패 후에 믿는 이가 가장 잃기 쉬운 것은 확신하는 믿음으로서, 자신과 주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 자인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똑같은 말의 반복은 이러한 것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2) 영적인 체험이 한 단계 더 높아졌을 때, 그러한 많은 체험들을 여전히 간직해야 한다. 분별된 헌신, 받아들이는 능력, 감추인 생활이 어렸을 때 필요하다면, 자랐을 때에도 똑같이 필요하다. 어떤 영적인 체험은 진보할 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과 어떤 영전인 체험은 자란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한 단계 더 높아질 때, 한 단계 더 깊은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노정에서 많은 중복된 공과를 배워 본 적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후에 배운 것은 처음에 배운 동일한 공과에 비해 더욱 완전하다. 체험은 비록 같지만 한 단계 한 단계 배우는 것이 있다.

 

8절의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솔로몬과 관계있다. 세상적으로는 이러한 일이 사악한 것이겠지만, 영적인 의미와 영적인 예표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여기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볼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 얻으신 것은 전체 교회의 믿는 이이다. 단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린양의 아내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그분에 대한 애정의 정도는, 또는 그분의 관계의 정도는 믿는 이마다 다른데, 어떤 것은 그분의 왕후 같고, 어떤 것은 그분의 비빈 같고, 어떤 것은 그분의 시녀 같다. 아담, 이삭, 모세는 모두 그리스도가 어떻게 단체적인 아내를 얻으시는가를 예표하며, 솔로몬은 그리스도가 개인적인 믿는 이에 대해 어떠하신가를 예표한다. 여기서는 성결과 영적인 행동이 주님을 대표하기 어려운 것 같으며, 오히려 불의한 것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예표하는 바는 오히려 그분의 불의가 아니다. 도적이 주님을 예표할 수 있으나, 그것이 예표하는 바는 물건을 훔치는 것일 뿐이다. 무릇 지혜 있는 사람은 여기에 대해 모두 분명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믿는 이와 주님과의 관계가 체험적인 면에 있어서 반드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왕후 같고, 어떤 것은 비빈 같고, 어떤 것은 시녀 같다. 어쨌든 그녀들은 다 왕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인 이 여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비둘기, 나의 깨끗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의 어미의 독생자요 그 낳은 자의 가장 뛰어난 자로구나"(9, 다른 번역).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누가 참으로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녀가 유일한 사람이다. 이것은 결코 그녀와 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의 안목에서 그러한 사람은 단 '하나뿐'인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성령 안에서 살므로 참으로 비둘기이다. 그녀는 또한 세상과 완전히 분별되었으므로, 그분의 참된 '깨끗한 자'이다. 그녀는 은혜로 산출된, 유일하게 완전한 사람인 것 같다. 그녀는 은혜의 독생자인 것 같다. 은혜의 역사의 결과 가운데 그녀가 가장 뛰어난 자 같다. 은혜의 자녀란 결코 하나님의 넓고 큰 사함을 입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의 역사이다. 은혜의 의미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역사하신 것이 많은 사람이며, 은혜를 조금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역사하신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에게는 은혜가 있지만,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완전히 역사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율법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은혜이다. 은혜의 자녀는 교회 안에 가득하지만, 은혜가 완전한 단계에 이르도록 역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희귀하다는 것이다. 은혜의 독생자는 그녀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며 다만 그녀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뿐이다(주님과 완전히 연합한 사람은 다 주님의 것인데 이것이 독생자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딸들이 그녀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여자들'은 마땅히 '딸들'로 번역해야 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자신은 비록 완전히 주를 위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누가 완전히 주님을 위한 사람인지는 안다. 비록 그들 자신은 완전히 주님께 돌아갈 정도로 충분히 많은 생명을 얻지 못했지만, 그들 안에 완전히 주님께 속한 사람을 사모할 정도의 생명은 충분히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자신은 비록 아직 완전히 순복하지 못하지만, 완전히 순복하는 사람을 칭찬할 정도의 순복의 체험은 충분히 갖고 있을 것이다. 딸들과 왕후와 비빈은 이 여자의 육체의 방면에 있어서는 아마도 탄복할 만하지 못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 여자가 은혜를 받은 방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복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장막 안의 생활에 있어서, 사람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모든 것은 다 귀하게 여겨져야 한다.

 

B. 여자의 영광(6:10)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성령은 제삼자의 입을 빌려 가장 놀랍고 기이한 질문으로 이 여자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네 가지 질문은 다 이 여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성령은 질문으로 믿는 이의 생각을 격려하기를 기뻐하시며, 또한 그들의 주의를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더듬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케 한다. 우리는 매번 성령이 질문을 할 때는 여자가 새롭게 온전케 함을 얻은 이후임을 본다. 3장에서 그러하고, 후에 8장에서도 그러하며, 여기서도 그러하다. 성령은 믿는 이의 체험이 한 단계 더 높아 졌을 때 질문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의 과정과 원인을 알게 하시는 것 같다.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이제 그녀는 이미 아침에 이르렀다. 여기의 '아침빛'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두 번 사용한 '날이 밝음'이란 단어와 그 뜻이 같다(2:17, 4:6, 원문 참조). 이제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졌고, 그녀와 주님과의 사이에 더 이상 간격이 없다. 그녀는 이제 간격이 없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한다. 비록 아직은 낮이 아니지만, 이미 아침인 것이다. 그녀의 앞길은 아침빛과 같으며, 그녀의 소망도 아침빛과 같다. 그녀의 장래의 모든 것은 아침빛의 장래와 같은 것이다. 아침빛의 소망과 장래는 정오이다. 정오는 약속에 있어서 이미 그녀의 것이다( 4:18). 주님의 손안에 있는 의인의 길은 정오에 이르러 멈추며 결코 오후의 생활은 없다.

 

"달같이 아름답고".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달의 차고 기우는 것이 아닌 달의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그녀의 그 온화한 밝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땅을 비추어 흑암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간증을 보게 한다( 89:37).

 

'해같이 맑고'란 안에 조금도 가린 것이 없으며 빛이 충만하다는 말이다. 달과 해는 모두 그녀가 얼마나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은 그녀가 자신 안에서 얼마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며, 해는 우리에게 그녀가 주님 안에서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녀 자신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생명이 없고 기식(호흡)도 없는 죽은 사람에 불과하지만, 마치 태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얻는 달과 같다는 것이다. 달이 태양을 향할 때에는 빛이 있으나 태양을 등질 때에는 흑암이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맑은 해이며, 완전한 새 창조이며, 빛이 있을 뿐 흑암은 없다. 주님이 해이시듯이 그녀도 해이다.

 

"기치를 벌인 엄위한 군대같이". 그녀에게는 소망이 가득한 미래가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하늘에 속한 생활이 있으며, 그녀는 또한 항상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자이다. 그녀는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하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은 그녀를 보았는가?

 

C. 이 단락은 현안(懸案)이라 할 수 있으며, 결론을 내리기 어려움(6:1112)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1절의 '호도 동산' '육두구 동산'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 구절은 "골짜기의 열매를 보려고 포도나무가 무성한가 석류나무에 순이 났는가를 보려고 내가 육두구 동산으로 내려가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

 

12절을 혹자는,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기꺼이 원하는 백성( 110:3, 참조)의 수레 가운데 두었도다"라고 번역한다. '귀한'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왕권의 백성'이고, 또 하나는 '기꺼이 원하는 백성'이다.

 

만일 이 두 구절이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원하는 백성'이란 이 어구의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한 가지 대답 같은데,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 있는가 없는가, 진보가 있는가 없는가를 가서볼 때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왕의 수레 가운데 두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기꺼이 원하는 백성의 수레'에는 왕만이 앉을 수 있다).

 

D. 여자의 진보와 승리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
술람미 여자' '평안의 여자'로서 '솔로몬'의 여성형이다. '여자'라는 단어는 번역하지 않을 수 있다.

 

성령은 이제 제삼자인 방관자들의 부름을 통하여 가장 열렬하게 그녀가 돌아와 그녀들로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다. 그녀는 이제 전차에 앉아서 계속 전진하고 승리하며, 거침이 없고 장애가 없다. 이제 그녀들은 그녀를 한 번 봄으로 그녀가 이같이 전진하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이 부탁은 한 면으로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예표하는데, 왜냐하면 그녀들이 기꺼이 그녀가 계속 전진하는 이유를 알고자 하기 때문이며, 또 한 면으로는 성령이 제삼자의 부탁과 제삼자의 대답을 통해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위한 예비가 도대체 어떠한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제삼자의 두 가지 어조를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해 내신다. 그분은 한 무리의 사람을 통해 부탁하게 하시고,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을 통해 그녀들에게 대답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술람미 여자가 역사를 위해 예비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인식할 기회를 갖게 하신다.

 

그녀는 이제 참으로 술람미인데, 이는 그녀와 솔로몬의 연합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제 그녀는 솔로몬의 역사를 이미 그녀의 역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마하나임'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본 곳으로 '두 영()의 군대'라는 뜻이다( 32:2).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은 매우 열렬하며 충분히 사람을 매혹시킬 것이다. 춤은 승리의 표시이다( 15:20, 삼상 18:6).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 안에는 승리의 뜻이 들어 있다. 이 질문의 뜻은, 너희들이 왜 술람미 여인을 하늘에 있는 두 영()의 군대가 승리를 기념하는 춤을 추는 것으로 보았느냐이다. 술람미 여인에게 어떤 장점이 있기에 너희들이 그녀를 두 영()의 군대로 보았는가?

 

 

 

5단락 하나님의 역사(7:113)

 

. 장인(匠人)의 장식(7:19)


A. 과거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함(7:15)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1절에서 성령은 또다시 제삼자의 어조를 빌려 앞의 질문에 대답하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제삼자가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성령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이 맨 먼저 말한 것은 그녀의 발이다.

"왕의 딸아"(다른 번역). 이것은 그녀의 출신이 존귀하고 그녀도 왕가의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임을 말한다. 성경에서 '신발'은 분명히 '평안의 복음'을 의미한다( 6:15). 이제 중시하는 것은 일을 위한 준비이므로, 먼저 그녀의 신발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다. '구슬 꿰미' '보배'로 번역할 수 있다. '넓적다리'는 서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뜻은, 그녀의 그 서는 능력은 완전히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넓적다리가 보배같이 되려면, 우리의 다리는 야곱처럼 환도뼈의 힘줄이 끊겨야 한다( 32:25). 일의 능력은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그러므로 공교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2절의 '배꼽' ''('허리'는 원문에서 '복부'이다)는 그녀의 내면을 가리켜 한 말이다. 만일 '포도주'가 주 예수님의 피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한 단의 밀'은 반드시 주 예수님의 살을 가리킨다. 우리는 진실로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신 사람들이다. '섞은 포도주'의 뜻은 성령이 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백합화로 두른 밀단'의 뜻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 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3절의 '두 유방'. 여기서는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의 뜻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자라고 전진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어떠한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먹이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의 믿음과 사랑이 곧 우리가 다른 사람을 먹이는 분량과 능력이다.

4절의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는 이전과 다르다. 이전에는 다윗의 망대였다(4:4). 이제는 하나님의 처리를 받았으므로 상아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사에 다 피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하나님을 위할 때는 견고하기가 망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망대는 상아로서 기꺼이 자신이 고난 받고 죽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눈은 … 못 같고'는 이전의 비둘기의 눈과 차이가 있다. 못의 물은 빛이 없는 우물물 같지 않으며, 계속 유동하는 샘물과 같지도 않다. 못은 빛을 향하며, 동시에 고요하고 멈춰져 있다. 눈이 못 같다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며, 불순물이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고요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헤스본'이란 글자의 뜻은 '총명'이며, '바드랍빔'이란 글자의 뜻은 '많은 여인들'이다.

''는 이전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냄새 맡는 감각은 성숙되어야 비로소 생기기 때문이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귀가 열리고 눈이 밝은 사람은 적지 않으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를 가진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이러한 감각은 결코 들은 말이나 본 일에 따른 것이 아니며, 일종의 내적인 기능이다. 이러한 감각은 말과 지각을 초월한 것으로 향기와 악취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일종의 영적인 직감으로,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능히 알게 한다. 이유나 추론에 따른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우며 아주 정확한 내적인 느낌이 당신으로 영적인 일을 알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코는 악취가 무엇인지 냄새를 맡아서 알 수 있다. 많은 교리에 대해 당신은 그것들의 잘못을 말할 수 없으며, 많은 사람에게서 그의 단점을 찾을 수는 없으나, 당신은 그들이 그곳에 있는 것이 틀렸다는 내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여기의 ''이다.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탑()'. 이것은 그것의 높고 예리함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납작코의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줏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5). '갈멜산'은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능력을 나타낸 곳이다. 그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위해 싸웠으며, 동시에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도 얻었다(왕상 18:2046). 머리가 갈멜산 같다는 것은 마음에 품은 모든 생각이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머리털'은 여전히 헌신의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능력은 왕을 안에 감금해 놓을 수 있다. 이 뜻은 믿는 이가 주님 앞에서 능력을 얻으면 주님으로, 그녀의 지배를 받게 할 수 있으며, 주님으로 그녀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초보적인 체험 가운데 있을 때에는 이러한 것을 체험할 수 없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아직 이러한 능력을 그녀에게 위임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참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구원을 받았을 때, 또한 헌신과 순복의 능력이 완전히 주님만을 위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또한 이렇게 주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하여 그녀의 머리카락조차 자주색으로 변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왕을 감금할 만한 능력을 그녀에게 주신다. 사실 왕은 결코 그녀의 감금을 받지 않으시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비록 왕을 감금할지라도 그것은 그분 자신의 뜻을 이루고 그분 자신의 약속을 이루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왕에게, "당신의 계획을 이루소서. 당신의 말씀에 따라 행하시기를 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좌의 권위를 행사하는지를 배워서 안다.

B. 주님이 개입하여 말씀하심(7:69)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6절에서는 이제 주님이 개입하여 말씀하신다. 성령의 말함은 그분의 뜻과 완전히 상합하므로, 주님은 앞 문장을 자신이 말씀한 것처럼 계속 이어서 말씀하실 수 있다. 그분이 성령의 말을 5절까지 들으셨을 때, 그분은 참다 못하여 개입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녀들이 말한 여자에 대해 직접 입을 여셨다. 이것은 하나의 개입된 환호의 찬미이다.

과거에는 어떤 성장과 전진도 없고, 어떤 완전함도 없으며, 어떤 성숙도 없으므로, 신장(身長)을 말하지 못했다(7). 이제 성인이 되었으므로 신장을 말한다. '종려나무'는 높고 곧으며, 성경에서 원래 주님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종려나무 같다는 것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신장의 충만한 데까지 자랐다는 뜻이다( 4:13). 비록 가지와 잎에는 열대의 태양이 내려 쪼이지만 종려나무의 뿌리는 생수의 근원을 접촉하므로 여전히 이상 없이 자란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설사 사막에서 큰 시험을 받더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영향받지 않고 자랄 수 있다.

"네 두 유방은 주렁주렁 달린 포도 같고"(다른 번역). 이것은 또한 그녀의 분량이 다른 사람을 위해 커진 것을 말한다. '유방'은 사랑을 위한 표시일 뿐 아니라 원래 젖을 먹이기 위한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사랑의 표시가 다른 사람을 먹이는 것보다 강하다. 그러나 성숙할 때 다른 사람을 먹이는 방면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여기는 먹이는 방면을 주의하므로, 주렁주렁 달린 포도 같으며, 사람을 공급하여 먹일 수 있으며,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있다.

8절부터 9절 전반부, "내가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이 뜻은 주님이 믿는 이의 신장에 따라 그녀를 꼭 껴안으신다는 것 같다. 그분은 믿는 이와 교통하려 하신다. 이제 믿는 이가 주님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것 같을 때, 그분이 믿는 이를 추구하시려는 것 같다. 이같은 몸의 생활이 있고 이같은 지체의 생활(가지의 생활)이 있으므로, 마치 주님은 믿는 이를 부러워하지 않으실 수 없으며, 믿는 이와 왕래하지 않으실 수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초기의 "내가 그분의 그늘 아래서"(2:3)와 얼마나 다른지!

주님은 여기서 그분의 마음이 특별히 만족한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그녀의 다른 사람을 먹이는 분량이다. 그분의 말은 하나의 축복이며, 이 분량이 여전히 넓혀지기를 희망하신다. 둘째는 그녀의 직감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직감의 작용이 아니라 이 직감의 과거의 접촉으로 인하여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향기가 어떠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코가 맡은 냄새가 불수감(佛手柑)의 향기였다면, 불수감을 먹어 보았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불수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안다. 그리스도를 먹어 본 사람은 그녀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네 입은 최상의 포도주 같은 것이니라". 이 뜻은 그녀가 내세의 권능을 미리 맛보았다는 것이다( 6:5). 왜냐하면 최상의 포도주는 틀림없이 천년왕국 안의 포도주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2:10,  26:29). 이 뜻은 그녀가 주님에게 이러한 기쁨의 입맛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주님과 동역함(7:9하-13)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주님이 9절 후반부를 말씀하실 때에 이르러서 여자는 주님과 완전히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님의 뒤를 이어서 이 포도주가 미끄럽게 그녀의 사랑하는 자 안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녀와 사랑하는 자가 미리 이 복을 맛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먹는 사람은 그들 두 사람뿐이 아니며, 많은 잠자는 사람들도 먹는다. 여기와 5 2절의 '잠자다'는 모두 나쁜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여기의 잠자는 것은 어조를 볼 때 전혀 거기에 나쁜 뜻이 없다. 또한 이 잠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사랑하는 자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이 잠은 자신을 향하여 잠자는 것으로, 자신의 느낌을 잃고 하나님만을 향하여 사는 것을 가리킨다.

10절에서 이제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소유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미 자신을 위해 독점하는 것을 제해 버렸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 같은데 만일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그것도 원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늘 주의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얻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그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했으며, 이것 한 가지로 그녀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만족했다. 이전에 혈기로 붙잡던 것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초기에 그녀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는 것은 부차적인 생각에 불과했다. 그 뒤에 비록 생각의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그녀의 체험이 충분히 깊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속하였다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참으로 영적인 추구에 있어서 많은 때에 '자아'도 이와 같이 역사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도 뜻밖에 '자신'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현재의 문제는 나의 기쁨이 아닌 그분의 연모(戀慕)하심이다. 나는 내가 여기에 사는 것이 그분의 연모함이 되는 것임을 안다. 내가 여기에 사는 목적은 연모할 만한 사람이 되어 연모하는 사람에 의해 연모되는 것뿐이다. 현재의 문제는 결코 내 느낌이 어떠한가가 아니며, 나의 득실도 아니며, 나의 일도 아니다. 현재의 문제는, 나는 그분의 것이며 그분의 연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족하다.

한 믿는 이가 이러한 단계에 이를 때,  '자아'가 끝없는 처리를 거친 후에, 그녀는 이제 주님과 동역할 수 있다. 그녀는 이제 이같이 주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개시할 수 있다. 비록 겉으로 볼 때에는 그녀가 시작한 것 같으나, 사실은 그녀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연합이 이같이 완전하므로 그녀의 행동은 항상 의지하는 것으로 변했다. 이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11). 이제는 그녀의 단독적인 행동이 아니고 주님 혼자의 행동도 아니며 '당신과 나'의 연합의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계속 볼 수 있는 것은 일에 있어서의 교통이다. 이제 그녀가 자신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동시에 그녀는 모든 좁고 작은 것들로부터 해방된다. 그녀가 이제 주의하는 것은 결코 나의 집회, 나의 일, 나의 교회, 나의 단체가 아니다.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들 곧 세상이다. 그녀는 이제 세상을 초월하는 안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안목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녀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도 흥미를 갖고 있다. 그녀에게는 소위 '자신'의 일이 없으며 사역의 '구역'도 없다. 모든 주님의 일이 곧 그녀의 일의 '범위'이다. 이제 모든 문제는 다 들의 문제이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동네'는 복수이다). 그녀는 이제 주님처럼 나그네의 성질을 지닌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집이 아니고 일종의 기거하는 곳인데, 이러한 기거하는 곳은 일정하지 않으며, 다만 동네에서 동네로 전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곳에서 길 잃은 양이나 상처 받은 사람을 찾으며 주님을 따른다. 주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안목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마땅히 기거하는 성질과 실제를 항상 지켜야 한다.

12절에서 이제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결코 자기의 포도원이 아니요 포도원들이다(여기의 포도원은 복수임). 이제, 그녀도 포도원들을 주의할 수 있다. 믿는 이가 일을 시작할 때, 그녀는 반드시 포도원들에 대한 유혹을 떨쳐 버리고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한 믿는 이가 자신에서 해방되어 나왔을 때, 비록 하나님이 특별히 위임하신 것이 조금 있고 하나님께 그것에 대해 특별히 책임져야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해방되어 포도원들을 주의해야 한다. 이제 주님의 일이 그녀의 일이며, 이전에 그녀의 일이 주님의 일이었던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무릇 주님을 위한 모든 것이 다 그녀의 관심사이다. 나는 그녀가 개인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람들을 견고케 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자신의 포도원을 지킬 줄 아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른 아침'(원문 참조)은 우리에게 그녀의 근면함을 보여 준다. 주님의 일에 있어서 이른 아침의 일이 적지 않다. 게으름은 영원히 주님께 속한 생활의 성질이 아니다. 반대로 영적인 사람만이 비로소 근면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활동은 혈기로부터 나온 것이나 또 어떤 종류의 피동적임은 옛 창조로부터 나온 것이다. 육체의 살아 있음은 하나의 극단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거절해야 하지만, 어떤 종류의 피동적임은 게으름의 별명으로서 참으로 옛 창조로부터 나온 또 하나의 극단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게으름과 근면은 다 시간을 그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구속하라는 것이 사도의 명령이다( 5:16,  4:5).


그녀와 주님이 포도원에 내려온 것은 "포도가 움이 돋아 꽃이 피었는지 석류 꽃술이 피었는지"를 보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주님과 함께 생명의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며, 함께 그곳에서 주의하는 것은 열매가 있으리라는 소망이다. 이제 그녀는 이미 자신에서 해방되었으므로 모든 믿는 이의 일이 다 그녀의 관심사이다. 아주 어린 믿는 이에게서 생명의 증거가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든가 혹은 결실의 소망이 보이면, 그녀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본다. 현재의 문제는 결코 이러한 사람을 누가 인도하는가가 아니며, 또한 그들이 우리 집회에 속한 사람인가의 여부도 아니며, 다만 그들이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이다. 일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이런 종류의 교통은 생명에서 주님과 완전히 연합된 후에 있다.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거기서'는 어디서인가? 곧 들 안에서, 동네 안에서, 포도원 안에서, 즉 주님의 일 안에서이다. 주님의 일 안에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겠다'는 것은 당신의 일 안에서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나타내겠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기묘한가! 과거에는 일이 항상 그녀로 마음이 나뉘게 했다. 돌보아야 할 일이 많으므로 주님의 발 앞에서의 교통을 잃었다. 어린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일은 그녀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주님과 거리가 생겼다고 느끼게 하는데, 이것은 다 불완전한 연합의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서 그녀의 체험은 이미 완전한 단계에 들어갔으므로, 그녀는 능히 주님과 주님의 일을 연합시키고, 세상 사람과 주님을 연합시키며, 형제와 주님을 연합시킬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녀는 주님이 일하시는 곳에서 주님을 향하여 그녀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이제 그녀는 비로소 그녀의 일을 그녀의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시로 삼을 수 있다. 이제 그녀는 일을 한 후에 자기가 어떤 일에서 주님의 어떠함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자책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13). 합환채는 사랑을 상징하는 식물로( 30:1416) 부부 사이의 연합을 나타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이 이러한 단계에 이를 때 합환채는 향기를 토할 것이다.

"우리의 문 앞에는". 이것은 아주 편리한 곳을 말한다. 비록 그녀는 동네마다 여행하지만, 이것은 결코 열매를 찾으러 멀리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 앞'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배해 주시는 곳으로서 열매가 있는 곳이다.

이제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똑같은 열매만이 아니라 각종 열매이다. 그녀가 아직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그녀가 인정하는 종류의 현상이 아직 어떤 사람에게서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아마도 결코 이 사람이 열매 맺었다고 시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아름다운 실과는 한 가지만이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을 안다. 새것이 있고 낡은 것도 있다. 그녀는 이제 각양의 사람이 결실하는 열매가 각양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이제 각종의 사람들이 영접하는 주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고, 그들이 얻은 새 창조도 하나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한 종류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참으로 빛이 결실케 한 열매는 모든 양선과 공의와 성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수확은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일의 결과는 본래 자기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동역했지만, 영광은 오히려 주님의 것이다.

 

 

6단락 육체의 탄식(8:114)
 

. 육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탄식(8:14)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

 

믿는 이의 주님과의 연합이 깊을수록 즉 이 여자가 도달한 것 같은 단계에 이르면, 그는 그의 겉사람 곧 육체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된다. 속 마음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같지만, 바깥 몸은 오히려 나날이 후패해 간다. 성령이 비록 반드시 죽을 이 몸을 살릴 것이지만 이 몸은 여전히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더욱 완전하게 나타나지만, 몸은 여전히 하나의 가시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진보할수록, 영적일수록, 하늘에 속할수록 그는 오늘의 완전함이 여전히 육체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비록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았지만, 그도 마음속의 탄식을 금하기 어려우며,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8:23). 우리가 육체를 따라 살 때에는 몸의 구속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이 실제적으로 완전케 될 때에야 비로소 겉사람과 속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게 된다. 몸의 어떠함이 비록 장애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하나의 약함이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몸의 구속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이것은 없어서는 안 될 은혜이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1). 이 뜻은, 당신과 내가 오늘보다 더 친밀한 위치에 있기를 갈망하며, 당신이 몸 안에서는 나의 오라비 같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의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가 이제 나타나기를 갈망한다. 그렇다면 내가 사람 앞에서 당신을 시인할 때, 또 사람 앞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표시할 때, 누구도 나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약함이 나와 함께한다고 느끼며, 내 마음에서 당신을 대하고 싶은 것만큼 당신을 대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처음에 내가 추구한 것은, 당신과의 입맞춤으로 당신을 얻고 당신이 나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오히려 당신과의 입맞춤을 사모하며 당신에게 사랑을 표시함으로 당신의 마음이 만족을 얻기 원한다. 그러나 여기에 육체의 간격이 있다. 당신이 아직 당신 자신을 나의 오라비같이 나타내지 않았다면,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마땅히 섬겨야 할 만큼 당신을 섬길 수 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 만일 참으로 그날이 온다면, 나는 오히려 당신을 이끌고 하늘의 예루살렘에 갈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영원히 은혜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맺은 모든 열매는 그날에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어 당신의 영원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 준 모든 영적인 열매 가운데 나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날에 이르러 오늘의 모든 석류는 다 향기로운 즙이 되어 당신의 마음을 만족케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당신께 드릴 수 있으며, 나의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3, 그날에 이르러 그분의 왼손이 나의 머리를 받쳐 올려 그분을 보게 할 것입니다. 그분의 오른손은 나를 안고 나로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을 대면케 할 것입니다. 이날을 내가 사모하며, 이날이 빨리 오기를 갈망합니다.

 

4,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녀는 이제 휴거의 소망 가운데 살며, 그녀는 이제 내 손안의 사람이다. 그녀의 현재의 느낌은 사적인 것이다. 너희들은 놀라지 말고, 육체의 손을 내밀어 간섭하지 말며, 그녀가 내 면전에서 깨어날 때까지 부디 기다려다오.

 

. 휴거되기 전(8:514)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 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그가 성벽일찐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찐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5, 이 책은 두 번 여자가 광야에서 올라온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광야에서 올라온 것은(3:6) 그녀가 어떻게 표류하는 생활을 벗어 버렸는가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그녀가 이미 주님의 죽음 안에서, 주님의 생명 안에서, 주님이 그녀에게 주신 은혜 안에서, 주님과 완전한 연합을 하기 시작했음을 본다. 그때로부터 그녀는 계속 전진하여 완전히 광야의 생활을 벗어났다. 비록 나중의 체험 가운데에서 한두 차례 주저한 곳이 있지만, 그러한 주저함은, 우리가 감히 당연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표류하는 생활은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지나가는 것인데, 주님은 왜 여기서 또다시 그녀가 광야에서 올라온다고 말씀하는가? 그녀는 여전히 광야에 있다가 이제야 올라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광야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광야가 표류하는 생활일 뿐 아니라 세상적인 장소라는 것을 안다.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 광야가 있을 뿐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광야가 있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표류하는 광야를 벗어나야 할 뿐 아니라 육신적인 면에서도 이 세상의 광야를 벗어나야 한다.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주권을 잡으실 때, 우리는 심한 기복이 있는 생활을 벗어 버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휴거의 부르심을 들을 때, 우리는 세상의 광야에서 벗어나야 한다. 곧 그리스로의 십자가는 우리로 영적인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우리로 세상의 환경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두 번째 광야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적인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여기서 또 제삼자의 입을 빌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광야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라고 묻는다. 그는 여기에서 한 여자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광야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가까이 올수록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는 휴거는 결코 갑자기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과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한 것의 결과임을 본다. 휴거는 주님과 동행한 마지막 한 걸음에 일어난다. 사람이 본 것은 아마도 땅으로부터 하늘에 이르는 그 단계의 갑작스런 변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휴거의 마지막 걸음에 불과하다. 휴거의 시작은 결코 이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와 같이 하늘의 끌림을 받아야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에서 벗어나고, 한 걸음 한 걸음 세상과 더 멀어지며, 한 걸음 한 걸음 세상과의 분별에서 더욱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가 완전케 될 때에 이르러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이미 주님 앞에서 깨어난 것을 본다. 우리는 에녹의 휴거가 이와 같음을 본다( 5:22, 24). 우리는 결코 휴거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며, 갑자기 우리의 영성(靈性)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휴거의 준비는 오늘날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계속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계속 올라가고 올라가서 주님이 우리를 맞이할 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마치 자신은 힘이 없어 걸을 수 없는 것 같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는 곧 자신을 짐으로 여겨 사랑하는 자에게 지우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는 마치 그녀의 다리의 힘줄이 하나님에 의해 끊어진 것 같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는 마치 이길 힘이 없이 계속 광야의 노정을 걸어온 것 같다. 주님만이 우리를 예비하여 우리로 들림받게 하실 수 있다. 의지하는 생활이 적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그분만 의지하는 단계에 이르러야만이 성령으로 하여금 이같이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는'그녀가 누구인가 하는 기이한 말을 하게 할 것이다.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전에 더러운 죄인이었는데 은혜로 찾은 바 되고, 은혜로 부르심받고,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신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한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하나님의 관대함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대함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세 전의 계획과 선택 그리고 시간 안에서의 그분의 아들을 통한 구속과 성령의 역사를 포함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된 한 죄인을 찾았을 때, 그분은 그녀를 그리스도의 그늘과 보호 아래 두신다. 거기서 그녀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녀를 위해 수고하신다. 그녀가 깨어날 때, 그녀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깨어난다.

 

여기의 사과나무와 2 3절의 불수감나무는 사랑이 가득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 그녀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녀가 첫날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첫 번째로 본 것은 사랑이 충만한 그리스도이다. 그녀가 찾은 첫 번째 사실은 그녀가 사랑이 가득한 그리스도의 그늘과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본래의 어떠함이다. 그녀의 영성이 높고 깊을 때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녀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

 

6절에서 그녀가 자신의 본래의 어떠함을 보았을 때, 그녀는 겸손의 느낌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자신의 헛됨과 체험의 쓸모없음과 마음의 믿을 수 없음과 추구하는 것이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없음을 보게 된다. 그녀가 앙망할 것을 주님뿐이다. 그녀가 '끝까지' 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결코 자신의 '버티는' 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모든 영적인 온전케 됨이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사람들에게 계속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을 알았으므로 그녀는,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은 사랑하는 곳이며, ''은 능력이 있는 곳이다. "나는 당신이 나를 마음에 인같이 그렇게 영원하게 품어 주시고, 도장같이 그렇게 마멸되지 않도록 팔로 이끌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전에 제사장이 그의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백성을 품고 메었듯이, 당신이 오늘 마음속에서 계속 나를 기억해 주시고 팔로 나를 계속 부축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나는 나의 약함과 공허함을 알며,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주여, 나는 아무 의지할 데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기까지 나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라고 한다면, 다만 당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나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입니다. 오늘날 나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능력에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도 당신을 사랑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압니다. 이제 내가 당신께 바라는 것은,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입니다. 이전에 나는 나에게 아주 강한 힘이 있는 것처럼 당신을 붙잡았습니다(3:4). 그러나 나의 강한 붙잡음이 지극히 연약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내가 의지하는 것은 결코 나의 붙드는 능력이 아니고 당신의 붙드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말할 수 없고, 당신을 내가 붙잡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은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했는데, 누가 능히 사망을 흔들 수 있겠는가? 부모의 탄식, 아내의 눈물, 친구의 슬퍼함도 사람을 사망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다. 사망은 그것이 얻은 사람을 지키려 하고 단단히 가두어 두려고 하며, 풀어 주지 않으려 한다.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당신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므로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나를 사랑하신다면, 당신의 질투도 반드시 따라올 것입니다. 당신의 질투는 음부같이 잔혹하여 반드시 책망하며 온전케 되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으로도 나의 마음이 나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는데, 당신이 얻는 것이 많을지라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눈은 당신께 속한 사랑이 세상 사람에 의해 더럽혀지고 다른 사람에 의해 침략당하는 것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질투하시는 것은 당신이 태고 적부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0:5). 또한 당신의 사도도 일찍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질투를 말하지 않았습니까?(고후 11:2) 당신이 질투하신다면, 누가 능히 내 안에서 당신의 질투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내 안에서 능히 당신의 질투를 막겠습니까? 당신이 나의 모든 원수를 멸해 주시고 당신을 막는 모든 것을 제해 주시어 당신이 유일한 주가 되시고 만유의 하나님이 되시며 견줄 만한 사람이 없는 왕이 되셔야 당신을 만날 때까지 내가 지키심을 얻고 나의 정결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질투가 음부보다 잔혹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것이 음부보다 더 잔혹합니까? 비록 가장 아끼는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 가장 귀한 것일지라도 음부가 죄인을 받을 때에는 결코 당신의 아끼는 것, 당신의 사랑스러운 것, 당신의 귀한 것을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물이 음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애통해함이 그것의 마음을 약하게 할 수 없으며, 간청함이 그것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음부는 긍휼이 무엇인지 모르며, 체휼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음부는 동정함이나 어떤 느낌도 없습니다. 그것은 잔인합니다. 내가 만일 나 자신을 정결한 처녀와 같이 주님께 드린다면, 또한 만일 내 몸에서 어떤 것이 당신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당신은 어떤 것도 개의치 않고 당신이 완전히 승리하실 때까지 이것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비록 보내기를 서운해하는 친구, 친한 친척, 사랑하는 애인이 그곳에서 권고하고 애걸하며 눈물을 흘릴지라도, 당신은 어떤 것도 돌보지 않고 당신의 느낌만 돌보실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보호를 받습니다.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리라". 여호와는 본래 불과 같은 분이시다( 12:29). 그분의 사랑과 질투는 불과 같아서 그분이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태우신다.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 지나가는 것, 세상에 속한 것,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다 태워질 것이다.

 

7절에서 '많은 물'은 믿는 이가 거친 시련이다. '홍수'는 원수의 핍박이다.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의 불은 결코 시련 때문에 꺼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의 불결은 핍박으로도 엄몰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시련과 핍박은 내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 사랑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대치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일만 마디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당신의 사랑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나는 선지자의 말씀 전하는 것과 비밀을 분명히 아는 것과 각양의 지식과 온전한 믿음으로도 당신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모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자신은 여전히 멸시 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소유한 재물과 귀한 것의 일부분일 뿐, 이러한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대치하는 것은 멸시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더 많은 일과 더 바삐 수고하는 것과 더 힘든 봉사로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자신을 당신께 드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8, 이러한 주님의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주님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오히려 그녀보다 더 어린 사람을 생각했었다. 그녀의 작은 누이는 비록 생명은 있지만 믿음과 사랑이 아직 주님에 대한 정감이 생길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주님과의 연합은 매우 완전하므로, 그녀는 주님 앞에서 그녀 안의 모든 느낌을 자유롭게 토로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두 유방이 없구나 그녀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 우리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꼬?" 그녀는 아직도 무엇이 사랑의 생활인지를 알지 못하는데 결국 어느 날 그 영원한 애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녀를 이끌어 사랑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우리는 그녀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명으로 말하자면 작은 누이이고, 사랑의 생활로 말하자면 그녀의 두 유방은 아직 자라지 않았다. 이러한 무리의 사람은 사랑어린 관심과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녀의 이러한 상태에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청혼을 받는 것은 믿는 이의 생활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마음대로 거절할지 모르지만, 사랑에 대한 주님의 요구는 모든 믿는 이에게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누이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그녀는 이제 마음으로 항상 염려하면서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 대해 주님과 상의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와 같이 주님의 뜻 가운데 살므로 이제 '우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관심하는 것이 주님이 관심하시는 것임을 알므로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이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므로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연합은 이미 완전하고 나눠짐이 없으므로 기도하는 것도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가 성벽일진대"(9). 만일 그녀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 있어서 성벽과 같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어떤 것과 분별을 갖게 하고 간격이 생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 위에 은 망대를 세울 것'인데, 즉 구속으로부터 얻은 모든 높고 귀한 것을 다 그녀 위에 세울 것이다. 그녀가 만일 이미 성령을 의지하여 분별과 격리의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구속의 열매를 그녀 위에 더하여 세워야 한다.

 

만일 그녀가 ''이라면,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그녀를 두르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사람의 생명을 그녀에게 더해 주어야 한다 (나무는 인성이며 백향목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인성이요 영광의 인성이며,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사람의 생명이다). 그녀가 하려는 이 모든 것은 결코 그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그녀와 주님이 함께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말은 비록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만, 오히려 주님의 마음의 뜻을 대표하고 있다.

 

"나는 성벽이요"(10). 나는 이미 분별된 사람이다. 주님은 이미 나로 하여금 모든 깨끗하지 않은 것과 세상에 속한 것과 평범한 것에서 분별되게 하셨다.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나의 믿음과 사랑이 세상과 분별되는 근거이다. 주님은 이미 나를 세우셨고, 나의 두 유방은 망대와 같이 자랐다. 내가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야 하나님 보시기에 평안한 자 같은데 그 뜻은,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나는 안식하기 시작하는 사람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강의 생활은 분별의 생활에 근거하며, 믿음과 사랑의 성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간단하게 간증을 하는데, 거기에 자만하고 자족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녀는 자기가 성벽이라고 자랑할 수 있고 두 유방이 망대와 같다고 자랑할 수 있으나, 다만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평안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할 뿐이다.

 

11절에서, 믿는 이가 들림받기 전에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하게 하는 또 한 가지는 곧 일에 대한 보상이다. 솔로몬은 지키는 자들에게 맡긴 그의 공장, 곧 그의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일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영원히 종의 위치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그분의 사업을 지킬 뿐이다. 그분이 오실 때, 그분이 우리에게 위임한 모든 것은 여전히 그분의 것이다.

 

'바알하몬' '많은 사람의 주()'란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주님은 솔로몬과 같이 모든 것의 주()요 또한 우리의 주()라는 것을 보여 준다. 솔로몬의 상례(常例)는 지키는 사람이 실과를 얻는 것이지만, 그가 얻은 실과를 위해 그는 솔로몬에게 은 일천을 바쳐야 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지킨 것과 관리한 것과 물 준 것으로부터 얻은 열매를 우리의 보상으로 삼게 하신다. 주님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는데,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에 대해서도 보상을 받을 것이다( 10:42).

 

"그 가운데의 실과를 위하여 필히 일천 세겔의 은을 내야 한다"(다른 번역). 솔로몬에게도 그의 몫이 있다. 일천의 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반드시 계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9, 마태복음 25장과 많이 다르다. 거기에서는 우리의 은사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여기의 은 일천은 모든 지키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마땅히 회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최저한도의 요구, 즉 주님이 모든 믿는 이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음을 안다. 이 요구가 곧 여기의 은 일천이다.

 

12절에서, 여자는 이제 많은 지키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별해 낸다. 그녀는 솔로몬을 대신해 포도원을 지키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다. 솔로몬이 일찍이 그녀에게 포도원을 주었으므로, 그녀에게는 자기의 포도원이 있었다. 현재 포도원이 그녀 앞에 있다는 것은 이 포도원이 그녀의 것이라는 뜻이며( 13:9, 참조), 또한 그녀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의에 따라, 지키는 사람은 모두 솔로몬에게 은 일천을 내야 하는데, 사랑을 따라 그녀가 행한 것이 율법을 따라 행한 것보다 더 적단 말인가? 아니다. 그녀도 솔로몬에게 은 일천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봉사를 보는데, 어떤 것은 율법을 인한 것이요 어떤 것은 사랑을 인한 것이며, 어떤 것은 두려움 때문이요 어떤 것은 감사 때문이며, 어떤 것은 본분 때문이요 어떤 것은 사랑함 때문이다. 그녀는 비록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며,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고, 단지 본분에 따라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다르지만 그녀는 결코 주님이 그녀의 본분에 따라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적게 행할 수 없다.

 

솔로몬이 얻은 것이 있을 뿐 아니라 그를 대신해 실과를 지킨 사람도 얻은 것이 있다. 그녀를 도와 일한 모든 사람에 대해, 그녀는 그들이 마땅히 얻어야 할 영광과 칭찬을 그들에게 돌아가게 했다. 그녀는 그들이 마땅히 얻어야 할 분깃을 탈취하지 않았다. 부디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동역자들의 영광을 빼앗지 않기를!

 

그러나 그날에 주님이 그분의 일꾼에게 상을 주실 때, 그녀 자신도 실과 지키는 사람 안에 포함되어 은 이백을 얻을 것이다. 공의에 따라 그녀는 실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은은 결코 아니었다(1112). 그러나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다 주님의 일을 상업적으로 여기지 않아야 하며, 주님도 그녀의 상을 상업적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녀가 마땅히 얻어야 할 실과 외에 주님은 그녀에게 다른 영광도 주신다. 심판대 앞의 문제는 마태복음의 그 노선과 상합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사랑이지 결코 책임이 아니다. 일과 상의 문제는 본래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으나, 성령은 오히려 이것들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책임의 안목에서 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안목에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과 완전히 상합된다.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13). ''는 주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동산'은 복수이다. 그분은 그녀의 동산에 거할 뿐 아니라(6:2) 또한 많은 동산에도 거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는데, 완전히 그분을 따르는 사람의 마음에 거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이 기뻐하는 모든 자의 마음에도 거하신다. 이제 여자는 그분을 이렇게 부르면서 그분에게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고 말한다. '귀를 기울인다'는 뜻은 모두 그곳에서 듣는다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제 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녀들은 이미 처리를 거쳤으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듣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안다. 그녀들은 이미 빨리 듣고 더디 말해야 하는 것을 알았다. 그녀들과 그녀는 이제 다 이전같이 그렇게 말이 많지 않고, 약간의 체험이 있어도 끊임없이 그녀들과 주님과의 상황을 말하지 않는다. 이제 이러한 것이 이미 없어졌다. 이제 그녀들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하기를 좋아함으로 말하지 않는다. 무릇 자질구레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다 땅에 속한 생명이 그곳에서 주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들은 다 듣고자 하며,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그녀들의 생명이 주님의 가르침에 있으며, 그녀들의 일이 주님의 명령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들으며,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스스로는 움직일 수도 없다. 주님의 음성이 없으면 계시가 없고, 빛이 없으면 지식이 없다. 믿는 이의 일생은 다 주님의 음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주여, 우리가 듣기를 기다릴 때에 주님이 나로 들을 수 있게 하소서. 구하면 얻을 것이고, 찾으면 찾을 것이며,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였으니, 당신이 나로 듣게 하시고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여호와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 힘있게 들릴지라도 내가 듣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이 나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이것만이 유일하게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나를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녀는 이제 이미 공과를 배웠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이러한 가장 깊이 있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14, 여기의 말과 2 17절은 같은 것으로, 거기에도 이와 같은 기도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가리키는 일은 결코 같지 않다. 우리는 이 책에서 어떻게 광야가 두 번 언급되는가를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주님의 오심도 '산에 있는 암 사슴과 어린 사슴'(다른 번역)과 같다는 것을 두 번 말한다. 그분이 첫 번째로 산에 있는 것은 믿는 이와 그분과의 교통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그분이 어떻게 믿는 이와 완전한 교통을 갖고자 하는가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가 아직 지나가지 않고 날이 아직 새지 않았을 때, 곧 오늘날 주님이 아직 강림하지 않으셨을 때이다. 거기서 주의하는 것은 교통이므로, 우리는 그분이 베데르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분리'가 다 완전히 지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여기의 이 '오다'는 장래의 문제로 아마도 매우 가까운 시기이지만, 누구도 언제인지는 모르므로 2장과 같이 시간적인 제한이 없다. 여기서는 교통의 문제가 아니므로, 산도 결코 베데르산이 아니고 향기로운 산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금으로 수놓은 세상이 있게 되는데 마치 향기로운 산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여자의 체험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들어가 흐르면 흐를수록 깊어지지만 더 이상 자취는 찾을 수 없는 것 같음을 본다. 이제 그녀가 소유한 모든 것은 세상에 남겨놓고 몸만 남아 있을 뿐이며 마음은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부르짖음을 발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당신이 오실 때 암사슴이나 어린 사슴과 같이 빨리 오소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암사슴이나 어린 사슴이 향기로운 산에서 어떠하듯, 당신이 오실 때에 당신도 당신의 왕국 가운데 강림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랑이 비록 완전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있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오실 때 참으로 '믿음은 보이는 것으로 변하고 찬미는 간구를 대신하게 됩니다'. 사랑은 그늘이 전혀 없는 완전한 극치에 이를 것이고, 죄 없는 상태에서 주님 앞에서 그분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입니까? 그러므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