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원,영적성장(New)

예수님의 첫번째 가르침이었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나다나엘(구 요나한) 2024. 5. 25. 10:11

모든 기독교 교리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간이 되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첫번째 가르침이었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일 것이다!

 

 

1.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들은 생명유지를 위하여서는 물과 공기가 필수적이다. 육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물과 공기라는 환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함과 같이 우리 영적 생명을 위하여서도 영적인 물과 공기가 필요하다. 물은 말씀을 그리고 공기는 성령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이 두 가지 원소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은 물(수면)위를 운행하시었다( 1:2). 역사의 시작에서 물과 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에 해당하는 히브리음은 루왁(Ruwach)으로서 공기, 호흡, 바람, 영이라는 뜻을 갖고있다. 이와 같이 물과 공기는 우리의 육적생명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세계와도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셨다. 물과 성령의 만남이었다. 침례요한은 물로만 세례를 주었지만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주님의 의하여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여호수아에 의해 약속의 시대가 시작됨). 물과 성령의 만남에 대한 예를 하나 더 들고자 한다. 홍해에서 다시 물과 성령의 마주침의 역사가 있었다. 모세가 홍해바다 앞에 서서 지팡이를 들자 동풍이 불어 바다는 갈라지고 이스라엘인들은 물을 건너게 되었다. 14:21에서 사용한 동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창 1:2 '하나님의 영'과 동일한 '루왁'이었다. 즉 그 바람은 성령이었던 것이다.

 

1:3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을 어두움과 나누시었다. 이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두 광명(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번 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는데( 1:18) 이 때의 빛은 자연의 빛이었다. 이와 같이 빛에는 영적인 빛과 자연의 빛이 있다. 물론 영적이 빛이 먼저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중요한 3 원소는 (루왁: 공기)임을 알게 되었다. 3 원소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3 원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1).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1:14). 그리고 하나님은 이시며( 4:26) 또한 이시다(요일 1:5).

 

은 말씀을 의미한다( 5:26). 영적인 물(말씀)이 먼저이고 궁창의 물이 나중에 있었다. 성령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영이 먼저 있었고 그 후 공기가 있었다. 공기()는 물이 변형된 모습이다. 물과 공기가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또한 요일 1:5에서 하나님은 이심을 증거한다. 사탄도 빛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지만 그 빛은 가짜 빛이다(고후 11:14).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은 어두움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물과 공기 안에서 살고 있으며 또한 이 환경에서 밤과 낮이 연속된다. 빛과 어두움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명뿐만이 아니라 어두움까지도 창조하셨다( 45:7).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모세'라는 이름의 뜻처럼 물에서 나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다. 나무도 흙에서 나왔다. 나무도 생명유지를 위하여서는 '물'과 '공기'와 '빛'을 필요로 한다. 에덴동산의 많은 나무들중 중앙에 서 있는 한 나무는 주변의 나무와 달랐다. 그 나무는 생명나무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 나무를 먹으면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22).

 

예수님은 진정한 생명나무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 첫 아담이 범죄함으로서 우리는 생명나무로부터 격리가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참 생명나무로 이끌어 주셨다.

 

참 생명나무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죽음을 통과한 아론의 지팡이처럼 싹이 나서 그 가지가 이방으로 뻗어 많은 열매를 맺었다. 십자가로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거져 주시는 생명수로 인하여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 11:30 에서 우리 또한 주변의 영혼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생명나무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생명의 실과를 맺기 위하여서는 깊은 뿌리로부터 물(말씀)을 올려야 하며 부단한 호흡(기도)을 통하여서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빛(계시)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러한 영적 광합성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실과를 맺게 된다( 15:8). 그리고 나무는 크게 자라야 한다. 왜냐하면 큰 나무가 되어야만 그 나무는 자신이 지고갈 십자가의 목재로 사용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 하늘과 땅 중간에 서 있다. 2,000년 전 갈보리 산 위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분명 하늘과 땅 가운데 서서 중보의 역할을 다 하였던 것이다. 그 분은 그 나무 위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생명을 마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두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10:38). 그 당시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의미를 제자들도 알 수가 없어 뿔뿔이 다 흩어졌던 것이다. 그 보혈은 영원한 언약을 위한 중보의 피( 13:20)이었으며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언약의 피였던 것이다( 26:28). 물로 우리의 더러워진 몸을 씻을 수가 있는 반면 우리는 주님의 피로써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옷을 하얗게 씻을 수 있다.  

 

주님의 사역은 '물'과 함께 시작이 되었다. 그 분의 공생애는 요단강에서의 침례로 시작이 되었으며, 지상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이 홍해(침례)를 건넌 후 광야에서의 첫 번째 기적이었던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사건과 연결이 된다( 15:25). 그리고 주님의 첫 가르침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교리이었다. 이 교리는 실로 기독교의 수 많은 교리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가르침에 대하여 니고데모와 같이 혼동을 하고 있으니 매우 애석하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중요하듯이 모든 가르침의 기초가 되는 이 교리를 자세히 알아보자. 예수님께서 거듭남을 설명하셨을 때 모태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 비유는 거듭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아기의 생명은 모태에서 시작한다. 40주간의 태아기(광야에서 40년간 물의 기간)를 지난 후에 아기가 태어남으로 눈이 뜨여져 세상에 있는 사물을 보기 시작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그리고 이 영적인 생명도 모태의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이 기간은 물의 기간으로써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시기이다(벧전 1:23).

 

<벧전1:23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즉 거듭남은 말씀으로 양육받음의 결과이고 거듭나는 시기는 물의 기간을 졸업할 때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셨다. 즉 물에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있으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2. '물'세례

 

침례는 새로운 믿음의 삶을 시작한다는 믿음의 외적인 표시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구속함을 받았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의 티켓이고 침례는 그 티켓을 외적으로 보여줌과 같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널 때 모두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고전 10:1-2). 구름의 주성분은 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함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의 죽음과 연합하였음을 의미하고, 뭍으로 올라옴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되었음을 뜻한다. 뭍으로 올라 온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는 광야생활이 시작되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영적인 거듭남을 말씀하셨을 때 모태의 비유를 사용하시었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적생명의 성장과정은 영적생명의 성장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모든 육체는 모태 안의 물의 기간을 거쳐야 하며 태어남으로 호흡이 시작된다. 물에서 살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은 큰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모태의 기간을 거치지 않은 아이는 있을 수가 없다. 아기는 모태에서 양육이 되어지며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준비가 다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셨던 바가 이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기 위하여서는 모태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내가 나이가 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 갔다가 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인 '모태'의 참 의미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물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많은 크리스챤들도 니고데모와 같이 거듭남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다. ''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기가 잉태하자마자 태어나는 것(거듭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양육받는 물의 기간을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할 때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 5:17). 그러나 그 생명은 모태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곧바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말씀으로 양육되어지는 물의 기간(태아기)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아기의 태어남은 아기가 모태 안에서 양육되어짐의 결과이다.

 

영적인 거듭남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짐의 결과이다(벧전 1:23). 태어나면서 아기가 사는 환경은 물에서 공기로 바뀌게 되는 것과 같이 크리스챤들도 거듭나면서 그 환경이 물에서 성령으로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과정은 한 이스라엘 자연인(영적도 포함)의 성장과정과도 유사하다. 광야의 이스라엘인들이 구름() 가운데서 받았던 보호와 인도는 모태의 양수 안에서의 양육과 비교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된 새 생명은 마치 모태 안에서와 같이 보호·양육 되어지는 것이다. 모태 안의 아기가 음식의 염려없이 어머니가 공급해 주는 양분으로 성장하듯이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매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다.

 

40주가 지나면 아기는 태어나듯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도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남으로 아기가 얻는 큰 변화는 세상을 눈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모태 안에서 양육되던 어린 신자는 어느 날 시력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예수의 피를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고 난 후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삶이 시작된다. 이 물의 기간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일은 만나(말씀)로 양육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느 날 아기는 태어난다. 이제는 눈에 시력이 생겨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이 때 환경은 물에서 공기로 바뀜으로 인하여 호흡이 시작된다. 이 후 아기는 할례를 거치고 또 음식이 젖에서 단단한 식물로 바뀌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단단한 식물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적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기간에서 진행되는 일은 성령으로 새롭게 하심으로서 ''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새 사람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3. 거듭남과 성령세례

 

물의 기간을 나오면서(born out of water) 출생을 하는데, 다시 거듭 강조하지만 거듭남(출생)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3: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보아야 하는데, 이 보는 것이 먼저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을 한 후에는 담 넘어 피어 있는 꽃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나비로 태어난 후로는 이제 땅에 속한 채소나 나무의 잎을 먹기를 중단하고 하늘의 향기를 담은 꽃의 꿀을 먹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거듭나기 전에는 땅에 속한 것을(3:2-5) 즐겼지만 거듭난 신자는 하늘나라를 보기 시작함으로 하늘의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꿀을 먹고 있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로부터 당연히 꽃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을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그리스도의 냄새가 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당신은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이다.

 

 

4. 성령의 새롭게하심

 

디도서 3:5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쫓아 ①중생의 씻음②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라는 말씀이 있다. 중생의 씻음이란 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 다음 단계인 성령으로 새롭게 하심이란 무슨 뜻인가? 4:22-24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물에서 나온 자는 이제 성령의 역사로 의와 거룩함을 입은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 아기는 태어난지 8일 후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그 아기는 그 때부터 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할례의 참 의미는 골 2: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물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벧전 3:21>

 

 

'그리스도의 할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다. (골 2:11)

 

바울사도는 다음 장에서 이를 다시 설명하였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3:2-5) 할례를 받은 아기가 참 이스라엘인으로 인정되었듯이 우리도 육적인 정과 욕심으로 벗어나야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참 크리스챤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부모의 말에 순종하기를 원할 뿐이다. 이제는 딱딱한 식물도 소화해 낼 수 있다. 한 성숙한 크리스챤이 되기 위하여 이제부터 부딪히는 모든 환난과 시험을 싸워 이겨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을 갖고 출애굽을 하였건만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를 못하고 다 광야에서 멸망하였다. (마치 임산중인 아기가 사산으로 유산으로 양수의 기간에서 사망하듯이...) 만약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을 하기 전 그들이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이집트에서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크리스챤들이 출애굽시의 이스라엘인들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쫓아 순종의 삶을 살지를 않고 불순종의 삶을 살기 때문에... 광야 이스라엘인들과 같이 교회광야에서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는 자는 적으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무슬림과 같은 이교도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셨었다. 이 말씀은 또한 2,000년 전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5. 거듭남의 증거

 

우리는 종종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나는 몇 년, 언제 거듭났다"고 하는 간증을 듣곤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거듭난 자들에게는 거듭남의 증거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기로부터 볼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호흡이 있으며, 둘째로 무엇이든지 먹고자 하는 왕성한 식욕이다. 엄마 뱃속에서는 만나를 거저 쉽게 먹었으나 출생이후로는 악을 써가며 먹을 음식을 찾는다.

 

즉 거듭난 자는 ① 하나님과의 호흡(기도)이 시작되고, 영적인 음식에 배고픔을 느낀다. 만약 주변의 어떤 형제로부터 말씀을 갈급하는 식욕을 볼 수가 없다면 그는 아직 거듭나기 이전인 물의 기간에 속해 있던지 아니면 그가 거듭나긴 하였어도 병든 자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병에 걸려 있는 아기는 도무지 잘 먹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한 크리스챤이나 장성한 자는 더 많은 양의 음식과 다채로운 음식을 필요로 한다. 아기의 정상적인 성장을 위하여서 어느 때가 되면 아기의 음식은 젖에서 단단한 식물로 바꾸어 주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12:14 에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하면 거룩함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티켓이기 때문에 그렇다. 딤전 4:5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하나님나라를 보기 시작한 후에는 거룩한 그 나라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하여야 한다. 한쪽 발만 사용하여 그 곳에 도착하기란 역부족이다. 마치 두 날개를 동시에 또 균형있게 사용하여야만 새가 날 수가 있음과 같이 두 발을 똑같이 사용할 때 우리는 걸을 뿐만이 아니라 뛰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왼쪽 발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오른 쪽 발이 기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두 발로 달려나감으로 거룩함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마음과 생각에 묻혀 있는 더러움을 발견할 수가 있고, 이 더러움을 회개의 눈물로 씻어 내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깨끗한 양심으로 나설 수가 있는 것이다(24:15-16).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거듭난 자가 가지는 거듭남의 첫번째 체험은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좁은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좁은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좁은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은 성령님께서 주신다. 출생한 아기가 쉼이 없는 호흡을 시작하며 음식을 향한 배고픔을 호소하듯이...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한 거듭난 자들도 말씀과 기도로 좁은 길을 걷기 위한 영적 에너지를 부단히 채워야한다.

 

그 길을 어느 정도 가게되면, 거듭남의 증거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보이기 시작한다.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의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가 있게된다. 이는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박는 고통을 수반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듯이 우리도 자신의 옛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게 된다. 십자가로 처리된 사람은 그 죽음의 증거가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그리고 옥합이 깨어지고 향기가 피어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도 주변으로 퍼지게 된다.

 

농부가 본격적인 밭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과거의 땅을 갈아 엎고 땅을 고르며 작물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돌들을 뽑아내는 준비작업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의와 거룩함을 열매맺는 마음의 농사를 우리에게서 경작하시기 전에도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거듭남의 증거인 육체의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마음의 밭이 기경되어 농사 준비가 완료되는 곳에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농사의 끝에서 물과 성령의 거듭남의 결과인 의와 거룩함의 열매가 맺어진다.

이 소출된 열매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농사를 지으신 농부이신 아버지의 것이다. 주님은 참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다. 가지로부터 맺혀진 성령의 열매는 주인이신 농부의 식탁에 올려진다. 농부 아버지께서는 열매를 소유하시고 농사의 결과물에 흡족해하신다. 가지는 나무에 꼭 달라붙어 열매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요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빌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