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모아’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에겐 하늘이 열리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가 주어졌다. 그가 영으로 하늘에 올라가 계시를 받았을 때(계 4:1), 그는 그에게 주어졌던 계시의 대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지만..., 유독 짐승에 관한 계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계 17:7~8).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을 기준으로하여 1)과거와 2)현재 그리고 3)미래의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계 1:19).
미래에 관한 기록은 계6장~계22장까지인데…, 이 기록은 6장에서~11장에서와 같이 시간순으로 기록된 제 1부와 12장~22장에서와 같이 (제 1부의 사건을 주제별로) 다시 반복하여 기술한 제 2부로 나누어진다.
다시 반복하여 기술하여야 한다는 근거는 계 10:11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반복하여 설명을 하여야 하는 이유는… 작은 책을 먹었기 때문이다. 먹음으로 인하여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알게된 내용을 다시 상세한 설명으로 전하는 책임이 그에게 생기게 되어... 사도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부터 다시 반복하여 설명을 하게 된 것이다.
책을 먹음으로 미래에 발생할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이해가 되었지만…,
짐승에 관한 것은 사정이 달랐다. 사도요한은 제 2부에서 미래에 관한 내용을 막힘이 없이 설명을 할 수가 있었지만… 짐승에 관한 부분은 책을 먹었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천사가 그를 돕는다.
짐승에 관한 중요한 설명은 사도요한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사에 의하여 주어졌다(계 17:7).
따라서 우리는 짐승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를 갖기를 원한다면…, 사도 요한의 설명(계 13장)은 물론이고... 천사의 설명(계 17:7~11)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된다.
짐승에 대하여
계 13장으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도요한은 짐승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 있는 총명한 자는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고 권고하였으며,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바꾸어 말해 볼 것 같으면… “지혜있는 자는 나(사도요한)처럼 짐승의 수를 세어보아라. 그럼 그의 이름으로부터 666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사도요한이 살던 당대에는 사람의 수를 세어볼 수 있는 방법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람의 이름이나 문자를 수로 나타내는 수비학은 고대에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수비학의 해석체계로서는 헬라어의 ‘이셉소피(isepsophy)’와 히브리어의 ‘게마트리아(gematria)’를 꼽을 수가 있다.
과거 로마황제들 가운데 ‘게마트리아’ 방식으로 사람의 이름을 세어보면… ‘네로’황제로부터 ‘666’이 계산되어 진다고 한다.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
천사는 계 17장에서 사도요한이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짐승의 비밀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하였다.
천사의 설명에 의하면 ‘일곱 머리’는 시대를 달리하며 등장하는 ‘일곱 왕’이지만… ‘열 뿔’은 짐승과 더불어 권세를 가지고 일시적으로 활동할 ‘열 왕’들이다.
짐승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point)는... 짐승은 ‘왕국(Kingdom)’이 아니라 ‘왕(King)’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이유로는 천사의 설명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계 17:10절에서 분명히 ‘일곱 머리’는 ‘일곱 왕’이라고 설명을 하였기에 우리는 달리 해석(일곱 왕국)을 하여서는 아니된다.
또한 다섯째 나팔이 불리울 때(계 9:1) 사단은 하늘로부터 땅에 떨어지고 무저갱을 열게 된다. 그 때 무저갱으로부터 황충이 올라오며… 그들 가운데는 임금이 있으니 그 임금은 무저갱의 사자(계 9:11)라고 불리운다. 히브리음으로 ‘아바돈’이라 불리우는 이 자가 바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며 ‘42달간 일할 권세를 받는 자’인 것이다.
일곱머리가 일곱왕이라고 해석하여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짐승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기 때문이다.
무저갱으로부터는 왕국이 올라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저갱은 ‘왕국’으로서가 아니라 ‘영(spirit)’이 강금되고 결박이 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계 20:1~3).
천사가 설명한 ‘일곱 머리’의 비밀
계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계 17: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계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계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천사가 요한에게 일곱 머리의 비밀과 또 열 뿔의 비밀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천사는 요한이 본 그 짐승의 역사적 4단계를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짐승은 첫째로 전에 있었다가, 둘째로 시방 없으며, 셋째로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넷째로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짐승은 앞에서 이미 생각해보았거니와 적그리스도, 혹은 로마제국을 상징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는 역시 국가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 개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 짐승이 “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로마제국이 요한이 살던 이전 시대에 있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그 짐승이 시방은 없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로마제국이 요한의 시대에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셋째로 그 짐승이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는 사실이다. 무저갱은 영물들이 갇혀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로마제국이 무저갱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넷째로 그 짐승이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로마로 알려진 정치적인 실제가 어떻게 장차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할 수 없고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전에 있었다는 말은 요한이 살던 이전 시대에 그와 같은 한 실제적 인물이 이 땅에 살았던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방 없다는 말은 그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던 시기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더군다나 창세기 42장 36~38절에 사용된 “시방 있지 않다”는 말도 직접적으로 죽음을 가리켰다. 그리고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는 말은 그가 지금 무저갱 속에 있지만 장차 그곳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사실, 다시 말하면 그가 재생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그가 땅에 살면서 영원히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운명은 곧 불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19:20 ; 20:10).
그의 존재가 전에 있었으나 시방은 없고 장차 올 자로 나타나는 것은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로 표현한 예수님을 아주 간교하게 모방한 것이라 하겠다(1:4,8 ; 4:8).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것을 보고 기이히 여겼던 것이다. 이런 놀람은 결과적으로 그 짐승을 경배하기에 이른다(13:12).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다. 창세로부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이며 결단코 그 짐승을 경배하지 않을 것이다.
17장 9절 말씀은 13장 18절 말씀과 의미를 같이하고 있다. 13장 18절 말씀이 총명있는 자가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고 하는 반면에 17장 9절은 지혜있는 자가 그 짐승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곱 머리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장소를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뜻한다.
(1) 장소를 가리키는 경우: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을 뜻한다.
땅의 머리는 산이다. 그것은 역시 능력이나 권세를 상징하는 인상을 풍긴다(민 21:20, 렘22:6, 암 1:2 ; 9:3).
특별히 우드워드 박사는 “요한이 살던 때에 로마는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라고 흔히 불렀다”라고 증거한다. 많은 고대의 로마 시인들도 역시 그들의 작품 가운데서 모라를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라고 읊었던 것이 사실이다. 요한이 살던 시대로부터 약 500년이 흘러간 다음에도 여전히 로마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로마를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로 명명했다는 사실을 혹자는 상기시킨다. 때로는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여인상을 새겨넣은 로마의 금메달이 발견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캡틴 스미드(로마 동전의 일종)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베스파시안 황제 시대의 동전은 로마가 일곱 언덕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잘 반영해준다. 동전의 이면에는 로뮤러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또 전면에는 타이버 강을 인격화시켜서 새겨넣었던 것이다(로뮤러스와 레무스는 쌍둥이로서 늑대의 손에 의해서 키워졌다고 한다. 그 중에 로뮤러스는 로마의 건설자이며 최초의 왕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역자주). 시인 호레이스는 그의 작품 가운데서 “일곱 언덕을 사랑하는 신들이여!”라고 읊고 있으며 또 다른 사인 티버루스는 “너희 황소들이여! 일곱 언덕 위에서 풀을 뜯거라”고 노래한 바 있다. 그 일곱 산들의 이름은 아벤틴, 콜리안, 에스퀼린, 캐피톨린, 팔라틴, 퀴리날, 비미날이다.
(2)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 이 일곱 산들은 역시 일곱 왕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왕은 백성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땅의 머리, 즉 산들이 현존적이며 계속적인 반면에 사람들의 머리는 일시적이며, 또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땅의 백성의 머리라는 이 머리에 대한 이중적인 개념은 이사야가 증거한 특별한 말씀, 즉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라”는 말씀을 논증하는 것 같다(사 7:8 ,9).
어떤 사람은 일곱 왕을 계속되는 일곱 가지의 정부 형태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성경 해석의 원리에 위배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이라고 한 것은 천사 자신이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다른 방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2) 성경은 결코 한 왕을 가리켜 한 정치체제를 상징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전주의 작가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상징주의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3) 왕에 대한 개념 그 자체가 벌써 한 형태의 정부를 상징한다(그가 전제주의 군주이거나 아니면 입헌주의 군주를 상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왕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형태의 정부를 각각 뜻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4) 서로 다른 로마의 일곱 가지 정부 형태를 찾아낸다 할지라도 어떻게 여기에 나오는 일곱 왕들이 계속적으로 뒤를 이어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일곱 형태의 정부들은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 간헐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만일에 일곱 왕들이 일곱 형태의 정부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열왕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들 역시 열 가지의 서로 다른 정부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로마의 정치사는 열 일곱 왕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6) 17장 9절은 여자가 일곱 산 위에 앉아 있다고 증거한다. 그 일곱은 각각 한 개의 산이다. 어떤 것은 산맥이고 또 다른 것은 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일곱 왕들 역시 단순히 일곱 왕들일 뿐이다.
(7)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머리”는 항상 인격을 가리킨다. 다니엘서 7장 6절에 언급된 네 머리는 곧 네 왕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네 왕조를 상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왕들만이 유별나게 일곱 왕조를 상징한다고 고집해야 될 이유가 있겠는가?
(8) 만일에 그 왕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콘스탄틴 대제와 같은 그리스도인인 황제들도 역시 여러 가지 정부 형태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12장 3절 의하면 일곱 머리가 용에게 달린 것이라 했으니, 이 모든 머리들은 사단에게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시 사단에게 속한 단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어떤 비평학자들은 로마를 열 두 가이사들이 통치한 바 있으며 특히 요한이 살고 있던 시대에 다스렸던 도미티안 황제가 열 두 번째의 가이사 황제였다고 말함으로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로마에는 오직 일곱 왕들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인용된 특별한 일곱 교회들만이 그 당시에 실재하고 있었던 교회들의 전부였겠느냐고 반문함으로써 그들에게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곱 교회들이 대표로 선정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곱 왕들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또 어떤 사람은 일곱 왕들이 대표로 선정되었다면 열 두 가이사들 가운데서 선정된 일곱 황제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여전히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와 같이 추론해봄으로써 그 일곱 황제들을 가려낼 수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첫째로 13장 1절에 기록된 “그 머리들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는 말씀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일곱 머리에 모두 참람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곱 왕들은 자신들이 신이라 자처하면서 자기들을 경배하도록 강요했던 그 오만한 황제들임에 틀림없다.
둘째로 17장 10절에 나오는 “망하였다”는 말이 비참한 죽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이다(삼하 1:19, 25, 27). 참으로 비참하게 죽은 왕들이 있다면 그들은 다음에 나오는 왕들일 것이다. 다섯 황제들, 즉 줄리어스 시이저, 티벨리우스, 카리큘라, 글라우디우스, 그리고 네로는 자신들을 신격화했던 황제들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신처럼 경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죽었으니, 어떤 사람은 살해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살했던 것이다. 그리고 도미티안 황제가 바로 여섯째 왕이 된다. 그는 요한이 살고 있던 때에 통치했던 왕이다. 그 역시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후에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곱째 왕은 장차 나타날 것이다. 여섯째 왕으로부터 일곱째 왕 사이에 얼마 만큼의 시간 간격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한다. 그는 요한이 살고 있던 때에 통치했던 왕이다. 그 역시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후에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다만 일곱째 왕이 나타나서 잠깐 동안 계속하여 다스리다가(17:10), 마침내는 그도 역시 살해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17:10 ; 13:3, 14).
여섯째 왕과 일곱째 왕 사이에 있는 간격을 종교적인 로마가 통치함으로써 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 왕으로부터 여섯째 왕까지 또 일곱째와 여덟째 왕이 이를 때까지는 정치적인 로마가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적인 로마를 대신해서 종교적인 로마가 권력을 뚜렷하게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 후에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왕이 없었다. 그르스도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긴 간격이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로마가 멸망하고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일정한 간격이 있을 것이다.
전 세계는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잘 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나타나자마자 일을 착수하여 삼년 반 동안에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 왕은 벌써 여덟째 왕을 영접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을 것이다.
본절 말씀을 17장 8절 말씀과 비교하여 읽어야 하겠다. 17장 8절이 그 짐승에 관한 역사적 4단계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17장 11절 말씀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17장 11절에 의하면 그 짐승의 역사적 4단계가 첫째로 전에 있었다가, 둘째로 시방 없으나, 셋째로 일곱 중에 속하고, 넷째로 멸망으로 들어갈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7장 11절에 나오는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 그리고 넷째 단계는 17장 8절에 언급된 그것들과 아주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17장 11절에 기술된 셋째 단계 역시 17장 8절의 그것과 일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짐승이 무저갱으로부터 나왔음에 틀림없다고 본다. 저가 여덟째 왕이지만 일곱 중에 되기 위해서 죽은 자로부터 재생한 일곱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가 일곱 중에 누구이겠는가?
(1) 그는 일곱째 왕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일곱째는 아직 세상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17:10). 그러나 짐승은 벌써 이 땅에 온 바 있다(17:8).
(2) 그는 여섯째 왕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여섯째는 요한의 때에 이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짐승은 요한이 살던 때에는 이 땅에 없었다(17:11).
그가 일곱째도 아니고 여섯째도 아니라면 그는 분명히 다섯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다섯 가운데 어떤 왕일까? 13장 18절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그가 네로 황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일곱째 왕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생각된다. 그리고 여덟째가 바로 그 일곱째의 몸을 이용할 것이다. 여덟은 부활의 수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주 예수의 부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주님은 스스로 부활하셨지만 그 여덟째는 다른 영혼에 육체를 제공하여 재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은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보다는 오히려 살아 있는 가이사 황제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은 역시 주를 영접하지 않았다. 장차 적그리스도가 가이사로 재생할 것인데 그 때에도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를 영접할 것이다.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이었던 것처럼 열 뿔 역시 열 왕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머리와 뿔은 서로 다르다.
첫째로 뿔이 머리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머리보다 더 작을 것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한 머리가 로마의 전체를 통치하게 될 것이지만 한 뿔은 로마에 예속된 한 분봉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한 시대에 오직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반면에 열 뿔들은 동시대에 다스리는 열 명의 분봉왕들이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셋째로 일곱 머리 가운데 아직 한 머리가 남아있는 반면에 뿔은 아직 열 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열 뿔, 혹은 열 왕들은 요한의 시대에는 아직 통치할 왕국이 없었다. 그러나 여덟째 왕국이 나타나면 그 열 왕들은 동시에 권세를 얻게 될 것이다.
짐승의 표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 ‘짐승의 숫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소개해 드린 바가 있지만 짐승의 표와 관련된 부분을 다시 정리하여 본다.
대체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666이 로마 황제 네로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어 성경에는 짐승의 표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 ‘차라그마(Charagma)’는 실제로 1세기에서 2세기까지 로마 제국에서 공식문서에 사용되었던 황제의 옥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데키우스 황제(249-251) 시대에는 제단에서 황제에게 경배하였다는 제사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상업 활동을 할 수 없었으니, 이 금령은 마치 (계시록 13장 17절을 연상시키는) 네로 황제 시대로 되돌아간듯 여겨졌다.
과거 로마 데키우스 황제의 시대에서는… 제단에서 황제에게 경배하였다는 제사증명서(Libellus, 라틴어)를 가지지 않고는 상업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금령은 마치 네로황제의 시대로 되돌아간듯이 여겨졌다고 한다.
장차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영이 일곱째 왕의 몸을 빌어 여덟째 왕으로 다시 등장하면… 그는 그가 과거에 그랬듯이 하나님의 전에 앉아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할 것이며,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의 우상에 절하게 할 것이다.
또한 과거에 황제에게 경배하였다는 제사증명서가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실제적으로 상업활동을 할 수가 없었던 것과 같이…, 장래에도 그(여덟째 왕)가 주는 짐승의 표를 오른손과 이마에 받지 아니하고는 물건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장차 상거래에서 이용될 짐승의 표에 대하여 짚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가까운 장래에 42달간 일할 권세를 받고 등장하게 될 짐승은 물건을 사고 파는데 있어서 짐승의 표를 오른손과 이마에 강제로 받게 할 것이지만…, “그가 상거래에 사용할 짐승의 표와 관련된 기술은 그가 등장하기 오래 전에 이미 개발이 완료될 것이고, 전세계의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도록 기술기준이 준비되고 또한 상용화 작업도 짐승이 나타나기 앞서서 미리 진행이 되고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혹자는 “짐승의 표는 장차 짐승에게 권세가 주어지는 42개월간에 주어지기에 현재 등장하고 있는 베리칩은 짐승의 표와 연관이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장차 짐승은 그에게 권세가 주어지는 42달간의 기간 동안에는 짐승의 표를 모든 자로 하여금 짐승의 표를 강제적으로 받게 할 것이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간과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짐승의 표와 관련된 기술은 그가 짐승임을 드러내기 훨씬 이전에… 이미 개발될 것이며 또한 등장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활에 필수적 형태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자들에게 짐승의 표는 주어질 것이고.., 표를 받은 자들은 식별되어질 것이며, 또한 이 표를 통해서만 상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이러한 매매형태는 컴퓨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베리칩에 대하여 우리의 우려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베리칩은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한 짐승의 표가 지녀야 할 특징들을 가장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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