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증

[스크랩] 워치만 니의 개인 간증

나다나엘(구 요나한) 2014. 1. 3. 15:30

워치만 니의 개인 간증 (1936년 10월 18일 복건 고랑여(鼓浪礖)에서)

 

구원받음과 부르심 받음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시는데, 어머님이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 나의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소홀히 여겼다. 때문에 어머님이 두 딸을 낳은 후 사람들은 어머니도 고모님과 같이 딸 여섯을 낳은 후에야 사내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어머니는 분명히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주님께 간구할 줄은 알았다. 그녀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1920년, 십 칠 세 때 구원 받았다. 구원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구출되는가의 문제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또한 나의 종신 사업과 연관되어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동시에 나는 또한 그분을 주로 영접해야 했다. 그분은 나를 죄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건지셔야 했다. 그 때 나는 구원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한쪽에 제쳐 놓고 구원만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한다면 이 두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 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지 않자니 또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여진 것을 보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런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나는 한면으로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구주를 보았다.

 

한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주님의 보혈이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음을 보았다. 한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 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내 일생 중에 첫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세 명이 과거 나의 동급생이었다. 그 중 위광희(魏光禧) 형제는 내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특이하게 행동하는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학생이었는지를 간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면으로 말한다면 나는 자주 학교 규칙을 어기는 학생이었고, 좋은 면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천부적인 총명을 주셔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일등을 했으며 나의 작문은 자주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그 때 나는 많은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자기 장래를 위해 계획하고 자신의 판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겼다. 내가 겸손히 말하거니와, 만일 내가 세상으로 나갔다면 아마도 큰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내 동급생들이 이 일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 받은 후 내게 많은 새로운 일들이 발생했다. 이전 나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나의 장래는 이미 끝장나고 포기되었다. 이 일이 다른사람에게는 쉬운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주 어려웠다. 이는 내게 많은 사상과 꿈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은 그날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구원받음과 부르심받아 주님을 섬기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내가 부르심을 받은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 한시간 동안 나는 나의 장래를 한 번 정함으로 영원히 정하였다. 나는 나를 구원하심은 한면에서 내 자신을 위한 것이며, 또 한면에서는 그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주님은 한면에서 나로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하셨고, 다른 면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역하게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전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장할 수록 내눈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이요 가장 비천한 일로 보였다. 그 당시 전도사는 대개가 유럽과 미주의 목사들에 의해 고용된 일꾼으로서 목사의 눈치를 살폈으며 매달 월급은 팔 구 불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는 전도할 뜻이 조금도 없었고 나는 전도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앗다. 그러나 오늘 내가 전에 비천하게 여겼던 전도의 직무를 택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듬어짐과 온전케 됨

 

구원받은 후, 나는 여전히 학교에 다녔지만 책에 대해서는 그리 큰 흥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소설책을 가지고 와서 교실에서 읽었지만, 나는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교실에서 열심히 읽었다. 나중에 나는 영적인 면에서 온전케 되기 위해 학교를 떠나 여자도 자매가 운영하는 상해의 성경 학교에 훈련받으러 갔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서 그녀는 아주 정중하게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녀가 나를 집으로 돌려보낸 이유는 내가 그곳에 거하는 것이자기에게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후에 나는 그 당시 나의 육체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잘 먹고 잘 입으려 했으며 아침에는 여덟시에야 일어났다. 여자도 자매는 나에 대해 주님을 위한 좋은 재목이고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나의 생활이 합당치 않음을 느끼고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때 나는 아주 낙심하여 장래가 암담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는 내가 구원받았는가를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고 많은 방면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또 많은 것들이 아직 처리받지 않았고 공과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주님이 이미 나를 구원하셨고 부르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낙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시인하나 한동안이 지난 후에는 진보하리라는 것을 믿었다. 

 

아직 영적인 추구를 계속하기에는 때가 일렀으므로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동급생들은 나를 보더니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나 나의 변화는 아직 철저하지 못했다. 때로 화를 내기도 하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때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 같으나 때로는 아직 구원받지 않은 사람같았다.

 

화수은 교사 아래서(Margeret E. Barber)

 

1923년에 우리 가운데는 일곱 명의 동역자가 있었는데, 나는 나보다 다섯 살 위인 한 동역자와 함께 인도했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에 동역자 집회를 가졌는데, 기타 다섯 사람들은 자주 우리 둘이 다투는 것을 들어야 했다. 그 때 우리는 다 젊었기 때문에 각기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하고 그는 내가 틀렸다고 말했다. 그 때 나의 육체가 아직 처리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자주 화를 냈다. 오늘(1936년) 나는 이거을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 나는 거의 웃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툴 때, 내가 틀렸다고 시인할 때가 많았지만, 때때로 그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나는 자신의 잘못은 용서하기 쉬었지만 남의 잘못은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요일에 우리는 서로 다투고서 토요일에는 나이드신 화수은 자매에게 가서 나보다 다섯 살 위인 그 동역자를 참소하였다.

 

내가, 『제가 그 동역자에게 어떤 일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그가 듣지 않으니 자매님이 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화수은 자매는, 『그가 너보다 다섯 살 위이니 네가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엿다. 『일리가 있든 없든 무조건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그렇다. 성경은 어린 자는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그렇다면 나는 할 수 없습니다.그리스도인도 이치에 따라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너는 이치를 따지지 말라. 성경은 어린 자가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성경이 왜 이렇게 쓰여졌는지에 대해 마음 속으로 화가났다. 나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낼 수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 다툼이 있은 후 나는 그녀를 찾아가 그녀에게 쓴 물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로 나는 나는 금요일 오후에 다투고 나서 저녁에 한바탕 울고 그 다음날 화수은 교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고통을 실토했다. 그녀가 나를 옹호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가지만 토요일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 한바탕 울게 되었다. 나는 내가 왜 몇 해 더 일찍 출생하지 않았는지를 원망했다. 언젠가 한번 다투고 나서, 나는 내게 좋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고하면 그녀가 반드시 나의 동역자의 잘못을 발견하고 나를 지지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개 동역자가 틀렸는지는 별 문제이다. 오늘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형제를 참소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다운가?』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러한 질문에 나는 정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 날 내 말과 태도가 확실히 십자가를 지는 사람 같지 않고 어린 양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연장한 동역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그 한 해 반 동안 나는 일생에서 가장 보배로운 공과를 배웠다. 나의 머리는 많은 이상으로 충만했었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적인 실제 안으로 인도하기 원하셨다. 그 한 해 반 동안 나는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오늘(1936년) 우리 가운데 오십 명의 동역자가 있다. 그 한 해 반 동안 순종의 공과를 배우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어느 누구와도 동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환경 가운데 나를 두시어 성령의 통제를 받게 하셨다. 그 십 팔 개월 동안 나의 주장을 내세울 기회가 없었고 나는 다만 울면서 고통스럽게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내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거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뾰쪽한 부분을 갈으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은혜로 나를 이끌어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이제 나는 연소한 동역자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의 연단을 견디지 못한다면,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없다고 말하겠다. 오직 온유하고 겸손하며 화평한 어린 양의 영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이다. 당신의 웅지와 큰 뜻과 재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 나는 이 길을 걸어온 사람이며, 나는 자주 나의 과실을 시인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문제는 옳고 그름에 있지 않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다운가에 있다. 교회 가운데 옳고 그름은 아무 지위가 없다. 계수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에 파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 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흘러 보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부담과 위임을 받음  

 

1921년에서 1923년 사이에 각지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부흥회 만이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이것만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목적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방적인 합일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고 하나님의 간증을 지키도록 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나의 몇몇 동역자들은 교회의 진리에 관하여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시간을 들여 사도행전을 주의깊게 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각 도시에 지방 교회들을 세우고자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때 이 빛은 내게 분명히 임했고,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빛이 임할 때 문제가 생겼다. 왜냐하면 몇몇 동역자들이 이 빛을 보지 못하고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요점들에 대해 관점을 달리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동역자는 열심히 부흥회를 열고 복음을 전파해야만이 그 일의 효과를 쉽게 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의 부담은 지방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으며 부흥회에 대해서는 비교적 냉담했다. 나보다 연장한 동역자는 자주 밖으로 나가서 전도 집회를 가졌다. 나도 때로는 속으로 내 자신의 부흥 전도집회를 열고자 하는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밖으로 나갈 때 나는 내가 받은 이상을 따라 사역했고, 그가 돌아와서는 내가 사역한 것을 다 뒤집고 그의 관념을 따라 사역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주 이렇게 하고 저렇게 했다. 사역에 대해 각자가 받은 빛이 다르므로 사역하는 방법도 달랐다. 하나는 전문적인 부흥전도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 교회를 세우는 길이었다. 주님이 나에게 보여 주신 것은 매우 분명했다. 머지 않아 그 분이 중국 각처에 지방 교회 들을 세우시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난 눈을 감을 때마다 지방 교회 들이 산출되는 것이 보였다....

 

주님을 섬기도록 나를 부르심에 있어서 그분의 중점은 각지에서 부흥전도집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성경 교리를 들려주는데 있지 않았다. 주님은 나에게, 그분은 각지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할 지방 교회 들을 세우고자 하시며 또한 그를 통해 지방적인 합일의 입장 위에 있는 합일의 간증을 나타내고자 하심을 보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은 교회 가운데서 기능을 발휘하며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얻고자 하시는 것은 단지 승리나 신령함 등을 추구하는 개개인이 아니라, 단체적으로 그분 자신께 드려질 영광스런 교회이다. 

 

성경을 순종하는 것과 전통을 버림

 

의문

 

다음은 1932년 12월 4일 상해에서 직접 진술한 것에서 발췌한 것으로 1933년의「 성경 강해 기록」제33기에  수록되었다.

나는 1920년에 봄에 구원받았다. 구원 받은 첫 해에 나는 교회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를 구원받도록 인도했던 그 자매는 나에게, 오늘날 교회 안에 이름뿐인 교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은극히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 또한 목사들(내가 아는)의 자질이 가장 낮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모금할 때 외에 평상시에는 목사들의 얼굴을 볼 수 업었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들이 아직 부흥되기 전에 우리 집에서는 종종 몇 테이블에서 마작판이 벌어졌다. 목사가 모금하러 올 때 식구들은 마작판에 놓인 돈을 그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그러면 목사는 그 돈이 마작판의 돈인줄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갔다. 이것을 보고서 나는 목사의 자질이 너무 낮다고 느꼈고, 그들은 돈만 있으면 족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이 외에도 나는 교회 안에 있는 교우들이 이름뿐이라고 느꼈다. 

 

침례

 

11921년 3월에 주님은 침례의 진리를 보여 주셨고, 교파에서 실핼되고 있는 약세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왜냐하면 그 몇주동안 성경을 읽음으로서써 나는 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그 분이 물에서 올라오셨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교파에서는 사람에게 세례를 줄 때 작은 접시나 대야에 물을 담아 세례를 주는데, 어떻게 물에서 올라올 수 있겠는가? 또 나는 어렸을 때 감리교의 감독에 의해 세례받은 것이 생각났다. 그는 차거운 물을 내 머리에 뿌리고서 커다란 두손을 내 머리에 얹었다. 나는 그가 좀 빨리 마쳐주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나는 참다 못해 울어 버렸다. 세례를 마치고 그 감도은 내게 세례 증서를 주었는데,그 안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의 서명도 있었다. 이것을 받은 후에 나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만일 나중에 내가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 세례증서가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대로 행했을 것이다. 다행히 후에 내가 구원을 받고서 내 생활에는 큰 전환이 있었다. 그 때의 세례는 내 어머님이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이다. 나 자신은 아직 주님을 믿지 않았었다. 그 때 나는 이미 어렸을때 내가 받은 세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세례를 받아야 한다면 성경대로 (물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올라오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

 

1921년 3월 28일 아침, 모친은 나에게, 『내가 침례받는 것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저도 침례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만일 침례를 받는다면 어디에 가서 받아야 하지?』『제가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복주에서 두 시간 정도 작은 증기선을 타고 가면 마웨이 라는 곳에 화수은 교사가 있습니다. 그분을 찾아가면 됩니다. 여자도 자매가 복건성에 왔을 때 바로 화수은 교사가 있는 곳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합니다.』모친이 언제 침례받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으시자 나는 날을 정하는 것보다 당일 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모친과 함께 즉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화수은 교사가 잇는 곳에 도착해서 우리의 의사를  그녀에게 알려주자 그녀도 찬성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 양지라는 시골에 가서 침례를 받았다.

 

이러한 침례로 내게 큰 전환이 있었다. 첫 번째로 나는 한 친구인 왕재 형제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바로 내가 구원받은 첫 해 동안 매주 목요일에 우리집에서 열렸던 사경회에서였다. 참석자의 대부분이 나이드신 분이었고 거기에서 나는 어린 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대화 할 만한 내 또래의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두세 주 후에 왕재 형제가 왔다. 그의 나이가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그와 교통하기 시작했다. 그 때 부터 나와 그 사이에는 왕래가 있었다. 침례받은 다음 날 나는 그에게, 『어제 나는 양지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전에 나도 남경에서 약세를 받았는데, 후에 하문(廈門)에 가서 한 형제를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침례의 진리를 알려주어서 고랑여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둘은 우리가 같은 빛을 본 것으로 인해 정말 기뻤다. 

 

둘째로 나는 우리를 인도했던 나이든 목사에게 알려주었다. 복주에서 그는 성경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사경할 때 그가 모든 것을 성경대로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알려주려고 찾아갔다. 그러나 내가 아주 뜨겁게 말하고 있는 동안 그의 태도는 오히려 매우 냉랭했다. 나는 그에게 침례가 성경적이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성경적이기는 하지만...이렇게 구애받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일 년간 사경하면서 그는 항상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침례가 성경적인 것이라면, 왜 그는 그렇게 구애받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는가? 오늘 한 가지 진리를 순종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가 전한 것에는 타협적인 것이 있음을 의미했다. 만일 한가지 진리에 있어서 그렇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교회에 관한 진리에도 다 순종해야 한다고 담대히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나는 그가 가르친 교회에 관한 교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사람의 권위(權威)는 다 한쪽에 제쳐 놓아져야 함을 알았고, 이후로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떡을 떼는 것

 

같은 해 (1921년)에 나는 성경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이름뿐인 교우가 많으나 성경에는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교회 안에 있다고 말했다. 오늘 많은 교파가 있지만, 성경에는 감리교도, 장로교도 없으며, 어떤 교파도 없다. 그러네 나는 왜 감리교의 교우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해야 하는가? 감리교의 감독은 우리 집안의 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인정(人情)과 교파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은 별개의 일이다. 나는 또한 목사 제도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보았다. 또 한 가지 일은 바로 집회인데, 이것도 역시 성경의 원칙대로 실행해야 함을 보았다. 이 일들에 대해 당시에 내가 얻은 빛은 작은 것이었다. 마가복음 8장의 그 장님이 처음에 사람을 보았으나 그들이 걸어다니는 나무같이 보였던 것과 같다. 조금 보기는 보았으나 그렇게 분명히 보지는 못했다.

 

1922년 상반기의 어느 날 오후, 나는 떡 떼는 문제에 대해 아주 어렵다고 느꼈다. 성경에서는 믿는이들이 마땅히 떡을 떼는 집회를 갖고 항상 주를 기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왜 일 년에 네 번(곧 사계절)만 떡을 떼는가? 또한 떡 떼는 집회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평상시 온종일 영화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종일 마작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내일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소위 성찬을 받기 위해 가는 것을 보고 내 자신이 거기에 갈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보았다. 나는 갈 수 없었다. 주님을 믿은 후부터 1922년까지 나는 소위 성찬을 받지 않았다. 나는 몇일 동안 성경에서 떡 떼는 일은 반드시 목사가 이끌어야 하는지와 안수받은 사람만이 떡 떼는 일을 주도할 수 있고, 안수받지 않은 사람은 주도할 수 없는지의 문제를 계속 상고하였다. 나는 많은 시간을 들여 상고해 보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 목사가 떡 떼는 일을 주도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일이다. 이 때 나는 곤경에 빠졌다. 성경은 항상 떡을 떼어 주님을 기념하라고 했는데, 나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목요일 오후의 사경회를 마치고 나의 친구 왕재 형제를 찾아가 대화를 가졌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항상 떡을 떼어 주님을 기념하라고 했는데, 나는 구원받은 후로 한 번도 떡을 뗀 적이 없습니다. 교파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함께 떡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그들은 목사가 아니고서는 떡을 떼는 일을 주도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당신도 목사가 아니고 나도 목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참되게 주를 믿은 사람을 한 곳에 모은다 해도 목사는 떡을 떼어 주러 오지 오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떡을 떼면 또 자격이 없다고 하니 좀 어려움이 있지 않습니까?』이때 왕 형제는 내 손을 잡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나에게도 동일합니다. 어제 저녁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온 밤을 지새우며 믿는 이가 떡을 떼야 하는지, 떡 떼는 일을 반드시 목사가 주도해야 하는 지에 대해 기도하고 상고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상고한 결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안수받은 목사만이 떡 떼는 일을 주도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서 나는 정말 주님의 인도가 같다는 것으로 인해 그분께 감사드렸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의 집회의 원칙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나는, 『 날을 택하는 것보다는 이번 주일부터 떡을 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작할 시간은 이미 정해졌으므로 장소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이 비교적 크기는 하지만 이 일을 아직 모친에게 말하지 않았고, 모친이 알게되면 우리 청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다. 왕 형제는 한 여학교 교실을 빌어 보려고 했으나 곧 그 학교가 이사해야 하는 바람에 좀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어디든 상관 없으니 그가 거하는 방에서 집회를 갖자고 말했다. 이렇게 결정한 후 금요일, 토요일 이틀간 나는 온종일 기뻤다. 왜냐하면 앞에 즐거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일 저녁에 나는 모친에게 왕 형제 집에 간다고 말했다. 모친이『무엇 하러 가느냐?』고 묻자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하러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날 저녁 우리 세 사람(왕 형제 부부와 나)은 조그만 방에서 함께 떡을 떼며 잔을 마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나는 이 일을 죽어도 잊지 못하고 영원 안에 들어가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저녁보다 하늘이 가까운 적이 없었다! 그날 하늘이 정말 땅과 가까웠다! 우리 세 사람은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날 비로서 우리는 떡을 뗌으로 주님을 기념하는 것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약세를 받았기 때문에 성찬을 먹은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빵은 좀 시고 포도주는 좀 달아요』라고 말했었다. 나는 신맛과 단맛을 기억할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러나 그날 비로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떡 떼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경배가 무엇이고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 때였다. 우리는 다른 할 말이 없었고 다만 찬미하며 은혜에 감사했다!

 

그 날 집회를 마치고서 우리는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어떤 교파는 사흘에 한 번씩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교통했다. 성경에 따르면, 항상 주님을 기념하라고 했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을 보면 당시 그들은 매일 떡을 떼기도 했다. 사도행전 20장 7절은,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주일 떡을 떼기로 했다. 그날부터주일마다 내가 병들지 않는 한, 혹은 집을 떠나 밖에 있거나 뜻하지 않은 장애가 없는 한, 항상 떡을 뎄다. 우리가 이렇게 실행한 지 얼마 안되어 모친이 이것을 알게 되었고, 다만 우리에게 『너희들 참 담대하구나. 그러나 나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씀했다. 몇 개월이 지나서 모친도 우리와 함께 떡을 떼게 되었다.

 

외부에서 점점 일들이 발생했다. 즉 어떤 사람이 니씨 집안의 몇몇이 침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감리교 전도사가 찾아와 이에 대해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침례받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만일 성경적이지 않다면 나는 당신이 소속해 있는 모임에 가서 내 잘못을 시인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경적이라면, 그것에 나는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할 말이 없었고 다만 『그래, 성경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게 구애받을 필요가 있나!』라고 했다. 한 가지에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면 모든 것에서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게된다. 나는 그것이 아주 이상하게 여겨졌다. 본래는 아주 좋은 친구였으나 이제 침례로 인하여 그들은 내게 냉랭해졌다. 그날 비로서 나는 주님을 순종하는 것이 무엇이고 주님을 순종하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또한 보통 사람들은 침례를 문제 삼지 않다가 어떤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침례를 받으면 문제 삼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파를 떠남

 

1922년 하반기에 나는 또다시 성경에서 한 가지 문제 곧 종파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내가 감리교의 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는가? 고린도 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이들에게 당을 짓지 말라고 권했다. 이는 그들이 각각『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속한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웨슬레가 바울보다 크다는 건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린도의 믿는이들이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말함으로 바울의 책망을 들었다면, 각자가 나는 장로교에, 나는 감리교에, 나는 침례교에 속했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 때 나는 한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나를 춘계 수련회에 대표로 참석하도록, 거기서 내게 어느 교파에 속했는지를 등록 용지 자료난에 기입하라고 했다. 나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들은, 『어쨌든 당신은 어느 교파의 교인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답변하기를, 『아닙니다. 나는 다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나에게 어떤 교파의 교인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그 때 나는 내 입으로 내가 감리교에 속해 있음을 시인하지 않기로 했다. 누가 나에게 뭐라고 물어도 나는 항상 『나는 다만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어느 날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문제 곧 내가 단순히 교파를 떠날 수 있는지를 신중히 고려했다.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으로부터 한 백화점이 파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백화점은 몇몇 사람이 동업하여 연 것이었다. 평상시 그들이 그 백화점에 관한 일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을 지라도, 언제든지 그 백화점이 파산하면 아무도 그 결과를 피할 수 없음으로 파산한 것에 대해 책임을 함께 져야한다. 나는 이 일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어 내가 그 백화점과 같은 감리교의 한 교인임을 생각했다. 비록 내가 감리교의 모든 제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명의상 나는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일 내가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다만 행위에서 감리교인이 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이름조차도 감리교에서 삭제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분명한 이상, 또 당시에 모친이 내 이름을 감리교에 넣었기 때문에 나는 모친과 상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에 모친은 서양 선교사가 다 우리의 좋은 친구였으므로 이렇게 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길까봐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누가 우리를 이상히 여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보다 우리를 더 나무라실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어느날 나는 배를 타고 마웨이로 화수은 교사를 만나러 갔다. 나는 그녀에게 내 이름을 감리교의 생명책(그들은 등록부를 생명책이라고 불렀다)에 두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물었다. 그녀는,『아마 그 생명책에 있는 이름 중에 죽은 사람도 많고 침륜한 이도 많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이름을 땅에 있는 생명책에 두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만일 네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있다면 땅 위의 생명책이 네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만일 네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이 땅의 생명책이 네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고 답변했다.

 

이 일에 관해 나는 모친과 이 개월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어느 날 우리집 식구들이 다 정원에 있을 때였다. 나는 기회를 잡아 부모님께, 『이름을 교파에 두는 것이 성경적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들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또 그들에게 『우리의 본분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그들은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강경하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체하며 성경에 순종하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좋다.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라』고 응락했다. 나는 즉시 초안을 잡았고 부친이 친필로 편지를 쓰셨으며, 각 사람이 모두 서명하고 나서 즉시 우체국에 가서 등기로 부쳤다. 이 편지의 대략은 이러하다. 『우리는 성경에는 종파의 분별이 없고 교파는 죄스러운 일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부로 우리의 이름을 당신들의 생명책에서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교훈에 순종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정은 최종적인 것입니다. 이후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당신들의 친구들입니다. 우리의 갈망은 성경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일 뿐 이외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편지를 보낸 지 사 일 후에 몇몇 외국 선교사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교우를 추방하는 일은 있어도 교우 자신이 교회로부터 자신을 추방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유는 이미 충분합니다. 또다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그들은 다시 어느 학교 교장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더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입니다. 단지 우리의 이름을 삭제해주십시오.』후에 그 예배당의 목사와 전도사와 감독이 다시 찾아와서 침례 문제 때문에 이름을 제해달라고 하는지를 물었다. 만일 누가 침례받고자 한다면 감리교도 침례받는 것을 문제삼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이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당신들이야 구애받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오, 모든 문제는 사람들과 침례나 종파를 떠나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는데 있지 않다. 모든 문제는 오직 사람이 성경에 순종하기를 원하는가 원치 않는가에 있다. 침례와 종파를 떠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순종해야 할 수천 가지 항목 중 두 가지일 뿐이다. 성경의 주요 요점은 바로 순종이다.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배움

 

구원받은 후로 나는 자연히 죄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급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기 시작했다. 약 일 년간 수고하였지만 한 사람도 구원받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이유를 더 많이 제시할 수록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 예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능력이 없었고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

 

그 무렵 나는 미스 그로브스(Miss Groves)라는 한 서양 선교사를 만났다. 화수은 교사의 동역자인 그녀는 나에게 구원을 받고서 일 년 동안에 몇사람을 구원시켰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두려워서 고개를 숙이고 아주 부끄러워 하며 낮은 목소리로, 『급우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지만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고 들어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그들에게 돌려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솔직하게, 내게『자네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네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나 감추인 죄를 아직 깨끗이 처리하지 않았거나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있기 때문일세.』라고 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그러한 상태가 있음을 시인했다. 그녀가 내게 그것들을 즉시 처리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나는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나에게 『형제는 어떻게 간증했는가?』라고 물었다. 내가, 『아무나 붙들고 전했습니다. 상대방이 듣든 듣지 않든 전파했습니다.』라고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자네는 먼저 하나님께 말하고 그런 다음 사람에게 말해야 하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급우들의 이름을 적어내야 하네.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할지 묻고, 이름대로 날마다 위하여 기도 해야 하며,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안배하실 때 그들에게 간증해야 하네.』

 

그녀와 교통한 후 나는 배상과 빚을 갚는 것과 급우들과 화목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는 등의 많은 죄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노트에 육칠십 명의 이름을 적고서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각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서 언급하였다. 어떤 때는 한 시간에 그들 모두를 위해 한 번씩 기도하였고 수업 시간에도 은밀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증거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급우들은 자주 농담으로, 『전도사가 또 오셨네.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또 다시 그로브스 교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알려 준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는데도 왜 효과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낙심하지 말고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까지 계속 기도 하게나.』라고 말했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매일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주께 감사드린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내 노트에 적힌 칠십 명 중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성령의 충만을 얻어야 함

 

비록 얼마의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학교나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얻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얻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화수은 교사를 만나로 갔다. 그 당시 나는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어렸기 때문에 그녀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능력을 얻어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녀에게 성령의 충만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하나님이 그분으로 너를 채우시도록 늘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내 자신을 헌신했으나 내 자신을 볼 때 여전히 옛 자아라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이미 나를 구원하신 것을 알고,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을 압니다. 비록 제가 완전히 승리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죄와 악한 습관들에서 벗어났고 나를 얽매던 일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에게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낍니다.』그녀는 나에게 프리진(Prigin)형제의 간증을 들려주었다.

 

프리진 형제는 미국인으로서 전에 중국에 온 적이 있었다. 그는 이미 석사 학위를 얻었고, 당시 철학박사 학위를 얻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영적인 생명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끼고 추구하며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저에게 불신의 마음이 너무나 많고 아직 이기지 못한 죄도 있으며 일할 능력 조차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두 주 동안 그는 이기는 생명과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성령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특별히 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정말 원하느냐? 만일 참으로 원한다면 이 개월 후에 있을 철학박사 학위 시험을 보러 가지 말아라. 나에게는 철학박사 학위가 필요치 않다.』고 하셨다. 그는 곤경에 처했음을 느꼈다. 철학박사 학위는 그가 가장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만일 가지 않는다면 너무 아깝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주님께 그가 한면으로 박사 학위를 얻고 또 한면으로 목사가 되는 것을 왜 허락하시지 않는지를 물었다. 한 가지 기묘한 것은, 하나님은 일단 요구하시면 더이상 사람과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에게 그 이 개월은 아주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마지막 토요일이 되었을 때 그는 정말 갈등을 느꼈다. 철학박사 학위를 원하는가? 성령 충만을 원하는가? 박사가 좋은가, 이기는 생명이 좋은가? 다른 사람은 박사 학위를 얻으면서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데 왜 그는 그럴 수 없는가를 생각했다. 그는 계속 발버둥치면서 하나님과 논쟁하였다. 그는 참으로 방법이 없었다. 철학박사도 사랑스럽고 성령 충만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양보하지 않으셨다. 박사 학위를 취하면 영적인 생활을 가질 수 없고 영적인 생활을 가지려면 박사 학위를 취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비록 제가 이 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고 어려서부터 삼십 년 동안이나 철학박사 학위를 얻고자 했지만, 오늘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시험 보러 가지 않겠습니다.』 그는 학교측에 편지로 통보했다. 그는 월요일 시험에 응하러 가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철학박사 학위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그날 밤 매우 지쳐서 다음 날 강단에 서서 전할 메시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주님께 굴복한 이야기를 청중에게 들려주었다.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사분의 삼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부흥되었으며, 그 또한 새힘을 얻었다. 그는, 『만일 이런 결과가 있을 줄 알았더라면 일찍 순종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의 사역은 주님께 큰 축복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내가 영국에 있을 때 미국에 가서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가 이미 주님께로 가셔서 만나보지 못했다! 그의 간증을 듣고서 나는 주님께, 『저는 성령의 충만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저 사이의 모든 간격을 기꺼이 제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920년부터 1922년 사이에 나는 적어도 이삼백 명에게 나의 죄를 자백했다. 한 가지 한 가지 과거를 엄격히 조사하였지만, 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여전히 간격이 있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아무 간격이 없다면 영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의 처리를 거쳤지만, 여전히 나는 능력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음    

 

어느 날 메시지를 전하러 가기 전에 성경으로부터 제목을 찾다가 시편 73편 25절 말씀을 펴게 되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이 말씀을 읽고서 나는 내 자신에게, 『시편 기자는 이 말을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 내 아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를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십여 년전 내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는 아직 구원받지 않았었다. 내가 그녀에게 주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서 그녀에게 믿으라고 권했을 때, 그녀는 나의 말을 웃음거리로 받아들였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녀가 내가 믿는 주님을 비웃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또한 그때 주님과 그녀 중 누가 내 마음에서 첫번 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기꺼이 그녀를 내려놓겠다고 표명했지만, 내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시편 73편을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께 이 땅에 제가 사랑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저는 『땅에서는 주밖에 주밖에 사모할 자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성령은 이것이 나의 장애물임을 내게 지적해 주셨다. 그 주일에도 여전히 설교했지만, 내가 무엇을 전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하나님께 설교했고 하나님께 참아달라고 요구했으며, 하나님이 먼저 내게 능력을 주신 후에야 그녀를 내려놓을 수 있다고 기도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과 이유를 말하지 않으신다. 그때 나는 황무지인 티벳에 가서 전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많은 계획들을 제안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일단 어떤 것을 지적하시면 결코 그 손을 거두시지 않는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통과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공부할 마음도 없었고, 성령의 능력을 추구하였으나 그것도 얻지 못했다. 나의 마음은 괴로왔고, 나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슬픈 애걸로 바뀌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기도했다. 나로 하여금 항상 자신을 거절하고 천연적인 사랑을 내려놓기를 배우게 하시고 전심으로 그분만을 사랑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무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나로 하여금 전에 배운 적이 없는 공과를 배우도록 나의 천연적인 생명을 예리한 칼로 잘라내 버리셨다. 어느 날 오전 설교를 마치고서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몹시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학교로 돌아가고 동시에 성령의 충만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충만을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주가 경과하였어도 나는 여전히 시폍 73편 25절의말씀을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되었으며, 결국 그녀를 기꺼이 포기하고 큰 소리로, 『나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영원히 나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였다. 이러한 선포 후에 나는 나는 마침내 시편 73편 25절의 말씀을 말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비록 삼층천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층천에는 올라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내게는 세상이 아주 작게 보였고 오직 나 한사람만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구원받던 날 밤 내 모든 죄의 짐에서 해방되었지만, 내가 사랑하던 사람을 내려놓던 그 날(이것은 1922년 2월 13일의 일임) 내 마음에는 조금도 나를 점유한 일들이 없었다. 

 

다음 찬송은 그 때 워치만 니가 쓴 것이다.

 

                            1. 길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 인해

                                나와 같은 죄인 괴수 큰 은혜 받았네

 

                            2. 내 주 댓가 치뤄 나를 구속했네

                                나는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겠네

 

                            3. 주님 얻기 위해 모두 내려놓네

                                생명이나 죽음까지 생각하지 않네

 

                            4. 친구 명성 선행 무슨 소용 있나

                                주 날 위해 낮췄으니 나도 낮추겠네

 

                            5. 내 구주 사랑해 그의 칭찬 구해

                                안락 이익 고통 손실 주 위해 바꾸리

 

                            6. 나의 위로 되신 은혜로운 예수

                                하늘에나 땅에서나 주님밖에 없네

 

                            7. 고통 반대 불행 돌아보지 않네

                                오직 주의 사랑으로 전체 싸소서

 

                            8. 주여 간구하니 내게 은혜 주사

                                늘 힘 주사 어둔 세상 지나가게 하소서

 

                            9. 사탄 세상 육체 나를 시험하니

                                힘 주소서 주의 이름 부끄럽지 않게

 

                           10. 이제 지체 말고 세상 벗기 원해

                                주 오실 때 외치겠네 "아멘 할렐루야"

                                     (한국복음서원 찬송 330장)

 

그 다음 주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기 시작했다. 위 형제(같은 반 급우)가 나를 위해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나는 의복에 매우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나는 곧잘 빨간 점들이 있는 실크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그날 나는 고운 의복을 벗고 낡고 검소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풀을 쑤고 한 뭉치의 복음 표어를 들고 길에 나가 그것을 벽에 붙이고 전도지를 뿌렸다. 그 당시 복건성의 복주에서는 아무도 해 본적이 없는 시도였다.

 

1922년 하반기에 학교에서 복음 사역이 시작되었고 많은 급우들이 구원받았다. 나는 매일 노트에 기록된 급우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1923년부터 우리는 빌리거나 세로 얻은 집회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때 수백 명이 동시에 구원받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죄인을 위해 기도해야만이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정하셨다. 수년 이래 이 일은 우리 가운데서 더욱 확증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

 

금전에 관한 일

 

금전은 우리에게 작은 문제가 될 수도 있고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 나는 내 생활의 매우 염려했었다. 만일 내가 교파에서 전도사가 되었다면 매월 고정된 월급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길을 가는고로 매달의 월급을 의지할 수 없었고, 주님을 의지해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1년, 1922년에는 중국의 전도사들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사람 두셋 찾기도 쉽지 않았다. 대다수가 월급을 받아 생활했다. 그때 많은 전도사들은 전시간으로 나와 주님을 섬기기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나가서 전도할 때 월급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생각했다. 나도 전에는 이러한 생각을 가졌었다. 오늘(1936년)중국에서 우리와 교통하는 형제 자매들 가운데 약 오십명이 완전히 주님을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이것은 1922년 때보다 훨씬 보편화되었다. 오늘 각지의 형제 자매들은 전도자를 돌보는데 있어서 전보다 많이 진보하였다. 나는 십여 년 후에는 형제 자매들이 주님의 종들의 필요에 대해 더욱 관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십여 년 전에는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에게 믿음으로 생활하겠다고 표명함

 

앞의 간증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구원받은 후에 나는 여전히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또 학교내에서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그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문제에 관해 말씀을 드렸다. 나는, 『몇일 동안 기도해본 후, 저는 아버님께 오늘부터 더이상 아버님의 돈을 돈을 쓰지 않을 것을 밝혀야 한다고 느낍니다. 한면으로 아버님의 책임으로써 저에게 많은 돈을 쓰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장래 제가 돈을 벌어 아버님을 부양드리기를 기대하시겠지만, 저는 앞으로 전도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버님께 돈을 돌려 드릴 수 없고 이자를 계산해서드릴 수도 없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학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는지를 배우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의 아버지는 그것을 농담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때부터 모친은 때때로 내게 오원, 십 원씩 주셨는데, 봉투에는 「니토생 형제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모친의 신분으로 내게 돈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내가  부친에게 내 태도를 밝히고 나자 마귀는 나를 시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방법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다. 가령 어느 날  네가 더이상 생활할 수가 없어서 또다시 부친에게 돈을 달라 했다 하자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너는 너무 빨리 부친에게 네 태도를 밝혔다. 네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발전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많은 친구를 사귀어 둔 후에 믿음 생활을 했어야 합당하다.』그러나 주께 감사드린다. 내가 부친의 돈을 받지 않겠다고 표명한 후로 오늘날 까지 나는 한 번도 부친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

 

외지로 나갈 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앙망함

 

 그 당시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오직 여자도 자매만이 월급을 받지 않는 전도자였다.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해 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의 영적인 누님이고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았다. 그녀에게는 중국과 외국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사역의 범위가 아주 넓어서 곳곳에 가서 전도하였다. 그러나 나의 상황은 정반대여서 나를 돌보는 사람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꼈다. 내가 주님 아페서 앙망했을 때, 주님은 나에게, 『만일 네가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면 너는 나를 위해 일 할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말씀과 살아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은 내 호주머니 속의 돈을 계산해 보니 십 원밖에 안 되었다. 얼마 안 있어서 다 떨어질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사르밧 과부의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왕상 17:12)뿐, 가루 두 웅큼도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녀의 생활을 지켜 주셨는지는 몰랐지만,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21년에 나는 두 동역자와 함께 먼저 복건이라는 지방에 가서 전도를 하고 나중에 다른 지방으로 가기로 했다. 내 호주머니에는 사 원밖에 없었고 이것으로는 세 사람의 차표도 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주께 감사드린다.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표 석장을 보내 주었다.

 

또 한번은 복건성 남쪽 고랑여에 있을 때, 내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도둑 맞아서 집에 돌아갈 여비가 없었다. 우리는 어느 가정에 묵으면서 한 작은 예배당에서 하루에 한 번씩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는 집회를 마치고 곧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두 동역자에게는 돌아갈 돈이 있었지만, 내 돈은 이미 도둑맞았다(그 당시 우리는 각각 자기 돈을 썼었다). 그들은 다음날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을 듣고서 나는 매우 난처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돈을 꾸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반드시 내게 여비를 주셔야 한다고 간구하였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날 오후 여러사람이 찾아와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그들과 대화할 심정이 아니었다. 이 때에 마귀가 와서 나를 시험하였고 내 믿음을 요동케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하나님이 지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때 나는 갓 나와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섬기기 시작한 젊은 사람으로서 아직 믿음으로 사는 공과를 배우지 못했었다. 그날 밤 나는 내 자신이 무슨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며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마귀는, 『내일 아침 동역자에게 부탁하여 차표를 대신 사달라고 하고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그에게 갚아 주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해왔다. 나는 이러한 건의를 받아 들이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앙망했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지만 내손에는 아직도 돈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같이 짐을 꾸리고 인력거를 이미 빌렸다. 이때 나는 어떤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 형제가 기차를 타야 하는데, 그 기차가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도 그의 손에는 차표가 없었다. 기차가 막 출발하려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안배하여 그에게 차표를 보내주셨다. 나와 동역자들은 인력거를 탈 준비를 했다. 모두 세 대였고, 나는 맨 나중에 탔다. 인력거가 약 사십 야드 정도 갔을 때 뒤에서 긴 와이샤쓰를 입은 한 노인이, 『니 선생, 잠깐 기다리시오.』하며 소리 질렀다. 나는 인력거부에게 수레를 멈추라고 했다. 그 노인은 음식 한 보따리와 봉투 하나를 내게 주고서 떠나갔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마련하심에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봉투를 열어보니 그안에는 사원이 있었고, 그 돈은 차표를 사기에 충분했다. 마귀는 계속 나에게, 『보라, 이것이 얼마냐 위험하냐?』라고 말했다. 나는, 『좀 염려가 되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때에 따라 나의 필요를 공급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하문(廈門)에 도착했을 때 또 한 형제가 나에게 왕복 차표를 주었다.  

 

하나님을 위대한 의사로 체험함

 

1924년 처음 나는 내게 병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다만 미열이 있었고 육신이 무력함을 느꼈으며, 가슴에는 통증이 좀 있었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몰랐다. 왕화성(王和聲)의사는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실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내게 와서 무슨 병인지 한 번 검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검사를 마친 후 그는 얼마동안 낮은 목소리로 왕등명(王燈明) 형제에게 어떤 말을 했다. 내가 그들에게 검사 결과가 어떠냐고 묻자, 처음에 그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나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자 , 왕 의사는 나의 폐병이 아주 심각하고 장기 휴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날 저녁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일을 마치기도 전에 주님을 뵈러 간다는 것이 주님께 죄송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시골로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면서 주님과 많은 교통을 갖기로 결정했다. 나는 주님께, 『나에 대한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목숨을 내려놓기를 원하신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약 반 년 동안이나 나는 주님의 뜻을 만지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었고 주님은 틀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때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들은 위로의 말을 하기 보다는 내가 일에 과로하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했다. 어떤 형제는 에베소서 5장 29절 말씀을 인용하여 나를 책망했다.『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얼마 후 남경의 성기귀(成寄歸)형제가 나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한면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그가 스코필드(Dr. C. T. Scofield) 성경 통신 과정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그 때 삼십여 형제 자매들이 내게 와서 교통을 나누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나는 하나님의 손이 내게 있는 이유는 나로 하여금 최초에 내가 본 이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부흥 전도사의 길을 가게 되었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도 내 폐병은 좋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비록 억지로 문서와 사경회 일을 조금 했지만, 매우 힘겨웠다. 매일 오후에는 열이 있었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식은 땀이 났다. 한 형제가 나에게 많은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자, 나는 『내가 녹슬 정도로 휴식을 취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비록 내가 오래 살지 못할지라도, 한면으로 나는 하나님이 내게 힘 주심을 믿어야 하고 또 한면으로는 내가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주님께, 마지막으로 내가 마쳐야 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만일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마쳐야 할 일이 있다면, 주님이 내 생명을 보존해 주시기를 구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처음에는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복음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나를 초청했는데, 나는 억지로 일어나 주님이 내게 힘 주시기를 구했다. 집회에 가는 도중에 나는 여러 차례 전봇대를 붙들고 잠깐씩 쉬어야만 했다. 전봇대를 붙들고 잠시 쉴 때마다 나는 주님께, 『당신을 위해 죽는 것도 정말 가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형제들은 나의 이러한 상태를 알고서 내게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그러나 나는 내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잃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병중에 「영에 속한 사람」을 씀

 

나는 한 달 이상 기도를 한 후, 하나님 앞에서 배운 것들을 책으로 써내야 한다고 느꼈다. 전에 나는 사람이 나이 들어서야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나는 내가 곧 세상을 떠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에 책의 집필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강소성(江蘇省) 무석성(無錫珹)에서 작은 방을 빌어 그 안에서 하루종일 집필에 몰두했다. 그때 내 병세는 더 악화되어 누워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집필할 때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서 가슴의 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해 가슴을 책상에 밀착시켜야 했다. 사탄은 나에게, 『너는 곧 죽게 되면서 편하게나 죽지 이런 고통을 당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주님이 하라시는 것이다. 너는 물러가라.』고 말했다. 사 개월에 걸쳐 나는 「영에 속한 사람」세 권의 집필을 끝마쳤다. 집필 기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생명을 단념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인도했으며 이 기간을 거치게 했다. 집필을 마칠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이것이 교회에 대한 나의 마지막 간증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 집필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히 가까우심을 느꼈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성 형제는 편지로 내게, 『자네가 이렇게 극도로 자신을 사용한다면 어느 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 대한 답장에서, 『나는 나의 주님을 사랑하므로 마땅히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네...』라고 말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당신의 종으로 편안히 세상을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때 내 병은 악화되어 밤에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깨어나 침상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으며, 몸은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밤에 식은 땀이 나고 목은 잠겨 있었다. 내 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귀를 내 입가에 갖다 대어도 내 목소리를 알아 듣지 못할 정도였다. 몇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간호하였는데, 그 중 노련한 간호원 자매는 나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내가 많은 환자를 보아 왔지만 그처럼 불쌍한 상태에 있는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삼 사일이나 더 살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라고 간중했었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알려주자, 나는『이대로 끝났으면....나는 곧 내가 죽게 될 것을 압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형제는 전보로 각지 교회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나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왜 이렇게 저를 빨리 데려가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게 아직 충성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봐 내 죄를 자복했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했다. 그날 나는 전일하게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이 내게 정하신 일만을 하겠다고 그분께 말씀드렸다. 그날 나는 아침부터 오후 세시까지 금식했다. 동시에 동역자들도 이 연여 자매의 집에서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께 내게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했는데, 그 때 그분은 나에게 일생 잊어버릴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 그 첫번째 말씀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였고, 두번째 말씀은 『믿음으로 서리라』(고후 1:24)였으며, 세번째 말씀은 『믿음으로 행하리라』(고후 5:7)였다. 이 몇 마디로 인해 나는 기쁨으로 충만케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미 내게 말씀을 주셨고, 나는 하나님이 이미 나를 치료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미했다. 

 

그러자 시험이 닥쳐왔다. 성경은 『믿음으로 서리라』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이때 내 마음 속에는 몸을 일으켜 설 것이냐 계속 침상에 누워 있을 것이냐에 대한 교전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침상에 누워서 죽는 것이 서서 죽는 것보다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능력을 발함으로 나는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백 칠십 육일 동안 입지 않았던 내 의복을 입었다.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서려고 할 때 비오듯이 많은 땀이 흘렀다. 사탄은 나에게,『네가 앉지도 못하는데 일어서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일어 서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어서는데 온 몸에서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하여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믿음으로 서리라! 믿음으로 서리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가서 옷과 양말을 가져다가 입은 후에 다시 앉았다.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시 내게 임하여 믿음으로 서야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가 바지와 양말을 입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더 걷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께, 『당신은 제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자, 하나님은 『너는 아래층 이백 십 오호의 이 자매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한 무리의 형제 자매들이 내 병을 위해 이미 이삼 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집 안에서는 걸을 수 있으나 어떻게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나는, 『오 하나님, 제가 믿음으로 설 수 있다면 또한 믿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나는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문을 향해 가서 그 문을 열었다. 내가 솔직히 말하지만, 내가 층계 위에 서 있을 때 그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높은 층계 같았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이 걸으라고 하셨다면, 내가 죽을 지라도 걷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어서, 『주여, 나에게는 걸을 힘이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부축하여 걷게 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나는 난간을 붙들고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왔다. 내 온 몸에서 다시 식은 땀이 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믿음으로 행하리라. 믿음으로 행하리라.』고 외쳤다. 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나는, 『주여, 당신이 나로 능히 걷게 하십니다!』라고 기도 했다. 믿음 안에서 나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그 스물 다섯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층계 아래로 내려 왔을 때 아주 힘있게 느껴져 빠른 걸음으로 뒷 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이 자매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님께, 『이제부터 나는 믿음으로 살며 더이상 누워 있는 환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도행전 12장 12절부터 17절에 있는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문을 두드렸다. 다만 거기에 문을 열어주는 로데가 없었을 뿐이다.문이 열리자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고, 칠팔 명의 형제 자매들은 나를 주시했으며, 그들은 말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나타난 것처럼 약 한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이 다 잠잠히 앉아 있었다. 나도 거기에 앉아 있었으며 내 마음 속에는 감사와 찬미가 충만했다. 이후에 나는 그들에게 내가 은혜로 치유받은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모든 이의 영에 상쾌함과 기쁨이 있었고, 우리는 높은 소리로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찬미했다. 그 날 우리는 자가용 한 대를 빌어 교외에 있는 강만(江灣)으로 유명한 여 전도자인 여자도 자매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얼마 전에 내가 곧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너무나 놀랐다. 나의 출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찬양했다. 그 주일 나는 강단에서 세 시간이나 말씀을 전했다.

 

어떠한 기적인가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 한 독일인 의사의 집에서 물건을 처분한다기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그 의사는 수년 전 엑스 레이로 나의 흉부 촬영을 해준 의사였다. 그는 석장을 찍고 나서 내게 소망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다시 한 번 찍어달라고 했을 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 엑스레이 흉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의 상태는 당신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가 두 주도 못 넘기고 죽었습니다. 당신은 다시 나를 만나러 올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돈을 벌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듣고 아주 실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 년전 나는 신문에서 어느 유명한 독일인 의사가 별세하여 집과 가구를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그 의사가 과거 내 흉부 촬영을 해 주었던 의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손을 들어 주님을 찬미 하면서, 『이 의사가 죽었습니다. 그는 내가 머지않아 죽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가 먼저 쓰러져 죽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주님의 보혈 아래에서 나는, 『이 의사는 나보다 강건했으나 먼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치유함을 받아 여전히 살아있다.』 고 했다. 그 날 나는 기념으로 남겨 두려고 그의 집에서 많은 물건들을 사왔다. 

 

 

  

출처 : 워치만 니
글쓴이 : 주정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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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니 형제님의 간증 동영상을 소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