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생명
1장, 우리의 체험 -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로마서 7장 21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장 23절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해놓으신 생명이 즐거움으로 충만한 생명인 것을 볼 수 있다. 이 생명은 완전히 안식하는 생명이고, 막힘 없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명이고,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는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예비해 놓으신 생명은 세상에 대하여 목마르지 않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죄를 떠나 행하는 생명이며 죄를 이기는 생명이다. 또한 거룩하고 능력 있으며 승리하는 생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간격이 없이 교통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바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정해 놓으신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 정해 놓으신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다. 무엇이 이 생명을 만질 수 있는가? 무엇이 이 생명에 영향을 주거나 요동케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요동하지 않듯이 우리도 요동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초월하듯이 우리도 모든것을 초월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서 계시듯이 우리도 하나님앞에 그러하다. 결코 당신 자신을 약하고 실패한 자라고 생각지 말라. 그렇지 않다. 골 3:4에서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시고 그 무엇도 그분을 건드릴 수 없다. 할렐루야!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정하신 것은 안식과 기쁨이 충만한 생활이다. 다. 또한 활기와 능력과 하나님의 뜻이 충만한 생활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생활을 살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활을 살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이겨야 하고 돌파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말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체험한 많은 부분이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해질 때 자신의 결핍을 보게 되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실패의 여덟 가지 유형들
우리는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 죄의 법에 묶여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는" (롬7:18) 생활이다. 생활 가운데 우리는 실패하고 죄에 묶여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그처럼 높은 생명이지만 우리의 생활은 실패하는 생활을 살고 있다. 성경의 기록과 우리의 체험을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여덟 가지 형태의 실패들 또는 죄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영적인 죄
교만은 영적인 죄이다. 질투와 불신 또한 영적인 죄이다. 고의로 남의 결점을 찾는 것도 영적인 죄이다. 기도의 부족이 영적인 죄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것도 영적인 죄이다. 이러한 영적인 일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이러한 일에서 실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다.
한때 교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어떠한 교만도 다 영적인 죄이다. 당신이 진보하는 것을 막는 어떤 교만도 영적인 죄이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참지 못한다. 그는 세상에 속한 일들들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에서도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앞선 것을 보고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영적인 일에 자신보다 전진했을 때 그 사람의 잘못을 찾아 내려고 애쓰고 그를 억누르려고 한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에 있어서도 질투하는 것은 죄이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악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 그에게 믿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문장도 믿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렇지 못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험을 받을 때 그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믿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마르틴 루터의 아내가 언젠가 장례식 옷차림을 하고 루터에게 "당신이 이렇게 근심하는 것을 보니 당신의 하나님은 죽었습니까?" 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생활하지 않고 또 하나님과 좋은 교통을 갖고 있지 않다. 하루하루를 느슨하게 지내고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도 않고 날들을 허비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않고 또 그분과의 교통도 없이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는 주님과의 교통하는 것을 싫어하며 하루하루를 낭비한다. 이것은 하나님 없는 생활이다. 죄와 실패는 있지만 영적인 생활이 없는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게 자아를 처리하는 공과를 배우는데 전혀 부지런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내려놓는 공과를 배우는데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
전에 어떤 두 형제가 있었는데 아주 작은 일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음식을 같이 먹었는데 그 중 한 형제는 밥을 먹을 때 항상 고기를 먼저 먹었다. 다른 형제는 이런 상황을 보고 몇 일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두 주일이 되던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와 헤어져 버렸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는 작은 일에서 드러난다. 나는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좋아한다. 허드슨 테일러는 집을 떠나 전도하러 다닐 때에 거의 매번 가장 좋지 않은 방과 침대를 선택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당신이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여준다.
2. 육체적인 죄
죄에는 영적인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육체적인 죄도 있다. 간음을 범하는 것과 같은 죄는 육체적인 죄이고, 우리의 눈이 제한을 받지 않는 것도 육체적인 죄이며, 다른 사람과 합당치 않는 관계를 가지는 것도 육체적인 죄이다. 이러한 일에서 실패하는 사람이 많다. 눈이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눈으로 죄를 짓는다. 어떤 사람은 친구 관계가 합당치 않다. 이러한 모든 것이 육체적인 죄이며, 어떤 죄는 몸과 관련된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의 눈은 다루심을 받은 적이 있는가? 나는 오늘날 눈이 범죄할 가능성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눈이 처리받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의 이기는 생명을 체험할 수 없다.
친구관계에 대하여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한 형제가 믿지 않는 사람과 지나치게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자. 이러한 일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죄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정하신 생명에 따른다면 그러한 관계는 죄이다. 이것은 상대가 자매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한 서양 선교사가 말하기를 어떤 믿지 않는 사람이 자기와 특별한 친구관계를 맺고자 했었을 때 자신은 그러한 일이 죄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친구 관계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3. 생각으로 지은 죄
죄에는 영적인 죄와 육체적인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생각으로 지은 죄도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죄는 없다. 또는 어느 정도 육체도 처리 받았다. 하지만 생각을 이기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방황하는 생각, 떠돌아다니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생각을 집중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의 생각은 유리하거나 떠돌아다니지 않고 산만하지 않지만 생각이 더럽고 망상적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의심이 가득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알려고 하고 알기 전에는 통과시키지 않고 알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기는 생활을 체험하지는 못한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생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방황하고 집중하지 못하며 표류한다. 생각이 표류하는 것도 심각한 것이지만, 보다 더 심각한것은 생각이 더럽고 오염되어 부정한 생각이 속에서 끈질기게 맴도는 것이다. 이번에 어떤 자매를 만났는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왜 계속 떠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이 왜 계속 더러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상상 때문에 손상을 받았다. 또한 의심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해를 받았다. 예를 들어 당신이 길가에서 어떤 형제를 만났다 하자. 당신은 그 사람이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므로 그 형제가 당신에게 무슨 의견이나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의 집에 가서야 비로소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잠을 잘 자지 못하여 머리가 아프고 환경이 너무나 견디기 어렵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당신은 그의 표정이 당신에 대해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상상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자주 자신이 남의 마음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 (계2:22).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생각으로 죄를 지었고, 판단이 너무 많았다. 망상도 너무 많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처리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기는 생활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떤 형제는 알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모든 일의 이치를 알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분석하려고 하며 알려고 한다. 그의 생각은 지나치게 활동적이어서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조그만 일이라도 알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러한 종류의 알고자 하는 욕망은 죄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것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4. 몸과 관련된 죄
어떤 죄들은 몸과 관련된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일들이 꼭 더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리 큰 일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인 것이다. 어떤 이는 먹는 것에 너무 주의를 기울이고, 어떤 이는 잠자는 것에, 어떤 이는 건강이나 개인적인 몸치장에, 어떤 이는 군것질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 몸을 지나치게 사랑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먹는 것에 묶여서 항상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번도 금식한 적이 없다. 당신이 그와 식사를 같이 해보면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그가 젓가락을 들 때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식욕이 좋아서 음식을 아주 많이 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음식에 절제가 없는 것도 역시 죄이다. 먹는 것에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죄이다.
어떤 사람은 잠을 약간 덜 잤다고 얼굴에 몹시 힘든 표정을 짓는다. 일을 처리할 때에도 안절부절하고 말할 때에도 횡설수설한다. 이것 또한 죄이다.
어떤 사람은 군것질을 좋아해서 군것질 하는데 돈을 많이 쓴다. 어떤 사람은 몸치장 하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꼭 좋은 옷만 입으려 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건강에 집착하여 어떤 것이 독이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를 세심하게 구분하며 모든 것에 제한을 받고 모든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자신의 몸을 너무 사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조금 고생하거나 병든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을 꺼려한다. 이것은 자신의 몸 때문에 스스로 묶이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말했다.(고전 9:27) 이것은 몸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몸을 통제 아래 두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몸은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자기 위해 새벽 기도를 희생시키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먹으려고 성경 읽는 시간을 희생시키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군것질을 탐하고 외적인 치장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 무릇 이런 일들에서 자신을 관리할 수 없는 것은 다 죄이다.
5. 기질적인 죄
기질은 사람의 성격과 관련되는 그 사람의 개인적인 특징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 자기의 기질을 갖고 있다. 주님이 오신 것은 다만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려 함이 아니라 또한 기질에서 구원하려 함이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고집 세고 어떤 이는 항상 원칙을 내세운다. 그들에게 2 더하기 2는 반드시 4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매우 정확하지만 동시에 매우 딱딱하다. 그들이 맞다고 한것은 맞은 것이고 틀리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들은 굽힐 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어느 때 어떤 일에든지 항상 자신이 대법원 판사이다. 물론 그들이 의롭다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의에는 뿔이 있다. 그가 형제를 대할 때에 온유와 달콤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이 보여 주는 의로움은 매정하고 완강한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죄이다.
어떤 사람은 매우 유약하며 일을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좋고 나쁜 것이 없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람은 앞에서 말한 고집 센 것과 완전히 상반된다. 사람들은 호인(好人)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신 호인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계실 때 호인이셨는가? 형제자매들이여, 이런 기질도 죄이므로 처리해야 한다.
어떤 형제는 딱딱하지도 않고 호인도 아니지만 자기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항상 자신을 드려내려고 한다. 또 어디에 있든지 항상 말하려고 한다. 어디에 있든지 기회가 되지 않는데도 여전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려고 한다. 어디에 있든지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 비로소 만족한다.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고 결코 잠잠히 있지를 못한다.
어떤 형제는 너무 잘 위축된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항상 구석에 앉는다. 이것도 죄이므로 처리해야 한다. 어떤 형제는 매우 조급하다.
또 어떤 형제는 매우 느리다. 어떤 형제가 한번은 자신이 성질을 내는 것도 빠르고 그치기도 빠른 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집에서 화를 크게 낸 후 오 분이 지난 뒤에는 문제가 사라지고 사무실에 갈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 그러나 아내와 자녀들은 하루 종일 고통을 당한다. 그가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아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이상하게 느끼며 자신을 좋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처리해야 할 죄이다. 어떤 사람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일이 하루 지연되든 열흘 간 지연되든 다 좋다고 한다. 이것은 게으름으로서 마땅히 처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기질이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의 행함과 처신이 극히 엄격하여 모든 일에 날카롭게 남과 대립하고 빈틈이 없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지도 않고 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용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단 다른 사림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다. 매우 빈틈없이 계산적이며 어떤 일도 느슨하게 풀어놓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엄격하지는 않지만 매우 인색하다. 이러한 사람은 몇 개의 동전이라도 남에게 꼭 받으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강도질을 하지 않지만 자신의 하인이나 인력거꾼에 대해서조차도 항상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이 너무 많다. 어느 곳이든 그 사람이 있는 곳은 조용하지 않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이나 단점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진리에 관해 늘어놓는다. 무언가를 알 때 꼭 말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을 과장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조금 지나치게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다 말할 때 드러나는 사람의 기질이다. 형제자매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기기를 갈망하고 또 이기는 생명을 살고자 한다면 이런 모든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반드시 이겨야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내가 왜 이런 것을 말하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너무도 하나님의 생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의 눈은 사람의 단점만을 볼 줄 알고 사람의 장점은 볼 줄 모른다. 그는 입으로 항상 형제를 비판하는 말만 한다. 이번에 중국 북부지방에 있는 한 형제가 이러한 일들에서 승리하고 돌파하는 일이 있었다. 어떤 형제가 자기에게 오면 그에게 예닐곱 가지의 잘못을 지적하곤 했다. 나는 그 형제에게 당신이 다른 형제를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당신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기질이자 그의 천성이었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들은 모두 죄이다.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이런 것들 아래 있지 않고 이런 것들 위에 있다.
6.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음
우리에게는 소극적인 면에서 앞서 말한 많은 죄들이 있을 뿐 아니라, 성경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도 죄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이 읽은 하나님의 명령 중에서 읽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얼마나 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는 얼마나 되는가? 어떤 자매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항상 먼저 다투고 나서야 순종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참되게 순종한 적이 한번도 없었음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죄이다.
근심이 죄라고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되는가?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다. 이 명령을 지킨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되는가? 형제자매들은 근심이 죄임을 알아야 한다. 무릇 기뻐하지 않고 즐거워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만일 당신이 염려한다면 그것은 곧 범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볼 때 근심, 염려는 다 죄이다. 사람이 볼 때는 근심도 염려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근심을 죄로 보며 염려도 죄로 본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범사에 "하나님, 당신께 감사하고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홉 아이를 둔 한 자매가 있었는데, 그녀는 성경이 말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 어머니로서 반드시 염려해야 하며, 만일 염려하지 않는 다면 그것이 죄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염려하는 가운데 두 아들을 잃었고, 다른 아이들도 염려 가운데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 이 자매는 염려가 죄인 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염려를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다. 나아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다. 승리하고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명령은 지킬 수 있다. 무릇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
7.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음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그분께 철저하게 헌신할 것과 아내와 자녀들을 그분께 드릴 것을 요구하셨고 또한 우리의 사업과 금전을 그분께 완전히 드릴 것을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조금 남겨두려고 한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구약에서는 십분의 일을 드리는 규례가 있지만 신약에서의 우리의 드림은 십분의 십으로서 우리의 집과 토지와 아내와 자녀들과 당신 자신을 다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려움을 줄까 봐 두려워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나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를 고생시킬까 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나는 진지하게 그에게 "당신은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를들어, 과거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던 아이가 이제는 말씀을 듣고 오늘부터 부모님께 순종하겠다고 말했다 하자. 생각해 보라. 그의 부모가 고의로 아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며 고의로 고생시키겠는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부모가 아니라 법관일 것이다. 만일 부모라면 그의 자녀들을 특별히 긍휼히 여길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하나님께서 고의로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당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인 것을 잊어버렸다!" 고 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오직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에게만 참된 능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하나님 손에 둘 수 있고 그의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을 하나님 손에 둘 수 있으며 자신의 금전을 하나님 손에 둘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을 자신이 취하지 않으며 또 세상에서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다. 무릇 일이나 물질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승리하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일수록 능력이 있다. 자원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더 가져 가소서"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헌신은 즐거운 생활이며 능력있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헌신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며, 그 사람에게는 능력이 없다.
8. 죄악을 품고 마땅히 자백해야 할 죄를 통회하지 않음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처리했지만, 마음 속에서부터 자신들이 처리한 것들이 죄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편 66편 18절에서 말한 그들의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이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어떠한 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해 버리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것들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꺼이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남몰래 사랑하는 것이며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우리 입으로 그러한 것들을 갈망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때 우리 마음 속에서는 기뻐하고 거기에 발을 내 딛기 전에 마음이 먼저 그곳에 가 있었는지 모른다. 많은 때 죄는 밖의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사랑하는 그것이다. 만일 당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품고 있는 죄악이 있다면 당신은 반드시 그것을 이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여러가지 죄들을 시인하려 하지 않는다. 한 형제가 어떤 형제에게 죄를 범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이것을 깨닫고 기꺼이 자신이 범죄한 것을 시인한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그는 몇 가지 외적인 변화를 보인다. 그를 대할 때 특별히 잘 대해 주며 만날 때는 손을 꼭 쥐고 더 친밀하게 그를 접대한다. 형제자매들이여, 태도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최상의 방법이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해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배상해야 할 것들과 배상해야 할 돈이 있는 지도 모른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긴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지만 당신은 당신의 죄를 자백해야 한다.
죄를 자백하는 것에 관하여, 자세한 죄들까지도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없다. 성경이 당신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했지만 소설책을 이야기하는 것같이 사람들에게 말하라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라고 말했다. (마18:15) 사람들이 당신에게 죄를 범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와서 "형제님, 제가 당신에게 죄를 범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마땅히 그를 용서해야 한다. 감추어진 많은 이야기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고 또 듣고 나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형제자매들이여, 아직도 마음에 사랑하고 있는 죄는 얼마나 되는가? 만일 그런 것들이 있다면 당신은 반드시 당신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한다면 그러한 죄들에 대해 승리했다고 할 수 없다.
이기는 것이 필요하며 이기는 것은 가능한 일임
형제자매들이여, 이상에서 말한 여덟 종류의 죄들이 당신에게 있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완전히 이겨야 한다. 이 여덟 가지 죄들 중에서 당신은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마 이 여덟 가지에서 다만 한두 가지가 당신을 계속 괴롭힐지 모른다. 혹은 몇몇 가지가 당신을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두 가지 혹은 몇 가지의 죄들이 당신을 계속 괴롭히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당신은 어떤 형제가 당신 앞에 왔을 때, 그에게 몇 가지 단점이 있고, 다른 어떤 형제가 당신 앞에 올 때 그에게 몇 가지 잘못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올 때 그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가를 관찰할지도 모른다. 형제자매들이여, 이러한 것은 부당한 것이며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가 우리의 발아래 있다는 것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당신이 엎드러질 정도로 큰 죄가 하나도 없고 당신이 이길 수 없을 만큼 큰 시험도 하나도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 주신 생활은 우리가 하나님과 간격없는 교통을 갖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천연적인 애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죄를 이기며 자신의 기질을 이길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며 죄를 사랑하는 데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이것은 이상적(理想的)인 생활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생활이다.
정직하며 자신을 속이지 않음
우리는 자신을 속이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직 그분 앞에서 마음이 정직한 사람만 축복하실 수 있다. 빌립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 과거에 나는 당신께 거짓말하였습니다. 저를 용서하소서." 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즉시 축복할 것이다. 형제자매들은 아마 "하나님! 저를 만족케 해 주소서."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배고프지는 않다는 것이다.
만족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굶주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탕자가 아비 집을 떠나 모든 것을 허비한 다음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웠다. 이것은 만족스럽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족하지는 않지만 매일 매일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운다. 그러므로 만족하지 않는 것과 굶주림은 별개의 것이다. 우리가 늘 연약하고 실패하는데 어찌 만족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온종일 이런 생활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만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굶주림이 있어야 한다.
이번 집회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 종류의 사람을 축복하실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굶주린 사람이다. 하나님은 다만 만족하지 않는 사람을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신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모든 거짓말을 멈춰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오랫동안 거짓말을 해 왔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실패한 자들이며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자들이다!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자백할 때 하나님의 이름은 영화롭게 된다.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정직한 사람들은 다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축복하시리라 믿는다.
2장,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인의 생명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엡 1:3> 그리스도인의 실패의 체험 우리가 갓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마음이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생명에 대하여 소망이 충만했었다. 갓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그때 이후로 모든 죄악이 다 우리 발 밑에 밟혔고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우리는 갓 구원 받은 이후로 우리가 이길 수 없을 만한 큰 시험은 없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을 만한 큰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영광의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처음으로 죄사함의 평강과 기쁨을 맛보았었다. 이때 우리는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고 하늘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운 것 같았으며 또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것 같고 실패하는 날이 하루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좋은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고, 그러한 아름다운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다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죄들이 돌아온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이겼다고 생각했던 죄악들이 다시 돌아오며 한동안 당신을 찾지 않던 죄악들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 또 당신의 오래된 성질과 교만과 질투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된다. 성경을 읽어도 별로 유익이 되지 않고 기도도 했지만 전과 같은 친밀한 맛이 없다.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심도 전과 같지 않고 사랑도 갈수록 식어간다. 분명하게 처리 받은 일도 몇 가지 되기는 하지만 어떤 일들은 참으로 처리할 방법이 없다고 느껴진다. 매일 당신에게는 승리의 노래보다는 패배의 노래가 많은 것 같고 승리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것 같다. 당신은 스스로 속에서 무언가 큰 결핍이 있다고 느낀다. 당신이 자신을 바울이나 요한이나 베드로 또는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그들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당신이 사람을 도울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이 승리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도 실패한 부분은 알려 주지 못한다. 당신이 승리한 날들은 몇 일이 되지 않지만 실패한 날들은 너무나 많았음을 느끼게 된다. 매일 우리는 이렇게 근심된 날들을 지내왔을 것이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체험이다.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모든 죄가 사해졌으므로 죄가 영원히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번 느낀 기쁨과 평강이 영원토록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죄가 다시 찾아오고 시험이 다시 올 줄 누가 알았는가? 즐거울 때가 많지 않고 근심할 때가 더욱 많게 될 줄 누가 알았는가? 이러한 상태일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일을 경험하게 된다. 한 면으로는 시험과 교만과 질투와 성질이 돌아오고 또 한면으로는 이러한 자신을 억제하려고 한다. 이러한 죄악이 돌아올 때 당신은 이것을 극복하여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많은 힘을 들일 것이다. 자신을 억제하는 일에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실패한 사람은 매일 실패,성공,범죄,후회가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을 지내다가 결과적으로 크게 실망하게 된다. 사람들은 구원받은지 얼마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자신의 죄를 억제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승리하는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자신을 체념한다. 낙심하거나 실망하게 된다. 그들은 한 면에서 승리하지만 또 한 면에서는 실패한다. 그들이 자신을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죄악이 잠시 멈춘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실패하게 되면 어찌할 방도가 없이 죄를 짓게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묻겠다.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실 때 그분은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체험을 생각하셨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의 생활, 곧 한번 성공하고 한번 실패하며 오전에 성공하고 오후에 실패하며 오전에 이기고 저녁에 실패하는 생활을 생각하신 적이 있었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우리가 거룩함과 공의로 그분을 섬기는데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우리가 거룩함과 공의로 그분을 섬기는데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죄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되기 위한 것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죄의 고통에서 구원하시지 못하고 다만 장래에 있을 영원한 죄의 고통에서만 구원할 수 있는 것인가? 오, 형제자매들이여, 여기까지 말할 때 나는 "할렐루야" 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 계실 때 지옥의 고통뿐 아니라 죄의 고통까지도 생각하셨다. 그분은 죄의 형벌의 고통뿐 아니라 죄의 권세의 고통도 생각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 형제자매들이여, 십자가에서 그분은 지옥의 고통을 돌아보셨을 뿐 아니라 죄의 고통도 돌아보셨다. 바꾸어 말해서, 그분의 구속의 역사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와 근거를 예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과 같은 생활을 살지 않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죄인들에게 전해 줄 복음이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죄인들' 에게 전해 줄 복음도 있으므로 "할렐루야!" 라고 말해야 한다. 전에 십자가의 구원이 당신에게 전파되었듯이 오늘 '그리스도인 죄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 죄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하신 생명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체험이 어떤가를 보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하신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명을 살아 나타내야 하는가? 이것은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이것을 알 때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결핍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이제 우리는 몇 군데 성경을 보기로 하자. 1. 죄들을 벗어난 생명임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고 말한다. 이번에 연대와 북평에 있는 몇몇 형제들은 나에게, 과거에는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으나 이제는 "예수! 내 구주!" 라고 부르겠다고 말했다. 왜 그분은 예수라 불리우는가? 그 이유는 이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예수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했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구주가 되었고 당신이 죄 사함 얻은 것은 사실이며 또 이를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예수님이 이루신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죄 가운데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는가에 있다. 당신의 옛 성질이 아직도 당신을 찾아오고 당신의 죄악이 아직도 당신을 묶고 당신의 생각이 여전히 전과 같이 당신에게 달라붙어 있고 당신이 전과 같이 자신을 위하는가? 아니면 당신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는가? 내가 여러 차례 말한 구명대와 구명선의 비유를 오늘 한번 더 사용하겠다. 바다 속에 빠진 사람에게 구명대를 던져 줄 때 그 사람이 구명대를 붙잡으면 가라앉지는 않지만 물속에서 올라오지도 못한다. 가라앉지는 않지만 올라오지도 못한다. 이것은 죽어 있는 상태 같지도 않고 살아 있는 상태 같지도 않다. 그러나 구명선은 이렇지 않다. 구명선을 사용할 때는 바다 속에 빠진 사람을 배 안으로 구출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의 구원하는 방법은 구명대의 방법이 아니라 구명선의 방법이다. 주님은 죽어가는 상황도 아님 그렇다고 완전히 살아난 상황도 아닌 그 중간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죄 중에 남겨 두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성경 안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미 믿었지만 아직 죄에서 나오지 못하고 죄 중에 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이 틀렸다는 말인가? 아니다. 성경은 틀리지 않다. 우리의 체험이 틀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을 때 또 무엇을 하셨는가? 성경에서는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가? 다음을 계속 보도록 하자. 2.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갖는 생명임 누가복음 1장 69절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으니" 라고 말하고 74절과 75절에서는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그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리라." 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뿔을 얻었다. 이 구원의 뿔은 우리를 위해 무었을 했고 또 어떤 단계에까지 우리를 구원하였는가? 그분은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출하셨다. 그분이 우리를 구출하신 후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하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그분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후 다만 우리가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시는가? 다만 이것뿐인가? 만일 이런 것에 불과했다면 우리는 다만 때때로 의와 성결로 그분을 섬겼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섬기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활은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한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일생토록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너무나 부끄럽게도 우리는 이 모든 날들 동안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성경 말씀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의 체험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 말씀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의 체험은 옳은 것이다. 과거에 나는 성경에서 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자주 생각해 왔다. 성경에 따른다면, 무릇 주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은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 만일 성경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의 체험은 옳은 것이고 성경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당신의 체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3. 주님으로 인해 완전히 만족하는 생명임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말한다. 이 한 마디는 얼마나 귀한가? 주님은 그분이 주는 물이 그분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낯선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곧 생수를 얻을 것이며 이 생수가 당신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형제자매들이여, 목마름이란 무엇인가? 목마름은 충분히 만족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이 주신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불만이 해소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만족하는 것임을 인해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다만 갈증이 해소되는 정도로 만족했다 하자. 그러면 그에게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히 만족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당신이 도시의 대로를 지나갈 때 목마르지 않았는가? 당신이 커다란 백화점 앞을 지나갈 때 목마르지 않았는가? 당신은 이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저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것은 목마름이 아닌가? 당신의 동급생이나 동료들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며 목마르지 않았는가? 당신은 그러한 것들을 갖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니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이러한 생명이지만 우리의 체험은 이렇지 않다. 주님은 그분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주님이 있어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른 일들과 다른 것들이 있어야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틀렸는가 아니면 우리의 체험이 잘못되었는가? 둘 중의 하나가 틀린 것이다. 주님은 부도수표를 내지 않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다 우리에게 주신다. 과거 우리의 체험은 한 찬송가에서 말했듯이 '절반의 구원'이었다. 주님은 믿는 사람이 왜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그 사람 속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속에 새로운 요구와 만족이 생겼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서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고 있는가? 우리는 누가복음 1장 75절에서 제사장 사가랴가 말한 것처럼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며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고 있는가? 우리 안에는 매 시간 솟아나서 다른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샘물이 있는가? 중국에 '무위(無爲)',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계시면 만족하므로 '무구(無救)'.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주님으로 만족한가? 당신은 참으로 주 예수님으로 만족한가? 만일 당신이 만족하지 않다면 당신의 생활은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4. 영향력이 충만한 생명임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는 "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고 말한다. 누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가? 특별한 그리스도인이나 사도가 아니요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아니라 모든 믿는이들, 곧 당신과 나처럼 일반적으로 믿는 이들이다.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과 나를 접할 때 만족을 얻고 목마름이 그치게 된다. 나에게 한 친구가 있는데, 당신은 그녀를 만날 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속되고, 야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탐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당신이 어떤 일에 대해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 하자. 그녀를 일단 접하면 당신은 주님이 이미 충분히 당신을 만족케 하셨음을 느끼게 된다. 어느날 당신이 어떤 일에 대해 만족스러워한다 하지. 당신이 그녀를 접하면 당신이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주님은 믿는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모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체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특별한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체험이 아니라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체험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사람들이 당신을 접할 때 더 이상 목마르지 않다고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목마르다고 하는가? 가령 형제들이 와서 고통에 대해 불평하면 나도 고통스러운 것을 불평하고. 당신도 나도 다 근심을 이야기하며, 다 실패한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다 생수의 강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이다. 심지어 당신은 다른 사람의 풀을 말려 죽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의 잘못이다. 하나님은 틀릴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잘못이 우리에게 있지 않겠는가? 5. 죄의 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생명임 사도행전 3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성전 행각에서 전한 메시지도 역시 우리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성취하신 일도 바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체험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들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알고 있는 죄들을 마땅히 이겨야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들을 이기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주님을 힘입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수년 동안 우리를 따라 다니는 여러 가지 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죄들을 모두 이겨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표준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어쩌다 가끔 죄를 범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가끔 이김을 체험한다. 우리의 체험은 얼마나 비정상인가? 로마서 6장 1절부터 2절에서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주 예수를 믿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다. 주 예수를 맏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죄에 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음 구절에서 대답을 볼 수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6:3)". 바꾸어 말하면, 침례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침례 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6:4)".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일상생활이다. 침례 받은 사람은 모든 행동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이 말씀은 어떤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고 침례받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다. 우리 각 사람이 다 침례를 받았으므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체험이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인가? 로마서 6장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고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매우 귀히 여긴다! 형제자매들이여, 어떤 사람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가? 앤드류머레이 뿐인가?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 뿐인가? 아니면 모든 믿는 사람이 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가?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이들 가운데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우리 가운데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우리가 다 은혜 아래 있다. 그러나 14절 앞부분에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는 문장이 있다.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함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이기는 것이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아님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이기는 것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체험인 것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하자.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다 은혜 아래 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나는 갓 구원받았을 때 이 구절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나는 많은 승리를 체험했고 여러가지 죄들을 이겼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롭게 대하셨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죄가 나를 주관했었다. 실제로 몇 가지 죄들이 늘 다시금 나를 찾아왔다. 나는 여러가지 죄들을 이겼지만 여전히 몇 가지 죄들이 있었다. 이것은 마치 어떤 형제를 만난 체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길에서 어떤 형제를 만나 그에게 인사했다. 잠시 후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 나오다가 또 그 형제를 만나서 인사했다. 그리고 다음 번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나왔는데 또 그 형제를 만나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다른 길로 가다가 또 그와 마주쳐 고개로 인사했다. 이렇게 그날 나는 연이어 다섯 번이나 그와 마주쳤고 다섯 번이나 그에게 인사했다. 우리가 마주치는 것도 그 형제와 마주쳤던 것과 같다. 마치 죄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 끊임없이 우리와 마주치고 계속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질이 계속 따라다니고, 어떤 사람은 교만이, 어떤 이는 질투가 계속 따라다니며, 어떤 이는 게으름이, 어떤 이는 거짓말이 계속 따라다니고, 어떤 이는 인색함이, 어떤 이는 비열함이 계속 따라다니며, 어떤 이는 이기주의가 계속 따라다니고, 어떤 이는 더러운 생각이, 어떤 이는 더러운 정욕이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아무튼 개개인마다 계속 따라다니는 한 가지 죄가 있다. 나 개인에게는, 계속 나를 따라다닌 몇 가지 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죄가 나를 주관했다고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 당신은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한다고 하셨으므로 잘못은 저에게 있습니다." 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않고 내게 있음을 시인할 따름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당신의 생활이 실패한 생활이라면 이것은 하나님 의 정하심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하신다. 로마서 8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한다. '정죄'에 대해 이미 수차 말한 바 있다. 이십 년 전 고대 사본을 발굴했던 사람은 이 단어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일반적인 의미이고 또 하나는 법률적인 의미이다. 일반적인 의미에 따르면 '무능'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무능함이 없나니."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웨슬레만을 위한 것인가? 마르틴 루터만을 위한 것인가?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무능함이 없나니."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이들에게는 더 이상 무능함이 없다. 2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말한다. 내가 이것을 한번 말하고 심지어 백 번 말하여도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곧 특별한 그리스도인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무능함'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7장에 따르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며, 원함은 내게 있으나 행함은 없는 것이다. 내가 무능하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역사가 결심한 후에 그러한 결심을 다시 무너뜨리는 것의 연속이다. 뭔가를 계속 결심하지만 다시 실패를 반복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무능함이 없다고 하셨다.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일이 계속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법은 어떤 장소, 어떤 상태에서든 똑같은 한 가지 방법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갖는다. 법은 바로 항상 있는 어떤 현상이고 일정한 성향이며 항상 반복되는 어떤 상태이다. 예컨대, 땅의 중심에는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언제든지 당신이 어떤 물체를 공중으로 던지면 그 물체는 중력 때문에 항상 땅으로 떨어진다. 이 중력이 하나의 법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화를 내는 것이 하나의 법이다. 한두 번은 참고, 세 번째에는 약간 꿈틀대다가 네 번째는 크게 성질을 낸다. 이 형제와 부딪쳐 보아도 이러하고 저 형제와 부딪쳐 보아도 이러하다. 처음에는 참을 수 있어도 후에는 폭발해 버린다. 매번 시험받을 때마다 결과는 항상 이렇다. 많은 때 교만도 이와 같다. 남이 당신에게 한 마디 칭찬할 때에는 당신의 마음이 아직 움직이지 않아도 두 마디 칭찬하게 되면 당신의 얼굴은 빛나는 것 같다. 무릇 똑같은 절차를 거쳐서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곧 법이다. 죄를 짓는 것도 하나의 법이 되었다. 많은 형제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는 좋아하다가 어떤 일을 부딪치면 화를 내게 된다. 그들이 여러 가지 것들을 이길 수 있지만 어떤 것만 부딪치면 죄가 꿈틀거린다. 형제자매들이여, 특별한 그리스도인만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늘 이후로 더 이상 무능하지 않고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위의 성경 구절들은 모두 사실이지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이런 체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 일치되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6. 모든 환경을 이긴 생명임 로마서 8장 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고 말하고, 37절에서는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 말한다. 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기신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이나 칼은 고사하고 남이 약간 좋지 않은 얼굴색만 비치어도 즉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겼다고 말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체험이 되어야 한다. 승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체험이지만 패배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체험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른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넉넉히 이겨야 한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막론하고 우리는 이것들을 이길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어려움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미친 사람들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할렐루야! 우리는 미친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개의치 않고 다 넉넉히 이겼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놓으신 체험이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은 어떠한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런 체험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생활을 체험하는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환난이 오기 전에 미리 소리를 지르며 " 인내해야 한다. 지금 나는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길을 발견한다면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는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말한다. 형제자매들이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때로 승리하고 때로 실패하는 것이 아니며, 오전에 실패했다가 오후에 승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이기는 생활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시험을 받았는데 시험을 이겼다면 밤에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해야 한다. 당신이 이기지 못한 것이 기이한 일이 되어야 하고, 당신이 이긴 것은 일반적이며 자주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 7.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생명임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은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쎄서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한다. 여러분은 에베소서 2장 10절이 8절과 9절에 뒤이은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앞 구절에서는 너희가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10절 에서는 우리가 그의 만드신 바로서 우리로 선한 일을 하도록, 곧 하나님 께서 전에 예비하신 바 안에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이것 또한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 인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려 하심이다.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선을 행하는가 아니면 선을 행하면서 항상 원망하는가? 예를 들어, 당신이 바닥을 닦고 있다 하자. 당신은 한 면으로는 바닥을 닦으면서 또 한 면으로는 왜 우리 한두 사람만 닦고 다른 사람은 닦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당신의 이런 생각은 교만이 아니라면 원망일 것이다. 이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고 선을 행할 줄 알며 인색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고 남 주기를 아까와하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기꺼이 남에게 줄 수 있다. 만일 아주 좋은 그리스도인만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통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행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체험이 되어야 한다. 8. 빛이 충만한 생명임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정하신 생명이다.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 사람은 특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무릇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 빛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일 따름이다. 빛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9. 온전히 거룩케 된 생명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이다. 바울이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라고 한 것은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한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수 있고 온전히 흠이 없게 보존하실 수 있다. 오늘 내가 말한 것들은 다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주님이 예비하신 것 들이다. 주님의 구원은 능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죄를 이기고 죄의 얽매임을 받지 않으며 죄를 발 밑에 밟을 수 있고 하나님과 간격없는 교통을 갖게 한다. 이것은 주님이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만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체험할 필요성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의 체험은 어떠한가? 만일 당신의 체험이 성경과 다르다면 당신은 아직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다. 오늘 당신에게 한 가지 소식을 알여 주겠다. 그것은 곧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께서 성취하신 것은 당신을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죄의 고통에서도 해방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완전한 구원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가 날마다 이 땅에서 초보적인 구원을 얻게 할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매일 승리하게 한다. 승리란 무엇인가? 승리는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는 면에 있어서 추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을 때 약간 부족한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 땅에서 표류하는 인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대신에 우리가 완전한 해방을 체험하는 것을 보기 원하신다. 우리가 믿을 때 완전하게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보충 수업이 필요하다. 즉 과거에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을 보충해주는 이기는 체험이 필요하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의 구원이 다만 우리가 죄를 짓고 난 후 통회하는 것을 반복하도록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우리가 여전히 범죄할 수 있는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죄에 묶였다. 이제 이미 구원받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죄에 묶여 있단 말인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가 다스렸지만 지금은 이미 구원받았는데 여전히 죄가 다스려야 한단 말인가? 죄는 하나님과 완전히 상반된다. 우리는 죄가 조금이라도 우리 안에 남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과 상반된 어떤 것을 하시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죄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 기질적인 죄든지 연약함에 속한 것이든지 몸과 관련된 죄이든지 생각에서 지은 죄이든지 죄는 항상 죄이다.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자. "주여, 당신께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성취하신 것은 나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구원의 체험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음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기 바란다. 우리가 이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기 바란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우리의 체험이 성경에서 말한 것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겨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 자신을 드러내시기 원한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속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주님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형제자매들은 주님의 십자가가 어떤 일들을 성취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가신 것이 당신을 다만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거짓말하지 않아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억누를 수 있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자신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다. 주님의 승리가 죄를 완전히 부서뜨린다. 할렐루야! 죄가 이미 주님의 발 밑에 짓밟혔다! 오,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통을 체험하지 못하고 죄를 짓밟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축복하시기 원한다. |
3장, 이기는 생명의 성질 -
이기는 생명의 성질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사무엘상 15장 29절 " 이스라엘의지존자(능력)"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미국표준역(ASV)에서는 "이스라엘의 승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승리란 무엇인가? 신. 구약 전체에서 첫 번째로 승리가 언급된 곳은 사무엘상 15장 29절이다. 여기서 승리는 거짓이 없고 변개함이 없다고 말한다. 오, 승리는 바로 한 인격이다. 어떤 물건이나 일은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승리는 한 인격이다. 승리는 어떤 물건이나 일종의 체험이 아니요 어떤 일도 아니며 한 인격이다. 우리는 이 인격이 누구인지 안다. 이 인격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어제 나는 여러분에게 승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고 우리의 체험도 아니라고 말했다. 오, 승리는 한 인격이다! 승리는 당신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을 대신해 살아 나타난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승리는 거짓이 없고 변개함(후회함)이 없다. 승리가 살아 있는 인격이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오늘 저녁은 어제 저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승리가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다. 즉 이기는 생명의 성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성경에는 이기는 생명의 성질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다섯 가지만 언급하겠다. 이 생명의 의미 - 개선된 생명이 아니라 바뀐 생명임 형제자매들은 승리가 개선된 생명이 아니라 바뀐 생명임을 주의하라 승리는 내가 개선된 것이 아니라 바뀐 것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구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있다.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성경 구절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 오직 한 가지 곧 생명이 바뀌었다는 뜻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내가 아니요 나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근본적으로 내가 아니요 나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악한 내가 좋은 나로, 더러운 내가 청결한 나로 고쳐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아니요"이다. 오늘 사람들은 승리란 계속 진보하는 것이고 실패란 계속 퇴보하는 것이라는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성질을 내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내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수 있으면 승리할텐데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승리는 당신과 무관하고 당신과 상관없음을 기억하라. 어떤 형제는 울면서 자신은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 형제에게 "형제여, 참으로 당신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또 자신이 승리할 수 없고 조금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 하나님은 형제에게 자신 안에서 승리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쁜 성질을 좋은 성질로 고치고 당신의 강퍅함을 온유하게 고치며 염려를 기쁨으로 고치시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자매는 나에게 " 다른 사람은 쉽게 승리하지만 나는 승리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나는 남보다 성질이 나쁘고, 나보다 생각도 깨끗하지 않으며, 남보다 교활하고, 자신을 통제하지도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렇습니다. 당신은 승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승리할 방법도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 조금 더 얌전하고 성질이 더 낫고 생각도 단순하면 승리하기가 더 쉽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이 남보다 온유하고 거룩하며 온전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야만 승리할 수 있다. 사람이 남보다 악하고 더러우며 흠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그리스도가 들어오시게 하면 승리할 수 있다. 성질이 아주 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주 예수를 믿어야 할 뿐 아니라 성질이 아주 좋고 도덕적인 사람도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성질이 아주 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승리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성질이 보다 좋고 도덕적인 사람도 승리가 필요하다. 승리는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한번은 한 자매를 만났다. 나는 그녀처럼 승리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자매를 본 적이 없다. 그녀는 " 만일 당신이 승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 보려 한다면 나를 찾으시고, 승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 보려 한다해도 역시 나를 찾으십시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로 인하여 마음 아파했고 심지어 자살까지도 시도했었다. 그녀에게는 정말 소망이 없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주 예수님은 좋은 환자를 만나셨군요. 주 예수님은 오늘 왕진하실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와 교만으로 가득했고 또 자신의 성질로 가득했다. 만일 당신이 승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녀에게서 이 많은 것들을 들을 때 당신 자신도 그녀에게 전염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승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녀의 이런 말을 들은 후 아마 당신은 정말 소망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여기에 복음이 있다! 만일 당신이 거쳐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바꾸어 버리면 된다.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이기는 생명은 고쳐지고 개선된 것이 아니라 바꾸어진 것이다. 만일 당신이라면 이것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어떤 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문제는 당신이 승리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는가에 달렸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다면 당신이 지금보다 열 배나 나쁘다 하더라도 문제없다. 형제자매들이여, 승리란 무엇인가? 승리는 당신 자신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 승리한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해 이기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볼 수 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복건(福建) 사람들이 남을 욕할 때 하는 말 중 "죽어도 변한게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좋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북평에서 형제들에게, 우리 각자는 다 자신에게 "죽어도 변한게 없다" 고 말해야 하나고 한 적이 있다.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우리는 고쳐진 것이 아니라 바꾸어진 것이다! 어떤 자매는 나에게 개선하는 것은 무엇이고 바꾸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 가지 비유로 말하겠다. 만일 내 손에 낡고 헤어진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있다 하자.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책표지를 한 겹 더 싸고 풀로 붙이고 아마 금박으로 칠 할 것이다. 또 성경 속에서 없어진 글자를 채워야 하고 잘 안보이는 것을 다시 써 넣어야 할 것이다. 많은 절차가 필요하고 또 얼마나 많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른다. 또 잘 고쳐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 한 권을 새것으로 바꾸는 것은 일 초면 충분하다. 당신은 나쁜 것을 내게 주고 나는 좋은 것을 당신에게 주어 바꾸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당신에게 주셨으므로 당신은 조금도 힘을 들일 필요 없이 바꾸기만 하면 된다. 또 한 가지 비유를 인용하겠다. 몇 년 전 내가 시계 하나를 샀는데 시계 점포에서는 그것에 대해 2년간 보증을 서 주었다. 그러나 이 시계는 내 집에 있을 때보다 시계 점포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시계가 하루 이틀 정도 가다가 정확하지 않아서 다시 점포에 가져가 수리하고 또 수리했다. 나는 한 번, 두 번, 열 번이나 왔다갔다해서 피곤했다. 계속 수리를 했지만 결국은 고치지 못했다. 나는 시계 점포에서 다른 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점포 측은 그런 규칙이 없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점포에서 2년간 보증을 서 주었지만 그저 계속 수리를 해 주었을 뿐이다. 이렇게 8개월 동안 점포측은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지 않고 수리만 해주었고 결국은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할 수 없이 그 시계를 거기 버려 두겠다고 말했다. 사람의 방법은 계속 수리하고 고치는 것이다. 이 년 동안 나는 매일 수리하다시피 했다. 사람은 바꾸어 줄 수 없다. 사람의 방법은 계속 수리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방법은 수리하거나 고치는 것이 아니라 대치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사야 61장 3절을 보기로 하자.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대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재를 좋게 수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화관으로 재를 대신하신다. 하나님은 슬픔을 수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락의 기쁨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근심을 수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는 것이다. 고쳐서 변케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밥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바꾸는 것이다. 몇 년 동안 계속 고칠 수 없는 나를 바꿔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이것이 거룩함이요 온전함이다. 이것이 승리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다! 할렐루야!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온유가 나의 온유이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나의 거룩함이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기도 생활이 나의 기도 생활이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교통은 나와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이제부터 내가 이기지 못할 만큼 큰 죄가 없다. 이제부터 내가 이기지 못할 만큼 큰 시험도 없다. 왜냐하면 승리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큰 죄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무슨 큰 시험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제부터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이기는 생명의 원칙 - 보상이 아니라 선물임 승리는 선물이지 보상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선물이란 무엇인가? 선물이란 당신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다. 당신이 수고로 얻은 것은 보상이다. 당신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값없이 얻은 것은 선물이다. 하나는 당신과 조금도 관계가 없고 당신이 조금도 힘들일 필요 없이 당신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당신 자신이 일하고 힘들여야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한 이기는 생명은 당신이 힘들일 필요가 없는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을 보자,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오, 이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한 것이다. 우리의 이김은 자기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얻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구원은 값없이 얻는 것이지만 승리는 자기를 의지해 얻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구원받는 데 있어서 공로가 쓸모없고 조금도 행위를 더 할 수 없고 다만 단순히 십자가 아래 와서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하면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행의로 구원받을 수는 없으나 구원받은 후에는 선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신이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으나 선을 행함으로 이기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당신이 선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듯이 당신은 선을 행함으로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이 조금도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또 지금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살고 계신다. 육신에서 나온 것을 하나님은 조금도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주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후에는 마땅히 선한 행위를 가지려고 하고 아주 선하게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이 구원받은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당신은 얼마나 선하게 되었는가?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우리는 조금도 선하게 될 수 없다. 이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되 값없이 주신 것임을 인해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서는 죄와 율법과 사망에 대하여 말하고, 5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셨다고 말한다. 이 이김은 죄를 이길 뿐 아니라 율법과 사망을 이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속은 죄악을 이길 뿐 아니라 능히 율법도 이길 수 있으며 율법을 이길 뿐 아니라 사망도 능히 이길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여러분이 앉아있는 자리를 한 바퀴 돌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이김을 주셨다는 복음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다. 아마 당신은 어떻게 해야 시험을 이길 수 있을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또는 어떻게 해야 내 성질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교만을, 어떻게 해야 내 질투를 이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당신은 얼마나 많은 힘을 들이고 얼마나 많이 실망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주겠다. 주 예수의 온유가 바로 당신에게 값없이 주어졌고, 주 예수의 거룩함도 당신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주님의 기도가 당신에게 값없이 주어졌고, 주 예수의 모든 것이 다 당신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당신이 주 예수를 영접할 때 주 예수의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소유가 된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이 아니면 무엇인가! 당신은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간격 없는 교통을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소극적인 것들을 처리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당신은 성질을 내지 않기 위해서 매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죄를 자백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죄 짓는것을 중단하지는 못한다. 당신이 자주 하는 거짓말을 고치려고 많은 힘을 들이지만 거짓을 말할 것이다. 나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해 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고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두세 마디를 하다가 거짓말을 하게 된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의 거룩함과 인내와 온전하심과 인애와 미쁘심을 당신에게 값없이 주신다는 이 복음을 전해주겠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에게 이것들을 주신다. 주님과 하나님이 누리는 친밀한 교통, 주님이 사셨던 거룩한 생활, 그리스도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주신다. 이것은 하나의 선물이다. 당신이 자기를 의지해 승리하려 한다면 또 다른 이십 년이 걸려도 당신의 성질을 고치지 못하고 당신의 교만을 제할 수 없다.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 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인내가 나의 인내가 되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나의 거룩함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교통이 나와 하나님과의 교통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미덕들이 나의 모든 미덕들이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구원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은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죄인을 보았는가? 나는 이런 사람을 많이 만났다. 당신이 죄인을 만날 때, 그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으며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당신에게 주셨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영접하면 된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와 같이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한 메시지를 전해주겠다. 당신은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당신에게 주셨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영접하면 승리하게 된다. 구원받기 위해 당신의 노력이 필요치 않듯이 이김 또한 당신의 노력이 필요치 않으며, 이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구원이 우리가 힘들이지 않고 얻는 것이듯 승리 또한 힘들이지 않고 얻는 것이다. 여기 당신에게 줄 성경 한 권이 있다하자. 이 성경 안에 있는 글자는 당신이 쓴 것이 아니요 책 표지도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요 금박도 당신이 입힌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남이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이기는 것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서서히 한 단계의 승리에서 다른 단계의 승리에 이를 수 없고 서서히 거룩함에서 거룩함에 이르고 온전함에서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 만일 이 세상에 이기는 자가 있다면 그의 이김은 분명히 주 예수에게서 얻은 것이다. 최근에 나는 한 자매를 만났다. 그녀는 이십 년에 걸쳐서 그녀의 교만과 성질을 이기기를 바랬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이십년 동안 이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갈수록 나빠지고 아무런 방법이 없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의 노력으로 당신의 교만을 이기고 성질을 이기려고 한다면 또 다른 이십 년이 걸려도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만일 오늘 당신이 죄에서 해방받기 원한다면 빨리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당신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받기만 하면 당신의 것이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승리이시다. 당신이 그분을 당신의 승리로 영접한다면 당신은 즉시 승리하게 된다.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준 이 은사를 받았다. 오늘 당신은 자신의 일에 대한 공허함과 생활의 실패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당신은 이기게 된다. 당신은 로마서 6장 14절을 잘 알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왜 죄가 여러분을 주관치 못하는가? 이는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율법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차 말했듯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것을 말한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은혜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일한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한다면 죄가 우리를 주관할 것이다. 우리가 일한 결과는 바로 죄가 우리를 주관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일하신다면 죄가 주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율법 아래서는 내가 일하는 것이고 은혜 아래서는 하나님께서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죄가 결코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이것이 바로 승리이다. 우리 자신이 노력해서 만들어 낸 것은 결코 승리가 아니다. 승리는 값없이 얻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어떤 사람이 많은 죄를 범하고 지칠 정도로 죄를 범하여 더 이상 그리스도인 답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당신에게 말하지만, 여기서 만일 그 사람이 다만 이 은사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즉시로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김의 원칙은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선물을 받는다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이 생명을 얻는 방법 -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임 이기는 생명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얻을 수 있을 뿐 이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얻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취한다는 것이다. 도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달한다는 것은 당신이 어느날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 먼 길을 서서히 걸어가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의 이김은 서서히 걷고 또 걷는 것이 아니다. 한번은 내가 고령에 올라가는데 오신량 형제가 나에게 산에 같이 올라가지고 요청해 왔다. 우리는 서서히 걸었는데 걸을수록 나는 힘이 들었다.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내가 오 형제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가 그는 거의 다 왔다고 했다. 그러나 제법 많이 갔는데에도 아직 정상이 보이지 않고 여전히 더 걸어야 했다. 오 형제에게 몇 번 물어볼 때마다 그는 거의 다 왔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만일 내가 가마를 타고 산에 올라왔다면 나는 고령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고령을 '얻은 것'이다. 이김은 우리가 애써서 도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얻은 것이다. 성령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다 영접한 것이다. 이김에 관한 것들도 또한 다 영접한 것이다. 로마서 5장 17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김이 다만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에 당신이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김은 당신이 서서히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김은 하나의 선물로 당신 손에 가져다준 것이므로 당신은 조금도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 장 형제에게 내가 이 성경을 선물한다면 얼마의 힘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일 초에 얻게 된다. 이 성경은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당신이 집에 돌아가 금식할 필요가 있는가? 당신이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는가? 당신은 앞으로 성질을 내지 않겠다고 결심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다만 영접하면 된다. 당신이 이 성경을 받기 위하여 어떤 절차를 밟았는가? 어떤 절차도 없이 다만 손을 내밀면 당신의 것이 된다. 이김은 하나의 선물이다. 당신이 그것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얻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구절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지혜는 포괄적인 제목이므로 잠시 한쪽에 두기로 하자. 여기서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다음 세 가지, 즉 (1) 의로움 (2) 거룩함, (3) 구속함이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언제 그분을 우리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는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와 주 예수를 우리 의로 영접할 때라고 답할 것이다. 당신이 삼일 동안 운 다음에야 이 의로움을 얻는가? 하나님께 충분히 잘못을 사과한 후에야 이 의로움을 얻는가?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당시을 대신하여 죽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당신이 믿을 때 즉시 이 의로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주 예수를 거룩함으로 취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며 노력한다. 당신이 주님을 당신의 의로 영접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이 주 예수를 당신의 거룩함으로 영접하는 것도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서서히 걸어서 거룩함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거룩함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도 역시 이김을 얻을 수 없다. 얻는 것과 도달하는 것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오직 한 가지 차이 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시간의 문제이다. 하나는 즉각적이고 또 하나는 점차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닭을 훔쳤던 것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본래 그는 한 주에 일곱 마리를 훔쳤는데 후에 자신을 개선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일 주일에 한 마리씩 덜 훔침으로써 육 주가 지난 후 완전히 도적질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서서히 훔치는 양을 줄여갔다. 그러므로 그가 더 이상 도적질하지 않게 된 것은 서서히 도달한 것이지 즉각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이김은 즉각적으로 얻는 것이다. 지난번 연대(煙臺)에서 나는 성질이 아주 고약한 한 형제를 만났다. 그가 한번 화를 내면 그의 식구들은 모두 그를 무서워한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뿐 아니라 그의 가게 일꾼들도 그를 무서워한다 때로 그가 집회 장소에서도 화를 내기 때문에 형제들까지도 그를 무서워한다. 그는 나에게 자기 성질에 대하여 조금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만일 당신이 주님을 당신의 이김으로 영접한다면 당신은 즉시로 이기게 된다고 말해 주었다.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는 이 말을 받아들였고 이겼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니 형제님, 제가 이김을 얻은지 얼마나 되었나요?" 라고 물었다. 내가 계산해 보니까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이 기간 중 언제인가 제 아내가 병을 앓아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이전에는 아이가 병에 걸렸을 때 나는 조급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왔다갔다하며 안색이 좋지 않고 아주 쉽게 화를 내었습니다. 이번에 제 아내가 병에 걸려서 맥박 뛰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작은 소리로 하나님께 심지어 당신이 그녀를 데려가시더라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묘하게도 저의 성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후에 그의 아내의 상태는 조금 더 좋아졌고, 그 형제는 침을 놓는 의사를 불러다가 침을 몇 번 맞게 하여 인내로 아내를 섬겼다. 내가 떠나려고 하던 날 그 형제는 나를 바래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지난 스무 시간 동안 제 아내가 병에 걸렸는데 남의 부인이 병에 걸린 것같이 조금도 다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봉 사업을 하는데 항상 여공들을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 이 한달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발생했는지 모릅니다. 옛날 같았으면 큰 소리를 질렀을 텐데 이번에는 내 일 같지 않고 또 나는 웃으면서 그들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말했습니다. 오, 내 성질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얻는 것이다. 만일 도달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이십 년이 걸려도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김은 얻는 것이지 도달하는 것이 아님을 인해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오늘 여기서 만일 당신이 얻기를 원한다면 즉시로 얻을 수 있다. 인도에 간 어떤 여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녀는 화를 잘 내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자주 화를 냈다. 심지어 그녀는 만일 내가 인내할 수 있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인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었던 한 친구가 그리스도를 이기는 생명으로 취하는 비결을 얻은 후에, 이기는 생명은 얻는 것이라는 내용으로 그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선교사는 편지를 받고서 편지에서 말한 대로 실행하였다. 그 선교사의 친구는 삼 개월 후에 그녀의 회신을 받았는데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의 편지를 받고서 저는 이것이 복음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인내로 취할 때 제 성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과거 저의 실패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삼 개월 간 시험을 한 후에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인도의 일꾼들은 아주 장난이 심하고 우둔합니다. 과거에 나는 문을 닫을 때마다 항상 문을 쾅하고 닫았습니다. 내가 화난 것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당신의 말대로 실행한 뒤 문을 닫을 때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닫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할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오, 죄를 이기는 것은 당신이 힘쓸 필요가 없고 완전히 주님이 당신에게 이루어 주시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힘입어 하려고 한다면 백 년을 더 하더라도 불가능 하다. 형제자매들이여, 거듭 말하거니와 이김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다. 이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의 기적임 바울이 우리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어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자신이 힘을 써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다. 이 거룩한 생명과 온전한 생명은 우리가 힘써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는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사악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실패를 느끼지 못하고 또 자신의 무능함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의 성질이나 교만이나 개성에 대하여 만일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면 정말 구할 길이 없고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이기지 못한다.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사람의 방법은 죄를 억누르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나님은 기적으로 당신의 옛 사람을 제해 버리고 당신의 마음을 청결케 하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김이 무엇인지를 보았다면 당신은 얼마나 즐거워하고 기뻐할지! 보통 사람보다 성질이 고약한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과 자녀들 또는 일꾼들 중에서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성질이 이렇게 불 같은 것에 대하여 참으로 방법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녀는 주 예수를 그녀의 승리로 영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큰 시험을 당했다. 그녀가 주 예수를 승리로 얻은 그 이튼날 아침 잠에서 깬 후 일층으로 내려왔다. 아래층에서는 남편과 일꾼들이 샹들리에를 달고 있었는데 그 샹들리에는 값비싼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과 일꾼들이 그것을 달면서 부주의로 땅에 떨어뜨려 샹들리에가 깨져 버렸다. 바로 그때 그녀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남편은 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꼼짝못하고 이제 그녀가 얼마나 화를 낼 것인가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조용하게 "깨진 조각들은 쓸어버리세요" 라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이상히 여겼다. 평상시 작은 컵이나 접시를 깨뜨려도 화를 냈기 때문에 오늘은 아마 크게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그녀의 이러한 상태를 보고 "당신 어젯밤 잘 잤소? 어디 아프지는 않고?" 라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 어디 아픈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저의 옛 사람을 제하여 주셨어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 이것은 정말 기적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라고 말했다.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주일 학교 신문사를 세웠던 트럼블 씨는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기는 생명이 진실로 기적임을 깨달았다. 한번은 어느 장로에게 자신이 자신이 주 예수를 생명으로 영접한 후 성질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성질을 낼 마음조차도 없어졌다고 간증했다. 그 장로는 그에게 당신의 말은 옛 죄들도 제해 버릴 수 있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트럼불 씨가 그렇다고 답변하자 그장로는, "당신의 말을 믿기 때문에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결코 사실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후에 트러불 씨는 그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그날 그들은 아주 긴 기도를 했고 그 장로도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느 날 트럼불 씨가 그를 만났는데 그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내 일생에서 그날 저녁에 체험한 것과 같은 것을 맛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분투나 능력이 필요치 않고 하나의 기적입니다! 이제는 그런 욕망도 그러한 마음조차도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참 놀랍고 참으로 기적입니다." 얼마 지난 후 그는 트럼불 쎄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일하는 곳에 이사회가 있는데 거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악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거기 있을 때는 항상 자신을 억눌렀으나 이번에 갈 때는 그런 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러한 죄에 대한 마음조차도 없어진 것 같습니다." 오, 이 어떠한 기적인가!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에게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는가? 처리하지 못하는 죄는 없는가? 만일 있다면 주 예수님은 똑같이 우리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당신이 수년 동안 방법이 없었지만 그분은 즉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당신의 죄가 영적인 죄이든, 육신에 속한 죄이든, 생각에 속한 죄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기질적인 것이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한 죄이든, 헌신하지 못한 죄이든, 죄를 자백하지 않은 죄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은 다 즉각적으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헌신할 수 없는가? 그분은 당신을 헌신하게 할 수 있다. 인내할 수 없는가? 그분은 당신으로 인내하게 할 수 있다. 주님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죄들을 능히 이기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 생명의 결과 - 억누르는 생활이 아니라 표현되는 생활임 이기는 생명의 결과는 억누르는 생활이 아니라 표현되는 생활이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소유한 '승리'가 대부분 억누름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는데 있다. 나이든 여자 분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화가 날 때마다 힘써 성질을 억눌렀다. 곁에서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억지로 누르고 있다. 이러한 억누르는 생활이 몇 년간 계속되다 보면 속에서는 내적인 출혈이 있게 된다. 그렇게 억누르는 생활 안에는 쓰라림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김은 억누르는 생활이 아니라 표현되는 생활임을 인해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표현되는 생활은 이미 얻은 것을 살아내는 생활이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말한 "너희 구원을 이루라"이다. 과거에 우리는 가능한 한 철저하게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한 그리스도의 이김은 담대히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과거에는 억누를수록 좋았지만 지금은 표현할수록 더욱 좋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살아내야 한다. 제시 펜 루이스 여사에게 시를 잘 쓰는 한 젊은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어리아이들을 이끌어 이기는 생명을 얻도록 잘 도왔다. 펜 루이스 여사는 그녀가 대체 무슨 방법으로 아이들을 인도하는지 알아보려고 어느 날 특별히 그녀에게 갔다. 그날 그녀는 열 아이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같이 먹었다. 음식을 먹고 식탁을 치우기 전에 갑자기 손님이 왔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식탁이 이렇게 지저분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깨끗한 천으로 식탁을 덮어 버리자는 생각을 짜냈다. 그녀가 좋다고 말하고 깨끗한 천을 가져와 상 위에 있는 지저분한 것을 덮었다. 손님이 떠난 후 그녀가 아이들에게 손님이 상 위에 있는 지저분한 것을 보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손님은 보지 못했지만 상은 더러운가 더럽지 않은가를 물었다. 아이들은 손님은 보지 못했지만 상은 여전히 지저분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사람들은 속이 더러워도 밖으로는 깨끗하게 보이려고 한다. 우리 마음속의 생각과 느낌을 사람들에게 열어 보일 수 없는데도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한다. 남이 우리를 칭찬할 때 우리는 자신을 겸손하다고 생각한다. 인내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에 모든 것이 다만 묶여있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솔직하게 한 마디 하는 것을 허락하라. "속에서 억누르는 모든 것은 다 이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가고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게 할 때만이 이기는 것이다. 이긴다는 것은 뭔가가 표현되는 것이다. 쉽게 성질을 내는 한 자매가 있었다. 어느 날 하인이 꽃병을 깨뜨렸는데, 화를 내지 않으려고 그녀는 즉시 자신의 침실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 썼다. 이것은 억누르는 생활이다. 과일 파는 사람이 와서 당신에게 과일을 사라고 하자 안 산다고 해서 떠나갔다고 하자. 다시 와서 두 번째 당신에게 사라고 하자 당신은 사지 않는다고 해서 떠나 갔다. 세 번째로 당신에게 와서 또 사겠느냐고 묻는다. 그 과일 장사는 과일을 팔기 위하여 성질을 억누르고 인내하며 계속 와서 과일을 팔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이김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장사하는 방법이다. 성질을 억누르는 것은 이김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김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이김은 마음이 깨끗케 되는 것이다. 오십이 넘은 한 형제가 있었는데 전에 그는 공자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주를 믿은지 삼 년이 되었는데, 주님께서 피를 흘려 죄를 씻은 일은 알았지만 기독교와 유교가 어떻게 크게 다른지를 알지 못했다. 유교의 수신은 계속 함양하고 억제하는 것에 성공해야 성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억제하고 함양하려고 노력하면서 언제나 큰 일은 별 것 아닌 일로 여기고, 작은 일은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후에 이기는 길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오늘에서야 이김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다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십자가가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속의 교리를 전파할 뿐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전한다. 그 형제는 참으로 공자의 제자였지만, 그의 안에 있는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자신이 나가고,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르지않으며, 더 이상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할렐루야를 외친다! 승리란 당신의 자아와 그 표현들이 나가는 문제이다. 이기는 생명은 바로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이상 다섯 가지는 이 생명의 성질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몇 마디 솔직한 말을 하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이김은 마치 구원받은 것과 같이 분명한 것이다. 그것을 체험한 분명한 날짜가 있다. 당신이 구원받은 분명한 날짜가 있듯이(물론 어떤 사람은 월, 일은 잊어버린 경우도 있다) 당신이 이긴 날짜를 기록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언제 이김을 통과했는지 분명한 날짜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통과해야 할 구체적인 관문이다. 당신이 이미 통과했든지 아니면 아직 통과하지 않았든지 하는 것이지 이 문제에 있어서 "아마"는 없다. 세상에는 이미 구원받았거나 아니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지 "아마 구원받은" 경우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아마", 즉 대충 이긴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마땅히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오늘은 다 말할 수 없고 나중에 말하겠지만 이김은 단지 우리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겨야 한다. |
4장,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1) -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성경 구절이다. 오늘 오후 우리는 더 자세히 보기로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그리스도이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임을 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이 생명을 체험하는 가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고자 하시고 그분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게 하여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께서 구주시라는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구주로 얻는가?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의 구원과 연결되는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신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아야 한다. 이 성경 구절의 시작이나 끝 부분에서부터 말하지 않고 중간에서부터 말하겠다. 보라, 이 구절에 놀라운 표현이 있다. "이제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바로 이김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이 바로 우리가 몇 일 동안 말해온 이기는 생명이다. 이기는 생명은 다름이 아니라 첫째는 "내가 아니요" 이며, 둘째는 "오직 그리스도" 이다. 이기는 생명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일단 " 내가 아니요", " 오직 그리스도" 일 때 승리가 있다. "내가 아니요" 에 "오직 그리스도" 가 더해질 때 곧 이기게 되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곧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임을 보았다. 그러나 오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에 이를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길로 가야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라는 말씀이 중간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앞뒤에 각각 한 마디씩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단계에까지 이른 후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우리도 같은 길을 취하여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거친 것을 우리도 거쳐야 한다. 바울이 취한 길이 우리가 취할 길이고 그가 걸은 길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일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지를 보겠다. 첫 마디를 읽어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은 어떻게 했기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단계에 이르렀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니요" 라는 말은 내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가 함께 죽었다는 진리는 우리 가운데서 오늘 오후에 처음 들은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벌써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교리가 우리 몸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육 형제님에게 묻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교리를 안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육 형제는 십여 년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효력이 있는가 없는가? 솔직히 말해 달라. 이것이 당신의 몸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했는가? 육 형제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계 형제, 당신이 알고 있는 십자가의 교리가 당신을 얼마나 인도했는가를 간증해 보라. 효력이 있는가? 바울과 같은 능력이 있는가? 계 형제는 이 몇 일 동안에 더 많은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 주겠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교리를 안지 십여 년이 되었지만 내 몸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론 효력이 있긴 있지만 많지 않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라고 말한 다음 뒤이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 교리가 우리 몸에서 별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 것 같다. 오늘 오후 나는 다만 십자기의 교리를 반복하여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 말씀이 우리 몸에서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한 다음에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 말할 수 있는가?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다 알듯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가 못 박은 것이 아니요 우리가 그곳에서 죽은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거기서 죽으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시켜 죽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질문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못 박혀 죽게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어떠한 절차를 거치고 어떤 일을 거쳐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과거 수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보았지만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보지 앟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못 박으신 것을 거듭 보았지만 우리 자신의 못 박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것"에 대해 나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보기로 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임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를 못 박았는가? 오늘 오후 나는 설교를 하려는 계획이 없고 여러분과 대화를 갖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일이지 나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왜 나를 주 예수와 함께 못 박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려주겠다. 한 강도가 판사의 판결을 받는데 법관은 그의 죄가 무겁지 않으므로 10년의 징역을 선고한다. 또 어떤 강도에 대해서는 판사가 사형을 선고한다. 당신은 왜 그 사람을 사형하는지 아는가? 왜 한 사람은 십 년 징역이고 또 한 사람은 사형인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십 년 징역을 선고받은 강도에 대해서는 판사와 국가가 아직도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좋은 국민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십 년 동안 가둔 후에 다시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강도에 대해서는 국가가 소망을 갖고 있지 않고 그의 죄가 너무 무거우며 국가에 대해 조금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를 사형시키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왜 그러셨는가? 솔직히 말해서, 이 말은 그리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이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조금도 소망을 갖지 않으신다.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전혀 방법이 없고 당신이 조금도 좋아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신다. 당신의 육신은 극도로 패괴하여 참으로 방법이 없고 오직 죽음 외에는 길이 없는 것으로 보신다. 주 예수의 역사는 당신의 육신을 변케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도, 성령도 당신의 육신을 변케하지 못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여도 당신의 육신은 변케할 수없다. 육신으로 남 것은 육신이요 영원히 변하기를 바랄 수 없으며 변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육신이 다만 죽는 데에만 적당하다고 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당신과 나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켜 못 박아 죽게 하셨다. 당신은 죽는 것외에 달리 소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첫 번째 일이 바로 침례이다. 침례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절망을 하셨고 그를 못 박아 죽게 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침례는 또한 당신이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므로 나를 들어 장사하라고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당신은 보았는가? 침례는 바로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하나님께 선포하고 또한 우리가 시인하는 것이다. 침례는 곧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할 때 당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서 나를 장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소망을 갖지 않고 나 자신에게는 조금도 소망이 없기 때문에 죽는 수밖에 없다. 오늘 나는 죽음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침례 받을 때 행한 것을 다 잊어버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를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평가는 곧 죽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죽기에 합당하다. 우리는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당신은 고치려 해도 고칠 길이 없고 때워도 때워지지 않는다. 당신은 진보하려고 해도 진보할 수 없으며 개선하려 해도 할 수 없다. 당신은 죽음외에 별다른 용도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을 주 예수의 죽음 안에 포함시켰다.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은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당신과 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우리가 조금도 소망이 없고 죽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인정하는가? 사람은 자주 자기 모순에 빠져서 모순된 생각을 갖는다. 한 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이 말을 우리는 십 년 동안 말해 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 소망이 가득하다. 한 면으로는 자신이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한면으로는 자신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계속 넘어지고 실패했는데도 여전히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런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 여인이 남편이 죽었는데 그 남편의 관을 자기 집 문 앞에 30여 년간 두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남편은 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우리도 이렇게 바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임을 믿고 자신이 죄 가운데서 죽은 자임을 믿지만 또한 스스로 아직도 호흡할 수 있고 아마 아직도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번에는 내 결심이 굳세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굳세게 결심을 하면 이길 수 있다. 이번에는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기도를 많이 하면 이길 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보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너는 죽은자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신은 당신이 죽은 자임을 보지 못했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계속해서 이미 꺼진 불이라도 부채질하면 타오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부채질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체험하려면 우리편에 영원히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 당신이 나에 대해 실망하셨기에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합니다. 당신이 나를 조금도 소망 없다고 보시므로 나도 자신을 조금도 소망 없는 것으로 봅니다. 당신이 나를 마땅히 죽을 자로 보시므로 나도 자신을 죽어 마땅한 자로 봅니다. 당신이 나를 약한 자로 보므로 나도 내가 약한 자임을 시인합니다.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나도 내가 할 수 없음을 시인합니다." 당신이 이러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가리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영원히 뒤집을 수 없다. 이미 완성된 것이다. 지금은 당신 편에 책임이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두지 않으신다. 우리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해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당신에게 말하지만, 언제든지 당신이 자신에 대해 소망을 잃어버릴때 당신은 즉시 "내가 아니요" 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가장 어려운 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소망이 없고 요구가 없으시며 그들이 아무 쓸모없는 자임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육 형제에게 상처를 줄까 염려하지 않고 말하겠다. 나는 모든 형제 앞에서 형제는 아무 쓸모없다고 선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래도 예의를 갖춰 말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 육 형제, 당신은 속까지 썩었다. 당신은 너무나 악하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나는 육 형제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너무 악하고 아무 쓸모가 없다. 죽음 외에 다른 용도가 없기 때문에 오직 죽는 것만이 길이다. 나라는 사람은 고쳐도 선하게 될 수 없고 아무런 소망이 없다. 너무 악하기 때문에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것 외에 다른 관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관점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소망을 가득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실행 방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보기로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절망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도 자신에 대해 절망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기로 하자. 우리는 잠시 갈라디아서 2장을 한 쪽에 놓고 필요할 때 다시 보기로 하자. 이제 누가복음 18장 18절로부터 27절까지를 보자. 오히려 한가지 부족함의 원칙 나는 이 단락의 성경 말씀을 아주 귀히 여긴다. 이 단락의 성경 말씀은 이김의 첫째 조건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여러분은 인내를 가지고 나와 함께 이 단락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기 바란다. 여기에 한 관원이 주 예수께 와서 영원한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원한다고 말했다. 이 영원한 생명 안에는 구원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는 구원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언급된다. 우리는 여기서 말한 그 범위가 구원과 이김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관원은 주 예수께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다. 주 예수님은 다섯 가지 엄격한 계명들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곧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였다. 이것들은 젊은 관원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젊은 관원이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으며,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젊은 관원은 이러한 다섯 가지 조건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 젊은 사람은 예수님께 "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 부터 다 지켰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계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이 다 지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 선생님, 다른 조건들은 없습니까? 다른 조건들이 없다면 저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겠군요. 저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그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당신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란 무엇인가? 주 예수님은 , "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이 한 가지가 있어야 완전하다."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 예수 앞에 나온 사람들은 다 모든 소유를 팔아야 한다는 말인가?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재물이 많은 사람들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고 이렇게 적은가? 어떤 사람은 그들이 모든 소유를 파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 26절에서는 듣는 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고 말했다. 그러나 27절에서 주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이 그 젊은 관원에게 말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젊은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간음하지 않을 수 있고 살인하지 않을 수 있고 도적질하지 않을 수 있으며 거짓 증거하지 않을 수 있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이 할 수 없음을 그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 사람은 할 수 없고 이기는 것에 있어서도 사람은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관원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에게 조건을 내세웠다. "좋다, 네가 이 다섯 가지를 할 수 있다고 했느냐? 내가 또 한 가지 일을 추가하여 네 앞에 둘 터이니 네가 할 수 있나 보자." 이제 이 젊은 관원은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 당신이 스스로 이기고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당신 앞에 두실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행함이 매우 좋다고 느낀다. 조급한 성격을 이제는 통제할 수 있고 조급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본래 교만한 사람이었으나 이제 겸손할 수 있다고 느낀다. 본래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제 별로 질투하지 않고 본래 말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말을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승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상당히 많은 승리를 체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급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말도 많지 않게 되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부족함이 있다. 다른 것들은 대충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일수도 있다. 때로는 먹기를 좋아하는 것이거나 여덟 시 아홉 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다른 죄들은 다 이길 수 있어도 무엇 때문인지 이 한 가지는 이기지 못한다. 이 한 가지는 항상 길이 없다. 당신이 많은 힘을 들여 남더러 깨워 달라고 하거나 자명종을 울리게 해도 당신은 일어나지 못한다. 당신은 다른 일을 다 할 수 있는데 왜 이것만은 할 수 없는지 이상히 여길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누가복음 18장의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의 원칙이다. 하나님의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고자 하신다. 결국에는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일들에서는 승리하도록 허락하셨지만 여전히 당신 에게 부족한 것이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셔야 한다. 이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당신 스스로는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이기지 못하는 한두 가지 일들을 남겨 두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신다. 이김의 첫 걸음은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임 그 젊은 관원이 다섯 가지 조건을 통과하고 쉰 가지 조건을 통과하고 백 가지 조건을 통과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한가지를 그의 앞에 두어 그가 할 수 없음을 보게 하신다. 친구여! 이김의 첫 걸음은 내가 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데 있다. 당신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보았다면 당신은 이미 첫 걸음을 걸은 것이다. 오늘 우리 가운데와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기묘하게도 매번 그것과만 부딪치면 곧 살패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질이고, 어떤 이에게는 더러운 생각이며, 어떤 이에 게는 수다스러움, 어떤 이에게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 어떤 이에게는 제안하기를 좋아하는것, 어떤 이에게는 질투이고, 어떤 이게는 교만이 다 한가지 부족한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각 사람에게 그 사람만의 특별한 한 가지가 있다. 무릇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사람마다 누구나 그 사람만이 특별한 한가지가 있다. 최소한 한 가지가 있고 그 이상 있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신다. 이기기를 매우 갈망했던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많은 것들을 처리했었다. 그녀는 매일 편지를 써서 남에게 사과하고 하루 종일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그녀가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올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장애물을 이겼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산에서 또 하나의 무덤을 파서 자신을 그 안에 묻어 버렸다고 말했다. 이튼날 내가 또 그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하나님께서 또 그녀에게 그녀의 죄를 찾아 주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묻어 버리고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이십여 일간 그녀는 매일 죄를 처리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는 충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처리했기 때문에 이젠 거의 승리했다고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 동역자 자매에게 그녀의 하는 일을 지켜보라고 말했다. 어느 날 그녀 집에 갔을 때 나는 그녀가 매우 근심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근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서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근심을 멈추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육 일간 그녀가 근심하는 것을 보았다. 육 일이 지난 후 우리 가운데 있던 한 형제가 많은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했는데 그녀도 자리를 같이 했다. 그녀도 자리에 앉았지만 거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녀는 내 정면에 앉았었고 겉으로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매우 근심하고 있었다. 그날 형제들은 이십여 명이고 자매들은 세 명뿐이었다. 식사를 한 후에 나는 그 자매에게 내가 새로 쓴 찬송을 피아노로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 2절까지 연주했을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나는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 가지 일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처리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매우 수줍어하는 자매인데 이십여 형제들 앞에서 울었다.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계속 울었다. 내가 그녀에게 대체 어떤 일을 통과하지 못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한 주 동안 처리했어도 통과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 형제님이 알다시피 이 한 주 동안 매일 저의 죄를 처리하여 거의 모든 죄들을 더 처리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 그녀의 죄를 자백했음을 시인한다. 그녀는 " 그러나 내가 어떻게 노력했어도 이번 주 동안 나의 죄를 처리할 수 없음이 증명됐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자매에게 대체 처리할 수 없는 것이 무슨 죄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아주 작은 것이지만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저에게는 군것질하는 작은 습관이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조금이라도 군것질하고 싶습니다. 점심 시간 전에 미리 약간 군것질을 해야 합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또 약간 군것질을 하고 싶어집니다. 이 며칠간 나는 주님 앞에서 이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육 일간 처리했지만 육 일 다 실패했습니다. 나는 나의 세 자녀들보다도 못합니다. 조그마한 간식만 보면 손으로 집게 됩니다. 멈추지를 못합니다." 그녀는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나는 듣고서 매우 즐겁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참으로 즐거워했다. 그녀가 울고 있을 때 형제자매들 중에서 어떤 형제들은 걸어 나가고 어떤 자매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녀는 거기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계속 눈물을 흘렸고 나는 거기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계속 웃었다. 그녀는 계속 울었고 나는 계속 웃었다. 그녀는 내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를 물었다. 나는 " 내 마음이 심히 즐겁고 즐겁습니다. 자매님, 당신은 오늘에서야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까? 노력한 지 20일이 지나서야 정말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까?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말하지만 당신이 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의 원칙이 여기 있음을 보아야 한다. 한 시간쯤 지나서 온전히 그녀는 이기는 체험을 갖게 되었다. 이기는 길은 한 가지 부족한 바로 이것이다. 당신 자신은 이것도 거의 다 됐고 저것도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이 할 줄 알고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당신에게 증명하여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이김의 관문을 통과하려는 사람이 첫째로 찾아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에 근거하여야 당신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신에게 무슨 특별한 죄나 특별히 이기지 못하는 죄가 있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대충하는 사람은 이김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당신 자신의 구체적인 약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럴 때 당신 자신이 이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의 약점은 교만이고 어떤 이는 질투이고 어떤 이는 쉽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서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영향을 받는다. 또 어떤 이는 부정한 생각이고 어떤 이는 말이 많은 것이며 어떤 이는 남의 흠을 잡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배후에서 사람에 대해 말하고 말을 전달한다. 어떤 이는 몸을 절제하지 못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누구에게나 다 한 가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 한 가지 이기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집회를 마친 후 여러분은 돌아가서 성경을 펴고 " 오히려 한 가지가 부족하다,"라고 쓰고서 당신의 부족한 점 한 가지를 써내기 바란다. 그 젊은 관원의 부족한 점 한 가지는 그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의 돈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돈이 아니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가 있기 마련이다. 만일 돈이 아니라면 당신이 이길 수 없는 죄가 무엇인가를 써내야 한다. 당신의 병이 어디에 있는지 알 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구체적으로 이길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각각 특별한 약점이 있다. 그것에 대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빛 비춤을 구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 한 가지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가지 이상이 있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없는 그 한 가지를 보아야 한다.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본 후 당신은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약함을 볼 수 없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은 왜 한두 가지를 거기 두셨는가?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매우 보편적인 원칙이자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우리가 매번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말할 때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이 원칙이다. 오!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쓸모없다는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이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모르고 당신의 육체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모른다. 그 결과,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힘껏 노력한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이 쓸모없음을 아신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이 쓸모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에게 죄가 있고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에게 지키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아신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당신이 범죄한 것을 더 많이 드러내려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율법을 범할 것을 아셨지만 당신은 자신이 율법을 범하게 될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율법을 범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럴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아신 대로 알게 되고 당신이 쓸모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율법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십계명만이 율법이고 신약의 명령들 역시 모두 율법이라는 것은 잊어버린다. 하나님은 이런 명령들을 통해 당신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당신에게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인도하신다. 그럴 때 당신은 비로소 하나님에게 " 당신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옳은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형편없고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잘못 못 박은 것입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로마서 7장의 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계속 발버둥치는 한 사람을 본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완전히 실망하셨지만 로마서 7장에 있는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여전히 소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으려 하고 율법을 행하려고 하지만 완전히 실패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잘못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가 죽어 마땅한 자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자신이 정말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충분히 실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은 것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이기지 못한다. 만일 죄를 조금 더 많이 지었다면 더 쉽게 이기게 된다. 만일 참으로 육신의 패괴함을 보았다면 더 쉽게 이기게 된다. 로마서 7장에 있는 그 사람은 결국 길이 없어서 탄식하며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말했다. 그가 "누가" 라는 단어를 볼 때 곧 그를 구원할 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오후 첫 번째로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조금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쓸모없는 자로 보신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자임을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십자가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신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만일 내가 아직도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면 여전히 자신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이제는 내가 아니요"라고 말한지 못한다. 할 수 없고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음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자기가 할 수 없음을 안다. 당신은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묻겠다. 당신은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형제여! 당신은 자신에 대해 절망했는가? 당신은 여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어제 저녁에 우리가 본 것은 다 객관적이고 오늘 오후에 본 것이 첫 번째 주관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이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해 사는 데에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은 자신의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당신은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과거에 많은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여러가지 실패를 주셨는데 당신은 자신에 대해 아직도 절망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앞으로 당신이 진보할 수 있는가의 관건은 다 여기에 달렸다. 만일 당신이 마음속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그리스도는 당신을 대신하여 사실 수 없다. 그리스도는 오직 완전히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만 사실 수 있다. 이김은 완전히 실패한 사람을 위하여 예비한 것이다. 오직 완전히 실패한 사람만이 이김을 소유한다. 누구든지 완전히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대신하여 이기실 수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첫 번째 조건은 바로 "나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하려고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두 가지를 보았는가? 우리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많은 때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하려고 노력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기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할 수 없음을 알지만 해 보려고 하는데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추가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조금만 더 기도하면 할 수 있고 조금만 더 결심하면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으면서도 해 보려고 한다. 가령 여기에 삼백 근 무게의 짐이 있다 하자. 당신은 이 백근 밖에 들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삼백 근을 들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짐이 무거운 줄 알면서도 자기가 들 수 없지만 시도해 보겠다고 말한다. 그는 할 수 없으면서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할 수 없는 것과 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은 별개이다. 우리가 할 수 없다면 시도해 보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려고 시도해 보지도 않겠습니다." 당신은 완전히 손을 놓아야 한다. 손을 놓는 문제는 매우 큰 문제이다.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당신 자신을 멈추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나는 계속해서 어떤 죄를 범하는 많은 형제를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해보려고 하지는 않았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우리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당신을 구할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자신이 구할 길이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해 보려고 한다. 여전히 해 보려고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화내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가령 당신에게 조급해하는 성질이 있고 자기의 성질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하자. 당신이 계속 노력하지만 계속 실패한다. 당신의 성질에 대하여 당신은 방법이 없음을 시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성질을 다스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힘써 다스리려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사람과 말할 때 조심해야 한다. 사귀면 좋지 않은 사람들과 왕래를 적게 하고 내 뜻과 합하는 사람들과 왕래를 많이 갖는다. 나에게 가시가 되는 사람들과 교통하지 않고 그들의 얼굴을 대하지 않는다. 화가 나려고 할 때마다 힘을 다하여 억누른다. 조금 더 기도하여 그것을 억눌러 버린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곧 할 수 없으면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할 수 없으면서 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할 수 없으면서 능력을 가하여 해 보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없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기기 위한 조건은 곧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김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신이 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김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며, 또한 바로 나를 대신하여 사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이기는 생명은 우리가 " 주여, 저는 할 수 없고 또한 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저를 위해 역사하소서. 제 스스로 승리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선포하기를 원한다.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이기는 것을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루실 수 없는 사람들은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조금도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하려고 시도해 보고 또 하려고 결심한다면, 우리가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은 멈추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나타내기를 원하시지만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일의 완전함을 지키려고 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생명을 나타내실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일을 완전히 거절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조금 도우려고 하고 또 사람의 행위가 추가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의 일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의 구멍난 부분을 때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살기를 원하신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할 수 없음을 알 때 비로소 길이 있다. 또한 싸우기만 하면 패배당하기 때문에 싸우기를 사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힘을 쓸 때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서 살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일은 종종 겹칠 가능성이 있다. 내 집에 있는 한 일꾼이 일을 그만 두려고 해서 나는 새로운 일꾼을 불러왔다. 나는 그 오래된 일꾼에게 이 주간 더 머물면서 새 일꾼에게 가르친 후에 돌아가라고 말했다. 사람이 하는 일은 항상 겹치는 시간이 있다. 오래된 하인은 돌아가려고 하고 새로운 하인은 이 주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 당신 편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그분은 시작하시지 않으신다. 당신이 멈추는 그곳에서 그분이 시작하신다. 그분이 계시고 당신도 그곳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든지 당신의 일을 완전히 멈출 때 그리스도가 일하기 시작한다. 언제 "오직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아니요"일 때이다. 나와 그리스도가 겹치는 때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할 수 없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하려고 노력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한다. 오늘부터 모든 것을 주님께 넘겨야 한다. 당신은 할 수도 없고 해 보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럴 때 당신은 이기게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울면 자연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는 것은 매우 좋다. 많은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만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있다.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해서 반드시 눈물이 있어야 한다. 많은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눈물을 너무 적게 흘린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려고 노력하고서 자신의 문제와 자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발견한 다음 그 젊은 관원을 본받아 근심하며 돌아간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없음으로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나와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없으므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전히 소망이 있다. 나는 종종 누가복음 18장 19장이 연결된 것이 매우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누가복음 19장이 무슨 일을 기록했는지 아는가? 19장은 삭개오의 이야기이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인가? 삭개오는 나이든 사람이다. 18장의 관원은 젊은 사람이다. 젊은 사람도 부자였고 삭개오도 부자였다. 사람들이 볼 때, 젊은 사람은 보통 너그럽고 늙은 사람은 인색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놀랍게도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올 때 주 예수님이 돈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만일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돈을 다 내놓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그 젊은 관원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할 수 없었다. 이 늙은 사람에 대해 주 예수님은 그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가 돈을 내놓았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젊은 사람은 사람의 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삭개오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주 예수님이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 젊은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나쁜 성질이 있거나 육신의 죄가 있거나 영적인 죄가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자기에게 그런 어려움이 없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나는 여러 자매들이 나에게 "이 형제님, 제가 성질을 조금만 더 참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당신의 조급한 성질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인해 즐거워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함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는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를 덮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보았는가? 약함은 비참하고 눈물 흘릴 일이 아니라 도리어 자랑할 일이다. 당신은 당신의 큰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말하겠지만 당신의 큰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내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의 나쁜 성질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질투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더러움, 당신 속에 죄악이 가득 차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만일 당신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는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둘째는 하려고 애쓰는 것을 포기해야 하며, 셋째는 할 수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할렐루야, 나는 할 수 없다! 할렐루야, 나는 할 수 없다! 왜 바울은 도리어 나의 약함을 자랑하기를 기뻐한다고 말했는가? "자랑" 이라는 용어는 원문에서 "영광" 이다. 바울은 그의 약함을 그의 영광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드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 자신을 덮게 했기 때문이다. 약함이 있는 사람에게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를 덮어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주님께 일하실 기회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함들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실 기회가 있게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에게 심지어 시인하기 어려운 어떤 죄가 있는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 드릴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는가? 혹은 당신이 제해버릴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얻지 못한 어떤 은혜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근심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그 젊은 관원의 친구가 된다. 그가 근심했기 때문에 당신도 근심한다면 결과적으로는 당신은 그와 한 길을 가는 것이다. 그가 근심하며 갔고 당신도 근심하며 가는 것이 된다. 오! 우리는 근심할 필요가 없다. 젊은 사람의 잘못은 자기의 할 수 없음을 본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을 보지 못한 데 있다. 젊은 사람의 잘못은 그가 해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의 약함을 찾아내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자기의 돈을 내놓지 못함을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돈을 내놓게 하실 수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나쁜 성질을 가진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기기 어려운 큰 죄를 가진 것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이길 수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자신이 의지할 것이 없음을 보는 것은 매우 영광스런 일이다. 주님의 목적은 그 젊은 사람에게 자기가 의지할 것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젊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때 즐겁지 않고 근심하였다. 일단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신 다음에 주님은 즉시 그분께서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을 실망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신 것은 오늘 주님께서 당신 몸에 나타나실 기회가 있음을 믿으라는 것이라.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주여, 하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저의 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 당신이 자신이 할 수 없음과 자신에게 길이 없음을 본 후, 오직 주님만이 당신으로 할 수 있게 하심을 볼 때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다. 당신이 이것을 보았다면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에 당신은 자신의 약함에 대해 근심하고 자신의 죄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오늘 당신은 자랑하고 찬양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나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내게 방법이 없음과 이길 수 없음과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나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리고 즐거워합니다. 내게 조금도 방법이 없지만 당신께서 하실 수 있음을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이럴 때 당신은 이기게 된다. 주 예수님은 불치병만 치료하신다 이전에 연대에서 이김의 관문을 통과하고 있던 한 형제를 만났다. 이 형제는 만주지역에서 왔는데 군대에서 십여 년간 의사로 활동했다. 그가 만주지역에서 있었을 때 형제들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주님을 믿은 후 그는 연대로 와서 일 년 남짓 진료를 했다. 내가 연대에서 일 주간의 집회를 가질 때 그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집회 때에 이기는 문제를 언급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찾아와 아주 급하게 내일 아침에 자신을 만나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도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오늘 밤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일이 매우 중요하고도 또 저녁 시간으로는 너무 부족하므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날 아침시간을 정했다. 그는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올테니 다른 사람과 약속하지 말고 자신에게 아주 큰 문제가 있으니 오전 시간을 종일 그에게 할애해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참으로 군인답게 키기 크고 체격이 늠름했다. 나는 좋다고 하고 다음날 아침 이 형제님 집에서 교제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아홉 시 전에 거기에 도착했는데 그는 벌써 와 있었다. 서로 대면하여 앉자마자 그는, "니 형제님, 저의 이야기가 아주 깁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그가 어떻게 군대에서 생활했고 후에 어떻게 주님을 믿었고 어떻게 연대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는 나에게, 그가 어떻게 모든 죄를 이겼고 과거 군대에서의 모든 죄를 어떻게 이겼는데 현재 오직 한 가지만은 방법이 없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누구도 한가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손을 네게 보이면서 담배 피우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각종 무서운 죄와 나쁜 죄를 다 이겼지만 이 한 가지는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피운지 이미 십 년이 됐고 주님은 믿은 지는 삼사 년이 되었으며 연대에 있은 지도 이미 일 년이 되었다. 이 삼사 년 동안 일 년에 심지어 일곱, 여덟 번도 끊으려고 했지만 끊을 수 없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기서 담배 피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연대 지방은 작은데다가 형제자매들도 많습니다. 만일 제가 담배 피운다는 것을 알면 큰일나기 때문에 남 몰래 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집에서 피우려면 자매인 내 아내가 감시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밖에서 피우면 형제자매들과 부딪칠까봐 담배를 공개적으로 피울 수 없습니다. 저는 담배를 주머니 속에 넣고서 병원에 있을 때는 제 방에서 피울 수 있지만 밝은 데서 피울 수 없고 한 구석에서 피워야 합니다. 사람 소리가 나면 빨리 담배를 꺼야 합니다. 또 병원에서는 간호원이 알고서 형제자매들에게 연락할까 봐 두렵습니다. 아내에게 들키면 다툼이 벌어지기 때문에 정말 담배 피우는 것이 너무나 고통입니다. 또 형제자매들은 모두 친근해서 자주 저를 보러 옵니다. 담배를 피우다가 형제들이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입에서 담배 냄새가 날까 봐 은단을 입 속에 넣습니다. 이 일 년 동안 연대에서 저는 담배 때문에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피우고 싶지 않습니다.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끊을 수 없었습니다." 앞에 앉아 있는 아주 크고 늘름한 그의 체격을 보면 참으로 군인다왔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 이것은 즐거워할 만한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다른 사람은 다 끊을 수 있는데 저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십니다. 만일 제가 담배를 끊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나의 고통을 알 것입니다. 한번은 삼 일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고 손에 담배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머리 속에는 담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담배를 피웠습니다. 저는 자신이 밉습니다. 제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이것은 즐거워할 만한 일이요 참으로 즐거워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나에게 " 형제님의 말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 선생님은 진료를 잘하는 유명한 의사입니다. 그러나 제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저에게는 의사인 형제님이 필요 없게 됩니다. 형제님은 연대 지방에서 매우 뛰어난 의사이고 저는 연대 지방에서 몸이 매우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당신이 필요 없고 당신도 내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당신이 담배를 끊을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같이 당신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몸이 약하여 병들었고 많은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하는데 당신이 유명한 전문의라서 당신에게 온다면 당신은 당신의 나타낼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는 그에게 " 사 의원님, 당신의 병원 문 앞에 '불치의 전문 치료' 라는 푯말을 감히 걸어 놓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는 "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잘못 치료하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 주 예수님을 다른 병은 일체 치료하지 않으시고 오직 죽을 병 한 가지만 치료하십니다. 오늘 당신은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당신의 끊지 못하는 담배는 불치병이 아닙니까?" 라고 말했다. 그는, "불치병입니다. 사 년 동안 일 년에 일곱, 여덟 번 끊어도 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불치병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주 예수님은 당신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즐거워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 당신의 병이 치료 불능이고 당신이 주 예수께 치료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주 예수께 '주 예수여,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 방법이 없습니다. 주 예수여, 내 자신을 당신 앞에 둡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예수님이 당신 같은 환자를 받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속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는 " 니 형제님, 저와 농담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정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또 울었다. 후에 나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펴서 그에게 읽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약함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나의 약함을 좋아하고 나의 약함을 자랑하며 나의 약함을 자랑하기를 기뻐한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를 덮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오늘 주 예수 앞에 나아와 그분께 '십여 년간 저는 계속 담배를 피웠습니다. 주 예수여, 저는 담배를 끊을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제가 사 년 동안 담배를 끊으려고 했으나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제가 작년에도 일곱, 여덟번 끊으려고 했으나 여전히 이기지 못했음을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제게 조금도 방법이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저의 약함을 인하여 당신께 감시드립니다. 주 예수여, 제가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음을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제가 담배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은 끊으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저를 대신하여 담배를 끊어주소서. 당신이 대신해 끊어주시지 않으면 저도 끊지 않겠습니다. 어떠하든지 저는 제 힘으로 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대신해 끊어주소서. 당신의 능력이 저를 덮을 수 있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하여 찬양합니다.' 라고 말하십시오. 좋습니다. 이제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그러자 그는 좋다고 하며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참으로 군인답게 재빨리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내가 먼저 이렇게 기도했다. " 주님, 당신이 불치병에 걸린 이 사람 위에 당신의 능력을 갖게 됨을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참으로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기적을 보고자 합니다." 내가 기도를 마치자 그가 다음과 같은 좋은 기도를 했다. " 당신께 찬양드립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고 또 담배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신 앞에 나왔습니다. 주여, 오늘부터 제가 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제 대신 끊어 주십시오. 저는 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저의 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당신이 할 수 있음을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기도를 마친 후 그는 참으로 즐거워했으며 일어나서 상 위에 모자를 집었다. 나는 그에게 잠시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오늘 이후로 다시 담배를 피우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그는 아주 좋은 답변을 해 주었다. 그는 "나는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사채림은 담배를 피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담배를 끊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서 떠났다. 이튿날 저녁 그는 다시 집회에 나왔다. 그는 나에게 자기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간증했다. " 당신이 일 년 넘게 나와 다투면서 내게 담배 피우는 것이 틀렸다고 계속 말해 왔지만 내가 아무리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었다. 보라, 어제 아침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삼십 분밖에 안 들였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 당신과 다투는 것은 소용없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만이 길이다." 나는 그에게 앞으로 또 담배를 피울 거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왜 못 피웁니까? 피울 줄 압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또 피우게 되면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다. 그는 "나는 영원히 피울 줄 알고 나 사재림은 오 년 아니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로 담배를 피우지 않게 하는 분은 주 예수이십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평강이 있었고 문제가 해결된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았고 또한 그의 하나님도 알게 되었다. 그는 그가 변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가 그를 바꾸는 것임을 알았다. 내가 연대를 떠날 때까지 이 개월 동안 그는 담배 한 가치도 피우지 않았다. 형제들은 그 형제가 계속 진보했고 아주 빠른 속도로 진보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는 첫째 조건은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이고, 둘째 조건은 당신이 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며, 셋째 조건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의 약함이 우리를 저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실패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한다. 또 우리의 생각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습관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성질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한다. 주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 반복하거니와 주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 오늘 오후 이 집회에서 주 예수님은 자기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신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준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게 하셨고, 또한 당신을 죽기에 합당한자로 보신다.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다만 죽기에 합당합니다. 나는 나를 개선하고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없는 자로 당신 앞에 나옵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과거 몇 개월 동안 사탄은 수없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겼느냐? 보라, 너는 아직도 좋지 않다." 나는 " 만일 나라면 근심하겠지만 이기는 분은 주님이시다." 라고 말한다. 사탄이 " 보라, 네가 이렇게 악하지 않느냐라고 말할 때 나는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당신은 약함이 귀한 것이고 즐거워할 만한 일임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속에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할 수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의 "할 수 없음" 은 장애물이 아니라 돕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을수록 그리스도는 더욱 그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분은 전문적으로 우리의 할 수 없음과 약함을 해결하신다. 내가 형편없을수록, 내가 실패하고 약할수록, 할 수 없을수록 내 몸에서 주님께서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가지시게 된다. 할렐루야! 예수는 구주시다. 할렐루야! 예수는 나의 주시다. 할렐루야! 그분은 우리 생명이시다. 할렐루야! 그분의 능력은 전적으로 우리의 약함을 덮으신다. 우리의 눈은 자신을 보지 말고 그분을 보아야 한다. |
5장,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2) -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며칠 저녁 동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생활이 어떠한 것이며,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이김을 얻으려 하고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이기시는가를 보았다. 또 이기는 생명이 무엇이고 이 생명의 성질이 어떠한 가를 보았다. 오늘 저녁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을 체험하는가를 볼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인 어떻게 이 생명 안에 들어가고 그리스도를 얻는가를 보아야 한다. 오늘 저녁에 읽은 성경 말씀은 어떻게 이 생명 안에 들어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먼저 첫 부분은 건너뛰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부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자. 이것은 바로 우리가 체험해야 할 생명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소극적인 면에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적극적인 면에서 이기는 생명은 전에 말한 적이 있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이 이 위치에 도달했고 이러한 체험을 가졌으며 이러한 체험 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도달했고 어떻게 이 체험을 가졌으며 어떻게 들어갔는가를 보기로 한다. 바울이 어떻게 들어갔는가를 본다면 우리도 들어갈 수 있다. 바울이 그러한 체험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부분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서 사신 것이라" 이며 이 말씀 뒤에 두 번째 부분이 있다. 20절의 첫 구절의 말씀인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는 이러한 생명의 체험 안으로 들어가는 첫째 조건이다. 두 번째 부분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며 이것이 생명의 체험 안에 들어가는 둘째 조건이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와 거룩함과 승리로 취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자세히 보기로 한다. 항복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첫째 조건인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는 대체 무슨 뜻인가? 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야" 이 이기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형제자매들이여, 당신 안에 거하시는 이는 대체 몇 분인가?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시인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는 "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 말한다. 우리 믿는 사람은 버리운 자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단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이기는 생명으로 체험하기 위하여는 우리 자신이 이사 가고 옮겨져야 하며 우리 자신의 손을 놓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나갈 때 우리는 이기는 생명을 얻게 된다. 어제 어느 자매가 내게 어떻게 이 이기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가 이사 가면 된다고 말했다. 한 집에 두 사람이 산다 하자. 우리 믿는 사람은 버리운 자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단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이기는 생명으로 체험하기 위하여는 우리 자신이 이사 가고 옮겨져야 하며 우리 자신의 손을 놓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나갈 때 우리는 이기는 생명을 얻게 된다. 어제 어느 자매가 내게 어떻게 이 이기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가 이사 가면 된다고 말했다. 한 집에 두 사람이 산다 하자. 그 함께 사는 사람이 나쁘면 그로 이사 가게 하면 된다. 지금 문제는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 문제는 그분이 당신 안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사를 가야 하는 데 있다. 함께 사는 당신이 너무 더럽고 어떤 죄든지 다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나가면 문제가 없다. 첫째 조건은 당신이 나가는 것이다. 첫째 조건은 당신이 이사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수 차례 이사하고 싶어도 나가지지 않고 수 차례 자신을 못 박으려고 생각했지만 죽지 않았다. 대체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오늘 저녁 이것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1. 나는 할 수 없다. 오늘 여기서 형제자매들은 다 십자가의 사실을 보았다. 우리가 알듯이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의 죄를 담당했을 분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못 박았다. 로마서 6장의 가르침은 우리가 수 년간 알았던 것이다. 이는 곧 십자가 위에서 주의 죽으심은 내 죄를 담당했을 뿐 아니라 나의 옛사람도 그분과 함께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년간 우리가 우리가 주의했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실이지만 왜 나는 항상 죽지 않는가? 주님은 이미 나를 못 박았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나이다. 나는 여전히 묶임을 받고 약한이 있으며 실패를 하고 무력하다. 성경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말했지만 왜 나는 여전히 무력한가? 그러므로 구원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쉬지 않고 노력하며 계속 노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기기를 바라지만 승리는 그들에게서 너무나 먼 것처럼 느껴진다. 형제자매들이여, 주 예수께서 구원을 이루신 것과 우리가 이 구원을 영접하는 것은 별개의 일임을 알이야 한다. 마치 밥을 하는 것과 먹는 것은 별개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 주 예수님이 당신을 위하여 성취하신 것과 당신이 주님이 성취하는 것을 영접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죽으신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로마서 6장은 우리 모든 사람이 다 이미 죽었음을 말해 준다. 할렐루야! 우리 모든 사람은 다 이미 죽었음을 말해 준다. 로마서 7장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다 죽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마서 6장은 객관적인 진리요 7장은 주관적인 체험이다. 로마서 6장은 사실이고 로마서 7장은 체험이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6장을 잘 안다. 그들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고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매일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길 줄을 알았다. 이런 것들을 깨닫지만 실제가 되지 않는다. 교리는 여전히 교리이고 나는 여전히 나이다. 교리에서는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한다. 교리는 내가 이미 죄를 벗어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죄가 여전히 내몸에 있다고 말했다. 교리는 내가 이미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체 무엇 때문이다. 오! 로마서 7장은 한 가지 큰 사실을 알려 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판결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 너는 형편없고 조금도 쓸모가 없다. 너는 변개될 수도 없고 개선되지도 않으며 진보할 수도 없다. 너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러므로 너를 못 박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다."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서중결 형제의 어깨를 치면서 " 서중결은 철저히 부패했다! 고 말한 적이 있다. 만일 그를 책망해서 소망이 있다면 책망할 가치가 있다. 만일 그를 감금해서 소망이 있다면 그를 감금할 것이다. 그러나 벌을 줘도 감금해도 안 된다면 조금도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를 사형시킬 수밖에 없다. 서중결은 철저히 부패하고 그가 조금도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는 다 서중결과 같이 철저히 부패하고 쓸모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바로 다름 아닌 우리에 대한 평결문이다! 십자가에 바로 다름 아닌 우리에 대한 평결문이다! 십자가의 평가는 당신이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고 말한다. 당신에 대한 평가는 당신이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내가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우리에 대한 평결문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알며 우리에게 좋은 사상이 조금도 없음을 안다면 "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 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죽는 것외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선을 이루기를 원하는가? 최근 중국 정부에서 아편을 금하는 한 가지 새 법령을 내렸다. 강력한 금지령을 내린 후에 아편을 피우는 사람은 발견되기만 하면 총살한다는 것이다. 아편을 오랫동안 피웠던 어떤 사람이 있다 하자. 한동안 참았지만 다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금지령이 내린 후에 아편을 피우다 공안에게 발견되면 총살될 것이다. 만약 발각되었을 때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가 무엇을 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내일 사형이 집행되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얼마있지 않으면 총살될 것이기 때문에 속히 의사를 불러와서 아편을 끊게 하는 주사를 맞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일이다. 사형에 처해질 사람은 더 이상 어떤 개선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를 개선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죽기에 합당하고 개선될 수 없고 진보할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오직 죽음뿐이요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우리를 고치려 해도 안 고쳐지고 개선하려 해도 개선이 안되며 진보하려 해도 진보할 수 없기 때문에 포기했다가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고쳐보고 개선해 보고 진보해 보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 우리는 선을 행하려고 결심한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은 몇번이나 뜻을 세웠는가? 그 중 얼마를 이루었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여러가지 영적인 약속들을 한다. 당신은 하나님께 그분이 하라시는 것을 하겠다고 말하고 저렇게 하라고 해도 하겠다고 말한다. 당신은 일찍 내일 일찍 일어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드렸다. 서양에서 온 한 자매는 하나님께 서원한 서른 가지 일 중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사형되기로 작정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의사를 부르고 좋은 옷으로 바꾸어 입으려고 하고 있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절망했음을 표명한다! 십자가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소망을 버리셨음을 표명한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 내가 너희를 고쳐도 고쳐지지 않고 개선하려고 해도 개선되지 않으며 진보하게 하려 해도 진보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리 없이 너희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기묘하게도 우리는 이 사실, 곧 하나님께서 우리가 철저히 부패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한 면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뜻을 세우고 내일도 이런 뜻을 세운다. "하나님, 이것을 할 것을 서원합니다. 저것을 할 것을 서원합니다. 하나님, 오늘 이후로 다시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의 결심이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뜻을 잘 세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시 뜻을 세운다. 지난 번 화를 낸 후 다음에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결국 화를 낸다. 그러면 세 번째 뜻을 세운다. 바울이 지내 온 세월은 바로 "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의 세월이다. 계속 원하고 계속 실패하고, 또 계속 원하고 또 계속 실패한다. 이것은 과거 바울이 지낸 생활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뜻을 세우는 것이 충분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오직 죽기에 합당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이미 절망하고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이미 절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 너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 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망하셨다는 말이다. 내 편에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 말하는 것은 내가 절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쓸모 없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임을 분명히 보셨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란 무엇인가? 이는 곧 내가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내가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 하나님은 나를 죽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육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소망이 없고 오직 죽음뿐이고 죽기에만 합당하다. 형제자매들 집에 병든 사람이 있나 모르겠다. 내가 가 본 대 여섯 집에서는 혹은 남편이 혹은 아내가 병을 앓았고 혹은 자녀들이 병을 앓았다. 그들은 환자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내게 " 니 선생님,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빨리 데려 가시는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더 이상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오, 모든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기 때문에 못 박아 죽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당신 또한 자신이 쓸모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밖에는 없다고 말한다면 잘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한 면으로 로마서 6장에 아주 익숙하면서 또 한 면으로 로마서 7장에 있는 사람처럼 결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서원하고 자기가 아직도 약간의 용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6장을 분명하게 말할지라도 당신의 행동은 로마서 7장이다. 로마서 6장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쓸모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로마서 7장은 바울도 자신은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은 우리를 철저히 아시고 우리에 대해 이미 절망하셨고 우리를 조금도 가치 없는 자로 보신다. 이제 당신이 어떻게 말하는 가를 볼 때이다. 만일 당신도 자신에 대해 절망했고 당신이 쓸모없다고 말한다면 즉시 구원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계속 화를 내도록 허락하고 교만하도록 허락하고 성실하지 않도록 허락하며 죄가 당신을 넘어뜨리도록 허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지난 번에 뜻을 세운 것이 약했기 때문에 이번에 뜻을 강하게 세우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은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로마서 7장의 체험이다. 로마서 6장은 단지 교리일 뿐이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6장이 사실임을 알도록 인도한다. 만일 나더러 철저희 부패했다고 말한다면, 나는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 워치만 니는 철저히 부패했다. 할렐루야! 바울은 조금도 방법이 없었다. 그는 수년간 고통을 당했다. 그는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 오늘 여기서 만일 당신이 쓸모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즉시 구원받게 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 선하게 되려고 뜻을 세우는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이기지 못한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의 십자가는 당신에 대해 조금도 잘못 말하지 않았다. 매일 나는 한 가지 일을 좋아한다. 그것은 곧 어제도 쓸모 없었고, 오늘도, 내일도 쓸모없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쓸모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십자가의 평가를 받기를 원하시는가? 이는 우리가 십자가의 평가를 받아야 주님을 우리의 거룩함으로 취할 수 있고, 주님을 우리의 온전함으로 취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이김으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약간의 소망이라도 있고 한 치의 소망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조금도 소망이 없는 단계에까지 인도할 것이며 한 치의 소망이 없는 단계에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로 십자가를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또한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시인하기를 원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이기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또 하나의 조건을 이행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2. 하려고 노력하지 않음 어제 내가 한 자매를 만났는데 그녀는 십여 년 간의 그녀의 실패한 역사를 두 시간에 걸쳐 내게 말해 주었다. 그녀가 말할수록 나는 계속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 만족하고 즐거운가? 당신이 아직도 소망이 있는가? 당신의 실패가 충분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없음을 시인했지만 그녀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하나님은 첫째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시인하게 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시인하는 것과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것은 좋고 옳은 것이지만, 당신은 여전히 '하려고 노력한다' 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당신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마땅히 자신의 일을 멈춰야 합니다. 입으로는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녀는 계속 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자기가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고 자기가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거듭하여 여러 번 그녀에게 "당신은 당신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보지 못했습니까? 당신이 이기기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보지 못했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녀가 계속 발버둥치고 계획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또 그녀에게 말했다. " 당신은 다만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또한 하려고 애쓰지 말고 할 수 있기를 바라지도 마십시오."그녀는 그럼 자신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만일 무엇을 원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 무엇을 해도 다 실패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욱 실패하지 않겠느냐? 고 말했다. 많은 사람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히 자신은 아무 쓸모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자기에게 조금도 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버둥치며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여전히 승리는 없고, 여전히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항복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우리는 자신 안에서 할 수 없다는 것임을 시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해 보려는 생각조차 갖지 말고 완전히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 것이다. 어떤 형제는 자신은 대체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믿을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말하자 그는 이것이 무슨 이론이냐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다만 하나님께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하나님은 다만 당신이 믿을 수 없다고 시인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곧 오늘 이후로나는 이김이나 실패를 상관치 않고 나의 일들을 다 그리스도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다. 가령 한 자매가 당신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준다 하자. 당신의 손은 찻잔의 한 쪽을 잡고 있고 그녀의 손도 놓지 않고 있다. 당신은 마시려 했지만 그녀는 당신에게 마시라고 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다. 그녀가 손을 놓지 않으면 당신은 마실 길이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는 나의 손을 놓는다는 뜻이고, 둘째는 내가 상관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당신이 하나님께 "하나님, 오늘 이후로 내 자신을 당신께 맡깁니다. 오늘 이후로 이기는 것은 당신의 일이고 인내도 당신의 일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형제는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승리하는 것은 사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승리하는 것이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번은 어느 자매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말하라고 했다. "오늘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늘 이후로 아무것도 상관치 않겠습니다."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고 억누를 수도 없고 항복할 수도 없다. 오늘 이후로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우리는 할 수 없고 방법이 없다고 말하지만, 돌아올 때는 자신과 함께 돌아온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께 가져간 것은 반드시 그분께 두고 나와야 한다.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하나님께 남겨놓고 나오는 지를 아는 사람이 해방됨을 체험하게 된다. 한번은 한 자매에게 원고를 가지고가서 깨끗하게 다시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떠나올 때 다시 원고를 집으로 가져왔다. 그녀가 다시 쓰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쓸 방법이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기도하는 방법이다. 입으로는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라고 말하지만 마치고는 다시 가져와 버린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손을 놓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하나님, 나는 이길 수 없습니다. 나 또한 이기려고 생각하지 않고 이기려고 시도하지도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아침에 일어났는데 사탄이 당신은 이러저러해서 아주 나쁘다고 말하면 당신은 근심할 것이다. 내가 당신께 묻겠다. 당신은 또 무엇을 하려고 계획하는가? 다만 이렇게 말하라. " 내가 철저히 부패한 것은 이미 네가 아는 바이다. 나는 이미 절망했다. 나는 진보하려고 계획하지 않는다." 이럴 때 당신은 즉시 좋아질 것이다. 이것은 매우 기묘하다! 왜냐하면 문제는 개선하는 데 있지 않고 바꾸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 께서 성취하신 사실을 붙잡아야 한다. 만일 당신에게 약간의 용도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철저히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를 당신 안에 두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손을 놓아야 한다. 실제적인 면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말하라. "하나님! 나라는 사람은 선하게 될 수 없고 선하게 되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주여, 오늘 이후로 나는 끝났습니다. 오늘 이후로 나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후로 또한 하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담대히 당신의 손을 놓겠는가? 나는 담배를 피우던 의사 이야기를 했었다. 그는 거의 70 여세가 되었는데도 담배 피우는 것과 싸웠다. 어느 날 집회에서 그는 담배와 싸우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아는 한 청년은 만일 자기라면 싸우지 않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담배와 싸워도 끊을 수 없는데 싸우지 않으면 더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나라면 하나님께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대신 끊어주십시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 하나님이여,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도 힘을 들여 끊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당신께 맡깁니다. 나는 상관치 않겠사오니 당신이 나를 대신해 끊어주소서." 전에 그는 하루에 열두 가치 내지 스무가치를 오십 년 동안 피워 왔었다. 하나님께 항복한 후 이튿날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아침에 일어난 다음 담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당신이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온전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칠 수 없고 개량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신다. 오늘 저녁 당신은 바울과 같이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바울의 뜻은 그가 철저히 부패하고 조금도 쓸모가 없으며 오직 십자가에 못 박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북평에서 나는 어떤 형제에게 "당신은 끝났는가?" 라고 물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나는 끝났다!" 고 말했다. 이것이 하나의 조건이다. 당신은 반드시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고 조금도 고칠수 없으며 조금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 주여,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을 다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내 대신 행하소서." 왜 어떤 형제자매들은 이미 자신의 할 수 없음과 끝났음과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시인했지만 아직도 이기지 못하는가? 왜 오늘날까지 여전히 실패하는가? 왜 아직도 이김을 보지 못했는가? 형제자매들이 잊어서는 안 될 또 한 구절이 아래에 있다. 믿음 -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고 나는 끝났다. 하나님께서 내가 철저히 부패했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나도 내가 철저히 부패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아무 쓸모없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나 자신도 조금도 쓸모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나도 내가 다만 죽기에 합당하다고 말한다.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사실이다. 오늘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다. 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닌가? 2 빼기 1은 1이다. 내 속에서 아담을 빼 내면 그리스도밖에 남지 않는 법이다. 두 사람이 함께 살다가 한 사람이 이사가 버리면 다만 그리스도만 남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실이 나타날 수 있는가? 유일한 길은 바로 믿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사실을 믿음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의가 되고 우리의 구속함이 되실 뿐 아니라 더욱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는 먼저 그분을 생명으로 영접한 후, 나중에 그분의 온전함과 인내와 온유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의 생명이시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의 머리이심을 보여 준다. 머리가 몸을 위하여 느끼고 책임지며 지배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머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의 몸이 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분은 이미 머리이시고 우리는 이미 지체들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다. 소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어 현재 우리를 위하여 느끼고 우리 전체를 책임 맡고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을 지배하고 계심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그분이 성경에 따라 참으로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참으로 모든 책임을 지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모든 일을 책임질 필요가 없고 이제부터는 그분이 당신을 위하여 책임을 질 것이며 지금 이미 책임을 지기 시작했음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그분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임을 보여 준다. 그분이 장래에 우리의 포도나무가 되고 우리가 장래에 그분의 가지가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영적 상태가 오늘 보다 조금 진보한 후 우리가 그분의 가지들이 되고 그분이 우리의 줄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이 열매를 맺듯이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분에게 미덕이 충만하듯이 미덕으로 충만해야 한다. 진액과 생명과 열매 맺는 힘을 우리에게 분배하는 분은 주님이시다. 지금 그분은 이미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이미 그분의 지체들이며 지금 그분은 우리 안에 생명과 거룩함과 온전하심과 그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고 계신다. 형제들이여,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그분이 이미 우리의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이제 그의 가지인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완전히 그분과 연합되었음 (물론 과거에는 이물질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물질이 사라졌음)을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그분과 연합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그분과 한 나무가 되게 하셨다. 당신은 나무가 가지를 공급하듯이 주님께서 여러분을 공급하실 것을 믿는가? 당신은 그분을 위하여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당신을 통해 열매 맺는 것이다.하나님은 또한 주 예수와 우리와의 연합이 마치 음식과 우리 몸과의 관계와 같음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마시는 피요 우리가 먹는 살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분이시다. 음식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이런 공급이 끊어질 때 우리가 죽게 되듯이 주 예수님도 우리에 대해 이러하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주 예수와 연합했음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와 나무와 음식이 되셨다. 우리는 주 예수처럼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살며, 우리의 생명 능력이 되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부터 그분의 모든 온전함과 교통과 희락과 풍성을 살아 나타내도록 그분을 우리에게 주셨다. 과거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계속 자신의 거룩함을 세우려 하다가 하나님의 거룩을 순종치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소극적인 면에서는 자기의 행위를 멈추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이 우리의 생명되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그분의 모든 것을 능히 우리 몸에서 표현하실 수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 때 그분은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신다. 우리는 그분이 이미 이렇게 이루었음을 믿어야 한다. 승리하는 비결은 그러한 승리가 점차적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승리가 되셨음을 안다. 이김은 곧 그리스도이고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 몸에 실체화 시킨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주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과 자유함과 거룩함이 우리 몸에 나타나도록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영접해야 한다. 이 비밀스런 연합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다.이것을 믿는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다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함과 온전함과 생명과 능력과 풍성을 다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게 하셨고 그분이 우리의 머리와 줄기와 양식이 되게 하셨다. 지금 그분은 우리의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시며 지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가? 지금 하나님은 주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가 주 예수와 하나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인내와 온유함과 청결함과 선량함이 모두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은 믿으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또한 명령하고 계신다. 과거 우리가 그분을 우리 의로 믿었듯이 지금 또한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거룩함으로 믿는다. 형제들은 많은 사람의 실패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아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이기는 방법을 알았지만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알았지만 그리스도의 유능하심을 몰랐다. 그들은 자기 육체가 완전히 부패한 것을 알았지만 그리스도의 풍성이 이미 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어떻게 선물을 받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영접하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영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영접할 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기점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해 본적이 없다면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체험있는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참된지를 안다. 우리가 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 성령께서 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어떠한 복음인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 우리의 것이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온전한 생명은 매일 우리의 죽을 몸에서 살아 나타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일 뿐 아니라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 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살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 이미 받았다는 것을 믿음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은 여러분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실 수 없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손을 놓으라고 하면 놓을 수 있고 떨치라면 떨칠 수 있지만, 믿지는 못한다. 그는 한 면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또 한 면으로는 이틀만 더 두고 보자고 말한다. 물론 손을 놓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승리를 살아 나타내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다. 일단 손을 놓은 후에 우리는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대신해 죽은 것을 믿으면 영생을 주실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것을 믿으면 우리에게 이기는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많은 사람의 실패가 바로 주께서 그의 안에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하고 주께서 대신 이긴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 있음을 안다. 어떤 자매에게 손을 놓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손을 놓았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손을 놓는 것이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나는 조금도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상관치 않겠습니다. 지금부터 이겨도 좋고 실패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겼냐고 물어볼 때 그녀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왜 감히 이겼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그녀는 아직 자신이 이겼다고 느끼지 못하고 효능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사실을 믿고 주 예수가 바로 이김이요 그분이 당신 안에 사는 것을 믿는다면 마땅히 즉시 당신이 이미 이겼음을 믿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효능을 보려 한다면 영원히 승리를 체험하지 못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김의 은혜를 얻는 것은 죄 사함의 은혜를 얻는 것과 똑같다. 당신이 한 죄인에게, " 만일 당신이 예수께서 당신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믿는 즉시로 당신의 죄는 사함 받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자. 만일 그가 믿었다면 그의 죄는 사함을 받게 된다. 당신이 그에게 믿었느냐고 물으면 믿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사함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왜 그런가? 만일 그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으면 희락과 평강이 있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아직 희락과 평강이 없기 때문에 계속 기도하다가 희락과 평강이 있은 후에야 그의 죄가 사함 받게 될 거라고 말한다 하자. 당신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당신이 무릎을 꿇고 일 년을 기다려도 희락과 평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언제 당신이 희락과 평강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언제든지 당신이 믿을 때 희락과 만족을 갖게 됩니다." 이와 같이 당신이 하나님의 이기는 조건을 이행하여 당신이 손을 놓고 잡은 것을 풀며 자신에 대해 절망한 다음, 당신이 이미 이기는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당신 안에 그의 이김을 살아 나타내고 있음을 즉시로 믿어야 한다. 당신이 이렇게 믿을 때 효과가 오게 된다. 만일 당신이 무릎 꿇고 효과를 기다린다면 내가 말하지만 당신은 결코 효과를 얻지 못한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당신이 효과를 얻은 후에야 당신에게 이기는 생명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당신의 체험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체험이 오고 느낌이 오며 이김도 오게 된다. 바울은 내가 이긴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했다. 당신이 매우 냉랭하고 웃을 수 없다고 느껴도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내가 정신이 말짱하게 보이겠지만 나는 하루도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는 날이 없다. 자신의 느낌에 따르다면, 즐겁다고 생각되는 날은 하루도 없었고 아침에 일어날 때 차갑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사탄은 "네게 희락의 느낌이 날마다 너는 차가운데 이것이 네 안에 주 예수가 사는 것이냐? 며칠 전에 네가 그렇게 차갑고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똑같고 차갑고 느낌이 없지 않으냐?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냐? 고 여러 번 말해 왔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즉시 내게 이런 답을 주셨다. " 내가 느끼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요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은 육신이 느끼는 것이요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은 육신이 느끼는 것이고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주님은 당신 안에서 당신을 대신해 이김을 살아 나타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조건을 이행할 때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이김을 살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하나님!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나의 느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은 바로 나의 느낌입니다. 느낌은 사탄과 가까운 친구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는 내 느낌을 믿지 않고 당신의 말씀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되고 모든 느낌은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어떤 시험을 만나든 어떤 느낌을 갖게 되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산다. 나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다만 손을 내려 놓는다." 고 말하라. 당신이 손을 내려 놓고 믿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대신해 싸우고 이기신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성질을 제해 버리시고 당신의 강퍅함과 교만을 제하시며 당신의 질투를 제해 버리신다. 할렐루야, 온 세상에서 유일한 승리자가 한 분 계신다. 할렐루야, 온 세상 사람들은 다 약한 사람들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다 실패한 사람들이다! 다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할렐루야, 오직 주님만이 이기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옛부터 지금까지 승리하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당신 손으로 강도와 창녀를 지적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을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할일은 이러한 조건들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한 면으로는 우리는 할 수 없고 또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이 모든 것을 이미 이루어 놓으셨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것임을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이것이 승리이다. |
6장, 항복 -
항복 "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 :27) "(그가)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12 :9)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 누가복음 18장 27절에서 주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께서 언제 이 말씀을 하셨는지 다 알 것이다. 이는 한 젊은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랴 영생을 얻으리이까?"(18절)리고 물었을 때였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으므로 , 주님은 "네가 계명을 아노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20절)고 답변하셨다. 주님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일을 말씀하셨다. 주님이 뜻하시는 바는, 만일 네가 행위로 영생, 곧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이와 같은 일들 중에서 어떤 일들은 행해서는 안되고 어떤 일은 마땅히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젊은 관원은 만일 영생을 얻는 것이 행해서는 안될 일은 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은 행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그러한 요구들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한 이 모든 일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22절)고 말씀하셨다. 오늘 저녁에는 이 단락의 말씀을 설명할 시간이 없다. 나는 이 구절을 다만 하나의 원칙으로 삼겠다. 젊은 사람이 주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주님은 그에게 다섯 가지 일만을 알려 주셨다. 주님은 왜 한 번에 다 알려 주지 않으셨는가? 주님은 왜 다섯 가지를 말한 후에 또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라고 말씀하셨는가? 주님이 이렇게 하신 유일한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의 할 수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영생은 사람이 무엇을 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님이 먼저 다섯 가지를 말씀하신 후에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은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나니" 라는 말을 추가하셨다. 주님은 그가 한 가지를 할 수 없고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셨다. 오늘날 이기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 가운데서도 주님은 똑같은 일을 하시고 동일한 원칙이 있기를 원하신다. 아마 어떤 형제나 자매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이 그리 교만하지 않고 질투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같이 강퍅하지도 않다고 말할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많은 일에서 남보다 낫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은 당신에게 당신이 계속 이기지 못한 한 가지 일이 있음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남겨 두신 것은 이 일에서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또한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에 분명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이겼느냐고 물으면 아마 당신은 이것도 이기고 저것도 이겼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문제는 당신이 몇 가지를 이겼느냐가 아니라 당신에게 최소한 이기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남기신 것은 당신에게 여전히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말해 주시려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평가가 우리가 다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에 합당하다는 것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고 영원히 선을 행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쓸모없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투명하게 보시지만 우리는 아직 자신을 투명하게 보지 못했다. 당신이 아무리 자신을 좋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질이 계속 따라다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강퍅함이 계속 따라다닌다. 어떤 사람은 교만하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는데 강퍅함이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당신에게는 항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어떻게 해도 당신이 이기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고 당신의 한 가지 죄를 이길 능력이 없다. 어떤 사람은 교만하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으며 강퍅하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지만 항상 말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한다. 그는 이런 죄 저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겠지만 주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은 돈을 가까이한다. 일생 동안 어떤 심갓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탐내는 것이 그의 죄요 그가 가진 오점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한 가지가 왜 당신 몸에 있는가? 이 한 가지가 당신 몸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완전한 생명이 당신 몸에서 나타나기를 원하지만 당신에게 있는 한 가지는 당신이 아직 이 생명을 얻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갖고 있는 그 '한 가지' 를 시인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교만이고 어떤 이에게는 질투이고, 어떤 이에게는 말이 많은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생각의 더러움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곧 구원받는 것을 사람이 할 수 없고 생명을 얻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없고 이기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없으며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말은 매우 강했다.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을" "다 지키었나이다" 이것은 얼마나 강한 말인가! 그는 얼마나 통쾌하게 말했는가.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내가 말한 교만과 질투와 강퍅함과 말 많은 죄들이 그에게는 다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만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집에 돌아가 생각해 보라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할 수 없음을 보기 원하심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론은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다고 이미 정하셨고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정확하고 투명하게 보셨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구원받은 이후 하나님은 왜 당신이 자주 실패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당신은 구원받았지만 계속 실패하고 오늘날까지 실패한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많은 형제자매들은 자신이 이런 죄 저런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울면서 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당신의 실패를 동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죄가 여러분을 계속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의 할 수 없음과 당신의 항복과 패배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많은 죄들을 알려 주실 필요 없이 오직 한 가지 죄들을 남겨 두셨고, 이 한 가지 죄로 말미암아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하신다. 어떤 자매가 다른 죄들은 다 이겼지만 거짓말하는 죄를 이기지 못한다 하자. 말을 하기만 하면 거짓말을 한다. 그녀는 자기가 이길 수 없는 한 가지 죄를 안다. 또한 성질내는 것을 처리하지 못하는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기만 하면 화를 냈다. 한 면으로 화를 내면서 또 한 면으로 죄를 거듭 자백한다. 화를 낸 후 죄를 자백하고 죄를 자백한 후 또 다시 화를 낸다. 참으로 불쌍하다. 그러나 도리가 없다. 잠시 후에는 다시 화를 낸다. 많은 죄들을 이겼지만 오직 한 가지, 담배 피우는 죄를 이기지 못하는 한 형제가 있었다. 그는 좋은 형제이지만 이 죄를 이기지 못한다. 어떤 자매는 다른 죄들은 다 이겼지만 군것질하는 죄는 이기지 못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다른 체험을 갖는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신데도, 당신은 여전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은 소망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당신은 여전히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수 차례의 당신의 슬픈 실패와 부끄러운 실패들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실패가 충분한지를 증명해 보여 주셨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영원히 승리할 수 없음을 증명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한두 번 실패하게 한 것으로 아직 충분치 않은가?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수차 실패하게 하신 것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하나님께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형제자매들이여, 구원받은 첫 걸음은 하나님께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나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해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도 나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당신이 이런 단계에 이를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불행하게도, 주 예수님 앞에 나온 젊은 사람은 실망하면서 그냥 돌아가 버렸다! 비록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절망하고 떠나 가버린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지난 사천 년 동안에 사람에게 주신 모든 율법을 다 생각할 필요 없이 다만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러한 계명들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범하라고 주신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사람이 지킬 수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을 아시지만,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열심히 시도해 보다가 실패한 후에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키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범하라고 주신 것임을 보여 준다. 사람은 지키지 못할 때 비로소 복종하고 항복한다. 하나님은 사천 년을 사용하여 사람이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셨고 그런 후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길을 여셨다. 지난 이천 년 동안 많은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혹 우리의 성질이 많이 좋아지고 교만도 많이 없어져서 어떤 개선이 있었는지 모른다. 소위 개선된 일들이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자기 억제의 한 종류이다. 전에는 성질이 밖으로 드러났는데 이제는 안에서 억제된다. 전에는 교만이 밖으로 나타났지만 이제는 안에서 억제된다. 그러나 이러한 억누름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폭발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이길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고 자신의 죄를 처리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처리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구제 불능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출받는 첫 걸음은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께 굴복합니다. 나는 망하고 끝났습니다. 나는 더 이상 분투하지 않겠습니다. "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항복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해방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라. "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싸우지 않고 힘쓰지 않겠습니다. 전에 나는 교만을 조금 고치려고 했지만, 주님, 이제는 개선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전에 성질을 조금 고치려고 했지만, 주님, 이제는 고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전에 말 많음을 조금 고치려고 했지만 주님,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고치려 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항복은 곧 손을 놓는 것임 형제자매들이여,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보고 이것을 믿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당신은 선을 행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이와 같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과 당신이 함께 못박힌 것을 볼 때 당신은 분투를 중단하고 자신을 개선하려던 것을 멈출 것이다. 일단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를 대신해 이기고 계심을 믿는다면 자신의 행위를 멈추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주여, 오늘 이후로 나는 영원히 선해질 수 없고 선해지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상관치 않고 아무것도 주의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을 손에서 놓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어떤 문제도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을 가리켜 항복 곧 손을 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손을 놓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시험이 올 때 그래도 싸워야 하고, 성질이 올 때 그래도 씨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이렇게 안 하고 저렇게 안 하기로 해도 결국 실패한다. 그래서 다음에는 뜻을 좀 더 굳게 세운다. 한번 더 뜻을 세우면 한번 더 실패하고 한번 더 서원하면 한번 더 실패한다. 한번 더 결정하면 한번 더 실패한다. 이번에 세운 뜻이 크지 않다 하여 다음에는 더욱 큰 듯을 세워도 안 통한다. 여전히 로마서 7장에 말했듯이 원함(뜻을 세움)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18절)! 손을 놓지 않는 한 모든 서원은 틀린 것이다. 당신이 여전히 당신의 죄를 담당하고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 라고 말할 수 없고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죽는 것이 곧 손을 놓는 것이고 손을 놓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 죽는 것은 곧 상관치 않는 것이다. 당신이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첫째 조건은 바로 당신이 손을 놓는 것이다. 천진에 있는 어느 형제가 내게 어떻게 손을 놓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손을 놓을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게 회사에서 무슨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OO회사의 천을 공급하는 부서의 부장이라고 말했다. 나는, 만일 당신의 회사 경영자가 오늘 당신에게 내일부터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해고한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다음 달에 사표 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음 달 새로운 부장이 올 때 당신은 모든 일을 인계해야 한다. 당신이 인계한 다음 갑자기 아래층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달려와 어떤 천의 값이 얼마이고 이틀 후에 얼마가 오를 것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며칠 전 같았으면 회사의 재고가 얼마이고 얼마를 더 구입할 것인가를 계산하였겠지만 지금은 내가 인계를 했기 때문에 아무 일 없는 것같이 가볍게 다만 옆에서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손을 놓는 것, 즉 항복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의 의미이다. 다만 주께 말하라. "주여, 내가 능력이 있는데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조금도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만둡니다. 내 성질이 여전하고 내 교만도 여전하며 내 강퍅함과 시기도 여전합니다. 나는 정말 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은 주께 "주여,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천을 사려고 당신에게 나타나더라도 당황치 말라. 사람들이 매일 당신에게 와서 계속 일을 하라고 유혹한다. 다만 자신을 주님 손에 맡기고 다른 것을 상관하지 말라 . 이것이 승리이며, 이것이 항복이다. 사탄의 시험은 당신이 움직이도록 하려는 것임 여러분은 시험이 무엇인지 아는가? 어떤 형제는 늘 화내는 시험을 받는다고 하고 어떤 형제는 늘 자기의 태도가 아주 딱딱해지는 시험을 받는다고 하며 어떤 형제는 늘 부정한 시험을 받는다고 하고 어떤 형제는 늘 말을 많이 하는 시험을 받는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천 명에게 천 가지 다른 시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온 세상에 오직 한 종류의 시험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화내는 시험을 받거나 교만해지는 시험을 받거나 탐심을 갖는 시험을 받거나 간음하는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탄의 유일한 시험은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사탄의 시험은 당신은 화나게 하거나 교만해지게 하거나 탐심이 일어나게 하거나 간음을 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움직이도록 할 때 사탄은 승리한다. 이런 움직임이 어떤 종류의 움지임이든 그것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든 성경 읽기이든 당신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사탄은 승리한다. 나는 많은 눈물로 간절히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일단 우리가 움직이면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가 사탄과 겨루고 싸우며 그에게 저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움직이는 그때 사탄이 승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승리의 비결이 지켜보며 서 있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상관하려고 할 때 곧 실패한다. 우리가 상황을 처리하려고 할 때 실패하게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쪽에 제쳐놓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기기를 원하신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 말한다. 여기서는 성령이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고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우리의 역활이 없고 그 둘이 서로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형제는 자신의 원함이 죄 짓는 것과 더러움뿐이라고 통회했다.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고 육체는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싸움에 역활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출하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물러서서 성령이 육체의 소욕을 대항해 싸우는 것을 보고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을 지켜볼 때, 우리는 해방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갓 구원받았을 때 나는 승리의 의미를 알고 있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캐스윅 총회에서, 어떤 사람이 소녀에게 네가 시험을 받을 때 어떤 방법으로 이기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마귀가 와서 문을 두드릴 때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결과 항상 실패였습니다. 이제는 마귀가 와서 문을 두드릴 때 나는 '주님, 당신이 가서 문을 여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문을 열면 마귀가 주님인 것을 보고는 '내가 문을 잘못 두드렸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도망가 버립니다. 만일 우리가 시험받을 때 "주여, 또 시험이 왔습니다. 주여 날 구원하소서. 주여, 날 구원하소서" 라고 말한다면 문이 열리기도 전에 마귀가 이미 들어오게 된다.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이 이런 문제를 다루시도록 해 드려야 한다. 우리가 그와 같이 기도할수록, 더 간절한 마음을 가질수록, 이런 기도가 반복될수록 손을 놓는것은 더 어렵게 된다. 어떤 형제가 언젠가 말하기를 베드로가 바다에 가라 앉을 때는 다만 "주여 날 구원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했다. 당신이 한 마디로만 구하는 것이 곧 손을 놓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여, 날 구원하소서." 하며 연달아 대여섯 번 또는 몇 번 더 말했다면 당신은 실패한 것이다. 나는 이런 기도를 목을 매다는 기도라고 칭하겠다. 이러한 기도는 처음 시도에 실패해서 두 번째 세번 째 계속 자신을 매달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당신이 아직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기도를 이용하여 승리하려고 애쓰는 것이며 자기 힘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예외 없이 결과는 패배이다. 당신이 그렇게 많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사탄은 우리를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움직이는 한, 심지어 그것이 기도하는 것일지라도 사탄이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당신을 쏘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고 하자. 오늘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계속 말로 당신을 괴롭히고 아주 그러한 괴로움이 심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주님께 "주여, 나는 이 일을 상관치 않습니다. 성질은 내 일이 아니요 승리는 당신 일입니다. 나는 내 성질을 다스릴 수 없사오니, 주여, 당신이 책임지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 곧 손을 놓는 것이다. 이럴 때 주님은 당신이 그분의 인내를 살아 나타나게 할 것이고 당신은 주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주여, 나는 상관치 않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말로 당신을 괴롭힐 때 견딜 수 없어서 "주여 날 구원하소서. 성질이 나오려고 합니다." 라고 기도 한다면 십 오분이 열 다섯 시간 같을 것이다. 겉으로 화를 내지는 않지만 속에서는 불이 날 것이다. 이것은 승리가 아니다. 사탄은 당신을 크게 성질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당신을 조금만 움직이게 하면 사탄은 승리한다. 이김은 곧 당신이 움직이지 않고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상관하지 않는 것은 곧 손을 놓는 것이다. 이김은 당신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 당신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이기신다. 당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을 가리켜 이김이라고 한다. 최근에 연대집회에서 이김의 체험을 갖게 된 형제자매들이 많았다. 그 중 한 자매는 환경이 매우 힘들었다. 남편이 잘 대해주지 않았고 시어머니도 자신을 박대했다. 그녀는 참으로 참았지만 이김이 없었다. 나중에 이기는 생명에 관해 듣고서 그 말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이틀 후 내게 와서 손을 놓으려고 해도 놓아지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의 손에 놓는 것이냐고 물었다. 내가 많은 말을 했지만 그녀가 깨닫지 못해서 나는 주님께 하나의 예화를 주시도록 구했다. 나는 "자매는 인력거를 타고 친구 집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녀는 간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신이 차를 타고 친구 집 문 앞에 도착하여 돈을 꺼내려 지불하려 할 때 당신의 친구가 달려 나와 당신을 대신해 지불했다고 합시다. 결국 당신도 지불하려고 하고 그녀도 지불하려고 하며 당신은 그녀에게 돌려주려 하고 그녀는 당신에게 돌려 주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없었습니까? 그녀는 있다고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가령 그녀가 당신을 대신해서 이 센트를 지불하고 인력거꾼이 받고서 떠났다고 하자. 당신은 그녀가 손을 쓰지 않도록 당신이 떠날 때 갑자기 이 센트를 그녀의 손에 쥐어 준다. 그녀가 당신을 보낼 때 또 갑자기 이 센트를 당신 손에 쥐어 준다. 서로 쥐어 주자 당신은 할 수 없이 돈을 길에 버려 두고 친구에게 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마음속으로 "내 친구가 돈을 가져 갔을까? 만일 가져가지 않고 행인이 주워 가면 어떻게 하지? 지나가는 인력꾼이 가져 가면 어떻게 하지? 어린아이가 보고 가져가면 어떻게 하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남 몰래 돌아가서 당신 친구가 가져갔는지를 본다. 당신은 그녀가 가져가지 않은 것을 보고는 걸으면서 몰래 뒤돌아본다. 내가 말하지만, 당신이 몰래 쳐다볼 때 당신의 친구는 분명히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길가에 버려 두고 친구에게 돈이 여기 있으니 가져가라고 말한 후 아무것도 상관치 않고 도망간다면 당신의 친구는 분명히 돈을 가져갈 것이다. 이 비유를 말하자 그녀는 깨닫고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일들을 하나님께 맡긴다. 한 면으로 하나님께 맡기면서 또 한 면으로 안심이 안되어 돌아가 다시 쳐다본다. 당신이 상관할 때 그분은 상관하지 않고 당신 혼자 처리하게 하신다. 당신이 상관하지 않을때 그분이 처리하고 완전한 책임을 지신다. 만일 당신 자신이 상관해야 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자신을 억눌러야 하고 당신이 가서 집어야 한다. 항복이란 무엇인가? 이는 돈을 길가에 둔후 방향을 돌려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이 가져가든 인력거꾼이 가져가든 행인이 가져가든 당신이 염려하지 않고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말하라. " 하나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오늘 이후로 좋든 나쁘든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맡길 때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을 받으실 것이다. 당신이 할 일은 다만 당신이 가진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당신이 손을 놓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아 주신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후에야 손을 놓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손을 뗀 후에야 그것을 들어 일하신다. 내가 그 형제에게 말한 것과 같이 만일 당신의 경영주가 당신에게 다음달 1일에 사직하라고 하고서 새로운 다른 사람을 임명한다 하자. 당신은 한 면으로 그를 가르치면서 그에게 맡겨야 한다. 이럴 때 당신도 그도 절반의 책임을 지어야 한다. 이런 신구 교체는 겹치는 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받으시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든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절반하고 그분이 절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 당신이 31일에 그만두면 하나님께서 1일에 착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점진적으로 그만두려고 하면 하나님은 인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에게 있는 큰 죄 중의 한 가지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다. 우리는 매일 자기 스스로 다스리고 억누르려고 한다. 우리 자신이 매일 다스리고 억누르는 것이다. 우리는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지 않고 억누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이빙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해 죽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해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고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분의 지체들이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모든 것이시다.우리가 나가고, 포기하고, 그만두고, 떠날 때 그분이 책임지기 시작하신다.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비우면, 귀신들이 들어와 거할 것이다.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마 12 :44-45)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의 경우는 두 주인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경우이다. 만일 한 사람이 이사해도 또 한 주인이 계신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멈춰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이 일단 자기의 행위를 멈추면 주님은 즉시 그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신다. 자아가 나갈 때 즉시 이기게 된다. 우리가 이사해 나갔을 때 우리는 이기게 된다. 손을 놓고 사임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끝내고 이사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완전한 항복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비결" 리하는 책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 그리스도인이 마른 우물 밑으로 내려가려 하고 있다. 그 우물 입구에 밧줄 하나가 있었고 손으로 번갈아 밧줄을 잡고 밑으로 내려 갔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내려가다가 보니 밧줄이 끝나고 말았다. 밑으로 내려 가자니 얼마나 깊은 줄 모르겠고 다시 우물 입구로 올라가자니 힘이 딸렸다. 할 수 없이 그는 밧줄을 잡고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계속 외쳤다. 그러나 그 우물이 광야에 있었고 또 그가 우물 밑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외쳐도 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목소리가 쉬고 힘이 다 빠져 온몸의 기력이 소모되어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을 때 그는 "하나님, 나로 영원 안에 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서 손을 놓자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땅과의 거리가 삼 인치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덩이 속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손을 놓았을 때 자신이 영원 안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반석 위에 떨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손을 놓으라! 손을 놓으라! 이기는 생명의 첫 번째 조건은 곧 손을 놓는 것이다. 오늘 이후로 당신이 상관하지 않을 때 당신은 이기게 된다. 오늘부터 상관하지 않겠다고 할 때 승리가 임한다. 최근에 연대(煙臺)에서 이기는 생명을 얻는 두 가지 조건을 들은 한 자매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것을 체험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늘 산 위에 올라가 기도했으므로 "오늘도 산에서 또 하나님 새 무덤을 파고 자신을 묻어 버렸습니다" 라고 답변했다. 수 차례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똑같이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처리하기 어려운 죄들을 이미 처리한 것을 알지만 그녀는 여전히 근심하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기도도 했지만 별 효력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구변을 주셔서 그녀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시도록 구했다. 그날 그녀가 피아노로 찬송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는 지금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한마디 밖에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또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많은 죄들을 다 처리했지만 군것질하는 죄만은 처리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였지만 그녀에게는 작은 죄였다. 그녀가 말하고 있을 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놀랍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녀는 "당신은 이기는 생명을 첫째 조건은 항복이고 둘째 조건은 믿음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항복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면 여전히 항복하지도 않고 믿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당신은 이기는 조건의 첫째가 항복하는 것이고 둘째가 믿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나는 항복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종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계속 항복하지 말고 믿지 많으면 됩니다. 항복이란 무엇입니까? 항복은 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손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곧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지금 당신은 손을 놓는 것을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일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당신은 믿는것을 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항복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면 다만 당신의 모습대로 그대로 있으면 됩니다. 자신을 개선하려고 하거나 심지어 손을 놓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이김의 조건은 당신이 항복하고 믿으라는 것인데, 당신은 항복하고 믿는 것을 승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당신의 손을 내려놓으십시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손을 놓거나 믿으려고 하지도 마십시요. 찬양할 수 있으면 찬양하고 찬양할 수 없으면 찬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으면 나오십시오. 당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상관하지 말고 그분 앞에 나오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손을 놓는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너무 복잡하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래도 이것저것을 하려고 한다. 많은 형제자매는 손을 놓아야지라고 말하면서, 손을 놓는것을 하나의 일로 여긴다. 놓지 않다가 놓고 또 놓았다가 다시 잡으며 여전히 발버둥치면서 자기의 힘을 쓴다. 형제자매들이여, 손을 놓는다는 것은 당신은 끝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김이다. 이 자매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삼 일 동안 혼돈 가운데 있었다. 빛이 너무 커서 혼돈 가운데 빠져 버렸다. 삼 일이 지난 후 그녀는 통과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통과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그 자매가 손을 놓지 못하던 유일한 한 가지를 통과하도록 인도하셨다. 우리의 약함은 자랑할 만한 것임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는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약한 자요 할 수 없는 자여며 방법이 없는 자로 여겨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약함과 할 수 없음과 방법 없음을 인해 기뻐해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여기서 당신은 당신의 약함으로 인해 울어야 한다고 말했는가? 아니다. 울지 않고 기뻐해야 하며, 기뻐할 뿐더러 또한 자랑해야 한다.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은 다 자기의 약함을 탄식한다. 그러나 이기는 자들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에게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느끼는가? 당신은 실패했다고 느끼는가? 당신에게 있는 어려움과 실패는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이 이기도록 돕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연대(煙臺)에서 나는 구원받은 지 삼사 년밖에 안 된 의사를 만났다. 그는 군대에서 십여 년간 근무를 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직선적이고 솔직했으며 군인다왔다. 그에게는 담배를 피우는 취미가 있었다. 그가 구원받은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담배피우는 습관이 있었다. 만주에 있었을 때는 담배 피우는 것이 그리 문제되지 않았는데 연대에 와서는 약간 어려워졌다.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가 칠팔십 명이 되고 또 연대 지방은 작기 때문에 집에서 몰래 피워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자매였기 때문에 밝은 데서 피울 수가 없었다. 병원의 몇몇 간호원도 우리 자매들이었다. 그는 한 면으로 피우고 싶고 또 한 면으로는 고통스러웠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사람의 음성을 들으면 담배를 꺼야 했다. 길에서 피울 때는 아는 사람이 없는지 앞뒤를 살펴보아야 했다. 담배를 끊을 수도 없고 안 끊자니 또 안 좋고 참으로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집회 후 그는 다음날 아침 아홉시에 나와 대화를 갖자고 약속했다. 그는 나와 교통할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이튼 날 아침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그의 일을 내게 알려 주었다. "십여 년간 담배를 피웠는데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을 계속하고 있을 때 나는 천장을 보면서 웃었다. 그는 "니 선생님, 이 일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라고 말했고 나는 안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고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방법이 없다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오직 주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즐겁고 기쁩니다. 이 일에 대해 나도 길이 없고 당신에게도 길이 없습니다. 당신의 아내에게도 형제자매에게도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 같은 환자가 있으므로 주 예수께서 왕진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는 십여 년간 방법이 없었던 이일은 작은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맞습니다. 당신에게는 어렵지만 주님에게는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상황을 쉽게 바꾸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또 "사(史) 형제님, 당신은 뛰어난 의사입니다. 나는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 없고 내게는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내 몸에서 치료하는 솜씨를 나타내려면 내가 병을 앓아야 하고 더욱이 큰 병을 앓아야 합니다. 내 병이 치료하기 어려울수록의사의 능력이 더욱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주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사 형제님이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처리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알려 주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를 덮게 하려 함이라." 그가 담배를 끊으려 했던 것은 좋은 일이고 또 그가 끊을 수가 없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가 담배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사람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말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담배를 끊으려 하지 않았다면 그 일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볼 때에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당신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 놀라운 입니다" 내 말로 인해 그는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결코 담배 피우는 것이 통탄할 만한 일어나거나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오히려 '주님, 담배 피우는 것을 인해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내가 담배 끊지 못함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내가 담배를 끊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는데 내가 먼저 몇 마디로 기도하고 이어서 그도 기도했다. 그는 믿음이 있었고 군인답게 직선적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담배 피우는 것으로 인해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또한 내가 담배를 끊지 못함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내가 담배를 끊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모자를 쓰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내가 그에게 "사(史) 형제님, 당신은 또 담배를 피우실 것니까?라고 묻자 그는 "나 사재림은 담배를 끊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날 위해 끊어 주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그에게 문제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저녁 때 나는 그의 일이 약간 염려스러워서 병원에 가서 그가 어떤가를 물었다. 그는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이튼날 아침 다시 그에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오늘 아내와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십 년간 그의 아내는 담배 피우는 것 때문에 그에게 불평했었지만 그는 담배를 끊지 못했다. 그가 하나님께 말씀드린후 삼십 분만에 담배를 끊게 되었다. 그는 "어제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오늘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다시 그에게, "사 형제님은 자신이 담배를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는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그럼 어떻게 하려느냐"고 묻자 그는 "주님이 날 위해 끊어 주신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안심하고 나왔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조금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지금부터 오십 년이 더 지난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화를 낼 것이다.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해 사시는 문제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할 수 없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그리스도의 할 수 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사람의 성질이 너무 나쁠까봐 두렵지 않고 사람의 성품이 너무 조급하고 사람이 너무 크게 교만할까봐 두렵지 않다. 오직 사람이 자신의 할 수 없음을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할까봐 두렵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당신의 승리를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더욱 당신의 약함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특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철저히 부패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스도가 또 한번 내 몸에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셨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하나님께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고 의로움과 거룩함이 없으며 인내와 침착함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이러한 것들이 내게 없음을 인하여 또한 이러한 것들을 얻으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도 않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오 주님, 오늘 이후로 내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이제부터는 날 대신해 이기는 분은 당신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이 이렇게 할 때 즉시로 이길 수 있게 된다. 일 분 일 초 만에도 당신은 즉시 이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 누가복음 18장에서는 할 수 없는 젊은 사람을 보여 준다. 누가복음 19장에서는 할 수 있는 삭개오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며 사 배나 갚겠나이다." (8절). 그는 즉시 행했다. 그 젊은 사람은 할 수 없었지만 삭개오는 해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누가복음 1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누가복은 18장에서는 젊은 사람은 할 수 없었지만 19장의 나이든 사람은 오히려 해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주님이 젊은 사람에게 말씀하셨는데 젊은 사람은 들을 수 없었고, 누가복음 19장에서는 주님이 나이든 사람에게 별로 말씀하시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믿었다. 이 젊은 사람이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나이든 사람과 그 가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이 구원이 임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사랑할 수 없고, 인내할 수 없고, 겸손할 수 없고, 온유할 수 없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 가운데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하고 당신이 통과할 수 있는 것을 당신이 통과하라고 말한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고 당신이 살 수 없는 생활을 살아내게 하신다. 매일 아침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저녁에도 하나님께서 또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오늘 하나님은 나로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셨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셨다. 오늘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날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체험한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7장, 믿음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라디아서 2장 20절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장 1절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어야 함 오늘 나는 이 두 구절만 읽겠다. 요 며칠 간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다름 아닌 바로 그리스도임을 보았다. 이기는 생명이란 자신의 진보나 자기 개선이 아니며 또한 자기 힘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데 이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이김은 곧 내 안에 사시고 날 대신해 사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전에 그분은 날 구원하시려고 내 대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오늘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이 며칠 간 우리는 이기는 조건의 첫째가 항복이고 둘째가 믿는 것임을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승리를 살아 나타내심을 믿는다. 이제 우리는 항복이란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보았다. 오늘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보기로 한다. 나는 많은 사람이 항복했을지라도 믿지 않기 때문에 이기지 못할까봐 염려스럽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항복했다 할지라도 믿지 않았다면 여전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항복하는 것은 다만 소극적인 면에 불과한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적극적인 면이다. 소극적인 면에서 항복하고 적극적인 면에서 믿었다면 분명히 이기게 된다. 연대에 상해에 갔다 온 한 형제가 있었다. 집회를 마친 후 집에 돌아가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항복했지만 여전히 이기지 못햇다. 오늘도 하루 종일 형편없었다. 옛날과 똑같이 오늘도 직장에서 화를 한 번 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항복하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면에 불과하므로 또한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받아들이고 이기게 됐다. 마지막 집회에서 그는 하나님을 찬미했고 처음으로 선포하기를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고 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기는 조건은 다만 항복만이 아님을 기억하라. 항복하는 것만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항복한 후에는 전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항복하고 또 믿었다면 분명히 이기게 된다. 사도 바울의 체험은 어떠한가? 그는 어떻게 이겼는가? 그의 첫걸음은 항복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했으므로 그는 이미 "내가 아니요"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뜻하는 바는 그분이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믿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사 날 위해 자기를 버리신 분임을 믿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항복했는데 왜 아직 이기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말할 수는 없고 대략적으로 말하겠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과 이김은 얼마나 큰 관계가 있는가이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사실을 믿음 성경 안의 모든 일들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이다. 작년 1월 집회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가지를 언급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실들이며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들은 이 세가지에 포함된다. 언약에 대하여는 새 언약을 말할 때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장래 이루실 것들이다. 사실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시고 성취하신 것들이다. 오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사실과 그분의 약속에 관해 언급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사실이 무엇인지 모른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 곧 온 세상 사람을 위해 죽으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오직 믿은 사람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믿든 믿지 않든 다 구원받게 되는가? 그가 믿어도 구원받고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은 것이 하나님께서 이룬 사실이므로 믿으나 믿지 않으나 다 같은가?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 안에 살고 계신다고 말할 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우리는 몸이다. 그리스도인은 머리가 느끼고 지배하며 다스리고 책임지듯이 그렇게 느끼고 지배하며 다스리고 책임을 지어야 한다. 오늘 주 예수가 머리이심을 본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되는가? 오늘 그리스도께서 느끼고 계신가, 아니면 당신이 느끼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는가, 아니면 당신이 지배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가, 아니면 당신이 다스리는가? 그리스도께서 책임을 지시는가, 아니면 당신이 책임을 지는가?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주 예수께서 머리이신 것은 믿지만 모든 것을 머리가 다 책임지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데, 사실은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성경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했다(요 15:5). 이 말씀은 그분이 우리의 포도나무가 될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가지들이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그분은 언제나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가지들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만이 그들을 통해 진액이 흐르는 것을 체험하고, 일을 통해 열매를 맺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애써서 일하여 열매를 맺으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흘러가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는 것을 알려 준다면, 그들은 왜 자신들은 일을 할 수 없고 왜 열매를 맺을 수 없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면 우리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또 하나님의 사실은 항상 하나님의 사실이 아니냐고 대응할 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사실을 실체화 하는 것임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 구절은 온 성경 안에서 믿음의 정의를 제시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 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번역이 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아주 번역하기 어렵다. 이 단어를 점 정확히 번역하려면 "실제화"로 번역해야 한다. "실체화"란 어떤 것을 실제가 되게 하는 역량을 뜻한다. 예를 들어, 여기에 등의 모양과 벽 색깔과 오르간 소리가 있다 하자.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 이런 모양과 색깔과 소리를 실제화시킬 수 있는가? 색깔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두 눈뿐이다. 가령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하자. 초록색의 부분이 매우 보기에 좋고 빨간색 부분도 좋고 노란색 부분도 좋다 하자. 그러나 이 보기 좋은 색깔들이 우리에게 실제가 되려면 눈이 필요하다. 만일 눈이 없다면 아무리 보기 좋은 색깔이라도 실제가 될 수 없다. 오르간 소리가 듣기에 매우 좋지만 귀가 있어야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가 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귀머거리라면 소리를 실제화 시킬 수 없다. 눈은 볼 수 있지만 소리를 실제화 할 수 없다. 손은 접하고 만질 수 있지만 소리를 실제화 할 수 없다. 오직 귀만이 소리를 실제화 할 수 있다. 물체의 모양에는 네모난 것, 동그란 것, 평면으로 되어 있는 것, 삼각형, 곡선이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보아야만 그것의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물체의 존재와 그 물체의 존재를 실체화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 세상에 많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실체화할 수 있으려면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한다. 믿음도 이와 같다. 여기에 산과 물과 화초와 나무들이 멋진 풍경화 한 폭이 있다고 하자. 당신에게 눈이 있다면 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다. 만일 여기 때어날 때부터 색깔을 본 적이 없는 장님이 있다 하자. 가령 당신이 그에게 여기 붉은 색이 있고 붉은 색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는 붉은 색이 무엇이냐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여기 초록색이 있고 참으로 아름답다고 알려준다면 그는 초록색이 무엇이냐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붉은 색은 붉고 초록색은 초록색이라는 정도밖에 말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이 있지만 그 장님은 그 그림이 얼마나 멋진가를 누리지 못한다. 그림 속의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지만 이러한 멋진 경치를 즐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자매가 있다고 하자. 귀 있고 음악을 아는 사람은 이 자매가 연주한 것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귀머거리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연주되는 음악을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모든 사실들이 다 실제이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사실들을 실체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실체화하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을 확증해 주기 때문이다. 장님은 그림의 풍경이 멋지더라도 그러한 그림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고 해서 이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당신이 볼 수 있든 볼 수 없든 하나의 그림이고 아름다운 색상은 그림 속에 있다. 문제는 이 그림이 주는 유익을 당신이 얻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세상 사람을 위하여 피 흘러 죽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죽으신 사실을 실제화하는 믿음에 있어서 자신이 유익을 얻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믿음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하나의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다. 형제자매들이여, 믿음의 중요성을 보았는가? 우리가 눈과 귀와 손으로 물질적인 대상을 실체화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영적인 사실들을 실체화할 필요가 있다.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것을 실체화하려면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손은 물체의 모양을 실체화할 수 있고 귀는 소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손은 색깔을 만질 수 없고 귀도 색깔을 들을 수 없다. 색깔은 오직 눈으로만 실체화할 수 있다. 영적인 것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주님은 머리이시고 우리는 지체이다. 이러한 연합은 하나의 사실이며 결코 다시 나뉠 가능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는 것도 사실이며, 분리될 가능성이 없다. 당신이 이 사실을 믿으면 유익을 얻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하지만 진액과 생명이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머리 속에서 한 가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한 가지 사실을 본 것이요 그 사실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피흘려 속죄를 이루신 것에 대해 들었다. 구속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음을 듣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사실에 동의했을 수도 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는 말을 듣고서,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과 동의했을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 그분이 나의 생명이요 내 안에 살아 계신다고 말하는데 동의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러한 사실들을 실체화하지 못한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은 이미 자신을 내려놓았고,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알고 쓸모없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또 자신의 손을 이미 내려놓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소극적인 면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들에 불과하다. 적극적인 면에서 당신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실체화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단지 몇 초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사실들이 당신 몸에서 실체화될 수 있다. 여기 아름다운 그림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풍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한 풍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골로새서에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여졌다는 말씀이 있는데 어떻게 당신이 온전하여진 것을 알 수 있는가? 그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을 본다면 당신은 조금도 온전하지 않다.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여졌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가?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여졌는가? 주님은 그분의 충만을 우리에게 주셨고 은혜 위에 은혜를 주셨다. 당신은 이것을 가졌는가? 이것은 당신이 머리 속에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속에서 그렇게 믿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런데 이 복들은 어디에 있는가? 형제자매들이여, 모든 문제는 믿음 곧 하나님의 말씀이 참됨을 믿는 것에 달렸다. 이것은 참으로 간단하며,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보기로 한다.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큰 실패는 곧 믿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실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일단 무언가를 볼 때 그것을 실체화할 수 있다. 믿을 때 사실을 실체화하게 되며, 믿을 때 즉시 얻게 된다. 과거 영국에 웹페블로씨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딸이 죽었다. 딸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다음날 무슨 제목으로 주일 설교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교인들이 내 딸이 죽은 것을 알고 상심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위안이 될 메시지를 전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제목을 택했다. 그는 이 말씀을 제목으로 삼고 성경 말씀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설교 준비를 했다. 다 마치고 나서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이 제목을 축복해 달라고 구했다. 그는 기도하면서 진정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한가를 자문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지 않다면 내가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말하면서 내 딸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괴로워하고 마음이 아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는 제목을 바꾸려 했지만 시간이 이미 늦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튼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게 족하게 하시도록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주소서. 하나님,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해 주소서." 라고 구했다. 그가 오랫동안 간구했지만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이것을 해야 하는가? 바로 이때 그는 문득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동일한 성경 구절을 보았다. 이것은 장례식을 치르러 나갔다 왔을 때 그의 어머니가 걸어 둔 것이었다. 이 성경 구절은 세가지 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내" 와 "네"는 파란색으로, "족하도다"는 붉은 색으로, 다른 글자들은 검은 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갑자기 그는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면서 말했다. "하나님, 당신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는 한 면으로 죄를 자백하면서도 또 한 면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므로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쁨과 감사로 충만했고 더 이상 간구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튿날 그는 강단 위에 서서 일생 중에 가장 좋은 메시지를 전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능력을 얻어 변한 것이 언제냐고 물었다. 그는 딸을 장사한 후리고 말했다. 그날 이후 그가 변한 것은 믿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 문제는 바로 사람들이 주 예수께서 머리이심을 듣고서도 주님께 "주여, 나의 머리가 되소서" 라고 구하는 데 있다. 당신은 왜 주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주여, 당신은 내 머리이십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즉시 그 사실이 실체화될 것이다. 어떤 형제가 내게 "니 선생님, 당신은 많은 것을 말씀하셨는데 나는 조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의 한 말만 들었기 때문에 그러하니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구하십시요"라고 말했다. 그는 밤에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로 이기게 하소서. 승리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나는 성질이 너무 형편없습니다. 하나님,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다가 그는 문둥병자가 주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기도한 것이 생각나서 자신도 주께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저의 성질이 떠날 것입니다."라고 간구했다. 여기가지 기도했을 때 그는 주께서 이미 원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셨고 그분이 원하신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아나 누가복음 18장 27절을 믿을 있기만 하면된다. 우리는 "내가 원하노니"라는 말을 믿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노니"로 어려움이 다 지나가고 성질도 다 지나갔다. 이뿐 아니라 아내가 죽을 병에 걸렸을지라도 주님이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것이 잘 될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한번은 한 형제가 이김에 관하여 말씀을 전했는데 말씀을 마친 후 형제자매들에게 어려움이 있느냐고 묻고, 있으면 질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젊은 자매가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서도 질문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또 다른 한 나이든 자매가 일어나 "이 몇 년 동안 이기도록 기도해 왔지만 계속이기지 못했는데 문제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 형제는 "다른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다만 기도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도를 찬미로 바꾼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형제가 말을 마치자 한 남자가 일어나서 말했다. "내가 이기려고 11년간 구해왔지만 지금까지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좀 전에 당신과 노 자매와의 일문일답을 통해 빛 비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얻게 되었습니다." 이 전도하는 형제가 그 젊은 여자 옆으로 가서 그녀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도 좀 전의 문답을 듣고서 자기도 분명해졌고 이제는 얻었다고 말했다. 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손을 놓았다고 해서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에게 믿음이 없다면 결코 사실을 실체화할 수 없다. 그림의 색깔은 눈으로만 실체화할 수 있고 오르간 소리는 귀로만 실체화할 수 있으며 물체의 채질은 손으로만 실체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만 실체화할 수 있다. 우리는 주저하면서 "하나님, 나의 이김이 되소서. 하나님, 당신이 나의 생명이 되소서. 하나님, 당신이 나의 거룩함이 되소서." 라고 구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하나님, 당신이 나의 승리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의 생명이시며 나의 거룩함인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찬양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매번 여러가지 시험에 직면한다.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임하고 듣기 힌든 많은 말들도 우리귀에 들려 온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기도록 힘을 주시라고 구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당신이 나의 승리이십니다. 주여, 당신이 내 대신 모든 어려움을 견디시는 분입니다. 주여, 당신은 내 머리시요 나는 당신의 지체요, 당신은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이신 것을 인해 감사드리며 찬양합니다. 당신이 나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대로 이미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천 마디 말씀 중에서 한마디를 얻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근거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 5장 24절, 어떤 사람은 로마서 10장 10절에 근거해 구원받는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기는 것도 하나님의 많은 말씀 중에서 한 마디를 얻어야 한다. 좀 전에 말한 그 형제는 "내가 원하노니" 라는 한 마디 때문에 이김을 얻었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로 말미암아 이김을 얻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로 말마암아 이김을 얻는다.또 어떤 사람들은 로바서 6장 14절을 통해 이김을 얻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로 말미암아 이김을 얻는다. 믿음은 바람이 아님 믿음은 바람(소망)이 아니다. 바람이 있는 사람이 다 믿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이기는 문제를 다룰 때, 어떤 이에게 이겼느냐고 물었는데 만약 그가 "이기기를 바란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당신이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 누가 당신에게 구원받기를 소망한다고 하면 당신이 그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 자신을 구원하고 또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라고 계속 바란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 자신이 승리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한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이 이길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계속 기다린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미 항복하고 믿었지만 정말 이루어지는 가를 두고 보자고 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는 나에게, 이긴 후에 주 예수가 나의 승리이심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내 공장에 일꾼들이 이십명이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관리해야 하지만 그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감독인데 아침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그 많은 여공들과 그 많은 일들을 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다면 내가 이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에게 답변하기를, "당신은 공장에 있을 때 당신이 두 눈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합니까?라고 하자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공장에서 나올 때 당신의 눈이 있는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손으로 만져 볼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가 필요 없다고 말하자, 나는 그에게 "당신이 기억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만 당신이 두 눈이 정말로 거기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기는 생명은 우리가 주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는 것임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자. 그분이 우리를 기억하신다! 믿음은 느낌이 아님 어떤 사람은 바라거나 기도하거나 기다리지는 않지만 느낌을 얻고자 한다. 어느 자매는, "내가 이미 항복하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믿었지만 감히 내가 이겼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의 승리를 영접한 후로부터 오늘날까지 나에게 조금도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믿으려면 온전히 믿어야 한다. 느낌은 쓸모없다. 그림은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느끼는 것은 소용없다. 느낌이 다른 일에는 쓸모 있어도 주 예수를 아는 일에는 쓸모없다. 손으로는 찬 것과 뜨거운 것을 알 수 있지만 손으로는 그림을 볼 수는 없다.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감각을 사용할 수 없고 믿음으로 실체화해야 한다. 당신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만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긴다는 것은 특별한 힘을 느끼는 것이 아니며 며칠간 뜨거운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기기위해서는 주님이 주신 한 마디의 말씀이 필요하다. 오늘 아침 한 형제가 와서 자신의 어려움을 말했다. 그는 이미 항복하고 믿었지만 이미 승리했다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사탄이 여전히 그를 참소하고 있었다. 어제 어떤 일이 있었고 아마 그러한 일로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승리가 참인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가령 내가 내 뒷뜰에 있는 화원을 당신에게 팔고 계약서를 당신에게 써 줬다고 합시다. 당신이 화원에 들어갈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가운데 어느 부분의 땅이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내가 당신에게 써 준 계약서를 믿고 포함된 모든 부분이 다 당신의 것임을 믿는 것이다. 둘째는 내 말을 믿는 것인데 내 말이 참이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의 말이 거짓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당신이 누구의 말을 믿느냐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면 그가 거기 거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다. 만일 당신이 내 말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에게 떠나라고 해야 하며 그럴 때 그는 즉시 떠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성질과 교만이 참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믿지 않으면 당신의 성질과 교만이 실제가 되겠지만 당신이 믿는다면 그 모든 것은 다 쫓겨날 것이다. 하나님은 온유가 당신의 것이요 인내와 겸손과 사랑과 절제가 당신의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라는 언약을 당신에게 주셨다. 그러나 당신이 다시 화를 내게 되고 교만과 더러움이 나타나고 실패하게 될 때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 내가 온유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으며 겸손하고 사랑하며 절제할 수 있음을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기만 하면,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게 된다.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임 오늘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데 있다. 그들이 손을 놓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손을 놓았으므로 믿는 것은 응당 매우 쉬운 일이 되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주님의 임재 앞에 나아오라. 나아와 손을 놓은 후 당신이 통과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완전히 손을 놓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 한 자매가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이겼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아직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가? 그녀가 아직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직선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인 불신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이 손을 놓을 때 주님의 생명이 살아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비록 당신이 손을 놓았지만 하나님께서 아직 충분히 구원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본분은 다했는데 하나님이 아직 그분의 본분을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주님, 당신이 이미 모든 것을 내게 주셨음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이시고 생명이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또한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믿기만 하면 아무리 어려운 것일지라도 지나가게 된다. 당신이 믿었다면 당신의 승리를 저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할렐루야, 이것이 구원이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머리이심과 당신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주님이 당신의 생명이심을 믿고, 주님이 포도나무요 당신은 가지임을 믿고, 주님이 당신을 대신해 이긴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당신이 믿을 때 모든 시험이 다 지나가게 된다. 당신이 믿을 때 그분이 모든 것을 다 하신다.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드리자. 그분이 모든 것을 다 하셨다. 우리가 여기 모인 지 이미 팔구 일이 지났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자 한다. 여러분 중 이미 손을 놓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손을 놓았을 뿐 아니라 이미 믿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먼저, 이미 손을 놓은 사람들은 손을 들어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미 손을 놓고 또 믿은 형제자매들이 손을 들어주기 바란다. 좀 전에 손을 들어 손을 놓았다고 한 사람의 수와 손을 놓을 뿐 아니라 믿었다고 한 사람의 수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믿었다고 표시한 사람의 수가 손을 놓았다고 한 사람의 수보다 약간 적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믿음에 관한 일들을 조금 더 알려 주겠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의 하신 말씀은 신뢰할 만한 것임을 기억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이나 느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하나님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요 거룩함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요 거룩함이심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가 내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가 나의 거룩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나의 승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가 나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연대에서 나는 한 자매에게 "당신은 손을 놓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이미 손을 놓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겼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솔직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자매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생명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거룩함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과 하나님 중 분명 한쪽이 거짓말쟁이일 것입니다.하나님께서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틀린 것입니다.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틀린 것입니다. 당신은 감히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생명이라고 말하는데 당신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생명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거룩함이라고 말하는데 당신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거룩함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니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는 안색이 변하여 즉시 "나는 그런 뜻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라고 답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여기서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결정을 못 짓고 아직도 그리스도가 당신의 생명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그리스도가 당신의 거룩함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당신은 이것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연대에 한 자매가 있었는데 그녀와 집회 전에 몇 마디 나눈 적이 있다. 집회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그녀에게 손을 놓았냐고 물었다. 그녀가 이미 손을 놓았다고 말하자, 나는 그녀에게 이겼느냐고 물었다.그녀는, "내가 이기지 못했지만 내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또 그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몇 분 후에 떠나야 할 것을 알고서 하나님께 답변할 말씀을 구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웃으면서 믿음이 없다고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리스도가 당신의 생명이요 그리스도가 당신의 거룩함이요 그리스도가 당신의 승리라고 말씀하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믿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중요하지 않게 여깁니다. 자매여, 내가 말하지만 당신은 큰 죄를 범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이렇게 말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당신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나의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이 죄를 사하여 주소서.'"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서, 여전히 웃는다. 그들은 믿지 않는 것을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큰 죄이다. 이 죄는 간음죄보다 더 중하며 살인죄보다 더 중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하나님, 제가 당신께 죄를 범했으니 저를 용서해주소서. 하나님 저의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제하여 주소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을 죄로 여길 때 당신은 통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가!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원문 참조)라는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가! 골로새서 3장 4절의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씀 또한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된다. 당신에게 다만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있다면 확신을 갖게 되며 이기게 된다. |
8장, 믿음의 시련 -
믿음의 시련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전서 1장 7절 오늘 저녁 나는 믿음의 시련 혹은 믿음의 시험에 대해 말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시험을 거치지 않은 믿음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믿음은 시험을 거쳐야 한다. 믿음이 시험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믿음이 시험을 거쳐야 하는 이유 1. 우리를 자라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자람이 있는 그리스도인 치고 믿음이 시험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자람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다 시험을 거쳤다. 나는 주저함 없이 이 말을 하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다 시험을 거쳐야 한다.믿음이 자라는 유일한 방법은 시험을 거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도록 인도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 시험을 받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며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인다.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라게 된다. 2.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은 우리를 자라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그분을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치고 믿음이 시험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당신이 진실로 믿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참된 믿음이다. 시험을 거친 믿음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이름은 시험을 거친 믿음을 통해 영화롭게 된다. 우리가 환란에 처하고 핍박을 받으며 방해를 받고 흑암을 통과할지라고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 넘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3. 사탄의 입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거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자라게 하고 또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거치게 하시는 것은 또한 사탄의 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믿은 사실을 부인하게 만들려 한다. 또한 우리가 믿은 사실들을 우리가 이미 얻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는 어찌하든지 당신을 속이고 괴롭히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사탄으로 할 말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탄은 당신이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때 비로소 물러난다. 우리를 속일 수 있는 한, 사탄은 우리를 계속 방해하고 우리를 평안히 가게 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앗아가려고 한다. 모든 방법을 써 보고 지칠 때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사탄의 입을 막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4.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은 또한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시험을 거치지 않은 믿음는 남을 도울 수 없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당신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믿음이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다. 믿기는 믿었지만 시험을 거치지 않은 사람의 믿음은 완전히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참으로 시험을 거친 믿음 앞에 사탄은 아무런 방법이 없고,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탄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교회를 도울 수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시험을 통과한 믿음은 불로 연단할 때 결국은 없어질 금보다 더욱더 귀하다. 믿음의 시험과 이김의 관계 이제 나는 믿음이 시험을 받는 것과 우리의 이김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대해 말하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믿음임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참된 믿음은 오래간다. 얼마가지 못하는 것은 다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수명이 길다. 이런 믿음은 삼 일이 지난 후에도 믿고, 한 달이 지난 후에도 믿으며, 일 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더라도 믿는다. 참된 믿음은 한 번의 방해를 견딜 수 있고, 다섯 번, 열 번의 방해를 견딜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한 번의 시험을 거쳐도 믿고 다섯 번, 일곱 번의 시험을 거쳐도 여전히 믿는다. 무릇 오래가지 못하는 믿음이나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넘어지고 끝나는 믿음은 분명 믿음이 아니다. 모든 믿음은 분명히 오래간다. 성경은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머리요 우리의 이김이요 우리의 거룩함이요 우리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우리의 모든 책임을 지고 계심을 알며, 우리에게 인내와 온유를 공급하시며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하고 계심을 안다. 주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또한 시험을 거칠 필요가 있다. 오늘 아침 한 형제가 내게 말했다. "나는 이미 손을 놓았고 나는 이미 믿었고 이미 이김의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어제 집회를 마친 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큰 길가의 백화점 부근에서 어느 노인과 부딪혔습니다. 그때 겉으로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내 속에서는 이미 화가 났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내가 이미 손을 놓았고 이미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이미 믿었고 그리스도가 나의 이김이심을 믿었지만, 화를 내려는 생각이 없었는데도 성질이 났습니다. 이것은 왜 그렇습니까?" 형제자매들이여,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1. 이김은 자신이 변했다는 의미가 아님 당신이 이김을 체험한 후 일 주일 동안 죄를 범하지 않았고 이 주가 지나고 삼 주, 오 주 동안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자신이 좋아졌고 이제 변하고 성숙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당신은 스스로 만족해하고 자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당신을 한번 시험하셔서 실패하게 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주님으로 대치되어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변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당신이 인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시는 것이고, 만일 당신이 온유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온유한 것이며, 당신이 거룩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거룩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겨왔든지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고, 당신은 영원히 당신이고,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워치만 니는 영원히 워치만 니이다. 50년이 지난 후에도 워치만 니는 여전히 니이다. 은혜가 사라져 버린다면 남는 것은 단지 워치만 니 뿐이다. 이김은 그리스도시요 나 자신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음을 인해 주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연대에 있는 중국내지선교회의 몇몇 외국 선교사들은 개선됨과 바뀜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은혜가 없다면 바울에다 베드로를 더하고 요한을 더하여도 여전히 죄인이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에게서 은혜를 제해 버린다면 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길가의 강도와 많은 창기들과 차별이 없다. 은혜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시는 것이다.이것은 내 자신 안에서 어떤 개선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찬송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마음 높아질 때에 위험한 땅에 넘어져"(한국복음서원 찬송가 423장)이것은 진정한 사실이다. 형제자매들여, 당신은 조금도 개선된 것이 없고 여전히 똑같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체험 중에 어느 것이 더 믿을만한가 자신의 체험을 믿기는 매우 쉽다. 자주 우리는 나같이 연약하고 실패하며 성질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체험이 이러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믿을 만한가, 당신의 체험이 믿을 만한가? 내가 연대에 있었을 때, 이 상수 형제의 자매가 내게 찾아와 말하기를 자신이 이미 항복하고 또 주님이 승리이심을 완전히 믿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기는 체험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이김이 얼마가지 못합니다. 일 주일이 지난 후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두 아이가 다툴 때 나는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 이삼일 동안 이기지 못했는데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라고 물었다. 내가 그리스도께서 변하셨느냐고 묻자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셨느냐고 묻자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그리스도께서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변하지 않았는데 왜 당신은 승리하지 못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녀는 그것은 자신의 체험이 자신의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가령 자매님의 아들이 나갔다가 길가에서 만난 어떤 사람에게서 '너는 네 어머니가 낳은 것이 아니라 건재당에서 이 원 주고 사 왔다'라는 말을 듣고서 당신에게 달려와 '엄마, 엄마가 저를 낳으셨어요. 아니면 이 원으로 저를 사 왔어요? 밖에서 어떤 사람이 나는 엄마가 나는 엄마가 사 온 애라고 했어요.' 라고 묻는다 합시다. 당신은 '내 아들아, 너는 내가 낳은 아들이다. 밖에 있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말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또 나가서 그 사람을 만나 그에게서 '네 엄마가 너를 사올 때 내가 내 눈으로 보았단다' 라는 말을 들었다 합시다.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당신에게 물으면 당신은 '얘야, 네가 아직도 내 말을 믿지 않느냐?' 라고 말할 것입니다. 후에 아들이 나가서 또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또다시 당신의 아들에게, '네 엄마한테 확실히 물어 보았니? 네 엄마가 이 원으로 너를 사던 그날 나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인력거꾼도 보았단다. 그 뿐 아니라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보았어.'라고 말한다하자. 그 사람이 일이십 명의 증인을 대가며 당신의 아들이 엄마가 난 것이 아니라 이 원으로 산 애라고 합시다. 이럴 때 한쪽에는 증거가 필요 없는 어머니의 말이 있고, 또 한쪽에는 이십 명, 오십 명의 말, 즉 그럴듯한 증거를 대고 있는 거짓된 말이 있습니다. 이때 당신의 아들은 증거가 필요 없는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많은 증거를 대고 있는 밖의 사람들의 거짓말을 들어야 합니까? 만일 당신의 아들이 여전히 당신에게 '엄마, 그 사람이 많은 증거로 나는 엄마가 산 애라고 말했어요. 엄마, 나는 대체 엄마에게서 낫어요, 엄마가 사 온 애예요?'라고 묻는다면, 그때 당신은 분명히 '이 녀석, 정말 분별이 없구나.'라고 말할것입니다. 이 자매님, 오늘 하나님도 당신에게 분별없는 아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당신의 거룩함이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이김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참입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그분을 떠날 때마다 당신은 조급해지면서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이기지 못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나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게는 내가 거룩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당신의 아들이 말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보다는 많은 증거를 보여 주는 사탄의 거짓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말로 당신의 아들을 속일 때 당신의 아들이 웃으면서 '내 어머니가 한 말이 믿을 만 하고 당신은 거짓말쟁이예요.'라고 말하고,두 번째 속일 때에도 여전히 웃으면서 '당신은 거짓말쟁이예요.'라고 말하고, 그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쉰 번 그를 속인다 하더라도 그가 '당신은 거짓말쟁이요 내 어머니가 한 말이 믿을 만합니다.'라고 한다고 합시다. 이럴 때 당신의 아들은 대적을 부끄럽게 하고 어머니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탄이 와서 자매님을 냉담하게 만들어도 자매님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나는 이기는 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탄이 와서 자매님을 괴롭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승리이기 때문에 나는 이기는 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탄이 말한 것은 거짓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시험을 거친 믿음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면서 시험을 받을 때마다 울어 버린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한 믿음은 오래가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분명히 시험을 거친 것입니다. 만일 시험을 당할 때마다 패배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끝난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당신이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이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이요,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참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 위에 영원히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굳게 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당신이 누구의 말을 믿느냐에 있다. 믿음이 있을 때 산이 옮겨 짐 또 다른 자매도 이 자매님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믿었지만 아직 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에게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그마한 시험도 통과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큰 믿음이란 무엇인가? 산을 옮기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 견고하여 요동치 않는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이다. 산을 옮기는 믿음은 어떤 방해로도 저지를 받지 않는다. 믿음이 있을 때 문제는 사라진다. 이것이 산을 옮기는 믿음이다. 산과 믿음 이 두가지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산이 옮겨지거나 믿음이 옮겨져야 한다. 산이 여기 있다면 믿음이 옮겨져야 하고 믿음이 여기 있다면 산이 옮겨져야 한다. 모든 시험이 바로 산을 옮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문제는 시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중대한 사실은 산이 있다면 믿음이 옮겨져야 하고 믿음이 있다면 산이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길가에 있는 사람들의 거짓을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에 있다. 시험에 직면할 때 넘어져 버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어떤 형제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돌파한 것같지만 아직 승리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사탄이 그에게 "보라,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여전히 실패했다. 너는 속았다. 이김이라는 것은 없다." 고 말했다 하자. 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당신도 속았다고 말한다면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당신의 믿음대로 이루신다. 한때 나는 병 때문에 위층 다락방에서 앓아 누워 있었다. 한 형제가 와서 열을 재보고 맥박을 만져 보았다. 열이 높고 맥박도 매우 빨랐다. 그 형제가 오기 며칠 전에 나는 며칠 밤을 연달아 잠을 이루지 못해 거의 죽을 뻔했었다. 그날 밤 나는 기도했고 이튿날 오후에 주님게서 말씀을 주셨다. 주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나에게 로마서 8장 11절을 보여 주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나는 그날 특별히 잠을 잘 이룰 줄로 생각했지만 그날 특별히 더 잠을 이루지 못할 줄이야! 다음날 그 형제가 다시 나를 진찰할 때 열이 더 높았고 맥박이 더 빨리 뛰었다. 사탄은 매우 분주했다. 그는 아주 속히 와서 이것이 무슨 약속이냐고 말했다. "하나님은 네가 살아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보라, 네가 어디 살아났느냐?" 사탄의 말은 매우 그럴 듯하게 들렸다. 이때 하나님은 즉시 내게 두 구절을 주셨다. 한 구절은 요나서 2장 8절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신 주를 버렸사오나" (원문 참조) 이 말은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 한 것이다. 밖의 광경과 상황은 거짓되며 헛된 것이다. 또 한 구절은 요한복음 17장 17절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은 다른 말은 다 거짓이고 그분의 말씀만이 참되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면 내 열이 높은 것은 거짓이요 내 맥박도 거짓이다.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것도 거짓이다. 그러므로 나는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은 참이고 다른 말들은 다 거짓이라고 말했다. 나는 다만 이렇게 믿었고 이렇게 선포했다. 오후가 되자 내 열이 내려가고 맥박도 느려졌다. 밤이 될 때 나는 또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것임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곧 믿음의 시험이다. 참된 믿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자기의 체험이나 느낌이나 암담한 환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할렐루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이다! 만일 환경과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해야 한다! 만일 환경과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인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은 다 거짓된 것이다. 사탄은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네가 구원받았느냐? 보라, 네가 전과 똑같이 부패했고 약하다. 네가 어디 이기었느냐?" 당신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여전히 나다. 나는 영원히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나의 거룩함이요 나의 생명이고 나의 승리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당신이 여전히 부패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다. 사탄은 당신이 여전히 약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다. 사탄은 당신이 여전히 더럽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다. 사탄이 당신에게 한 말은 다 거짓된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이다. 연대에서 나는 한 가지 공과를 배웠다. 어느 날 나와 바 자매는 다 하나님께 특별한 은사를 구했다. 나는 믿음의 은사를 구했고 바 자매는 신유의 은사를 구했다. 우리는 십오 분쯤 기도한 후 다 응답을 얻었다. 저녁집회에 갈 때 안(安) 자매가 나에게 집회소 아래층에 살고 있는 한 자매의 정신병이 발작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한달에 한두 번 발작했던 것이 최근에 들어서는 자주 발작한다고 했다. 집회를 마쳤을 때는 이미 열 시 반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회소 아래층에서 거하는 사람이 정신이 이상해졌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내가 형제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하나님의 말씀 베드로전서 1장 7절이 내게 임했다. "믿음의 시험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나는 "좋다. 믿음이 시험을 받아야 한다면 받게 하자."고 말했다. 이튿날 나는 바 자매를 찾으러 갔다. 본래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었으나 그녀가 어제 신유의 은사를 얻었고 나는 믿음의 은사를 얻었기 때문에 함께 가서 적용하고자 했다. 바 자매는 내가 가자고 요청할 때 조금 어려워했다. 그녀는 먼저 기도해 보겠다고 했다. 기도가 끝난 후 그녀도 가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는 병든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의사인 사(史) 형제는 그녀가 깨어난 후에 보자고 하며 아무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바 자매는 오전 11시 30분 배로 떠나야 했는데 열 시 오십 분이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병든 그 자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은 다 곧게 서 있었다. 여러분은 그녀가 거의 미쳤다는 것을 알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일이 분 기도한 후 주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셨고 내 안에 믿음이 생겼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치료될 것을 알았다. 바 자매도 몇 마디 기도한 후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또 두 형제와 한 자매도 우리와 더불어 몇 마디 기도했는데, 바 자매와 나처럼 이런 흐름 안에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나는 바 자매를 배 있는 곳까지 배웅해 주어야 했다. 내가 부두에서 돌아왔을 때 병든 그 자매는 울다가 웃다가 하며 큰 소리를 질렀다. 몇 분 후 그녀는 쓰러졌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때 나는 그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 형제는 내 옆으로 와서 "형제님, 빨리 기도하십시오. 의사인 저로서는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탄아, 더 시도해 봐라 네 힘을 다해 해 봐라."고 말했다. 그녀는 미친 자 같았고 나도 미친 자 같았다. 그녀는 방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밖에서 외쳤다. 그녀는 오후 세 시 반까지 소란을 피웠고 나도 세 시 반까지 계속했다. 끝에 가서 나에게 믿음이 왔다. 네 시에 집회가 있서 가야 했기 대문에 나는 사(史)의원에게 그녀를 건드리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사탄이 할 수 있는 대로 다 해보도록 놔두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신다. 저녁 때에 사 형제가 와서 그녀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녀가 거의 정상인과 똑같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또 발작할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다른 형제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병든 자매가 양호한 때는 약 한 시간 정도였는데 그 시간 동안에도 정말로 양호한 시간은 삼십 분 정도였다. 오후에 그녀는 또 한번 크게 소란을 피웠다. 사 형제는 또 내게 와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지만 주신 말씀이 없었고 마치 믿음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 겉았다. 이때 사탄은 즉시 네게 "한번 더 웃어 보라. 네가 어제 웃지 않았느냐? 오늘 한번 더 웃어 보라." 고 말했다. 이때 나의 믿음은 상실된 것 같았다. 사탄은 옆에서 내게 "어제는 네가 웃을 수 있었으나 오늘은 이렇게 차갑지 않느냐?" 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내 속에 이런 음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너의 느낌은 변했는지 모른다. 네가 어제는 웃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차갑다. 그러나 나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옳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다. 어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렇게 웃은 것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더할 수 없고 오늘 느낌이 이렇게 차가운 것도 하나님의 미쁘심을 감소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더이상 기도하지 않고 다만 주님께 감사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사 형제가 말하기를, 신체 증상으로 볼 때 그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했다. 이튿날 그녀의 얼굴색도 좋아졌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믿은 다음에 즉시 결과를 보고자하고, 믿은 후에 즉시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하나님을 삼 일도 믿지 못한단 말인가? 혹은 삼 개월간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단 말인가? 당신이 삼 일간, 삼 개월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면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 말씀을 다시 말하고자 한다.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28:16) 어느 날 밤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지고 명했다. 갑자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를 덮게 되었다. 주 예수님은 배 뒤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후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마가복음 4장 40절에서는 "너희가 어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셨고,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8:26)"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불안하여 어쩔 줄 모르는 기도는 불신의 표시이다. 만일 당신이 믿음이 있다면 굳게 서 있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에게 저 편으로 건너 가라고 명하셨지 바다 밑으로 가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주님이 이미 분부하셨으므로 바람이 조금 더 심하게 불어도 파도가 높아도 상관했다. 아무리 바람이 심할지라도 배가 뒤집어지는지 보라. 믿음이 없을 때에는 시험을 만나면 피하려 하지만, 믿음이 있을 때는 시험을 만나도 여전히 설 수 있다. 적은 믿음은 시험을 당할 때 도피하게 되고 큰 믿음은 시험을 당할지라도 여전히 설 수 있다. 거짓된 믿음은 시험을 보기만 해도 넘어질 것이지만, 참된 믿음은 시험을 당할지라도 견고히 설 것이다. 오직 믿음 위에 견고히 섬 어떤 사람이 내게 욕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참을수록 그는 더 욕했다. "하나님, 속히 인내를 주소서. 속히 내게 힘을 주서서. 견딜 수 있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성질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같으면 나는 그렇게 다급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사탄아, 네가 사람을 통해 나를 더 심하게 욕하려 하더라도 상관없다. 네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다급하게 할 수 있는가 보자."라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욕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그를 사랑할 수 있다. 참으로 당신이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 형제자매들이여, 승리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만일 승리가 나라면 내 인내는 이만큼 뿐이기 때문에 얼마후 곧 성질을 내게 된다. 만일 승리가 그리스도라면 어떠한 시험도 지나치게 심한 것이 아니요 어떠한 시험도 지나치게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이 편에 서 있고 믿음 이 편에 서 있다면 사탄은 당신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주님이 저 편으로 건너가고 명했으므로 분명 건너갈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말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믿을 만하고 하나님께서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들에게 묻겠다. 당신에게 반복되는, 자주 범하는 한두 가지 죄가 없는가? 나는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는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이끌어 시험을 통과하게 하실 때 실제로 누가 시험을 받는 것인가? 매번 당신에게 임하는 시험은 당신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우리가 시험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시험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미쁘심이 시험을 받는 것이다. 모든 시험이 임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매번 시험이 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미쁘심이 어떠한가를 시험한다. 당신이 하나님 이편에 서 있고 하나님 말씀 이 편에 서 있으며 환경과 상반되는 이편에 서 있는 것이 곧 믿음이요 이김이다. 사탄이 당신을 아직도 더러운 자라고 말할 때 당신은 그리스도가 "나의 거룩함이요"라고 말하고, 사탄이 당신을 아직도 교만한 자라고 말할 때 당신은 "그리스도가 나의 겸손이요"라고 말하고, 사탄이 당신을 아작도 실패하는 자라고 말할 때 당신은 "그리스도가 나의 승리요"라고 말해야 한다. 사탄이 어떻게 말하든지 그리스도는 믿을 만한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이 곧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시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미쁘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믿음에 대한 시험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당신이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직후에, 그 전보다도 더 많은 시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후에는 다른 이들에게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다. 시험을 통과한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시험을 통과한 믿음은 사탄의 입을 막아 버리고 사탄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게 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만한 것임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서 있을 때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어떠한 산도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믿음은 산을 움직이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산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우리는 그러한 산을 옮겨 버릴 수 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
9장, 성장 -
성장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요한복은 17장 17절 오늘 저녁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일을 더 보려고 하는데, 보기에 앞서 먼저 이미 본 것들을 복습하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의 체험이 계속 실패하는 것임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 정하신 생명이 우리의 체험을 훨씬 초월한 것임을 보았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기는 생명이 그리스도임을 보았고, 억누르고 발버둥치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사람의 방법은 쓸데없다는 것을 보았다. 넷째로 우리를 이기는 생명의 성질에 다섯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 생명의 성질은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바꾼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보았다. 다섯째로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에 들어가는지를 보았다.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조건은 (1) 항복, 곧 손을 놓는 것이요, (2)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으면 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인 것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인 것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손을 놓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일곱 번째로 우리는 믿음이란 다만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을 실체화하는 것임을 보았다. 여덟 번째로 우리가 믿었지만 이 믿음이 또한 시험을 거쳐야 함을 보았다. 오늘 저녁에는 이어서 이기는 생명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 곧 어떻게 해야 자랄 수 있는가에 관하여 다룰 것이다. 앞의 요점들을 들은 후 여러분은 틀림없이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후 지금, 우리의 생명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더 전진할 필요는 없습니까?" 라고 물을 것이다. 오늘 여기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후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후 매일 마땅히 해야 할 일들 1. 얽매는 죄들을 이김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기는 생명을 체험했고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승리가 되셨다. 그러나 어떻게 매일의 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금방 넘어진다. 첫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긴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일한 죄에서 구원해주시기를 바라고, 기대하며 소망한다. 유일한 죄는 계속 그를 괴롭히고 방해하던 죄이다.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전히 자신의 유일한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주님은 이미 당신을 구원하셨고 이미 당신의 이기는 생명이 되셨다. 당신은 주님께 "주님, 그리스도의 승리가 나의 승리임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주님,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나의 거룩함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 안에 살아 계신다. 전에는 성질을 잘 내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성질이 사라졌다. 혹 의심이 많던 사람이어서 의심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혹 말이 많은 사람이어서 말 많은 것 때문에 자주 어려웠을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앞에서 말한 여덟 가지 죄 중에 한 가지 때문에 계속 괴로움을 당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런 죄들을 쫓아내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다. 당신은 이김을 체험한 후에는 응당 하나님께 "주님, 주님께서 이러한 죄들을 내 뒤로 던져버리게 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외에 많은 죄들을 처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 당신이 누구에게 죄를 범했거나 형제에게 죄를 범했다면 당신은 그에게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 과거에는 잘못을 시인할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자백할 힘이 있을 것이다. 또한 과거에 해방 받지 못한 죄가 있다 하자. 지금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살아 계심으로 당신은 해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형제자매들은 이기는 생명을 얻은 후에 유일한 죄 곧 늘 반복되며 당신을 얽매이게 하는 그 죄를 제해 주시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만일 유일한 죄를 계속 당신 몸에 머물도록 한다면 형제자매들은 당신이 이미 승리했음을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당신도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기는 생명을 얻기 전 당신이 싸울 힘이 없었다. 지금 이기는 생명이 있으므로 당신은 싸울 힘이 있다. 지금 당신에게 믿음과 힘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가서 싸울 수 있다. 어느 날 연대에 있는 몇몇 외국인 자매들이 내게 와서 이긴 후에도 여전히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자매들에게, "당신은 싸워서 이깁니까? 아니면 이겼으므로 가서 싸웁니까?" 하고 물었다. 싸워서 이기려 한다면 영원히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겼기 때문에 싸우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싸움으로서 승리에 이르는 것인가, 아니면 이긴 후에 나가서 싸우는 것인가에 있다. 많은 사람은 이기려고 발버둥치며 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승리란 당신이 힘을 써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얻는 것이요 완전히 하나님게서 당신께 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주님이 우리의 거룩함, 완전함, 승리이신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사라져야 한다.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다 뽑힐 것이다. 내가 어떤 형제에게 이런 비유를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이 어떤 땅을 샀는데 땅을 판 사람이 당신에게 땅의 길이와 넓이가 쓰여진 꼐약서를 주었다 합시다. 당신이 그 땅을 인수하려 할 때 그 땅에 오두막을 짓고 그 안에 살겠다는 몇 깡패를 만났다면 어떻게 하겟습니까? 당신은 계약서에 따라 그 깡패를 쫓아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도 이와 동일하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의지한다. 성경에서 우리의 씨름을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싸워야 함을 말했다. 성경은 우리가 원수를 이겨야 한다고 말했지만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성경이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방패로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에게 묻겠다. 당신이 특이한 의심이나 말 많음이나 얽매는 특별한 죄가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이사 가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먼저 대적하고 후에 승리하려 한다면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아의 힘으로 싸워서 이기려고 한다면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승리한 후에 대적하러 가고 승리한 후에 싸우러 간다면 당신은 계속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당신이 싸워서 이기려 하는가 아니면 승리 안에서 싸우는가에 있다. 승리 안에서 싸운다는 것은, "주님, 당신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을 인해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나는 내 몸에 있는 모든 죄들을 쫓아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긴 후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시므로 이러한 죄들은 더 이상 내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다 사라져야 합니다." 어떠한 얽매는 죄라 할지라도 즉시 제거될 수 있다. 이것이 곧 싸우는 것이다. 당신을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죄는 당신이 믿을 때 단번에 나가게 된다. 이것이 승리이다. 2. 자신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취함 둘째로, 당신의 매일의 생활은 마땅히 이김을 통과한 첫날과 같아야 한다. 매일 아침 일찍 당신은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 앞에서 나는 여전히 할 수 없고 약합니다.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이 오늘도 나의 생명이요 나의 거룩함이요 나의 승리이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당신이 나를 통해 당신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은혜요 모든 것을 당신의 아들이 성취하셨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동시에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일이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떤 형제들은 이 말이 이기는 체험을 한 후에는 우리가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냐고 물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그러한 체험을 갖는 단계에 이르겠지만 그 동안에 여전히 우리는 범죄할 가능성이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준 생활은 어떠한 생활인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믿음의 생활임을 보여 준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살리라."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것은 초기의 체험이다. 의인은 또한 믿음으로 말마암아 사는데 이것은 전진된 체험이다. 우리 앞에는 두 세계가 있는데 물질적인 세계요 또 하나는 영적인 세게이다. 우리가 오관을 사용할 때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안에 살고 있다. 그러나 믿음을 사용할 때 우리는 영적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당신은 여전히 죄인이요 여전히 더럽고 교만하며 보통 세상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믿음을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바라볼 때 당신의 성질과 강팍함이 모두 사라진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오늘날 문제는 이 두 세계가 있으므로 당신이 매일 선택해야 하는 데 있다. 우리 사람은 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있다. 만일 당신이 오관을 의지해 물질적인 세계 안에 살고 있다면 물질적인 세게를 실체화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세계 안에 살고 있다면 영적인 세계를 실체화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당신의 느낌을 사용할 때 당신은 즉시 아담 안에 살게 되고, 당신의 믿음을 사용할 때 당신은 즉시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다. 당신은 이 둘 사이에 있다. 당신이 느낌을 의지하면 아담안에 살게 되고, 믿음을 의지하면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살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체험이 된다. 성경에서는 죄가 근절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믿는 이가 이기는 생활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와 공급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으며 매일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느낌 안에 살거나 느낌에 의해 살 때 우리는 즉시 실패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매일 매일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실체화할 수 있다. 실패한 후 즉시 피를 의지해 회복함 불행히도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은 즉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보혈 아래 당신의 죄를 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즉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당신의 아들이 여전히 나의 생명이요 나의 거룩이심을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당신의 아들이 내 안에서 이기는 생명을 살아 나타낼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오 분이나 한 시간을 기다릴 필요 없이 몇 초만에도 회복될 수 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셨지만 우리는 좀더 괴로워하고 형벌을 받아야 죄가 더 깨끗이 씻어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느낌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요 아담 안에서 몇 시간 더 사는 것에 불괴하다. 혹 어떤 사람은 이긴 후에도 실패를 면할 수 없고 여전히 보혈의 씻음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이기지 않을 때와 똑같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이 두 가지는 크게 다르다. 이기기 전의 당신의 생활은 다 실패한 생활이다. 당신은 우연히 승리할 뿐 계속 실패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승리한 후의 당신의 생활은 다 승리한 생활이다. 당신은 우연히 실패하며 승리하고 계속 승리한다. 오, 엄청난 차이이다! 과거에 당신은 실패가 많고 승리가 적었지만 지금은 실패가 적고 승리가 많다. 과거 당신의 실패는 일률적이다. 당신의 화내는 것도 여전하고 생각이 더러운 것도 여전하며 강팍하고 속이 좁은 것도 여전하고 당신의 질투도 여전하다. 매번 당신의 실패가 똑같고 승리는 많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성질에 계속 묶이고 당신의 교만에 묶인다. 또 당신의 질투에 묶이고 당신의 거짓에 묶인다. 당신이 승리를 체험한 후에도 어쩌다 실패할 수가 있지만, 그런 죄를 계속하여 반복하지는 않는다. 죄를 범할지라도 이전과는 다른 것이다. 이기기 전에 당신은 실패할 때 속수무책이고 어떻게 회복할 줄을 모르며 하나님의 교통안에 돌아올 줄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는지도 모른다. 마치 천 개의 계단을 내려온 다음에 어떻게 다시 올라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이 된다. 당신이 승리를 체험한 후에 어쩌다 실패한다면 몇 초 후 즉시 회복될 수 있다. 당신이 즉시 당신의 죄를 자백하면 즉시 씻음을 얻게 된다. 또한 당신은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승리를 다시 살아 나타내실 것이다. 이것이 이긴 사람과 이기지 않은 사람의 큰 차이점이다. 매일 그리스도와 정상적인 관계를 가져야 함 나는 형제자매들이 요한1서 5장 12절을 주의하기 바란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러분은 이것을 보았는가? 이기는 생명은 어떻게 주어졌는가?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아들 없이는 이기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단지 처방전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의사까지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생명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 안에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이기는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생명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과 약속들에 대해 의심할 때 즉시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은 다만 인내와 온유와 겸손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안에서 인내와 온유와 겸손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아들과 문제가 있을 때 즉시 승리를 잃게 되므로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와 정상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매일 주님께 "주여, 당신은 여전히 나의 머리시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지체입니다. 주여, 당신은 여전히 나의 생명과 거룩함이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의 눈이 당신 자신을 볼 때 이것들은 다 사라진다. 만일 당신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본다면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 된다. 믿음은 바로 이러하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거룩함과 이김과 인내와 겸손을 붙잡을 수 없다. 당신에게 그리스도가 있을 때 거룩함과 이김과 인내와 겸손이 있게 된다.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청산(靑山)을 남겨 두면 땔나무 걱정은 없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땔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산을 주신다. 산이 있을 때 나무는 자연히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원인은 느낌을 좇아 살고 믿음을 좇아 살지 않는 데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과거의 체험이 헛되고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승리를 체험한 후에 실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승리를 체험하기 전에는 마땅히 실패해야 했다.심지어 비참하게 실패해야 했다. 그러나 이긴 후에 실패는 불필요한 것이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어쩌다 일어난 일이다. 아담 안에서 당신은 자신이 차갑고 강팍하고 더럽다고 느끼는데 사실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자신에게 거룩함과 승리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말한 것을 우리는 갖게 된다. 진리를 보고 은혜를 받음으로 성장함 마지막으로 참된 성장이 무엇인지를 보기로 한다. 우리가 이긴 후에는 마땅히 성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교만하여져서 자신이 이기고 거룩하여졌으므로 모든 것이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이기고 거룩하여진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이 관문을 통과한 것은 단지 하나의 문을 통과한 것뿐임을 알아야 한다. 입문(入門)하지 않고는 길을 갈 수 없다. 이긴 후에야 진보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와 이성과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죄들만을 이길 수 있을 뿐 우리가 알지 못한 죄들은 이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장은 필수적인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죄에서, 예를 들어 성질이 아주 급한 죄가 있다 하자. 당신이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길 때 당신의 인내는 더 이상 진보할 것이 없고 당신의 인내는 극점에 이른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그 인내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내는 삼십삼 년 반 동안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그분의 인내와 똑같은 것이다. 당신의 인내가 거짓이라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만일 당신의 인내가 그리스도의 인내라면 이 인내는 더 이상 진보할 필요가 없는 인내이다. 왜냐하면 그 인내가 바로 그리스도의 인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죄들만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모르는 죄들이 있고 이러한 죄들에 대해서는 승리해 본적이 없다. 이때문에 요한복음 17장 17절의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필요하다. 한 면에서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는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원문 참조)라고 말하고, 또 한 면에서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요 우리의 거룩함의 분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진리이다. 성경 전체를 아는 형제가 있는가?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다 점진적으로 성경을 깨닫는다. 진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 년 전에는 어떤 일들이 죄인줄 몰랐으나 지금은 죄로 여긴다. 과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여겼던 것을 지금은 죄로 볼 것이다. 무슨 이유로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 달라졌는가? 진리를 많이 알수록 죄를 더 많이 알게 되고 죄를 많이 알게 될수록 그리스도를 더욱더 생명으로 취하게 된다. 분량이 클수록 그리스도가 더욱 필요하다. 하루하루가 거듭될수록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이 죄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죄를 많이 알게 될수록 하나님께 "하나님, 나로 이 일에서 그리스도가 나의 승리요 나의 공급임을 보게 하소서."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빛 비춤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진리의 빛 비춤은 당신이 잘못한 것이 얼마인가를 드러낼 것이고 당신이 얼마나 약한가를 드러낼 것이다. 당신의 상태를 드러낼 때 당신의 분량은 점점 커진다. 당신의 분량이 커질수록 당신은 더 많이 소화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베드로후서 3장 18절의 말씀을 매우 좋아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자람에 관하여 언급한 몇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간다. 은혜 안에서 자라간다는것은 무엇인가? 은혜 안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거듭 더 많은 역사를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벌서 다섯 가지 일을 하셨다고 하자. 하지만 아직 세 가지를 더 하셔야 한다고 하자. 나의 필요가 더 많아졌으므로 더욱 하나님께서 날 대신하여 하실 필요가 있다. 은혜와 진리의 관계는 이러하다. 진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은혜는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진리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은혜가 있다. 구약시대에 사람이 계속 실패한 원인은 그들에게 진리만 있고 은혜가 없는 데 있다. 그들에게 율법이 있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임"(요 1:17)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 주시고 은혜를 공급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나는 영원히 구걸하는 자요 동냥하는 자로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당신께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내가 매일 그분께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월요일에도 그분께 나아가고 내일 화요일에도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당신이 이렇게 하나님을 귀찮게 하고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은혜 안에서 자랐다고 말할 것이다. 거듭 당신이 당신의 실패를 보면 볼수록 당신은 하나님께 더욱더 요구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이 더욱더 필요로 하며, "주여, 나는 여전히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책임지심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해야 한다."하나님, 나의 죄를 시인해야 합니다. (이때 당신은 죄를 정확히 명명하며 죄를 죄로 정해야 한다) 하나님, 나는 더 이상 자신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공과를 배우게 됐고 나는 영원히 개선될 수 없으므로 고치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약함을 한번 더 자랑하게 하심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당신의 능하심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당신이 내 대신 나의 약함을 제하실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의 약함을 자랑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당신을 덮게 된다.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계속 진보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나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성장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한다. 우리가 죄인지 모르는 많은 죄들이 있다. 우리가 죄인 줄 알 때 하나님께 "하나님, 내게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리스도가 내 대신 그분의 생활을 살아 나타내게 하소서! 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을 간증할 수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부당하게 대했기 때문에 몇 마디 거친 말을 했다. 나는거친 말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가 많은 과실을 범하고도 내게 잘못을 빌지 않았는데 조금밖에 범하지 않은 내가 그에게 잘못을 빌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나더러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다. 그 사람이 내게 죄를 범한 것에 대하여 그를 미워하지 않고 더욱 그를 용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도리어 죄를 자백해야 했다. 나는 내 자신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참으로 이룰 수 없었다. 나는 만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개나 고양이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거칠게 말했던 것을 인정하는 편지를 썼지만, 그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편지를 보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다시 쓰기로 했다.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또 용서했지만 그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 그를 사랑하실 수 있고 나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죄이다. 나는 승리하고자 했고 또 믿음으로 싸우기 원했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이 나로 그를 사랑하게 하실 수 없다면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참으로 나는 할 수 없고 하나님게서 하실 수 있다고 진심으로 말했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한 면으로 진리는 당신이 마땅히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또 한 면으로 은혜는 당신이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공급해 준다. 이러한 다루심을 체험하는 데에는 때로는 몇 초면 되지만 때로는 며칠이 필요하다. 바로란 자매에게는 그녀를 항상 어렵게 만드는 한 동역자가 있었는데, 그 동역자는 항상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서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다. 바 자매가 어떤 일이 있다고 할 때 그녀는 없다고 말하고 바 자매가 어떤 일이 없다고 할 대 그녀는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 들에게 바 자매를 솔직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다. 바 자매는 그녀에 대해 참았고 그녀를 다룰 방법이 없었다. 바 자매는 그녀와 만날 때마다 항상 친근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녀의 어깨를 치거나 손을 잡았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것같이 말하지만 속으로는 항상 문제가 있다. 어느 날 바 자매는 베드로 1장 22절에서 "거짓이 없이....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서 "나더러 그녀를 사랑하라고? 그럴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나님께 "나는 이 일에 있어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 일이 죄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런 죄를 제하여 주시도록 구했다. 바 자매가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 것도 힘을 들여야 하는데 더욱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니. 그녀를 사랑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바 자매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려고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어느 날 문을 잠그고 하나님께, "하나님, 내가 그녀를 사랑해야 하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로 그녀를 사랑하게 만드시기 전에는 나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바 자매는 세 시간 가량 기도했다. 결국에는 주님의 사랑이 그녀에게 충만하여 그녀는 자기 동역자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게 되었다. 바 자매는 사랑할 뿐 아니라 뜨겁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를 사랑하므로 바 자매는 그녀를 위하여 밤을 세워가며 중보 기도를 했다. 이튿날 일과를 마치고 또 그녀를 위하여 기도했다. 결국 바 자매는 승리의 체험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능력의 체험도 갖게 되었다. 이것이 곧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요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진리는 당신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은혜는 당신으로 이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한다. 당신이 죄가 무엇인지를 찾아낸 후에 그냥 지나가지 않고 이긴다면 당신은 매일 매일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된다. 영국에서 온 세 자매가 있었는데 남을 두 자매는 독신주의자들이었다. 그 세 사람이 중국 내지(內地)에서 주님의 일을 했다. 그런데 약혼자가 종종 편지로 그녀를 안위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면 또 괴로워했다. 어느 날 그녀는 방안에서 외롭다고 느끼면 또 울어 버렸다. 다른 두 자매는 그녀에게 "왜 외롭다고 느끼니? 외롭다고 느껴야 할 사람은 우리 둘이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마친 후 그 두 자매도 역시 외롭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 자매들은 내지에서 사역하면서 좋은 것을 먹을 수도 없고 좋은 것을 입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오, 죄는 참으로 전염성이 있다. 그들이 이렇게 괴로워할 때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28:20)고 하신 말씀과 시편 16편 11절의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들은 "주여,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죄입니다. 당신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죄입니다. 당신은 당신 앞에 기쁨이 충만하고 당신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죄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주여, 우리가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죄입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들이 이렇게 처리할 때 외로움이 다시는 그들을 찾아오지 않았다. 할렐루야, 외로움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매일 새로운 죄와 실패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매일 새로운 은혜의 공급이 있다.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우리가 한 번 은혜를 얻을 뿐 아니라 더욱 얻어야 한다. 인도에서 사역하는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염려가 많았는데 어느 날 4장 6절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는 말씀을 읽고서 염려하는 것, 감사하지 않는 것이 다 죄인 것을 보았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무엇이 죄인가를 볼 때 우리는 응당 하나님 앞에서, 한 면으로 이 죄를 자백하면서 또 한 면으로 주님이 당신 안에 살아 계심을 시인해야 한다. 이것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승리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다. 즉 본질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절정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김의 범위는 계속 확장한다. 각 사람이 얻은 바 빛 비춤은 각각 다르다. 빛 비춤을 얻은 사람은 많이 진보하고 빛 비춤을 적게 얻은 사람은 적게 진보한다. 어떤 것이 죄인가를 많이 알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공급을 더욱 많이 받게 된다. 어떤 것이 죄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공급도 적게 받는다. 형제자매들은 진리가 당신과 어떤 관계가 있고 은혜가 당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매일 하나님 앞에서,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여, 하려고 하지도 앟습니다. 주여,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당신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께서 빛비춤과 은혜를 주시도록 구해야 한다. 어쩌다 실패한다면 당신은 일 분이나 일 초 사이에 즉시 회복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이렇게 행한다면 누구도 자기가 어느 단계에까지 진보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것은 완전한 구원이다! 할렐루야, 그분은 앞으로 진보하도록 계속 우리를 인도하신다. 할렐루야, 사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렐루야,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하셨다. |
10장, 승리의 멜로디 -
승리의 멜로디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시편 20편 5절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 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여호사밧을 선두로 즐거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그 적군을 이김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무리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 - 역대하 20장 1절,3절,12절,15절,17-22절,24절,26-28절 이 며칠 저녁에 우리는 한 가지 문제 곧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기는 가를 보았다. 우리 가운데 이기는 체험을 갖게된 형제자매들이 많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어제 저녁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았다. 오늘 우리는 또 한 가지 주제, 곧 승리의 멜로디를 보기로 한다. 여러분이 알듯이 많은 때 사람이 찬송을 부를 때 가사는 맞지만 멜로디가 틀린다. 이기는 생명 또한 멜로디가 있음을 기억하라. 가사만 옳은 것으로는 부족하고 멜로디가 또한 옳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승리의 멜로디가 무엇인지를 언급할 것이다. 시편 20편 5절에서는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라고 되어 있다. "개가를 부르며"는 "즐거워하며" 로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즐거워하며"라고 번역할 수 있다. 구원과 승리는 사실 별 차이가 없고 한 가지 일의 두 단계에 불과하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승리의 관문을 통과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승리의 관문을 통과한 후 여러분의 승리의 멜로디도 옳아야 한다. 여러분이 멜로디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할까봐 다른 말로 승리는 표시가 있다고 말하겠다. 당신은 당신이 승리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언제 당신이 승리한 것을 알 수 있는가? 바로 시편 20편 5절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승리와 개가를 부르는 것의 차이 나는 여러분이 승리와 개가를 부른 것과의 차이를 아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승리이고 무엇이 개가를 부른다는 것인가?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고 개가를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승리는 그리스도의 일이고 개가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승리는 그 일이 성취되어서 계속 유지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개가를 부른다는 것은 이긴 후에 계속 자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에 나는 하키를 했었다. 하키는 힘이 드는 운동이다. 공이 아주 무겁고 손에 맞을 때 아주 아프다. 한 시간 동안 시합할 때, 땀을 흘리면서 힘을 들여 공을 넣는다. 넣고 또 넣는 쪽이 승리한다. 이것은 승리이다. 이때 동급생들은 우리 팀이 승리한 것으로 인해 모자와 기를 높이 쳐들고 흔들며 계속 횐호하고 즐거워하는데 이것은 개가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 팀이 승리했을 때 동급생들이 개가를 불렀다. 승리는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임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개가를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승리한 후 응당 그의 입으로 개가를 불러야 한다. 매일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는 것은 개가를 부르지 않는 것이다. 매일 눈물의 샘만 보이는 것이 곧 개가를 부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멜로디는 그분의 구원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요 그분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키 시합에서 승리할 때 승리를 학교측에 돌리고 동급생들로 개가를 부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승리하셨으므로 승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계속 개가를 부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렐루야! 그리스도는 승리하셨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할렐루야를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을 패배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승리의 멜로디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강서 사람이 북평 말을 할 때 말은 옳지만 어조가 틀리다. 할렐루야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은 그의 어조가 틀린 것이다. 우리가 승리를 말할 뿐 아니라 우리의 어조도 옳아야 한다. 만일 어조가 틀리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어찌된 것인지를 의심할 것이며 당신 자신도 당신이 어찌된 것인가를 의심할 것이다. 베드로의 어조는 갈릴리 사람의 어조였기에 여종까지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갈릴리 사람의 어조"가 없다면 우리의 어조는 승리를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매일 우리에게 "갈릴리 사람의 어조"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당신의 어조가 "갈릴리 사람의 어조"이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틀림이 없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 여호사밧 왕의 개가 구약에서 유다 나라에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었다. 역대하 20장을 읽으면서 그의 승리의 어조가 어떤지를 보기로하자. 그때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1절). 여호사밧 때에 유다 나라는 매우 약하여 외적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여호사밧이 자신을 볼 때는 자연히 두려워했을 것이다. 과거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듯이 지금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 옛 대적이 또 공격해 올때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에게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므로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했다." (3절) 그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께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12절)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무력함을 시인하고 오직 주만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너희는)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5절)고 말씀하셨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승패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질, 교만, 의심 많고 더러운 생각, 탐심 등 각종 죄들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승패는 여러분께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17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을 완전히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상관하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다만 서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17절).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개가를 부르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전쟁하실 것이다. 여호사밧은 한 가지를 더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전쟁을 관람할 뿐 아니라 선지자의 말을 들은 후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많은 무리가 결탁하여 그를 공격했는데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한 무리 레위인들이 일어나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했다. 그는 그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다(21절). 이 사람들은 미친 것이 아닌가? 그들은 돌이나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것이 승리의 멜로디이다. 승리의 멜로디는 곧 여호와께서 승리의 이미 당신에게 주셨음을 알고 대적이 이미 실패한 것을 아는 것이며 당신이 이미 승리한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험이 오는 것을 볼 때 발버둥치며 대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22절)라고 말씀하셨다. 언제든지 여호와를 찬양할 때 대적은 패하게 된다. 결국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24절).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지 않았다면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승리를 주실 때는 하나도 피한 자가 없게 하신다. 우리라면 대여섯 명을 남겨 둘 것이나 하나님은 하나도 남기지 않으신다. 찬송이 "시작 될때"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가 있다. 모든 이의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디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찬송할 때 역시하실 수 있다. 언제든지 당신이 찬송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많은 시험과 시련이 있는 것을 안다. 몸이 약하거나 환경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사업이 어렵거나 이와 같은 각종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승리를 아는 것은 좋은 것이나 당신의 멜로디가 틀렸다. 당신은 시험이 오는 것을 볼 때 "할렐루야!"라고 말해야 하며 시련이 오는 것을 볼 때 "할렐루야"라고 말해야 한다. 또 어려움이 오는 것을 볼 때 당신은 "할렐루야!"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이 "할렐루야!"라고 말할 때 대적은 패배한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이 찬송할 때 역사하시고 당신이 노래할 때 역사하신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부족함을 시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마음 속에서 "할렐루야! 하나님, 내가 시련 받는 것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내게 방법이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승리가 나의 것임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여호사밧은 그가 이미 승리했다고 믿기 때문에 계속 찬송을 불렀다. 여호사밧의 눈에서 볼 때 그들 모두가 시체뿐이었기에 그는 계속 전진하며 찬송을 불렀다. 그는 그들을 이미 죽은 자로 보았기 때문에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망대에 올라 보니 다 죽은 시체뿐이었다. 두 부분의 찬송과 감사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여호사밧을 선두로 즐거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그 적군을 이김을 인하여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무리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26-28절) 우리의 찬송과 감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 부분은 승리하기 전이고 또 한 부분은 승리한 후이다. 오늘날의 큰 과오는 사전에 찬송하지 않고 보류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기다리는 데 있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이미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또 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이미 하나님의 사실을 믿고 그리스도가 그의 승리임을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할렐루야, 나는 이겼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 어떤 형제는 통하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자매는 효력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뜻은 내일 조금이라도 통해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어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사밧에게는 두 차례의 찬송이 있었다. 모든 이기는 자에게는 두 차례의 찬송이 있었다. 한번은 육신의 눈으로 보기 전의 찬송이요 또 한번은 육신의 눈으로 본 후에 하는 찬송이다. 이것이 승리의 멜로디이다. 언제든지 찬송이 사라질 때 이미 실패한 것이요 승리를 잃은 것이다. 당신은 승리가 있는지를 묻지만 나는 "할렐루야"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할렐루야"가 승리의 멜로디이다. 멜로디가 맞을 때 참으로 승리한 것을 나타낸다. 다른 것은 꾸밀 수 있어도 이것은 꾸밀 수 없다. 그러므로 승리한 사람에게는 계속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어조가 있다. 사람이 어떤 어조를 사용할 때 당신은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가를 알게 된다. 사람이 이겼는지를 보려면 그의 멜로디가 어떤가를 들으면 된다. 승리의 표시는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과 "주님을 찬양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승리의 표시는 시험이 올 때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본 사람은 주님을 찬송할 수 없고 오직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여전히 할 수 없는 것을 볼 때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이 주님을 바라볼 때 당신은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더 큰 시험도 상관없고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더 많아도 상관없다. 모든 것을 책임지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승리의 음조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당신이 실지로 실패하고 더러우며 큰 죄를 범할 때에야 당신이 실패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언제든지 감사와 찬송을 잃을 때 당신은 이미 승리를 잃은 것이다. 당신이 큰 죄를 범하지 않아도 다만 당신이 개가를 부르지 못하고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못하며 감사치 못하고 찬송하지 못할 때 당신은 이미 승리를 잃은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기는 생명은 매일 할렐루야를 부르고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생명이다. 이러한 표시를 잃어버릴 때 승리는 이미 잃은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 안에서 승리를 지킴 우리는 잘 아는 성경 구절 느헤미야 8장 10절이 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무엇을 통해 표현되는가? 기쁨을 통해서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찬양의 분위기 안에 계신다. 이 며칠 동안 나는 이 공과를 배웠다. 나는 이미 용서했고 인내했으며 이미 헌신하고 순종했지만 약간 고통을 느끼며 원망이 있었다. 나는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언제든지 당신이 주께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말할 수 없을 때 당신은 이미 실패한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의 승리는 기쁨 안에 있다. 언제든지 즐거움을 버릴 때 즉시 승리를 버리게 된다. 언제든지 즐거움을 버릴 때 즉시 답답해진다. 어느 형제가 전에는 기쁨이 이렇게 큰지 몰랐는데 요즘에서야 알았다고 말했다. 언제든지 즐거워하지 않을 때에 속이 답답해진다. 당신은 즐거움 안에서 당신의 승리를 지켜야 한다. 물고기를 물 속에서 길러야 하듯이 승리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서 지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기쁨과 즐거움 안에서 승리를 지켜야 한다.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즐거워함 그런데 어떻게 해야 즐거울 수가 있는가? 물론 많은 일에서 당신은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승리의 관문과 능력의 관문을 통과했다면 당신은 자연히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즐거워할 수 없는 일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일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성경에서 보기로 한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에서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게도냐 사람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들에게 한두 방울의 기쁨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넘치는 기쁨이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하고 넘치는 기쁨이 있어야 하며 큰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기는 생명이므로 당신은 개가를 부를 수 있다. 큰 군대가 공격해 오고 큰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승리의 특징은 곧 환난 가운데서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것이다. 철도원이었던 한 형제기 있었다. 한번은 기차가 지나가는데 사고로 다리 한쪽이 깔려 잘려나갔다. 병원에서 깨어날 때 어떤 사람이, 당신은 그래도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한쪽 다리만 깔려 부러진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곧 승리의 멜로디이다. 승리의 멜로디는 큰 환난 중에서도 여전히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고, 베드로전서 1장6절 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1장 8절에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라고 말하고, 4장 12절부터 13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 말한다. 이 몇 구절에서는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지내야 하는 가를 말한다. 야고보서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말한다. 합당한 시험이 올 뿐 아니라 합당치 않은 시험이 임하고, 대적이 올 뿐만 아니라 친구도 오며, 이방인도 오고 형제도 오며, 이유 있는 것도 오고 이유 없는 것도 온다. 여러 가지 시험이 다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다. 성경에서 기쁨을 말할 때 항상 "크게 기뻐하도다" "넘치는 기쁨"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다 크고 넘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에서는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말했다. 근심은 일시적인 것이다. 근심할 것이 없는가? 근심은 불가피한 것이다. 두 눈이 있는 한 여전히 눈물을 흘려야 한다. 눈물의 샘이 있는 한 여전히 눈물을 흘려야 한다. 눈물을 흘릴지라도 여전히 기뻐한다. 그러므로 1장 8절에서는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나"라고 말한다. 이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 많은 때 우리는 눈물이 다 마르기 전에 입으로 "할렐루야"라고 외치지 않는가? 많은 때 우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만 입으로 주께 감사하며 찬양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눈물 섞인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여러분은 바버자매의 찬송 중에서 "내 마음은 상해 아플지라도 영은 주를 향해 찬송하도록" 이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당신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 당신의 마음은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마음에는 아픈 느낌이 있지만 당신의 영은 여전히 주님은 찬양할 수 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의 뜻은, 시련 가운데 있을 때 기뻐해야 할 뿐 아니라 시련이 임하기 전에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시련을 환영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또 시험이 왔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형제자매는 시련이 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또 왔네!"라고 말하지만, 베드로는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또 왔네!"라고 말하라고 한다. 언제든지 당신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이 환난 위에 있게 된다.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능히 시험과 환경과 어려움을 초월할 수 있다. 이것이 이기는 자들에게서 울려 퍼지는 승리의 멜로디이다. 연대에 있는 어떤 자매는 이기는 관문을 통과했지만 참으로 시련을 받았다. 그녀의 딸이 몇 시간이 안 되어 죽었고 남편은 먼 곳에 있었다. 그녀의 딸이 죽자 형제자매들은 그녀를 안위하러 갔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딸이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즐겁고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본래 형제자매들은 위로하러 갔는데 오히려 그녀로부터 위로를 받고 돌아왔다. 이것은 꾸밀 수 없다. 승리는 바로 이러한 음조로 지켜진다. 이는 곧 시련을 받을 때에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 위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으로 이 땅에 두셨다. 만약 남이 울 때 당신이 울고 남이 어려워할 때 당신도 어려워하며 세상 사람과 똑같다고 하자. 당신의 승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든 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기쁨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미친 자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을 "미치게 한" 그 그리스도를 사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시련가운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낼 수 있게 하시기 바란다. 마태복음 5장 11절부터 12절에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한다. 남이 당신을 욕을 할 때 "참겠다. 말대꾸를 하지 않겠다" 고 말한다 하자. 당신이 참을 수 있고 말대꾸를 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지 말라. 만일 당신이 다만 참고 말대꾸를 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인내하고 말대꾸하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나 중들도 할 수 있고 유생(儒生)들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응당 그들과 달라야 한다. 남이 당신을 욕할 때 당신이 "주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사람의 핍박을 기뻐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승리가 참 승리라면 당신은 크게 즐거워하며 기뻐할 것이다. 만일 승리가 다만 참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이 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한 모든 것은 다 억누르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모든 것은 다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여기의 문제는 어조가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이다. 오늘 가장 큰 문제는 오래 참음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데 있다. 누가 당신을 욕할 때 당신은 크게 즐거워할 수 있는가? 누가 당신을 욕할 때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숙이고 소리를 내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남의 핍박을 받는다. 남편의 핍박을 받는 자매들도 매우 많다. 사람이 꾸민 말의 비방을 받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성질을 내지 않고 화가 나지 않도록 주님의 보호하심을 구한다. 우리는 성질을 내지 않고 화가 나지 않으면 이겼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크게 승리했는가? 당신이 승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주님이 당신에게 준 승리가 아니다. 만일 당신의 승리가 주님이 주신 승리라면 누가 당신을 욕하거나 핍박할 때 당신은 크게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다. 내가 거듭 말하거니와 언제든지 당신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을 때 당신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승리의 멜로디는 바로 감사와 찬양이다. 어떤 사람이 전철에서 자기 원수와 같이 앉게 되었다. 그는 형제였기에 주님께 계속 "주여, 나를 지켜 주소서."라고 구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좋은 태도를 가지고 그 원수와 계속 대화를 하면서 심지어 최근의 뉴스와 스포츠 소식등 에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속으로 주님께 "주여, 그가 먼저 내리거나 나로 이길 수 있게 하소서" 라고 말했다. 아주 쉽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이 이겼다고 말했다. 이것은 어떤 승리인가? 이것은 거짓된 승리요 인위적인 승리요 공허한 승리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라면 당신은 주님께 보호와 인내를 주시도록 구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 곳에 두신 것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주님이 나를 이 곳에 더 오래 두시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기뻐하라는 말 앞에 "크게", "넘치게" 혹은 "항상"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항상" 은 계속적이다. 여러분은 들었는가? 만일 듣지 못했다면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은 바울의 말이다. 그 뜻은 만일 당신이 듣지 못했다면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기쁨의 생명이다.기쁨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활이다. 환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다.기쁨의 반대는 염려이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위해 염려하고 어떤 사람은 금전으로 인해 염려하고 어떤 사업으로 인해 염려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 4:6)이다. 그 목적은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루 종일 기뻐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날 죄를 범한 것이다. 어떤 집회에서 한 형제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을 전했다. 어느 자매가 듣고서는 아주 화를 내며 "사람이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형제들이 좀더 염려하려면 우리 음식이 좀더 좋아질 텐데요 (그 집회 기간에 형제들이 음식 봉사를 했음)" 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고 염려가 죄임을 보여 주셨으며 후에 그녀는 승리하게 되었다. 만일 계속 말한다면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라고 말한다. 바울은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가는 길이 그리 순조롭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병을 앓을 것이고 어떤 이는 친척이 병을 앓거나 죽게될 것이며 어떤 이는 장래에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주여, 나는 참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실패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주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라고 말하면 당신은 승리하게 된다. 이럴 때 그리스도가 즉시 당신 몸에서 나타난다. 이럴 때 주님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주기 때문에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매일 이 땅에서 우리의 생활이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한다.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한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서"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고 말한다. 이 두 구절의 성경 말씀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오늘 다 읽지 못하고 빠뜨린 부분은 다 이 안에 포함된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할렐루야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우리를 이상히 여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한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이럴 수 있다면 여러분을 대적할 수 있는 시험과 시련이 하나도 없다. 어떠한 시련도 당신을 만지지 못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 시련이 올 때에도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내가 오래 참음을 나쁘게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래 참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물론 마땅히 오래 참아야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오래 참음은 이를 악물러가면서 참는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서는 "(범사에)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억지로나 근심스럽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인내해야 한다. 범사에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의 멜로디이다.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삼층천에서의 생활이다. 주님이 주신 것은 넉넉히 이기는 이김이다 왜 즐거워하고 기뻐해야만 이기는 생명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 왜 반드시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만 이기는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로마서 8장 37절에서는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김은 오직 한 가지 곧 넉넉히 이기는 이김이다. 어렵게 이긴 것이나 간신히 이긴 것은 모두 주님이 주신 이김이 아니다. 주님이 주신 이김은 넉넉히 이기는 이김이다. 간신히 이긴 것과 어렵게 이기는 것은 다 이김이 아니다. 주님이 주신 이김은 다 넉넉히 이기는 이김이다.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의 잔은 넘치는 잔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다 넘치는 것이다. 넘치지 않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김은 이러한 것이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39-41) 넉넉히 이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김이다. 간신히 이기는 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승리의 멜로디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구한다. 넉넉히 이기지 않는 이김은 모방하는 이김이다. 당신 스스로 억누르고 씨름하는 것은 곧 승리를 모방하는 이김이다.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면 어떤 일에든지 당신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으며, 또한 오늘부터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11장, 헌신 -
헌신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고린도후서 5장 14-15절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과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 - 로마서 6장 13, 16, 19, 22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뱐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 로마서 12장 1-2절 오늘 저녁 집회는 "이기는 생명"에 대한 이번 특별집회의 마지막 집회이다. 오늘 밤 우리는 한 가지 일을 반드시 말하고자 한다. 만일 한가지 일을 언급하지 않고 어제까지 말한 것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크게 전진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너무 일찍 언급할 수 없었고 또한 이 문제가 너무 일찍 언급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오늘 밤, 우리는 헌신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후 제일 먼저 할 일은 헌신하는 일이다. 물론 헌신은 사람이 구원받은 즉시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헌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김의 관문을 통과한 후 헌신은 필수적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때 이미 주께 헌신했으나 여러 해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는 합당하지 않은 면들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헌신해야 한다. 헌신하는 것이 이긴 후의 첫 번째 단계 또는 첫 번째 체험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헌신하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죽고 사시는 주님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헌신하는 것을 다만 이기는 생명이 하는 첫 번째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헌신이 이기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헌신 후에야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6장 13절에서는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헌신하는 일이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뒤에 오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헌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만이 헌신할 수 있다. 이 며칠 동안 나는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것을 계속 말해 왔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 13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후에 헌신하는 것을 본다. 만일 당신이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헌신 할 수 없다. 당신이 헌신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과 사망에 속한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헌신했다 하더라도 그 헌신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오늘 헌신하고 내일은 잊어버린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겠다고 서원하고서 내일이면 다 잊어버린다. 캐스윅 집회를 일곱 번 참석한 한 외국 선교사가 있었다. 그녀는 캐스윅 집회를 참속하는 것은 마치 풀어진 태엽을 바짝 감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일 년에 한 번씩 해마다 "태엽을 감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갈 때는 하나님 앞에서 많은 약속하고서 돌아올 때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 우리 자신은 헌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는 헌신할 능력이 없다. 만일 우리가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헌신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있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것이고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나에게 선물을 준다면 감사는 하겠지만 받고자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지 않으신다. 오직 주님에게서 온 것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주님께 드릴 수 없다. 우리가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후에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지금은 마땅히 자신을 주님께 헌신할 때이다. 지금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지금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뒤로 물러가게 되고 며칠이 지난 후에는 다시 실패하게 될 것이다. 헌신의 동기와 근거 로마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할 뿐 아니라 12장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는 헌신해야 하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긍휼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가 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이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로마서 12장은 8장의 뒤를 잇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8장 이전의 일들이다.전에 우리는 죄인들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죄를 속량했다. 3장과 4장은 피에 대해 말하고, 5장은 사하심을 말하며, 6장부터 8장은 십자가를 말한다. 한 면으로 십자가는 우리 옛 사람을 못 박기 위한 것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살고 계심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러한 긍휼과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했다.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목적이 있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도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생명을 나타내고 또한 그 아들의 영광에 참예하시를 원하신다. 만세로부터 하나님은 독생자만이 아니라 많은 아들을 얻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한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시고 속량하신 것은 우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얻으신다. 하나님 편에서는, 친히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우리의 구속에 관한 한, 우리는 그분의 노예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셨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산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 17:12) 고 말씀하셨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낳은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산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산 자들이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다. 물론 주권적으로나 구속으로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당신이 금전을 섬기려고 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내버려두신다. 당신이 세상을 섬기려 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내버려 두신다. 당신이 우상을 섬기려 해도 하나님은 당신을 내버려두신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신다. 당신이 어느날 "하나님, 당신이 나를 사셨기 때문에 당신의 종이 될 뿐 아니라 또한 단 마음으로 즐거이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로마서 6장 16절에서는 헌신에 대한 매우 귀한 원칙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한 면에서는 우리가 자원하여 즐거이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법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다. 그러나 체험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헌신한 그날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종이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리에서 볼 때는 우리가 구속을 받은 그날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다. 하지만 체험적으로는 우리가 자원하여 즐거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한 그날에야참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롬 6:16).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반드시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이러한 헌신은 완전히 우리가 자원하여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조금도 당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바울 또한 여러분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권하고 간청한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조금도 강요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원하여 즐거이 자신을 그분께 드리기 원하신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기는 생명은 구원과 큰 관련이 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자연스럽게 헌신하려는 갈망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생명은 우리가 헌신하는 것을 요구한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각자가 다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느끼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많은 일들이 우리를 얽어매어 주를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죄 가운데 있었을 때 우리는 헌신할 수 없었다.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산다면 우리는 여전히 헌신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거룩함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즐거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다. 한번은 팬톤씨가 노예시장에서 한 흑인 소녀가 경매에 팔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경매에 참가했는데 그들은 계속 가격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 둘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그 흑인 소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누구의 손에 가게 되든지 고통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고는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심히 괴로워했다. 바로 이때 한 백인이 경매에 가담했는데 그 두시람이 부를 수 없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 흑인소녀는 그 백인에게 팔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대장간 주인을 불러다가 그녀의 사슬을 끊고 그녀에게 당신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내가 당신을 내 종으로 삼으려고 산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 주려고 산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 흑인 소녀는 얼떨떨해져 있다가 몇 분이 지난 후 정신을 차리고 그 백인을 쫓아가 "오늘부터 내 숨이 끊어질 날까지 당신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했다. 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으로 인해 우리도 주님께 "오늘 이후로 당신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또한 부활하게 하셨다. 우리가 이미 그분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로마서 6장은 우리 자신, 즉 우리 몸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12장에서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드림 안에는 매우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 십일 일 동안 우리는 손을 내려놓는 것과 믿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했고,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며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이 요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이렇게 할 수 없고 오직 우리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할 수 있다. 전에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할 수 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 히브리인이 종을 샀을 때 그 종은 반드시 주인을 육 년동안 섬겨야 했고 제 칠 년이 되었을때는 나가서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상전을 사랑하므로 나가지 않겠다면 상전은 그를 재판장에게로 데려갔고,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 대고송곳으로 그 귀를 뚫으면 그 종은 영원히 그 상전을 섬기게 되었다(출 21:2-6) 형제자매들이여,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 썩어질 금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피로 우리를 사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양심 때문에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귀함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자원하여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자원하여 기꺼이 주님의 종이 되길 원한다고 말씀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우리의 귀를 뚫을 것이다. 문설주는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던 곳이다. 오늘 우리도 거기서 피를 흘리게 되며 십자가로 인도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히 주의 종이 되기로 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영원토록 그분을 섬기기 원한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여,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셨으며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영원토록 당신을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헌신해야 할 것들 1. 사람 우리가 첫째로 헌신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친구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주님께 드렸다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마음을 점유하거나 붙잡을 사람이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신 것은 당신을 온전히 얻기 위한 것이다. 오, 당신을 잡아당기는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을 끌어당기는 인정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은 반드시 주님께 "주여, 어떤 사람과의 관계도 다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모든 세상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끝났습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형제의 아내가 병을 앓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왜 아내의 병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직 그녀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이 그에게 만일 당신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마음이 괴롭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저에게 제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또 어떤 형제에게는 아주 좋은 친구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형제에게 친구를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그는 다만 순종할 분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친구를 내려놓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이기는 생명으로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단지 소극적인 면에서 죄를 범하지 않게 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사실상 이기는 생명은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기는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붙잡고 있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드리지 않고는 오늘 저녁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릴 수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 73:25)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나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마 22:37)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바버 자매님을 사랑했는데 그 자매님은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의 성경책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는 구절 아래 "주여, 이러한 명령이 있음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글이 있었다. 많은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주 많은 것을 보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여, 당신에게 이러한 명령이 있음을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누군가를 주셨을지라도, 당신이 그 사람에게 묶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당신의 아내이든 자녀이든 친구이든 하나님은 당신이 이 사람들에게 묶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주신 이삭까지도 제단 위에 두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실패하는 아유는 그들의 마음이 사람에게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2. 일 사람을 헌신해야 할 뿐더러 많은 일들도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자주 마음속에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그 일을 성취하고자 결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 어느 형제는 졸업할 때 학교에서 최고의 점수를 얻고 일등으로 대학에 입학하고자 결심했다. 그의 모든 시간과 힘을 공부하는 데 사용했다. 그가 이기는 체험을 갖게 된 후 이 일을 하나님 손에 맡겼다. 그 시간 이후로 그는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기 원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를 꼴찌에 둔다 해도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온갖 시간을 사업에 두는 것도 좋지만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교통이 친밀하지 않다면 그 일은 당신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당신은 사업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한다. 당신이 직업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에 쉽게 그 일을 놓고자 하지 않는다. 당신의 상황이 이렇다면, 당신은 반드시 헌신해야 한다. 어떤 일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많은 형제들에게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기를 바란다. 이러한 소망은 교만이 섞인 소망이다. 나는 당신에게 학업을 중단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주님이 당신을 부르신다면 이 모든 것을 다 뒤로 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아로 자라난 한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다. 그는 서예를 매우 잘했고 음악에도 뛰어났다. 고아원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토목 공사의 일을 배우는데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매 학기에 장학금도 받았다. 그가 이 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측에서는 그를 상해에 있는 성 요한 학교에서 이 년간 공부를 하게 하고 그 다음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건은 그가 외국에서 돌아온 후에 모교에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숙부는 즐거워서 그에게 축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약 이 개월전에 구원을 받았고, 자신이 가졌던 많은 소망들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했다. 나는 그가 어떻게 하려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가기로 결정했고 또 서명할 때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네는 나와 팔 년 동안 동급생이었는데도 나의 소망을 모르는가?" 라고 말했다. 헤어질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오늘은 우리가 여전히 형제이지만 자네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는 내 형제가 아닐까 두렵네." 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나서 그는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나의 소망을 아십니다. 또 당신을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소망은 내려놓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이 원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시골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그는 즉시 교장실로 달려가 자신은 서명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앞으로도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교장 선생님은 그에게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그는 "주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흘이 지난 후 그의 숙부와 사촌형이 오고 어머니도 왔다. 어머니는 울면서 "네 아버지가 죽은 후 이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바랬던 것은 네가 출세하는 것이었다. 오늘 너는 기회가 있는데도 그 기회를 버리려고 한단 말이냐." 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계속 울고 또 울었다. 그의 숙부는 "네가 고아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너를 부양했고 네 어머니도 내가 돌보았다. 이제는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다. 또 네 사촌 형제들은 공부할 학비조차도 없다. 네게 이런 기회가 있는데도 이런 좋은 기회를 던져 버리는구나" 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내게 와서 "니 선생,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봉양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 아이는 우리들을 봉양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때 우리 형제는 참으로 진퇴양난에 처하여 주님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형제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사람에게는 조금 빚졌지만 주님께는 많이 빚졌다는 것이었다. 그 형제는 어머니와 숙부의 쓸 것을 다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지만, 결코 그들의 소망을 따라 살 수는 없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의 일들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을 헌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주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헌신하는 것을 전도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헌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참되게 자신을 헌신했을 때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꾸준하게 사업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결과 전도하러 나가는 일을 그만두기도 한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필요나 개척할 곳의 필요를 보고 전적으로 전도하러 나갈 것이다. 이 몇 년간 우리 가운데에는 동역자 형제들과 자매들이 부족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면 머지 않아 전시간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자매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 물건 사람이나 일들뿐 아니라 물건도 드려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드려야 할 것이 장신구이고 어떤 이는 집이고 또 어떤 이는 의복일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이 드려야 할 것은 아주 작은 것일 것이다. 어떠한 것도 당신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아마 많은 사람이 드리지 못하는 것은 두세 개의 금반지나 진주 장식일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헌신된 생활을 살기 원한다면, 아마 금으로 된 장신구나 유행에 다른 의복이나 많은 금전이 나가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금전을 낭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이 금전을 저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낭비하는 것이나 저축하는 것이 다 주님 앞에서는 지위가 없다. 우리는 돈을 한꺼번에 다 써버려서는 안되며 돈을 하나님의 회계장부에 이체시켜야 한다. 신약에서는 십일조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두는 원칙이 언급된다. 봉급을 받는 그날 당신은 하나님께 "하나님, 이 돈은 다 당신의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저의 가정에서 쓸 만큼만 당신이 주옵소서." 라고 말해야 한다. 내가 얼마를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진 것을 다 가져가신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당신이 참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했다면 당신이 헌신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많은 형제자매들의 집에 있는 장식품이나 옷장 속에 옷이나 옷에 차고 있는 장식품들이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들을 만졌다면 우리는 다 드려야 한다. 나이 드신 형제자매님들은 어떻게 유서(遺書)를 쓸 것인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유서를 어떻게 썼는가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구출하셨고 돈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세상으로 가져가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을 위하여 계획하고 또 돈을 자녀들에게 주어 세상에 가져가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재산을 세상으로부터 이끌고 나왔기 때문에 다시 세상에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 동물 하나도 애굽에 남기지 않았다. 우리도 응당 한 가지도 세상에 남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힘입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말한다. 이 말은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드리는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많지 않을 때는 주님께 잘 드리다가, 부요해지면 오히려 돈이 적을 때보다 드림이 적어진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얻으셨다면 응당 우리의 지갑도 얻으셔야 한다. 마음이 닫힐 때 지갑도 닫힌다. 만약 지갑을 열지 않는다면 결코 마음도 열리지 않는다. 4. 우리 자신 사람과 일들과 물건들을 드려야 할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 또한 드려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내 자신을 당신께 드려 당신의 뜻을 행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라.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 대해 정하신 뜻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을 누릴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축복이든 고통이든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많은 사람이 즐거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지속적으로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헌신인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헌신이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헌신하라고 말하지 앉았다. 성경에서는 자신의 몸을 드리라고 말했다. 자신을 헌신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몸은 주께 드리지 않고 보류하는 사람은 없다. 오, 우리는 온 존재를 주께 헌신했다. 그러므로 내 입은 내것이 아니다. 내 귀도 내 것이 아니고, 내 눈도 내 것이 아니며 내 손도 내 것이 아니며,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만 주님의 관리자이다. 이제부터 이 두 손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젊은 아들을 잃은 나이든 아버지가 관을 옮기는 사람들에게 조심해서 움직여 주라고 당부했다. 그 아버지는 말하기를 "그 아이의 몸은 20년 동안 주님의 성전이었소"라고 했다.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된다. 오늘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 말한다. 찬송 중에 "내 손 주께 쓰임 받고/ 내 발 주 길 쫓으며 내 눈 주의 얼굴 보며/ 내 입 주를 찬송해 주 예수께 다 드리리 아낌 없이 드리리/ 그리스도 내 구주께 아낌없이 드리리 (한국복음서원 찬송가 338장) 라는 찬송이 있다. 이것이 바로 몸을 드리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몸을 자기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일생의 하루하루가 주님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온 몸이 다 주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다만 관리인에 불과하다. 외국에서 어느 주일 예배에 헌금 접시가 돌아가고 있었다. 헌금접시가 13세의 여자아이에게 다가오자 그 소녀는 접시를 더 낮게 놓아 달라고 말했다. 사람이 접시를 바닥에 두자 그 소녀는 접시 위에 섰다. 그 소녀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접시 위에 바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사람과 일들과 물건들을 주께 드릴 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드려야 한다. 매 주일 헌금을 드릴 때, 우리 자신도 드려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보류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돈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자신"을 얻지 않고는 "우리의 것"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자신"을 얻을 때 "우리의 것"을 받으신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헌신했는데,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인이 되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아마 주님은 당신더러 좋은 사업가가 되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구석에 다 빛이 필요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오늘 이후로 당신의 뜻을 행하기로 작정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헌신의 결과 헌신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첫 번째 결과는 로마서6장에 언급되어 있고 두 번째 결과는 로마서 12장에 언급되어 있다. 많은 사람은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로마서 6장의 헌신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한다. 로마서 12장의 헌신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로마서 6장에 있는 헌신의 결과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됨으로써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며 이것은 매일 이기는 생활을 살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12장에 있는 헌신의 결과는 하나님의 기뻐하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다만 손을 내려 놓고 믿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지 말라. 마지막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손에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실 수 있다. 과거에 우리는 헌신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기는 생명을 체험한 후에는 헌신할 수 있다. 과거 우리는 하나님 손에 자신을 둘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놓고자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라. 전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 였지만 지금은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호주에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한 형제가 있었다. 한번은 기차 안에서 몇 친구들이 노름을 하려는데 한 사람이 부족해서 그 형제를 끌어드리려고 했다. 그때 그 형제는 "미안하네, 나는 손이 없는 사람이네. 이 두 손은 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네. 다만 내 몸에 붙어 있을 뿐 나는 감히 사용할 수 없다네." 라고 말했다. 오늘 이후로 나의 손과 발과 입은 다 주님께 속한 것이므로 나는 감히 내 맘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매번 시험을 만날 때 당신은 손이 없다고 말하라. 이것이 로마서 6장에 있는 헌신이다. 이렇게 드릴 때 당신은 거룩하게 되고 매일 거룩함의 열매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이김을 체험한 후에 해야 할 첫 번째 일이요 이기는 체험의 첫 번째 열매이다. 로마서 12장에서의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때 그러한 헌신은 거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2장에서의 헌신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6장은 개인적인 거룩함을 위한 것이고 12장은 일을 위한 것이다. 6장에서는 헌신을 말하고 거룩함과 거룩함의 열매도 말했다. 12장에서도 거룩함과 거룩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말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며, 거룩함은 무엇인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든 거룩한 것이든 모두 어떤 사람이 특별히 사용하기 위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일들이나 물건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산다. 한번은 내가 조풍공원에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기사가 나에게 바로 내라라고 말했다. 자세히 보니까 그 차는 일반버스가 아니라 전세버스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응당 "전세버스" 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반버스"와 같다. 우리는 '일반버스"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분별된 "전세버스"와 같아야 한다. 로마서 12장은 우리의 직업, 남편, 자녀들, 금전, 보물이 모두 온전히 하나님만을 위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만을 위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이 한동안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만족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만족하시지 않는다. 사람이 향유를 주께 붓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만족하시지 않고, 우리가 가진 소유를 다 드리지 않았다면(눅 21:4) 하나님은 만족하시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그분께 드려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진정 죽음에서 살아난 자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임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당신이 이렇게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동시에 이것이 합당한 것이다. 특별한 그리스도인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헌신해야 한다. 그분은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러한 헌신이 어떠한 헌신인가를 기억하라. 우리는 산돌이다. 우리가 헌신했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는 산 제물들이다. 구약의 제물은 단칼에 죽임을 당했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제물들이다. 이렇게 드린 결과는 2절에 나와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오늘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다. 작년 1월 이기는 자 집회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은 영원한 목적을 갖고 계시며 이 목적은 그분의 아들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았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하여 그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다. 구속도 이 목적을 위한 것이며 마귀를 깨뜨린 것도 이 목적을 위한 것이요 죄인을 구원하신 것도 이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우리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단지 죄인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일들이 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연결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헌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뜻이 선하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 이라는 말만 들어도 불편해하고 괴로워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몸을 드린 후에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참으로 선하다고 노래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참으로 선하다고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유익한 것이며 악의가 없다. 우리는 너무나 근시안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매우 좋다. 어떤 형제가 한번은 매우 좋은 기도를 했다. "우리가 떡을 구할 때 당신이 돌을 주실 것으로 생각했고 생선을 구할때 뱀을 주실 것으로 생각했으며, 계란을 구할 때 전갈을 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여, 우리가 돌을 구할 때 당신이 주신 것은 떡이었습니다." 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선하고 아주 좋은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일에 있어서 당시에는 원망을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그분을 찬양한다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선할 뿐 아니라 또한 온전하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정하신 뜻은 다 유익한 것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거룩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분의 뜻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과 그분의 뜻이 선하고 온전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밤이 마지막 집회이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한가지 요청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하나님, 나는 전적으로 당신의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 나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승리의 조건을 이미 다 보았고 이제 우리가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헌신하는 것은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 항목이자 첫 번째 항목이다. 일단 우리 자신을 헌신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열납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 당신이 헌신했다면 이제 헌신된 사람이 된것이다. 당신이 뜨겁든 차갑든 마음에서 진정으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다른 것을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신이 자신의 느낌에 따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연대에 이미 헌신한 어떤 형제는 주님과 문제가 생길 때 다시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한 여자가 어느 날 남편과 불화가 있다고 해서 다시 결혼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만 한 번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헌신한 이후로는, 주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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