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그리스도의 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시작에서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철저히 고려해 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외에 이런 생활을 실지로 살아내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질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외에」라는 말이 바로 이 질문의 정답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는 특별한 일이나 기이한 일을 높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준으로 삼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정상적인 생활의 원칙을 말하였다고 믿는다. 간략하게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은 인간의 모든 필요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준다. 우리 몸에서 그분이 하신 모든 역사는 바로 우리를 제하고 우리를 그리스도로 교체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사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사신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가지의 교체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우리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교체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승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이루신 교체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오직 하나. 즉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더욱 계시해 주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크나큰 도움을 받을 것이고 많은 혼란을 피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두 가지 문제 : 죄의 행위와 죄의 본성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을 이 문제를 연구하는 기점으로 삼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설명하고 또한 실제적 이고 실험적인 각도에서 우리의 문제를 연구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이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또 이 두 부분의 뜻이 현저히 구분된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이런 지적만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은 독립된 하나의 단락이다. 1장 1절부터 5장11절까지는 이 단락의 전반부이고 5장 12절부터 8장 39절까지의 세장 반은 이 단락의 후반부이다. 이 여덟 장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전후반부의 주제가 다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전반부의 논의 중에서 우리는 복수의 죄(sins)가 특별히 현저한 것을 발견한다. 그런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복수의 죄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단수의 죄(sin)가 재삼 사용되며 다뤄지는 주제로 되어 있다. 왜 이런 변화가있는가? 이것은 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범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이 죄들은 많을 뿐 아니라 일일히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죄의 본성이다. 이 죄의 본성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일종의 본질과도 같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든. 그것들은 다 이 죄의 본질이 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 죄들에 있어서 사함이 필요한 동시에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 전자는 우리의 양심을 만지고 후자는 우리의 생명을 만진다. 만일 우리의 죄의 본성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설령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 속에 항구적인 평강이 없다. 하나님의 빛이 처음으로 내 마음을 비출 때, 그분 앞에서 나는 내 범죄로 인하여 용서해 달라고 그분께 부르짖었다. 죄사함을 얻은 후, 나는 새로운 것. 즉 나의 죄의 본성을 발견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내 안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나에게 범죄하는 천성이 있고 내 속에 범죄하려는 경향과 나를 유혹해 범죄케 하는 어떤 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힘이 내 속에서 발동할 때 나는 곧 죄를 범하게 된다. 내가 이것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사하심도 얻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범죄한다. 그러므로 나는 죄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는 악순환 속에서 살게 된다. 하나님의 사하심에 대해 내 마음에는 감사가 넘친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용서함만이 아니라 또한 구원하심이다. 나의 모든 행함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고. 나의 본성을 위해서는 죄의 본성에서 구출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두 방면의 구원-피와 십자가 그러므로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에서 우리는 구속의 두 방면을 본다 첫째는 우리 죄들이 사함받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는 것이다. 이 두 방면을 위해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의 차이점에 주의해야 한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독립된 단락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주 예수의 피에 대해 두 차례 언급된 것을 본다. 즉 3장 25절과 5장 9절이다. 후반부의 6장 6절부터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말하는 새로운 사상이 도입된다. 전반부의 논의의 범위는 주 예수의 역사, 즉 예수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범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 반면에 후반부의 논의 중에서는 피를 계속하여 언급하지 않고 십자가로 대표되는 주님의 다른 면의 역사에 중점을 둔다. 이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분은 매우 가치가 있다. 우리는 피가 우리의 행위를 처리하는 반면에 십자가가 우리의 어떠함을 처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피는 우리의 죄들을 제거했고 십자가는 범죄하는 우리의 근본을 강타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장들에서 우리는 두번째 방면의 주님의 역사를 볼 것이다 우리의 여러 죄들 먼저 우리의 죄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와 이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는 것으로부터 말하기시작하겠다. 다음 구절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롬 3.2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 : 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426) 이 문제를 연구하는 후반부에서 우리는 타락의 실상과 회복의 길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 때 먼저 나는 죄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로 말미암아 들어왔다는 것을 언급하겠다.(롬 5:19). 우리는 불순종이 발생할 때마다 뒤따라오는 것이 범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온 첫번째 결과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에 그분은 더이상 사람과 교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경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장애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첫 단계로 하나님은 그들(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이 다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신다. 둘째 단계로 사람 속에서 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통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범죄한 느낌-하나님과 격리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깨어난 양심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눅 15:18)라고 말하는것이다. 이뿐 아니라 죄가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는 근거를 주는 동시에 우리 속의 범죄의 느낌은 우리 마음 속에서 사탄에게 우리를 참소할 기회를 준다. 그러므로 세번째 단계로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10)가 『너는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속하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이끌기 위하여 주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죄 있는 양심에 대하여, 사탄의 참소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셔야 한다. 먼저 우리의 범죄가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그 다음은 죄 있는 느낌이 처리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피의 가치를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써 정죄받는 양심으로 평강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마귀의 공격과 참소에 대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리하고 해결해 주셔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향하여. 사탄을향하여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계속 전진하려면 절대적으로 주님의 피의 가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선적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의 교체물이 되신 것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인 인식을 가질필요가 있다. 우리의 범죄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의 피의 기능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아직 올바른 길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이 세 가지에 대해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피는 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 속죄를 위한 피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다룬다. 우리의 범한 죄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하심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심판에 떨어지게 된다. 또 죄 사함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을 소흘히 하시거나 감찰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피를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는 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피의 가치를 깨달으려 한다면 반드시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피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를 조금도 모른다면 나는 영영 나에 대한 피의 가치를 알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계시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깨달을 때 비로소 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우리에게 피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피의 첫번째 방면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피라는 단어는 항상 속죄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피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백 번 이상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언급되는 곳마다 피가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약 달력에는 우리의 죄와 매우 큰 관계가 있는 하루가 있는데 그날은 곧 속죄일이다. 죄 문제에 대하여 속죄일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것은 없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일에 속죄 희생의 피를 지성소로 가져가 하나님 앞에 일곱 번 뿌렸다고 말한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해야 한다. 속죄의 날에 속죄 제물은 회막의 바깥 뜰에서 회중 앞에서 드려졌다. 거기서의 모든 것은 완전히 노출되어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제사장 외에 누구도 장막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명하셨다. 오직 피를 가진 대제사장만이 피를 거기에 뿌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도록 하셨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는 구속사업에서 대제사장은 주 예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히 9:11-12) 그러므로 예표에 있어서 대제사장은 구속 사업을 하는 일꾼이다.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가거나 접촉할 수 없었다. 이 뿐 아니라 대제사장이 들어갔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 피는 하나님이 이미 받으시고 그 안에서 만족을 얻으신 그것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교역이다. 이 교역의 유익을 얻을 사람들은 그 교역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피는 먼저 하나님을 위 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초기의 예표는 출애굽기 12장과 13장에서 말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피 흘린 유월절 어린 양이다. 나는 이것이 구속에 관한 구약의 또 하나의 좋은 예표라고 생각한다. 피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피가 발라진 집 안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피가 사람에게 드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또 다른 예증을 얻는다. 그 이유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진 피를 집 안에서 양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셨음 하나님의 성결과 공의는 우리 인류를 위해 드려질 수 있는 무죄한 한 생명을 요구하신다. 피에는 생명이 있는데 이 피는 나와 나의 죄를 위하여 반드시 부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킬 피를 그분께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하셨다. 오.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히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다! 여기서 나는 새로 믿은 형제들에게 몇 마디 하겠다. 이는 우리가 이점에서 자주 곤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양심의 괴로움을 받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우실 때 비로소 양심이 살아난다. 본래 우리의 양심은 죽었다. 양심이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 아무 쓸모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얼마 후,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깨어난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예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죄악의 느낌은 우리에게 크고 두려운 것이 되어 심지어 우리로 피의 참된 효능을 보지 못하게까지 한다. 결국은 우리로 길을 갈 힘을 잃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참되다고 느낀다. 어떤 특별한 죄들이 여러 차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크게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때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피의 가치를 느껴 보려는 데서 주관적으로 우리에 대한 피의 의미를 평가해 보려는 데서 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피의 가치는 우리가 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먼저 피는 하나님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평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 반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으로 평가해 보려고 할 때 아무런 수확이 없고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달려 있다. 우리는 피가 하나님께 귀하다고 그분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벧전 1:18-19). 만일 하나님께서 죄들을 갚은 것으로서 피를 받으실 수 있고. 속죄의 대가로 피를 받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죄 빚을 갚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이미 이 피로 만족하셨다면. 이 피는 받으실 만한 것이다. 이 피에 대한우리의 평가는 그분의 평가를 따라야 한다 더하거나 덜하지 말아야한다. 이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이상이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결코 그분의 평가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분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임을 기억하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분 보시기에 이 피가 받을만한 것이라고 그분을 온전히 만족케 했다고 능히 말씀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2) 믿는이들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보혈 이 피가 하나님을 만족케 한 고로 또한 우리를 만족케 한다. 그러므로 피의 두번채 방면의 가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그분이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한 것이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을 때 이 방면에서의 피의 효능을 본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히 10:22)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들을 우리는 자세하게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주 예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을 피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피가 역사하는 범위에 대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주여 당신의 피로 내 마음을 죄에서 씻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 17:9)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씻음보다 더 기본적인 일을 하셔야하는데 이는 곧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곧 버릴 옷을 빨거나 다리미질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것을 보아야 한다. 육체는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 게 주되』 (겔 36 : 26)라고 말한다. 나는 성경에서 주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는 말씀을 보지 못 했다. 피의 역사는 이렇게 주관적이지 않고 온전히 객관적이며 하나님앞에서의 문제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피의 씻음을 말할 때 마음을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피와 양심과의 관계를 말한것이다.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이것은 무슨뜻인가? 이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격이 있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갖게 되고 언제든지 그분을 가까이 하려고 할 때 잘못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거리낌 있는 이 양심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 준다 이제 보혈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서 가로놓인 장애물이 제해지는 새로운 결과가 산출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이 사실을 나에게 설명하셨다. 내가 이 사실을 신뢰하고 받아들일 때. 내 양심은 즉시 깨끗케 되고 죄책감도 제거되며, 하나님에 대해서 나의 양심은 더이상 거리낌을갖지 않게 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질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알고 있다. 믿는 마음과 아무 참소가 없는 마음은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서로가 상호보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새어나가고 즉시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때에 따른 피의가치를 알아야한다 하나님은 매일, 매시간. 매분, 단기적인 것을 장부에 기록하시기 때문에 오직 피로 말미암아야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피를 의지하고 피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영원히 이 피의 효능은 상실되지 않는다. 보혈 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해서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내가 내 죄를 시인하고 정결함과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이 이루신 역사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의 업적이 아닌 그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아침 특별히 인자했다거나 참을성 있었다거나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을 때마다 나는 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하나님출 가까이 하려고 할 때에 누구나 다음과 같은 유혹을 만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다루어오고 계시기 때문에-우리를 그분 앞으로 더 이끌기 위하여 그분은 십자가의 더 깊은 공과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이미 여러 과정을 채택하셨음-우리 앞에 새로운 표준을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표준들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양심을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심의 청결함은 결코 우리의 업적에서가 아닌 오직 주 예수의 피 흘린 역사를 의지하는 데서 온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내 속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무거운 느낌이 있다. 즉 『오늘 내가 조심하여 선하게살았고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기도를 잘 할 수 있었다!』혹은 정반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 나는 식구들과 약간의 문제가 있었고. 아침부터 아주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지금도 명쾌하게느껴지지 않는다. 내게 분명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겠다. 』 대체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믿을 수 없는 당신의 느낌이나 오늘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다는 느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 아니면 비교적 멀리 있는 견고한 것 곧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만족하신 그분의 흘린 피를 의지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 만일 피가 변할 수 있다면 이것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 것도 무가치할 것이다. 그러나 피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고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항상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데, 이 두려움 없는 담대함은 당신 개인의 업적이 아닌 보혈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이든내일이든 어제든. 당신이 어떤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일단 지성소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있을 때 당신은 유일하게 믿을 만한 흘려진 피를 당신이 설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 당신이 얼마나 선하게 살았든 혹은 범죄했든 간에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영원히 오직 하나 즉 그리스도의 피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근거이다. 이것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다른 많은 체험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에도 시작(초기)과 지속(진보)의 양면이 있다. 전자는 에베소서 2장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후자는 히브리서 10장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의 시작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기』(엡 2:13) 때문이다. 이 후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도 여전히 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 22)고 말했다. 시작할 때 나는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하였고. 이후로 이 새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나는 여전히 그분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서 다른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혹 당신은 『이것은 간단한 것이고 복음의 초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곧 복음의 초보를 떠난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가 진보하였기 때문에 이 초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복음의 초보를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시작할 때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같이 이후에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에도 언제나 우리는 동일하게 피로 말미암아야 한다. 종착지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근거는 오직 한 가지 즉 이 피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제멋대로 방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의 다른 방면은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피로 만족하고 피가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 우리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주의한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근심과 걱정을 느낀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우리의 성결함을 조금도 돕지 못한다. 이것들이 우리를 조금도 돕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피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자. 『주여! 제가 이 피의 가치를 아직 충분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피가 이미 당신을 만족케 한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 피만 있으면 저는 족합니다. 이 피가 저의 유일한 의지입니다. 지금저의 성장의 여부나 업적이 있는가의 여부가 나의 근거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언제든지 당신 앞에 나올 때 저는 당신의 보혈만을 의지하겠습니다.』이렇게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은 참으로 깨끗케 된다. 이 피를 떠나서는 양심은 영영 깨끗케 될 수 없다. 오직 이 피만이 우리를 두려움 없고 담대하게 한다.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이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절에있는 놀랄 만한 말씀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우리는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라는 바울의 말에 반향할 수 있다. 그 참소자를 이김 우리가 말한 바에 비추어 이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대적에게 얼굴을 돌릴 수 있다. 왜냐하면 피에는 사탄을 향한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안에서 사탄의 가장 맹렬한 활동은 바로 형제들을 참소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계 12:10). 그러나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의 특별한 직분 안에서 그분의 피(히 9:12)로 말미암아 사탄을 대적하신다. 이 피는 어떻게 사탄을 처리했는가? 이 피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능히 사람 편에 서시게 함으로써 사탄을 처리한다. 타락은 사람 속에 무언가를 가져와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 속에서 설 발판을 갖게 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 동산 밖에 있다. 인간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사람 속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것이 제거되기 전에는 하나님은(이치상으로)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주님께 감사드리자. 피가 이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했다. 지금 하나님이 사람 편에 계시기 때문에 사람은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지금 사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탄을 대할 수 있다. 여러분은 요한 일서 1장 7절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나는 다비의 번역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every sin)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요한은 총괄적으로 「모든 죄」라고 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죄. 모든 항목의 죄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하나님은 빛이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것이 빛 아래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서 일목요연하게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지만 그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능히 깨끗케 할수 있으시다. 아. 어떠한 씻음인지! 이것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다또한 이것은 내가 어떤 것들을 숨기거나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소홀히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고 나도 빛 가운데 있을 때 보혈이 나의 모든 종류의 죄를 씻는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피로 족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에 억눌리거나 심지어 때로 시험을 받음으로 어떤 죄는 결코 사함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말씀을 기억하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것이요. 』큰 죄. 작은 죄. 아주 검은 죄, 그렇게 검게 보이지 않는 죄 우리 생각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 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의식하는 죄 의식하지 못하는 죄. 기억하는 죄. 이미 잊어버린 죄 모두가 「모든 종류의 죄」라는 단어 안에 포함된다. 할렐루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피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미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죄를 보셨고 그분께서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들을 용서하셨는데 사탄이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참소할수 있겠는가?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께서 피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사탄에게 보여준 이것이 가장 유력한 답변이기 때문에 사탄은 더이상 소송을 걸 수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틀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 : 33-34) 그러므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혈의 절대적 부요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9:11-12). 그분은 오직 한 번 속죄자가 되셨지만, 그분이 대제사장과 중보가 되신 것은 거의 이천 년이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서신『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요일 2:2)이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 못하겠느뇨』라는 말씀을 주의하라 이 말씀은 그분의 사역의 부요함을 말해준다.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의 피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태도로 사탄을 대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또한 양심 안에서 우리를 참소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와 다투는 것은 이것이다. 즉 『너는 이미 범죄 하였고 계속 죄를 범할 것이다. 너는 연약한 자이며 하나님은 더이상 너에게 어떠한 것도 용서 하실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속을 살피게 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 안에서나 느낌 안에서 혹은 자신의 행위에서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찾으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유혹되어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다른 극단에 빠져 침체와 절망에 굴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소는 사탄의 가장 흉악하고 효력있는 무기이다. 사탄은 우리 죄를 지적해 냄으로써 이 죄들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참소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즉시 넘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가? 이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의를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램은 근거가 잘못된 것이다. 이 방면에서 사탄은 항상 성공적으로 우리를 틀린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이로써 사탄은 승리하여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면. 육체의 본성은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범하여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 말의 뜻을 이해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참 근성을 모르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 한 가닥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를 참소할 때 우리는 넘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 죄를 처리하여 주실 수 있지만 그분은 결코 참소 아래 있는 사람을 처리하실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사람이 피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피가 그를 위하여 유리한 말을 할지라도 그는 돌이켜 사탄의 말을 듣는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자이시지만. 참소를 받는 우리들은 참소하는 자 편에 서 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죽음 외에 달리 가치가 없는 자임을 모른다. 뒤에서 우리는 우리가 오직 십자가에서 죽기에만 합당하다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소자를 응수하실 수 있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를 응수하신 것을 아직 모른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주 예수를 바라보고 어린양의 피가 각종 죄들로 조성된 상황에 응수하시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 죄들에 응수하셨다는 데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믿을 만한 기초이다. 절대로 우리의 선한 행실로 사탄에게 응수하지 말고 항상 보혈로 그에게 응수하라, 그렇다 우리는 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 피가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 피를 보셨고 그의 아들은 이 피로 말미암아 사탄의 참소에 응수하셨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더 이상 우리를 공격할 근거가 없다. 오직 이 피를신뢰하고 얻은바 위치를 떠나지 않은 사람만이 사탄의 참소를 그치게하고 그를 달아나게 한다.(롬 8:33, 34). 이 체험은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계 12:11). 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보혈의 가치를 조금 더 본다면 우리는 어떠한 해방을 받게 될지! |
제 2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일보적인 구분
앞 장에서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가 두 부문. 즉 우리의 행위를 처리하는 피를 언급한 첫째 부문과 우리의 어떠함을 처리하는 십자가를 언급한 둘째 부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는 피의 사함이 필요하고 또한 십자가의 처리하심도 필요하다. 앞에서 우리는 첫 부문에 대해 개략적으로 말했었다. 이제 우리는 둘째 부문에 대해말해보겠다. 우리가 두번째 부문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이 장들의 몇 가지 특징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특징들은 이 두 부문이 주제와 강론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전 후반부 가운데 로마서 4장과 6장에서 부활의 두 방면이 언급되었다. 4장 25절은 주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의롭다 하심과 연관시켰다. 사도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지위가 언급되었다. 그 반면에 6장 4절은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하여 우리로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행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또 이 부문에서 화평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다. 5장에서 말한 하나님과 화목됨은 그분의 피를 인해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이다. 사도는『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5:1)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내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다.(5:10)
그러나 나는 곧 나 자신이 문제의 일대 원인인 것을 발견한다. 내 속에 여전히 불안함이 있는 것은 내 속에 나를 이끌어 범죄케 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과는 화목되었지만 내자신과는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는 사실상 여전히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광경을 로마서 7장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준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안에 육과 영의 치명적인 충돌이 있다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로부터 8장에서 말한바 영 안에서 행함으로써 갖게 되는 깊은 평강의 생활로 인도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다』. (롬 8 : 6-7)
더 상세한 고찰
더 상세히 고찰하면, 우리는 전반부의 첫 부문은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3:4-6, 4:5, 25), 둘째 부문은 칭의에 이어지는 성화의 문제(6:19, 22)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 귀한 진리를 아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절반밖에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를 해결해 줄 뿐이다. 우리가 앞으로 계속 전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행위 문제를 해결하는 등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심을 볼 것이다. 이 장들 안의 사상의 발전은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일에서 두번째 걸음은 항상 첫 걸음에 뒤따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첫걸음만 안다면 우리는 정상 이하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생활에 들어서는 필수 조건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워진 기초가 있을지라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전진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우리는 피가 우리의 범죄를 다룬다는 것을 볼수 있다. 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교체물로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과 칭의와 화목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이 어떻게 우리 안의 죄의 본성을 처리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피는 능히 우리 죄들을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우리 「옛사람」을 처리할 수는 없다. 나의 이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피는 범죄를 처리하는 반면에 십자가는 죄인 자체를 처리한다.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에서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이 장들의 주제가 죄인이 아닌 사람이 범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5장에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서 죄인을 어떻게 말했는지를 주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5장에서 죄인이 죄인으로 불리운 것은 그가 범한 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흔히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 하였으매』라는 말씀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그가 죄인임을 알려주기를좋아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순서가 바뀌는 위험이 따른다. 로마서의 가르침은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범죄로 인함보다 출생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5장 19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구성)된 것같이』
우리는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가?
우리는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가? 아담의 불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행한 것 때문이 아니라 아담이 행하고 이룬 것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지금 내가 영어를 한다고 해서 영국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사실 나는 중국인이다. 그러므로 3장은 우리의 행한 것은 『다 죄를 범 하였으매』를 주의하는 데로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행한 것 때문이 아니다. 한번은 내가 어린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죄인이냐』고 물은 적이있었다. 그들은 즉시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지요.』라고 답했다. 그렇다.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다. 그러나 범죄는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인된 이유가 아니다. 범죄한 사람이 죄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아담의 족속이라면 역시 죄인으로서 구속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는가? 어떤 사람은 악한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선한 죄인이다.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패괴한 죄인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죄인인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 것도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점은 우리의 행하는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어떠함에 있다. 한 중국인이 미국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중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중국인인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으면 곧 그런 사람이다. 내가 죄인인 이유는 아담으로부터 출생했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이 된 것은 나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혈통과 유전 때문이다. 내가 죄를 범해서 죄인이 된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죄악의 종족에서 나왔기 때문에 범죄하는 것이다. 내가 범죄하는 이유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것이 아주 악해도 우리 자신은 그렇게 악하지않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사악하고 우리의 근원이 사악하다는 것을 재삼 보여주고자 하신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본은 우리가 죄인인 데 있다. 그리고 이 죄인은 반드시 처리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범죄를 처리해주는 것은 주님의 피이고 우리 자신을 처리해주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이다. 피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행함에서 사함을 얻게 하고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어떠함에서 해방을 얻게 한다.
인간의 천성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까지를 보자.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은혜와 죄의 대비와 그리스도의 순종과 아담의 불순종이 서로 상반됨을 볼 수 있다. 로마서의 후반부(5:12-8:39)의 시작은 바로 이점을 말한다. 이제 이 구절들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거기서의 논의는 한 결론으로 안내하는데, 그 결론이 우리의 한 걸음 전진된 묵상을 위한 기초가 된다. 그 결론은 무엇인가? 5장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우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시고 그런 다음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만을 관심하고 우리의 존재를 별로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심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이지 우리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면이 고쳐지기만 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고치는데 착수한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실망하여 우리의 문제가 밖의 행위에만 있지 않고. 우리의 내적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점차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겸손해보려고 하지만 우리속에 겸손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이 있다. 우리가 사랑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 남을 싫어하는 느낌이 있다. 우리가 겉으로 웃으면서 온유를 나타내려고 하지만 우리 속의 강팍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겉에서 상황을 고쳐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속 깊숙히 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우리는 주님앞으로 나아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이제 깨달았습니다! 나의 행한 것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나 자체까지도 잘못되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남으로 죄인 됨
로마서 5장 19절의 결론이 이제 우리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질상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족속에 속한 죄인이다. 타락은아담으로 하여금 성질상 기본적인 변화를 갖게 했다. 이로써 아담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죄인이 되었다. 우리가 외관상 이 족속의 공통점을 구비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내적 성품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있는가? 바울은 『한 사람의 불순종함으로』라고 말했다. 이 점을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나의 성은 니이다. 이것은 중국의 아주 보편적인 성이다. 나는 어떻게 이 성을 갖게 되었는가? 이것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중국의 성씨표를 찾아서 이 성을 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내성이 니씨인 것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방법 으로도 내 성을 바꿀 수 없다. 내가 니씨인 것은 내 부친이 니씨이기 때문이다. 내 부친이 니씨인 것은 내 조부께서 니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이 니씨 집안 사람 같아도 니씨이고 니씨 같지 않아도 여전히 내 성은 니이다. 내가 중화민국의 대통령같이 존귀하든 길거리의 거지같이 비천하든 내 성은 여전히 니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 내 성이 니라는 사실은 바꾸어 놓을 수 없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아담 때문이다. 나 개인이 범죄함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할 때 내가 이미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나는 아담에게서 출생한자이기 때문에 그의 일부분이다. 나는 이 사실을 바꿀 수 없고, 나의 행위를 개선함으로써 아담 밖에 있거나 다시 죄인이 되지 않게 할 수 없다.
중국에 있을 때 나는 아담 안에서 우리가 이미 범죄하였다고 말한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모든 중국 사람은 황띠(중국어 발음을 딴 것임)가 그들의 조상인 것을 시인한다. 사 천년 전 그가 시유와 싸울 때 비록 적이 흉악했어도 황띠는 그와 싸워 이기고 그를 죽였다. 나중에 황띠는 중화민국을 세웠다. 그러므로 중국 민족은 사 천년 전 황띠에 의해 세워졌다. 만일 황띠가 적을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오늘의 상황은 어찌 되었겠는가?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나라는 사람은 있지도 않지요.』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기를. 『오. 아닙니다! 황띠는 그 사람대로 죽을 수 있고 당신은 당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만일 황띠가 시유에게 살해되었다면 결코 나라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당신은 인간 생명의 일관성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생명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다 만일 당신의 증조부가 세 살 때 죽었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도 그의 안에서 죽은 것은 자명하다! 당신의 체험은 증조부의 체험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사람의 체험은 아담의 체험과 분리될 수 없다. 나는 아무도 에덴 동산에 있어본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잠재적인 사실로 말한다면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아담의 죄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범죄로 인한 열매인 아담의 성품을 받았다. 바꾸어 말해서 죄인의 성품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아담으로 인해 존재하고 또 그의 생명과 성품에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로부터 얻은 성품에도 죄가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했듯이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행위에 있지않고 우리의 유전에 있다. 우리의 혈통을 바꾼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 우리가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방향에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이런 사태를 처리하신다.
아담 안에와 그리스도 안에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은 우리에게 아담에 관해 말해줄 뿐 아니라 주 예수에 관하여도 말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절). 아담 안에서 우리가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 아담 안에와 그리스도 안에라는 두 마디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예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전과 종족의 중요성에 대해말하겠다.
이 예증은 히브리서에 있다. 여러분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서신의 앞부분에서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크다고 증명하는 것을 볼수 있다.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먼저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히 7:14-17). 또 아론의 제사 직분은 자연히 레위의 반차를 따른 것이다. 만일 그가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크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런 뛰어난 방법으로 이점을 증명하였다. 히브리서 7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들을 패배시키고 돌아올때(창 14장) 노략물 중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 또 그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였으므로 레위는 멜기세덱보다 크지 못하다. 왜 그런가? 이는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칠 때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이삭도 십분의일을 드린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안에 있는 야곱도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으며 따라서 아브라함 안에 있는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빔을 받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히 7:7). 그러므로 레위의 위치는 멜기세덱보다 낮고 아론의 제사직분도 주 예수님의 제사 직분보다 낮다. 여러 왕들이 싸우고 있을 때 레위는 아직 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고 또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드린 것이다(히 7:9-1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가정의 아비로서 온 집이 그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릴 때 온 집도 그의 안에서 십분의 일을 드렸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드릴 때 그의 드림 안에 그의 후손들도 모두 포함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한 사람의 불 순종으로 우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죄가 그로 말미암아 인류 안으로 들어왔고 또 사망이 죄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날부터 죄가 왕 노릇 하여 사람을 죽여왔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신 것이다. 죄가 많이 나타난 곳에 은혜를 넘치게 하셨다. 죄가 왕 노릇 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같이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롬 5:19-21) 아담 안에서 우리는 절망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죄로부터의 해방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는데 이끄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6장의 시작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질문에 바울은 스스로 놀라면서 큰 소리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분의 자녀들이 거룩하지 않고 그들의 죄에 묶이는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또한 『죄에 대하여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의 억압을 받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적절한 준비를 해주심을 인해 그분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가 죄인으로 출생하였는데 어떻게 죄의 유전을 끊을 수 있는가? 우리는 아담 안에서 출생했는데 어찌 아담에게서 나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아담에게서 옮길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겠다.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우리가 출생으로 아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오직 죽음으로써 거기서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을 제하려면 우리의 생명을 제해야만 한다. 죄의 묶임이 출생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죄의 해방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바 죄에서 구원받는 길이다. 해방의 비결은 바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롬 6:2)라고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죄스런 그들의 생명을 벗으려고 힘쓰고 노력하다가 죄의 생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것을 발견한다. 그러면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의 길은 우리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의 이어진 말은 이 뜻을 설명해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6:3).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면 그분 안에 있을 때 구원의 방법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사실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길이 없다. 또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주셨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고린도 전서 1장 30절의 말씀은 정말 좋다. 나는 이 구절이 신약에서 가장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 안에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을 우리가 궁리하고 노력하도록 남겨두지 않은 것을 인해 하나님을 찬미하자.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시고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려고 계획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역사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많은 것들이 뒤따르게 된다. 우리가 인용한 히브리서 7장의 예증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아직 출생하지 않은 레위를 포함하여-다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드린 것이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드릴때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드림 안에 그의 모든 자손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예표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가 죽었다. 그때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죽음은 개별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또한 그분 안에서 죽은 것이다. 사도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 14)고 말한다. 그분이 십자가 상에 못박혀 죽으실 때 우리도 못 박혀 죽은 것이다.
중국 향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흔히 간단한 비유로 심오한 진리를 설명한다. 한번은 한 작은 책을 들고서 종이 한 장을 그 책 속에 끼워 넣었다. 그러면서 향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주목하십시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종이는 이 책과 완전히 다른 나름대로의 모양을 가졌습니다. 이제 이 종이가 내게 특별한 쓸모가 없어서 이 책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서 이제 이 책을 상해로 보낸다면 이 종이는 결국 어디에 있겠습니까? 책이 상해에 도착할 때 이 종이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겠습니까? 이 종이와 이 책의 운명이 다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은 자명합니다! 비록 나는 이 책만 보냈지만 종이가 책 속에 넣어져 있기 때문에 책이 간 곳에 종이도 가게 됩니다 가령 내가 이 책을 강에다 버린다면 종이도 강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 책을 물에서 건져낸다면 이 종이도 건져지는 것입니다. 이 종이가 책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모든 체험을 이 종이는 동일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분이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모든 일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행해진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같은 운명이다. 무릇 그분의 체험한 바를 우리도 체험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한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이미 못 박혔을진대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필요가 있는가?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힐 때 우리도 못 박힌 것이다. 그분의 못 박히심이 과거의 사실이라면 우리의 못 박힘은 결코 장래의 일이 될 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도전하겠다. 여러분은 우리의 십자가에 못 박힘이 장래의 일이라고 말한 구절을 신약에서 하나도 찾을수 없다. 헬라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말할 때 사용된 단어는 시간상 부정과거시제로 되어 있다(롬 6:6. 갈 2:20, 5:24, 6 14). 육신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못 박혔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그분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영원한 사실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대표성과 포괄성
십자가 상에서 주 예수님이 죽고 그분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무죄한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속죄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만족케 하셨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이런 특권이 있다. 그분 외에는 구속 사업을 분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피를 흘렸다는 말씀이 없다. 이는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구속사업을 이루실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이것에 참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은 단지 피를 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또한 우리와 함께 죽음을 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피분의 죽음 안에 당신과 내가 포함되었다. 그는 자주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과 함께 죽었다는 말로 주님의 죽으심의 두 방면을 언급한바 함께 죽었다는 것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함께 죽었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함께 죽은 사실이 우리 편에서 시작된 것으로 오해되기가 쉽다. 그래서 자신이 주님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용어가 옳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응용에 있어서 너무 일러서는 안 된다. 먼저 주님이 나를 그의 죽음 안에 포함시킨 사실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다. 주님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 나를 그분과 함께 죽은 위치에 두셨다. 이 말은 당신더러 그분과 함께 죽으러감으로써 그의 죽음 안에 포함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킨 것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약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하다고 느낀다.
마지막 아담과 둘째사람 예수
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만유를 포함한다. 주 예수님의 부활도 만유를 포함한다. 고린도 전서 1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같은 서신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이 사실에 관한 더 풍성한 의미를 볼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과 47절에는 주 예수님을 말하는 두 가지 현저한 명칭 혹은 칭호가 있다. 거기서 주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 불리웠다. 성경은 그분을 두번째 아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분을 마지막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둘째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안에 극히 중요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분을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총체이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그분은 새 족속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연합이 있다. 하나는 그분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그분은 인류와 연합하여 마지막 아담이 되셨고. 역사적으로는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어 십자가와 무덤에서 종결되었다. 그분은 아담 안의 모든 것을 그분 자신 안에서 종결시키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심판과 사망으로 이끄셨다.
둘째로 그분은 둘째 사람으로서 우리는그분과 연합되었다. 이것은 부활로 시작되고 영원-끝없는 것을 말함-으로 종결된다. 그분의 죽음은 첫 사람을 제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이 첫 사람에게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족속의 머리가 되셨다. 이 새 족속에게서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은 마지막 아담의 신분으로못 박히셨다. 첫 사람 아담 안에 모든 것이 그분 위에 집합되어 제해졌다. 우리는 다 그 안에 포함되었다. 그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옛 족속을 제하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새 족속을 이끌어오셨다. 그분은 그의 부활 안에서 둘째 사람이 되셨고 이 안에 우리도 포함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었고 둘째 사람 안에서 우리는 살아났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에게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제 3장 성장하는 길-앎
네 가지 조건
우리의 옛 역사는 십자가에서 끝났고 우리의 새 역사는 부활로부터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십자가는 첫번째 창조를 끝냈고 죽음에서 나온 것은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인 둘째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아담 안에 있다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질을 내거나 다른 죄를 범하는 데는 결심할 필요가 없이 저절로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원함의 여부를 묻지 않는 것과 같다. 같은 원칙으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 안의 모든 것도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이 다만 믿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졌다는 말은 참되지만 좀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실제가 되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체험에서 참이 될 수 있는가? 로마서 6, 7, 8장을 읽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네 가지 조건을 발견할 것이다. (1) 앎 (2) 여김 (3) 자신을 하나님께드림 (4) 영 안에서 행함이다. 이것이 네 가지 조건의 정확한 배열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려면 이 네 가지 절차를 완전히 취해야한다. 한 가지나 두 세 가지가 아니라 네 가지를 모두 취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절차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그분의 도움을 얻기 위해 첫 단계를 보기로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제 우리 앞에 로마서 6장 1절부터 11절의 말씀이 있다. 이 말씀들은 주 예수님의 죽음이 대표적이고 포괄적인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우리도 죽었다. 이 점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진보를 갖지 못한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우리 죄를 짊어졌다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만일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우리를 짊어진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린 결코 거룩케 될 수 없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돌아갔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분 안으로 넣어 졌다
당신은 어떻게 죄 사함을 얻었는가? 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당신의 죄를 감당하시고 당신의 교체물이 되셨으며 당신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피흘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의 죄가 십자가로 가져가졌다는 것을 보았다면 또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은 『주 예수님,내 죄를 위해 죽어주십시오.』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다. 당신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 그분이 이미 당신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께 당신을 위해 죽어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다.
죄 사함을 어떻게 받았으면 해방도 그러하다. 모튼 역사가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고 다만 찬미하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 못박히실 때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나는 매우 사악한 사람이오니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구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당신의 죄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면 왜 또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는가? 당신의 죄가 이미 그분의 피로 처리되었고 당신 자신도 이미 그분의 십자가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이미 완성된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당신도 죽었고. 그분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만 주님을 찬양하면 된다. 이 일을 인하여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의 빛 안에 살아야한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 106 12)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가? 물론 당신은 믿을 것이다. 성경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6:6). 이것은 첫번째 설명으로서 매우 분명하다. 성경은 또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곰 6:6),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롬 6:8)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우리 옛사람이 언제 못박혔는가? 어제인가, 오늘인가? 아니면 내일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거꾸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옛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 모임에 참석할 때 나는 여러분이 둘씩 둘씩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이 같이 왔다면 『나의 친구가 나와 함께 왔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는 『내가 내 친구와 함께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 중 한 사람은 삼 일 전에 오고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만일 여러분이 함께 왔다면 어떻게 말해도 옳다. 이는 두 가지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로 말한다면. 우리는 공경하는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저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혹은 『제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도 함께 못 박히셨습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모두 정확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가지의 역사적 사실이 아닌 한 가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적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어찌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있는가?
그분이 약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면. 나는 내일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과거의 사건이라면 내가 지금이나 장래에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는가? 주님을 찬미하자.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분과 함께 죽었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나를 대신한 죽음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죽었고 나도 죽은 것이다. 내가 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었다면 나는 그분의 죽으신 것의 귀함을 믿는 것같이 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당신은 왜 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가?
당신이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분이 죽은 것을 느낄 수 있는가? 당신이 느껴보았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당신이 주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해주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6절의 「예수와 함께」라는 어구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진리적인 의미도 있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말씀은 순서를 거꾸로하여 인용할 수 있다. 못 박히실 때 두 강도가 동시에 함께 못 박혔다.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말해주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이 함께 못 박힌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주 예수님의 죽으신 것을 믿고 두 강도가 동시에 못 박힌 것을 믿었다면, 당신 자신이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당신이 함께 못박힌 사실은 두 강도가 동시에 못 박힌 것보다 더욱 친밀하다. 그들은 주님과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다른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당신은 주님과 함께 동일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는 그분이 죽으실 때 당신이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이 사실을 알 수있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느낌과 관계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사실이다. 같은 원칙으로 당신이 이미 죽은 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당신이 죽은 것도 확실하다. 이것들은 거룩한 사실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고 두 강도가 죽은 것도 사실이며 당신이 죽은 것도 사실이다. 내가 말하지만 당신은 이미 죽었다! 당신은 이미 제거되었다! 당신은 이미 버린 바 되었다. 당신이 싫어하는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위에 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 (롬 6 : 7) .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복음이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서 결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효능있게 할 수 없다. 오직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받아들일 때만이 유효하다. 우리 눈이 열려서 갈보리에서 주님이 완성하신 일들을 보아야 한다. 구원받기 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보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당에 가고 구제한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의 눈이 열려서 십자가 상에서 주님이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완전한 구속을 보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것이다. 이럴 때 평강과 기쁨이 당신 마음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구속과 동일한 기초위에 있는 성화
구속이 성화와 동일한 기초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죄에서 해방받는 길과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사람의방법은 죄를 이김으로써 죄를 억누르는 것이나 하나님의 방법은 죄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약함을 인해 비통해하고 그들이 조금 더 강하면 모든 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므로 자신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한다. 이것은 잘못된 관념이다. 만일 우리가 죄의 능력과 우리의 무력함을 이기려 한다면, 우리에게 이미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 더 많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내가 조금 더 강하면 내 거친 성질을 극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강건케 하시어 더 자제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강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점점 약하게 하심으로써 구출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이 기이한 승리의 방법이라고 말하겠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다. 하나님이 죄의 억압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우리 옛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못 박는 것이다. 옛사람을 도와서 무엇을 하지 않고 도리어 옛사람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출하신다.
어쩌면 수년 동안 당신은 자신을 제어하려고 시도했으나 아무런 결과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당신은 이런 노력 안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를 보았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인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완전히 한쪽에 제쳐 놓으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 이런 계시는 사람의 노력을 멈추게 한다.
제 일보 : 「앎」
죄 사함을 얻는 길은 똑같은 것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확실한 앎 속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에 관한 것을 알거나 중요한 교리를 깨닫는 것만이 아니다. 이 확실한 앎은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마음 눈이 밝아짐으로써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죄가 사함받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전도사가 이것을 당신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당신은 그냥 당신의 죄가 사함받은 것을 알 뿐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냥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 곧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물론 죄 사함을 받는 이 일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쓰여진 그분의 말씀이 그분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이 되게 하려고 당신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엡 1 17).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혜와 계시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되 항상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때가 바로 영 안에서 무언가를 볼 때이다. 빛이 당신의 마음을 비출 때 당신은 완전히 믿게 된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죄 사함과 원칙상 완전히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빛이 당신의 마음에 비췰때, 당신은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가 그것을 당신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분의 영으로 당신에게 계시해주었기 때문이다. 혹 당신이 그일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고 이해가 안 될지라도 당신은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일단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았다면 어떤 일도 축복을 받은 사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요동케 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선 성도에게 어떻게 그런 체험에 틀어 갔느냐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특이한 방법을 강조하고 또한 자기의 체험을 옹호할 성경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의 특별한 체험과 성경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각기 다른 방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강조하는 체험 혹은 진리가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서로 보완된다고 말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가치가 있는 체험은 주 예수의 인격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결정적이고도 안전한 체험인 것이다.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서 바울은 모든 일을 다음의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즉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룻 하지아니 하려 함이니』 (롬 6 : 6)
앎의 요건인 하나님의 계시
그러므로 첫 단계로, 우리는 계시에서 비롯된 앎을 하나님에게서 구해야 한다. 이 계시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역사에 관한 것이다. 내지 선교회의 발기인인 허드슨 테일러 형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설 때 이런 것을 체험했다. 여러분은 그가 항상 한 가지 문제 즉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어떻게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흡수하느냐 하는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그의 안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얻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1896년 그는 진강에서 누님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안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드디어 어느 날 빛과 계시가 그에게 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나는 비결이 여기 있다고 느꼈습니다! 즉 내가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내 안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만 주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심을 기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뿌리요 줄기요 작은 가지이며 잎사귀요 꽃이요 과실이며 모든 것 되십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를 도와 주었던 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내 자신을 지체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은 내가 가지이고 그분의 한 부분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믿고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래 전부터 제가 그것을 읽었었지만 지금에서야 이것이 살아 있는 실제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래부터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개인에게 이것은 새로운 노정에서 참된 체험이 되었다. 다시 그는 누님에게 이렇게 편지를썼다. 『내가 얼마나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별 신기하거나 특이한 것은 아니나 지금 나에게는 모두 새로운 것이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에 나는 눈 먼 자였으나 이제는 친히 보게 되었습니다 ‥‥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도 이렇게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나를 제일 잘 아십니다. 아, 이 진리를 보는 것이 어떠한 기쁨인지! 주님이 누님의 마음 눈을 밝히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값없이 얻는 풍성을 얻고 누리기를 구합니다.』
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당신이 이미 방 안에 있는데 방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주님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을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많은 계시를 얻었다면 간구 대신 찬미를 더 많이 할 것이다. 우리가 많은 간구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해에 있을 때 어느날 자기의 영적 상태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한 형제와 대화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도의 생활을 하기 원하는데 나는 정말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때 조금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과 이 부활의 생명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때 어떤 형제가 우리와 자리를 같이 했다. 우리 둘이서 거의 두 시간 가량을 소비하여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간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주셨는데 어찌 달라고 간구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분이 아직 저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가 아직도 화를 내고 끊임없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 많이 간구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우리는 묻기를 『당신이 구한 것중 얻은 것이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는 답변하기를 『저는 참 괴롭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그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것처럼 성화에 있어서도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바로 그때 주님께 크게 쓰임받는 한 형제가 들어와 우리의 대화에 참예했다. 상 위에 보온병이 있었는데. 이 형제가 그 병을 들더니 그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보온병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보온병이 기도할 줄 알아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주여. 내게 은혜를 주사 나로 보온병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이런 기도를 들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친구가 답하기를,『제 생각에 보온병은 결코 그렇게 어리석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보온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보온병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당신도 죽었고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당신도 부활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는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부활 생명을 소유해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이미 죽었고 이미 새 생명을 소유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모든 간구는 마치 보온병의 기도처럼 우습습니다. 당신은 주님께 무엇을 구할 필요없이 다만 눈을 떠서 그분께서 이미 이루신 모든 것을 보면 됩니다.』
관건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 우리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방법을 생각해낼 필요가 없고 죽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주님이 이미 이루신 일들을 알고 그분을 찬미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은 어두움을 드러내는 빛과 같이 이 말로 그의 눈을 열어주셨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이 이미 나를 그리스도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은 나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계시를 얻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 만일 이후로 그 형제를 만나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우리 문제의 근원을 만진 십자가
나는 당신에게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들의 기본 성질을 일깨워 주겠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지나치게 말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겠다. 가령 우리 정부가 술 문제를 엄격히 처리하기 위해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다 하자. 내가 묻겠는데 이런 결정을 어떻게 집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각지로 가서 점포마다 수색하여 술병을 발견하는 즉시 깨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각지에 있는 술병 속의 술을 나 제거할 수 있지만 그 술병 뒤에는 술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있는 것이다. 만일 술병만 처리하고 술공장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술이 계속 생산되기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만일 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려면 전국에 있는 술공장의 문을 닫아야 한다.
비유로 말한다면 우리는 공장이고 우리의 행위는 생산품이다. 주예수님의 피는 생산품의 문제 곧 우리의 범죄를 처리한다. 그리하여 우리 행함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이 여기서 멈추시겠는가? 우리의 어떠함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죄의 행위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죄들은 이미 처리되었지만 우리 자신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당신은 주님이 우리의 모든 범죄를 깨끗이 씻으셨는데 우리 스스로 범죄의 공장을 제거하라고 하신다고 믿는가? 그분이 산출된 생산품만 가져 가시고 우리 스스로 생산품의 근원을 처리하라고 하시겠는가?
이런 질문은 이 문제에 대해 자동적으로 답이 되는 것 같다. 주님은 결코 일을 절반만 하시고 나머지를 남겨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생산품들을 제거하셨고 또한 생산품을 산출하는 공장도 깨끗이 청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역사는 실로 우리 문제의 근원을 만지고 처리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일을 절반만 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고 말한다. 이것은 알아야 하는 사실이나. 당신은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그래도 모른다면 『알지 못하느뇨?』(롬 6:3)는 말씀을 주의하라. 우리의 눈이 열리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제 4장
성장하는 길- 여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혼동이 되어오던 「여김」에 대해 보기로 하자. 먼저 로마서 6장 6절을 보기고 하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시간에 있어서 과거형이다. 이 사건을 과거에 두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이 사건이 이미 이루어졌고 더이상 폐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마지막이자 영단번에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 옛사람이 영단번에 못 박혔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못 박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 후에 무엇이 뒤따르는가? 성경을 더 읽도록 하자. 다음 명령은 11절에 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이 6절에 이어지는 것임은 매우 분명한사실이다. 이 두 구절을 연결시켜서 읽어보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의 체험의 순서도 이러하다. 우리가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 때 다음 단계는 함께 못박힌 자로 여기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했다는 진리를 말할 때 종종 이 진리의 두번째 요점인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기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중요시 해야 할 기점은 우리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는 것이 여기는것 이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알거니와 ---- 여길지어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우리의 여김은 앎에 근거해야 한다. 이 앎은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사실을 얻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기초를 잃게 된다.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는 자연히 여길 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일을 말할 때 우리가 여기는 것을 지나치게 주의하는것은 합당치 않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알기도 전에 여기려고 한다.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 성령이 계시한 바를 얻기도 전에 여기려고 하기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쉽게 당하게 된다. 시험이 임할 때 그들은 맹렬하게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여기고 있는 순간에 화를 내버린다. 사후에 그들은 『이 방법은 안 통한다. 로마서 6장 11절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6절이 없다면 11절이 소용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사실을 알지못한 채 여긴다면 여기면 여길수록 긴장하게 되어 결국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믿은 후 수년 동안 나는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나는 1920년부터 1927년까지 「여겨왔다」.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수록 나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지 못했고 죽어 지지도 않았다. 이런 문제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로마서 6장11절을 읽으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서 6장 11절을 읽고서 여기면 여길수록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내게서 더욱 멀어졌고 이런 여김은 나로「죽음」을 얻게 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는 이런 가르침을 매우 감상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 번의 여김이 왜 아무런 결과를 낳지 않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이것 때문에 수개월 동안 번민했던 것을 시인한다. 나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했다『주님. 만일 이 일을 분명히 해주지 않으시면 내게 이 기본적인 일을 보여주지 않으시면 나의 모든 일을 멈출 것입니다. 다시는 전도하거나 당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먼저 이 일에 대해 철저한 인식을 갖게 하소서.』 수개월 동안 때로 나는 금식까지 해보았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그 아침을 나는 영원히 잊어버리지 못한다.- 위층의 책상 앞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여.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것을 보았고, 내가 그의 안에 있으며. 그분이 죽을 때 나도 죽었고. 나의 죽음이 장래의 일이 아닌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죽으실 때 내가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그분의 죽으심과 같이 참되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모든 문제가 내게 알려졌다. 이런 발견으로 나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의자 위에서 펄쩍 뛰면서. 『주님을 찬미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크게 외쳤다. 나는 아래층으로 달려가 주방에서 돕는 한 형제를 만나 그를 붙잡고서, 『형제님, 내가 이미 죽은 것을 아십니까』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내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형제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어서 그에게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신 것을 모르십니까?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나의 죽음이 그분의 죽음처럼 참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고 말했다. 오. 나에게 이 일은 이렇게 참되었다! 나는 정말 상해의 도로들을 한번 두루다니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을 외치고 싶었다.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나는『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의 결정성을 의심해본 적 이 없다. 내 말은 이 일을 살아 나타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잠시 후 우리는 함께 죽은 사실에 대해 볼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6장 6절이 함께 죽은 것을 체험하는 우선적인 조건이다. 그렇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여김의 비결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바로 계시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계시가 필요하다(막 16 17. 엡 1:17.18) .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사실을 알 뿐 아니라 더욱 눈이 열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계시는 결코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본 날이 언제인지 기억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보는 데 있어서도 확실한 날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전진하는 것의 기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모호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는 내가 죽은 자라는 것 곧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끝내셨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계산 방법이다. 여기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죽음을 향해 나아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여겨야 한다. 둘째 단계 :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여길지어다" 여긴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헬라어에서 여긴다는 말은 장부에 기록한다는 뜻이다. 회계는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화가가 풍경화를 그릴 때 완전히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가? 역사 학자가 모든 기록의 절대 정확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혹은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모든 지도의 절대 정확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 그들은 대략적인 정도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 우리의 언행도 마음 속으로야 진실하게 말하고자 하지만 완전히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말은 왕왕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말하거나너무 적게 말한다. 오직 수학만이 절대 정확성과 진실성을 갖고 있다. 수학에는 과오가 용납되지 않는다. 의자 하나에 한 의자를 더할 때 두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런던에서나 상해에서나 동일하다. 당신이 서쪽으로 여행하여 뉴욕까지 가든 동쪽으로 여행하여 싱가폴까지 가든 이것은 동일하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 더하기 하나는 변함없이 둘이다.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심지어 지옥에서도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인 것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는가? 이는 우리가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회계로 비유하겠다. 가령 내 호주머니 속에 십오 실링이 있다 하자. 나는 어떻게 장부에 기록해야하는가? 나는 십사 실링 육 펜스라고 기록할 수 있는가? 또는 십오 실링 육 펜스라고 기록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나는 장부에다 내호주머니속의 실지 실링을 기록해야 한다. 회계는 사실적인 계산이지 환상적인 계산이 아니다. 같은 원칙으로. 내가 참으로 죽었기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계산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실이 아닌 것을 장부에 기재하라고 하실 수 없다. 만일 여전히 살아 있는 자라면 그분은 결코 나에게 나를 죽은 자로 계산하라고 하실 수 없다. 이것은 계산이라고 할 수 없고 그보다 오산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계산은 허위적인 형식이 아니다. 만일 내가 내 호주머니 속에 십 이실링밖에 없는데 십 오 실링이 있기 바라기 때문에 내 장부에 십 오 실링으로 기록한다면 그 계산법은 차액을 보충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럴수 없다. 만일 내게 십 이 실링밖에 없는데 자신에게 『내게 십 오 실 링이 있다. 내게 십 오 실링이 있다. 내게 십 오 실링이 있다.』고 말한다 하자. 당신은 이렇게 의지와 생각으로 자신을 설득시키는 것이 호주머니 속의 액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계산한다고 해서 십 이 실링을 십 오 실링으로 만들 수 없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 되게 할 수 없다. 다른 면에서. 만일 실지로 내 호주머니 속에 십 오 실링이 있다면 나는 마음놓고 장부에다 십 오 실링이라고 기록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여김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도리어 우리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사실로 보라고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계시는 자연히 우리를 계산하는 데로 이끈다. 우리는 결코 우리에게 『너희도..... 여길지어다』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장부에다 기록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나는 이미 죽었다』고 기록하고 그런 다음 그 사실을 붙잡기를 원하신다. 무엇 때문인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실 때 내가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사실로 간주한다. 나는 내가 이미 그분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간주하고 선포한다. 바울은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것이 참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언제나 참된 것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당신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돌이켜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분이 이미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주여. 당신을믿고 당신 안에 있는 사실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종일토록 이것을 붙잡아야 한다 믿음의 여김 로마서 앞 네 장 반은 거듭 믿음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롬 3:28. 5:1).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과 죄 사함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를 믿지 않고서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로마서 두번째 부분에서는 믿음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얼핏볼 때에 강조점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번째 부분에서 비록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여김」이라는 단어가 「믿음」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여김」과 「믿음」은 동일한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항상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근거한다. 믿음은 장래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장래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소망이지 믿음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한 믿음은 장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때문에 여기서 「여기다」라는 단어를 택했을 것이다 이 단어는 과거와 관계 있다. 그 의미는 이미 완성된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이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말한 그런 종류의 믿음이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구한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으면(물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당신이 어떤 것을 받을지 모른다거나 능히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요 심지어 장래 받을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여기의 믿음은 당신이 이미 얻은 믿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오직 과거와 관련된 것만이 여기서 말한 믿음이다. 이외에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이 필히』 『하나님이 장차 』라고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믿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항상 『하나님이 이미 이루셨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의 십자가에 못 박힘에 관하여 어느 때가 내게 믿음이 있는 때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혹은 『하나님이 장차 하실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다.』고 말하는 때가 아니다. 그 때는 내가 즐겁게.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못 박혔습니다.』라고 말하는 때이다. 로마서 3장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위하여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보여준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되어 있고 이로써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보여 준다. 성령이 첫번째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할 때 우리는 믿고 의롭게 되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두번째 사실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실행면에서 두 번째 부분의 「여김」은 첫번째 부분의 「믿음」을 대치한 것이다. 서로의 강조점이 다른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사실을 봄으로써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계속 진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거룩한 사실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분의 십자가이다. 시험과 실패는 믿음의 시금석이다. 역사상 두 가지의 가장 위대한 사실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로 처리된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로 처리된 것이다. 시험에 관하여는 어떤가?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보고 또 믿었는데 이제 옛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것보다 더 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전에 아는 죄에 빠질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성질을 내거나 혹은 성질을 내는 것보다 더 나쁜 어떤 것이 일어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들로 인해 앞에서 말한 모든 사실들이 다 거짓되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마귀의 주된 목적이 항상 우리로 하나님의 사실을 의심하게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창 3:4참조).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실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보고, 또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 후에 사탄은 우리에게 와서. 『속에 활동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 이것은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을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이것은 결정적인 시금석이다. 당신은 당신 앞에 놓여진 자연계 안의 만질 수 있는 사실을 믿는가? 아니면 볼 수 없고 과학으로도 증명될수 없는, 영적 한계 안의 접하기 어려운 사실을 믿는가? 여기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붙잡으라는 것과 붙잡지 말라는 것들을 상기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의 방법을 말씀하셨는가? 먼저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뽑아버린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계산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잘못 계산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말했듯이 장부에 기록을 잘못한 것과 같다. 그 사람은 호주머니 속에 십 이 실링밖에 없었지만 장부에다는 십 오 실링으로 기록하였다. 사실상 죄의 본성은 제해지지 않았다. 죄의 본성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정복하여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범죄하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계속 보혈의 역사를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범죄를 처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피로 인하여 그분은 다시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간접적인 방법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분은 죄의 본성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제하신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전에 죄의 도구였던 육신의 몸은 실직하게 되었다(롬 6:6. 원문참조). 비록 옛주인인 죄의 성품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를 섬겼던 노예가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이상 우리 몸을 지배할 수 없다. 도박꾼의 손이 실직하고 맹세하는 자의 혀가 실직하였기 때문에 이제 이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롬 6 : 13) .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이 「죄를 이김」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성경적이다. 로마서 6장 7절과 11절이 말한 「죄에서 벗어남」과 「죄에 대하여 죽고」라는 말씀은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권세가 아닌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실재하는 권세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죄의 본성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알고 또한 해방의 정도가 날로 증가한다. 이 구원이 이렇게 참되기 때문에 요한은 담대하게, 『하나님께로서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요일3:9)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된다.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죄가 다시는 우리의 역사(歷史) 중에 출현하지 않고 우리가 다시는 범죄치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뜻은 범죄가 하나님께로서 난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심겨진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질은 범죄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어떤 존재의 성질은 그것의 역사와 큰 차이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의 역사와 큰 차이가 있다.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하여(적절하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예를 들겠다. 우리는 나무가 성질상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나무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나무를 손으로 누른다면 잠기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우리의 역사에서 하나의 사실인 것같이 이 역사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뿐 아니라 본질도 하나의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새 성품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를 범할 수 없다. 오직 아담 안에 있는 자만이 능히 범죄하고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에게 사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권세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실을 우리의 의지로 삼고 생활의 수단으로 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체험 중에서 접촉한 사실을 택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강력한 사실을 택하는가? 그분의 부활 능력이 우리 쪽에 있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한다.(롬 1:16)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실을 우리 체험에서 실제화하는데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나는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11장이 신약뿐 아니라 실지로 성경 전체에서 믿음에대한 유일한 정의임을 알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이 정의를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어떤 상태만을 뜻하지않고 일종의 행동을 뜻한다. 수년 동안 나는 이 단어에 합당한 용어를 생각했었다. 영어 성경 중 다비의 번역판은 이 단어를 매우 훌륭하게 번역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화요』(substantiate). 이 단어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는 실제화는 바라는 것들을 체험으로 화하는 행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실제화」하는가? 사실상 우리는 매일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 수 없게 된다. 당신은 「실상」과 「실제화」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가? 실상(實狀)은 내 앞에 있는 어떤 물체의 현상을 말하고 실제화는 그 물체를 우리에게 참이 되게 하는 어떤 힘 혹은 기능을 가리킨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오관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계 안의 것들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예컨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세상에 있는 빛과 소리를 실제화시키는 두 가지 기능이다. 또 세상에 있는 홍색, 황색, 녹색, 자색 등 각종 색상들은 모두 참되다. 그러나 눈을 감아 버릴 때 그 색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색상의 실재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시력이 있을 때 나에게는 색상을 실제화할 능력이 있게 된다. 시력을 통하여 황색은 내게 황색이 된다. 그러므로 황색의 존재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황색을 실체화할 능력이 나에게 있다. 나는 어떤 물체를 내게 참된 것이 되게 하고 내 의식 속에 실제가 되게할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실제화의 의미이다. 만일 내가 색맹이라면 색상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혹 내게 듣는 능력이 결여되었다면 나는 음악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과 색상은 모두 참된 것들이다. 그들의 실재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영향받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비록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참된 것들이다. 우리가 천연적인 감각으로 신성한 사물들을 실제화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라는 것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들을 실제화하는 능력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사실을 우리의 체험에서 진실한 것이 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실제화시킨다. 천천 만만의 사람들이 로마서 6장 6절의,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을 읽어보았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고, 의심하거나 머리로만 동의하고 영적인 빛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기서 우리는 약속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다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붙잡도록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믿든 믿지않든 여전히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여전히 참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사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 자체는 결코 믿음에 의해 그 진실성이 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만이 그것들을 만질 수 있고 그것들을 우리 체험에서 참된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무릇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들을 우리는 마귀의 거짓말로 여겨야 한다. 그 일들 자체는 우리의 느낌에 상당히 실재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큰 사실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이 선포 이전의 모든것들은 다 굴복되어야 한다. 내게 어떤 체험(세밀한 원칙에서 완전히 이 일에 적용될 수는 없지만)이 있는데. 그 체험으로 이 원칙을 설명할수 있다. 수년 전 나는 병을 앓았는데 엿새 밤이나 열이 높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은 성경으로부터 나를 치료하시는 한 마디를 주셨다. 이로 인해 나는 모든 병세가 즉시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반대고 나는 여전히 한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을 뿐더러 전보다 더욱 더 아파졌다. 체온이 높아졌고 맥박도 더 빨리 뛰고 머리도 전보다 더 심하게 아팠다. 마귀는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 네 믿음이 어디 있으냐? 네가 올린 기도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왔다. 이 때문에 나는 미혹되어 다시 기도하면서 이 일을 해결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책망을 받았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이 성경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이 증상은 다 무엇인가? 이증상들은 다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귀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이 불면증은 거짓이다. 이 두통도 거짓이며 고열도 거짓이다. 이 빠른 맥박도 거짓이다.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 이 모든 증세는 너의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에게 진리이다.』 오 분 내에 나는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침 깨어날 때에는 완전히 회 복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같은 특이한 개인의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사탄의 변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든간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노련한 거짓말쟁이는 말로만 아니라 또한 태도와 행동으로도 속인다. 그는 위조지폐를 내놓고 사용하듯이 거짓말을 한다. 마귀는 노련한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결코 그자가 말로만 거짓말한다고 생각지말아야 한다. 그는 어떤 표시나 느낌, 혹은 체험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요동시키려고 한다. 내 말을 정확히 기억하기 바란다 나는 육체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는 육체에 대해 더 많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한 것은 거짓말이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받아들일 때.사탄은 최선을 다하여 매일 우리 체험을 증거로 하여 우리가 근본적으로 죽지 않았고 도리어 매우 활동적임을 믿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탄의 거짓을 믿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타난 상태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나의 이름은 「니」이다. 나는 내가 「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내가 자신 있게 믿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기억력을 상실함으로 내가 「니」라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꿈 속에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내 이름은 깨어날 때도 「니」이고 잠잘 때에도 여전히 「니」인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을 때에도 내 이름은 「니」이고 잊고 있을 때에도 내 이름은 여전히 「니」이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으로 가장한다면 사정은 어려워질 것이다. 가령 내가 내 자신의 이름을 「왕」이라고 한다 하자. 그렇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나는 왕씨다. 이제 너는 네게 왕씨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내 자신을 여길지라도 내가 유념하지 않을 때 누가 나를 『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내가 대답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것은 사실이 상상보다 승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어떻게 간주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내 이름이 「니」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니」라고 간주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내게 체험이 있든 없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나는 어떻게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체험이 이 사실을 확증하든 안 하든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사실 위에 서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된다. 마귀는 항상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을 공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될 때 그의 목적은 달성되고 우리를 그의 능력 아래 둘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의심치 않고 확신한다면, 하나님이 그분의 역사 혹은 그분의 말씀에 대해 불의하실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사탄이 어떤 체계를 사용하든 우리는 여전히 마귀를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가 나에 대하여 내 성이 「니」가 아니라고 설득시키려고 할 때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고후 6:7). 여러분은 아마도 사실에 관한 이런 비유를 들어보았을 것이다.「사실」과 「믿음」과 「체험」은 탑 꼭대기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세 사람과 같다. 「사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게 전진하며 또한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믿음」은 사실을 따라간다. 오직 「믿음」의 눈의 초점을 「사실」에 둘 때만이 만사가 순조롭다. 그가 체험을 관심하여 돌이켜 자신이 어떻게 전진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즉시 담에서 떨어진다. 거기에 따라 가련한 「체험」도 이어서 떨어지게된다. 모든 시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시험은 우리의 눈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보이는 것들로 돌아가게 한다. 믿음은 종종 산봉우리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상태를 만나며 접촉하는 물질적인 세계와의 뚜렷한 모순에 부딪친다. 그러나 실패한 사실이든 느낌이든 혹은 암시적인 실패이든 이것들은 모두 믿음을 저지하는 산봉우리들이다. 믿음과 산봉우리는 공존할 수 없고 그 중 한 가지가 제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많은 때에 산봉우리만 남기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데 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좇아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사탄의 거짓말이 우리의 체험과 일치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들을 거절하고 단순히 그분을 믿는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사탄의 기만이 허물어지고 우리의 체험이 한 걸음씩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만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에게 단계적으로 참되게 되시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그분이 참 공의인 것과 참 거룩인 것과 참 부활 생명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본래 우리가 보았던, 그분 안에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이 이제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참되게 역사하는 상태에 이를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숙의 표시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가 바로 이런 뜻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실을 참되게 만든다. 믿음은 항상 영원한 사실-영원한 참된사실-을 참되게 만든다. 그분 안에 거함 비록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적지 않은 시간을 사용했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 한 가지를 더 말하겠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수차 언급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죽었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가 죽은 사실을 발견하려고 할 때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우리 속」은 우리가 죽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매우 익숙하다. 이제 이 말씀을 한번 상고해보자 먼저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몸부림과 노력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이미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다. 이는 곧 우리가 배치된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다.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신성한 원칙을 세워준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만유를 포함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밖에서」 완전하고도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런 역사는 장차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그분 밖에서는 우리의 영적 체험이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안에서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셨으며. 우리가 그분안에서 충만하여 졌다고 말한다.(롬 6:6, 엡 2:5 6, 골 2 10) 이런 일들은 우리가 완성하도록 남겨둔 일이 아니다(물론 우리는 이런 체험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일들은 이미 완성된 일이고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완성된 일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이루신 일은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안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이루신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분이 머리를 다루실 때 모든 지체도 다루어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 자신 안에서 단독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체험하려 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체험을 줄 뜻이 조금도 없으시다. 또한 그분은 당신을 위하여 그런 일을 완성할 뜻도 없으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체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체험하셨다. 소위 「우리의 체험」은 우리가 그분의 역사와 체험 안으로 들어 가는 것에 불과하다. 만일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서 어떤 가지는 붉은색 포도를 맺으려하고 다른 가지는 녹색 포도를 맺으려 하고 또 다른 가지는 자색 포도를 맺으려 한다 하자. 만일 모든 가지들이 포도나무를 상관치 않고 자기가 내고 싶은 포도를 낸다면, 이것은 정말 세상을 놀라게 할만한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불가능하고 불가사이한 일이다. 가지의 성질은 포도나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각종 체험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부활과 승천을 각각 개별적인 일로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것이 주님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직 주님이 우리 눈을 열으사 그분이 만유이심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체험이 있게 된다. 모든 진실한 체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가 그 사실들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얻지 않은 체험들은 모두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질 체험들이다. 『주님을 찬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 체험을 발견했습니다. 그 체험은 이미 내 것이 되었습니다! 주여 내가 그 체험을 갖는 것은 그것이 당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실이 우리의 체험의 기초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기본 원칙은 우리에게 어떤것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로 어떤 일들을 거치게 함으로써 결국 그것들을 우리 안에 두어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어떤 일을 완성하사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지않으신다. 즉 『저는 삼월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혹은 『저는1937년 1월 1일에 죽음에서 부활했습니다.』 혹은 『지난 수요일에 제가 구하는 어떤 확실한 체험을 얻었습니다.』 일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은혜 시대에 우리는 더이상 체험 자체를 우리가 추구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으로 우리의 사상을 통제하지 못하게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전기(轉機)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말할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에서 참된 전기를 체험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뮬러 형제가 어느 날 땅에 엎드러져 『뮬러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내 말을 기억해두라. 나는 우리가 거친 영적 체험 중에서의 실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과 동행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전기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나는 우리의 생활에서 확실한 전기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개인에게도 개인적인 체험을 주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모든 개인의 체험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바로 시간 안에서 영원한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의 체험과 영적인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그분을 떠나서 단독적인 역사를 가질 수 없다. 우리에 대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신 그분의 역사 외에 따로 어느 개인에게 역사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단독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또한 우리를 그분의 아들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었다. 이상 말한 것들의 요점은 굳건한 믿음 안에서 이렇게 말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이미 나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참된 것이라면 나에게도 참된 것입니다. 나는 그분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이런 믿음은 매우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사탄은 자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끌어내어 그리스도 밖에 있게 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여기도록 우리를 권하고 설득한다. 또한 유혹과 실패와 고통 그리고 시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확실히 느끼게 한다. 이 때 우리는 종종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런 상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느낌으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저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주소서.』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이 구원의 방법이다. 어떻게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무언가를 역사하실 기회를 얻으실 수 있다. 이럴때 그분은 뛰어난 능력-부활의 능력(롬 6:4. 9. 10)-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실을 점차적으로 매일 우리가 체험하는 사실들이 되게할 기회를 얻게 되신다. 본래는 『죄가 왕 노릇 하였으나』(롬 5:21) 이제는 기쁨 안에서 우리는 진실로 『다시는 저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게 된다』(롬 6 : 7) .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만유라는 기초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점차적으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초 위에서 있다면 우리는 옛사람의 모든 것이 여전히 우리 몸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밖에서 자아가 죽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장소를 잘못 찾은 것이다. 이는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계속 우리 속을 들여다 본다면 죄를 향하여 우리는 십분 살아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죽음을 여기에 역사하시도록 한다면 결국 새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될 것이다.(롬 6.4. 1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이 이중적인 내용의 말씀이다. 한 부분은 명령이고 다른 부분은 약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객관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주관적인 면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주관적인 면은 객관적인 면에 근거한다.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우리가 그분의 안에 거한 것의 결과이다. 우리는 일의 주관적인 면을 지나치게 관심함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소홀히하고 자신을 향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객관적인 면-내 안에 거하라-만 붙잡고 주관적인 면은 하나님께 맡기라. 주관적인 면은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고 행하신다. 우리는 전등으로 이 일을 설명한 적이 있다. 만일 당신이 집 안에 있고 날이 점점 어두워 졌다면 책을 읽기 위해 당신은 등을 켜야 할 것이다. 당신 옆의 탁자 위에 등이 하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그 등에 기대를 걸고 그 등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고 지켜보겠는가? 아니면 헝겊으로 전구를 닦겠는가? 당연히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다른 쪽으로 가서 벽에 부착된 스위치를 켤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전기의 근원을 주의하고 거기에 요구되는 행동을 취한다면 등은 즉시 켜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초점을 그리스도 한 분에 고정시켜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은 그 사실들을 주관적인 진실로 만든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우리가 ‥‥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같은 원칙으로 이것을 생명의 열매 맺음에 적용할 수 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혹은 맺은 열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도 없다. 우리의 본분은 그분을 앙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이행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분 안에 거하는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또한 그분은 이미 이것을 이루셨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말라.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다만 그리스도를 주시하고 그분 안에서 당신을 보라. 그분 안에 거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그분의 아들 안에 두셨다는 사실에 안식하라. 또한 그분이 당신 안에서 그분의 일을 완성하실 것을 믿으라. 그분은 영광스런 그분의 약속을 실현하신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 14). |
제 5장 십자가의 경계
이 세상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 안에서 체계적인 체계인 그분이 창조한 우주 곧 그 아들 그리스도를 머리(골 1:16-17) 삼은 우주를 갖고 계신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의 육체를 사용하여 대적하는 체계를 세웠는데, 성경은 이것을 「이 세상」이라고 부른다. 이 체계 아래 우리가 포함되어 있고 사탄 자신이 그 세상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사실상 사탄은 「이 세상 임금」(요 12:31)이 되었다.
두 창조
이 때문에 첫 창조는 사탄의 손에 의해 이미 옛 창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관심은 더이상 첫 창조가 아닌 두번째 창조에 있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의 새 창조, 새 왕국, 새 세계를 가져오셨다. 이 새 창조 안으로는 옛 창조와 옛 왕국과 옛 세계 안의 어떤 것도 가져올수 없다. 이제 문제는 이 대립되고 대적하는 두 왕국 중 우리가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물론 우리가 어느 왕국에 속하느냐에 대해 모호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 : 12-13)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새 왕국 안으로 이끌기 위하여 그분은 우리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셔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새 창조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새 왕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게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 15:50). 당신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얼마나 교양이 있든지 또는 얼마나 개선하든지 간에 육체는 여전히 육체이다. 우리가 새 왕국에 적합한가는 전적으로 우리가 어느 창조에 속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옛 창조에 속하는가, 아니면 새 창조에 속하는가? 우리는 육체로 난 자들인가, 아니면 영으로 난 자들인가? 우리가 새 왕국에 적합한가는 결국 우리의 근원 문제에 달려 있다. 문제는 선하고 악한가에 있지 않고 육체냐 영이냐에 있다. 『육으로 난 것은육이니』. 육신은 결단코 다른 것을 낳을 수 없다. 옛 창조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결코 새 창조 안으로 가져올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일임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결코 옛 창조의 어떤 것으로도 새 창조에 공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우리를 얻고자 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낡은 원래의 우리들을 그분의 계획 안으로 이끄실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그분은 십자가로 우리를 제하시고 그런 다음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기능을 지니고 새로운 왕국, 새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전 것」을 해결하시는 방법이다. 그분은 우리 「옛사람」을 완전히 한쪽으로 제쳐 놓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 새 세계 안에서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우주 가운데 가장 큰 부정(否定)은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일소하셨다. 그 반면에 우주 가운데서 가장 큰 긍정은 바로 부활이다.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신 모든 것을 새로운 영역 안으로 이끄셨다. 그러므로 부활은 새 창조의 벽두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첫 왕국에 속한 모든 것들을 끝내는 십자가와 두번째 왕국에 속한 모든 것을 가져오는 부활을 보는 것은 복된 일이다. 부활 이전에 시작된 모든 일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이는 부활이 하나님의 새로운 기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앞에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낡은 것이고 하나는 새로운 것이다. 낡은 세상 안에서 사탄은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옛 창조 안에서 당신이 선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당신이 옛 창조에 속해있을 때 당신은 사망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 이는 옛 창조에 속한 것들 중 새 창조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포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것 중 십자가 이편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모두 저편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빨리 볼수록 좋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옛 창조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을 그의 아들에게 돌리셨다. 그런 다음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이미 그분 안에서 제거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신 듯하다. 『나는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한쪽에 제쳐놓았다. 옛 창조에 속한 너희들도 그 안에 포함하여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우리 중 이런 판결에서 벗어날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점은 우리를 침례의 문제로 이끈다. 『무룻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롬 6:3, 4).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중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성경에서 침례는 구원과 관계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 비록 우리가 성경에 근거하여 침례의 중생을 말할 수는 없지만 침례의 구원을 말할 수 있다.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구원은 죄나 죄의 권세와 무관하며 이 세상 체계와 관계된다. 우리는 사탄에 속한 세상 체계 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사탄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베드로는 여덟 사람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다』(벧전 3:20)고 말한다. 이 예표는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설명해준다. 노아와 그의 일가는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가 패괴한 옛 세상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그들이 이로 인하여 익사를 면한 것에 중점이 있지 않고 그들이 패괴한 세상으로부터 나왔다는데 중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21절)고 말한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은 침례로 표명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서 당신을 구원하신다. 또한 당신의 침례로 말미암아 이 점을 확증하셨다. 침례의 한 방면은 『그분의 죽으심에 합하고』 옛 창조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의 다른 방면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새 창조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롬 6.3) 당신이 물 속에 들어갈 때 당신의 세상도 함께 물 속에 들어간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켜질 때 당신의 세상은 이미 멸절된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한 그들은 간수와 그의 일가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간수와 그에게 속한사람들은 즉시 침례를 받았다.(행 16:31-34) 그들이 이렇게 행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영적인 권세 앞에서 그들이 심판받은 세상으로부터 구원되었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 하였다』 .
그러므로 침례는 단지 물을 뿌리거나 물에 잠기는 문제만이 아니다. 침례는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된 너무 큰 일이다. 또한 두 세계와도 관련된다. 무릇 이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 사역해 본 사람은 침례로 야기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것이다.
장사는 바로 끝냄이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침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것이라』(벧전 3 21)고 말한다. 만일 누가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와 세상과 옛 창조 그리고 옛 왕국에 대한 심판을 알려주셨다. 십자가는 단지 그리스도 개인에게 속한 「개인적인」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십자가요 당신과 나를 포함한 공동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 각 사람을 그의 아들 안에 두셨고 그의 안에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그분은 이미 첫 아담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완전히 일소하셨다.
나는 옛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 대해 어떻게 응해야 하는가? 침례를 요청하는 것이 나의 응답이다. 왜 그런가? 로마서 6장 4절에서 바울은 침례는 곧 장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침례 자체는 죽음이나 부활이 아니다. 그러나 침례가 장사이기 때문에 침례는 죽음과 부활과 서로 연관이 있다. 어떤 사람이 장사될 자격이 있는가? 당연히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침례 받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는 오직 무덤에 들어가기에만 합당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장사를 죽음의 방법으로 취한다. 그들은 장사를 통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내가 강하게 말하거니와, 우리 눈이 열려서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또한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는 침례받을 권리가 없다. 우리가 물 속에 내려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이미 죽었음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을 간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간단하고도 명백하다. 그분은 『그리스도가 이미 죽었고 또 내가 너를 그의 안에 포함시켰다. 이 사실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말하느냐?』고 말씀하신다.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나는 『주여, 당신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이 나를 당신의 죽음과 장사에 넣으신 것에 대해 나는 예라고 말할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그분이 이미 나를 죽음과 무덤에 넣으셨기 때문에 내가 침례를 청하는 것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어떤 여인이 그녀의 남편을 잃었다. 그 여자는 비통한 나머지 미쳐서 남편의 장사를 거절하였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도록 그의 시체를 집 안에 두었다. 그 여자는 『그이는 죽지 않았어요. 매일 나는 그이와 대화하고 있는데요.』라고 말했다. 이 가련한 여인은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을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장사하기 원하는가?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을 때이다. 만일 그들에게 최소한의 소망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장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침례를 청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의 완전성과 내가 죽어 마땅한 것과 하나님이 정말로 이미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믿을 때이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때 나는 침례를 청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이미 죽었음을 인해 하나님께 찬미합니다! 주여, 당신이 이미 나를 죽이셨으므로 이제 저를 장사하소서!』
중국에 긴급 구조기관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적십자사」이고 다른 하나는 「청십자가」이다. 「적십자」의 일은 전쟁터에서 부상만 입고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간호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청십자」의 일은 기근이나 수해 혹은 전쟁 중에 사망한 사람들을 장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다루심은 적십자의 일보다 더욱 철저한 것이다. 그분은 옛 창조를 보충하고 완전하게 하려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사람을 못 박고 장사하심으로써 그들로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생명을 갖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셨고 지금 우리는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청십자」의 일에 복종해야 하며 장사로 죽은 사실을 확증해야 한다.
오늘날 옛 세상과 새 세상이 있는데 이 두 세상 사이에는 무덤이 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못 박으셨지만, 나는 무덤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나의 침례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십자가 안에서 내게 주신 판결을 확증하는 것이고 또한 내가 이미 옛 세상과 갈라졌고 지금은 새 세상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옛 생활 방식으로부터 단호하고 의식적인 구분을 짓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6장 2절에서 말한 바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의 뜻은 『만일 너희가 옛 세상에 계속 머물기 원한다면 왜 침례를 받는가? 만일 너희들이 옛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기 원한다면 침례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옛 창조를 장사함으로써 새 창조를 위한 토대를 닦아 두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5절의 말씀도 역시 침례받은 사람(3절)에 대해 말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침례로 말미암아 우리가 상징적으로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을 완성하신 것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내가 한 형제에게 이 진리를 강조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나는 내 찻잔에다 설탕을 한 덩어리를 넣고 저었다 몇 분 후에 나는 그에게, 『지금 설탕이 어디에 있고 차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두 가지를 섞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나눌 수 없게 되었어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간단한 예화이지만 그로 하여금 우리가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의 친밀성과 최후성을 깨닫게 하였다. 우리를 거기 넣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역사는 역전될 수 없다. 그러면 사실에 있어서 이 연합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침례 배후의 진실한 의미는,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음 안으로 잠기고 결국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죽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그분의 죽음과 이같이 친밀히 연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물 속에 잠길 때 우리는 이 역사적인 「잠김」 곧 하나님이 완성하신바 그분과의 연합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침례받을 때 우리가 대중 앞에서 한 간증은 바로 이천 년전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유를 포함하고 능력 있는 죽음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의 능력과 포괄성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제하고 끝내셨다.
부활로 인해 새 생명 안으로 들어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 : 5) . 이제 부활의 다른 상징이 있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부활에 들어간 것은 침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주님을 찬미하자!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은 내 안에 들어오시어 새 생명을 나에게 나누어주셨다. 주님의 죽음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안에」있는 것이다. 부활에 관하여도 물론 내가 그분 안에 있지만,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생명을 나에게 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어떻게 이 새 생명을 얻는가? 바울은 「그와 연합하여」라는 용어로 이에 대한 좋은 설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헬라어에서 연합이라는 단어에는 「접붙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것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을 설명하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제공한다.
복건(福建)에 있을 때, 나는 용안(이것의 원산지는 중국 남쪽 지방인데 그 크기는 살구만하다. 맛이 달아 먹기도 하고 약으로도 쓴다. ) 과수원을 경영하는 어떤 사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오천 평이나 되는 대지에 삼백 그루의 용안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의 나무에 접붙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당신은 내가 접붙이지 않은 과수를 심고서 내 땅을 낭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접붙여지지 않은 원래 나무가지에서 어떤 이익을 얻기를바라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접붙이는 과정을 좀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는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한 나무가 일정한 높이로 자랄 때 나는 윗부분을 잘라내고 거기에다 접붙입니다. 』라고 했다. 그는 한 그루의 특별한 나무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나무가 보이십니까? 나는 그 나무를 아비 나무라고 부릅니다. 이는 접붙이는 데 사용되는 모든 가지가 그 나무로부터 취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 나무들을 접붙여주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게 둔다면 그 과실은 매실처럼 작고 껍질은 두껍고 씨가 큽니다. 그러나 그 아비나무의 과실은 매실보다 크고 껍질은 아주 얇고 씨가 매우 작습니다. 이 나무 가지의 접붙임을 받은 나무도 그 나무와 똑같은 과실을 맺습니다. 』 내가 다시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그는 『이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는 한 나무의 성질을 다른 나무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나무에 상처를 내고 그런 다음 거기에 좋은 나무의 가지를 끼워 놓습니다. 그리고 잘 묶어서 그냥 자라게 둡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또 『어떻게 자랄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그는 『나도 잘 모르지만 자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
그는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를 지적하면서, 그 나무의 접붙여진 부위 밑의 원 줄기에는 나쁜 과실이 맺혀 있고 그 윗부분인 새 줄기에는 좋은 과실이 많이 맺혀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 나쁜 과실을 맺는 가지를 남겨 둠으로써 양자의 차이점을 표명합니다. 이 나무에서 당신은 접붙임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접붙인 나무만을 기르는지 알 것입니다. 』
한 그루의 나무가 어떻게 다른 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나쁜 나무가 어떻게 좋은 과실을 맺을 수 있는가? 오직 접붙임 곧 좋은 나무의 생명을 연결시켜 접붙임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람이 한그루 나무의 가지를 다른 나무에 접붙일 수 있을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더욱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연결시킬 수 없으시겠는가?
한 중국 여인이 팔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었다. 상처에 딱지가 생길 때 발생할 심한 수축을 방지하기 위해 상처 난 부위에 새 살을 이식시켜야 했다. 그 여인은 너무 나이가 들었었고 또 영양 부족이어서 그의 살을 이식시키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중에 한 외국 간호원이 그 여인에게 피부를 제공하여 수술은 성공적 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살과 원래의 살을 같이 꿰멤으로써 그 여인은 팔이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의 황색 팔에 횐 피부 가 일부 붙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다른 사람의 피부가 다른 여인의 팔에서 자라는 것은 어떤 영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나 다만 아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 땅의 외과의사가 한 사람의 몸에서 피부 일부를 취하여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시킬 수 있다면, 더욱 큰 외과의사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에 접붙일 수 없으시겠는가? 나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 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할 필요도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이 세상에 천만 인의 생명 안에 접붙여진 열매 맺는 유일한 생명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새 생명이라고 부른다. 새 생명이란 전에 사람에게 없었던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나의 천연적인 생명이 완전히 변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생명 곧 전혀 새로운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 다.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옛 창조를 제 하셨는데. 그 목적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를 가져오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이미 흑암의 권세로 향하는 낡은 문을 닫아버리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다 나의 영광은 바로 이미 완성된 일 안에 있는데, 그것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한』 것이다(갈 6:14). 나의 침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개적 간증이다. 이것은 입을 열어서 하는 간증이 나의 구원을 위함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제 6장
성장하는 길-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앞 장들에 이어서 이제 우리는 드림의 참된 성질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앞에는 로마서 6장 후반부 곧 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가 있다. 6장 12 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룻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이 두 구절 말씀 안에 어떤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는 「드림」이다. 13절. 16절, 19절에서 도합 다섯 번 사용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드리다」라는 단어를 헌신의 의미로만 생각하고 그 내용을 자세히 연구해보지 않는다. 물론 「드림」에는 헌신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옛사람」과 그 기능과 지혜-천연적인 지혜와 힘 기타 재능-를 주님이 사용하시도록 그분께 드리라는 뜻이 아니다. 13절을 읽을 때 이 점이 즉시 분명해질 것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라는 용어를 주의하라. 바울은 『너희 자신을 죽은 자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헌신의 기점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여기서 헌신은 옛 창조안의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은. 죽음과 부활을 거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드림」은 우리의 옛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안 결과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는 「알고」. 「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참으로 알았을 때. 나는 자연히 내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게 된다(6. 11절). 또 내가 죽음에서 그와 함께 부활한 것을 알 때. 나는 자연히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게 된다』(11절). 이것은 십자가의 두 방면-죽음과 부활-이 모두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도달할 때 뒤따라오는것은 바로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다. 실지로 그분은 나의 생명이시다. 나의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모튼 소유를 그분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죽음을 거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이 없게 되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그분이 이미 십자가 위에서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정죄하셨기 때문이다. 죽음이 그분께 드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다 제하였으며. 오직 부활만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게 한다. 자신을 하나님께드린다는 말은 오늘 이후로 나의 온 생명을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세째 단계 : 「자신을 드림」 우리는 이 「드림」이 우리 몸의 지체들과 관계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 몸을 더이상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함을 보았다. 바울은 『너희 자신을 ....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지체와 능력이 완전히 그분께 속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신다. 내가 내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그분께 속함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큰일이다. 만일 호주머니 속에 내 소유로 십 실링이 있다면 나는 그 돈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만일 그 돈이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관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없고 감히 잃어버리지도 못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바로 이 점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날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야 한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또 우리의 시간과 금전 혹은 재간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함부로 자기 뜻대로 쓰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 가운데 우리가 그분께 속하기 때문에 돈 한 푼. 한 시간 혹은 어떤 지혜와 체력을 다른 데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한번은 한 중국인 형제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있는 객실 내에서 믿지 않은 사람 셋이 카드로 오락을 즐기려고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부족해서 그들은 그 형제에게 같이 하자고 요청했다. 그는 「여러분들을 실망시킬 생각은 없지만 저는 함께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손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며 그에게, 『당신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내 이 두 손은 내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그들에게, 생명 안에서 그의 주권이 양도된 것을 설명해주었다. 이 형제는 그의 모든 지체가 완전히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참된 성결이다. 바울은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 19)고 말한다. 실제적인 활동에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거룩히 분별되어 주님께 드림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을 제해 버리면 거룩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 분별되는 것을 통하여 거룩케 된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간 사람만이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분별된 사람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생물이나 물질적인 것들, 예컨대 어린 양이나 성전 안의 금까지도 같은 방법으로 거룩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거룩케 되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악한 것을 제함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완전히 그분을 위해 예비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함은 분별된 것을 가리킨다. 참다운 거룩은 「여호와께」거룩인 것이다.(출 28:36). 내가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이것이 바로 거룩이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 완전히 그분의 소유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계산과 같이 확실한 것이다. 우리 일생 중에서 우리 자신을 자신의 손에서 그분의 손에 넘기는 날이 필요하다. 그 날 이후 우리는 그분께 속하고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전도사나 선교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가 된 것은 그들이 참으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 그들이 「드린것」(그틀이 말하는 헌신)은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천연적인 능력이다. 이것으로 그들은 주님의 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헌신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가? 기독교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다윗에게는 많은 용사들이 있었다. 왕이 그들에게 지시한 직책에 따라 장군 된 자도 있었고 문지기 된 자도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우리의 분깃의 일을 해야 한다. 장군이든 문지기이든 우리 스스로 택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정한 길이 있는 것이다. 곧 디모데 후서 4장 7절에서 바울이 말한 달려가야 할 길이 있다. 하나님은 다만 바울을 위하여 그가 달려갈 길을 정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을 정해 놓으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길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우리는 응당 주님께 『주여, 당신이 나를 위해 정하신 길을 알고 그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갈망을 위하여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헌신이다. 만일 우리 일생의 종착지에서 바울과 같이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 나는 일생의 종착지에 이르러 우리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길임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임의로 우리 생명을 지배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뿐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기의 기쁨을 구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나는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내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는 모든 것을 하리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 삼는것이 당신의 갈망인가? 당신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당신에게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시다』 (롬 12 : 2)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이다. 우리의 강인하고 고집센 의지는 반드시 십자가로 보내야 하고 우리 자신은 주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천을 재봉사에게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옷을 만들어 주기를 바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건축 재료를 건축자에게 주지 않았다면. 결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기를 바랄 수 없다. 같은 원칙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분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시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는 아무런 보류나 다툼이 없이 그분께 자신을 드려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롬 6 13). 종인가 노예인가 만일 우리가 아무런 보류함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가정에서나 일에서나 교회 관계에 있어서나 우리 개인의 견해에 있어서 많은 조절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것을 보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손가락은 한 가지 한 가지 그분의 것이 아닌 것들을 지적하시면서. 『이것들을 제해 버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때 당신은 원하는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분에게 순복하는 자가 지혜롭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다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분이 어떤 것을 원하실때 우리는 종종 다른 것을 원한다. 많은 일에서 우리는 우리의 평강을 잃어버릴까봐 무엇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생각할 담력을 갖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이런 문제에서 탈피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이렇게 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기란 종종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이 우리를 다루시도록 하는 것만이 복된 일인 것임을 기억하라 만일 우리가 종종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하고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않는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이것은 너무나 좋은 것이다!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이런 느낌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를 느끼게 한다. 여기에 조건이 매우 뚜렷하다. 만일 내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려 한다면. 나는 반드시 그분께 점유되었다는 느낌을가져야 한다. 내 몸에서 그분의 주권이 일단 설립되면, 나는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무엇을 할 담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내가 그분의 유일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여기서 말한 종은 사실상 노예이다. 6장 후반부에서 이 단어가 수차 언급되었다. 종과 노예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종은 다른사람을 섬길지라도 그가 섬기는 사람에게 자기의 주권을 양도하지 않은 사람이다. 만일 그가 자기 주인을 좋아하면 그를 섬길 수 있고 싫어하면 다른 주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노예는 그렇지 않다. 노예는다른 사람의 종일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주님의 노예가 될 수 있는가? 그분 편에서는 그분이 나를 사신 것으로 말미암고 내 편에서는 나 자신을 그분께 드림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셨으므로 나는 그분의 기업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분의 노예가 되려고 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그분께 기꺼이 드려야 한다. 이는 그분은 나에게 강요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에 대한 충분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는 데 있다. 그들은 쉽게 『주여, 나의 어떤 것도 당신께 드리기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이 언제나 좋아했던 이상(理想)과 강한 의지와 소중한 관계와 좋은 일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렇게 하기로 뜻을 세우지 않았다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 당신이 헌신을 엄숙한 것으로 보지 않을지라도 당신에 대해 하나님은 진지하시다는 것을 알라. 갈릴리의 소년이 주님께 떡을 드렸을 때 주님은 그 떡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그분은 그것을 떼셨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드린 것을 항상 파쇄하신다. 그분이 받으신 것들에 대해 그분은 파쇄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파쇄하신 후에 축복하시고 그것으로 사람의 필요를 만족 시키신다. 당신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후에 그분은 당신이 그분에게 드린 것을 파쇄하기 시작하신다. 이 때에 사사건건 뜻에 맞지 않은것 같고 결국 당신은 하나님의 방법을 원망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여기 머문다면 당신은 파괴된 그릇이 된다. 즉 세상에 대해 당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는 당신이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세상은 당신을 쓸 수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도 당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는 당신이 미치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에서는 이탈되고 하나님과는 다툼이 있게 된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이다. 우리는 한차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시작의 기본 행동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든지 그분을 찬미하고 받아들이며 육체와 상반된 인도에 대하여도 원망하지 않도록 매일매일 헌신해야 한다. 나는 주님께 속하므로 다시 나를 내 소유로 계산하지 않고 도리어 범사에 그분의 권리와 주권을 시인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태도이고 이 태도를 유지하는 것만이 참된 헌신이다. 나는 선교사나 전도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내 자신을 그분께 드린다. 내가 학교에 있든 사무실에 있든 혹은 주방에 있든 나는 그분이 척량해 주신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긴다. 이는 그분에게 완전히 속한 사람에게만 가장 좋은 것이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이상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느낄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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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우리가 말한 바 있듯이, 만일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계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외에 또한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갈망 안에 있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왜 앞의 절차들이 필요한지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절차는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 내적 체험의 문제를 보기 전에 먼저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목표를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로마서 첫부분의 두 단락에서 각각 한 마디를 빼내어 그내용을 총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롬3:23) 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롬 8:21)이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본래 영광이었다. 그러나 죄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게 하여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켰다. 우리는 죄를 생각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죄에 따른 심판과 정죄를 지옥과 연결시켜 생각한다. 사람의 관념은 항상 내가 죄를 범하면 내게 형벌이 임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분은 죄로 인하여 사람이 영광을 잃었다고 생각하신다. 범죄의 결과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의 결과는 우리에게 다시 영광을 얻을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영광. 영광, 영광이다.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심 이제 우리는 이에 관계된 부분인 8장 16절부터 18절. 29절, 30절을 먼저 보기로 하자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8:16-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 : 29-30)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로 모두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떻게 이 목적을 실현하시는가?『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그분의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를 영광을 얻은 많은 아들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에 포함된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보기고 하자. 요한복음 1장 14절은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은 그분 외에 하나님께 다른 아들이 없다는 말이다. 그분은 영원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갖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시지 않고 그를 맏아들로 세우고자 하심을 말한다. 독생자는 어떻게 해야 맏아들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의 답변은 매우 간단하다.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더 있으면 된다. 만일 당신에게 아들이 하나 밖에 없다면 그는 독생자이다. 그러나 나중에 당신이 아들 몇을 더 낳았다면 독생자는 자연히 맏아들이 되는 것이다. 창조와 구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많은 아들들을 얻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만족하시지 않는다. 얼마 전에 나는 「구원의 안전, 확신, 기쁨」이란 책의 저자인 죠지 커팅(Mr Geroger Cutting)을 만나보러 갔었다. 내가 93세의 나이든 형제의 면전으로 안내되었을 때 그는 내 손을 붙잡고서 조용하고 사려 깊은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당신은 내게 그분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 그분에게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라고 말했다. 그가 고령이었으므로 육신의 약함 때문에 다른 것을 말할 수는 없었고 단 한 시간 동안 그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만남이 항상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반복했던 두마디 때문이었다. 즉 『형제여, 당신은 내게 그분이 없으면 안 된다는것을 아십니까』 『당신은 그분에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탕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대개 탕자가 당한 어려움에 대해서만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탕자가 거친 곤경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 비유의 요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가 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문제는 아들이 무슨 고통을 당했는가에 있지 않고 아버지가 무엇을 잃었는가에 있다. 이 아비 된 자야말로 고통을 당한 자요 잃어버린 자이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이것은 누구의 손실인가? 당연히 손실 당한 자는 목자이다. 드라크마 하나를 잃었을 때, 누구의 손실인가? 물론 여인의 손실이다. 한 아들을 잃어버린것은 누구의 손실인가? 아버지의 손실이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이 우리에 게 보여주는 바이다. 주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분이 독생자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그의 독생자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성육신과 십자가의 전체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다. 또 이로써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안에 들어가게 하는』(히 2:10)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온전히 이루고자하는 목적도 완성될 것이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우리는 「많은 형제들」을 보고 히브리서 2장10절에서는 「많은 아들들」을 본다. 주 예수님의 측면에서 말하면 많은형제들이고 아버지 하나님의 측면에서 말하면 많은 아들들이다. 이 두용어는 성경에 근거한 용법이고 모두 성숙의 뜻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얻고자 하시는 것은 완전히 성장한 아들들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들이 곡간이나 차고(車겨)나 들에 거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분의 집에 거하여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로마서 8장 30절에서 설명하는바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이다. 아들의 명분-그의 아들의 충만한 표현-이 많은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분은 어떻게 이 목적에 이르시는가? 먼저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다. 아들들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도록 정하셨다. 그분은 하늘 전체가 영광을 얻은 아들들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구속의 목적이다. 한 알의 밀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는 어떻게 그분의 맏아들이 되실 수 있는가? 요한복음 12장 24절은 그 방법을 설명해준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그 밀알은 누구인가? 주 예수님이시다. 온 우주 안에 하나님께는 두번째 밀알이 없고 오직 하나의 밀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땅에 두시어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게 했던 유일한 밀알은 처음 밀알이 되었고그 밀알로부터 많은 밀알이 산출되었다. 그분의 신성으로 말할 때 주 예수님은 유일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러나 부활로부터 영원까지 그분은 또한 맏아들이시다. 이는 그때로부터 그분의 생명이 많은 형제들 안에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성령으로 난 우리들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1:4)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름 8: 15 16) . 주 예수님은 성육신과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아들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아버지로 하여금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게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된 하나님의 마음은 만족되셨다. 요한복음 1장과 20장은 이 방면에서 가장 귀중한 장들이다. 요한복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예수가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복음서의 끝부분은 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 17). 본래 주님은 자주 「아버지」혹은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 그분은 앞에 한 마디를 추가하여 「또한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다. 이것은 맏아들 곧 먼저 나신 자가 하신 말씀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많은 형제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이끌려졌다. 그러므로 같은 구절에서 그분은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 말한바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이다. 아담이 당면한 선택-생명과와 선악과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많은 나무를 심으셨는데 「동산 가운데」-특별히 드러난 장소-에 그분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 피조되었을 때 아담은 순진하여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다. 생각해 보라 가령 삼십 세 된 한 성인이 옳고 그름을 모르고 선악을 분별할 능력도 없다 하자! 당신은 이런 사람이 미성숙되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아담도 처음에 이러했다. 하나님이 그를 동산 가운데로 이끄셨을 때 사실상 그분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너는 이 나무 근처에 생명나무라는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두 나무는 어떤 의의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피조된 아담이 도덕성에 있어서 중성적-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룩한 것도 아닌 무죄 상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두 그루의 나무를 동산에 두사 그로 자유로이 택하게 하셨다. 그는 생명나무를 택할 수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나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먹는 것을 금지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에는 틀린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그 나무가 없다면 아담은 자신을 위하여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그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었으므로 아담이 어떤 문제에 당면할 때 그의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 안에 있는 생명은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명임을 본다. 그러므로 이 두 그루의 나무는 두 가지 큰 원칙을 상징하고 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 자신인데 이는 하나님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최고의 생명 형태이시고 생명의 근원과 목적이시다. 과실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나무는 먹을 수 없지만 과실은 먹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면에서 말하자면 그분을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 주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 과실은 나무에서 먹을 수 있고 영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내가 겸손히 말하지만, 주 예수님은 우리가 영접할 수 있는 형태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과 연합되었더라면,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끊임없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만일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천연적인 성향에 따라 자기의 인성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 방면에서 고봉에 이를 때 그는 자족한 사람이 되고 그의 안에 단독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앞에 놓인 하나의 선택이었다. 만일 그가 성령의 길을 택하고 순종의 길을 택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만일 그가 천연적인 길을 택했다면, 그는 자기를 발전시키며 단독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 밖에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그의 선택의 결과이다. 아담의 선택이 바로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택했으므로 그는 독립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사람(곧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바라는 것과 같다. )이 되었다. 그는 어떤 지혜를 구사할 줄 알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거나 멈출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지혜」(창3:6)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사망이지 생명이 아니었다.그의 선택은 사탄과의 동역과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나무를 가까이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두 종류의 생명이 아담 앞에 놓여져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룩한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하고 자족하는 사람에 속한 생명이다. 아담이 후자를 택한 것이 죄였다. 왜냐하면 그의 이런 선택은 사탄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대항하여 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인성을 개발하는 길을 택했지만-비록 그가 아주 선한 사람이 되고 심지어 그의 표준에 따라 「완전한」사람이 될지라도-결과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선택의 결과는 바로 사망이다. 이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거룩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도리어 기꺼이 원수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 되어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매여 모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거치실 필요성을 볼수 있다. 또한 우리는 참된 헌신-죄에 대하여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자기를 산 자로 여기며,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같이 자기를 그분께 드려야 함-의 필요성을 볼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천연적인 것에서 나온 자아 생명은 죄의 법 아래 복종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반드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워야만 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생명을 거절하고 자아의 생명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 안의 모든 것을 한데 묶어서 제거하지 않으실 수 없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그리고 나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에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이미 다 제거 되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는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셨다. 여전히 그분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만, 더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계셨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원문 참조). 지금 주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영적인 몸, 영광스런 몸을 갖고 계신다. 그분이 더이상 육신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지금 그분은 사람들에게 영접될 수 있으시다. 주 예수님은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7)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그의 샅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이런 사상을 악하다고 생각하여 당시에 그분을 영접하지 못했다. 이는 그분이 아직 육신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영접하는 자 .... 에게는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요 1 12. 13) 하나님은 밖에서 우리의 생명을 개선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상은 우리의 생명을 개선하는 단계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잘못된 생명을 영광 안으로 이끄실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으로 거듭난 사람 곧 새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거듭남과 의롭다 함은 병행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생명에는 각종 등급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낮은 등급에 속한 동물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 사이에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등급이나 낮은 등급에 속한 것 사이에 있는 격리하는 큰 도랑을 뛰어넘을 수 없다. 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은, 우리와 낮은 등급에 속한 동물의 생명과의 간격보다 더욱 큰 것이다. 중국에 있을 때, 어느 날 나는 침상에 누워 있는 한 기독교 지도자를 만나러 갔었다. 편리를 위하여 그를 왕 선생이라고 부르겠다(그의 진짜 성은 왕이 아니다. ). 그는 매우 학식 있는 철학 박사였다. 그의 도덕성은 중국 전역에서 존경받을 만 했다. 그가 기독교 사업에 종사한지도 수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남의 필요성을 믿지 않고 다만 사회복음만을 선창했다. 내가 이 왕선생을 보러 갔을 때, 그가 기르던 개가 그의 침상 옆에 있었다. 나는 그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격에 대해 언급한 후에. 그 개를 가리키면서 이 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바둑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어서 또 나는 그에게. 『이것이 개의 이름입니까? 성입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다만 개의 이름이오.』라고 말했다. 『개의 이름이라고 하셨지요? 그럼 내가 그 개를 왕바둑이라고 불러도 좋습니까?』 그는 매우 강하게, 『그럴 수는 없지요!』라고 답했다. 나는 『이 개가 선생님 집에서 사는데 왜 왕바둑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나는 그의 두 딸을 가리키면서 『당신의 딸들을 왕양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라고 물었다. 『그렇소!』 『그럼 나는 왜 당신의 개를 왕바둑이라고 부를 수 없나요?』 그때 그 박사는 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 뜻을 아시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는 집에서 난 자들로서 당신과 같은 성을 가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당신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신 집의 이 개가 영리하고 말도 잘 듣고 참 좋은 소중한 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가 좋은가 나쁜가에 있지 않고 한 마리의 개라는 데 있습니다. 이 개가 당신 집안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은 개가 나쁜 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한 마리의 개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원칙을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악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사람인 것에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생명의 등급이 하나님의 생명의 등급보다 낮다면 결코 하나님의 집에 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일생 전도하시는 목적은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개선하는 것이지만 이런 사람이 선하든 악하든 하나님과 결코 생명의 관계를 가질 수없습니다.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 그 날 그 박사는 이 진리를 깨닫고 마음 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아담 안에서 잃은 것보다 횔씬 뛰어나다. 아담은 자기를 개발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하고 그 등급 안에 머물렀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한 우리들은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로 대표된 하나님의 생명도 얻었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는 아담이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우리는 아담이 놓친 것을 얻는 것이다. 다 하나에서 난지라 하나님은 많은 아들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안에서 함께 후사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이런 목적에 이르시는가? 이제 히브리서 2장 10절부터 11절을 읽어보자.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여기서는 두 방면이 언급되었다. 곧 '많은 아들들'과 그들을 '구원할 주'이시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한쪽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이고 다른 한쪽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편이 하나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는데, 그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의 새 생명도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태어나셨고(마 1:20) 우리도 성령으로 태어났다(요 3 : 5. 1 : 13) .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다 하나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맏아들과 아들들은 다 한 생명의 근원에서 나왔다. 오늘날 당신이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것을 아는가?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분배하신 생명은 바로 하늘에서 그분이 소유하신 생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롬 6:23)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생명이 변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해 주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생각할 때 전체 죄의 문제가 연기같이 사라짐을 주의한 적이 있는가? 죄에게는 더이상 지위가 없다. 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들어왔다. 죄가 처리된 후, 우리는 아담의 원래의 위치로 이끌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목적-우리로 생명나무를 가까이하도록 회복하심-과 관계를 맺을 때 , 구속은 아담 안에서 우리가 소유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었다. 구속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
제 8장 성령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바로 우리 몸에서의 그분의 모든 다루심의 동기이자 해석이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각종 단계들을 보기 전에 다시 한 번 주제를 떠나서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대해 말해보자. 이것은 우리의 모든 체험에서 우리의 생명과 봉사를 효과 있게 하는 데 결여 되어서는 안 될 힘인것 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두 단락의 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한 곳은 5장 l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이다. 다른 곳은 8절, 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이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엉뚱하거나 임의로 주지 않으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확실한 기초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 1:3)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체험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취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취하는 근거를 알아야만 한다.
성령의 은혜에 관해서는 두 방면에서 보는 것이 가장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이는 곧 성령의 옮겨부음과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지금 우리의 목적은 어떤 기초에서 성령의 이중적인 은사가 우리 것이 되는가를 보는 데 있다. 나는 그분의 역사를 외적인 표현과 내적인 표현으로 나누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계속 전진할 때 우리는 이런 구분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를 비교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훨씬 귀하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밖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다 좋은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권리가 너무 풍성해서 그런지 우리는 쉽게 이것들을 경시한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우리처럼 복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부어짐의 은혜를 우리보다 더욱 감상하였다. 그들 당시에 이 은혜는 택함받은 소수에게만 주어졌었다. 주로 제사장과 사사와 왕들과 선지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모든 자녀틀은 다 이런 은사를 얻을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취할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벗 모세와 사랑받은 다윗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와 같이 성령의 옮겨부음을 입을 수 있다니! 성령의 옮겨부음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택한받은 자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은혜에 대한 가치를 보고 그것이 갈급히 필요하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성령의 옮겨부음을 얻을 수 있고. 봉사할 능력을 갖기 위해 어떻게 내 자신을 영적인 은사로 장비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내게 성령을 주시는가?』
성령의 옮겨부음
먼저 우리는 사도행전 2장 32절부터 36절을 읽어보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32)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34)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35)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하셨느니라(36)』
34절과 35절은 시편 110편을 인용한 삽입된 말씀이기 때문에 잠시 한쪽에 제쳐 놓고 먼저 33절과 36절을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먼저 인용한 두 구절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한 말에 대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33절에서 베드로는 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으로 높여지신 것에 대해 말하는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분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으셨다. 』 이어서 무엇을 말하는가? 오순절이 임하였다! 그분이 높여진 결과는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이다. 그러면 성령을 먼저 주 예수님에게 주사 그분으로 하여금 성령을 그분의 백성에게 부어주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분이 하늘로 높이 올려지심에 근거한다. 이 구절 말씀은 주 예수님이 높이 올려지셨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케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다. 성령의 옮겨부으심은 당신과 나의 공로와 무관하고 오직 주 예수님의 공로와 관계된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있지 않고 그분이 무엇인가에 있다. 그분이 영화롭게 되셨기 때문에 성령이 부어진 것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기에 내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었고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내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으로 높이 올려지셨기에 내가 성령의 옮겨부으심을 얻었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한것이다. 죄 사함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에 근거한다. 거듭남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의 부활로 인한 것이다. 성령을 주심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높이 올려지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당신과 내게 부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제 36절을 보기로 하자. 이 구절 안에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런즉」이다. 이 단어는 어떻게 사용되는가? 이 단어는 이 구절의 문장의 시작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미 한 말 뒤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이미 언급된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항상 암시한다. 이 「그런즉」 앞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엇과 관계 있는가? 이것들이 34, 35절과는 무관하고 33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매우 현저한 사실이다. 베드로는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에 대해 말했었다.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또 그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 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너희 보고 듣는 성령을 너희에게 부어주신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이미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데 있다.』. 성령이 이 땅 위에 부어진 것은 하늘에서 발생한 일-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높여지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요셉이라는 청년은 그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자였다. 야곱은 어느 날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로 인해 수년 동안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요셉은 무덤에 있지 않고 영광과 권세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야곱은 그 아들의 죽음 때문에 수년 동안 애통해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요셉이 아직 살아 있고 애굽에서 고위에 있다는 것을 누가 그에게 알려주었다. 처음에 야곱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좋은 소식이 그에게는 사실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해준, 요셉이 높여졌다는 말은 참이었다. 그는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야곱이 나가서 요셉이 애굽으로부터 보내어준 수레를 보고서야 그 말을 믿었다.
여기서 수레는 무엇을 대표하는가? 물론 성령을 대표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 안으로 들어갔다는 증거로서 보내심을 받았을뿐 아니라 더우기 우리를 영광 안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거의 이천 년전 행악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순교로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더욱 지금 영광 안에와 아버지 우편에 계시다는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그분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심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아무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것을 아는 것은 그분의 영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예수는 주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나사렛 사람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주 예수님의 높이 올려지심은 성령이 강림하신 것의 근거이다. 주님께서 이미 영광을 얻으셨는데 당신은 아직 성령을 얻지 못했다면, 이것은 가능한 일인가? 당신이 죄 사함을 얻은 것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당신의 기도가 간절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신이 한두 번 성경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인가? 당신이 자주 집회에 참석하기 때문인가? 당신의 공로 때문인가? 아니다! 천만 번 아니다! 그럼 당신은 무엇에 근거하여 죄사함을 받았는가? 히브리서 9장 22절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사함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피 흘림이다. 보혈이 흘려졌으므로 당신의 죄는 이미 사해진 것이다.
이미 부어진 성령
우리가 성령의 부어주심과 죄 사함을 얻는 것은 원칙상 완전히 동일하다. 주님이 이미 못 박히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주님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그분의 피를 흘리셨는데 당신의 죄가 아직 사함받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는데 당신이 아직 성령을 얻지 못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에 동의하나 자신은 이런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내게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떻게 자만자족하여 내가 모든것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객관적인 사실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주관적인 체험도 필요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사실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결코 체험을 가질 수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실이 우리의 체험의 근거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칭의의 문제로 돌아가자. 당신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는가? 당신이 의롭게 된 것은 당신이 무엇을 행한 것에 있지않고 주님이 이미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데 있다. 당신이 성령을 얻는 것은 의롭게 되는 것과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다만 주님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써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체험이 결여되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침례는 높이 올려지신 주님이 교회에게 주신 은사라는 영원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도록 그분께 구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이점을 보았다면 우리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멈추고 찬미로 간구를 대신할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 사람을 위하여 주님이 이루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셨기 때문이다. 같은 법칙에서,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이루신 것을 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면 우리는 더이상 성령의 침례를 얻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고 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사를 보면 믿음이 우리 마음 속에서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믿을 때 우리에게 체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얼마 전에는 복음을 매우 반대하다가 후에 구원을 받은 한 청년이있었다. 그가 구원받은지 다섯 주도 안 되었을 때 내게 일련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상해에 왔었다. 마지막 날 내가 말한 것은 성령의 옮겨부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여 내게 참으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이미 영화롭게 하셨는데 왜 지금 곧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그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로잡아 주었다. 『주여. 완전히 내가 잘못했습니다.주 예수여. 나와 당신은 종일토록 동반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두 가지 곧 당신의 영광 얻으심과 당신의 성령 부어주심을 이루셨습니다. 당신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으므로. 만일 내가 아직 성령을 얻지 못했다면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고 나도 성령을 이미 얻었습니다. 』 그날부터 그는 성령의 능력이 그의 몸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감지하였다.
비결도 역시 믿음이다.
우리의 죄사함과 성령을 얻는 것도 모두 믿음에 달렸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계신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 죄가 사함받은 것을 알게 되고, 주 예수님이 보좌 위에 계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을 얻는 근거는 우리의 기도나 금식이나 기다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우심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몇몇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기다림을 강조하고 「기다리는 집회」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게 된다.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어떠함에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에 근거한다. 성령의 부어지심은 우리의 선량함과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량함과 위대하심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그분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구원받고자 하는 뜻을 표명한 한 불신자가 있다 하자. 당신이 그에게 구원의 길을 설명하고 그와 기도할 때, 그가 『주 예수여, 당신이 나를 위해 이미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능히 내 모든 죄를 씻어내실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당신이 나를 용서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라고 기도했다 하자 당신은 이런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믿을 수있는가? 그렇지 않다. 언제 그가 이미 거듭난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가? 그가, 『주여, 당신이 장래 내 죄를 용서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할 때가 아니라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이 이미 내 죄를사하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내 죄는 이미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라고 말할 때이다. 사람의 기도가 간구에서 찬미로 바뀔 때, 비로소 그가 구원받았음을 믿을 수 있다. 이 때 그는 더이상 하나님께 그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어린양의 피가 이미 흘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그를 사하셨다는 것을 찬미할 것이다.
같은 원칙에서, 당신은 성령을 얻기 위해 수년 동안 간구하고 기다렸지만 아직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성령을 부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멈추고 도리어 믿는 마음으로 그분을 찬미하면서 주 예수님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이미 부어졌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을 발견할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자! 성령을 얻기 위해 애쓰거나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도 없다. 예수님은 장차 주가 되실분이 아니라 이미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고, 지금 그분이 주이심을 기억하라.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장래 성령 얻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믿음의 문제이다. 또 믿음은 계시로부터 온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이 이미 영광을 얻으신고로 성령님이 이미 부어졌다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의 마음 속의 간구는 자연히 찬미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신령한 복을 확실한 기초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는 우리 편에서 우리가 영접하기 위한 어떤 조건들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경 말씀에는 부어지신 성령을 받는 조건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2장 38절, 39절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 구절은 네 가지를 말한다. 즉 회개와 침례와 죄 사함과 성령이다. 앞의 두 가지는 조건이고 나중 두 가지는 은혜이다. 만일 우리가 죄 사함을 얻으려 한다면 어떤 조건을 수행해야 하는가?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그 조건은 두 가지 곧 회개와 침례이다.
첫번째 조건인 회개는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전에는 범죄가 일종의 즐거운 일이었으나 이제 이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전에 나는 세상을 매력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 좋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불쌍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내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이다. 전에는 가장 즐겁게여겨졌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천하게 여겨지고, 전에는 아무 가치 없게 여겨졌던 일들이 이제는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서 회개이다. 만일 사람의 생각에 이런 변화가 있다면 그의 생명에는 참된 변화가 있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침례이다. 침례는 내적인 믿음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만일 내가 마음 속으로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으며 또 함께 부활한 것을 믿었다면, 나는 침례를 주도록 요청할 것이다. 이로써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믿은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함의 조건은 두 가지, 즉 회개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당신은 회개하였는가?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주와 연합하여 하나 된 것을 간증하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죄 사함과 성령의 은사를 얻었는가? 당신은, 첫번째 은혜만 얻고 두번째 것을 얻지 못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친구여, 만일 당신이 두 가지 조건을 이행했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두 가지 은혜를 주신다! 왜 당신은 한 가지만 원하는가? 두번째 것에 대하여 당신은어떤가?
가령 내가 한 서점에 들어가서 가격이 십 실링인 상 하권으로 되어있는 책을 택했다 하자. 내가 돈을 지불하고 서점에서 나올 때 부주의로 그 중 한 권을 서점 계산대에 두고 집에 와서야 그것을 발견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즉시 서점으로 돌아가서 잊어 버리고 가져오지 않은 그 책을 가져올 것이다. 그 책값을 다시 지불하려는 생각은 합당치 않다. 나는 서점 주인에게 설명하고 두 권의 책값을 드렸으니 나머지 한 권을 달라고만 하면 된다. 나는 돈을 지불할 필요 없이 즐겁게 그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만일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신은 바로 이런 상황 하에 있다. 만일 당신이 이미 조건을 수행했다면, 당신은 마땅히 두 가지 선물을 다 얻어야지 한 가지만 얻을 수 없다. 당신이 한 가지를 이미 얻었다면 왜 즉시 두번째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은가 주님에게 빨리 이렇게 말하라. 『주여, 저는 당신이 죄 사함과 성령을 주시는 조건을 수행하였으나 내 어리석음 때문에 전자만 얻었을 뿐입니다. 이제 돌이켜서 당신에게 성령의 은사를 요청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
체험상의 차이
혹 당신은 『성령이 내 몸에 강림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알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것을 안다. 성경은 오순절날 제자들 각 사람의 느낌과 정서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당시 그들의 느낌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느낌과 행동에서 그들이 다소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을 본 사람들이,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 위에 강림하실 때, 그들 몸에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광경이 있는 법이다. 비록 그것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와 느낌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 느낌에 따라 불가사의한 초월의 능력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옮겨부음에 어떤 특별한 밖의 표현이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없고 규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의 옮겨부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한 것을 안다는 것이다.
오순절날 당시 성령이 제자들 위에 임했을 때 그들의 행동은 매우 특별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다. 그럼 그 날 베드로가 예언을 하였는가? 우리는 그날 베드로가 요엘이 말한 예언을 하였다고 단정할수 없다. 그 백 이십 명이 예언을 하거나 이상을 보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몽을 꾸었는가? 그들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는가? 그들은 생각이 매우 청명하지 않았는가? 베드로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말씀을 인용했단 말인가? 대체 무슨 뜻인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말(을 2:28-29)은 예언을 말함과 환상을 보는 것과 꿈 꾸는 것이 성령의 옮겨부어짐에 따라 오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증거들은 오순절날에 분명 보이지 않았었다. 다른 면에서 요엘은 성령의 옳겨부음을 받을 때의 광경을 예언함에 있어서 『큰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니』, 또는 『불 같은 혀가 나타나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작은 다락방에서 발생했다. 당신은 그들이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말한 요엘의 말을 찾아낼 수있는가』 그럼에도 오순절날 제자들은 방언을 말하였다. 그럼 베드로가 요엘의 말을 인용한 것은 무슨 뜻에서였는가? 생각해보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오순절날의 체험이 바로 요엘이 말한 성령의 옮겨부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요엘이 말한 그 증거들은 오순절날 한 가지도 출현하지 않았다! 요엘서에서 말한 것을 제자들은 소유하지 않았었다. 제자들이 소유한 것은 요엘서에 언급되지 않았다. 베드로가 인용한 성경은 그의 논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하는 것 같다. 이 비밀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그날 베드로가 성령의 통제 하에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의 감동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가 임의로 한 말씀이나 합당치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으며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베드로가. 『너희의 보고 들은 바는 선지자 요엘의 말씀이 응한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의하라. 그는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행 2:16)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일을 체험한 것일 뿐이다. 「이는 곧」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은 예언한 바와 동일한 일이라』는 뜻이다. 만일 이것이 성취에 관한 일이라면 모든 체험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고, 예언도, 환상도, 꿈꾸는 것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는 곧」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일을 중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일이 동일한 부류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령은 베드로를 통하여 체험상의 차이점을 강하게 설명하였다. 밖의 표현들은 다양하고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 표현들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지라도 성령은 오직 한 분이고 그분은 주이시다(고전 12 : 4-6) .
토레이(R. A. Torrey)가 여러 해 동안 목회를 한 후 성령이 그의 몸에 강림하였는데, 그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가 한 말로 설명해 보도록 하자.
『나는 내가 무릎 꿇고 기도한 그 장소를 정확히 기억한다.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나는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말씀하신 것임) 「이것은 네 것이다. 이제 가서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일서 5장 14절부터 15절에서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성경에 대하여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무지함을 긍흘히 여기사 내 마음에 직접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가서 전파하였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새로운 사역자가 되었다. ‥‥ 이 체험 후(얼마 후인지는 모름) 어느 날 내가 집안에 앉아 있을 때 ‥‥ 갑자기 나는 내 자신이 다음과 같이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큰 소리로 외쳐본 적이 없다. 내 성품상 큰 소리 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 나는 웨슬레 교인들처럼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나는 멈출수 없었다.‥‥그러나 이 때 내가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할때 성령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토레이의 「성령은 누구이시며 그분은 무엇을 하시는가?J 198-199쪽) .
토레이에게 성령이 옮겨부어졌을 때 밖에 나타난 것은 요엘 혹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비록 그것들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동일한 것이다.
성령이 무디(D.L. Moody)에게 임할 때 그는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했는가?
『나는 자주 하나님께 그분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어느 날 뉴욕시에서-아, 그것은 얼마나 기억할 만한 날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또 나는 그것에 대해 언급한적도 별로 없다. 이는 그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십 사 년후에야 말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에게 계시하여 나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손을 멈추시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로 나는 여전히 전도하러 다녔다 내가 전파한 것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 명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다. 당신이 온 세상을 내게 준다 해도 나는 복된 체험이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이 복된 체험과 비교할 때 온 세상은 저울 위의 작은 먼지같을 뿐이다. 』(무디의 아들 W.R. Moody가 지은 「무디의 생애」 149쪽)
무디가 체험할 때 밖으로 나타난 것은 요엘이 말한 것이나 베드로가 말한 것이나 토레이가 말한 것과 다 다르다. 그러나 누가 무디의 체험이 오순절날 제자들이 가진 체험임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들의 체험에서 밖으로 나타난 것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동일하다.
성령의 능력이 위대한 피니(Ch』rles Finney)에게 임했을 때 그의체험은 어떠 했는가?
『성령 능력의 침례를 받기 전에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마음 속에서도 내가 이런 일을 체험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나는 누구에게서 이 일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성령이 내 몸에 임할 때 그분은 영광으로 내 몸을 투시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부어진 기묘한 사랑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인하여 큰 소리로 웃었다. 』 (「피니의 자서전」 제2장) 피니의 체험은 오순절의 복사판이 아니요 토레이가 체험한 것의 복사판도 아니다. 그리고 무디가 체험한 것의 복사판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체험이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어질 때 그들의 체험은 왕왕 크게 다르다. 어떤 사람은 환상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남을 주께로 인도할 때 새로운 해방을 얻고,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큰 능력을 얻는다. 또 어떤이들은 하늘의 기쁨과 넘치는 찬미로 충만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광경이든 그들이 체험한 것들은 바로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이다. 모든 새로운 체험이다. 그리스도의 높이 올리우심과 관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이것」이 「그것」의 증거라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다루시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우리 자신 혹은 다른 사람 위에 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물샐틈 없이 격리된 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은 마땅히 성령 강림의 증거로서(방언과 같은) 특별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사람과 어떠한 표현이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사하시고 그분의 역사 안에서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증거를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양보해 드려야만 한다. 그분은 주이시다. 우리에게는 그분을 대신하여 무엇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예수께서 이미 보좌 위에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또한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음을 인해 그분을 찬미하자. 우리가 단순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사실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이는 곧‥‥』임을 확실히 알고 담대히 선포하게될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역사의 두번째 방면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하겠다. 로마서 8장에 이를 때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할 것이다. 이는 로마서 8장의 주제가 성령의 내주하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8장 9절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 11절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 등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령의 옮겨부음과 같이 만일 우리가 체험 가운데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곧 그분이 하늘 보좌로 높이 올리우심-을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 몸에 능력으로 임한 것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곧 우리의 생명 안에서 그분이 능력 있는 통치자가 되심-을 볼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능력이 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이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의 내주하심의 계시를 그들의 구원으로 삼았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선입감을 품고 있었고 성령이 옮겨부어질 때 보이는바 징조를 주의하고 방언과 기적을 높였지만 그들의 체험 속에는 모순이 가득하고 결국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 그들이 성령을 얻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그들은 성숙하지 않은 갓난아이 같았다. 하나님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치료책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대한 치료책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말했다. 에베소 성도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무언가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엡 1:18). 거룩한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의 필요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필요이기도 하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 마음 눈이 밝아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리스도도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이론이나 교훈이 아니라 복된 실제인 것이다. 혹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위격이 있는 성령임을 아는가?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 임을 아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 영향력-의심할 바 없이 사람으로 선을 향하게 하는 영향력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양심이 성령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악을 행할 때 성령도 그들을 질책하고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문제는그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의 임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안에 계신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로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영적이지 못함에 대한 치료책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누가 그들 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한 것이다.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가?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볼수 있기를! 내 안에 거하시는 분은 다만 어떤 영향력이 아니라 위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다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뻐서 큰 소리로 외칠 것만 같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인격적인 성령임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이것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의 말이 없다. 나는 다만 반복하여, 『그분은 인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격이 있는 분이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 친구여,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인격이 있는 분임을 백 번이라도반복하여 말하겠다. 나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이 질그릇 안에 비할 데 없는 보배인 영광의 하나님을 담았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이 열려서 그들 안에 감추인 보배가 이렇게 놀랍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 안에 있는 풍성한 자원이 당신이 당한 어떤 환경의 필요도 채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에게 당신이 거주하는 도시를 이동시킬 만한 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에게 이 우주를 흔들만한 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오, 내가 가장 경건한 말로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남을 얻은 당신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 안에 담은 보배의 위대함을 안다면, 그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호주머니 속에 십실링밖에 없다면 길거리를 다닐 때 당신의 몸은 매우 가벼울 것이다. 당신은 가볍게 말하면서 당신의 지팡이를 휘두를 것이다. 당신이 부주의하여 돈을 잃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이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몸에 천 파운드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전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기뻐도 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발걸음을 늦추고 손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보화를 만져볼 것이다. 그리고는 신사답고도 유쾌한 심정으로 길을 걸어갈 것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營) 안에는 수천 개의 장막이 있었다. 그 중 다른 모든 장막과 다른 한 장막이 있었다. 보통 장막 안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혹 음식을 먹거나 금식하거나, 일하거나 쉬거나, 기뻐하거나 엄숙하거나, 소리지르거나 조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장막에 대하여는 공경하고 경외해야만 했다. 보통 장막 안에서는 마음대로 출입하고 원하는 대로 말하며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장막에 가까이할 때에는 조용히 걸어야 했다. 그 앞에 서 있을 때에는 장중해지고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만지고서도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만일 사람이나 생축이 그것을 만진다면 정녕 죽게 된다. 왜 이 장막은 이렇게 특별한가?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었다. 장막 자체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 장막에 사용된 자료도 보통 것과 같았다. 그러나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그 장막을 그분의 거처로 택하셨다.
당신은 주님을 믿을 때 당신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곳을 그분의 성전 삼으셨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돌로 만든 성전 안에 거하셨다. 오늘 그분은 살아 있는 믿는이들로 건축된 성전 안에 거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참으로 보았다면, 우리의 일생은 얼마나 경건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 때, 모든 경솔함과 얕음과 자만은 다 종식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성령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가? 당신은 성경이나 하나님께 속한 많은 선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하나님 자신을 모시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참으로 알아도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경건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건함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이 인격을 가진 성령이 임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령은 그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는 생활을 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실패의 생활을 하는가? 그들의 차이점은 성령의 임재여부에 있지 않고(이는 성령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 어떤 사람은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데 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이 사실에 대해 참된 계시를 얻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주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
이제 이 두 구절은 우리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이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시키는 데 이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인 것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에 헌신이 계시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과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성령이 있고 없는 데 있지 않고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 데 있다. 결국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 생명 안에 있는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주로 삼는다.
계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첫 걸음이고 헌신은 두번째 걸음이다. 우리의 일생 중에 우리가 우리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절대적인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는 날이 있어야 한다. 이런 날은 우리가 구원받은 날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우리의 헌신의 진실성을 시험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안 하시든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무 보류함 없이-우리 자신,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재산. 사업 우리의 시간을 다 주님께 맡기는 날이 필요하다. 그 날 이후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어떠함은 다 그분의 것이 되고 완전히 그분이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 그 날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다만 청지기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 안에서 확실한 사실이 되지 않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효과적인 참된 역사를 하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그분께 완전히 드려서 그분으로 하여금 다스리시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효과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이끄실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그분으로 우리 안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갖게 하지 않아도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는 있겠지만. 그분은 결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게 된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하여 사는가? 이 질문은 너무 광범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실제적인 것을 묻겠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그것을 당신은 보류하지는 않는가? 당신은 하나님과 다투는 점이 없는가? 만일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고 성령에게 충분한 주권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은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이상 주실 수 없다.
지금 이미 주님께로 간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편리를 위해 폴이라고 부르겠다. 어려서부터 그는 폴 박사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는 대학에 들어가 석사 학위를 얻고 나중에는 박사 학위도 취득할 것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즐거운 그 날이 임하여 모든 사람이 그를 폴 박사라 칭하기를 기다렸다. 그 후 주님이 그를 구원하셨고 또한 그를 보내셨다. 얼마 후에 그는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 때 그는 이미 석사 학위를 얻었고 박사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학업에 진보가 있었고 목사가 되었을지라도 그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이었으나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었다. 그의 안에는 성령이 있었지만 아직 그는 성령의 능력 혹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였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복음 전하는 자와 교회 목사로서 믿는이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고 알려주나 내 자신은 진심으로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지만 내 자신은 아직도 기도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지만 내 생활은 거룩하지 않다. 나는 그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겉으로는 세상을 피하고 있으나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 그는 이로 인해 근심이 생겨서 주님께 그의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는 수개월 동안 기도하였지만 응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금식하면서 그의 생활 속에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지적해 달라고 주님께 구하였다. 매우 빨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다. 『나는 네가 나의 성령의 능력을 알기 원한다. 그러나 네 마음은 내가 원치 않는 것에 있다. 너는 모든 것을 다 내게 주었지만, 한 가지 스스로 보류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네 박사 학위이다. 』 누가 우리를 폴씨라고 하든 폴 박사라고 하든 우리는 아마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 칭호는 그의 생명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느 날 박사가 될 꿈을 꾸었다. 청년기 전체를 통해 그는 이것을 위하여 온갖 힘을 쏟았다. 이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거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짧은 이 개월만 더 지나면 그는 박사가 될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내가 철학 박사가 되는 것이 내게 무슨 해가 됩니까? 폴 박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폴씨로 복음전하는 것보다 당신의 이름을 더욱 영화롭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바꾸시지 않았다. 폴씨의 충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그가 이것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는 동일한 응답을 얻었다. 그는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께 조건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로 박사 학위를 얻게 하기만 하면 어느 곳에도 가고 어떤 일도 다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뜻을 바꾸지 않으셨다. 그러는 동안 폴은 점점 더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기말시험 이틀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폴은 다음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연구해보았으나 그는 전할 메시지를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그는 일생의 포부를 실현할 시점에 당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박사 학위에서 오는 영향력과 그의 생명에 영향을 줄 하나님의 능력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바로 그날 저녁에 그는 굴복하였다. 무릎을 꿇고서 그는 주님께,『주여, '내 일생토록 평범한 폴로 족합니다. 그러나 내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능력을 알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그는 일어나서 월요일 시험에 응하지 못하겠다는 사유서를 써서 시험관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으로 잠들었다. 그는 별특별한 체험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그는 참석한 회중에게, 육년 이래 처음으로 제목 없이 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그들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하나님은 과거에 준비해서 전한 메시지보다 그 날 그의 간증을 더욱 축복하셨다.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를 축복하셨고 그를 얻으셨다. 그날 이후로 그는 세상과의 분별을 더이상 밖의 사물로부터만이 아닌 더 깊은 내적인 실재로서 알게 되었다. 이후로 매일의 생활에서 그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분 사이의 모든 다툼을 해결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폴 선생에게 있어서 다투는 문제는 그의 박사 학위이나 우리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아마도 완전히 다를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절대적으로 항복하는 관건은 항상 어느 특정한 일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이 그것을 얻으려고 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얻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한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쓴 자서전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즉 『내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나의 국가를 위하여는 모든 것을 원한다. 』 만일 기꺼이 자기 나라로 하여금 그의 모든 것을 얻게 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단 말인가? 『주여, 내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원치 않고 당신을 위하여는 어떤 것도 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 원하고 당신의 뜻 외에는 어떤 것도 원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노예의 위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 몸에서 주인이 되실 수 없다. 그분은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도록 우리를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항복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당신은 그분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가?
나에게는 폴 선생과 같이 주님과 다투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주님을 믿기 전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구원받은 후 그는 즉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주님 앞으로 이끌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하여 그녀는 아무런 취미가 없었다. 주님은 그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회피하면서 계속 주님을 섬겼고 주님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러 다녔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성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 느낌은 그로 흑암의 나날에 들어서게 하였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할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을 구했지만 주님은 그의 간구를 계속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같았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다른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전한 것은 시편 73편 25절 말씀이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어느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한 자매가 똑같이 시편 73편 25절 말씀을 읽었다. 이 자매는 그가 좀 전에 이 구절에 대해 설교한 것을 몰랐다. 성경을 다 읽고 나서 그녀는 이어서, 우리가 참으로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이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마음 속으로 하늘이나 땅 위에 주님 외에 달리 사모할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이로써 그는 그의 모든 일이 그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할 수 있느냐 없느 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그에게는 너무 심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핑계로, 『주여, 만일 내가 그 여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신다면 티벳이라도 가서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티벳으로 가는 것을 관심하시지 않고 오직 그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관심하시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핑계를 대어도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을 조금도 바꾸시게 할 수 없는 듯했다. 이런 다툼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다시 성령의 충만을 위해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은 여전히 한 가지 일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그 날 주님은 승리하셨고 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주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이제 저는 마음 속으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날 그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갖게 되었다.
사함을 받은 죄인과 그냥 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그리스도인과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를 확실한 위치로 이끌어주시기를!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완전히 순복하기를 원하고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그분께 구할 때, 우리는 특별한 느낌 혹은 초자연적인 표시를 바랄 필요 없이 다만 단순히 그분을 앙망하고 찬미하면 일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분께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분의 전을 충만케 한 것이다.『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제 9장 로마서 7장의 의미와 가치
이제 로마서로 돌아오자. 6장 끝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련된 제목을 다루기 위해 잠시 멈춘 적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기와 목표인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공급하는 성령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7장을 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 장을 불필요한 장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옛 창조 전체가 이미 십자가에 의해 제해졌고 또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보았다면 로마서 7장은 불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진정 이것을 '알고' 또 이 일에 근거하여 이것을 '여기며' 이것에 기초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우리에게는 로마서 7장이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이 장을 로마서 5장과 6장 사이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6장에 이를 때 모든 것이 완전하고 평탄케 되었는데 어찌 또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실패의 신음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찌 용두사미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에서 말한 것은 거듭나기 전 바울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장에서 그가 묘사하는 것 중 어떤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의 체험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 장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로마서 6장이 다루는 문제가 죄를 향한 자유함인 반면에 7장은 율법을 향한 자유함을 다룬다는 것을 안다. 6장에서 바울은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가를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을 말함으로 결론짓는다. 이제 7장은 다만 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부족하고 또한 어떻게 율법에서 벗어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아직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죄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죄로부터의 해방과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전자의 가르침만 알면 되지 왜 또 후자의 가르침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되어야 할 필요성을 알려면 반드시 율법과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육체와 사람의 연약함
로마서 7장은 우리에게 새로운 공과를 가르쳐 준다. 바울은 내가 "육체에 속하고" (롬7:5), 또 "나는 육신에 속하였고" (14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18절) 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의 문제를 훨씬 능가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처리하는 것은 각양의 죄가 아니라 육체에 속한 사람이다. 후자는 전자를 포함하나 전자보다 진보적이다.
이는 후자가 육신의 범위 안에서 우리가 여전히 무능한 사람인 것과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8)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자 여기에는 율법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잠시 뒤로 물러나서 많은 사람의 체험을 말해 보기로 하자. 어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죄에 매여 있다. 이것은 그가 항상 죄의 권세 아래 생활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죄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거듭하여 그 죄들을 범하게 한다는 뜻이다. 어느 날, 그는 주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씻을 뿐 아니라 그분이 죽으실 때 죄인인 우리까지도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은 우리 죄만 처리 하지 않고 우리 자신도 처리하였다는 완전한 복음을 듣고서 눈이 열려 그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게 된다. 이 계시를 따라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자신을 주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로 여기는 것이고 둘째는 그에게 있는 주님의 주권을 인식함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 같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그가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찬미로 가득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으며 내 자신을 영원히 그분께 드렸다. 그가 나를 위하여 이렇게 많은 일을 행하셨으므로 나도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겠다. 나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분의 뜻을 행해야겠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헌신한 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그분께 순복하려고 결심한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본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때때로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뜻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시도해 볼 때에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내가 정말 알았는가? 그렇다! 내가 참으로 여겼는가? 그렇다! 내가 확실하게 내 자신을 그분께 드렸는가? 그렇다! 내가 내 헌신을 다시 회수하지는 않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상태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려고 할 때마다 실패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그가 얻은 결론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갈망과 능력을 그분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시인하고 다음에는 불순종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기도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는 또 이미 실패한 자가 된다. 그는 승리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실패했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에게, "아마도 나의 최종 결정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에는 절대적이고 확고한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의지의 힘을 다하여 행한다. 그러나 결국 더 심한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시 바울의 말을 되풀이하게 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8-19) 그는 절망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율법의 용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돌연히 로마서 7장에의 체험에 들어서고는 그들에게 왜 그런 체험이 필요했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로마서 6장의 체험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로마서 6장을 깨닫고서 이후로 다시는 실패의 문제에 당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서 7장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크게 놀란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로마서 6장에서 말한 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것이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6장은 오직 한 가지 즉, 그 죽음에 대한 설명과 그 죽음이 가져다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로마서 7장의 진리를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6장 14절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문제는 우리가 아직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심을 의미하는 반면에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과 공의를 요구하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만일 율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이행하라고 하시는 것이라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그분이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고 그분이 요구하신 것들을 친히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하라고 요구하신다는 말이고,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은혜 안에서 그분이 하신다는 말이다. 나 (여기의 '나'는 7장 14절의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의 문제는 바로 육신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데 있다. 당신이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마다 당신은 자신을 율법 아래 두는 것이다. 그 결과로 당신은 로마서 7장의 체험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로마서 7장의 체험을 갖게 한 장본인이 율법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바울은 "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7:12) 라고 말한다. 율법 자체는 틀린 것이 없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율법의 요구는 의로우나 율법의 요구를 받는 그 사람이 의롭지 못하다. 문제는 율법의 요구가 부당한데 있지 않고 내가 그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데 있다. 이것은 마치 정부가 나에게 백 파운드의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나 내게 세금 낼 돈이 십 실링밖에 없다면 잘못이 전부 나에게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이미 죄에게 팔린 사람이다(7:14). 죄가 내 몸에서 주권을 갖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때 나는 아주 선한 사람과 같다. 그러나 당신이 무엇이가를 요구할 때 나의 죄는 드러나게 된다. 만일 손발이 둔한 어떤 종이 있다 하자. 그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손발이 둔한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그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 일어나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라." 고 말한다면, 즉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의자를 넘어뜨리고 몇 걸음을 더 걸을 때 의자 다리에 걸려 넘어진다. 귀한 그릇과 접시들을 꺼낼 때 몇 개를 깨뜨린다. 만일 당신이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의 손발이 둔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요구할 때 그의 둔함이 즉시 사람에게 발견된다. 요구는 옳지만 문제는 그 사람에게 있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을 때에나 일을 할 때에나 그는 똑 같이 손발이 둔한 사람이다. 그가 움직이든 안 움직이든 본질상 그는 언제나 손발이 둔한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에게 무엇을 하도록 분부할 때 비로소 그의 둔한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다 좋다. 그러나 일단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실 때 우리는 대대적으로 우리 죄를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의 약함을 드러낸다. 만일 당신이 내게 가만히 앉아있고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면, 난 아주 좋은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하라고 하면 나는 반드시 그 일을 망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두 번째 일을 맡기면 나는 또 일을 망치게 된다. 거룩한 율법을 죄인에게 적용할 때 그의 죄는 완전히 표현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 줄을 아신다. 그분은 머리부터 끝까지 내가 죄가 충만하다는 것을 아시고 내가 약함의 화신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나 문제는 내 자신이 이 점을 모르는 데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그러므로 나도 죄인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구제 불능의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극도로 약하고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는 데 이르도록 우리를 이끄셔야만 한다. 비록 말은 우리가 이렇게 하지만 우리들이 이것을 완전히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구제 불능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언가 하시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가를 모른다. 바울은 실로 이런 경지에 이끌렸었다. 로마서 7장 7절에서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말해 준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의 다른 부분에 대한 그의 체험이 어떠했든지 간에 열 번째 계명은 바로 "… 탐내지 말라"이다. 이것은 그의 죄를 드러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모든 실패와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우리의 약함이 더 드러나고 로마서 7장의 체험에 더 깊이 빠져버린다. 이런 체험은 우리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약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 지속 된다. 하나님은 벌써부터 이것을 아셨지만 우리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통스런 체험을 주지 않으실 수 없다. 우리의 약함은 우리가 더 이상 다툴 것이 없을 정도로 확증될 필요가 있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지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바로 우리로 범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다. 우리가 이렇게 약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신약에서도 믿는 이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도리어 율법의 용도가 범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롬5:20)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율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네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 7:7-9).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의 참된 성질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결국 하나님은 부득불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신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극히 타락한 죄인으로서 스스로 무엇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시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심은 우리가 준수하기를 바래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율법이 주어질 때 우리가 범할 것을 아셨다. 율법을 범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약한 존재라는 것을 믿게 된다. 이때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 안에서 율법을 이루시는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다.(갈 3:24).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는가를 보고 로마서 7장에서는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는 가를 본다. 6장은 주인과 종의 그림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두 남편과 한 아내의 그림으로 율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죄와 죄인의 관계는 바로 주인과 종의 관계인 반면에 율법과 죄인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사용하여 율법에서 벗어나는 그림을 제공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한 여인에게 두 남편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 여인은 두 사람중 한 사람의 아내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불행히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다. 그녀와 결혼한 남편은 좋은 사람임을 기억하라 문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완전히 맞지 않은 데 있다. 그는 극도로 엄격한 사람이고 호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반대로 범사를 아무렇게나 처리하는 극단에 처해 있는 사람이다. 남편은 범사에 매우 정확한 반면 아내는 경솔하게 일한다. 그는 모든 일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처리하는 반면에 그녀는 대충 해 버린다. 이런 가정이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 남편은 너무나 정확하여 자기 아내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어느 누구도 그의 흠을 말할 수 없다. 또 그는 그 여자의 남편이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할 권한이 있다. 더욱이 그의 모든 요구는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남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의 요구도 틀리지 않다. 문제는 그의 아내가 남편이 요구한 것을 이루지 못하는 데 있다. 두 사람은 전혀 함께 할 수 없다. 그들의 성품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잘안다. 그러나 이러한 남편과 함께 거할 때 그녀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일이 다 틀리게 된다! 그녀에게서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만일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 한다면 모든 면에서 좋을 것이다. 그 남자는 그녀의 본래 남편보다 엄격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녀는 그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나 단지 그의 남편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아직 살아 있을때 그녀는 "법적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된다". 남편이 죽지 않고서는 결코 합법적으로 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
이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린 것이다. 첫 남편은 율법이고 두 번째 남편은 그리스도이시다. 또 당신은 바로 그 여인이다. 율법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그 요구를 이루는 데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주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많다. 심지어 율법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마 5:21-48)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우리 안에서 친히 이루신다. 율법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요구만 하고 이행할 능력을 주지 않는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시지만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이 요구하신 것을 이행하신다. 그러므로 그 여자가 첫 남편을 떠나 다른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가 해방받기 위해서 유일하게 바랄 수 있는 것은 바로 첫 남편이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남편은 끈질기게 자기의 생명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그가 죽는 것에 대해 호리라도 소망을 가질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율법은 영원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일 율법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나의 첫 남편이 죽기를 거절한다면 내가 어떻게 두 번째 남편과 결혼할 수 있는가? 오직 방법은 하나이다. 즉 그가 죽기를 원치 않는다면 내가 죽으면 된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혼인 관계는 끊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로마서 7장이 이 단락에서 중요한 점은 3절에서 4절로 바뀌는 것이다. 1절부터 3절까지는 마땅히 남편이 죽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4절은 사실상 죽은 쪽은 여인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율법이 죽지 않고 내가 죽은 것이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율법에서 벗어 났다. 율법은 영원히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는 영원까지 존재한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한, 나는 반드시 그 요구들에 응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죽었다면 율법은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 율법은 무덤을 넘어서 나를 따라올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원칙상 죄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내가 죽었어도 나의 옛 주인(죄)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나를 노예 삼는 그 권세는 무덤까지 밖에 미치지 못한다. 더 이상은 미치지 못한다.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는 옛 주인인 죄는 나에게 백 가지 천 가지를 요구할 수 있지만, 일단 내가 죽어 버리면 그는 다시 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때 나는 영원히 그의 학대에서 벗어나게 된다. 율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여자가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녀는 남편의 속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일단 그녀가 죽게 되면 혼인 관계는 청산되고 그녀는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율법의 요구가 여전하지만, 율법은 더 이상 나에게 권세를 행사할 수 없다.
이제는 " 나는 어떻게 죽는가?" 의 문제가 남았다. 우리 주님의 역사의 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롬 7:4)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그분의 몸이 갈라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안에 두셨기 때문에(고전 1:30) 나도 갈라진 것이다. 그분이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나도 그와 함께 못 박혔다.
구약에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한 가지 예증이 있다. 즉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격리시키는 휘장 위에 그룹들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출 26:31, 대하 3:14). 에스겔 1장 10절과 10장 14절은 그룹들의 얼굴 중 하나가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사람은 천연적인 옛 창조물(시8:4-8) 전체의 머리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휘장 안에 거하셨고 사람은 휘장 밖에 거하였다. 사람은 휘장 밖은 볼 수 있었지만 휘장 안은 볼 수 없었다. 그 휘장은 우리 주님의 육체를 상징한다.(히 10:20).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밖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마16:16-17) 그들은 주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성소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성전 안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지게 하셨다(마 27:51).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죽으신 후로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을 감추시지 않으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셨다.(고전2:7-10).
이제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휘장이 갈라질 때 그룹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휘장을 찢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룹들이 휘장위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룹들은 휘장위에 있었고 휘장과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휘장만 찢어지고 그룹이 온전할 리가 없다. 휘장이 찢어질 때 그룹들도 함께 찢어졌다. 하나님의 눈에 주 예수님이 죽으실 때 모든 피조물들도 다 죽은 것이다.
"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 여인의 남편이 아주 건장하고 강건할지 모르나 만일 그 여자가 죽었다면 그 남편이 자기의 원하는 대로 그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해도 그녀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죽음은 이미 그녀를 남편의 모든 요구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주 예수님이 죽으실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만유를 포함한 그분의 죽음이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죽음은 무덤에 남아 계시지 않으셨다. 사흘되던 날에 그분은 부활하셨다. 우리 역시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였다. 주 예수님의 몸은 그분의 죽음을 말해 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부활을 말해 준다. 이는 그분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 우리는 "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 목적에는 소극적인 면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 다른이 … 에게 가는 " (롬7:4) 영광스런 방면이 있다. 죽음으로 옛 혼인 관계는 해소되었다. 이전 남편은 쉽지 않고 그녀에게 요구만하며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돕지 않아 절망에 떨어졌던 그 여인이 이제는 자유하여져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분이 그녀에게 요구하시지만, 그분 자신이 그녀 안에 계셔서 그분의 모든 요구를 이행하는 능력이 되신다.
이 새로운 연합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함" (롬7:4) 이다. 어리석고 죄있는 여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었다. 그분의 죽음에 연합함으로 그녀는 그분의 부활과도 연합되었으며, 부활 생명의 능력 안에서 그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다. 주님의 승천의 능력은 그녀 안에서 능력을 주어 그녀로 하여금 능히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요구하신 거룩함에 응하게 했다. 하나님의 율법이 폐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전히 온전케 되었다. 이는 이제 부활의 주님께서 그녀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분의 생명은 영원히 아버지의 기뻐하심을 얻은 생명이다.
여인이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녀는 더 이상 자기의 성(姓)을 갖지 않고 남편의 성을 사용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성에 참여할 뿐아니라 또한 남편의 재산에도 참여하게 된다. 우리도 이렇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일단 우리가 그분에게 속한다면 그분의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소유가 된다. 우리가 그분의 무한한 풍성을 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그분의 모든 요구에 응할 수 있다.
사람의 마지막이 하나님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의 교리적인 면을 해결하였다. 이제 우리는 실제적인 방면을 보기로 하자. 적극적인 면은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하기로 하고 먼저 소극적인 면을 보기로 하자. 매일의 생활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후로 다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지 않고 다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당신은 놀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무슨 가르침 입니까? 얼마나 무서운 이단 입니까!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이런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 안에서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 즉시 내 자신을 율법 아래 두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나는 율법을 어기게 되고 율법은 내게 사형을 선포할 것이다. 이 사형은 집행되어졌고 이제 육체에 속한 나(롬7:14)는 죽음으로써 이미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벗어난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여전히 존재하며 사실상 이제는 새로운 율법이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옛날보다 더 엄격한 율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하자! 이제 그 요구들을 이행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은 이미 만족되었다. 그분은 " 내가 온 것은 …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5:17) 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초 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법도 하늘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반대로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시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준수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부활생명을 완전히 나타내실 주님을 신뢰하게 된다.
내 고향에서 본 일로 이 일을 설명하겠다. 중국에는 짐꾼 중 120근의 소금을 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250근도 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자. 그런데 어떤 사람이 120근밖에 질 수 없는데 여기에 250근 되는 소금 한 가마가 있다 하자. 그는 자신이 그것을 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만일 그가 총명하다면 "나는 그것을 만지지 않겠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 안에서는 시도해 보자는 유혹이 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질 수 없다 하더라도 그는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 어렸을 때 나는 자신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 시도해 보려는 사람들을 보았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질 수 있는 사람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우리가 그 일을 독점하게 되면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시도하는 것을 빨리 포기할수록 좋다. 만일 우리가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보다 더 강한 능력이 우리로 감당케 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1923년 나는 캐나다의 유명한 한 전도자를 만났다. 그날 나는 앞에서 내가 말한 말씀으로 설교를 하였다. 우리가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로마서 7장을 말하는 것을 듣기가 어려운데 오늘 다시 들어보니 참 좋군요. 제가 이미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았던 날 저는 참으로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 수년 동안 저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힘을 쓸수록 더욱 실패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주 가운데 가장 요구를 많이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작은 요구도 나 스스로는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로마서 7장을 읽는데 갑자기 저에게 빛이 임하였습니다. 주님이 저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같이 율법에서도 해방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놀라 뛰면서 '주여, 당신은 참으로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그런 요구들에 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을 찬미하자. 보좌 위에서 그분은 입법자이시고 내 속에서 그분은 준법자이시다. 그분이 법을 세우시고 스스로 그것을 지키신다. 그분은 요구하시고 또한 친히 그 요구를 만족케 하신다. 나의 그 친구는 다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았을 때 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사실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이 외칠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한, 그분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시다. 우리가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 실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해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하기 전에는 우리의 실망과 낙심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몸부림침으로 승리에 이르러 보려고 하는 한 형제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내가 왜 이렇게 약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당신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만 모든 일을 포기할 정도로 약하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충분히 약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력한 데까데 낮아져서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 주여, 저는 당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내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할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약해져야 한다.
한번은 중국에서 스무 명의 형제와 함께 거했었다. 우리가 거하는 곳에는 충분한 목욕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강가로 가서 목욕을 해야만 했다. 한번은 한 형제의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는데 나는 그가 얼마 안 되어서 곧 물속에 잠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수영을 잘하는 형제에게 손짓하여 속히 그를 구출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형제가 꼼짝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급하여 어쩔 줄 몰라서 큰 소리로, "당신은 그 형제가 곧 익사하게 될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다. 다른 형제들도 나와 같이 격동하여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수영에 능한 그 형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침착했고 원래 서 있던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내키지 않는 일이라서 미루고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곧 익사할 것만 같은 그 불쌍한 형제의 목소리는 갈수록 미약해지고 그의 힘은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은 정말 잔인하다! 한 형제가 눈 앞에서 익사하는 것을 보고도 구출하지 않다니!'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림이 물에 완전히 잠겼을 때, 수영에 능한 그 형제는 빠른 속도로 그에게 가까이 가더니 두 사람 다 무사히 연안에 올라왔다. 나는 구출한 그 형제에게 기회를 잡아 내 의견을 이렇게 말햇다. "나는 당신과 같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만일 당신이 자신을 조금 덜 돌아보고 남을 좀 더 관심한다면 그를 이렇게까지 고생시키지 않고 구출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수영에 익숙한 그 형제는 이 일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만일 내가 조금 일찍 그에게 갔다면 그는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은 다 강 속에 잠기게 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온 몸에 힘이 빠져서 자기를 스스로 구할 힘이 없기 전에는 구출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이제 당신은 깨달았는가? 우리가 포기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힘이 막바지에 이르러 다시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정죄하셨고 이것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에 육체는 무익하다. 만일 우리가 육체 안에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선포를 믿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행동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 행동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서 달리 취할 것이 없다는 십자가의 선포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노력하는 이유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오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급의 원인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록 율법 자체는 옳을지라도 틀린 사람에게 적용할 때 모든 것이 잘못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로마서 7장의 그 '곤고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케 하려고 하였다. 그의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장에서 거듭 사용된 '나'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우리의 실패한 실마리를 보여 준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7:19). 이 사람 속에 기본적으로 잘못된 관념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행한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로마서 6장은 '죄의 몸'을 다루고, 7장은 '사망의 몸'을 다룬다. (6:6, 7:24) 6장에서 우리 앞에 놓여진 것은 죄의 문제이고, 7장의 문제는 사망이다. 그러면 죄의 몸과 사망의 몸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일)에 관하여 나에게는 죄의 몸 - 적극적으로 죄를 범하는 몸 - 이 있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나에게 사망의 몸이 있다. 죄와 관련된 활동은 나의 몸을 죄의 몸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실패하는 것은 나의 몸을 사망의 몸이 되게 한다. 사악한 것들에 관하여 나의 성품은 세상에 속하고 사탄에 속한다. 이 면에서 나는 완전히 적극적이다. 그러나 성결과 하늘에 속한 일에 대하여 나는 완전히 소극적이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 안에서 이 진리를 발견하였는가?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말해야 할 때 당신은 한마디도 말해내지 못할 것이다. 기도하려고 할 때 당신은 졸릴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당신은 몸이 좋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된 것 이외에는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몸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 고린도전서의 한 말씀이 있다. 곧 "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 11:30), 죽음은 극도로 약해지는 것이다. 약함에서 질병으로, 마지막에는 사망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사망은 극도의 약함이다. 즉, 더 이상 약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우리가 사망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약하고 극도로 약하여 구제 불능의 정도로 약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쳤다. 만일 누가 바울처럼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이다. 이것은 사람의 외침 중 가장 신령하고 성경적인 소리이다. 사람이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어떤 뜻을 세울 결심 조차도 포기할 때 비로소 이렇게 외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매번 실패할 때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배나 더 의지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결심이 무익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 중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외치게 된다.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 자신이 불타고 있는 집 안에서 발견한 것처럼 구조를 요청하며 외치게 된다. 이는 그가 이미 절망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이미 절망하였는가? 혹 당신은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함으로써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 읽기와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 읽기와 기도를 우리의 승리의 비결로 삼는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도움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만이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목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다행이도 그 '곤고한 사람'은 그의 곤경을 호소했을 뿐 아니라 또한 좋은 질문을 하였다. 즉, "누가 나를...건져 내랴?" 이다. 누가? 전에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소망은 그를 건져내실 한 분에게 있다. 전에 그는 자기 안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았지만, 이제 그는 자신 밖에서 한 분 구주를 찾았다. 그는 더 이상 자기의 힘을 쓰지 않으며 이제 그의 모든 희망을 다 그분에게 둔다.
우리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가? 성경 읽기, 기도, 구제 등으로 인가? 아니다. 십자가를 앙망하고 주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았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을 받은 것도 이 원칙에 근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여전히 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사함을 얻게 되고,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앙망할 때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분이 이루신 것들을 의지할 때 우리는 첫 번째의 것을 얻게 되고, 이제 우리 안에서의 그분의 역사하심을 의지할 때 두 번째 것을 얻게 된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에게 만유가 되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의지할 분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살인자는 매우 특별하고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형벌을 받았다. 그 방법은 바로 죽은 사람의 시체와 죄수의 몸을 손은 손과 발은 발과 함께 묶어 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인한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묶어 놓는다. 죄수는 자기 원대로 아무 데나 갈 수 있지만 그가 어디로 가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끌고 다녀야 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있겠는가? 바울은 바로 이런 형벌을 예증으로 삼았다. 그는 죽은 시체에 묶인 사람 같이 자유함이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는 이 무서운 짐의 속박을 받았다. 결국에 그는 참지 못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 건져내랴" 고 외쳤다. 그런 다음 그는 갑자기 깨어나서 절망 가운데서의 부르짖음이 찬송의 시가로 변해 버렸다. 그는 이미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
우리는 의롭게 된 것이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케 되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전히 주님을 의지해야만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죄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성과가 없을까봐 두려워한다. 구원 받은 후 우리의 '무언가 하려는' 낡은 습관이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요19:30) 고 신선하게 말씀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이미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받도록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이 두 가지 일 모두 그분이 역사하신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죄로부터 해방받는 사람의 첫 마디는 매우 귀하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원문 참조) 라고 했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물 한 컵을 준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당신에게 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할 것이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하였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 스스로 해방받았다면 아마 '바울에게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곤고한 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필요를 만족케 하실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얻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역사를 이루셔야 한다. 만일 우리도 무언가를 했다면 약간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영광이 다 그분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시종 모든 것을 이루신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 머문다면, 이 장에서 우리가 말한 것이 다 소극적이고 실제적이지 않은 것같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앉아 있기만하고 일이 발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물론 사실은 전혀 이렇지 않다. 참으로 이 말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임을 안다. 또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원칙 아래 사는데, 이 원칙은 바로 생명의 영의 법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새 생명의 원칙의 효능을 볼 것이다.
제 10장 성장하는 길 - 영을 좇아 행함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에 왔다. 먼저 두 번째 단락의 중심인 5장 12절부터 8장 39절까지의 중심을 두 마디로 간략히 설명하겠다. 이 두 마디는 한 가지 대조를 포함하고 있고 각각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한 방면을 지적해 준다. 이 두 마디는 다음과 같다. '아담 안에서' 와 '그리스도 안에서' - 5:12∼ 6:23. '육체 안에서' 와 '영 안에서' - 7: 1∼ 8:39. 우리는 이 네 가지의 관계들을 깨달아야 한다. 앞의 두 가지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말한다.
그중 첫 번째의 것은 원래 천역적으로 믿은 우리의 위치이고 두 번째 것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위치이다. 뒤에 나오는 두 가지는 주관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행함과 관계된다. 이것들은 실제적인 체험에 속한 것들이다. 성경은 앞의 두 가지가 전체의 일부분만을 언급한 것이고 나중 두 가지가 있어야 온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만 하면 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영 안에서 행해야(롬8:9) 함을 알았다. 로마서 8장 앞부분에서는 거듭 영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이 공과를 얼마나 중요시 하는가를 보여 준다.
육체와 영
육체는 아담과 연관되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관된다. 이제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치고 잠시 이 문제를 한 쪽에 제쳐 놓고 우리 자신이 육체 안에 사는가 영 안에 사는가를 물어보자. 육체 안에 산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행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힘은 아담에게서 이어받은 옛 창조의 천연적인 생명에서 나왔기 때문에 체험에서 우리는 아담의 죄 있는 모든 자본을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매우 효과적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그러하다. 만일 우리가 체험에 있어서 그분이 체험한 것을 누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옛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못 박혔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심" (엡 1:3)은 현재의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 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과 완전히 상반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이 사실이 우리 몸에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만, 또한 우리의 낡은 성질이 여전히 나타나는 사실에 직면할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우리가 객관적으로 그 진리를 붙잡을 뿐 객관적인 진리를 주관적인 진리로 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내 안에 계신다. 사람의 몸이 물속에서는 생활하거나 일할 수 없고 공기 중에서만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거하시지 않으시고 영 안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육신을 좇아' 생활한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본래 내게 속했던 모든 것이 내 안에서 허공에 뜬 것과 같이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비록 사실에 따르자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겠지만, 만일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곧,내 힘으로 내 주장대로 행한다면-체험에 있어서 나는 당황하게도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이 내 몸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것을 체험으로 알려 한다면 반드시 영 안에서 살기를 배워야 한다.
영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내 자신을 의지하여 살아내는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에 당면할 때마다, 나는 그분께서 내게 요구하신 것을 내 안에서 친히 이루시도록 그분을 앙망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도해 보라고 하시지 않고 다만 믿고 의지하라고 하신다. 또 그분은 우리에게 분투하라고 하시지 않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라고 하신다.
만일 내가 난폭한 성품이나 부정한 생각, 예리한 혀와 비평하는 영을 가졌다면 자신을 고치려고 결심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할 일은 다만 이 모든 일을 향하여 이미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내게 필요한 순결함과 겸손과 온유를 산출해 내시도록 앙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가 말한 "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 의 뜻이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리라고 믿는다. 즉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한 친구를 심방하러 가자고 할 때 당신은 그 친구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를 돌보러 갈 것이다. 출발하기 전 당신은 주님께,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실패뿐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주님이 당신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달라고 구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은 비록 그 친구가 조심성이 없고 남과 조화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당신이 그에 대해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것에 놀랄 것이다.
집에 돌아올 때 당신은 이 체험을 회상해 보면서 당신이 그렇게 잠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인해 놀란다. 당신은 다음에도 그렇게 잠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확신이 없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이상히 여기며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성령이 당신으로 통과하게 한 것임을 기억하라.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어쩌다 한번 이런 체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이어야 한다. 성령이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은 긴장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를 악물고 자기를 잘 통제하면 영광스런 승리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참된 승리는 육체의 힘을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어떤 것을 넘어가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목적은 항상 우리로 어떤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중일 전쟁의 첫 삼 일 동안 우리는 많은 탱크를 잃었고 일본의 탱크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군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즉, 돌격대 한 사람을 매복시켜서 일본 탱크를 향해 총을 한 방 쏘게 하고 얼마 후 두 번째로 총을 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 다른 사람으로 총을 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적 탱크의 조종사가 급히 공격할 지점을 찾기 위해 고개를 내밀어 사방을 두루 살필 때 즉시 돌격대원은 총으로 그 조종사를 쏘아 버렸던 것이다.
만일 그가 탱크 안에 숨어 있었다면 절대로 안전했을 것이다. 모든 계획은 그로 고개를 내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탄은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처음에 그는 우리를 범죄케 하지 않고 우리가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도록 격동시킨다. 일단 우리가 숨어 있는 곳에서 나와 버릴 때 사탄은 이미 우리를 이긴 것이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숨어 있고 육체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탄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승리의 방법은 바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활동할 때 위험에 떨어지게 되고 우리의 천연적인 경향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읽어보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바꾸어 말해서 육체는 우리를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거스린다.이는 '이 둘이 서로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짓밟고 처리하는 것은 그분이지 우리가 아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자주 이 구절의 하반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보기로 하자. 천연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우리 천성의 지시를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행동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일하기를 거절한다면, 성령은 자연히 우리 안의 육체를 처리하실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천연적인 경향에 따라 일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는 원칙이 있다.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행한다면, 우리는 한편에 서서 능히 성령으로 매일 우리의 육체를 이기시게 할 수 있다. 성령은 이 일을 책임지도록 이미 우리에게 보내지셨다. 우리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고 오로지 성령만을 의지하여 그분의 새 갈망을 따라 우리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데 달려 있다.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이루었고, 우리 안에서 성령은 구원을 나타내도록 주어지셨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또한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의 이 부르짖음은 참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가 말한 것과 똑같다. 거기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연구한 문제의 해답이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나' 라는 단어가 매우 현저히 나타났고 또 이 '나' 는 결국 답답한 부르짖음, 곧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 끝난다는 것을 안다. 그 뒤에 우리는 그의 해방받은 환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주 예수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매우 분명한 것은, 바울이 우리가 사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개선된 생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치하는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다른 생명, 곧 그리스도로 대치하신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생명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재생산'이 '거듭남' 이상이라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거듭남은 우리가 새로 출생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심는 것이다. '재생산'은 더 나아가 이 새 생명이 자라고 점진적으로 우리 안에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까지 재생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인들에게 바울이 말한 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이다.
또 한 가지 예화로 이 점을 설명해 보겠다. 한번은 미국에서 주님을 믿는 부부의 가정에 갔었다. 그들은 내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해 왔다. 내가 그들에게 무슨 어려움이라도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니 형제님, 최근 저희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저희는 너무 쉽게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납니다. 과거 몇 주 동안 저희 두 사람은 거의 매일 수차 화를 내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저희에게 인내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이런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말이 무슨 뜻 입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당신의 뜻은, 저희가 너무 형편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내를 구하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꺼려하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내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렇게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당신들이 자주 이렇게 간구했으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당신들은 왜 응답이 없는지 아십니까? 이는 당신에게 인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 없다구요? 저희는 매일 화를 냅니다. 당신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답했다.
하나님은 결코 겸손,인내,성결,사랑의 은혜를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다. 즉, 인내가 없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인내를,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사랑을, 혹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약간의 겸손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약간씩을 우리에게 자본으로 주지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족히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는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그분의 생명을 내 안에서 살아 나타내고자 그분을 앙망할 때, 그분은 나의 겸손과 인내와 사랑이 되신다. 또한 내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이 되신다 요한1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1-12) 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여러 가지 항목으로 우리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사도 바울은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고 말한다.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는 바로 생명의 관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와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 즉 온유와 그리스도, 인애와 그리스도, 사랑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나니". 통상적으로 거룩함에 대한 사람의 관점은 생활의 모든 방면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룩함 자체가 아닌 거룩함의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거룩함은 그리스도 자신임을 기억하라. 주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거룩함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기타 사랑, 겸손, 능력, 절제등도 이와 같다. 오늘날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면 그분이 바로 우리의 인내이시다!
내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거룩함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의 해답이시다.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 그 열매가 단수요 하나의 열매요 별개의 여러 열매들이 아닌 이유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에게 사랑이 결여되었을 때 성령의 열매는 바로 사랑이고, 우리에게 희락이 필요할 때 성령의 열매는 바로 희락이다.
이것은 정확하다. 당신 개인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일지라도 당신에게 백한 가지가 결여 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충족한 답변인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있으시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의 해답이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필요를 더욱 많이 느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들 안에서 부족한 점이 발견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혀 자라지를 못한다. 오직 은혜 안에서 자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은혜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는 것임을 말한 바 있다. 비로 우리 안에 동일하게 거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지만, 오직 새로운 필요에 대한 계시가 있어야 만이 우리를 이끌어 그분을 믿고 의지하게 하며 이 점(필요)에서 우리 안으로부터 살아 나타나시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계속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 성장의 비결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시도함과 믿고 의지함에 대해 말한 바 있고 또한 이들의 차이점을 본 바 있다. 이것들의 차이는 마치 천당과 지옥 같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말뿐인 좋은 사상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주님께, "주여,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도하지도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라. 많은 사람은 이 점에서 실패하였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주여, 나는 할 수 없으므로 손을 떼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당신을 믿고 의지합니다." 라고 말한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고 그분이 하시도록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나는 그분이 시작하신 역사 안으로 완전히 즐겁게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피동적인 생활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생활이다. 나는 이렇게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흡수하고 그분을 생명 삼으며 내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다.
생명의 영의 법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적극적인 면을 상세히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는 시작에서 " 이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는 이 말씀의 위치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정죄함은 확실히 피에 의해 해결되었고 주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제하였기 때문이다(롬 5:1,9) 그러나 정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정죄와 내 자신 안에서의 정죄이다(이것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말한 두 종류의 평안과 같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 있어서 두 번째 종류의 정죄가 첫 번째 종류의 정죄보다 훨씬 무섭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만족케 했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의 죄가 이미 사하여졌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는 여전히 실패를 체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내 속의 정죄의 느낌이 아주 참된 것일 가능성도 큰 것이다.
그럴지라도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내 생명으로 취하여 산다면 나는 승리의 비결을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6)를 체험하게 된다.
이는 내가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평안이 있기에 더 이상 정죄받은 느낌이 없고 도리어 그분이 나를 한번씩 승리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찬미하게 된다. 무엇이 나에게 정죄의 느낌을 주는가? 실패한 체험과 무능한 느낌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보기 전에 나는 항상 불리한 위치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정말 나로 하여금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범사에 무능함을 느끼게 한다. 자주 나는 큰 소리로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저 일을 할 수없다!" 고 부르짖는다. 노력해 보지만,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다"는(롬 8:8) 것을 발견한다.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없다. 이제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 4:13)
바울은 어떻게 이같이 담대할 수 있는가? 그는 무엇에 근거하여 이제 더 이상 제한을 받지 않고 도리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할 수 있는가? 다음 말씀이 그의 답변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왜 결코 정죄함이 없는가? '이는 …'은 결코 정죄받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고 확실한 사실에 근거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이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있다. 바울이 이것을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 법이 다른 법인 '죄와 사망의법' 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법들은 무엇인가? 어떻게 운행하는가? 죄와 죄의 법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망의 법과 죄의 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먼저 법이 무엇인지 물어 보겠다. 엄격히 말해서 법은 검증을 거친 법칙으로서 어떤 예외도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간단한 말로 표현한다면, 법이란 어떤 일이 거듭 발생할 때마다 변함 없이 동일한 그것이다. 어떤 법칙을 제정하는 것과 자연 법칙으로 이 점을 설명할 수 있다. 가령 이 지방에서 우측 통행으로 운전을 한다면 교통 순경이 나를 제재할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내가 이곳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당신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할 때 제재를 받게 된다. 왜 그런가? 이는 당신도 내가 제재를 받은 동일한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법은 예외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발생할 때마다 변함이 없고 또 거듭 발생한다. 우리는 만유인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지금 나는 런던에 있다. 여기서 내 손수건을 던질 때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만유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뉴욕이나 홍콩에서 내 손수건을 던진다 해도 결과는 똑같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손수건을 던질 때마다 만유인력은 역사한다. 따라서 동일한 결과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동일한 조건에 있기만 하면 동일한 결과를 낳는 것이 바로 법이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인가? 가령 누가 내게 대하여 좋지 않은 비평을 할 때 내 속에서는 즉시 뭔가 불쾌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법이 아닌 죄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만일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좋지 않은 비평을 할 때에도 여전히 내 안에서 동일하게 불쾌한 생각이 일어 난다면 나는 항상 변함없는 만유인력과 같은 한 법 -죄의 법-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죄의 법도 이와 같다. 우리는 사망을 극점에 이른 약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니의 약함은 나의 할 수 없음이다. 내가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 보니 또 나의 할 수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한 법이 내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본다. 내 속에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죄의 법이 있다. 내속에 사망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사망의 법이 있다.
이 법은 만유인력과 같이 불변하고 어떤 예외도 없다. 이것은 토론을 거쳐 제정한 법칙인 교통 법규와는 달리 사람은 제정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손수건은 내 도움 없이도 자연히 땅에 떨어질 수 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울이 발견한 법도 이와 같다.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은 선함에 반대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를 좌절시킨다. 사람은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따라 자연히 죄를 범한다. 그가 다른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안에 있는 법은 잔인하며 사람의 의지는 결코 이 법에 대항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가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 죄뿐 아니라 더욱 사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끊임없는 약함과 실패에서 해방받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두 가지 예를 더 들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과거 중국인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부담이 되던 이금세(세금의 일종)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이 법은 청나라 때 제정되어 중화민국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은 국내의 화물 통관세로서 전국에 많은 세관이 세워졌다. 세금을 징수하는 관의 권한은 매우 컸다. 한 가지 화물을 여러 도를 거쳐서 운송해야 한다면 내야할 세금은 매우 막중하다. 그러나 수년 전 다른 법이 이 법을 대치하였다. 한번 상상해보라. 옛날 법 밑에서 심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어떠한 기쁨과 위로를 느꼈겠는가!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볼 필요가 없고 간구할 필요조차도 없다. 이는 새 법이 제정되어 옛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내일 이금 징수원을 만난다면 당신은 더 이상 그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지방법이 이렇고 자연의 법도 이런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만유인력의 법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가? 또다시 네 손수건을 예로 든다면, 만유인력의 법은 손수건에 역사하여 그것을 아래로 끌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을 손수건 밑에 둔다면 손수건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게 된다. 왜 그런가? 법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나는 만유인력의 법을 제거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법을 제할 수 없다. 그러면 왜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가? 이는 손수건이 땅에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다른 힘이 있기 때문이다. 법이 여전히 거기 있지만 그 법을 능가하는 생명의 법이라고 하는 다른 법이 운행하여 그 법을 정복한다. 만유인력이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역사할 수 있지만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법이 운행하여 만유인력을 대항하여 손수건을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로포장 석판 사이에 떨어진 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씨가 점점 자랄 때 그 생명 안에 있는 능력이 아주 무거운 석판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한 바 법이 법을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다른 법을 이끌어 옴으로써 원래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죄와 사망의 법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른 법-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역사하게 하신다. 이 법의 강도는 족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을 기억하라. 이 법은 부활한 생명으로서 이미 그분 안에서 각종 사망을 처리하였고 이미 사망을 이겼다(엡 1:19,20).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려서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임의로 행하시게 하다면, 우리는 그분이 옛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보호하심이 우리 힘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벧전 1:5)
생명의 법의 표현
이 점을 더 실제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 바 있다. 심지어 오래된 그리스도인도 의지가 그들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를 모른다. 이것 또한 로마서 7장의 어려움 중 일부이다. 그의 원함은 선한 것이나 그의 모든 행함은 그의 원함과 상반된다.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얼마나 큰 결심을 하든 그의 원함은 그로 더 큰 어두움을 거치게 할 뿐이다. 그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기름이 없는 자동차 같이 누가 밀어 주어야 간다. 언제든지 누가 밀지 않을 때에는 즉시 멈추고 만다. 그들은 의지로 자신을 밀어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아주 고생스럽다고 생각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고 힘이 빠지게 한다. 어떤 사람들이 할렐루야를 외치기 때문에 자기도 억지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들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들은 자기답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강요한다. 이것은 물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훨신 어려운 것이다. 이는 의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이 원함이기 때문이다 (마 26:41)
만일 우리가 많은 힘을 들여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야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생활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님을 말해 줄 뿐이다. 우리가 모국어를 말할 때는 힘이 들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 천성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의지력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뜻을 세울 수 있으나 결국은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 패배당할 것이다. 아마 우리는 "원함이 내게 있어서 내가 이 주 동안 선을 행했다." 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뜻을 세우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행하려고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당신은 왜 사람이 의지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거듭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취한 새 생명이 없거나 혹은 거듭나서 생명을 소유하였으나 그 생명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거듭거듭 실패하고 범죄하며 자신들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끊임없이 연약한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활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과 의지함이 없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로마서 6장 23절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절은 새로운 은사를 말하지 않고 로마서 6장 23절에 언급된 그 생명을 말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새로운 계시라는 뜻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아니라고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얻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새롭게 열어 주는 것이다. 이는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는 말에 사용된 시제가 과거시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이 점을 보고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로마서 7장은 우리 몸에서 절대로 재현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체험들이나 행위들은 참으로 중복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렇게 의지의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고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땅에 떨어져 깨지지 않고 도리어 다른 법인 생명의 영의 법 아래 떨어지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에게 생명만 주지 않으시고 또한 생명의 법도 주셨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이 사람이 만든 법의 결과가 아닌 자연계의 법칙이듯이 생명의 법도 자연의 법칙으로서 원칙상 우리 심장이 뛰는 것이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이 깜박이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가 우리눈의 청결함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눈에 대해 항상 생각하거나 의지로 결심하지 않아도 눈꺼풀은 자동적으로 감겼다가 열려진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항상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도움이 되기는 커녕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기만 하면 눈꺼풀은 자연히 움직인다. 우리의 의지는 생명의 법을 저지할 뿐이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나는 이 사실을 발견하였다.
전에 나는 불면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며칠 밤 온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는 여러모로 기도하였다. 나는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내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분의 답변은 "자연 법칙을 믿고 의지하라." 는 것이었다. 수면은 굶주림과 같이 다 하나의 법이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비록 내가 굶주리지는 않았을까를 염려하지는 않았으나 항상 수면에 대해 염려하였다. 나는 자연 법칙을 도우려고 하였다. 이것이 많은 불면증 환자의 주된 문제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자연 법칙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잠을 잘 이룬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당연히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손실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억지러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안에 성경을 사모하는 새로운 법이 있다. 우리가 이 법을 따라 삼십 분간 읽는 것이 억지로 다섯 시간 동안 성경을 읽는 것보다 더욱 유익하다. 이와 같이 구제하고 전도하며 간증하는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냉정하게 자선 사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전도할 때 결국 찬 심장으로 뜨거운 복음을 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만일 우리가 새 법 안에 산다면 우리는 옛 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옛 법이 여전히 존재할지라도 그것이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수 없고 우리도 더 이상 그 통제하에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라" 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날으는 새들에게 만유인력을 무서워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면, 그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는 뉴턴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 법칙을 조금도 모른다. 우리가 날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우리로 날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 나는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생명 안에는 항상 그들로 자연스럽게 만유인력을 이기게 하는 하나의 법이 있다. 그러나 만유인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날씨가 몹시 춥고 땅에 눈이 쌓인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 났을 때 참새 한 마리가 정원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즉시 그 법의 항구성과 불변성을 상기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들이 만유인력을 정복하고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분은 이미 이 영의 새 법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나는' 것은 더 이상 우리의 의지 문제가 아닌 그분의 생명의 문제이다. 당신은 인내할 수없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하라는 것이 그에게 하나의 시험이라는 것을 주의한 적이 있는가? 그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족히 그를 억압하여 병들게 한다. 하나님은 염려로 우리 영적 키를 더하게 하려는 노력과 같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들을 결코 억지로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염려는 사람의 영적 키를 줄어들게 만들 뿐 절대로 조금도 크게 하지 못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새 법을 주의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이 있기를!
이것은 얼마나 귀한 발견인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 이는 이 법이 작은 일에서도 큰일에서 처럼 운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방에서 주인의 허락 없이 임의로 책을 꺼내 본다면, 이 법은 허락을 얻기 전에는 꺼내 볼 권리가 없다고 우리를 일깨우고 저지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한번은 어느 그리스도인 친구와 대화를 가졌는데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아십니까? 만일 사람이 생명의 영을 의지해 산다면 참으로 고상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이는 그 법이 사람을 완전한 신사(紳士)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시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참된 문제는 그들에게 주님의 생명이 있는가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내가 말하지만, 그 생명은 그들에게 '당신은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그렇게 웃는것은 틀렸습니다.' 혹은 '당신이 이렇게 비평하는 그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말해 줄 것입니다. 성령은 범사에 그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상세히 알려 줄 것입니다. 이로써 진실된 고상함이 나오게 됩니다. 교육에는 이런 본질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내게 이런 말을 한 친구 자신이 교육자였다!
이것은 참된 것이다. 말이 많은 것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은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닌가?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당신은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인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면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특별히 조금만 말하여 내 자신을 통제해야겠다."고 말한 적이 없는가? 당신이 한두 시간은 자신을 잘 제어한다. 그러나 당신은 어떤 이유로 자제력을 잃고 얼마 못 가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수다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 의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자. 만일 내가 이런 일에서 의지를 사용하라고 권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 세상의 허무한 종교를 제공한 것일 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제공한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수다쟁이가 온종일 말하지 않아도 그는 여전히 그런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이는 수다스러움의 자연 법칙이 그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그루의 복숭아 나무가 복숭아를 맺든 안 맺든 여전히 복숭아나무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 새 법, 곧 생명의 법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 법은 다른 모든 법보다 강하고 이미 우리를 수다스런 법에서 해방 하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새 법에 자신을 맡긴다면 그 법은 어느 때에 말을 멈추어야 하고 어느 때 말하기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만일 이 기초 위에서 생활한다면 당신은 친구 집에 가서 두세 시간 동안 앉아있어도, 심지어 이삼 일동안 거하여도 말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 당신은 말을 많이 한 것으로 괴로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생명의 새 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 자발적인 생활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이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 어떤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천연적으로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다 - 이 법은 사랑을 나타낸다. 이 법은 주님이 그 형제 안에서 보시는 가능성을 기초로 하여 역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그를 사랑스럽게 보고 그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또한 나를 통하여 그를 사랑하소서!" 라고 말한다. 이러므로 실제적인 생활에서 이 법은 그 자체를 표현하게 된다. 즉, 참된 도덕적 행위를 통해 그 자체를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 생활 중에 위선이 너무 많고 가식도 너무 많다. 가식만큼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은 없다. 이는 사람들이 결국 우리의 가식을 꿰뚫고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생명의 법을 믿고 의지한다면 '가식'은 '실제'에게 굴복될 것이다.
네 번째 단계 : 영을 좇아 행함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이 두 구절을 자세히 읽은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일을 발견할 것이다. 첫째는 주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이루신 일이고, 두 번째는 성령이 장차 내 안에서 행하실 일들이다. 육신이 약한 고로 결국 율법의 의는 육신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다.(여기서도 구원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문제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 가지 절차를 취하셨다. 첫째로는 우리 문제의 핵심을 다루기 위해 그분이 개입한 것이다. 그분은 죄를 위하여 죽고 "육신에 죄를 정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속에 있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사지로 이끄신 것을 말한다. 이 옛 창조를 '우리 옛사람' 혹은 '육체', '육신에 속한 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의 약함의 기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고 우리의 어려움을 근절시키는 데 있다. 이것이 첫째 단계이다.
그러나 율법의 의는 여전히 우리 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필요가 잇다. 성령은 우리 속의 사정을 돌보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만 하면" 그는 능히 이렇게 돌보실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두 방면으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이것은 일이 아니라 좇는 문제이다. 우리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 나는 헛된 노력 아래 묶이게 된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골 1:29) 평안히 자신을 의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을 대비시켰다. (갈 5:19,22)
둘째로, 좇는 것 안에는 순복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로마서 8장 5절부터 8절까지는 육신을 좇는 결과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영을 좇는다는 것은 바로 영을 순종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영을 좇아 행할 때 그는 결코 그분을 향하여 독립할 수 없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반드시 성령께 순복해야 한다. 나의 행동은 반드시 그분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그분께 순복할 때 나는 비로소 생명의 영의 법의 충분한 운행하심과 율법의 의(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일) 가 만족되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복의 말씀에 매우 익숙해 있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신령한 복의 근원이시고, 주 예수의 은혜는 신령한 부요함을 우리 것이 되게 하며, 성령의 교통하심은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우리는,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이고, 은혜는 이 사랑이 아들 안에서 표현되고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며, 교통은 성령을 통하여 은혜가 사람에게 분배되는 것임을 안다. 무릇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은 아들이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루셨고 이제 성령은 그것을 우리에게 교통해 주신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확보해 놓으신 것들을 새로이 발견할 때, 그것이 성사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을 바라보고, 절대적으로 성령께 순복하여 발견한 그것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성령께 충분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그분은 이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실현시키신다.
중국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구원시킬 때 철저하게 그를 도와야 한다는 공과를 배웠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새 신자들에게, 그가 주님께 그의 죄를 사해 달라고 구하고 주님이 그의 생명으로 들어오시도록 기도할 때 그의 마음이 주님의 산 거처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제 그의 안에서 그에게 성경을 열어 주고, 그로 하여금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고 기도를 가르쳐 주며, 그의 생활을 통제하고 또한 주님의 인격을 그의 안에서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어느 늦여름에 장기 휴양을 위해 어느 고원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는 침식을 겸하여 제공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게 잠자는 것과 식사를 각각 다른 집에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식사를 하던 곳은 어느 직공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거했었다. 내가 그곳에 간 후 이주 동안 식사하기 전에 축도하는 것 외에는 집주인에게 복음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그들에게 주 예수님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듣기를 좋아했고 또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였으며 주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들은 거듭났고 그들의 생명 안에 새로운 빛과 기쁨이 있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확실히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발생한 일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얼마 후 기후가 차가워졌기 때문에 나는 거기를 떠나 상해로 돌아오게 되었다.
추운 겨울 동안 그 직공은 식사 때마다 술을 약간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마실 때마다 과음하기가 매우 쉬었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날씨가 추워지니까 식탁에 또 술을 올려놓았다. 그날 그는 전과 같이 식사 전에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두번 시도를 해보아도 말이 나오지 않자 그는 아내에게, "뭐가 잘못되었지? 왜 오늘 기도를 할 수 없을까? 빨리 성경을 가져와 보오, 그 안에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는지 봅시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성경 한 권을 남겨 두었었다. 그의 아내는 글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어두워서 술을 마시는 것에 관한 성경의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성경을 상고해야 할 줄 몰랐고 또 하나님의 종에게 문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그들에게서 아주 먼 곳에 있었고 그들은 몇 개월 후에야 나를 볼 수 있었다. 이때 그의 아내는, "먼저 마시고 보지요. 다음에 니 형제님을 만나거든 그때 물어보도록 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술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술을 치우시오!"라고 말했다. 그녀가 술을 치운 후에 그들은 감사하고 음식을 먹었다.
나중에 그 사람은 상해로 와서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었다. 그는 아주 적절한 말로 나에게 말하기를, "니 형제님, 내 속의 주인 어른이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아주 좋습니다. 형제님, 당신 속에 계신 주인 어른의 말씀을 계속 들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제 11장
그리스도 안의 한 몸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최종적인 중요한 제목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말해 온 것을 한번 복습해 보고 또 간략하게 우리가 취해야 할 절차를 설명하겠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거쳐야 할 체험들을 간략히 설명하려고 시도했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지나치게 간소화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심각한 혼란에 떨어지게 된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에 대한 체험이 전적으로 보혈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거룩한 생활에 들아가는 체험까지도 이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든지 주님의 피를 힘입어 우리가 알고 있는 죄들을 처리해야 하고, 또한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하여 피는 끊임없는 효능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매우 정확한 것이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도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피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믿고 있는 거룩함은 사실상 사람을 그의 과거로 부터 분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님이 흘린 피에 근거하여 모든 죄가 도말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분별하여 그분에게 돌아가게 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해하는 거룩함은 여기까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요구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의 완전한 예비하심을 소홀히 한다. 나는 이제 우리가 이 점의 부족함을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십자가의 죽으심 안에 그들을 포함시키어 그들의 옛사람을 처리하심으로써 죄와 율법의 묶임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빌 3:3) 확실히 주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 안에서 무언가를 건축할 수 있는 분명한 터전을 찾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기점으로 하여한 걸음 더 나아가 헌신(정확한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함)은 아무 보류함 없이 그들 자신을 주님 손에 맡기고 그분을 따르는 것임을 인식하였다. 이 모든 것이 다 시작에 불과하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안배하시고 다른 사람들도 누린 다른 방면의 체험들을 만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체험이 귀한 진리의 일부이지만 어떤 한 가지 체험도 그 자체가 진리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체험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임한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의 열매인 것이다. 우리는 그중의 어떤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관문을 통과함과 길을 걸음 우리는 믿는 이들의 생명이 그 체험과 많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실을 주의 깊게 보자. 이 체험들이 항상 일률적으로 고정된 순서대로 발생하지는 않지만 그 양상들에는 고정된 절차 또는 특징들이 있는 것 같다. 이 절차들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는 계시이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계시는 언제나 믿음과 체험 이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눈을 열으사 그의 아들에 관한 사실적인 진리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사실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우리 생활 속에서 실제적인 체험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순서를 나열할 수 있다. Ⅰ) 계시(객관적인 것) Ⅱ) 체험(주관적인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런 체험들이 항상 관문을 통과하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하여 만일 우리가 존 번연(John Bunyan)이 말한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비유한다면 더 분명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먼저 '좁은 문' 을 통과하고 그다음 '좁은 길' 을 간다고 말했다. 우리 주님도 영생에 이르는 문과 길을 말씀하셨다(마 7:14). 그리스도인의 체험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특징을 열거할 수 있다. Ⅰ) 계시 Ⅱ) 체험 : ⒜ 좁은 문 (관문을 통과함) ⒝ 좁은 길 (길을 걸음) 이 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에 우리가 사용했던 제목들을 보기로 하자. 먼저 의롭다 함과 거듭남에 대해 보겠다. 이것은 우리가 계시를 얻어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일을 완성하신 것을 봄으로 시작하여 회개와 믿음의 관문(좁은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으로 계속된다(엡2:13). 이 문은 또한 우리를 끊임없이 주님과 교통하는 길(좁은 길)로 인도한다. 그러나 매일 주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여전히 보혈인 것이다(히10:19,22). 죄로부터의 해방을 말할 때 여기에 세 단계가 있다. 성령의 계시는 우리로 알게하고(롬6:6), 그 다음의 믿음의 관문인 여김 (롬6:11)이 있으며,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롬6:13)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계속적인 헌신의 길이 있다. 또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이 점도 역시 주 예수님이 보좌로 높이 올려지신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서 시작된다. 결과적으로는 성령의 옮겨 부음과 성령의 내주하심의 이중 체험을 갖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일에 있어서 다시 한번 우리는 육체-사람의 자아 생명 전체- 에 대한 십자가의 평가를 보기 위해 성령의 빛 비춤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믿음으로 이 점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즉시 '좁은 문'의 체험(롬7:25)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을 멈추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운행하는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요구를 만족케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여 성령께 순복하는 생활을 하게 한다(롬8:4). 실제적인 과정은 이러한 그림과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어떤 고정된 틀을 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체험이라도 그 과정은 앞에서 말한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항상 먼저 우리 눈이 열려 그리스도와 그분이 완성하신 역사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갖게 되고 그런 다음 믿음의 문에 들어서게 되며 새로운 길로 이끌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여러 단계, 곧 의롭다 함과 거듭남과 성령의 은사와 해방과 거룩케 됨 등으로 나누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체험에 들어설 때 이 단계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상 만일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시작부터 우리 앞에 놓여졌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첫날부터, 그런 체험에 대한 이해는 장래에 갖게 될 지라도, 많은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오, 각처에서 전파되는 복음이 다 이런 것이기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계시가 항상 믿음 앞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것들을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반응을 갖게 되는데, 이러므로 믿음은 자연히 이것을 뒤따른다. 계시는 항상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경을 우리에게 열어주심으로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한 것이다(요16:13). 성령이 이것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응당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당신이 빛과 믿음이 부족한 어려움에 처할 때 당신의 어려움을 주님께 직고하라. "주여, 내 눈을 열어주소서. 주여, 나로 이 새로운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소서. 주여,믿음 없는 나를 도우소서!" 그분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십자가의 사중(四中)의 역사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포함한 범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의 체험함에 따라 분석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네 방면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많은 일이 아닌 한 가지 거룩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천 년 전에 주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한 번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제 그분을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 높이셨다." (행 2:33). 이 역사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고 무엇이 더 추가될 수도 없다. 십자가의 네 방면 중에 세 방면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상당히 자세히 언급했었다. 마지막 방면은 다음 두 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먼저 요약해 보겠다. 1) 그리스도의 피는 죄들(범죄와 과오)을 처리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본성과 육체와 천연적인 것을 처리하였다. 3)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 안에 거하여 사람으로 새 창조가 되게 하고 사람을 능력 있게 하였다. 4) 죽음이 천연적인 사람 안에 역사하여 내주하는 생명이 점점 표현되게 한다. 앞의 두 방면은 보완적인 것이고 마귀의 일을 멸하며 사람의 죄를 제하기 위한 것이다. 뒤의 두 방면은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처음 두 방면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잃었던 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고,나중 두 방면은 아담이 들어 가지 못했던 것 안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고 아담이 얻지 못한 것을 우리 안으로 가져 온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이 단지 사람을 구속하는 역사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구속 역사가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했음을 보여 준다. 앞 장들에서 우리는 그분의 죽음의 두 방면, 곧 죄의 행위를 처리한 피와 죄의 본성과 육체를 처리한 십자가를 자세히 본 바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논의할 때에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신 그리스도로 설명한 세 번째 방면을 간략하게 본 바 있다. 지난 장에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볼 때 우리는 그 밀알의 실제적인 나타남을 보았다. 그러나 이 네 번째 방면(나는 이것을 '십자가를 짊'이라 칭하겠다)을 언급하기 전에 세 번째 방면, 곧 사람 안에 거하고 사람에게 봉사할 능력 을 주기 위하여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해방되는 것에 관해 조금 더 말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하여 말한 바 있다. 이 목적 안에 포함된 것은 아담이 누렸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그분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영으로서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한 족속을 얻고자 하셨다. 이 족속은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고, 하나님과 동역하여 대적의 모든 가능한 궤계를 파하고, 원수의 모든 악한 역사를 제하며,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온전케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인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것을 실현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주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주 예수님의 죽음은 능력 있는 죽음이고, 적극적이며, 목적이 있는 죽음으로써 잃었던 위치를 되찾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은 죄와 옛 사람을 처리하고 그 결과들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또한 무한한 풍성을 우리에게 가져왔다. 그리스도의 사랑 이제 우리는 두 군데 성경 구절을 읽어보자. 한 곳은 창세기 2장이고 또 한 곳은 에베소서 5장이다. 이 두 군데 성경은 이 제목에 매우 중요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니라 하니라"(창 2:21-23)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5-27) 에베소서 5장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창세기 2장 말씀을 설명한 곳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장을 자세히 상고한다면 이 장이 주의할 만한 장임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얼마나 보배로운지! 우리는 자신을 구속이 필요한 죄인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수년 동안 이 가르침은 우리 안에 주입되어 왔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주님을 찬미하자.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아님을 기억하라. 에베소서 5장은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종종 우리는 교회를 구원받은 많은 죄인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 면에서 이것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비슷한 것으로 보고 교회가 은혜 받은 죄인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는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신성한 창조인 것이다. 은혜 받은 죄인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고 교회는 단체적인 것이다. 전자는 소극적인 것이고 과거에 속한 것이다. 후자는 적극적인 것이며 장래를 조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분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취어졌던 것이다. 이 목적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그분의 생명을 표현할 한 몸을 얻도록 정하셨다. 이 관점 - 하나님의 뜻의 관점 - 에서 볼 때 교회는 죄를 초월한 것이고 전혀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분명하게 볼 수 없었던 주 예수의 죽으심의 한 방면을 에베소서에서 본다. 로마서의 관점은 사람의 타락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리스도께서 죄인이며 원수이며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으로 시작한다.(롬5장) 그리고는 우리를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이끈다(롬8:35). 다른 면에서 에베소서의 관점은 '창세로부터'(엡1:4)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작되며 복음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엡 5:25)인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우리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그 메시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인(롬5:8) 반면에,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이며, 여기서 말한 사랑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죄와 무관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속죄가 아니라 교회를 창조하심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죽음의 한 방면은 완전히 적극적인 것으로서, 이는 특별히 그분의 교회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다. 이 점에서 그분의 죽으심은 죄와 죄인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사람 속에 깊이 새겨 주기 위하여 바울은 창세기 2장의 사건을 예로 들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비밀들 중의 한 가지이므로, 우리 눈이 열릴 때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창세기 3장 이후에는 가죽 옷을 지은 것에서부터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구약 전체 안에 주 예수님이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말한 예표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 예표의 어떤 것으로도 그분의 죽음을 설명하지 않고 창세기 2장에 있는 예표를 인용하였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해야 하며 창세기 3장에 와서야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에 죄와 무관하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는 예표가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죽음이 타락 이후에 있지 않고 타락 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예표는 창세기 2장에 있다. 우리는 이 예표를 조금 보기로 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신 이유가 하와가 엄중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때 하와는 아직 피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도덕적인 문제가 전혀 없었고 달리 관여된 문제도 전혀 없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신 것은 그에게서 다른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무엇인가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아담이 잠든 것은 하와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산출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이 구절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와를 산출하기 위한 아담의 이런 체험은 그분의 신성한 계획 안에서 그분이 정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여자를 얻고자 하셨다. 그분은 그 남자를 잠들게 하여 그의 몸에서 갈빗대 하나를 취했으며 그것으로 여자를 지으셨다. 그런 다음 그녀를 그 남자에게 이끄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바 주 예수님의 죽음의 다른 면을 예표하는 한 폭의 그림인 것이다. 이 방면의 죽음은 주로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장에서의 아담이 잠드는 것에 상응하는 죽음이다. 결코 주님의 죽음이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오해하지 말라. 그 반대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이 속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인해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오늘 우리가 에베소서 5장에 있고 창세기 2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에베소서는 사람이 타락한 후에 쓰여진 것이고 타락의 결과로 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에베소서 안에는 우리가 피조될 때의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타락의 흉터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티나 주름 잡힌 것'을 언급할 리가 없다. 우리가 아직 이 땅 위에 있고 또한 타락이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씻음이 필요한 것이다(엡 1:7). 우리는 반드시 구속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기 위한 노선에 큰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삽입된 것, 곧 하나의 '비상' 조치로 보아야 한다. 구속은 우리 마음속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사람이 구속을 위해 피조된 것처럼 구속을 최고로 평가하지 않았다. 타락은 진실로 하나의 비극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의 노선에서 급격히 하락하게 만들었다. 그런 반면에 속죄는 확실히 복된 회복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도말되었고 우리 자신들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구속이 이루어진 후, 또 한가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아담이 얻지 못했던 것을 얻는 것이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잊어버리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담은 생명나무로 예표된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우리는 이 죽음과 부활이 한 가지 일임을 거듭 강조한다)로 말미암아 그분의 생명은 해방되었고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담이 얻지 못한 것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셨다. 주님을 믿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왜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죽음을 말할 때에는 그 뒤에 정죄가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죄로 인하여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담이 잠든 것은 그 이전에 발생했다. 그러므로 여기 예표는 구약의 다른 예표와 같지 않다. 죄와 속죄에 관하여는 항상 양이나 암송아지를 잡았다. 그러나 여기서 아담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잠들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깨어났다. 그러므로 그가 예표한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증가를 얻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하와가 개별적인 창조로 인하여 아담과 동등한 어떤 독립된 사람이 되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 아담이 잠듦으로써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산출하신다. 하나님의 '둘째사람'은 이미 그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셨고, 그분의 교회는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으그분으로 조성되었으며, 그분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부활의 생명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에게는 한 아들, 곧 그분의 독생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가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도록 그분의 독생자에게 많은 형제들이 있기를 원하셨다. 이렇게 될 때 한 아들만이 아니라 많은 아들들을 갖게 되신다. 한 알의 밀이 죽음으로 많은 밀알을 맺은 것이다. 첫 밀알은 본래 유일한 밀알이었으나 이제 많은 밀알 중에서 첫 밀알이 된 것이다. 주 예수님이 그분의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났다. 이상 우리가 인용한 성경의 예표들은 이 진리를 설명해 준다. 우리가 본 하와의 예표에서 단수가 복수를 대치하였다. 십자가의 수확은 오직 한 사람, 곧 하나님 아들의 신부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하나의 산제물 우리가 말했듯이 에베소서 5장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면은 로마서에서 말한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방면은 우리가 연구하는 로마서의 최종적인 목적이다. 구속이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의 노선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서신이 우리를 이 방면으로 안내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많은 아들들(14절) 중에 맏아들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여기서는 의롭다 하심이 우리를 영광 안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영광은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들 안에서 표현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안에서 표현된다. 즉,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는 많은 사람들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구속을 받은 목적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 사랑은 8장 35절부터 39절까지의 제목이다. 8장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 12장에 가서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12장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전반부 여덟 장을 보았다. 이 여덟 장 다음은 삽입부로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루심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이 세 장을 건너뛰고 12장을 계속해서 보기로 하자. 우리는 앞장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5장은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6장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말하며, 7장은 우리의 천연적인 구제 불능임을 말하고, 8장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12장은 구속의 결과,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을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에 따라 말해 볼 때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결과이며 모든 말씀의 결론과도 같다. 로마서 12장에 이어지는 각 장들은 우리의 생활과 행실에 대해 매우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이 교훈들도 역시 거듭 헌신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마서 6장 13절은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나 12장 1절에서의 바울의 강조점은 조금 다른 듯하다. 그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한다. 이 헌신의 새로운 부르심은 '형제' 된 우리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8장 29절의 '많은 형제'를 상기하게 한다. 우리를 부르사 동일한 믿음을 갖게하는 절차는 바로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일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온 몸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드림은 개별적인 것이고 제사는 단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하나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봉사는 바로 단체적인 봉사이다. 결코 우리의 드림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는 우리의 드림이 전체적인 봉사에 도움이 되고 이것을 하나님은 만족해 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봉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롬12:2)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12:5) 고 말하고, 신성하고 새로운 사실에 따라 "너희 중 각 사람" (롬 12:3)을 권한다고 말한다.그 뒤로 나오는 실제적인 교훈들도 다 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 시대 안에서 주 예수님이 그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은 단독적인 개인이 아니라 한 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을 주셨지만 (롬12:3) 사람들과 격리된 개인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반드시 완전한 몸으로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신장에 이를 수 있고 그분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이 점을 볼 수 있기를!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3절부터 6절까지에서는 사람의 몸이라는 표징을 통하여 우리가 서로 연락하여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개개의 그리스도인은 몸이 아니라 몸의 지체일 뿐이다. 사람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다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귀는 자신이 눈도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귀가 아무리 기도하여도 스스로는 무엇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온 몸은 눈을 통하여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비유로 말한다면, 내게 듣는 은사밖에 없을지라도 보는 은사를 가진 사람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혹 나는 걷는 은사를 가진 발로서 일하는 손의 은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손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주님의 일에 대한 우리의 공통적인 태도는 바로 "나는 내가 아는 것만 알고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해도 상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는 일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아는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강하게 말하거니와, 이것은 단지 사람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 안에서의 극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서로'가 없다면 결코 우리는 살아나갈 수 없다. 이것이 함께하는 기도가 중요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함께하는 기도는 몸의 도움을 이끌어 오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19절,20절의 말씀은 이 점을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나 개인이 단독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나는 몸과 하나된 기초 위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몸의 도움이 없이 우리는 결코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봉사의 방면에서 이것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만일 단독적으로 섬긴다면 나는 좋은 봉사를 할 수 없다. 또한 주님은 수고를 무릅쓰고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그분은 내게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듯 몸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 많은 일들을 막바지에 이르게 하시고 사방의 문을 잠궈 버리시며 벽에 부딪치는 것을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그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몸은 비유가 아닌 하나의 사실이다. 성경은 교회가 몸과 같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했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모든 지체가 연결되는 것이 바로 몸이다. 왜냐하면 모든 지체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그분이 각 지체 가운데 분산 되어 있는 것과 같다. 한번은 중국계 형제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이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어느 주일 주님의 상에서 떡을 뗄 때에 나는 그들에게 떡을 떼기 전에 그 떡을 자세히 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떡이 이미 그들 개개인 안으로 들어갔지만 떡은 여러 개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라는 것을 지적해 주었다. 떡은 나누어졌으나, 그리스도께서 분리된 것은 아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한 영이시며, 우리도 그분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천연적인 상태와는 정반대이다. 아담 안에서 나는 아담의 생명을 가졌고 본성에 있어서 그 생명은 단독적인 것이다. 죄 안에서는 연결과 교통이 없고 자기의 이익만을 돌보고 남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다. 주님과 계속 동행할 때 나는 나의 죄와 천연적인 능력이 처리받아야 할 뿐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생명도 처리받아야 함을 보게 된다. 이 생명은 자만하고 자족하며 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몸과 연결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나는 죄와 육체의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여전히 깨지지 않는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개인주의자일 것이다. 내가 거룩함과 승리와 열매를 많이 맺고자 하는 동기는 매우 단순할지라도 내 자신만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몸을 돌보지 않는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 그분의 처리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항상 그분의 목적과 충돌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 개인은 책망하지 않으시지만 나의 개인주의는 책망하신다. 하나님께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밖의 분열된 각종 종파가 아닌 우리 안의 개인주의 마음이다. 그렇다. 내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단독적인 낡은 생명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또 부활 안에서 단독적인 그리스도인 만이 아닌 더욱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순간순간 상기하기 위해 십자가의 역사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극히 큰 차이가 있다. 이 점을 볼 때 나는 즉시 단독적이기를 포기하고 교통를 추구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다른 사람안의 그리스도의 생명에 매혹 되어 나로 더 이상 개인적인 노선을 갈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더 이상 시기나 다툼이 없게 되고, 개인적인 일과 개인적인 이해와 개인적인 야망과 사랑도 다 사라지게 된다. 이때 우리의 관심사는 누가 그 일을 하는 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성장하는가에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점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중대하고 신성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영 안에서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이것을 보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하늘에 속한 계시가 필요하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로 이것의 모든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생활과 일에는 혁신적인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그분을 힘입어 넉넉히 이김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항상 타락에까지만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초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보신다. 타락전에 하나님은 하나의 갈망을 갖고 계셨는데 이 갈망은 장차 오는 시대에서 완전히 실현 될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들어올 것을 아셨기 때문에 구속을 예비하셨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 교회에 대해 계시한 그분의 갈망 안에는 죄 문제가 전혀 없다. 그분은 구속의 역시 전체를 뛰어넘어 장래 영원 안에서의 교회를 보시는 듯하다. 교회의 사역과 교회의 장래 역사는 완전히 죄와 무관하다. 이는 교회가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영광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은 타락한 사람을 표현하지 않고 영광을 얻으신 인자의 영광을 표현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통치권을 얻은 교회에 이르게 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비록 우리가 구속의 역사 안에 서 있을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께 드려질 교회로 예비되기 위하여(이미 타락으로 인한 부패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명수와 씻는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보완되어야 할 결함과 치료되어야 할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교회가 '흠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은 죄와 상처와 죄의 해를 입은 역사가 이제 잊어버린 바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약속은 얼마나 귀한지! 이 말씀 안에 어떠한 은혜가 감취어져 있는지!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위치이다. 이 시대는 곧 끝날 것이다. 사탄의 권세가 오늘날처럼 격렬한 적은 없었다. 우리의 씨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권세들과 능력에 대한 것이다(롬8:38, 엡6:12). 이들은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고 파괴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많은 일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한다. 우리 개인은 결코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개인이 할 수 없는 것을 교회는 할 수 있다. 죄악과 자신을 신뢰함과 개인주의는 하나님의 뜻을 공격하기 위해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탄이 사용하는 최상의 무기이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것들을 폐하셨다. 우리가 그분이 이미 이루신 것 -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 을 신뢰할 때(롬8:33-34) 음부가 이기지 못하는 방어막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가 바로 그분의 교회로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
제 12장
십자가와 혼(魂)적 생명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구속을 완전히 마련해 놓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은 바울이 "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것" 이라고 말한 영원한 경륜을 실패할 여지가 없도록 확실하게 마련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이제 그 경륜을 선포하셨다.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것" (엡 3:9-11)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로 인해, 우리 안에서 그 목적이 실현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두 개의 결과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한편으로 십자가의 역사는, 주님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그 생명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소위 "십자가를 지는 것" 을 가능케 했다. 즉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매일매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우리가 동참하여, "육적인 사람" 을 점진적으로 성령님께 복종하도록 이끌어감으로써 우리 안에 그 새 생명이 나타나기 위한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히 이들은 동일한 일의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이다. 마찬가지로 분명히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활의 진보에 대하여 특별히 더 논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주된 강조점을 그 생활로 들어가는 한 분기점에 두었다. 이제는 주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받아야 할 훈련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제자의 활동을 더 분명하게 들여다 보자. 주 예수님은 제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이제 우리는 육적인 사람과 "십자가를 지는 것" 에 대한 논의를 할 때가 되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루하겠지만 다시 한번 창세기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그의 목적이 좌절되었는가를 상고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그 목적과 조화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원리를 더 분명히 터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타락의 참된 성격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약간의 계시라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항상 "사람" 이란 말을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4)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사람(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우리는 아담이 내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영과 외적으로 물질세계와 접촉하기 위한 몸을 가진 생혼(生魂 - 이것은 living soul에 대한 번역이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령으로 나와 있지만, 여기서 저자는 혼(spririt)과 영(soul)을 철저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부득이 하게 이 둘을 구분하여 번역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living soul 을 "생혼" 이라고 했다. 신학적으로 저자는 인간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는 삼분법을 택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영과 혼을 하나로 보아 영혼과 몸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택하고 있다. 독자들은 본 장을 이해함에 있어서 저자가 삼분법을 채택하여 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 역자 주) 으로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배운다 (살전 5:23과 히 4:12 과 같은 신약성경의 구절들은 이상과 같은 인간 존재의 삼중 성격을 확언하고 있다.) 아담은 그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의 세계와 접촉하였고 그의 몸으로 물질세계와 접촉하였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양면을 지니고 있는 인격이었으며, 스스로 움직이며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실존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자의식을 가지고있고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 곧 "생혼" 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아담이 완전하게 창조된 것을 보았다. 이 말은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다. 아담은 어딘가 마지막의 손길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아담 안에서 하시고자 했던 모든 일을 마치지 않으셨다. 이직도 계획 속에 있는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완성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에 대한 그의 목적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계셨다. 그 목적은 인간 자신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확보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이 일에 도구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연합에서 비롯되는 협동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 한 혈통을 가진 인류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지체들 속에 거하는 인류를 가지기 원하셨다. 그와 같은 인류는 결국 사탄을 몰락시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들을 성취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었다. 다시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과 교제도 하며 또한 자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보았다.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그는 말하자면 아직 최종적인 방향이 결정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가 원하면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목표는 아들의 명분을 주시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안에서 그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은 앞에서 보았듯이 에덴 동산에서는 따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지닌 생명나무로 나타났다. 만일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이 자진해서 그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편을 택하여(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다면, 그 때 하나님은 그 생명이 인간에게 연합되게 하셨을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아들들을 확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몸을 돌렸다면,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후자의 선택은 사탄과 연루된 것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의 혼 우리는 아담이 선택한 길을 알고 있다. 아담은 두 나무 사이에 서 있다가 사탄에게 굴복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결정지었다.그때부터 아담은 지식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지점에 이른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첫 사람으로 하여금 혼적으로 과도한 성장을 하게 만들었다.왜냐하면 그 열매는 눈에 보기에 좋아서 그가 그것을 "갈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지성이 성장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가 강화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그는 언제나 자신이 갈 길을 결정할 수가 있었다. 그 열매는 혼의 발육과 완전한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생혼일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는 혼에 의해 살게 된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혼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혼은 그 날부터 자유선택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능력을 가지고인간에게 활력을 주는 영의 자리를 빼앗았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혼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신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역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셨다. 오늘날의 인간 안에는 단순히 혼을 가지고 사용할 뿐만 아니라 혼에 의해 살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이 아담의 타락에 있어서 사탄이 일으킨 일이다. 사탄은 아담을 꾀어 그의 혼을 성장시켜 혼으로부터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택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이것을 개선한다는 것은 혼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을 때, 우리는 힘을 잃거나 무감각해지거나 개성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때는 언제나 혼이 하나님께 참으로 순복하는 가운데 여전히 그 일에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하신 한계,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 혼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안에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한계를 떠나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하고 계신 일은 포도원의 불필요한 가지들을 제거해 버리는 일이다. 우리 혼에는 방치되어 그대로 자라고 있는 가지와 에 맞지 않게 자라고 있는 가지들이 있다. 가지들을 모두 찾아 잘라 버려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런 가지들을 잘라 버리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우리 앞에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아들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이끄신다. 둘째, 하나님은 선악과의 결과인 다른 육적인 자원을 제거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 안에서 직접 일하고 계신다. 매일같이 우리는 이 두 교훈을 배우고 있다. 즉 전자의 생명을 부활시키며, 혼적 생명을 억제하고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 이 두 과정은 언제나 계속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그의 아들의 완전히 성숙한 생명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혼을 아담의 출발점으로 다시 데리고 가신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1)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 안에서는 만족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단지 어떠한 일을 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에 유전을 통하여 받은 힘이 있다 할지라도 힘만을 의지하여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 실과를 먹음으로써 아담은 고유의 행위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즉시 사탄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당신은 주님을 알게 될 때 그 행위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주님께서 그것을 잘라 버리신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없음을 발견 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이,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 오, 친구들이여!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실로 걱정하고 있지 않을 때가 대단히 많다. 우리는 하나님께 정중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주님께서 이 일을 원하시지 않는다면 저는 이 일을 할 수 없나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잠재의식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라고 하시지 않더라도, 또한 그 일을 위해서 힘을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일을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행동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힘을 내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발육한 혼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자아는 지나치게 성숙하였다. 우리가 그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은 감금되어 활동을 못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자아의 힘 혼적인 능력이나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 주님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그 원리를 생활 원리로 삼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 원리에 따라 살기를 거절한다. 그들은 그 원리가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그 원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능력의 원천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르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 원리를 의지하고 이용하며, 또 그 원리가 유일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이것에 대한 명확한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과거에 우리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즉 여기에 아주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훌륭한 경영 능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겸비한 사람이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저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교회에 큰 자산이 될터인데! 만일 그가 주님의 사람이 된다면 주님께 큰 영광이 될터인데! "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의 좋은 성격은 어디서 왔는가? 그 훌륭한 경영 능력과 건전한 판단력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새로운 출생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육으로 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선생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신생으로 말미암지 않고 육적인 출생으로 말미암은 것은 모두 육이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이다. 그 말은 그다지 유쾌한 말은 아니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혼적인 능력, 또는 자아의 힘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 자아의 힘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 "내가" 물려받은 타고난 은사와 자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날 때부터 예리한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신생하기 전에, 육적인 출생으로부터 발전된 그것을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일어난다. 나는 회심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내 영 안에 심오한 일이 일어났고, 우리의 영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본질적인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 후부터 내 안에는 두 가지 것이 존재하고 있다. 이제 나는 영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되었으나, 동시에 육적인 출생으로부터 받은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연적인 경향은 이렇다. 전에 나는 나의 지성을 사용하여 역사, 사업, 화학, 세계의 여러 문제들, 문학, 시 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나는 그 연구를 성공시키기 위해 나의 여러 지성을 최선을 다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욕망이 변하였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그 동일한 지성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고 있다. 그런고로 나는 관심의 대상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나의 일하는 방식을 변경시키지는 않았다.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나의 관심은 완전히 변하였다.(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라) 그러나 이제 나는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데 사용하던 그 동일한 능력을 고린도서와 에베소서를 공부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새로운 창조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단순한 관심의 변화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고 잇는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힘이 발휘되는 통로는 변경하였지만 그 힘의 원천은 변경하지 않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일에 그와 같은 요소들이 많이 개재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웅변의 문제를 생각하여 보자. 선천적으로 웅변가의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정말 비상한 설득력을 가지고 어떠한 사건을 청중들 앞에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회심하여 영적인 일에 관해서 자신이 정말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그들을 강단에 세워 설교하게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설교할 때에 그들의 타고난 재능을 사용하라고 격려한다. 이러한 경우에도 주제는 변화되었으나 능력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의 능력에 있어서, 문제는 그것의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원천, 즉 그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임을 잊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데 어떤 힘을 사용하느냐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서, 우리는 우리의 힘의 원천을 너무나 사소하게 생각하는 반면에 그 일의 목적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음의 가정적인 예화는 현 논의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는 아주 훌륭한 능변가이다. 그는 어떠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든지 유창하고 설득력있게 잘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는 대단히 서툰 경영자이다. 그런데 반해서 B는 말을 잘 할 줄 모른다. 그는 자기 표현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늘 주제를 빙빙 돌며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사업상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는 대단히 유능하고 훌륭한 경영자이다. 이 두 사람이 회심하여 모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 두 사람을 찾아가 어느 집회에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그 두사람이 모두 승락을 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나는 그 두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누가 기도를 더 열심히 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두말할 것 없이 B이다. 왜 그럴까?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웅변에 있어서는 자기가 의지할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이일을 행할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저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물론 A도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B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신뢰할 만한 타고난 재주가 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번에는 그들에게 말하는 것 대신 그 집회의 실제적인 사무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고 가정해 보자.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입장은 정반대가 될 것이다. 이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A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조직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B도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 먼저와 같이 다급한 기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사업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A와 같이 그렇게 자기의 부족함을 의식하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연적인 은사와 영적인 은사의 다른 점을 알겠는가? 우리가 기도 없이, 그리고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육신으로 더럽혀진 육적인 생명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물론 어느 특정한 일을 위해 타고난 은사가 없는 사람들만이 그 일에 적합하다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여기에 있다. 타고난 재주가 있든 없든 간에(우리는 모든 은사에 대해 찬미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은 "육적인 사람" 에 속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우리는 부활하신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의존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사리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이웃을 보고 부러워 하며 시기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기가 십자가의 그와 같은 역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 일에 장벽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회심한 지 얼마 후에 시골 동네로 다니면서 전도를 하였다. 나는 고등교육도 받았고 성경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시골 사람들을 가르치기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구비되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그 시골 사람들 중에는 글자를 모르는 부인네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곳을 몇 번 방문한 후, 그들이 비록 무식하기는 하지만 주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떠듬 떠듬 읽는 그 "책"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책이 증거하고 있는 그 "분"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육적인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 많았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그때의 나처럼 거의 육적인 무기만을 신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나는 전에 한 어린 형제를 만난 일이 있다. 어린 형제라는 말은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주님은 그로 하여금 많은 환난을 통하여 그와 같은 지식을 얻게 하셨다. 나는 그 형제와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주님께서 실제로 형제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꼭 한 가지 있어요. 제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형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정말입니까?"하고 나는 거듭 물었다. "아무 것도 못하고 말고요, 물론 저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것이 나의 골칫거리였습니다. 선생님도 알다시피 저는 늘 저 자신을 신뢰해 왔어요. 저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님은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다 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내가 주님을 떠나서 행한 일이나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가치 판단에 이르러야 한다. 내 말은 우리가 많은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회를 열고 예배당을 세울 수 있다. 우리는 땅 끝까지 가서 선교회를 세울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 5:13)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주의 유일하고 정당한 창시자이시다 (창 1:1)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의 유일하고 정당한 창시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계획하고 착수하는 모든 일은 그 기원이 육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아무리 간절히 그 위에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 달라고 간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영역에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사업이 몇 년 동안은 지속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당신은 여기를 이렇게 조절하고 저기를 개선하면 그 일이 한층 더 잘될거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그 일은 성공할 수 없다. 기원은 도착지를 결정짓는다. 라서 원래 "육으로 난" 것은 아무리 많이 "개선" 한다 하더라도 결코 영적인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육으로부터 온 것은 육이다. 것은 결코 그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육은 무익하니라." 오직 위로부터 오는 것만이 존속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들음으로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마다 친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은 자아에서 온 것이다. 것은 근원이 옛 창조에 있으며, 나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의미를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주실 때까지는 우리가 원리상 동의할지 모르나 사실을 실제로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가르침에 동의하고 심지어 좋아하기까지 할지 모르나 실제로 자아를 증오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어느 특정한 문제를 직면할 때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불결합니다. 그것은 불순합니다. 주님, 저는 그것을 봅니다!" "순결" 이란 말은 복된 말이다. 나는 언제나 그 말을 성령과 결부시킨다. 순결은 전적으로 성령님께 속한 것이다. 불순은 혼합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육적인 생명 자체로는 하나님의 일에 결코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그 교리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불순한 것에 대하여 자신을 협오하게 된다. 그러나 그 지점에 도달할 때에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우리는 잠시 후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빛과 지식 물론, 만일 어떤 사람이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빛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그가 하나님께 사로잡혀 주님과 함께 전진하려고 할 때에만 빛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 하나님의 것과 단순히 인간에게 속한 것을 알기 위해서, 또 참으로 하늘에 속한 것과 단지 땅에 속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지 혹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이나 감각이나 상상을 따라 행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빛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따르고자 하는 지점에 도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빛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형제 자매들과 대화를 할 때, 거듭 거듭 제기되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즉 "내가 성령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극들 중 어느 것이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어느 것이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이 점에 있어서는 거의 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좀 더 나아가 있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 안을 들여다보며 구별하고 식별하고 분석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더 한층 깊은 속박 가운데로 이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위험스러운 상태이다. 왜냐하면 자기 분석이라는 불모의 길을 따라가서는 결코 내적인 지식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우리의 내적 상태를 검토하라는 말씀이 없다. 그런 길은 우리를 불확실과 불안정과 절망으로 인도할 뿐이다. 물론 우리는 자기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상태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완전한 길을 잘못 들고도 잘못 들었다는 것을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우리는 완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기 지식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안으로 돌림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감정과 동기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분석하여, 우리가 육으로 행하고 있다느니 혹은 성령으로 행하고 있다느니 하는 선언을 함으로써 오는 것도 아니다. 이 문제를 조명하고 있는 몇몇 구절이 시편에 있다. 첫번째 구절은 시편 36편 9절이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나는 그 구절이 구약성경에서 가장 좋은 구절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두 광명이 있다. 즉 거기에는 "주의 광명"이 있고, 우리가 그 광명 가운데로 들어갈 때에 우리는 "광명을 볼" 것이다. 그런데 두 광명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첫째 광명은 객관적이고 둘째 광명은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광명은 하나님께 속한 광명이지만 우리에게 비추어진 광명이다. 그러나 둘째 것은 그 광명에 의해 알게 된 지식이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는 볼 것이다. 자기 안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나 내성적인 자기 검토는 우리를 그 밝은 지점으로 결코 이끌어 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있을 때 우리는 보게 된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얼굴이 깨끗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원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보는가? 아니다. 우리는 거울을 찾아가지고 그것을 빛이 비치는 곳으로 가지고 간다. 그 빛 가운데서 모든 것은 밝게 보일 것이다. 시각은 느낌이나 분석에서 오지 않는다. 시각은 오로지 하나님의 빛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온다. 그리고 일단 빛이 들어 왔을 때는 더 이상 어떤 일이 옳고 그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시편 139편 23절에 기록된 말씀도 역시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살피사" 라는 말씀의 뜻을 당신은 이해할 것이다. 그 말씀은 분명히 내가 나를 살핀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살피사"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나를 살피사" 라는 뜻이다. 영적 조명은 그렇게 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친히 들어 오셔서 살피시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말은 내가 나의 참 상태를 방관하면서 맹목적으로 행하여도 무방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것이 중점이 아니다. 문제의 중점은 여기에 있다. 즉 나의 자기 검토가 아무리 내 안에서 시정해야 할 것들을 많이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살핌은 실제로 표면 아래로는 결코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참다운 지식은 내가 자신을 살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살피시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빛 가운데로 들어온다는 것이 사실상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주님의 광명 가운데서 광명을 보는가? 여기서 다시 시편 기자가 우리를 도와 준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우둔한 자" 이다. 우리가 명철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한다. 특히 우리 자신의 참다운 성격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여기에서 역사한다. 신약성경에서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구절은 히브리서 4장 12,13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그렇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예리한 성경말씀이다. 그것은 우리의 동기를 살펴, 그 근원이 혼에 있는지 혹은 영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는 교리적인 면을 떠나 실제적인 면으로 가보자.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정직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계속 전진해 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이 크게 잘못되었는지를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는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어떤 종은 우리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대면시키는 일에 쓰임을 받아 왔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다. 혹은 아마 우리가 친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에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서 혹은 성경 자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때에 우리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본다. 우리는 마음에 찔림을 받는다. 우리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저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불순한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혼란이 있습니다. 저는 얼마나 눈이 어두웠는지요! 여러 해 동안 저에게 잘못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빛이 들어오므로 우리는 빛을 본다. 하나님의 빛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관한 빛을 보게 한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그것은 언제나 성경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중 일부는 주님을 진실하게 알고 있는 성도들과 친하게 지내 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거나 대화하는 동안, 우리는 그들로부터 비쳐 나오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성도를 한 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지금 주님께 가 있다. 나는 언제나 그 자매님을 "빛이 비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매님의 방에 들어가기만 해도 나는 즉시 하나님의 임재를 감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대단히 연소하였고 회심한 지도 겨우 이 년 남짓 한 때였다.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많은 계획들과 아름다운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이 많은 계획들이 이루어 진다면 참으로 놀라울 거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 모든 생각들을 가지고 이러 저러한 것이 할 일이라고 그 자매님을 설득하려고 찾아간 일이 있다. 내가 벌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자매님은 평소와 같은 태도로 몇 마디 말을 하였다.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나의 "행함"과 계획은 모두 자아 중심적이며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끌려 왔다. "주님, 저의 마음은 여러 가지 인간적인 활동에만 집중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와 같은 일에 전혀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은 성도가 있습니다. 저에게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자매님은 단 하나의 동기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그 자매님의 성경 겉장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주님, 저는 저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그 자매님은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이 어디 있든지 당신은 그 사람이 온통 빛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과 그 빛이 다른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증거이다. 빛은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들어가는 데마다 빛을 비춘다. 그것이 유일한 필요 조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빛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놓는다면 하나님은 빛을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꼭 닫고 열쇠로 잠그고 막았을 때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패배는 우리가 잘못한 데 있다기 보다는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다. 잘못은 자아의 힘의 문제일지 모르나, 잘못에 대한 무지는 빛의 문제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자아의 힘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오, 우리는 성실하고 겸손해야만 한다.! 열려 있는 자들만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면서 명철이 없을 수 없다. 시편 기자와 같이 다시 이렇게 말하여 보자.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시 43: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전보다 더 죄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한다.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뜨여 죄에 대한 승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죄로부터 구원과 승리를 구하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있다. 주님께로 향하는 움직임, 하나님을 향한 참된 거룩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주님을 찬미하라!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루어져야 할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범죄뿐만 아니라 인간 생명 그 자체이다. 인간의 혼적인 능력이나 추진력의 문제는 여전히 그 문제의 핵심이다. 범죄나 보다 명백하게 나타나는 육신의 문제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피상적인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문제의 근원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아담은 살인을 범함으로써 죄를 세상에 들어오게 하지 않았다. 살인은 죄보다 후에 온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 자력으로 행할 수 있는 지점까지 자기의 혼을 성장시키는 길을 택함으로서 죄를 들어 오게 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성취할 도구로 사용될 인류를 확보하실 때에 그들은 그들의 생명, 바로 그들의 호흡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 나무" 가 되실 것이다. 내가 거듭거듭 나 자신 안에서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과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자아" 에 대한 참다운 계시이다. 내가 거듭 말하거니와 내 말은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며 "이것은 혼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영에서 나온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암흑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도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님 자신이다.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베드로, 바울, 요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비추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빛이 계시와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왔다. (사 6:5; 겔 1:28; 단 10:8; 눅 22:61.62; 행 9:3-5; 계 1:17) 하나님의 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죄와 자신에 대한 증오심을 결코 체득할 수가 없다. 나는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한 주님 자신의 내적 계시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빛은 교리만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해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시다. 또한 그는 살아있는 말씀이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은 계시를 가져다 준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14). 그와 같은 영적 조명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분명하고 면밀해질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보게 되어, 우리의 모든 신뢰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빛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것이다. 빛은 깨끗하게 한다. 빛은 살균 소독 작용을 한다. 빛은 있어서는 안될 것을 죽인다. 빛의 광휘 안에서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것" 은 우리에게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실이 된다. 인간 본성의 부패와 우리 자아의 가증스러움과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혼적 생명과 힘이 하나님의 역사에 실제적인 위험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공포와 전율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한다면 얼마나 우리를 철저하게 다루셔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이제 전례 없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지배를 벗어날 때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광범한 의미에서 다시 우리의 도움이 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인간의 혼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해결할 십자가의 역사의 일면을 상고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대한 철저한 이해만이 주 예수님 자신이 취하셨던 그 의존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씀 가운데 나타내셨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 5:30) |
제 13장 성장의 길 : 십자가를 지고
전장에서 우리는 여러 번 주님께 대한 봉사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제 인간의 혼적 생명으로 말미암아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고찰함에 있어서, 먼저 그와 같은 봉사를 규정하는 원리들을 논의하면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우리의 세상을 다스리는 영적인 법칙을 세워놓으셨는데, 주님을 섬기고자 애쓰는 사람은 누구나 그 원칙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구원의 기초는 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봉사의 조건은 그에 못지 않게 분명한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인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과 부활의 원리는 주님을 위한 우리의 생활과 봉사의 기초가 된다.
모든 참다운 봉사의 기초
그 누구도 죽음의 원리와 부활의 원리를 모르고서는 참다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주 예수님 자신도 그 기초 위에서 봉사하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3장에서 주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발견한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주님께 어떠한 죄가 있거나 씻음을 받아야 할 것이 있어서가 아니였다. 우리는 세례의 의미를 알고 있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다, 주님의 사역은 그 기초 위에 서시기 전까지는 시작되지 않았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자진해서 죽음과 부활의 자리를 취하신 후에야 성령님께서 주님께 임하셨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사역은 시작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주님은 죄없으신 분이셨다. 이 지상에 발 붙인 사람 중에 죄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주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으로서 그의 아버지와 독립된 인격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는 주님을 언급할 때 대단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의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말은 분명히 주님께서 자기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이 시사하고 있는 대로 주님은 자기 뜻을 가지고 계셨다. 인자(人子)로서 주님은 뜻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 뜻을 행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것이 핵심이다. 주님 안에 있는 요소 중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것은 인간의 혼이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때 그 혼을 받으셨다. 우리 주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몸은 물론이고 혼 또한 가지고 계셨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혼과 몸을 가지고 있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혼으로부터, 즉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즉 주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사탄이 와서 유혹한 사실을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사탄은 주님께 돌을 떡이 되게 함으로써 주님의 근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고, 성전 뜰에 기적적으로 나타남으로써 그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을 즉시 확보하고, 주님을 위하여 예정된 세계 통치권을 지체없이 장악하라고 유혹하였다.
당신은 왜 사탄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이상한 일을 하라고 유혹하였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사탄은 더 철저한 방법으로 주님이 죄를 짓도록 유혹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사탄은 더 잘 알고 있었다. 사탄은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이것이다. "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엇을 해서라도 그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여기에 도전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반드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왜 당신은 지금 그것을 증명함으로써 최종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가?"
사탄의 모든 간사한 목적은 주님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힘으로, 즉 혼으로부터 행동하도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심으로써 그와 같은 행동을 단호히 거절하셨다. 아담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행동하였다. 그것이 에덴 동산의 전 비극이었다. 그런데 인자는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입장을 취하신다. 후에 주님은 그것을 그의 기본 생활의 원리로 삼으셨다. 나는 헬라어로 된 다음의 말씀을 좋아한다. "아들이 ......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 5:19) 혼적 생명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 주님의 모든 사역을 지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갈보리의 사건이 아직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을지라도 주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기 전까지 지상에서 행하신 모든일은 죽음과 부활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그 기초 위에서 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즉 만일 인자께서 일을 하시기 위해 (비유와 원리상으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그 외에 다른 갈로 갈 수 있겠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님의 종은 자기 생활 가운데 그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친히 알지 못하고서는 주님을 섬길 수 없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가실 때 그들에게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주님은 죽으셨고 또한 부활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하실 때까지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분부하셨다.
그런데 이 성령의 능력, 주님께서 '위로부터의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공로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격의 모든 보배가 담겨 있는 그릇으로서, 우리에게 그것을 전해 주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 보배를 "포함하고" 있고 또 그 보배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중개 역활을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주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을 때 비로소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임하여 그들로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가치가 없이는 그와 같은 증언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거기에도 똑같은 사실이 있다. 민수기 17장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 있다. 아론의 성직 문제가 논란이 된 것이다. 아론의 참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종인지의 여부가 사람들 가운데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의혹을 가지고 실제로 이렇게 말하였다. " 저 사람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는지 인 받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가 그의 종이며 누가 아닌지를 증명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는가? 모세는 생명이 없는 열두 개의 지팡이를 하룻밤 동안 성소 안 하나님 앞, 증거궤 앞에 두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주님은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는 지팡이로 그의 택한 종을 표시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 말씀의 의미를 안다. 움이 돋는 지팡이는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하지 않은 봉사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은 것은 아론이 참다운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역에 이른 자들만을 그의 종으로 인정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을 보아왔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사함에 대해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죄의 권능에서 구하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았으며, 이제부터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않도록 우리 옛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나아가 인간의 자기 의지의 문제가 제기되고, 우리의 헌신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진실로 우리 사역의 출발점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문제의 핵심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혼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이다.
그 다음에 로마서 7장에는 생활의 거룩함, 곧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거룩의 문제를 다루는 또 다른 면이 제시되어 있다. 거기에서 당신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의로운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발견한다. 그 결과 그는 율법 아래로 들어오게 되고, 율법은 그를 발견해 낸다. 그는 자신의 육적인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지점에까지 이끌어와야 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릴 수 없다. 나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여 주실 것을 믿을 뿐이다." 이 교훈을 얻기 위해, 또한 주님의 죽음의 가치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깊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도 우리 중에 많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실제 생활의 거룩에 관하여 로마서7장에 언급된 "육" 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혼적 생명의 육적인 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경험상으로 알고 있어도 우리가 실제로 주님의 일에 사용되기 전에 주님의 죽음이 개입해야만 하는 영역이 아직 더 남아 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더라도 이 문제가 우리에게 실현되기까지는, 우리는 주님이 사용하시기에 아직 안전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의 격언대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께 사용되어 벽을 열 두 자 쌓았다가, 그 다음에 자기 힘으로 열 다섯 자를 무너뜨리고 있는가! 우리는 어느 면에서는 쓰임을 받고 있으나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일뿐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일도 파괴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어딘가 십자가로 처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혼을 어떻게 처리하시고, 특별히 이것이 주님에 대한 우리의 봉사의 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십자가의 주관적인 역사
이제 복음서에서 다음 네 구절을 살펴 보자. 이 구절들은 마 10:34-39; 막 8:32-35; 눅 17:32-34; 요 12:24-26 이다. 이 네 구절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각 구절에는 주님께서 친히 인간의 혼의 활동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또 각 구절에는 혼적 생명의 다양한 면이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들 가운데서 주님은 인간의 혼이 단 하나의 방법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다. 즉 그것은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서 되는 것이다.
방금 본대로 현재 논의 중에 있는 혼적 생명, 또는 육적인 생명은 육신에 속한 옛사람에 관한 구절들에 나타나 있는 것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우리 옛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영단번에 이루신 사실을 강조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설명하려고 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세 번이나 "십자가에 못박는 것" 이 하나의 성취된 사실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로마서 6장 6절에는 "우리 옛사람이 .....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만일 그 말씀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옛사람은 최후로 그리고 영원히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깨닫고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십자가의 더 깊은 면이 있다. 이것이 이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짊어졌으니 이제는 내가 그것을 지지않으면 안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적인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십자가의 주관적인 역사" 의 뜻이다. 더구나 그것은 지속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주님을 한 걸음씩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혼과 관련해서 이제 우리 앞에 제시된 사실이다.
여기에서는 강조점이 옛사람의 경우와 동일하지는 않다. 여기에는 우리의 자연적인 은사, 재주, 인격 및 개성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의미에서 혼 자체의 "십자가의 못박힘" 은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 관해서 히브리서 10장 39절과 같은 말씀이 언급될 수 없을 것이다. "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영혼" 이라고 되어 있다 - 역자 주) (눅 21:19 ; 벧전 1:9 의 말씀과 비교하여 보라)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존재를 완전히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은 여전히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타고난 재능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재능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낙인을 찍으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영광스러운 부활 안에서 그 재능들을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자신의 열망을 나타내었다 (빌 3:10). 죽음의 낙인이 항상 혼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성령님께 종속되어 있게 하고 결코 독립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바울과 같은 도량 있는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 암시되어 있는 타고난 재능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고린도의 상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수 있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에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2-5)
혼은 애정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심과 행동의 대부분은 이 애정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 애정 자체에 관해서 고의적으로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주의하라. 다만 우리 안에는 육적인 애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아갈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따라서 그것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경우에 우리의 행동 전체에 악영향을 줄 수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앞에 소개한 네 구절 중 첫번째 구절에서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7,38)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길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 놓으신 정상적이고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 다음에 나온 말씀은 무엇인가? "자기 목숨(혼)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혼)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9) 하나님의 길에서 우리를 떠나게 만드는 애정의 미묘한 역사에 은밀한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열쇠가 되는 것이 혼이다. 십자가는 그 혼의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주님께서 앞의 구절에서 말씀하신 의미에서 나의 혼을 "잃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중에는 혼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쉽게 혼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 우리는 혼에 굴복할 수 없고 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것이 혼을 "잃는" 것이다. 우리는 혼이 요구하는 바를 좌절시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느 일정한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어딘가에 있는 은밀한 사랑, 또는 우리의 진로를 역전시키는 어떤 인간적인 애정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 애정은 우리의 실생활에서 큰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는 거기에 와서 정결케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제 마가복음 8장을 살펴보자. 나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방금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의 손에 죽으실 것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주님, 그렇게 하지 마세요. 이런 일이 주님께 임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의 목숨을 구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주님은 사탄을 꾸짖듯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고는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다음의 말씀을 반복하셨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혼)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으로 위하여 제 목숨(혼)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전문제는 역시 혼의 문제이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그것은 자기 보존에 대한 혼의 욕망에 관한 것이다. 혼은 다음과 같이 교활한 제안을 한다. " 만일 내 목숨을 살려 준다면 나는 어떠한 일이든 할 것이며 어떠한 일이든 기꺼이 할 것이다.그러나 나는 살아있어야만 한다!" 거기서 당신의 혼은 소리쳐 도움을 청한다. " 십자가로 가는 것,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 오, 그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너를 동정해라! 너는 너 자신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말하려 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과 계속 동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혼의 음성이나 다른사람들의 혼의 음성을 부정하고 동시에 십자가를 개입시켜 자기 보존을 위한 그 호소를 묵살시키도록 해야 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내가 앞에서 나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그 성도가 여러번 나에게 이렇게 물은 일이 있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십니까?" 그것은 굉장한 질문이다. 그 자매님은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그 자매님은 언제나 "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그 질문은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더 깊숙이 가슴을 찌른다.
나는 그 자매님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주님과 논쟁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자매님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알았고, 심중으로는 그 자매님도 그 일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매가 이와 같이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 "주님, 저는 제가 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양보하지 마시옵소서. 잠깐만 기다려 주옵소서. 그러면 제가 주님께 양보하겠나이다." 그 자매님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양보하시고 또 자기에 대한 요구를 감해 주시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자매님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선하고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그것이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을 자진해서 기꺼이 버리는 자리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관심은 그의 주님을 위한 것이었고, 주님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사랑의 표시였다. 우리는 베드로가 감히 주님께 이의를 제기할 만큼 주님에 대한 기이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강한 사랑만이 그와 같은 시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베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혼이 혼합되어 있지 않은 영의 순결함이 있을 때 우리는 베드로의 과오에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좀더 빨리 인식할 것이며, 오직 거기서만 우리 마음의 참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한번 주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에서 혼의 문제를 다루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님의 재림에 관련되어 있다. "인자의 나타나는 날" 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그 날과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 (29,30절)을 비교하신다. 그리고 잠시 후에 주님은 성도의 "휴거" 에 대해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4,35절)
그러나 주님께서 롯을 소돔에서 불러내시는 것에 대한 언급과 "휴거" 에 대한 이 언급 사이에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말씀이 나온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31,33절)
롯의 처를 생각하라! 왜? 왜냐하면 "무릇 자기 목숨(혼)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잃는 자는 살 것이기 때문이다" (33절) 만일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휴거" 의 부름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서 "우리가 ....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라는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인자가 오실 때에 자동적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그 두 구절을 아무리 조화시켜 보려고 해도, 누가복음의 이 구절은 적어도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멈추고 사색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사실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장 긴급한 호소를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마 24:42과 비교해 보라)
거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분명히 휴거의 부름은 그 이전에 우리가 주님과 함께 행한 것과 전연 관계 없이 마지막 순간에 우리 안에 기적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마음의 진정한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 보화가 주님 자신이라면 뒤를 돌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은사를 "주신 자" 보다 그 은사 자체에(심지어는 하나님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역사에) 더 마음이 끌리기 쉽다.
실례를 들어 보자. 요즘(1938년) 나는 책을 한 권 쓰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덟 개의 장을 마쳤는데 앞으로 아홉 개의 장을 더 써야 한다. 나는 주님 앞에서 그 일을 대단히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리로 올라오라"는 부름이 있어 내가 "그러면 이 책은 어떻게 하고요?" 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은 아마 "좋다. 그 아래서 그 일을 끝마쳐라!" 고 하실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래층 "집 안에서" 하고 있는 귀한 일이 우리를 지상에 못박을 만한 충분한 이유, 즉 우리를 지상에 남겨 두는 구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혼을 따라 사느냐 영을 따라 사느냐의 문제이다. 누가복음의 이 구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지상의 일들 (죄악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라)에 종사하고 있는 혼적 생활을 설명하였다. 주님은 단지 결혼, 식목, 식사, 매매.... 등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모두 완전히 합법적인 활동들을 언급하셨다. 그러나 그 일들에 전념함으로 당신의 마음이 그 일들에 빼앗기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을 지상에 머물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혼을 잃는 것뿐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의 행동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비록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옛 직업으로 되돌아와 있었지만, 이제 그에게는 배나 그렇게 기적적으로 고기를 가득 공급해 주던 그물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요한이 "주님이시다" 하고 외쳤을 때 베드로가 주님께 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 내렸다" 는 기사를 읽는다.
그것이 참된 분리이다. 문제는 언제나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안에 주님 자신을 제외한 어떠한 사람이나 사물로부터의 참된 영적 분리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여전히 혼의 활동의 외적인 면을 더 다루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혼은 애정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한다. 혼은 자기를 주장하며 일들을 교묘하게 조작하려고 한다. 혼은 세상의 일에 몰두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며, 문제의 진짜 핵심에는 아직 다가가지 않았다. 아직도 더 깊은 것들이 남아 있는데,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십자가로 인한 풍성한 결실
요한복음 12장 24,25절을 다시 읽어 보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혼" - 헬라어역)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에 십자가의 내적인 역사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혼을 잃는 것" 이라고 말해 왔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는 한 알의 밀로 묘사된 주 예수님의 죽음, 즉 열매의 증가를 목적으로한 주님의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그 목적은 풍성한 결실이다. 생명이 있는 한 알의 밀이 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은 한 알 그대로 있다." 밀은 남에게 그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취하신 길을 알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님의 죽으심으로써 그의 생명이 많은 생명들 안에서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그의 생명을 버리신 것은 우리로 그 생명을 받게 하려 하신 것이다. 주님의 죽음의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죽으라고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님의 죽음에 합하는 것의 가치를 분명하게 하신 곳이 바로 여기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그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새 생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생명의 전달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잃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많은 열매를 맺는 사역의 비결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1,12)
우리는 문제의 중심점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 안에는 새 생명이 있다. 우리는 모두 그 고귀한 소유, 즉 질그릇 속의 보배를 가지고 있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라! 그러나 왜 그 생명은 그렇게 적게 나타나는가? 왜 "한 알 그대로 있는가?" 왜 그것은 흘러넘쳐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지 못하는가? 왜 그것은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가? 생명이 있는 곳에 생명의 표적이 그렇게 적게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혼이 (밀의 껍질이 그 알을 싸고 있는 것과 같이) 그 생명을 싸고 있고 또 제한하고 있어 출구를 찾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으로 살고 있다. 생명이 솟아 올라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혼이다 그 혼을 잃어버려라. 그 길에 충만함이 있다.
암흑의 밤 - 부활의 아침
그래서 우리는 하룻밤(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암흑의 하룻밤) 동안 성소에 갖다 놓았더니 그 다음날 아침 움이 돋는 살구나무 지팡이로 다시 돌아온다. 거기서 보여진 것은 죽음과 부활, 죽은 생명과 얻은 생명이다. 그리고 거기서 당신의 사역이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나를 다루고 계시다는 사실을어떻게 깨닫는가?
첫째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사실이 하나 있다. 즉 육적인 힘과 자원을 가진 혼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존속할 것이다. 그 때까지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육적인 사람의 근성을 밑바닥까지 깊숙이 훑어내는 역사는 매일매일 끊임없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평생 지속되는 봉사의 조건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우리는 결코 그것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없다. 그것을 피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8). 그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죽음과 부활은 혼을 잃어버리고 생명의 성령이 나타나게 하기 위한 우리 생활의 영속적인 원리로 잔존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전환점이 있는데, 그 지점을 통과하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새로운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곁문이다.
그러한 전환점이 야곱의 생애에서는 브니엘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자는 야곱의 안에 있는 "육적인 사람" 이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고 말씀하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능과 힘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안에 있는 그 자아의 힘을 꺾으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쳐 그를 넘어뜨리셨던 것이다. 야곱은 그 후에도 계속 걸어다녔지만 계속 절름발이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야곱은 개명(改名)이 의미하는 대로 이전과는 다른 야곱이 되었다. 야곱은 양 발을 다 가지고 있었고 또 그 발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이 약해졌고, 그는 결코 회복될 수 없는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기 위하여 깊고 어두운 경험을 통해 우리의 육적인 능력이 상처를 받아 근본적으로 약해지는 지점에까지 우리를 이끌어 오셔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렇게 하실지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 지점까지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을 대단히 가혹하게 다루시고 또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드디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일을 더 이상 "좋아" 하지 않는 때가 온다. 실로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을 거의 두려워 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다.
내 말을 들어 보라 나는 회심한 후 일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내 안에 나를 앞으로 몰아내는 그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전도하는 것이 나의 생활의 전부가 되었다.
주님은 은혜롭게도 당신을 그렇게 오랫동안 앞으로 나아가게 하실 뿐만 아니라 축복으로 나아가게 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날 당신을 재촉하는 그 자아의 힘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당신은 당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경험을 하기 전에는 당신이 하나님을 그렇게 섬김으로써 얻는 만족을 위해 전도를 했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만드실 수 없었다. 당신은 육적인 생명에 의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활은 많이 변화한다. 그 생활은 기질의 노예이다. 당신이 감정적으로 주님의 길을 갈 때는 전속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감정의 방향이 바뀔 때는, 심지어는 의무가 요구될 때에도 당신은 조금도 움직이기를 싫어한다. 당신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까지, 당신이 그 일을 즐거워하든 그렇지 않던 간에 동일하게 그 일을 할 것이다. 당신이 전도를 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러 저러한 일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당신은 그 일이 당신에게 의식적인 기쁨을 주든 주지 못하든 관계없이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체득하게 되는 참 기쁨은 당신의 변화무쌍한 감정보다 더 깊숙한 곳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만 하면 당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지점까지 당신을 이끌어가고 계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의 정신이다 (시 40:7,8) 그러나 그러한 정신은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정신은 우리의 자아의 힘과 의지와 애정이 자리잡고 있는 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될 때 온다.
그러한 종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며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에 이르는 길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긴 과정일 수도 있도 순간적인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는 그 방법을 존중해야만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결코 전과 같이 될 수 없다. 지금부터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 자신을 두려워 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혼의 충동에 따라 행하기를 두려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그렇게 행할 경우 주님 앞에서 심적으로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겪게 될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는" (히 12:7)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의 채찍질하시는 손을 경험해 보았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과 그와 함께 고난받을 때 기업과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됨을 증거하신다.(롬 8:16,17) 그리고 당신은 우리 영의 아버지에 대해서 "아바 아버지" 라고 응답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당신 안에 확립될 때 당신은 "부활의 영역" 이라고 하는 새로운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죽음은 당신의 육적인 생명의 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해방시켜 부활에 이르게 하시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은 전에 잃었던 것이 전과 같은 형으로는 아니지만돌아오는 것을 발견한다. 생명의 법칙은 지금도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것은 당신을 인도하고 당신에게 능력을 주며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다. 금후 당신이 잃었던 것이 다시 돌아올것이지만 이번에는 하늘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다시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보겠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우리의 수족을 절단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혼도 가지고 있을 수가 있고 또 혼의 기능도 완전히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혼이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혼에서 생명을 얻지 않고 혼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혼을 사용한다. 육체가 우리의 생명이 될 때 우리는 하등 동물들과 같이 생활할 것이다. 혼이 우리의 생명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반역자와 도피자와 같이 생활할 것이다. 물론 재주가 있고 교양이 있고 교육도 받았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끊어진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을 따라 살게 될 때 우리가 여전히 혼의 기능을 육체의 기능을 사용하듯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성령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지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것은 그 암흑의 밤이다. 주님은 은혜롭게도 나의 생애 가운데 한 번 나를 수개월 동안 내버려 두시고, 영적으로 완전히 어두운 상태에 처하게 하신 일이 있었다. 마치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만 같았고, 거의 아무 일도 진행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으며, 나는 정말 종말에 이른 것만 같았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점차 모든 것을 원 상태로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 모든것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는 유혹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성소에서 온 밤을, 암흑 가운데서 온 밤을 지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밤을 재촉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죽음과 부활이 함께 한 시간 동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제쳐 놓으실거라는 생각을 직시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내로 기다리지 못한다. 물론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는 말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기에 머물러 있게 하시는 일정한 기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신이 귀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이 당신의 손에서뻐져 나가는 것만 같을 것이다. 거기서 당신은 문이 없는 벽을 직면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며 사용되는 것같이 생각된다. 조용히 누워 있으라. 만물이 암흑 가운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하룻밤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온 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다. 그 후로 당신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영역 안에서 모든 것이 당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전에 있었던 것과 현재 있는 것의 차이를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어느 날 한 젊은 형제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형제에게 우리의 육적인 힘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당신을 만나 그 근본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치심으로 불구로 만드는 상처를 받게 하신 것을 당신이 알고 계신다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식탁 위에는 비스킷이 담긴 접시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나는 비스킷 하나를 집어, 마치 그것을 먹을 것처럼 둘로 쪼갰다. 그러고는 그 두 쪽을 다시 조심스럽게 맞추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 이것은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똑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단 당신의 등이 한번 부러진다면 다음부터는 언제나 하나님의 가장 사소한 채찍에도 굴하게 될 것입니다.
" 바로 그것이다. 주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알고 계신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충족시키셨고,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많은 아들들 가운데 나타나게 하셨다. 지금까지 걸어 온 제자들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영)으로 " (롬 1:9)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의 말을 진정으로 반복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그와 같은 봉사의 비결을 배워 왔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 (빌 3:3)
바울보다 더 활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롬15:19)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로마에 갈 준비가 되어 있고(1:10) 또 거기서부터 가능하면 서바나로(15:24,28)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편지하였다. 그러나 전지중해 연안을 포함하는 모든 사역에 있어서 그의 마음은 단 하나의 목적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 목적은 이 모든 사역을 가능케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 15:17,18). 그것이 영적 봉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사도 바울과 같이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해주기를 기원한다.
제 14장
복음의 목적 이제 이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그림자 바로 아래서 일어난 복음서의 한 사건, 그 내용에 있어서 역사적인 동시에 에언적인 사건을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 14:3,6,9)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에게 값비싼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복음서의 이야기에 언제나 동반될 것을 정해 놓으셨다. 즉 마리아가 행한 일은 언제나 주님이 행하신 일과 결부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의 선언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 깨닫기를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마리아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리아의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난 뒤에 일어난 잇다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 12장의 상세한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그 가정이 특별히 부유한 가정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자매들은 직접 가정 일을 돌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 명절에 "마르다는 일을 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 12;2 ; 눅 10:40)과 비교해 보라. 당연히 이 자매에게는 동전 하나하나가 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매 중 한 사람인 마리아는 그의 귀중한 재산 중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에 해당하는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모두를 주님을 위해 사용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것이 정말로 과분한 것이었고 주님을 과분하게 대우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리아의 처사가 낭비였다고 일반적인 불만을 표시하는 데 유다가 주동이 되었고 다른 제자들은 그를 지지하였다. 허비(虛費)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 :4,5) 이 말씀들은 내가 믿기에는 주님께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상고해 보기를 바라시는 교훈인 "허비" 라고 하는 이 조그만 단어가 의미하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허비"란 무엇인가? "허비"란 무엇보다도 필요 이상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 50원이면 될 것을 1,000원을 준다면 그것은 허비이다. 만일 3일 동안 끝낼 수 있는 일을 5일이나 일주일 동안 한다면 그것은 허비이다. "허비" 란 너무나 적은 것에 너무나 많은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분수에 넘치게 받는다면 그것은 허비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복음과 함께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신 그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주님은 복음 선포가 여기에 있는 마리아의 행동과비슷한 결과를 가져와야 된다는 것을 의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주님께 와서 주님께 자신을 허비해야만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추구하시는 결과이다. 주님께 "허비" 하는 이 문제를 두 각도, 즉 유다(요 12:4-6)와 다른 제자들 (마 26:8,9)의 견지에서 고찰하여 보자. 그리고 우리의 현 목적을 위해서 그와 병행하는 기사를 함께 살펴 보자. 열두 제자들은 그것이 허비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한번도 불러 본 일이 없었던 유다에게는 당연히 주님께 부어진 모든 것이 허비였다. 그에게는 향유뿐만 아니라 물도 허비였으리라! 여기서 유다는 세상을 대표한다. 세상의 눈에는 주님께 대한 봉사, 그리고 그러한 봉사를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허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 만일 이러이러한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텐데!" 어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천부적인 재능이나 다른 자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수치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사람들이 주님께 드려지기에는 정말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쓸모있는 인생이 저렇게 허비되다니!" 라고 그들은 말한다. 나 개인에게 있었던 일을 하나 이야기하겠다. 1929년에 나는 상하이에서 나의 고향인 후초로 돌아왔다. 어느 날 나는 대단히 연약하고 쇠약해진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걸어 가다가 대학 시절의 교수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나를 찻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나를 아래 위로 두 번 훑어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보게 자네가 대학에 다닐 때 우리는 자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고 또 자네가 무슨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를 기대했었다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이 바로 자네란 말인가?"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런 노골적인 질문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나의 생애, 나의 건강, 모든 것이 다 가버렸다. 그리고 학창 시절에 나에게 법률을 기르치던 옛 교수가 이러한 질문을 나에게 하고 있었다. "자네는 아직 성공도 못하고 아무런 발전도 없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가?"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에 나는 실제로 "영광의 영"이 나에게 머무르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그 체험이 나의 평생에 처음 있었던 일임을 시인한다. 나의 주님을 위해 나의 생명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나의 혼을 영광으로 가득하게 했다. 그때 바로 영광의 영이 나에게 임하였다. 나는 위를 바라보며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주님,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올바른 길입니다!" 나의 교수에게는 주님을 섬긴다는 것이 완전한 허비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이 존재하는 목적이고, 주님의 가치를 참되게 평가하는 것이다. 유다는 그것을 허비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그 돈을 다른 방법으로 더 적절하게 사용할 수도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 차라리 그 돈을 자선을 위해 쓰거나, 사회 봉사를 위해 바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실제적인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느냐? 왜 그것을 예수의 발에 부어 허비하느냐?" (요 12:4-6 참조) 그것이 세상의 사고 방식이다. "너는 너의 인생을 위하여 더 나은 직업을 구할 수 있지 않느냐? 너는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느냐?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허비가 될 수 있겠는가? 주님은 그만한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주님은 내가 주님의 포로가 되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주님은 내가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주님은 합당하시도다! 세상이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 여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괴로워하지 말자. 사람들이 제멋대로 말할지라도 우리들은 주님께서 "그것은 선한 일이다. 모든 참된 일은 가난한 자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행하는 일이다" 라고 말씀하신 이 토대 위에 서 있을 수 있다. 일단 우리의 눈이 뜨여 주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보게 되었다면 주님을 위한 과분한 헌신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다에 관한 이야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 한다. 이제 다른 제자들의 태도는 어떠하였는지 고찰하여 보자. 왜냐하면 그들의 반응은 유다의 반응보다 훨씬 더 중대한 의의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 무어라고 말하든 그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에는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이 유다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제자들은 유다와 똑같은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서도 매우 분개하였다.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마 26:8,9) 물론 우리는 그러한 마음의 태도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라" 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아주 보편적인 사실을 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더 깊은 데 있다. 예화를 들어 보겠다. 당신이 가만히 앉아서 많은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이러저러한 종류의 일을 하러 나가야만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무리의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될 수 있다. 왜 그들은 좀더 활동적이지 못한가?"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유용성에 있다. 모든 것은 그들이 이해하는 방법으로 충분히 사용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런 견지에서 주님의 사랑하는 어떤 종들이 표면상으로 일을 많이 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들을 염려해 온 사람이 있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어떤 단체에 가입되어 거기서 크게 환영을 받으며 지도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면 현재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더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한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앞에서 한 일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자매는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한 사람이다. 내가 그 자매와 교제를 갖던 시절에 그 자매는 대단히 실제적인 방법으로 주님께 쓰임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것이 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 가운데 있는 하나의 염려는 "그 자매는 쓰임을 받고 있지 않다" 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 왜 그 자매는 나가서 집회도 열고 어딘가에 가서 무슨일을 하지 않는가? 저런 자매가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저 조그만 촌락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가끔씩 나는 그 자매를 찾아가서는 거의 소리치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 자매님만큼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요. 자매님은 성경을 아주 생생하게 알고 있어요. 우리 주변의 필요가 보이지 않으세요? 무슨 일을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저 여기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시간 낭비, 정력 낭비, 금전 낭비, 모든 것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그것이 주님께 제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주님은 당신과 내가 쓰임받기를 바라신다. 나는 무활동주의를 전하거나 세상 필요에 대해 자기 만족적 태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듯이 "온 천하에....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강조점에 있다. 오늘날 과거를 되돌아볼 때, 나는 주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매를 얼마나 크게 사용하고 계셨는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그 자매를 사용하셔서 그 당시에 바로 이 복음 사역을 위해 주님의 훈련 과정에 있던 우리 많은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 자매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에 대해 하나님께 아무리 감사를 해도 여전히 아쉬울 뿐이다. 그러면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틀림없이 주님께서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신 사실에 있다. 이것으로 주 예수님은 모든 봉사의 기초를 세우셨다. 즉 당신의 모든 소유, 당신의 자아를 주님께 쏟아붓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주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시는 전부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가난한 자" 가 도움을 받았느냐 안받았느냐 하는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님께서 만족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전해야 할 집회가 많이 있고, 우리가 봉사할 수양회가 많이 있고, 또 우리가 관여해야 할 전도집회가 많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지 않다. 우리는 일할 수 잇고 또 충분히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위한 일에 끊임없이 전념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지는 않다. 그것이 주님의 제일 목적은 아니다. 주님에 대한 봉사는 보이는 결과로 말미암아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주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발 밑에 있고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옥합"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우리는 가장 고귀한 것,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나는 그것이 십자가 자체로 말미암아 생긴 생명이 우리들로부터 흘러넘치는 것 이라고 말하고 싶다)을 모두 주님께 드린다. 어떤 사람들, 심지어는 이해를 해야 할 사람들에게조차도 그것은 허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께서 가장 먼저 찾으시는 것이다. 종종 주님에 대한 헌신은 끊임없는 봉사로 표현되기 쉽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봉사" 인지 아니면 "주님" 인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얼마 동안 봉사를 중지하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봉사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막 14:9)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복음은 이런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단순히 죄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주님을 찬미하라! 죄인들은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만족은 복음의 복스러운 부산물이요, 제일의 목표가 아니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죄인의 유익에만 지나치게 강조점을 두고 주님께서 그의 목적으로 여기시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할까봐 두렵다. 우리는 만일 복음 없다면 죄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상고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주된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찬미하라! 죄인은 자기 몫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시며, 그에게 많은 축복의 단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일의 문제는 이것이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만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만족하실 때에만 우리가 만족을 얻고 죄인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리고도 자신이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을 만나 본 일이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주님을 제일 먼저 만족시켜 드릴 때 우리의 만족은 틀림없이 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허비"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만족을 얻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은 주님께 과분하게 드려 본 일이 있는가? 우리가 배운 한 가지 교훈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허비의 원리는 곧 능력의 원리라는 사실이다. 유용성을 결정짓는 원리는 바로 허비하는 원리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참된 유용성은 "허비'의 척도로 측정되는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그 일을 하기 위하여 당신의 재능을 최후의 한계선까지(어떤 사람은 그 한계선을 넘는다) 발휘하면 할수록 당신은 주님의 원리가 아니라 세상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원리, 즉 주님을 위한 우리의 일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섬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원리를 우리 안에 확립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내 말 뜻은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일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주님 자신이지 주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단히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나는 지위를 버렸다. 직업도 버렸다. 나는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찬란한 장래의 매력적인 가능성들도 버렸다. 이제 나는 주님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때로는 나로 하여금 분명한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는 것 같다.때로는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이 나의 옆을 그냥 지나가시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나 자신을 어떤 큰 기관에 있는 다른 친구와 비교하게 된다. 그도 역시 찬란한 장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버린 일이 없다. 그는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에서 생활하면서 주님을 섬긴다. 그의 전도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주님은 그의 사역을 축복하신다. 그는 성공하고 있다(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라 영적 성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그렇게 기뻐하고 그렇게 만족해하는 그가 나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인 답게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내가 여기서 얻는 결론은 무엇인가? 그는 재미있게 지낸다. 그리고 나는 항상 힘들게만 지낸다. 그는 결코 이런 경험을 해 본 일이 없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번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오는 것은 온갖 복잡한 문제들뿐이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나의 생애를 허비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과분하게 헌신한 것인가?" 거기에 당신의 문제가 있다. 당신은 그 다른 형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다른 말로 당신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을 정도로,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을 가두어 두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용하실 정도로 헌신한다면) 모든 것은 완전히 잘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다른 형제에게서 눈을 돌려러! 당신의 주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주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 보라. 허비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는 원리이다. "그 여자는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을 주님께 "허비" 할 때에만 하나님의 마음에 참된 만족이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지나치게 헌신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이다. 오, 친구여,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제자들처럼 "유용성"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들은 삼백 데나리온의 동전 하나하나까지 최대 한도로 활용되기를 원하였다. 모든 문제는 계산되고 기록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유용성" 의 문제였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기다리신다. "주님, 저는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나이다. 만일 제가 주님을 기쁘시게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나이다." 주님께 미리 향유를 부음 "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6-8) 이상의 말씀에서 주 예수님은 "미리" 라는 말로 시간적인 요소를 삽입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새롭게 적용할 수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당시에 여자에게 중요했던 것처럼 현재에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오는 세대에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더 위대한 일에 소명을 받을 것임임을 잘 알고 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25:21 ; 마 24:47과 눅 19:17을 비교 참조) 그렇다. 더 위대한 일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의 일은 그 이야기 속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같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이 향유 붓는 일이 상징하는 일이 있었다. 마리아는 그 일을 미리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에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날에 우리는 모두 주님을 전례없이 사랑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 날은 오늘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쏟아부은 자들에게 더 큰 축복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지 며칠이 지난 후, 아침 일찍 주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러 갔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향유를 발랐던가? 일주일 중 첫날에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는가? 그렇지 못했다. 주님께 향유를 붓는 데 성공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미리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의 문제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오늘 내가 주님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이 뜨여 우리가 섬기고 있는 분의 존귀함을 본 일이 있는가?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값지고 가장 고귀한 것만이 주님께 합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일하고, 사회 복지를 위하여 일하고, 구령과 죄인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은 정말 필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이다) 그 일의 위치가 제 자리에 있을 때에만 정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 일들 자체로만 보면 주님께 행해지는 일과 비교도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존귀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만 한다. 만일 이 세상 어떤 귀중한 예술품이 있어 내가 그것을 고가를 주고 산다면, 혹 그 값이 100만원, 1000만원, 심지어 15000만원을 주고 산다고 할지라도 누가 감히 그것을 허비라고 말하겠는가? 허비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가치를 과소 평가할 때 우리의 신앙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현재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존귀하신 분이냐 하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존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주님께 어떤 것을 드리더라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에게는 허비하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로 우리에게 존귀하신 분이라면 주님께 드리기에 너무 아깝다거나 너무 값진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 우리에게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값진 보화를 주님께 드리자.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말자. 마리아에 대해서 주님은 "저가 힘을 다하여....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리아가 자기의 전부를 바쳤다는 뜻이다. 그 여자는 앞날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아끼지 아니하고 드렸다. 부활의 아침에 그 여자는 자기의 허비를 애석하게 여길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을 다하여" 하는 일이 아니면 우리들로부터 오는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는데 들이는 노력과 정력의 소모량을 의미하고 있는것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찾으시는 것은 주님 발 앞에 놓여진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죽음과 장사와 미래의 날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의 장사는 그 날 베다니의 집에서 이미 보여졌다. 현재 시야에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면류관을 쓰시는 것이다. 즉 주님이 영광 중에 기름 부은 자,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환호를 받으실 때인 것이다. 그렇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것을 주님께 쏟아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주님께 물질적인 향유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어떤 값진 것을 쏟아붓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다-진실로 하나님께 훨씬 더 고귀한 일이다. 단순히 외면적이고 피상적인 것은 여기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처리되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였다. 또한 그것이 제거되는 것을 체험으로 배워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옥합이 상징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깊숙한 데서 캐내어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리아가 그 옥합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감히 그것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것은 심장, 우리의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 그것을 깨뜨려 주님께 부으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 여기 있나이다. 이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니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은 원하시던 것을 받으신 것이다. 오늘날도 주님께서 우리들로부터 그와 같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를 기원한다. 향유 " ....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옥합을 깨뜨려 주 예수님께 부음으로 온 집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참으로 고난을 맛본 사람을 만날 때마다 - 주님과 함께 극한 경험을 하여, 주님께 "사용되기" 위해 자유러워지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오히려 기꺼이 주님의 포로가 되기를 원하고 주님의 만족을 구하는 사람 - 즉각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의 영적 감각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의 생애에 그 무엇인가가 부서지고 깨뜨려져서 당신은 그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다. 그 날 베다니의 집에 가득했던 그 냄새는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마리아의 향유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주님을 위해 그 옥합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단 한번의 일격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 - 아낌 없는 헌신과 그 향기 - 는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자체에 대한 것이지 우리의 행함이나 설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인상을 전해줄 수 있도록 당신을 사용해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 기도는 정확하게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기도는 당신이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감각을 전해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것, 당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인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그 지점에 도달하면, 외적으로 볼 때 당신이 크게 사용되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 안에 기갈을 일으키기 시작하실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감지할 것이다. 가장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그것을 감지할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 주님과 함께 동행해 온 사람, 고난을 맛본 사람, 자기 마음대로 살아오지 않는 사람,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생애는 감화를 주며, 그 감화는 기갈을 일으키고, 그 기갈은 사람들을 격동시켜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충만함에 이를 때까지 계속 갈구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두신 첫번째 목적은 설교하거나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안에 주님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준비하는 일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제 방금 식사를 마친 두 사람 앞에 맛좋은 과자를 내놓는다면 그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인가? 그 사람들은 그 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과자의 모양을 칭찬하며, 과자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며, 과자의 가격에 대해 말하는 등 그것을 먹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말 배고픈 사람들이라면 그 과자는 얼마가지 않아서 없어질 것이다. 성령님의 일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생애에는 진실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우리는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욕구를 주입시킬 수 없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갈을 강요할 수 없다. 기갈은 일으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인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들 안에 일으켜질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수넴의 "귀한 여인" 에 대한 말씀을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 여인은 자기가 목격은 하였지만 잘 알지는 못했던 선지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왕하 4:9) 그 여인에게 그런 인상을 준 것은 엘리사의 언행이 아니라 엘리사 자체였다. 그가 단순히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여인은 무엇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여인은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감지하는가? 우리는 여러 종류의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즉 명철하다거나, 재능이 있다거나, 또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그러나 엘리사가 남긴 인상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상이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문제는 하나의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과 관련된 우리 안에서의 십자가의 역사이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기쁨을 구하고, 주님만을 만족시켜 드리고자 하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나에게 어떠한 희생이 따르든지 간에 개의치 않을 것을 요구한다. 내가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한 바 있는 그 자매님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 자매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그 자매님은 위를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해드리기 위해 저는 제 마음이 부서지기를 원하나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부서짐을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로맨틱한 감정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자매님이 처해 있던 특별한 환경에서 그 고백은 진심이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의 생애가운데 기갈한 마음을 일으켜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꺼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깨뜨려 주님께 쏟아부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복음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할 만한 상태를 우리 죄인들 안에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소유 전체, 우리 존재 전체를 (우리의 영적 경험에 있어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일들까지도) 주님께 가지고 와서 주님께 아뢰자.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하여 - 주님의 사업이나 주님의 자녀들 혹은 그 외의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허비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기독교계의 많은 저명 인사들도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크게 사용되었다. - 과도하게 사용되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허비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항상 "쉴 새 없이 활동하기" 를 좋아한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를 감옥에 가두기를 원하신다. 사도들의 전도 여행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과감하게 그의 가장 훌륭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셨다.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 .... 향유 냄새가 그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바울과 같이 우리가 이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을 때(고후 5:9) 복음은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출처: https://cafe.daum.net/xkrqhdwn/Sqt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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