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6일 만에 땅의 회복
태초에 하나님께서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사단과 그 세상에 살던 아담 이전 종족의 죄 때문에 그들과 그들이 점거하고 있던 땅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들어갔고, 이리하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땅을 복구하신 것을 살펴보자.
욥기를 보면, 그 기자가 하나님과 다투는 것의 어리석음을 밝히기 위해 사단 반역의 패배를 넌지시 비춘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랴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욥 9:4~7).
언제 하나님께서 이런 큰 일들을 하셨는가? 그 분께 대한 사람들의 강퍅함으로 인하여 도 대체 언제 그 분께서 땅을 흔드시고 별들을 봉하셨는가? 아담때 이래로, 우리의 현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일들을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했다. 이러므로 여기에 묘사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단과 그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을 그의 반역 때문에 심판하신 때와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땅을 흔들어 산들을 제자리에서 밀어내신 것은 그때였다. 그 재앙이 너무 속히 임했기에 산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 전에 이미 옮겨져 있었다. 땅이 흔들렸을 뿐 아니라 천체의 현상마저 영향을 입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해가 뜨지 못하고 별들이 봉인되었으며, 그 결과로 온 세계가 완전한 흑암에 빠졌다. 햇빛이 없었으므로 열이 없어졌음은 매우 당연했다. 그래서 땅은 빙하시대로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땅을 복구하시기로 작정하신 때에야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다시 말해서 깊음이나 완전한 흑암의 표면위에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욥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였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구 작업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욥9 :8~10). "하늘을 펴시며"는 하나님께서 물을 위, 아래로 갈라 궁창을 만드신 둘째 날에 행하신 작업이었다. 그 분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바다 물결은 궁창 위의 물을 가리킬 것이 다.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는 넷째 날에 행해진 하나님의 일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 별들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에 창조하셨던 것을 개조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셨으며" 라는 말이 쓰이지 않고 "만드셨으며”라는 말이 쓰였다. 또 앞에서의 "별들을 봉하시며”는 의심할 것 없이 별들이 이미 거기에 있었음을 나타낼 것이다. 이러므로 "만드시며"라는 말의 사용은 하나님께서 다만 별들을 봉인 전의 상태로 복구하셨음을 의미할 것이다.
1. 각기 24시간으로써의 6일
창조기사에 있어서의 6일의 하루는 각기 24시간임을 알자. 사실 성경은 때때로 "주의 날" 등과 같은 시간의 연장된 기간(period)을 나타내기 위해 "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한다. 그러나 여기의 6일은 6개의 긴 기간들(periods)로 해석될 수 없다. 편견 없는 독자는 누구든 그것들을 시간이 길게 연장된 기간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성경이 "날" (日)을 한 기간의 뜻으로 사용할 때에는 결코 일, 이 내지는 첫째, 둘째 등등의 수사를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날” (日) 앞에 수사가 놓여 있으면 그것은 변함없이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데 필요로 하는 시간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첫째 날이니라”고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길이에 있어 24시간에 불과한 하루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구별하여 놓으실 때에는 일곱째 날에 그 분께서 쉬셨다고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명하실 때에 이렇게 그것을 표현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 특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셨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1).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 7일은 24시간의 날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6일을 6개의 장구한 지질학적 기간으로 여긴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이 지질학적인 기간의 "저녁"은 어떻게 되며 "아침”은 어떻게 될 것인가? 셋째 지질시대 전에는, 풀도 나무도 땅에 없을 것이다. 여섯째 지질시대 전에는, 동물의 화석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은 지층에서 식물과 동물의 그러한 구분은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다.
6일이 과연 6개의 긴 기간이라면 여섯째 날에 창조된 아담은 그가 죄 짓기 전에 에덴 동산에 매우 매우 오랫동안 살았지 않겠는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실제로 "날"이라는 말을 긴 기간을 의미하게끔 사용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이론에 적합하도록 혹은 사람들의 공격을 완화하기 위해 왜곡하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해석한다면 우리들 자신에게 견책을 불러오는 것은 물론 성경을 비평에 예속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증거에 근거하여, 이들 6일은 6개의 긴 기간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24시간 단위의 6일은 그 분께서 땅을 복구하시는 데에 충분한데, 어찌해서 6개의 긴 기간을 필요로 하시겠는가? 그 분께서 6일 동안에 세상을 수선하시기를 기뻐하셨기에, 우리가 그 분의 위업을 겸손히 살피며 그 분의 엄위를 생각하여 그 분을 찬양하자. 우리는 전혀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의 이론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질학이 요구하는 것들(만일 그것의 가정들이 옳다면)은 창세기 1장 1절 과 2절 사이에 지속되는 기간으로 충분히 만족될 수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2. 첫째 날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복구작업을 하시기 시작하신다. 이제, 수면 위에 흑암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분께서 빛에게 비추라고 명하셨다. 이 비춤은 빛과 어둠 사이를 갈라놓았다. 과거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태양이 창조되기 전인데도 ‘빛이 있다’ 함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여 비웃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학의 발달로 더 이상 성경의 기록을 비웃을 수 없게 되었다. 과학에서의 최근의 발견들이 모세가 말한 것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창세기는 과학서가 아니며 또 과학적인 교과서로 사용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반하지 않으며 어떤 과학적 오류도 품고 있지 않다. 현대인들은 태양 외에 빛의 다른 원천이 있음을 안다. 빛은 미지의 근원에서 나와서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에테르(ether)에 어떤 상상할 수 없는 운동을 일으키는 일종의 에너지이다. 과학이 아직 이 에너지의 근원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을지라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과연 "빛이 있었음을 알고 이해한다. 사람들이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오기보다 도리어 어둠 속에서 찾아 헤매려 하는 것은 더 없이 슬픈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대한 그러한 믿음은 미신이라고,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셨기 때문에 기쁘다.
여기의 언급은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빛이 복구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어둠을 한정된 범위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바꿔 말하면, 다만 땅에만 가두어 두셨었다. 어둠이 일정한 범위에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빛이 이 어둠의 범위 전체에 나타났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땅에 나오도록 빛에게 명하신 명령일 뿐이다. 온 우주가 모두 흑암에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세 때에는, 당시의 과학이 태양 외에 빛의 근원 같은건 전혀 알지 못했다. 소위 북극광 같은 우주광선에 대해서 깜깜하게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께서 태양을 불러내시기 전에 빛을 불러내신 사실을 기록했다. 그가 성령에 의해 감동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인간들의 무지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과학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우주속에 설정된 자연법칙을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을 더욱 깨닫게 될 것이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창1:5). 첫째 날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어떤 이들은 그것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된 시초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의 의미일 수 없을 것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그 "아침"은 빛이 나타난 때일 수밖에 없다. 만일 첫째 날 전에 빛이 없었다면 "저녁" 이라는 용어는 하등의 의미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저녁과 아침은 명백히 빛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저녁"이라는 말이 2절에 보이는 흑암을 가리킨다면 이 저녁은 매우 매우 길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창세기는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를 첫째 날에 있었던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첫째 날의 저녁 전에 이미 빛이 출현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저녁과 아침이 어떻게 갈라졌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빛더러 비추라고 말씀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 빛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고 어둠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부터 나왔을리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원래의 하늘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다시 한번 우리의 현 세계가 복구된 세계에 불과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3. 둘째 날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또 명령을 발하셨다. 물을 갈라놓게끔 그 가운데에 궁창을 두셨다. 그래서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갈라져 나갔다. 과학은 이 아름다운 묘사를 다시 한번 감탄해야 한다. 이것은 실제에 있어 광활한 공간 혹은 대기권이 생겨나는 광경이다. 궁창은 위 아래의 물로 갈라져 있으면서도 융통성이 없는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 위로 걸쳐 있는 습기를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또 속이 물로 꽉 찬 물의 저장소도 아니다.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기 때문이다(창 1:20).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창 1:8 상반절). 이 "하늘"은 1절에 언급된 하늘과 다르다. 1절에서의 하늘이라는 말은 우주와 그 가운데 가득찬 것을 지시하는 반면, 여기의 "하늘"은 단순히 땅 위의 공중 혹은 대기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1절에 언급된 하늘은 부패한 적이 없다. 다만 땅과 그에 속하는 천체들만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변화를 입었던 것이다!
창조작업의 6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하루하루의 이루어진 일에 대해 좋다고 공표하셨으나 둘째 날만은 예외였다. 잊으셨을까? 결코 아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것도 다 같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다. 궁창 혹은 공중은 사단과 다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둘째 날의 일을 좋다고 공표하지 않으셨다.
사단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엡2:2)가 아니며, 그 아래 있는 귀신들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엡 6:12)이라고 불리우지 않는가? 이 궁창이 사단과 그의 악령들의 거처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이 날의 일을 좋은 것으로 결산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 악령들이 어떻게 공중으로 올라갔을까? 우리는 이미 그들이 여기에서의 물인 바다의 깊은 곳에 가두어졌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궁창의 위 아래로 물을 갈라놓으실 때, 이 사악한 것들이 자기들의 왕이 거처하는 공중으로 물이 올리어지는 순간에 도망치는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오늘날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중의 악한 영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탈출한 죄수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저갱에 던져질 때까지 당분간 자유를 허용 받고 있다. 공중은 이렇듯 흑암의 왕국의 본부가 된다. 사단의 활동은 보통 공중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가?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가 집회를 갖거나 기도할 때에, 그 적에게 억눌리지 않도록 우리 주님의 고귀한 피로써 공중을 깨끗케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셋째 날
물이 궁창의 위 아래로 갈려졌을지라도 당시의 땅은 아직 물에 덮여 있었다. 아직 마른 땅이 없었다. 그러므로,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또 명령하셨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 :9). 여기에 언급된 것은 우리가 창세기 1:1 과 1:2을 해석한 방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마른 뭍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뭍이 많은 물에 묻혀 있어 드러날 필요만 있었을 뿐, 이미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뭍이 무로부터 창조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태초에 창조하신 땅이 드러나도록 물을 향하여 일정한 곳으로 물러가라고 명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6일 동안의 작업이 본질에 있어서 창조적이지 않고 복구적임을 입증한다.
시편 104: 5~9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땅을 창조하셨고, 그 후 땅을 심판하셨고, 맨 나중에는 물더러 가라앉도록 명하셨음(이것이 셋째 날의 일이었다)을 묘사하고 있다.
(1)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시편 104편 본문의 이 부분은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를 가리킨다.
(2)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며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본문의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신 후에 변동된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데, 창세기 1:2 그 가운데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표현과 일치한다.
(3)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부분은 셋째 날의 처음에 행해진 하나님의 작업에 연관된다. “주의 견책"과 "주의 우뢰 소리"는 창세기에서의 하나님의 명령을 암시하는 표현들이다. 여기에서 물이 "도망”하고 “빨리 갔다는 것은 가일층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였음을 보인다.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 갔나이다”라는 말은 이것이 산과 골짜기의 시초임을 조금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시편의 6절이 산들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단순히 한 때 물에 덮여 있던 산들로부터 물이 물러난 뒤에 이제 드러났음을 나타낸다. 그리해서 뭍이 다시 드러났던 것이다. 우리의 시편 104편 본문을 읽어 나가면 이런 말을 보게 된다.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에 의해 "뭍이 드러나도록 한 곳으로 모이게 된 것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래서 우리는 우리의 현 세계가 하나님께서 복구하신 것에 불과한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논의로부터 땅이 물에서 나타났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것 또한 과학이 증명한 바이다. 오늘날의 지질학은 이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지층들이 오래 전에 물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다른 작업을 하셨다. 뭍이 물에서 나왔을 때 그 위에 아직 풀도 나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풀과 열매 맺는 나무로 땅을 장식하셨다.
5. 넷째 날
넷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천체들을 수선하셨다. 지상의 상태는 이 때에 복구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비추도록 빛을 불러내셨다. 그러나 이 날에는 "광명”을 만드셨다. 첫째 날에 이미 낮과 밤을 나누었음 (4, 5절)을 우리가 안다. 그런데 "광명의 기능도 역시 낮과 밤을 나누는 것이었다(16절). 이렇게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광명" 사이에는 기능상의 유사성이 있다. 첫째 날의 빛은 아마 한나절은 땅의 한쪽면을 비추고 또 한나절은 땅의 다른 쪽면을 비추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첫째 날에 밤과 낮이 있었다. 넷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광명" 혹은 빛을 지닌 광체를 만드셨다. 우리의 땅이 이 광체들과 일정한 관계들을 유지하면서 돌아갈 때에 그 광체들이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어지도록" 기능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더 큰 광명은 태양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태양을 "창조하셨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태초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순히 "수선”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아담 이전의 세계에서도 태양이 광체로써 기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반역후에 태양이 변화를 입고 흑암에 둘러싸여 비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땅은 태양의 주위를 계속하여 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 태양을 수선하여 다시 광체로써 기능하도록 하셨다.
과학자들은 달이 불모의 사막처럼 황무하다고 말한다. 태양과 달과 별들이 모두 사단의 반역으로 심히 훼손되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나님께서 "두 큰 광명을 만드신 후에 "또 별들을 만드셨다." 이 별들은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이때에 창조되지 않았음을 다시 되풀이하자. 우리는 이것을 욥기로부터 입증할 수 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욥38:4~7). 여기에서 말하는 땅이 원래의 창조를 가리키든 셋째 날의 복구를 가리키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확실하니 그것은 땅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땅이 만들어지고 있는 도중에 새벽 별들은 벌써 하나님의 위업들에 대해 "함께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넷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전에 창조하셨던 별들에 단순히 조정을 가하셨다. 태양에는 많은 빛을 두셨으므로 당연히 그것을 큰 광명이라 부르셨다. 그런 후 별들로 하여금 시계(視界)에 나타나 땅의 필요에 응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셨을 때에, 성경은 인간들에게 읽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인간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당신의 행하신 일들을 기술할 수 있게 하셨다. 그 분께서 우리들에게 이들 태양과 달과 별들의 다른 용도들은 보이지 않으시고 인간들에 대한 용도만을 보이셨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들이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관계가 있는데, 그때도 그것들이 "징조”를 이룬다는 사실은 특히 인간들에게 의미가 있다. 인류외에 어떤 것도 우주의 현상들을 징조로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와 달과 별들의 장소와 위치는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인간들의 관찰을 통하여 결정되어 왔다. 사람들의 관찰에 의하면, 태양은 더 큰 광명이고, 달은 더 작은 광명이며, 개개의 별들은 달보다 훨씬 더 작은 광명들이다. 하나님께서 천한 우리 인간들에게 그토록 광대한 세계를 허락하셨으니 놀랍도다!
6. 다섯째 날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이미 복구된 땅에 살 생물들을 준비하시고 창조하셨다.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1:20).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나타낸 그 분의 명령이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1:21).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무에서 창조하셨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슨 새 재료로 물의 물고기와 다른 생물들을 창조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창세기 2:19을 통하여 새들은 흙으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과학은 생물들이 육지에 나타나기 전에 물 속에 있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수생동물(生動物)들이 그러한 생물의 최초 종류이다. 오늘날도 바다에 무수한 생물들이 거대한 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 새들은 온혈동물 가운데 더 먼저 나타난 부류이다. 과학상의 발견들과 성경의 기록들이 얼마나 많이 일치하는가?
7. 여섯째 날
여섯째 날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의 창조가 피조물들 가운데서의 그의 위치를 보일 양으로 간단히 기술된다. 2:7~15에 가서야 인간의 기원이 하나님과의 그의 관계를 보이기 위해 자세히 묘사된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유의하자. 사람은 기어다니는 하등동물에서 "진화"되지 않았다. 우리는 전에 이 "창조" 라는 말을 무로부터 존재케 하는 것을 의미하게끔 설명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행위이지 자연도태의 결과가 아니다. 성경은 진화론을 결코 보증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영원히 하나의 가설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다음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자.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를 내라고 명령하셨다(12절). 채소들이 나무가 될 수 없으며 나무들도 채소들로 변할 수 없다. 다섯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21절).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25절). 창조된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이다. 이 종류들이 어떻게 나뉘는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적어도 창조된 모든 것들이 그 종류대로인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께서 "그 종류대로”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각 종류의 경계를 그 분께서 명확하게 정하셨다. 어떤 종류가 다른 어떤 종류로 진화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 식물이 한 동물로 된다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식물의 어떤 종(種)이 식물의 다른 어떤 종으로 된다거나 동물의 어떤 종이 동물의 다른 어떤 종으로 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는 말씀 밖에서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 분의 말씀은 모든 문제를 푸는데 충분하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입장을 어리석은 논리라 하여 비웃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목적없이 방황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어떤 가르침을 제조하여 거기에 그들 나름대로 신앙을 두기까지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신다든지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다든지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 결론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는 바, 미시적인 한 종자가 여러 종(種)을 통하여 진화하여 원숭이가 되게 되고, 그 후 결국 사람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는 명제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보다 훨씬 더,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마지막 때에 제기된 그 러한 어리석은 이설을 믿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되며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러한 그릇된 가르침을 주장하는 책과 잡지를 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성에 대해 우리는 그 분께 감사한다. 그 분께서 "그 종류대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발하신 그 말씀을 순종치 않는 것을, 식물이건 동물이건, 우리의 눈으로 발견치 못한다. 일찌기 진화론자들은 우리의 조상들이 수 백만 년 전에는 어떤 파충류였다고 말했었다. 이제 그들이 앞으로 수 백만년 후에는 우리의 후손이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없는 어떤 생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우리 시대보다 수 백만 년 전의 이야기를 하든, 후의 이야기를 하든, 그들이 주장하거나 예언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과 왈가왈부할 문제가 못된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의 책이다. 결코 무책임한 말을 하지 않는다. 피조물 중의 어떤 것도 "그 종류대로"라는 창세기에 천명된 법칙을 거역하지 않는다.
"하나님"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항상 단수동사를 거느리는 단복명사(名詞)라고 한다. 복수명사가 단수동사를 이끄는 것은 보통 있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 안에는 하나 이상의 격위 (person)가 있기 때문에 단수명사가 사용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집합명사이다. 그것은 하나안의 셋을 말하지, 세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수동사를 취한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시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뒷받침하는 증거들과 암시들이 그 안에 많이 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의심할 필요 없는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더구나,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우리”라는 말이 하나님의 복수성을 나타내고 "만들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지의 단일성을 보여준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말씀하시니라) 등의 어구가 31번 사용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이며, 요한복음서 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도 (말씀이신) 주 예수님의 창조적 사역이 언급되어 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에 있어서 함께 일하신 것을 목격한다. "하나님",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리고 "하나님의 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잠깐 정지가 있었다. 하나님 사이에 협의가 있었고, 그 결정은 이것이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다스리게 하자.." (26절). 하나님의 이 협의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중하게 일하셨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사단과 아담 이전의 종족들의 실패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어 버렸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 땅과 그 하늘을 생명이 깃들 수 있도록 복구하셨다. 온갖 생물들도 만들어졌고 예비되었다. 그러나 그 때 잠깐 정지,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자 우리 사람을 만들자!" 이것이 여기 하나님의 말씀의 요체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그 목적이 무엇일까? "그 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린다. 사단은 실패하여, 더 이상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 그가 아직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죄로 이미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하나님께서 복구하신 땅은 사단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여야 한다.
사단이 “세상의 임금"이라는 명칭을 보유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즉, 그는 자기의 주권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새로이 복구된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사단의 힘밖에 사람을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주권을 보존할 수 있다면, 사단은 단순히 빈 명칭만을 갖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사단의 힘을 꺾으시려고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친히 마귀를 파멸시키기란 매우 쉬운 일일 것임을 우리가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마귀의 활동을 파괴하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지배권을 주셨다. 이 직책은 전에 사단에게 부여되었다가 상실되고 말았었다. 그러나 아, 슬프게도 우리는 곧 인간의 타락을 목격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의 주권을 잃어버리고, 마귀가 "세상 임금"이라는 자기의 명칭의 권능과 지배권을 다시 취득하게 된다. 나중에 논의할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경륜과 사역에 오직 하나의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은 사단의 힘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자.
주 예수께서 사단을 원수라고 부르셨다(마 13:39을 보라). 주님에 의해 선택된 우리 신자들은 마귀의 활동과 힘을 파괴해야 한다는, 우리가 동참된 이 목적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이 일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유익하고 사단에게는 파괴적인가 혹은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흑암의 왕국에 타격을 주고 마귀에게 손상을 입힐 것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이든 하지 말자.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피상적인 결과에 의하여 그것들을 판단하지 말고,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볼 것인가에 관한, 영적인 영역에 나타날 결과에 의하여 그것들을 판단해야 한다. 이것은 혈육의 노력으로는 싸울 수 없는 영적인 전쟁이다. 이것이 또한 그 날에 있을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다. 한 행위가 타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견고히 서 있을 것인가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흑암의 권세를 공격하는 최선의 방법은, 한편으로는 성령안에서 사단의 활동에 대항하여 그의 승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사단의 모든 활동과 간계를 파괴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 기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자. 우리가 그 분의 뜻을 행할 때마다 사단은 손실을 입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분의 모양대로 사람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전혀 육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분과 교제할 수 있게 하는 정신과 윤리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 나님을 대리하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불행히도, 범죄를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하였다. 오늘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무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위로부터 새로이 나지 않는 한 그가 하나님과 사귀는 법을 결코 알 수 없다. 바울은 신약에서 사람(남자)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했다(고전 11:7).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그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영광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는가? 공중에 있는 사단에 게였다. 그러나 첫째 사람은 실패했다. 그렇지만 둘째 사람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 분,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으로서 하나님을 완전히 나타내실 수 있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 로 되니라” (1: 29, 30). 죄가 들어오기 전의 세상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범죄한 세상에서야 고기가 음식물이 되었다. 앞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 외에는 고기를 먹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렇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 4: 4,5). 악이 가득찬 우리의 이 세상에서 "식물(고기)을 폐하라” (딤전 4:3)고 하는 것은 세상이 저주 아래 있음을 부인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31절). 하나님께서 어떤 것도 결코 나쁘게 만드시지 않으셨다. 모든 나쁜 것들은 죄에서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악한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악이 없으며 어떤 나쁜 것도 그 분의 창조의 손길에서 빚어져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더 없는 자애로써 인류를 대우해 주셨다. 사람의 먹을 것을 위해 셋째 날에 풀과 채소들을 준비하신 후에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새와 동물을 만드셨다. 세상에 우리를 두시기 전에 미리 환경을 마련해 주셨던 것이다. 이 자애로운 보살핌을 우리가 참으로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늘 당신의 피조물들을 위해 배려하신다. 풀들을 내시기 전에 땅을 준비하셨고, 동물들을 창조하시기 전에 식물을 준비하셨다. 하나님과 그 분의 선하심을 보지 못함으로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스러운가! 무엇인들 그들의 심정을 어지럽힐 수 있으랴!
8. 하나님의 안식일
창세기 2:1~3은 실제로 1장의 연장이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한 가지는 언급된 안식이 하나님의 안식이지 사람의 안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 날이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서는 이제 쉬셨다. 그러나 이 안식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피곤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사 40:28). 그러면 그분의 안식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육체적이 아니고 영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의미한다. 그 분께서 손수 만드신 것을 보시고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좋음을 인지하셨을 때에 그 분께서는 만족하셨다. 성경을 주의깊게 연구하려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 분께서 사람더러 지키라고 안식일을 세우지 않으셨다. 사람이 아직 일하지 않았고 그래서 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야 일하기 시작했다(창 3:19). 그가 범죄하기 전에는 일곱째 날에 쉴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그런 것은 율법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다(그 분께서 이 날을 인간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주의를 요구하는 또 한 사실이 있다. 앞에 있었던 6일에 관해서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기록이 항상 나온다. 그러나 이 일곱째 날, 즉 안식의 날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마치신 후에, 항상 낮이요 밤이 없는 영원한 날에 쉬셨다. 이 안식은 하나님과 함께 수고하는 모든 자들이 그 끝없고 밤이 없는 날에 영원히 쉴 영원한 안식의 한 표상이다(히 4:3). 우리는 이것을 생각만해도 우리의 가슴이 기뻐 뛰어야 할 일이다.
IV. 창조와 그리스도인의 경험
우리는 지금까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과, 그 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된 것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땅과 그 생물들을 회복시키시고 제 7일에 만족하시는 가운데 안식하셨음을 살펴왔다. 이제 그 사화(史話)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 사화를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그 분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음에 재구성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리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배후에 더 깊은 뜻을 가지셨을까? 우리의 "새로운 창조"와 원래 세상의 창조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물질적 세계의 창조와 영적인 세계의 창조 사이에 어떤 닮음이 있지 않을까? 물질의 외부 세계는 영(靈)의 내적인 세계의 반영이 아닐까?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루시는 방법과 각 개인을 다루시는 방법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것이다. 물질적 세계의 창조에 관련된 절차는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에 있어서 개인의 중생의 경험을 반영한다. 창조의 역사는 새 창조에 있어서 우리 생의 행로를 표상한다.
이래서 우리가 관심의 초점을 모을 곳은 인류의 고대나 현대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의 현재의 경험에 관한 것이 되겠다. 우리의 시대, 현대의 가장 큰 과오는 (일반적인) 인류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그 자신의 자아인 (특수) 개인은 관심 밖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 분께서는 인류를 복 주시려고 뜻하실지라도 개인에서부터 출발하신다. 어떤 개인도 무관심하지 않으신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 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10:29). 우리는 그 분의 모든 사역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을 봐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은 범죄하여 타락하였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무관심하지 않으신다. 그 분께서 모든 개인을 향해 얼마나 마음을 쏟으시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위안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만이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다.
1. “태초에.” 이것이 세상의 시작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절). 하늘과 땅이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나왔을 때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원래 세상의 상태가 얼마나 완전하고 순수하고 산뜻했을까?“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 (욥 38:7). 이 기쁜 노래에는 불평이나 탄식이 손톱만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창조주의 창조는 얼마나 조화로웠는가! 죄도, 사단도, 슬픔도 없었으며 고통이나 병듦이나 누손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장애가 없이 잘 되어갔고 정말 낙원과 같았다.
사람의 원래 상태도 이와 같지 않았는가? 아담과 하와의 본래 상태가 물질적 세계의 최초와 같이 완전하지 않았을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분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한 배필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 에 두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모든 것을 그들 손에 맡기시고 그들을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 삼으셨다. 또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이르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매우 좋게 보셨다. 아담은 자기 안에 내재적인 죄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몸에 아무런 죄의 흔적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이상적인 환경에서 사는 이상적인 인간이었다. 그와 그의 배필은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고 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2. “(그러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공허하게 되었으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2절 상반절). 원래의 완전했던 세계가 무너졌다.
대재난이 떨어졌다. 땅은 엄청난 변화를 입게 되었다. 창조주의 작품이 이제 파괴되었다. 토기장이의 손으로 빚어진 토기가 부서져 과거의 아름다움이 추하게 되어버린 것과 같았다. 지난 날의 좋았던 것들이 변하여 부패로 떨어졌다. 원래 완전했던 것들이 황폐의 바람속에 휩쓸렸다. 더 이상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빛은 이제 꺼져버렸다. 하나님의 심판의 물속에 빠져 흑암이 그 깊음의 표면을 덮었다. 죽음과도 같은 색깔과 소금기 찌든 냄새와 무너져 내리는 굉음 외에는 다른 현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땅은 완전히 파멸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후의 그의 실제 모습이 아닌가? 혼돈하고 어둡고! 번뇌와 욕정의 물결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쳐 구른다. 아름다운 인격은 깊은 죄 밑으로 파선되어 가라앉았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사 57:20).
인간은 이렇게 타락했다. 전에는 그가 은총을 입었었으나 이젠 저주를 받았다. 탈출할 아무런 방법이 없이 그가 범죄 속에 깊이 잠겼고, 스스로 비췸의 아무 가망없이 흑암속에 싸였기 때문에 사망과 슬픔이 그의 생과 행복 위에 내렸다. 이와 같은 황폐는 타락한 생의 증상이다. 도덕적인 그리고 영적인 어두움(엡 4:18을 보라)은 죄인들의 공통된 몫이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는 죄인의 참으로 정확한 묘사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자신을 모르니 얼마나 가련한가!
위에서 말한 것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것이 인간의 악한 본성의 원인이다. 그는 자기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그러하였다(롬 5:12, 19).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상태는 이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덮여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고(엡 4:18), “자기의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이다(엡 2:1). 그는 실로 "심히 부패되어" (렘 17:9) 있으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롬 3:10, 12, 23)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들의 지식과 지혜와 학식과 문화를 자랑하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들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으로 가득한]"자기들의 모습을 안다면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되련만!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2절 하반절).
그러한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두운 상황은 하나님께 안식을 드리지 못했다. 죄와 사망과 사단에게 땅이 예속된 사실이 그 분께 기쁨이 되지 못했다. 설사 하나님께서 이 타락과 황폐에 포기하셨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참으로 기대를 넘는 것이었다. 이미 심판해 버리신 것에 그 분께서 어찌하여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시는가? 어찌하여 이 파멸과 혼돈과 부패에 마음을 쓰신단 말인가? 어찌하여 더 이상 이 무의미한 혼돈과 공허에 손길을 베푸시는가? 이런 질문들은 대답하기 어렵다.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비는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내려오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 위에 베풀어진다. 황폐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은 새로이 일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권리가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권리를 내세워 하나님께 그러한 요구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망상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부적당과 무가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부적당하고 무가치한 인간 위에 부어지고 그 분의 끝없는 자비와 사랑이 타락하고 무력한 인간 위에 내린다.
하나님의 사역의 첫 단계는 당신의 신을 수면위에 운행케 하심이다. 달리 어떻게 땅이 복구될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겠는가? 어둠이 어떻게 스스로 빛으로 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의로 심판 받은 것이 어떻게 스스로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성령의 사역에 의하지 않고는 타락한 피조계가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 파괴되고 무력한 피조제는 얼마나 절망적인가, 부흥이나 회복이나 부활이 성령의 사역 없이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타락한 자는 자기 자신 의 분투와 애씀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안에 곧 자기의 육체 안에 아무 것도 선한 것이 없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롬7:18).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께 감사할 것이니, 땅이 스스로 복구될 수 없음과 같이 죄인이 자기 자신을 새로이 나게 할 수 없을지라도, 땅이 스스로 물에서 벗어날 수 없음과 같이 그가 스스로를 죄에서 구조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땅이 흑암을 빛으로 변화시킬 수 없음과 같이 그가 의를 행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사역을 담당하신다. 옛 창조뿐만 아니라 새 창조도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 인간이 세계를 창조할 수 없음과 같이 그 자신의 영혼을 창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그 모든 일을 하셔야만 했는데, 감사하옵게도 그 분께서 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그 분의 의무가 아니었다. 그 분께는 우리를 구원해야 할 하등의 책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 기대 밖의 은혜로써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것은 아니시되 그렇게 하신다. 그것이 곧 자비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그것을 받는다. 그것이 곧 은혜이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절대적으로 받는 자의 위치에 선다. 자기가 어떤 공덕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 분의 은혜를 무시하는 짓이다.
여기에서 성령의 사역은 사람을 중생(生)시키는 일을 시작한다. 원어의 "운행하시니라”는 "떠다녔다” (hover), 혹은 “조용히 덮었다" (brooded)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자애와 다정함을 그림 그리듯이 보여준다. 그것은 신명기 32: 11에서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을 어떻게 길러내는가와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얻는 것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할지라! 그 분의 심정이 얼마나 우리를 사모하는지!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 타락한 죄인들일 뿐! 그럼에도 그 분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시지 않으시며 또 우리를 멸시하거나 버리지도 아니하신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일 뿐인 우리를 성령께서 품어 안으실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로 여기지 아니하신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합 1:13). 먼지와 티끌에 불과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오, 하나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4).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왜 사랑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요 4:10). 오, 하나님 주의 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 마디의 문책하심도 없이 주께서 “인자들을 기뻐하셨읍니다!” (잠 8:3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거듭남(生)의 원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황폐한 땅에 대하여 일하시어 그것을 다시 한번 "매우 좋게” 만드시도록 그 분을 강권하였다. 그러한 인간의 황폐한 파멸이 한번 더 "매우 좋게" 복구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애로운 심정이 도저히 안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거듭남은 첫번째의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과업이다. 이 작업 없이는 하나님의 빛은 아무 것에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빛을 비추기 위한 준비로써 당신의 영으로 하여금 사람의 내면에서 그 이해할 수 없는 작업을 하게 하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7,8).
죄인이 실제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생명이다.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죄인은 하나님을 원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취는 하나님의 빛도 바라지 않는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 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 3:19,20). 거듭난 자라야 빛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람이 일단 다시나면 그는 즉시로 하나님의 빛에 반응하게 된다. 그의 양심이 움직여 하나님께로 향한다.
4.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3절).
앞 절에서는 "하나님의 신(영)은… 운행하시니라”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신(영)과 하나님의 말씀은 함께 일하시며 불가분적이시다. 성령께서 먼저 일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일하신다. 우리가 “성령으로” 났으며 (요 3:5,6), 우리의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 (벧전 1:23).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추어...” (시 119:130).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빛이 있었다."
첫째 날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빛을 불러내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의 첫 사역은 흑암에 빛을 보내는 것이다. 죄가 사람의 마음을 매우 어둡게 하였음으로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가 자기의 위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앞으로 멸망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등의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완전히 어두움 속에 있다. 자기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도 그의 사고도 그 에게 전혀 빛을 비춰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왔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비친다. 실제로 황폐한 광경에 발하여 피조계의 타락한 상태를 보인다. 어두움이 제거되었을뿐 아무것도 변화된게 없다. 빛 아래 드러난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없다. 하나님께 좋게 보인 것은 그 분 자신의 빛뿐이다. (4절).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참 빛이시기 때문에 (요 1:9),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다(마 3:17을 보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의 첫째 날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 셨느니라” (고후 4:6). 하나님의 빛이 전에 어두운 세상에 비쳤던 것과 똑같이 이제 하나님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어두운 심령에 비춰진다.
그런데 사람이 이 하나님의 비취심을 받는 순간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다." 영적인 감수성과 지식이 이제 점차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전에는 좋게 여겨지던 것을 이제 나쁘게 보며 전에는 나쁘게 여겨지던 것을 이제 좋게 보게 된다. 아직 정확한 식별력은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두움의 구분을 실제로 맛본 사람들이 많다. 이 때에 하나님의 사역이 그러한 사역이 주는 빛을 통하여 사람의 조명된 영과 그의 어두운 혼 사이를 구분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하였기 때문이다(히 4:12). 이러므로 사람 속에 "육으로 난 것” 곧 육과 “성령으로 난 것” 곧 영 (요 3:6) 사이의 구분이 있다. 신자가 그러한 총합적인 경험을 갖지 않아서 그러한 구분이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구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위치와 이름을 각각에게 주셨다. 어두움은 여전히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영원히 어둡고 빛으로는 결코 바꾸어질 수 없었다. 땅 그 자체는 빛의 근원이 아니다. 땅이 빛을 등질 때에는 언제나 그 상태가 어둡게 된다. 그러나 빛이 어두움 속으로 비추이면 그 빛은 어떻게든 어두움으로부터 침범당하지 않는다. 빛이 어두움과 음침함을 쫓아내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와 똑같이 사람의 옛 성품(육)과 사람의 옛 생활 (혼의 생활, the soul life)은 항상 어둡다. 그러나 어떤 사람 속에서 영적인 생활이 강성해지면 옛 생활과 성품은 그 힘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빛에서 행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어두움 속에서 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그리고 계속하여 빛속에서 행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역시 우리가 완전히 어두움을 제거하거나 죄악된 생활과 성품을 뿌리뽑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빛의 아들들이요, 낮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살 전 5:5을 보라) 항상 하나님의 빛 안에서 걸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땐 어두움이 엄습해 와서 급기야 또다시 우리를 덮칠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낮은 “저녁"과 "아침" (5절)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이 낮이다. 하지만 그것이 "저녁”과 “아침"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 삶에 아침만 있고 저녁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언급된 낮이 아니다. "만일 우리 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요 1:8),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10).
어둠 그 자체가 “밤"일지라도 일단 그것이 비췸을 받으면 더 이상 밤이 아니고 “저녁"이다. 그러한 밤이 아무리 어두울지라도 그 위에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빛이 있는 이상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밤이 일단 빛으로부터 비침을 받으면 밤으로 남아 있을 수 없고 저녁으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 빛의 비침을 받은 신자에게 있어서도 그가 드러내는 것이 완전한 "밤"이 아니라 "저녁"이라는 사실을 제쳐 놓고는 그의 어두움이 아주 깊어 보이는 때가 있다. 이것은 어두움이 근절되지 않고 그의 안에 남아 있을지라도 이제 빛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때때로 실패하고 넘어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아 갖고 있는 빛이나 생명을 그런 것을 이유로 해서 잃지 않으며 또 다시 불신자로 되어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을때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넘어질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는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날 수 있으나(갈 6:1) 그렇다고 해서 거듭나지 못한 죄인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 문장이 이 창세기의 첫 장에서 여섯번 반복된다. 빛이 낮으로 불리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6일 동안의 각 날이 진입해 들어가는 곳은 "아침"일 뿐이다. 그 가장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낮의 경험은 나중에 온다. 아침은 낮의 전조이지 낮의 충만한 빛은 아니다. 하나님의 순서매김에 있어서 아침이 밤 다음에 온다. 우리가 동트는 여명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광명이 점점 더 밝아 완전한 낮이 되는 것은 아직도 미래에 향유할 경험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침일 뿐이다. 낮은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되어 그 분의 마음에 완전히 흡족해 하실 때이다. 그때에 그 분께서 안식하실 것이며 완전한 낮이 올 것이다(잠 4:18을 보라). 그때에는 더 이상 저녁과 아 침이 없을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 영원한 즐거움의 밤이 없는 낮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시 19:2). 듣는 자들의 수가 얼마나 적은고! 정말,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빛은 "아침"일 뿐이다. 우리가 완전한 광명으로 빛나는 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유한한 것이 지나갔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6절).
이것은 우리들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에 대해 말한다. 이 궁창은 위 아래로 물을 나눈다. 전에 짜고 어두운 물이었던 것이 이제 증발하여 하늘 속으로 올라갔다. 참으로 묘한 나뉨이다! "궁창"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는 비 순수한 것에서 순수한 것을 갈라내시고 그것들을 각각 제 자리에 머무르게 하셨다.
그것은 십자가 사역의 한 표상이다. 그 사역은 갈라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빛이 깊음 위에 비쳤을 때 물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전에는 끝없이 큰 물이 어둠에 싸여 아무도 그 물의 실제 모양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빛이 비췄다. 더 이상 숨김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물은 더욱 불결해 보였다. 빛은 정화시키지 않고 대신에 사람의 수치를 드러낸다. 사람이 하나님의 빛 아래 있을 때 일어나는 한탄과 참회! 이제까지 위안을 주었던 것이 이제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그는 자기의 죄된 생활과 본성의 추함을 보게 된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갈라놓는 능력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롬 6:6, 11)와 자아(自我, 갈 4:20)와 육체(갈 5:24)와 세상(갈 6:24)과 세상의 초등학문(골 2:20)을 형틀에 못 박는다. 죽음으로 인한 분리는 정말 큰 분리이다. 그것은 굉장한 해방이요, 엄청난 구원이다. 죽음은 모든 관계를 끊고 모든 복잡한 얽힘을 끝낸다. 십자가를 제쳐 놓으면 아래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은 달리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함으로써 우리가 "아래" 있는 모든 것 들로부터 구출된다. 우리가 거듭났을지라도 죄, 자아, 육체, 세상, 그 풍습에 아직도 붙잡혀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끌어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경험한 후에는 "구별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빛이 일단 우리를 자기 성찰에로 이끌었으면 이번에는 우리가 구출을 받도록 십자가에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십자가의 표는 우리가 하늘의 백성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우리의 지위를 경험과 혼동하지 말라. 우리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서 믿는 순간, 그 분 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는 바로 그 정상 (頂上)에 이른다.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 분께서 당신의 십자가로써 "위에 있는 것을 "아래" 있는 것으로부터 잘라 내셨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지위이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가 아직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 사이의 그러한 분리를 경험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밑에 있는 것 들로부터의 구출을 경험하여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경험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 분의 죽으심에 연합시키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을 기다린다. 우리가 “위로부터 난” (요 3:3,7)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요8:23)을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혼과 영 사이의 분리를 정말 실증적으로 알도록(히 4:12) 주님의 죽으심에 경험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제사장의 칼이 관절과 골수를 끊고 나누듯이 십자가의 사역이 우리의 혼과 영을 나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로 간주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그 분의 죽으심이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이 된다. 이것이 "함께 죽음" (同死)이다. 대신의 죽음은 자연히 "함께 죽음"을 낳는다. "대신 죽음” (代死)은 “함께 죽음" (同死)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받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죽은 자들로 간주하신다. 그것이 개인적인 경험에서는 대신 죽음일지라도 법적인 견지에서는 함께 죽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믿는 그때에 우리는 사실상 그 분과 함께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이 함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함께 죽음의 경험은 우리가 거듭난 후에야 그리고 빛과 어두움의 두 성품 사이에 있는 투쟁 결과로써의 십자가를 통한 구출을 추구한 후에야 획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면적인 일들에 관한 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상태에 관한 분리도 또한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은밀히 일하시면서 위 엣 것들에도 향하려는 열망과 욕구를 일으켜 주신다. 어떤 사람이 거듭났으면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 유한다(벧후 1:4). 십자가는 이 신적인 성품이 위에 있는 것들을 아래 있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오늘날 그 신자의 심령은 하늘을 향해 끌린다. 그 신자가 위 엣 것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소금기 있고 어두운 정욕과 탐심들이 지금 정화되고 있다.
물질적인 생명을 갖고 있으면 그 생명의 호흡에 공급될 공기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보건데, 영혼이 하늘의 빛으로 비침을 받으면 하늘의 공기를 호흡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궁창의 위아래로 물을 나누셨을 뿐 아니라 영혼의 내부에서도 나누시는 일을 하신다. 이렇듯 그 분께서 "하늘"을 우리 속에 두시며 우리를 하늘 안에 두신다. 성도들의 첫 징표는 그들이 하늘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고 하늘의 왕국을 섬기며 "하늘”의 도성에 들어가기를 기대한다. 그들의 기대하는 바는 하늘 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늘나라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을 이 세상의 나그네와 외인들로 여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을 안과 밖에 소유한 후에는 위에 있는 것들이 무엇이며 아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내면의 하늘은 외면의 하늘을 요구한다. 우리가 하늘의 생명을 가졌으면 하늘의 행보(行)를 하여야 한다. 거듭난 사람의 성품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는 말로 표현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는 말로는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과 유행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다. 건강한 몸이 오염된 공기를 호흡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는 사악과 희롱과 혼탁의 대기를 호흡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의 형제들과 있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그들은 하늘의 순례길에 있어서 자기의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요 3:14).
이때 (6~8절)까지엔 신자의 심령이 이미 하나님의 통제 아래 와 있다. 그래도 그의 실제의 상태는 그의 생활에 마른 땅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열매들이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의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령이 이제 위로 향해 있고 하늘과의 교통이 이미 시작되었다. 한 단계만 더 있으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6.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9절).
이것은 하나님의 작업의 셋째 날이다. 이 날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고린도전서 15: 4에 언급된 "사흘 만에"와 완전히 일치한다. 성경에서의 3"이라는 숫자는 항상 부활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땅이 이제 물로부터 나왔다. 이전에는 깊은 바다의 어두움 밑에 묻혀 있다가 이제 그 무덤으로부터 일어나 열매들을 산출할 수 있는 마른 땅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을 제거하지는 아니하셨을지라도 그것을 제한된 경계내에 가두셨다. 바다는 이제 자기의 한계를 갖게 되었다. 땅에 범람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바다라 칭하셔서 (10절) 그 존재를 인정하셨다.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때까지는 그 바다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뭍(마른 땅)도 바다와 구별되도록 땅이라는 이름(10절)이 주어졌다. 이것이 셋째 날의 전반부의 작업이었다 (셋째 날의 작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날에 하나님께서 두번 말씀을 발하시고 두번 그 결과를 좋다고 하셨다. 그 날의 전반부 동안에 땅이 물로부터 나왔으며, 후반부 동안에는 풀과 채소와 과실수들을 산출했다).
영적으로 말하여 전(前)날에 십자가가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우리가 살폈다. 자연스런 절차로써 지금 셋째 날에 표상되는 것은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준다.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던 것과 똑같이 또한 우리를 위하여 일어나셨다(롬 4:25). 우리에게 그 분의 죽으심이 필요한 것처럼 또한 그 분의 부활이 필요하다(롬 5: 10).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복음이 공허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는 아담에게 다시 말하면, 자연인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구조된다. 그리고 그 분의 부활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다시 말하면, 초자연인에 속한 모든 것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 분의 죽으심을 우리가 더 이상 죄인이 되지 않도록 죄인의 지위와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낸다. 그 분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여 의인의 지위와 경험을 얻게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우리의 낡은 것을 수선하거나 개량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용하여 낡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시고, 주 예수님의 부활을 이용하여 우리를 새 것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짐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 분과 함께 일으켜질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의 생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옛 피조물"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옛 생활이든 옛 성품이든 혹은 옛 행위이든 하나님의 마음을 도저히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 (고전 15:22). 하나님의 눈으로는, 우리의 옛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죽음의 표를 갖고 있다. 이 죽은 것들은 수선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 만을 원하신다. 즉, “새로운 피조물"을 원하신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분의 최초의 작업은 새로운 출산, (birth)이며, 이것에 의해 그 분께서 사람에게 “새 영 과 새 마음"을 주신다(앞에서 우리가 살핀 대로). 이것이 첫째 날의 작업이다. 이 새 영은 이제 옛 생활을 그 본성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하나님의 영과 함께 일한다 (앞에서 본 대로 이것이 둘째 날의 작업이다). "이전 것"의 문제를 해결하신 후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가운데 “새로운 피조물"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신다. 그 분께서 하나하나, 우리의 몸까지 변화시키실 때까지 (이것이 우리의 기대하는 바 여섯째 날의 작업이다), 일하여 가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인데 이 일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논의될 것이다.
부활의 경험 (셋째 날)은 중생의 경험 (첫째 날)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 (둘째 날) 후에 온다. 중생은 생명의 시작이다. 이 거듭난 생명이 있어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에 기꺼이 성령과 함께 협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은 자연히 그 분과 함께 부활함에 이른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5). 중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부활은 더 풍성한 생명을 준다. 신자가 만일 중생에서 멈춘다면 죄악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만일 함께 죽음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의(하나님의 성결)를 행할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험함에 있어서 단계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거듭나고 다음에 함께 못 박히고 마지막으로 함께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자. 그러나 사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어 거듭날 때에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앞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경험해야 할지라도, 우리를 이미 부활한 자들로 간주하신다. 많은 신자들에게 있는 위험이 이것이다. 즉, 그들이 자기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의 사실이 보이지 않을 때에 자기들이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성경의 말은 인간의 경험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하나 님의 표준에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죽자 살자 힘을 써본다. 그러 나 실제의 경험에 있어서 그들은 패배로 끝나고 평화나 기쁨을 잃고, 자기들이 갖고 있다고 고백하는 자유와 능력을 몽땅 상실하게 된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한다면 승리를 경험할 것이다. 우리의 패배 중 많은 것의 원인은 함께 못 박힘의 깊은 뿌리를 거절하면서 부활의 열매를 바라는데 있다. 십자가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일하게 하지는 않고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갖고자 안달함으로써 이전 것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데,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부활은 그 기초를 십자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다. 부활을 경험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십자가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가 받아들여짐에 관하여 말할진대,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에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가 우리를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자들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짐은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의 내적인 상태를 보시지 않으시고, 다만 우리의 새로운 위치를 보신다. 그래서 그 분께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들로 여기신다. 이것이 우리의 객관적인 구원이다.
그러나 또한 다른 면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의 아드님의 몸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우리의 머리 되시는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룩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그 분께서 원하신다. 이리하여 우리가 옛 피조물에서 구출되어 하나님께 서 정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독자적으로 우리가 부활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 분의 부활에 의해서만 우리가 이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그 분과 함께 부활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사용함으로써만 우리가 마른 땅에 옛 어두운 물의 범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땅이 물로부터 나온 것같이, 우리의 영이 육으로부터 부활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물이 빛의 비춤을 받지 못했음같이 육은 영이 되지 못한다. 둘이 한 곳에 모여 그 한계를 넘지 못했음 같이 육이 아직 존재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통제 아래 있게 된다. 육은 속량되지 않고 하나님께 완전히 배격당하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 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육에 속해 있지 않다.
우리는 이미 셋째 날의 전반(半)의 작업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 날의 후반의 작업을 살펴보자. 일으킴을 받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11, 12절). 열매맺는 일과 부활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4)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8).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땅"이라는 이 말은 흙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흙은 부서질 수 있음을 우리가 안다. 그것이 딱딱하면 비옥할 수 없다. 흙이 부서지는 덩어리가 작으면 작을 수록 심은 씨앗에 자양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수확을 위해서 더욱 좋다. 물이 가라 앉았을지라도 흙은 굳어져 있어서 파종자의 손에 저항했다. 마찬가지로 육의 영향력이 없어졌을지라도 우리의 자연적 생명은 “자기의 의"에 아직도 매어있다. 그 자신의 자연적 능력과 덕을 자랑하고 굴복하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신자의 혼의 생명이 부서질 때에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 안에 있는 기름진 흙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무능력을 요구하신다. 그 분께 서 우리들에게서 힘을 찾지 아니하시고 연약을 찾으신다. 채워져 있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시고 비워져 있음을 요구하신다. 그 분께서 우리의 저항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우리의 굴복을 기다리신다. 그 분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강하심이 우리의 연약함에서 돋보여진다. 부서진 밭이 하나님의 씨앗의 성장에 가장 좋은 땅이다. 결실(結實)은 손대지 않은 채로 놔둔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수고 낮추고 약하게 하고 손들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김에 의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은 하나님의 능력의 발현에 장애물이 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만일 우리가 그 자연적인 능력과 지혜와 덕과 함께 우리의 혼적 생명(soul life)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땅이 물로부터 올라왔음과 똑같이) 우리의 육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적인 힘을 내던져 버리고 부서진 (상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손을 받아들인 후에야 우리가 하나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죄악되고 불결한 육만 파괴하면 된 다고 생각하여, 우리의 자연적이고, 선하고, 바르고, 정직하고, 의로운 혼적 생활을 부인하는 것도 이 열매 맺는 일에 있어서 필수적임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땅에 우리가 만족해하고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심령의 흙이 부서지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높이 받들고 있는지! 죄로 물든 우리의 이 “나” 가 약하고 허무함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 모든 그 선한 결심들도 사라지는 거품과 같다!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비워 진흙이 도공의 손에 맡겨짐같이 완전히 굴복할 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기 시작할 것이며 그 분의 능력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실재를 우리가 많이 알면 알수록 혼적인 생명의 부서짐의 진정한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땅은 바다의 물결로 요동치 않는다. 그 생산성은 육에 의해 길러지지 않는다. 안개 (창 2:6)가 그 자양분이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 육의 명과 가르침은 진리에 따른 열매맺는 일에 "유익이 조금도 없다(골 2:23). 반대로, 하나님께서 육의 한계를 제한하시고 그것을 그 이름(육)으로 부르셔서 그것이 새 창조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고 그 자체로 정죄를 받아 복구될 수 없음을 보이신다. 열매 맺는 일에도 발전이 있다. 풀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채소,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과목이 나온다. 열매는 개인적인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롬7:4). 이 모든 열매들은 번식할 수 있다.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창 1:12). 씨는 각기 그 종류에 따라 그 열매 속에 있다. 이래서 사랑은 사랑을 다시 낳고, 기쁨은 기쁨을 다시 낳고 등등 할 것이다. 사랑이 필요할 때 마다 우리가 사랑을 보이며, 기쁨이 필요할 때마다 기쁨을 내보인다. 태양의 열에 더 많이 노출된 열매가 더 일찍 익고 더 맛있다. 또 사람은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둔다.
7.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4, 15절).
이 날의 작업은 이전의 작업과는 판연히 다르다. 장면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졌다. 그것은 하늘 위에서의 작업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갖는 신자의 승천을 표상한다. 부활 후에, 잇따르는 사실이 승천이다. 승천은 부활 다음에 오는 불가결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승천 없이는 우리의 “새 창조"도 완전한 작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함께 부활함과 다른 진리에 있어서처럼,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천 위치에 놓으시기 때문에 승천은 우리에게 사실이 되고 실재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아직도 지체하고 있을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부활을 경험하기까지는 승천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그 분의 부활생명에 연합되었다면 자연히 지상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며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앉히셨다” (엡 2:6). 승천은 그저 자연히 부활을 뒤따른다. 승천생명은 모든 성도가 이해해야 할 진리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지금은 그곳 하나 님의 우편에 앉으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셨다(엡 1:20, 21). 승천생명은 사단의 모든 권세를 이기는 생명이다. 전에는, 우리가 단순히 육과 죄와 세상을 이기었으나, 이제 승천으로, 어둠의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우리가 싸워 승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일단 우리의 영과 혼이 분리되면, 그리고 일단 부활로 말미암은 우리의 영이 혼적인 생각과 감정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면, 우리가 모든 세속적인 환경과 관심을 뛰어 넘을 수 있게 되어 승천생명을 소유한다. 승천생명으로 들어온 성도들은 보좌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살리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올리워진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1~3).
그런데 하늘의 광명들은 해와 달과 별들로 나누어진다(16절). 해는 낮을 주관하는 광명이다. 그것은 땅에 열과 빛을 주는 원천이다. 그 빛은 스스로 퍼져 나가며 불변하며 항구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 참 "신령한 사람” (heavenly man)의 한 모형이다. 그 신령한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지금은 이미 영광에 돌아가 계신다. 말라기 4:2은 그 분께서 "의로운 해"이심을 우리에게 알린다. 우리의 영화로우신 주 예수께서는 천상에서 “더 위대한 빛이시다. 그 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에 과연 그 분은 "우리에게 임하신" "위로부터의 돋는 해”이셨다(눅 1:78). 또한 “세상의 빛”이셨다(요 8:12). 그 분께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셨을지라도(요 1:6)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 (요 1:5).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 (요 3: 19, 20).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의로운 해" 로써 나타나실 천년왕국의 때까지 "장막”(시 19:4 하반절)에 거하시려고 하늘로 다시 가셨다. 그 때에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 19:5~6).
오늘날 그 분의 빛은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 그 분을 믿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 분의 비취심 아래 있지 않다.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요 14:19). "오직 우리가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히 2:9).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엡 5:14). 도덕적으로 어두운 세상의 이 밤에 사람들은 "해”의 행방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 햇빛보다 그 해가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달이 밤에 햇빛을 반사하는 것과 똑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에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의 이 어두운 밤에 발광체(發光體)가 된다. 6일 중의 첫째 날에 우리가 빛을 받았다.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니라" (요 12:36). “빛을" 믿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해야 한다. 이 악한 세대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마 5: 14, 16).
이 승천된 지위에 있음으로 해서 성도들은 주님과의 더 밀접한 교제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결과로써, 이 세상의 어두운 밤의 경악스런 상태가 더욱 명백해지고 어두움의 세력이 더 가까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는 더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되고 그리 스도께서 더 위대하게 되시지 않겠는가? 이 얼마나 놀라운 지위인가!
우리가 아는 대로 달빛은 햇빛보다 못하고 그것에 훨씬, 훨씬 못 미친다. 달빛은 어두운 밤에 빛으로써 일한다. 그리고 해라는 빛의 원천과 비교할 때에 그것은 만월일 때에도 침침하고 희미하다. 만월부터 초생달까지 변화와 변동도 왜 그리 많은지 달빛의 정도는 해에 향하는 그 각도에 좌우된다. 또 그것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는 때도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의로운 해"를 믿는 더 작은 빛들인 우리들을 위한 영적인 의미를 볼 수 없는가? 아, 교회는 얼마나 변화무쌍한가!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령하고 항상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관찰에 의하면, 교회가 항상 그렇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어떤 때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가 신령하게 존재할 때에도 충만한 형태로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교회가 그 빛의 원천으로부터 돌리면 비정상적으로 된다. 교회의 하는 일이란 끊임없이 빛을 받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빛이 교회 자체에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체 안에 영광을 갖고 있지 않고, 교회의 모든 영광은 그의 주님으로부터 온다. 오직 그 분의 빛으로만 교회가 비칠 수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 이니라” (고후 3:18).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보는 것이 바로 교회에 있어서 영광스러운 날이다. 지상에서 볼 때에, 교회는, 달과 같이, "태음(달)이 자라게 하는 보물” (신33:14)로 참으로 “아름답게" (아 6:10) 보인다. 교회는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될 것” (시 89:37)이며,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 할 때까지 이를 것이다(시 72:7).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해의 직접적인 광선이다. 그리스도 안에 그 분의 몸으로써 거하는 우리의 지위는 정말 아주 귀하고 그 분의 따뜻함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극히 중대하다. 그러나 해가 없어지면 달과 별들이 사라지게 된다.
달이 교회를 상징하는 한편, 별들은 개인적인 성도들의 모형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빛들(원어로 발광체들)로 나타나기" <빌 2:15> 때문이다. 해는(우리의 논의 과정에서) 지나갔고 달은 곧 지나갈 것이며, 이제 별들이 무대에 나타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 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3).
하나님께서 이 별들이 "주관하도록 그것들을 창조하셨다(창 1 : 16, 17). 생각해 보라. 성도들의 빛이 주관하는 힘을 갖고 있다. 얼마나 많은 죄들이 성도들로부터 자취를 감추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부정한 것들이 감히 신자들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의와 사랑으로 걷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주관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런데 신자들이 주관하는 대상은 어두운 밤이다. 승천(天) 된 그리스도인에 입혀진 가장 위대한 권위는 어두움의 권세를 정복하는데 있다. 새 신자들이, 처음에는 영적인 싸움에 대하여 분명히 모르고 마귀의 간계와 공격과 유혹과 거짓에 대한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하늘에 올리워진 자기들의 (승천된) 지위를 경험하고는 즉각적으로 어두움의 권세들의 활동을 보게 되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그것들을 이기는 법을 알게 되는데 그들이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계 12:11).
그들은, 마귀의 모든 일들을 파괴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도전적인 기도를 하는 방법은 물론, 적의 권세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르는 방법도 또한 안다. 그들은 십자가의 견고한 토대 위에 서는 법을 배워가며, 갈보리에서 이미 성취된 승리를 지키는 법을, 적의 모든 계획을 정지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행사하는 법을, 악한 영들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하여 찬미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들의 주관하는 지위에 의하여, 올리워진 승천된 신자들은 "사단을 그들의 발아래서 상하게 하는” (롬 16:20) 경험을 자주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의 빛은 하늘 궁창의 별들로써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도록" 사용된다(창 1:14, 18). 그들은 때의 징조를 안다(마 16:3 참조). 그들은 하늘 보좌를 보고 있기 때문에 시대를 분별할 줄 안다. 세상의 되어가는 일들을 꿰뚫어보고 마지막 때의 현상들을 확연히 감지한다. 세상의 돌연한 변화들도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할 때에도 그들은 동요치 않는다. 하나님 존전에서의 감수성 있는 성경이해를 통하여 이러한 변화들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올리워진 지위에서, 그들은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어떤 사태들을 일으키실지 알게 된다. 종말의 때에 세상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그들은 알고 있다.
승귀된(올리워진) 신자들은 깨어 있어야 할 필요를 늘 느끼는데,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세상을 미혹케 할 것 (마 24:24)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죄 지은 천사들과 악령들이 혼란을 가져와 사단의 이설들과 괴상하고 기만적인 초자연의 현상들을 믿도록 세상을 또한 무식한 성도들도 꾀일 것이다.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에 든든한 기초를 두지 않은 사람은 속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진 승귀된 신자들은 마귀의 간계를 모르지 않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고후 2:11).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0절). 이것이 다섯째 날의 작업이다. 이 날은 승귀와 왕으로서의 주의 재림 사이에 있기 때문에 그 영적 의미는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물고기들과 새들을 창조하셨다(21절을 보라). 물이 스스로 물고기들을 낼 수 없으며, 땅도 스스로 새들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들과 새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물들과 땅에 두셨다. 이 물고기들과 새들이 모두 생물이지만(21 절), 다른 생존양식을 갖고 있다. 전에 언급한 대로, 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게 하는 죄 된 육체를 상징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성공한다. 물들로부터 나오는 땅은 깨끗케 된 혼의 생명(the purified Soul life)을 상징한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양식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까지 높이 올라갔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발로 땅을 밟고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나타낼 수밖에 없다. 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승귀된 지위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떠나 살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다. 그러므로 아직 여기 지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혼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리에게 의무 지워져 있다.
그런데 물들도 땅도 원래 그것들 안에 어떤 생명도 갖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다른 형태의 생명들을 창조하셔서 그 장소들 안에 두셨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 결과로 오늘날 물고기들이 물 속에서 그곳의 생명을 나타내며, 새들은 땅위 공중에서 그곳의 생명을 나타낸다. 그와 똑같이, 우리의 기독교적 삶에 있어서, 원래는 우리의 육체와 혼에 신적인 생명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남을 통하여 하늘에 있는 승귀된 지위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나날의 행보에서, 즉 우리의 육체와 혼에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우리의 생명은, 물고기와 새의 그것과 같이, 한 형태를 취하는 것 같다. 그런데 외면적 형태에 있어서의 정도의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원리는 동일하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신적인 생명이 육체와 혼의 본래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그것들 속에 나타날 뿐이라는 점이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빌 2: 15, 16). 한편으로는,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3). 이것이 승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골 3:5). 이것이 생명의 발현이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얻을 것이다(창 1:22).
9.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4 절).
여섯째 날의 작업은 셋째 날의 작업과 비슷하다. 그것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지상 생물의 만듦은 여섯째 날의 전반부에 되어진 일이다. 이것은 생명의 밖으로의 발현이 발전적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물이 보이지 않으며, 그러므로 여기에서 상징되는 영적인 의미는 새로운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가치(virtue)의 발전이다.
다섯째 날의 작업과 여섯째 날의 전반부의 작업을 함께 생각해 보면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물고기, 새, 육축, 기는 것과 짐승은 모두 사람의 유형들을 보여준다(마 4: 19, 행 10:12, 28을 보라). 어느 그리스도인이 일단 승귀된 생명을 경험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위한 채널(channel)이 되어 그 생명을 많은 심령에 전달해 준다. 그리하여 이 모든 생물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명과 행위에 관련을 갖는다.
다음으로 여섯째 날 후반부의 작업을 보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26,27절).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재림 (이것은 영적 실재에 있어서 이미 하나의 사실이다)에로 이끈다. 중생, 함께 못 박힘, 함께 부활함, 열매맺는 승귀와 생명의 발현 등의 여러 영적인 단계들을 통과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는 것을 향하여 발전하여 간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 4:19) 이것이 영적인 생명의 목표이다.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 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 (고후 3:18)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이 모든 것을 그 분과의 연합을 통하여 경험한 후에야 가능하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 3:9, 10).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이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따라 "새 사람”의 완전성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벗어 버리라"와 "입으라”는 의지적인 행동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옛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배격하고 새 사람의 모든 신선함을 택하려는 의지를 발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절정은 의지의 삶이다. 그들은 의지를 굳게 세워놓은 뒤에, 마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되어진다. 마음은 영적인 전쟁의 전투장이다. 그것은 죄로 아주 부패해진 우리 생명의 중심점일뿐 아니라 아담 생명의 바로 본거지이다. 마음이 새롭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쉽게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완전한 회복은 아직 미래에 놓여 있다. 즉, 주 예수님의 재림때에 온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 3: 20, 21).
“그 (그리스도)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으리라” (요 3:2).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얻을 뿐 아니라 또한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26,28절). 이것은 천년왕국의 논의로 우리를 이끈다. 그 때에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며 (계 20:4) 다스릴 것이다. 그 왕국에서 "열 고을 권세(눅 19:17)를 차지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
천년왕국의 영광은 모든 신자들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몫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자. 그것은 창세기 1장에 상징된 생명의 여러 영적인 단계들을 경험한 이들만을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과거 경험에 있어서 그 분과 연합된 자들 이 또한 그 분의 모든 미래 영광에 있어서 그 분과 연합될 것이다. 구원 얻는 것은 단순히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것은 충성과 환난과 승리를 요구한다. 십자가가 면류관에의 길이며 환난이 영광을 위한 조건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사는 모두에게 값없이 주시지만, 상급은 무조건적으로 나누어 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손실을 감수한 사람은 모두 오는 세상에서 보상을 얻을 것이다. 이 생에서 이미 멍멍거리고 호사를 누렸다면 다음 세상에서 어떻게 영광을 얻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미래의 존귀와 영광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겠는가? 거룩한 삶과 신실한 봉사가 주님의 눈에 띄지 않은채 망각 속으로 사라질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 천년왕국의 통치가 미래에 가서야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 완전한 실현은 미래를 기다린다 할지라도, 실제로 지금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노릇” (롬5:17)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행사함으로써 만물을 다스릴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악한 영들의 도모를 저지함으로써 그 악한 모든 영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야 한다. 사단은 결국 천년왕국 동안에 결박을 당할 것이지만 확실히 우리는 지금 “내세의 능력" (히 6:5)을 사용하여 그의 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오늘날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서 기도라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그 환경이 국가적인 문제이건, 가정 문제이건, 혹은 교회적인 문제이건, 개인 문제이건, 기도로 그것을 제압할 수 있다. 성령과 함께 협동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행사한다면 완전한 자기통제(self-control)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다. 참으로 이것은 승리의 생활이다. 천년왕국의 그리스도인은 그 능력이 막강하다.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 외에, 성도들에게는 특별한 음식(창 1: 29)이 있음도 주목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씨 맺는 식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안에 생명력을 갖고 있다. 안에 생명을 갖고 있는 것만이 우리의 음식이 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미래에 우리의 음식은 우리 상급의 한 부분임을 알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계 2:7, 17). 음식의 문제는 부활 후에도 계속되는데,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사실을 기억하라. 하늘나라에는 영원히 우리의 음식으로서 생명나무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래에 가질 것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고, 음식이 그것을 섭취한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요 6: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요 6:54).
오늘날 우리가 강해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님을 먹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되는대로 읽을 수 없다. 기도와 명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하여 우리의 영적 생명이 길러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행할 때마다. 우리의 속사람은 한번 더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의 죽음(그리스도의 살)과 생명(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으로 받아들일 때마다 우리는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영적으로 강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두 생명을 주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쭉정이에 불과할 뿐이다.
10.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2). 창조되거나 만들어진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이 끝났다.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대속사역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안식 밖에 없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열번 이상을 말씀하셨다. 그 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결국 이루어졌다. 모든 단계에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이 있었다. 그 분의 모든 사역은 단지 그 분의 원래의 잠재적인 능력의 성장이나 발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하나하나 방출하심으로 처음에 구상하셨던 계획을 완성하셨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엡 2:10).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복되도다! 일곱번 하나님께서 "좋다”고 말씀하셨으며, 맨 마지막의 경우엔 "매우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그리하셨을까? 그 분께서 자신의 기묘한 작품에 이제 만족하셨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 만족하셨기 때문에 쉬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안식으로써, 매우 필연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영원한 안식의 때로 우리를 이끈다. 그 때에야 말로 우리가 “ (하나님의) 저 안에 들어갈 것이며 (히 4:3), 또한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 과 같이 우리 일을 쉴 것이다(히 4:10).
여기서 영원이 시작되며, 영원히 끝없는 날들을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쉴 것이며, 그 분의 뜻을 알고, 그 분의 긍휼하심에 놀라며, 그 분의 은혜를 찬양할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상태인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고전 2 :9).
그러나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것은, 우리가 이 안식을 갖기 위하여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것을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 29).
여기에 두 개의 쉼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주어진다. 다음의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운 이후에야 경험된다. 우리의 영혼은 많은 욕정, 열광, 충동, 좌절, 고통, 슬픔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멍에를 메시고 죄인들의 거스림을 인내하시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 앞에 모범을 보이시는 우리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곤핍해지거나 겁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분으로부터 배워감에 따라 우리 영혼은 쉼을 얻게 될 것이다. 얼마나 평온한 삶인지! 얼마나 평안한 삶인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한 삶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6일 동안의 각일(日)은 “저녁"과 "아침"으로 특징을 이룬다. 저녁 다음에는 꼭 아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곱째 되는 날, 즉 하나님의 안식일에는 저녁이나 아침이 없었다. 이제 우리가 맞이한 것은 완벽하고 완전하며 영광스러운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끝이 없는 날이며,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물리적인 창조는 영적인 창조의 모형일 수 있다. 그래서 물리적 창조 역사의 10 단계 (본 장에서 기술한)는 신자들이 현세와 내세에 경험할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자 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5~27).
우리가 여기에 제시한 이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백한가. 이러한 가르침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모두 이처럼 우리에게 말하는 창조의 음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손의 행사가 그 분의 깊은 생각과 위대한 사랑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와 구속 하나님의 이중적 사역이다. 그것들이 하나님 자신을 말없는 행동으로 선포하며 성경 전체의 열쇠이신 그리스도께서 대하여 중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 자신의 생각에 들어 맞게 왜곡시키려고 피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과 그 분의 그리스도께 대하여 증거하도록 그 분 자신이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드러내려고 애쓴 것이다.
<계속>
[옮긴이 주]
IV. 창조와 그리스도인의 경험,
3번("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항에서 거듭남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워치만니 형제의 거듭남에 대한 이해와 저의 이해는 약간 상충되어 이 내용을 나누겠습니다.
영적성장에 대하여서... 아래 그림과 같이 4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워치만니는 두번째 학파인 '케이직'의 견해를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보수 개신교단의 가르침과 같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시기에 중생(거듭난)의 경험을 갖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 의심을 갖고 반기를 든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웨슬레이'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구주로 믿을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지만 아직 거듭난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 '영'으로 거듭나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시기는 후에 찾아오는데... 이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발전하여 '채퍼리안'의 견해가 나왔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할 때, 구원을 받지만 열매없는 육적인 신자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영접하고 순종하는 삶을 시작하는데, 이때가 거듭나는 시기이며...
이 이후로 영적인 성장이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채퍼리안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래서 워치만니가 중생을 소재로 삼아 설명을 할 때에는 동의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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