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워치만니/11-3 워치만니의 창조의 신비

창조의 신비(1) - 워치만니

요나한 2023. 2. 16. 14:38

두 달전쯤으로 기억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말세에 무저갱에서 나오게 될, 두 짐승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오게 되는 「무저갱」이라는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이를 풀어볼 요량으로 탐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저갱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최초로 나오는 곳은 하나님의 6일간 창조사역 이전의 시기인... 창 1:2에서 나옵니다.

「깊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테홈'으로서 무저갱을 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장소에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1-2은  6일간의 창조사역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역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들(H8064 שָׁמַיִם '두 개의 하늘'을 의미)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사 45:18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은 완벽하고 아름다웠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혼돈하지 아니하게 창조하셨고, 많은 동식물들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거주하게 창조하셨음을 증거함)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①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

 

 

2. 그러나 2절에서는 하늘과 땅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창조하셨던 하늘과 땅이 황폐하게 되었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땅은 심연의 물속으로 가라앉고 빛은 사라지고 흑암이 드리워지게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땅에 천지가 진동하는 대격변의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모든 생명체는 갑자기 멸절을 하게되었습니다.

이 때, (지질시대 생명체들의) '화석'이 형성되었으며, 지구는 기나긴 빙하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나 봅니다. 

 

무슨 연고로 이 땅은 저주를 받아, 황폐케되며 생명이 멸절되고... 깊은 바닷물 속으로 덮히게 되었나요?  

 

 

 

깊은 바다(심연)란 무엇인가?

 

창 1:2은 천지창조 이전에 바다처럼 온통 물로 뒤덮힌 세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전제한다.

 

 

 

 

 흑암속 빙하기로 들어간 지구의 모습이 바로 아래그림에서의 혼돈의 땅(태초의 홍수)인것 입니다. 

 

태초의 땅(창 1:1)이 태초의 홍수로 물침례(창 1:2)를 받았고, 현재의 땅은 물에서 나왔다.(창 1:9, 벧후 3:5)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다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나서,

하나님의 영은 '깊음'(무저갱) 위를 운행하시면서

6일간의 창조를 준비하셨습니다.

 

 

 

 

1985년 8월에 출간

 

30여 년 전, '워치만니' 형제의 「계시록 강해」라는 책으로부터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받았었는데,   

혹시 '워치만니'가 창세기에 대해 기록한 책은 없을까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뒤져 보게 되었는데, 아주 오래된 중고책 1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쭉 살펴 보았습니다. 

이 책은  '워치만니' 형제의 「계시록 강해」 못지 않은 성경적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여겨집니다.

두껍지 않은 책인데...

3-4차례의 분량으로 나누어 포스팅을 해 보겠습니다.

 

 

 

I. 창조와 지질학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한 구절 한 구절에 하나님의 숨결이 서려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적대시 하기까지 하는 것은 경건한 이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무겁게 내리누르는 고통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규를 무시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성경 66권 중에서 창세기가 특히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많은 의심과 공격을 당한다. 성경을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분명한 계시를 무너뜨리고자 곧잘 지질학적 연대와 선사시대의 화석을 이용하려고 힘쓴다. 이 지질학적 근거들에 의하면 지구는 수 십만년 이상으로 존재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6천년 역사의 성경기록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세기의 기록을 공격함에 과학의 깃발을 흔든다.

 

주 안에서 친애하는 많은 형제들이 휘몰아치는 반박의 폭풍에 참으로 그에 대한 언명할 지식의 결핍으로 인해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래서 지질학이 우리가 고찰할 대상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형제들을 위하는 뜻에서 창세기 고찰의 첫 대목속에서 그것을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그 분의 말씀이 얼마나 완전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머물러 그 분의 영광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창세기는 하나님의 계시임을 이해하도록 하자. 반면에 지질학은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실들을 아시기 때문에 그 분의 계시는 잘못될 수 없다. 인간은 부분적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역이 정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 앞에 창세기와 지질학이라는 양자가 놓여 있다면,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지질학이 아니라 창세기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지질학이 서로 다를땐, 그 오류는 지질학 편에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성경의 권위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어떤 불일치가 있다면, 우리는 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사이에 서로 다름이 없다면 하늘로부터 온 계시는 믿는 연약한 자들의 신앙을 강화시킬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중국인들과 바벨론인들과 다른 고대인들 가운데 퍼져 있던 창조 신화를 종종 웃고 넘어간다. 어떤 과학자도 이 신화적 설명들을 논파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전통들은 아무런 내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특별한 주의를 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성경에 대항하는 바로 그들의 노력이 성경의 능력을 입증한다. 그들이 이 책을 여러 민족들의 전통들을 다루는 방식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이 성경이 보유하고 있는 높은 위치를 증시(證示)하고 있다.

 

그 독특성에 감명을 받지 않고서 창세기의 첫 장을 누가 읽을 수 있겠는가? 평범하다고 하기보다는 너무나도 놀랍다. 창세기에 나타난 사실들은 어떤 가정도 없이 직선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술된 사실들의 진정성을 논의하고 논증하려는 시도도 없다. 그 저자께서는 그 분께서 기술하시는 책보다 훨씬 더 크시므로 그 책에 의하여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 분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이시라는 이유 때문에 우주에서 훨씬 초월하신다. 그런데 만일 그 저자가 모세였다면 그는 의심할 것 없이 그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썼을 것이니 그의 기록은 자연히 이집트의 창조 신화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그 고대민족의 모든 지혜 가운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창세기의 기술에 서 이집트 신화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 왜일까? 모세에게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모세가 「땅이 처음에 물에서 나왔다」라는 사실, 즉 지질학에서 공인되고 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야 발견된 사실을 알 수 있었겠는가? 만일 모세가 계시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실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지상의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 성경이 진화론을 반대할지라도 발전의 개념을 배격하지는 않는다. 제일 먼저 물고기가 나오고 끝으로 인류가 등장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모세의 기록이 경이롭지 않은가?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이 사실들을 제시하셨으므로 그 분으로부터 그런 계시를 받은 사람은 오류를 범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과학서적이 아니다. 그 첫째되는 목적은 구원의 지혜를 얻도록 죄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매우 흥미롭게도 성경은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한 책이 아니면서도 과학적인 오류를 갖고 있지 않다. 성경과 과학 사이에 서로 어긋남이 있다면 그런 어긋남은 성경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든가 과학의 부정확한 결론에 기인하든가 할 것이다. 지난 날 지질학자들의 확신에 찬 주장들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얼마나 많이 수정되어 왔는가! 과거에 그들이 내세운 것들이 나중에 오류인 것으로 판명되어 왔다. 커밍스(Cummings)라는 한 비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지질학은 과오를 범해 왔으며 또 범할 것이다. 성급하게 큰 소리로 공포한 것이 장래에 정확치 못한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것을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를 설명하는 대신에사실"을 이야기한다. 과학자들은 그 ""를 설명하기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에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나아가 제한된 관찰에 근거한 논증으로 사실을 전복하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또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것의 이유를 알려고 탐구함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의 권위를 부인하고 그들 자신의 의견을 신뢰할 수 있는가? 지식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더 복된 어리석음도 있는 것이다.

 

창세기1장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은 바로 첫 구절이 일종의 전체적인 머리말내지 전제이고, 이어서 6일 동안에 되어지는 일들은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제1장의 주제로 여긴다. 그래서 창세기의 기자는 말하고자 하는 바의 윤곽을 첫 문장에서 알리고나서 자세하게 그것을 설명해 나간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언제 창조하셨는지를 언급한 후에 계속하여 땅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빛, 공기, 육지, 식물, 동물 등 등을 어떻게 창조하시는가를 이야기한다. 창세기 제1장이 창조 사건을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우주가 혼돈과 공허로부터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에 대한 대중적인 견해가 그러하다. 하지만 성경의 그 첫 장을 주의깊게 연구하는 사람은 그런 해석을 틀린 것으로 본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커다란 상충이 일어난 것은 성경의 기술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런 그릇된 해석에 의해서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특별한 지질학적 증거들과 같은 것을 앞에 두고 그러한 "불일치"를 보았을 때에는 성경의 정확성을 의심하게 된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창세기 제1장의 이 첫 절이 그들 자체안 에 독립된 의미를 지닌 7개의 낱말로 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령의 영감으로 제시된 이 낱말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떤 원료로부터 세상을형성" (formed)하였거나 "만드셨다" (made)고 말하지 않는다. 결코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다. , 땅은 창조되었다" (created). "창조하였다"라는 이 말은 원어로 "바라" (bara) 이다. 그래서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바라''가 된다. "바라"라는 이 낱말은 창세기 제1장과 제2장에서 세번 더 사용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는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바라)” (1:21). 두번째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바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7) 이며, 세번째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나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바라)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2:3). "창조한다"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 4:17)이다. 이 큰 물고기들과 생물들은 물질적인 몸뚱이를 가졌을 뿐 아니라 내부에 활기찬 생명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행위가 필요했다. 이래서 성경이 앞 성구들에서 "만들었다"는 말보다 "창조했다"는 말을 사용한 것은 참으로 합당하다. 비슷한 이야기로 사람의 몸이 땅의 흙으로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그의 혼과 영은 물질적인 재료로부터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한 것이다.

 

창세기의 첫 두 장에서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세 개의 다른 낱말이 사용되어 있다.

1. “바라" 미리 존재하는 재료의 도움없이 존재하는 것. 이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2. “아사" (asah) 이것은 "바라"와는 매우 다르다.  "바라"가 아무런 재료없이 창조한다는 뜻을 지칭한데 반해 "아사"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부터 만들거나 형성하거나 작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목수는 의자를 만들 수는 있으나 창조할 수는 없다. 창조기사의 6일 동안의 일들은 주로 "아사"의 차원에 속한다.

3. “얏차로(yatsar) 이것은 도공()이 진흙으로 하듯이 모양이나 형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낱말은 창세기 2:7에 사용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흥미롭게도 이사야서 43: 7은 이 3개의 낱말 모두의 의미와 연관을 예시한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창조한"은 무()에서부터 성립시킨 것을 의미하고, “지었고"는 일정한 형태로 이루었음을 지칭하며, “만들었느니라"는 앞서 존재한 재료로부터 제작했음을 나타낸다.

태초에란 말이 하나님께서 무에서부터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상을 강화한다. 이론을 붙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리 인간은 단지 믿기만 하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분의 일들을 유한한 머리로 헤아리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 11:3). 창조에 관하여 이 당한 하나님의 도전에 누가 대답할 수 있는가? ( 38장을 보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하늘은 땅을 직접 싸고 있는 창공이 아니다. 그것은 별들이 있는 하늘을 가리킨다. 이 하늘은 창조된 이래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땅은 그와 동일하지 않다.

 

창세기 첫 장을 이해하려면, 1절에 언급된 땅과 2절에 진술되는 땅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2절에 언급된 땅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최초에 창조하신 그대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의 상태가 혼돈하고 공허한 땅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겠는가? 이 구절을 잘 이해하면 문제가 해소될 것이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며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18)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분명한가! 여기의헛되이 (혼돈되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토후인데, "황폐" 또는 "황폐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 혼돈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째서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라고 말하고 있을까? 이것은 쉽게 풀릴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1:1). 그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은 혼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에, 대이변을 겪으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절 이후에 언급되는 모든 것은 원래의 창조를 가리키지 않고 땅의 회복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 후에 땅을 살 만한 곳으로 다시 만드시기 위하여 6일 동안을 쓰셨다. 창세기 1:1은 원래의 세상이었으나, 창세기 1:3부터는 현재의 우리의 세상이다. 한편 창세기 1:2은 원래의 창조 후에 그리고 우리의 현 세상 전에 오는 과도기의 황폐한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러한 해석은 이사야서 45:18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른 증거들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2절의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그러나로도 해석될 수 있다(한글 성경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드러나 있지 않다-역자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펨버 (G. H. Pember)는 그의 책 『지구의 최초기』 (Earth's Earliest Ages)에 이렇게 기술했다.

 

"그리고"는 히브리어 용법에 따르면 대부분의 다른 언어들의 용법도 마찬가지이지만 첫 절이 다음에 이어지는 것들의 요약이 아니라 기록되는 첫 사건에 대한 진술임을 드러낸다. 만일 첫 절이 단순한 요약이라면 둘째 절이 실질적으로 역사의 시작일 것이며, 그러면 확실히 계합 접속사로 시작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좋은 예증을 5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창 5:1). 거기에서 시작하는 말,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가 그 장(5장)의 요약이며, 따라서 그 다음 문장은 계합 접속사 없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의 두번째 절에서 앞 문장의 개요에 대한 첫 상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일어나는 완전히 구별되는 사건, 별들의 공간인 하늘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고 땅과 그 직접적인 환경에만 관계되는 사건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건이 무엇이었느냐는 이제 우리가 밝히려고 노력해야 한다."

 

백 여년 전에, 차머스 박사(Dr. Chalmers) "땅이 혼돈하고 "땅이 혼돈하게 되고로 바꾸어 번역해도 마찬가지임을 지적하였다. 할데만 박사(Dr. I. M. Haldeman), 펨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쓰인 동일한 히브리 원어가 창세기 19:26에서는 "되었다로 번역되었음을 지적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 이 동일한 히브리 원어가 19:26에서되었다로 번역될 수 있다면 어찌하여 1:2에서는 "되었다로 번역될 수 없겠는가? 더구나 2:7되었다"라는 말("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도 창세기 1:2에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낱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혼돈하고혼돈하게 되고"로 번역해도 전혀 자의적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그러나) 땅이 혼돈하게 되고 공허하게 되니라.' 께서 창조하신 땅은 원래 혼돈하지 않았다. 단지 후에 혼돈하게 되었을 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1: 1)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 20:11). 이 두 절을 비교하면 우리는 창세기 1:1의 세상은 창세기 1:3 후에 오는 세상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6일 동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셨다. "창조하셨다""만드셨다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누가 측량할 수 있으랴. 전자는 사물을 무에서부터 존재토록 하는 것이고 후자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에 작업을 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들 수는 있으나 창조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만드시는 것은 물론 창조할 수도 있으시다. 이런고로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후에 땅이 경악스런 대이변 때문에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자, 그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시기 시작하셨다고 이어서 기술한다. 베드로후서 3:5~7도 동일한 사상을 피력하는데 그 5절에서의 하늘과 땅은 창세기 1:1에 언급된 원래의 천지이고, 6절에 언급된 물로 넘쳐 멸망한 땅은 창세기 1:2에 언급된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어 물로 뒤덮인 땅이다. 그리고 7절에서 이야기되는 현존의 하늘과 땅은 창세기 1:3 이후에 회복된 하늘과 땅이다. 이러므로 6일 동안의 하나님의 사역은 태초에 행해진 그 분의 창조사역과 아주 다르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연구하면 할수록 위의 해석이 옳다는 확신을 더욱 갖게 된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밝게 비추라고 빛에게 명령하셨다. 이 첫째날 전에 땅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물에 묻히고 어둠에 잠겨 혼돈하고 공허하였다. 셋째날을 보면 그 날에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을 뿐이었다. 그랜트(F. W. Grant) “6일 동안의 사역은 땅을 새로운 체계로 조성할 뿐이다. , 무로부터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대신 빛에게 어둠으로부터 나와 비추라고 명령하셨다. 빛은 이미 있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둘째날에 하늘을 창조하시지는 않으셨다. 여기에서의 하늘은 별들의 공간이 아니고 지구를 둘러싸는 대기권적 하늘이다. 이 모든 것들이 6일 동안에 창조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유일한 대답은 그것들이 창세기 1:1에서 언급된 시간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에 창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개조할 필요만 있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에 자세한 묘사가 없는 점에 주의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의 하늘과 땅이 동시적으로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장구한 시간에 걸쳐 창조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수천 년이 걸렸을까? 수백만 년이 걸렸을까? 무슨 모양으로 얼마나 크게 창조되었을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음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또한 창세기 1장의 첫째 절의 시간과 둘째 절의 시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언제 창조하셨는지를 모르며, 원래의 창조후에 2절에 묘사된 황폐화가 일어났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믿기로는 원래의 완전한 창조세계가 그것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기전에 많고 많은 시간 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긴 기간은 소위 선사시대(先史時代)를 덮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지질학이 요구하는 모든 연대와 그 연대 사이에 분류되는 모든 이른 바 지질시대들은 이 시간구조 속에 짜여질 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등,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지구의 나이가 단지 6천 년에 불과하다고 언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경은 다만 인류의 역사가 대략 6천 년임을 밝히고 있다. 성경의 첫 두 절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성경과 지질학 사이에 아무런 충돌이 없음을 알게 된다. 성경에 대한 지질학자들의 공격은 허공만을 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가 과학을 토닥거려주기 위해서 이 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인간의 이성에 굽신거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결론과 타협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과학을 성경과 조화시키 려고 꾀하지도 않는다("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 8:7> 까닭에 상충이 예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 제시한 바와 같은 해석은 지질학이 과학의 한 분야가 되기 오래전 초대교회에서 까지도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은 사람들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반석을 접어두고서, 딛고 설 다른 지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성경이 우리의 믿는 바를 선언하는 한 그것은 우리에게 최종적인 것이다. 많은 소위 신앙의 수호자들이 성경을 인간의 이론들에 조화시키려고 너무나 쉽게 토대를 내어주고 성경을 변경시키는 것은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것의 한 예를 핑크 (A. W. Pink)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기록하기를, 어떤 앗수르 석판(Assyrian tablet)의 해독 후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사람들 이 구약역사는 이제 그 석판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고 열정적으로 보도한다고 했다. 이런 일은 참으로 사리를 거꾸로 뒤집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증명이 필요한가? 앗수르 석판의 기록이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다만 그 석판이 역사적인 오류를 갖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주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자. 그리고 만약 그 둘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석판이 틀렸음을 드러낼 뿐이다. 비슷한 양태로 과학의 가르침이 성경과 일치하면 후자가 과학의 진리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 둘이 불일치할 경우에는 성경이 과학의 가설이 오류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물론 자연인은 우리의 논리를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이 조소적인 태도 자체가 얄궂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라고 진술할 때에 선언하는 바를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일치하기 위해 우리의 존엄을 손상시키지 말자.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변경하지 말자.

 

창세기의 첫 장은 얼마나 놀라운가! 원래의 창조를 선언하기 위해 한 구절이 사용되고 세계의 파괴를 알리기 위해 단 하나의 구절이 부려지며 세계의 재조성을 반포하기 위해 30개도 채 안 되는 구절들이 이용된다. 도대체 어느 누가 창세기 1장에 비견할 수 있는 장()을 기술할 수 있으랴. 그토록 어려운 주제인데도 그토록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렇게 긴긴 역사가 그렇게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분명히 과학이 아닌데도 과 학적으로 정확하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장()을 쓸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더 많이 말씀하시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분에 대한 관계에 속하는 것 만을 그 분께서 사람들에게 계시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한 성경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로 부터의 이 계시는 그 분께서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그에게 주어진 것, 인간이 생각해야 할 것에 대한 진리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그 계시는 부분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과 영성(靈性)에 관한 것을 전한다. 이래서 천상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관해서도, 창조의 사실 외에는, 현재의 형상(形相, form)을 넘어서는데 까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들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들이 아니라 그 분의 신성과 인간의 죄성과 구원의 방법, 그리고 장래의 영광과 형벌을 표현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들이다. 세상적인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사람들이 자만심에서 그들의 제한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곧잘 성토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겸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람들은 늘 지식을 추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시로 그러한 추구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런고로 그 분께서 창조에 대하여 매우 조금밖에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발전하는 과학이 아니고 영원토록 지속될 더 깊은 영성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끝없이 자비하시니 그 분을 찬양하자. 그 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우리를 다시 만드신다. 주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II. 원래의 세상과 그 황폐화의 원인

우리는 이미 태초에 하나님께서 완전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후에 얼마 후였는지 우리는 모른다. 원래의 아름답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재조성하셨다. 6일 동안에 이 황폐된 세상을 복구하셨다. 뒤에 오는 장()에서 우리는 이 6일 동안의 사역들을 살필 것이지만 본장에서는 원래의 세상이 어째서 황폐케 되었는지에 관해 연구할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품이 파괴되는 것을 허용하셨을까? 어떤 이유로 그토록 무서운 재난이 그 아름다운 세상에 떨어졌을까?

 

우리가 연구할 주제는 성경에 명백하게는 기술되어 있지 않으나 많은 구절들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 넌지시 비추는 빛에 의하여 원래의 세상과 그 황폐화의 원인에 대하여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생각을 인도할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이해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우리를 바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 대신 인간 지혜에서 나온 가정에 매달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헛된 일인 것이다.

 

창세기 3장을 눈여겨 보면 (거기에는 사단이라는 이름이 어느 구절에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거기에서 언급된 뱀이 진실로 사단의 도구였던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아마 위장한 사단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9"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이 사단의 필요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질문, 즉 사단 그는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더구나 우리는 구약 전체에 걸쳐 많은 악령들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으며 복음서에서도 그들을 때때로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더구나,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천사들이 언급되어 있는데도 이 천사들의 피조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그들 또한 어디에서 왔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물론 우리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천사들이나 다른 초자연적 존재들의 피조에 대하여 아무것도 6일간의 창조기사에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때에 창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들이 그 6일간의 창조사역 동안에 창조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언제 창조 되었을까? 이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대답은 그들은 전의 원래 세계의 피조물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펨버의 진술을 참고해 들어야겠다.

 

화석이 분명히 보이는 바와 같이 그때 땅의 생물들 사이에는 질병과 죽음(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이 만연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포학 살육도 그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화석들이 우리의 현 세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6일 동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매우 좋았고 아담이 범죄하기 까지에는 그 안에 아무런 악이 없었다고 성경이 선언하기 때문에... 그리고 화석들이 아담 전, 피조물들의 화석들인데도 질병과 죽음과 상호파괴의 분명한 표들을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딴 세상에 속하여 그들 자신의 죄로 물든 역사, 즉 그들 자신들과 삶의 터전이 파괴로 끝나버린 역사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예레미야서 4:23~26을 읽으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6). 주께서 왜 진노하셨을까? 틀림없이 그때의 피조물들의 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사야서 24:1이 더 깊이 빛을 던 져준다.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무하게 하시며...  그 분 자신이 애초 창조하셨던 땅을 무엇 때문에 그 분께서는 파괴하셨을까? 우리의 세계 역사를 견주어 볼 때우리는 그가 역시 그 원래의 세상에 살던 피조물들의 죄 때문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1. 에스겔서 28장과 사단의 기원

창세기를 연구해서는 사단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세상이 황폐케된 그 원인을 면밀히 조사해 가면 우리는 그 황폐가 그 원수, 즉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자연적으로 단정 할 수 있게 된다. 사단을 제쳐두고는 이 대재앙을 설명할 다른 이유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

 

원래 세상이 황폐케 된 원인으로 드러나게 될이 대적자의 기원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듯 싶은 다른 성구를 이제 조사해 보자. 그것은 에스겔서 28:1~19이다. 19개 절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1절부터 10절까지의 앞 부분은 두로 왕에 대한 선지자의 경고이다. 11절부터 19절까지의 뒷 부분은 두로 왕에 대한 선지자의 애가(哀歌)이다.

 

두로 왕에 대한 앞 부분은 쉽게 이해된다. 그는 자만하고 교만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신으로, 그리고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운 자로 여겼다. 그의 마음은 장사로 얻은 큰 재물로 한껏 높아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처벌하셔서 열국의 강포한 자의 손에 의해 그를 파멸시키셨다. 이 예언이 내려진 후 오래지 않아 갈대아의 왕, 느부갓네살이 와서 두로를 멸하였다. 유대인 사가(史家)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두로 왕이 이토발루스(Ittobalus)라고 생각한 반면, 페니키아 역사에서는 그가 이토발 2 (Ittobaal II)로 불리웠다. 오늘날 우리는 이 예언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알고 있다. 이러므로 1절에서 10절까지의 구절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11절 부터 읽어나가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우선 이 부분을 완전히 인용하겠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 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에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 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어떻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내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먼저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분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 토함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며 네가 경제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28:11~19).

 

이 긴 구절은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는 많은 말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두로 왕이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11절부터 15절까지에 언급된 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두로 왕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에덴동산에 언제 있었는가? 도대체 그가 어떻게 법궤를 덮는 그룹이 될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언급된 것들은 조금도 두로 왕의 경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 마다 모든 것을 영해 할 수도 없다.

 

나는 두로 왕에게 말한 앞 부분(1~10)은 이토발루스(Ittobalus) 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나 두로 왕에 대한 애가인 뒷 부분(11~19)은 장래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절은 두로를 바다 가운데 있는 것으로 기술한다. 다니엘서를 읽어 우리는 장래의 적그리스도가 팔레스틴에 나타날 때에는 그가 두로에 체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두로의 왕으로 불린다. 사실상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화신이다. 그래서 여기의 많은 것들이 사단 자신과 관계가 있다.

 

다비 (J.N. Darby)는 이에 대해, “11~19절은 계속하여 두로에 관하여 말하면서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훨씬 더 먼 곳에까지 미쳐 우리의 범죄를 통하여 이 세상의 왕과 신이 된 사단의 멸망과 그 모습을 희미하긴 하지만 드러낸다" 라고 한다. 아노 게벌레인(Arno C. Gaebelein)도 동일하게 생각한다. “두로 왕은 가장 마지막에 나타날 가증스런 대죄인 (적그리스도)의 한 표상이다. 우리는 이 사악한 왕의 배후에서 다른 하나의 힘, 즉 사단을 본다. 사단이 그때에는 두로 왕의 배후 세력이었거니와 이제도 그는 여전히 이 세상의 신이 되어 열국들을 지배한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깊게 연구하면 사단과 적그리스도를 한 묶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온당한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움직임이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이든지( 2:13), 혹은 악령의 활동 결과이든지(2:2) 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갖고 있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악령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때때로 중대한 문제가 걸려 있을 때에 사단은 들어와서 활동하곤 한다. 우리는 그가 직접 나아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했던 일을 안다. 후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단념토록 하려는 데에 베드로를 이용하였으며 종국에는 그리스도를 멸하기 위해 유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때에 그는 세계의 전투장에서 적그리스도와 결합할 것이다. 이러므로 성경은 이런 말을 한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살후2:9). 사단이 그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13:2). 적그리스도가 사단의 화신(化身)이라는 사실에서 성령께서는 그들을 하나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인용된 성경 본문에서 모든 초자연적인 일들은 사단 자신과 관계가 있으며 그 외의 것들은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목표는 적그리스도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세계의 피조물들을 알며 그 황폐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언급된 부분들을 제쳐놓고 사단을 연루시키는 것들에 주의를 모아야겠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 14:12). 그 대천사가 타락하기 전에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고 불리웠었다. 그러나 반역 후에 그는 사단(()을 의미하는)이라고 불리운다.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 28:12). 이것이 범죄 전의 그 대천사의 상태였다. 그는 다른 모든 천사들보다 더 높았다. “완전한⋯⋯ 충족하며 온전히 "이런 용어들이 그가 원래의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였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른 모든 존재들 위에 놓으셨다. 더구나 그는 지혜가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었다. 어쩌면 그는 그때에 선지자의 직분을 맡았을 것이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13절 상반절).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사단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그는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꾀는 자로서 거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두 에덴은 공존하지 않는다. 아담의 에덴에서는 사단이 이미 타락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에덴에서는 사단이 아직 타락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이 에덴 동산은 아담의 에덴에 앞서서 존재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전()의 세계에 속하였고, 현재의 세계에 속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홍보석, 황보석 등등의 각종 보석으로 되어 있어서 장차의 새 예루살렘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이 거주했던 에덴은 그렇지 않았 다. 성경은 그 안에 있는 나무들에만 주의를 끌게 하고는, 보석 단장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여기에서의 에덴은 아담의 에덴과 다름에 틀림없다. 시간적으로는 훨씬 전이었다. 대천사가 단장했던 보석들은 제사장 아론이 부착했던 보석들을 생각나게 한다( 28장을 보라).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 서 그를 제사장으로 세웠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3절 하반절). 성경에서 우리는 악기들이 왕들에 의해 사용되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탔으며, 다른 왕에 관해서는 바벨론 왕이 멸망할 때의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라는 기술을 본다. 또 바벨론 왕의 기세가 한창 뻗어갈 때에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활 등 모든 갖가지 악기 소리가 울렸다( 3장을 보라). 분명히, 그때의 대천사는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세워졌고 따라서 이 모든 악기들이 주어졌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14절 상반절). "기름 부음을 받은"은 그가 구별되어 따로 놓여졌음을 의미한다. “그룹이나 "생물" ( 10:15 참조)의 하는 일은 주를 예배할 때에 인도하는 것이다( 4 : 9, 10;5:11~14를 보라). 그러므로 애초에 아침의 아들 계명성의 임무는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당시의 피조물들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그가 제사장의 직분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4절 하반절). 하나님의 성산은 필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장소일 것이다. 계명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는 으례히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을 섬겼을 것이다. 그런데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에스겔서 1:26에 의하면, 그룹이나생물” ( 1:19 이하를 보라)이 있는 장소는 하나님의 보좌 바로 밑이다.

 

모세와 70명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시내 산으로 불려갔을 때의 광경이 이렇게 기술된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 24: 10,17). 따라서 맹렬한 불같이 보인 이 청옥을 편듯한 것이 여기 에스겔서 28:14 하반절에 언급된 "화광석"이다. 이와 같이 그것은 원래 이 대천사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집에, 하나님에게서 아주 가까이 하나님의 보좌 바로 밑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다" (15). 하나님께서 죄의 창시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그 분께서 창조하신 것마다 완전했다. 불의는 이 범죄한 대천사 계명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 분께서 우리들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심같이 그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이 창조된 천사가 이 자유를 악용하였음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바로 옛 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자유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다" (16절 상반절). 마지막 때에 무역이 크게 증가할 것이므로 우리는 이 말을 적그리스도에게 적용할 수 있다( 18장을 보라). 교역의 증가로 인하여 많은 죄 또한 따른다. 이것은 과거의 인류역사를 뒤돌아봄으로써 쉽게 입증된다.

 

그러나 이 말은 사단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펨버는 "무역"이 라는 말은 "비방" 혹은 "중상"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우리는 원어에서의 "마귀" "중상자", "비방자", 혹은 "악의의 고발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안다. 사단이 욥을 얼마나 무 자비하게 고발하여 공격하였던가! 이 세상이 끝날 때에 우리는 이런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12:10). 여기의 "쫓겨났고"라는 문구가 에스겔서 28장에서의 "쫓아내었고"라는 문구와 조응하며 그의 추방의 이유도 동일하다.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유죄를 선언하시는 반면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에 대한 판결을 집행하기 위해 미가엘을 보내시는듯 싶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지금 사단이 공중에 머무르도록 허용하실까? 그 이유는 아마 (1) 하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 그리고(혹은) (2) 이 용광로에 의하여 순화되어야 할 찌꺼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7절은 사단의 원인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네가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움으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이사야서 14:12~14에서의 바벨론 왕에 대한 묘사는 여기의 사단에 관하여 묘사된 것과 아주 유사하다. 이러므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벨론 왕에게 적용될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 바벨론 왕의 배후에 있는 자, 곧 사단에게도 적용되었다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믿는다. 그것은 사단 타락의 원인에 관하여 말한다. 내가 믿기로는 에스겔은 사단의 교만의 원인을 밝히는 반면 이사야는 그가 얼마나 교만하였나를 드러낸다. 내심으로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과 비교하였을 때에 자긍하고 교만하기 시작했으리라. 나중에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하게까지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 12~14).

 

교만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처벌받았다. 하늘에서의 그의 모든 권능이 그에게서 박탈되었다(뒤이어지는 예언은 지금의 우리의 연구와 관계가 없으므로 에스겔서 본문의 고찰은 여기에서 끝내자).

 

2. 계명성에서 사단으로-개요

우리의 해석이 정당하다면, 이전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매우 아름답고 지혜로운 한 대천사(계명성)를 창조하시고 그를 그 피조계의 지도자로 세우셨음을 우리가 이 예언적인 에스겔서 본문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아담 때의 그 에덴보다 훨씬 더 오래고 훌륭한 동산에 그를 두셨다. 그 동산은 장차 새예루살렘과 뭔가 닮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거기 에덴에서 그 대천사는 그의 지혜를 사용하여 그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치며 선지자로서 활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 시대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그는 왕으로서 봉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의 위치가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복된 위치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15절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나 그는 범죄하여 그 이후로 하나님의 대원수가 되었다.

 

3. 타락한 천사들과 귀신들

우리는 사단의 기원을 살펴왔다. 그런데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천사들과 귀신들은 어떤가? 그들의 타락이 땅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 그것을 공허하고 혼돈하게 하였는가? 신약성경으로부터 우리는 두 종류의 사단 종자들, 즉 타락한 천사들과 귀신들을 추적해 낼 수 있다. 먼저 천사들을 보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그[용]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 다가 땅에 던지더라" (계 12:4).

 

여기에서의 ""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1:20 참조). 그 구절은 나중에 이런 말들로 계속된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천사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9). 이 천사들은 애초에 세상을 다스리는 대천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영들임에 틀림없다. 시편 82:1에서는 그들이신들” (the gods)로 기술된다( 10:35 참조).

 

그런데 이들이 계명성의 타락때에 그와 함께 공모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그와 동조했다. 그래서 그들이 사단과 함께 죄에 떨어져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되어버렸다( 6:12). 이 천사들은 탈체 귀신들이 아니다. 그러나 천상의 몸을 갖고 있다.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기 때문이다.

 

사단에게 다른 종류의 종자들이 있다. 이들이 악령 혹은 귀신들이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영)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8:16).

여기에서 성령께서 "귀신들" "영들"이라는 두 낱말을 동의어로써 사용하신다. 누가복음서 10: 17, 20도 마찬가지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에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영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기에서 주님께서 귀신들과 영들을 동일한 것으로 보신다. , 마태복음서 17: 18은 주님께서 한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기록한다.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마가는 귀신을 "더러운 귀신()",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으로 언급한다(9:25).

 

이 귀신들 혹은 영들은 아마 이전의(아담 전의) 세상에 산 종족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단을 반역시에 도왔거나 아니면 그 후에 그를 따랐거나 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육체로부터의 분리로써 멸망시키셨다. 그 결과로 탈()의 영들이 되었다. 성경에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을지라도 약간의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마태복음서 12장에 인간의 육체를 떠난 후의 그러한 영의 정황이 나온다. "더러운 귀신()...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 12:43). 그것은 절망적으로 되어 인간의 몸 밖에서 이리저리 방황하였으나 쉴 곳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그것은 원래의 장소, 즉 인간의 몸으로 다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실제로 탈체의 영들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가. 더구나 우리가 누가복음서 8장에서 군대라는 귀신이 인체(人體)를 떠나기를 싫어하는 것을 읽는다. 그것들 (군대라는 귀신들이 피할 수 없게 되자) 돼지들의 몸속으로라도 들어가고자 했다.

 

이 귀신들은 사단과 그의 타락한 천사들과는 다르다. 사단과 타락한 천사들은 아직도 그들 자신의 천상의 몸들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인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면으로도 귀신들은 다르다. 그들의 성격과 욕망이 그들이 과연 몸을 빼앗긴 영들임을 입증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언제 몸을 잃었을까? 오늘날 죽은 자들의 영들은 낙원에 있거나 음부에 있거나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그러면 이 영들, 곧 귀신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들은 이전의 세계에서 왔음에 틀림없다. 그것들이 살아 있었을 때에 거주지는 사단이 전에 다스리던 세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전의 세상에 거주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사야서 45: 18로부터 세상, 즉 이전의 세상이 혼돈한 채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도록 형성되었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옛 땅에 거주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듯 싶다.

 

우리가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해 가면 이 문제에 관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악귀들을 가두는 가두는 곳이 있음을 나타내는 단서가 있다.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던 군대라는 영들은 이 장소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주님께 간구할 만큼 두려워하였다( 8:31).

 

무저갱에 관하여 펨버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무저갱이라 불린다. 요한계시록 9장과 같은 어떤 구절들에서는 이 용어가 분명 하게 땅 중앙에 있는 불구덩이에 적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깊은 바다속에 대해서도 사용되는데, 그 어원과 잘 어울리는 의미이다." 요한계시록은 언젠가 사단이 이 무저갱 속으로 던져질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20:3). 확실히 귀신들의 얼마는 지금 거기에 갇혀 있으나 얼마는 거기에 감금된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아직은 자유롭다. 이 무저갱은 육지 중앙에 보다는 거의 바다속에 있을 듯한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에는(계 20:11~15을 보라), 모든 범죄자들이 불못 속에 던져질 것이며 새하늘과 새땅에는 더 이상 바다가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1). 어쩌면 단지 하나의 무저갱이 있으되 두 곳에, 육지의 중앙과 깊은 바다 속에 흩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다가 귀신들을 가두는 장소라는 성경적 근거들이 있다.

구약의 희랍어 70인역에 따르면 창세기 1:2 "깊음"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신약의 인용본문의 "무저갱"이과 동일하다. 우리는 이미 이 귀신들이 이전의 세상에 살았던 아담 전의 종족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창세기 1:2을 읽음에 있어서 「원래 땅에 거주한 그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멸망당한 신체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이 살던 장소 역시 하나님께 심판받아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온 땅이 물로 뒤덮여 깊은 바다가 되었다」 함이 우리에게 상당히 사리에 맞아 보인다.

그들, 곧 이전의 거주자들의 영들이 이 바다 속에 깊이 가두어졌을진대 그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땅을 회복시키실 때에 물에서 육지가 나오도록 명하셨으며 또 물들의 집합 곧 바다들을 불러내셨다. 이 마른 땅, 육지는 새 세상의 사람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 귀신들은 어디로 갔을까? 자연히 우리의 대답은, “이 귀신들은 바다에 삼켜졌다일 것이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를 읽을 때에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다 함은 이해되나,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가끔 당혹을 느낀다. 보통의 해석은 바다가 익사한 모든 자들의 육체들을 내어 놓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바다에 보다 육지에 더 많은 신체들이 묻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육지도 그 죽은 자들을 내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육지는 죽은 자들을 내어 놓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바다가 내어 놓을 것들은 죽은 사람들의 육체일리가 없고 이미 그 안에 갇혀 있는 영들이다.

인간의 영혼들은 사망과 음부에 갇혀 있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들이 바다에 유치된다고는 결코 시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바다가 내어놓은 죽은 자들이 이전의 세상에 속한 자들 말고 누구일 수 있겠는가? 여기의 순서가 꽤 시사적이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이전 세상의 거주자들이 제일 먼저 죽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일 먼저 나올 것이다. 모든 자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므로 현 세상의 사람들이 그 다음에 뒤 따를 것이다.

 

우리는 사단과 그의 천사들과 이 귀신들의 기원을 간략히 다루어 왔다. 아담 이전의 종족들이 이전의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것은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약간의 암시를 통해 우리가 얼마간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스코필드(C.I. Scofield)를 위시하여 많은 성경학자들은 예레미야서 4:23~26은 창세기 1:2의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들을 언급한다고 믿고 있다. 그 앞 구절과 뒷 구절이 유다의 황폐에 대하여 말하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에게 원래 세상의 황폐를 보여주신 것 같다는 점에서 이 구절들은 더 넓게 전망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이 구절로부터 이 전의 세상에 "좋은 땅" "성읍" (26)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의 거주자들이 성읍에 살며 땅을 경작했다. 주님의 진노가 사단과 함께한 그들의 반역 때문에 그들과 온 땅에 임하였다. 이리하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어버렸다.

 

4. 개요

함께한 우리의 고찰이 바른 것이었다면, 원래 세상의 상태와 그 황폐화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태초(영원과 대조되는)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때에 땅은 혼돈하거나 공허하지 않고(사 45: 18) 반대로 극히 아름다웠다. 그 땅에 많은 거주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과 아담 이전의 종족을 창조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셨다(욥 38: 6,7을 보라). 그리고 만만의 천사들 가운데 계명성을 머리로 세우셨다. 이 대천사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더 아름답고 지혜로웠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걸작품이었다. 그는 아담 이전의 옛 에덴 동산에 살며 세상의 통치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가 세상의 임금이라고 불리었다(요 14:30). 수많은 천사들이 그의 권위 밑에서 그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그의 위치와 영광 때문에 그가 교만해져서 반심을 품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높이고 싶었다. 그는 자기가 피조물이란 것이 불만이었고 창조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담 이전 종족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불의가 드러났고 응분의 심판이 내려졌으며 때가 차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다. 그의 반역에 천사들의 3분의 1이 추종하여, 그들은 마귀의 사자(使者)들이 되었다. 그들을 가두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옥을 예비하셨다(마 25: 41. 적당한 때에 사단과 그의 종자들이 그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이전의 세상에 살던 아담 이전의 종족은 이 대천사와 그의 천사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 종족이 꾀임을 받고 그들의 죄가 가득 찼다 (오늘날의 우리 자신의 세상과 비교함으로써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통하여 땅과 거기에 살던 모든 것들이 멸망당했다. 많은 악령(귀신)들이 바다의 무저갱에 갇히었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과 악령(귀신)들은 이렇게 해서 어두움의 왕국을 이룬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조치를 취하시기 전에 그러한 상태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으며,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복구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땅을 회복시키신 후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천사과의 연합을 통하여 사단의 힘이 무력화 되도록 경계하라고 그들에게 명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죄의 유혹에 빠져 타락하였다. 그가 세계를 지배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기는 커녕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을 또 다시 사단에게 넘겨버렸다. 전에는 천사들이 실패하였었으나 이제는 인간이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간이 되시게 되었으니 그가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 되셨다.

지상에서 그 분께서는 흠없는 하나님의 선지자이셨다. 당신의 죽으심 시간을 눈앞에 두시고 그 분께서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14:30)라고 담대히 언명할 수 있으셨다. 그 분께서 죽으실 때에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 분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담적인 옛 피조물을 당신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할 수 있으셨다.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그 분께서 첫 아담이 잃어버린 세상을 회복하셨다. 이리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 그 분의 죽으심에 의하여 옛 아담에 대하여는 죽고 그 분, 곧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며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마귀와는 적이 된다. 마귀는 매사에 우리를 공격할 것이지만, 우리는 그와 그의 사자들과 그의 귀신들을 언제나 대적해야 한다. 그것이 실재적인 영적 싸움이다.

 

이리하여, 사단은 한번은 "하나님의 성산"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갈보리에서 심판 받았다. 그의 죄는 이미 판결이 났으며, 그 집행만이 완전히 시행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가 땅에 던져질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때에 사단은 무저갱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리고 천 년 후에는 영원히 불꽃 속에 던져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 그 분께서는 반역의 모든 흔적을 쓸어내시고야 마실 것이다. 그 분께서 당신 자신의 피를 지성소에 뿌리시고 천상을 깨끗케 하셨으며 그 이래로 쭉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일하셨다. 그 분의 재림 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대로 복구될 것이다. 그때 그 분께서 하나님의 왕이 되실 것이다. 당신의 승리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그 분께서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을 예배하는 방법에 관하여 이 세상의 거민들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그리고 천년왕국의 상태는 죄가 들어오기 전의 세상의 그것들과 비슷할 것이다.

 

모든 것을 원래의 목적대로 복구하셨을 때, 그때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신 때이다. 그때에 이 세계는 불에 타 없어지고 의가 다스리는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어 들어설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마귀에 대하여 더욱 심각한 적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수 천년 동안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이 당신과 연합하여 사단의 힘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인간을 통하여 상실된 세상을 그 분께서 당신 자신에 의하여 다시 차지하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당신의 아들을 한 인간이 되시도록, 그래서 인간으로서 상실된 것을 복구하시도록 보내셨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비길 바 없는 사람, 주 예수님과 함께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사업과 환경과 모든 일에서 마귀에게 대적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벧전 5:9) 대적하지, 육적인 병기를 갖고(고후 10:4) 대적하지 않는다.

 

사단은 전에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웠는가? 그러나 자기의 교만 때문에 그는 완전한 파멸로 떨어지게 되었다. 스스로 지혜롭고 아름답다 생각하는 자들이여, 얼마나 위태로운가! 자긍과 교만으로 그대가 마귀의 참소에 말려들게 (딤전 3:6)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만과 자긍이 인간의 복이 아니니,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인 것을!

 

<계속>

 

 

 

첨부: 펨버(G. H. Pember)의  Earth's Earliest Ages 

Earth's Earliest Ages.pdf
11.75MB

 

 

 

[옮긴이 주]   

워치만니가 쓴 '창조의 신비'라는 책이 국내에서는 절판, 품절이 되어 구입이 어렵지만...

영문책은 아래 링크로부터 무료로 열람이 가능합니다. 

모든 책뿐만이 아니라 회복역성경(영문판)도 휴대폰에 다운로드가 가능하더군요.

오래전, 회복역성경 한글판을 다운 받았놓았지만, Activate 시키는데 10만원 이상을 요구하여 작동을 못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문판은 무료라서 오늘 큰 수지 맞았습니다.

 

https://bibleread.online/all-books-by-Watchman-Nee-and-Witness-Lee/book-collected-works-of-watchman-nee-the-set-1-vol-03-the-christian-1-Watchman-Nee-read-online/

 

 

Book Collected Works of Watchman Nee, The (Set 1) Vol. 03, The Christian (1) author Watchman Nee (W. Nee) read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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