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창조와 그리스도의 하신 일
그리스도는 모든 진리의 열쇠이시다. 그 분 없이는 성경도 하나의 죽은 책에 불과할 것이다. 그 분 없이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려운 구절들에 부딪칠 경우에 그 구절들을 그리스도에게 관련시킬 수 있다면 경이로운 빛을 조명받을 것이다. 성경은 꼭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서 그와의 관련을 떠나서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인물이 바로 주 예수그리스도이다. 그 분 자신이 이렇게 선언하신다.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주님의 이런 말씀도 이 사실을 확증한다. “...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히 10:7).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다. 기록된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을 증거하는 한편, 살아 있는 말씀은 기록된 말씀을 성취한다. 우리가 마태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 대하여 읽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창세기에서도 그 분께 대하여 읽는다. 앞의 논의에서 우리는 물리적 창조는 영적인 창조의 모형임을 보았다. 이제 물리적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취하신 여러 단계들이 영적인 창조에서의 그리스도의 행위들과 어떻게 유사한가를 보게 될 것이다. 사실상 물리적 창조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주 예수님에 의해서도 행해졌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살아 있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으며 (요 1:3),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기" (골 1:16) 때문이다. 이제부터 두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얼마나 유사한지 우리가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리스도를 성경의 증언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란다. 물리적 창조는 영적인 창조의 모형이 되도록 의도된 까닭에 그리스도의 손에 의한 이 두 창조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 합당하다.
1. 구속의 필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무엇이나 완전하다. 전능하신 분의 손으로 빚어지는 것은 죄나 주름이나 그러한 흠결로써 얼룩질 수 없다. 그 분께서 하시는 일은 그 분 자신이 그러하신 것처럼 아름답고 완전하다. 우주의 창조주 유일하신 도공의 손으로부터 새로이 나오는 것들이 얼마나 신선하고 영광스러운가! 그래서 사람의 원래 상태가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매우 좋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좋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음을 안다. 우리가 완전한 하늘과 땅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에 대하여 읽자마자 곧이어 그 파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 “ (2절). 1절과 2절의 기술이 서로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 변화를 입었던 것이다! 이 두 구절의 사건들 사이에 이상한 대격변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 아름다운 땅이 어떻게 혼돈하고 공허하게 될 수 있었겠는가?
대천사가 타락했었다! 역사의 이 부분은 너무 비통스러운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2절 하반절).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다. 흑암이 깊음 위를 덮고 있었던 것과 똑같이 행동에 있어서뿐 아니라 마음에 있어서 도덕적 흑암이 육적으로 태어난 모든 인류를 뒤덮고 있었다. 흑암이 (이것은 사단의 세력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휘어잡는다. 사람들이 "깊음" 속에서 아무리 자기들의 발명, 제작, 문화 그리고 지식을 뽐낼지라도 사단이 흑암으로 깊음을 덮고 있어서, 하나님의 빛이 그 위에 비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단의 세력 아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20세기에서의 자기들의 전례 없는 성취를 자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적인 방법을 두고 말해서 구원의 희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빚진 바 없으셨으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야 할 아무런 언질도 사람들에게 주신 일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 세상을 심판하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멸망선고를 내리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하고 바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분의 주권적 은혜는 광대하고 무한하여 인간의 어떤 예상도 미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계획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께서 6일 동안에 물리적인 창조를 회복하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죄 많은 인간들을 속량하시며 영적인 창조를 수행하신다. 이제 우리는 그 분께서 취하신이 여러 단계적 조치들을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더 많이 이야기하고 그 분을 더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놀라우신 구주와 그 분의 놀라운 구원사역을 숙고하면서 우리가 조용히 그 분을 경배하고 사모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첫째 날의 작업은 주 예수님의 출생을 상징한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빛을 명하여 들이시고 흑암 위에 비치게 하셨다. 이전에는 깊음이 흑암으로 덮여 있었으나 이제 빛이 왔다. 이것이 빛과 어둠 사이에 있는 첫 접촉이었다. 세상은 전에 그러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세상의 빛이 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온 첫 순간이었다. 분명히 이것은 주 예수님의 탄생을 상징한다. 주 예수의 탄생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실을 말하면서 요한은 이렇게 선도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또 덧붙여,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9). 요한은 명백히 주 예수님의 출생을 빛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와 비취는 것으로 보았다. 사가랴가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이렇게 선포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눅 1: 78, 79).
우리 주 예수 자신께서도 당신의 강생을 빛이 세상을 비친다는 관점에서 인지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요 3:17, 19). 그리고그는 유대뿐이 아니라 온 이방 땅을 구원하는 빛으로 오셨다. "...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6). 우리가 인용한 이 몇 개의 성구들은 첫째 날의 하나님의 작업 (빛이 어둠 속으로 비취는 것)이 후에 주 예수님께서 참된 빛으로써 세상에 들어오신 사실의 모형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빛이 왔다. 그런데도 어두운 세상이 완전히 비침을 받기를 원치 아니한다.
첫째 날의 작업은 구속사역에서의 첫 단계의 조치를 이룬다. 빛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접촉점이 없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독생자께서 보이신대로 죄인들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첫째 날의 작업이 주 예수님의 강생과 얼마나 합치하는지 주목해 보자.
빛의 조명은 성령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2절). 성육신(肉身)이 그와 같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5).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께서는 성령으로 태어나셨으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치 아니한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빛을 명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3절). 이 사실(주 예수께서 빛으로써 세상에 오신 그것)은 우리가 이미 다루었다. 다른 성경구절을 보자.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사 49:6)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눅 2:29~32). 누가 진실로 그 분으로부터 비침을 받기 위해 마음을 여는가?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4절 상반절).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님께 하신 첫번째의 말씀이 이것이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그 분 자신의 아들 외에는 누구도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니라” (롬 8:8). 죄 많은 인간의 괴이한 심사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께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 되며 주 예수의 삶은 자기 자신의 것보다 그다지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인(人)은 얼마나 눈먼 소경인가! 그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며 그 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빛 (그리스도)을 좋게 보신다. 하나님의 안목을 가진 자는 복이 있어라!
빛과 어둠이 이제 분리되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4절 하반절). 이 언명(言明)은 히브리서가 주 예수께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분리되어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6). 이 인자(人子)는 보통의 인자(人子)들과 얼마나 다른가! 그 분께서 기쁘게 살과 피에 동참하실지라도 인간의 죄성을 나누어 갖지 않으신다. 빛이 어둠으로부터 구별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죄 있는 인간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빛에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5절 상반절).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이름을 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요셉과 마리아에 의해 주어지지 않았다. 그 분께서 모태에 계실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말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그리고 그 분께서 태어나시기 오래 전에,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사 49: 1)라고 예언되었다.
그 분은 예수이시다. 그러므로 구주이시다. 이제 구주께서 오셨는데, 당신은 그 분을 어떻게 대접하는가? 세상이 구주를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그 분께서 불쌍히 여겨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구주께서 오셨고, 빛이 비추었으나, 사람들 중에 누가 그 분을 맞이할 것인가?
기본적으로 인간은 무엇과 같을까? 그는 매우 연약하여 티끌에 불과하다. 그는 제한을 받고 유한하다. 그에게 어떤 뛰어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계가 있다. 그의 사고, 성격, 품행과 도덕이 인간차원의 한계선이 그어져 있다. 그가 그 이상으로 뛰어넘을 방법이 절대로 없다. 인간의 공통적 특징은 연약과 타락 그리고 유죄(有罪)이다. 그가 한 두 개의 강점을 갖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상황에서 초월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모습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만족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또 완전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품, 도덕, 행위 그리고 생각이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동료가 될 수 없으며 천국에서 그 분과 함께 살 수 없다. 이러므로 인간이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완전하심같이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 가운데 누가 어떤 희망인들 가질 수 있겠는가! 성육신이 구원에의 첫 행동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 예수님의 출생은 신성과 인간성의 연합이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데도, 인간이 되셨다. 그 분은 그러므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고,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다.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심연이 있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결코 변할 수 없었으며, 인간이 하나님으로 결코 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그 분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그 분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교이시다. 하나님과 인간이 그 분에게서 만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변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으로 변할 수 없으되… 주 예수님께서 자신이 완전하신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서 인간을 대표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 분께서 완전한 연합으로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통하여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들에게 은혜를 보이신다. 그 분께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분 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이제 참 인간 신성이 충만한 진짜 사람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주 예수님 안에서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이후로부터의 하나님과 사람들의 연합을 가능하게 한다. 성육신이 복음의 전체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 과정의 첫 사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올 구원의 본질과 결과를 선언해 준다. 그러나 성육신에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살과 피에 동참하심을 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고(요일 3:8), ②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었다(히 2: 14, 15).
사람들이 죄를 범했고 그 죄값은 사망이다. 그런데 사망의 권세를 쥔 자가 마귀이다. 죄는 사람을 사망으로 끌고 가며 마귀는 사망을 통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들을 구하자면, 하나님께서 ① 죄의 책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며, 또 ② 마귀가 장악한 사망의 권세라는 문제를 해결하셔야 한다. 죄의 책벌은 사망이다. 그런데 살과 피를 갖지 않은 자는 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취하셔야 했다. 이제 육체를 취하셨으니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실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리고 이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이며... 그리스도 께서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이다(히 10:5,7,12). 아무도 사망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잡는다. 그러나 이제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고 이리하여 마귀가 장악한 모든 권세를 이기셨으며 마귀 자체를 멸하셨다.
사람들이 범죄했으므로 죽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자하여 의를 저버리실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며 죄를 벌하시지 않고 사람들은 구원하시는 일 같은 건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 분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실지라도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을 벌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죄책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시기 위하여 세상에 들어오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가 심판받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 더구나, 범죄한 것은 사람들이니 죄의 책벌을 받는 것이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실 수 없으나, 설사 그 분이 죽으실 수 있다 하더라도 헛 죽음을 하시게 될 것이다. 범죄한 자가 사람들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이다.
인류가 범죄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여야 한다(딤전 2:5).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온 인류를 포함하시고 죄책을 받으셨다는 점에서 독특한 사람이시다. 이것은 법과 완전히 조화된다. 그것은 아주 정당하다. 왜냐하면 만일 주 예수께서는 주 예수이시고 사람들은 사람들이라면 주 예수님의 죽음이 사람들의 죄책을 받은 것으로 간주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 하나님이신지라도 참으로 사람이시다. 그 분께서 이처럼 사람들과 완전히 연합되셨으므로 그 분의 죽음이 온 인류의 죽음으로 인정된다. 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 분의 죽음은 대리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육신이 이룩한 성과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속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분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범죄가 그 분께 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분은 그 적대를 받아들이거나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으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단순히 죄임을 받지 않는 무죄한 제 3자에 불과할 것이다. 무죄한 방관자에게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라고 요구한다면, 매우 은혜로울 수는 있어도, 공정하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 3자가 아니시며 직접 깊이 관여되신 분이시다. 그 분은 하 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범죄는 결국 그 분을 거스른 것이 된다. 따라서 그 분께서는 그 거스름을 참으실 뿐 아니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으시다.
성육신이 구원 소식의 전체는 아니다. 대속사역의 완성은 결국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육신은 첫 단계이다.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양을 취함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실 수 없었다. 베들레헴은 골고다의 선구자이다. 베들레헴 없이는 갈보리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시키심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이 되시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비인가!
(2) 둘째 날의 작업은 주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셔서 물을 갈라놓으셨다. 이 궁창은 하늘이라 칭하여졌다. 전에는 모든 물이 함께 이어져 있었으나 이제 궁창이 들어와 위에 있는 물과 아래 있는 물로 갈라 놓았다. 이 공중의 하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게 분명하니, 둘째 날의 작업에서 분리가 주제(the main theme) 이기 때문이다.
이 분리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 부분은 물 가운데 궁창을 만드는 것이었고, 둘째 부분은 궁창 위 아래로 물을 갈라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같은 분리를 하지 않았던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라고 부르짖지 않으셨던가? 그 분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셨다. 그리고 성경은 더 나아가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다” (사 53 :8)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 분께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셨음을 말하고 있다.
둘째 날의 작업은 대속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빛나는 모형이 아니라 빛은 선(善)하지만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상태를 가차없이 드러낼 뿐이다. 이러므로 빛이 크면 클수록 죄악상이 깊어진다. 뒤에 온 대속사역 없이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세상의 죄악상에 대한 가장 강한 증거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왜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이 살 수 없겠는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함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그 밖의 모든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행하는 것은 그렇게 행하지 않음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봉해버린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그 밖에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셨다면 그 분의 생애는 틀림없이 온 세상의 죄들을 정죄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의 강생이 대속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분께서 강생하시지 않으셨음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의 생각과 언행과 삶의 모습은 인간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리해서 그것은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지성소 앞에 걸친 휘장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우나, 지성소로부터 인간을 갈라놓는다. 사람들이 그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막는 것이 이 휘장이다. 이러므로 찢어진 휘장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놓는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단순히 사시기만 하신다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쫓아내실 뿐이다. 그러 나 또한 찢기우신 그리스도, 그리고 죽으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을 지성소로 이끄신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3:18). 그 분께서 살아 계시기만 하는 한 아무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이제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어떻게 상응하는지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궁창을 갑작스레 만드신 것은 아니었다. 먼저 하실 것을 결정하시고 그 다음에 그렇게 하셨다. 이러므로 6절에 말씀하신다.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이것이 미리 있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7절에서 이런 기록을 읽는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이것이 하나님의 행동이다.
십자가가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지기 전에 그것이 미리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었다. 나중의 십자가와 궁창이 서로 놀랄만치 유사성을 지녔다. 주 예수의 죽음은 돌발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미리 작정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 20), 그 분의 구속은 창세 이후로 시작되었다(계 13:8). 그리하여 주 예수님의 죽음은 실제로 실현되기 전에 미리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둘째 날의 작업을 닮았다.
이 궁창은 물 가운데에 자리잡았다. 성경에서의 물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계 17:15). 궁창과 같이 십자가가 사람들 가운데에 놓이고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진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 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 19:18). 사실상, 갈보리 언덕은 세상의 초점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던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이 궁창은 또한 물을 나누었다. 그처럼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세계를 나눈다. 그 분께서 못 박히셨을 때 그 분의 십자가는 두 강도를 영원히 갈라 놓았다. 하나는 낙원에 갔으며, 다른 하나는 음부로 내려갔다. 그들은 과거에 한 뜻으로 범죄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는 주 예수의 대리적 죽음을 받아들였으나 다른 하나는 완전히 그 분을 거절했다.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의 운명은 천국과 지옥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했다. 그것은 하나의 영원한 분리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두 강도를 갈라놓은 것과 똑 같이, 그것은 지금도 계속하여 온 세상을 나눈다. 먼 과거로부터 바로 지금까지 그 분의 십자가는 세상을 두 집단, 즉 구원받은 집단과 멸망하는 집단으로 계속적으로 분리시켜 왔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십자가는 구원받은 자들을 망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해낸다. 한 사람이 구원받을 것인가 혹은 멸망할 것인가는 그 사람됨에 달려 있지 않고 그가 십자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옛 궁창은 물을 위 아래로 나누어 놓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십자가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멸망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해낸다.
가운데 들어선 이 궁창이 모아진 물을 나누었으므로 궁창 위에 위치하게 된 물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위의 물이 내려와 아랫 물과 합쳐지지 않도록 궁창이 윗 물을 받쳐, 물이 하나님의 심판 결과였던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우리는 이미 요한계시록 17장으로부터 물이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위의 물은 다른 의미도 갖고 있다. 노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충분하게 오래 참으셨다가 그들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늘의 문을 여시고 위로부터 물을 쏟아 부으셨다. 이래서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윗 물이 하나님의 진노, 형벌, 심판을 나타낸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추론에 의하여 궁창의 의미를 이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궁창은 윗 물이 아랫 물에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준다. 그것은 윗 물과 아랫물 사이에 존재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십자가가 수행하는 일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하여 못 박히셨다. 이 의미에서 그 분은 우리의 덮개 (covering) 이시다.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과 진노가 우리 위에 떨어져 우리를 "깊음"같이 황폐하게 할 수밖에 없었으나,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와 우리 사이에 들어오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못 박히실 때에, 그 분께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들 위에 떨어지지 않고 당신 자신 위에 떨어지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들 위에 떨어져야 했다(요 3:36 을 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리자로 세우셨다. 이로써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사 53:6).
위 아래로 물을 나눈 공중의 하늘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의 진노를 사람들로부터 분리해내고 막아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가 받았어야 마땅한 것, 곧 하나님의 진노를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받으셨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이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이다. 위 아래로 물이 나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영원히 물 아래에 잠겨 있어야 했을 것이다. 주 예수의 대리적 죽음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혼돈하고 공허하게 아무런 구제책 없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십자가의 대리적 사역이다.
궁창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예비하고 실현한 분이 그 분이셨다. 외면적으로는, 주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못 박히셨다. 마치 그 분의 생명을 취하여 간 것이 사람들인 것처럼,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그 분으로부터 당신 생명을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그 분 자신이 천명하셨기 때문에 (요 10:18 을 보라), 실제로는, 사람들에 의해 그 분께서 죽임을 당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를 그 분에게서 심판하셨으므로 그 분께서 죽으셨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 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 (사 53:10).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직접적 행위이지 단순히 사람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능멸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 2:23).
하나님께서 하신 6일 동안의 작업 중에서 이 둘째 날의 궁창을 포함한 작업에 관해서만 당신께서 만드신 것이 좋았다고 그 분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음을 상기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도 말씀하시는 것만큼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이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죄를 다루셨다. 그 분의 진노가 의롭지 못한 자들이 자유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의로우신 분에게 쏟아졌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을 우리를 대신해 죄가 되게 하셨으며 우리 모두를 위해 형벌을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좋았더라”라고 천명하지 않으셨음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 분께서 죄를 벌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반대로,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어떻게든 정죄하기를 좋아하시지 않으신다.
십자가의 대속은 구원의 기초이다. 뒤 이은 십자가의 대리적 죽음 없이는 우리 주 예수님의 탄생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움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죄의 삯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대신에 죽을 구주가 없다면 죄인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탄생만으로는 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기꺼이 짊어지실 구주이지, 단순히 거룩한 스승이 아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구주만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 내실 수 있다. 죽음이 없으면 어떻게 부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죄로 물든 상태의 부활이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므로 구원의 모든 실재들은 이 둘째 날의 작업에 기초되어 있다. 물을 나눔이 없이는 후에 땅이 드러날 수 없었으며 첫째 날의 빛도 어떤 적극적인 목적을 위해 비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째 날의 작업이 가리키는 바를 특별히 주목하자. 곧 십자가 위에서의 주 예수님의 대리적 죽음 말이다.
(3) 셋째 날의 작업은 주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한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① 하늘 아래의 물이 한 곳에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도록 하라, 그리고 ②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실수를 내라고 하셨다. 전에는 땅이 깊은 물로 덮여 있었다. 거기에 생명도 활동도 없었다. 왜냐하면 땅이 하나님의 심판의 물 아래 깊이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움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구르는 성난 물결 말고는 땅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땅이 그렇게 깊이 묻혀 있었으니 생명인들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셨다. 첫째로, 땅더러 물 밑으로부터 나오도록 명령하셨다. 그 다음에 생명이 땅 위에 다시 나타나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 셋째 날의 작업은 주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게 된다. “셋째 날" (13절). 이것은 이 셋째 날의 작업이 과연 부활을 상징한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4). 성경에서 우리는 셋째 날과 부활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구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약에 나타날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유월절후 제3일은 '처음익은 열매'를 드리는 맥추절이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이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말한 것을 우리가 읽을 때에 그 특정 문구를 주목해야 한다.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4절). 이 언명으로 우리는 셋째 날의 주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이것은 바울 시대의 성경이었다)에 이미 예언 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셋째 날"이 기록된 성경의 매 구절을 살펴볼 시간이 우리에게 없지만, 적어도 “셋째 날이 맨 처음 언급된 창세기 1:13 은 고찰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신 이 셋째 날이 어떻게 주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지 알아보자. “셋째 날”에서와 같이 셋이라는 숫자만이 의미있는게 아니고, 셋째 날에 이루어진 일도 부활을 증거한다. 땅이 전에는 물 밑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뭍이 드러난다” (9절). 한 때 그것이 물 아래 있었으나, 이제 물 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것이 부활이 아닌가? 한 때 물로 뒤덮여 있던 땅이 물무덤에서 나오듯이 다시 나타났다. 물 위로 올라 물보다 더 높이 머물렀다. 얼마나 아름다운 부활의 모습인가! 우리는 이 모습을 그리스도인의 물세례에서 감식할 수 있다. 세례받을 때에 그의 몸 전체가 먼저 물에 잠겼다가는 그 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로마서 6:4과 골로새서 2:12은 이 세례가 죽음과 매장과 부활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물로부터 나오는 땅은 죽음과 묻힘으로부터의 부활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이사야서 57:20은 물이 사악함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한다.
"오직 악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치는 바다와 같으니라." 주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셨음과 같이 땅이 물에 묻혔었다. 허나 땅이 셋째 날에 물로부터 나타났기 때문에 영원히 물 아래 남아있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주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할 수 있다. 로마서 6:6~11이 주 예수님의 부활과 죄 사이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이 일을 아주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롬 9, 10절).
땅이 물로부터 나타났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슬을 끊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던 것이다. 셋째 날의 작업은 둘째 국면을 맞았다. 새로운 생명이 땅 위에 솟아올랐다. 첫 국면과 같이 이것도 부활을 말한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나무를 내니” (12절). 이것이 일어나기 전에는 심판받은 땅위에 아무런 생명이 없었으나, 이제 생명이 나타났다. 전에는 죽음이 지배했었으나, 이제 생명이 왔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둘째 날에나 넷째 날에 부르지 않으시고 부활의 날, 곧 셋째 날에 부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4). 부활 전에는 새 생명이 없었다. 새 생명은 부활 후에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이 물로부터 나타나기 전에는 생물이 자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물로부터 나왔을 때 자랄 수 있었다. 먼저 부활, 그리고나서 생명인 것이다. 부활 후에는, 반드시 새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이 무엇을 이루었다 말할 수 없다. 영적인 성장을 바라는 사람은 모두 이것을 유념해야 한다.
셋째 날의 이 둘째 국면에서, 열매가 특별히 강조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부활의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진정한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물로부터 나타난 땅에 그 밖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땅은 열매를 맺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 성경은 부활과 열매맺는 일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2). 죄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와지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함으로써 부활 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이다. 이러므로 열매 맺는 일은 부활 후에 반드시 와야 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4).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 부활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것은 주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함을 통하여서만 올 수 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열매는 그 토대를 반드시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둔다.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옛 창조에 속해 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 정죄를 받으며, 열매라 부르기에 적합치 않다.
오늘의 과제는 부활이다. 성육신이 중요하고, 십자가에 못 박힘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나, 부활 없이는 완전한 복음이 있을 수 없다. 탄생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위한 것이요, 십자가에 못 박힘의 결과가 부활이다. 부활은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로마서의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①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우리가 용서받도록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 죄의 형벌을 그 분께서 받으셨다. 죄의 용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원의 소극적 측면이다.
②그 분의 부활은 우리의 의롭게 됨을 위한 것이다. 의롭게 됨(칭의)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죄하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원의 적극적 측면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죄없다는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소극적인 측면의 사역이 철저하게 이루어져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깨끗하게 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가 받은 용서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그런데 이 의롭게 함(칭의)은 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분의 죽음은 대속을 성취하셨고, 그래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된다. 그리고 이제 주 예수의 부활의 근거 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없는 자들로 선언하시며 이리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갖게 한다. 주 예수의 부활에 힘입어, 우리가 새로운 태도와 새로운 지위에서 하나님 앞에 선다. 죽음과 부활이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데, 이러므로 해서 용서와 칭의가 뗄 수 없이 융합되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음을 뜻한다. 게다가,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입증한다. 주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주님에 의해 자기가 죄에서 멀리 옮겨졌음을,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받고 하나님에 의해 용서 받았음을 자기의 심령속에서 느낀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이 소극적 측면이다. 그리고 주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더 이상 겨우 죄를 용서받은 비참한 수인이 아니라 완전히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기의 심령 속에서 깨닫는다. 부활은 과거의 모든 것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죄와 자아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무덤에 묻혀버렸으며,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이제 가진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아는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이 될 뿐 아니라 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새로운 지위에서 하나님 앞에서 매일 사는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그리스도께서 성부에 의해 받아 들여지셨음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들여졌음을 우리는 매일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기뻐하심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그 분의 죽음과 부활에 그 분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4) 넷째 날의 작업은 주 예수님의 승천(승귀)을 의미한다.
넷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광명들을 만드셨다(창 1:14~18).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 셋째 날의 작업은 땅에서 행해졌으나, 이 날의 작업은 하늘에서 행해진다. 이제 주의가 하늘의 물체들에게 쏠린다. 해와 달과 별들이 모두 하늘의 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 이 광명들을 몇 가지 목적을 위하여 만드신다.
① "땅에 비취게 하시며" (17절). 어두움은 세상의 전형적인 성격이나, 광명은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이다. 보통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워 광명이 비춰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기나긴 밤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②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18절). 광명을 비췰뿐 아니라 주관한다. 이 날의 작업은 주 예수님의 승천의 한 모형이다.
이 날에 한 모든 작업은 하늘의 궁창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빛이 세상에 비친 하나님의 첫째 날의 작업과 같지 않았다. 하늘에서 빛나던 빛이 이 세상에 들어왔다(첫째 날). 이제 그 빛이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넷째 날). 그런데 이것이 승천이다. 하늘로부터 오셨던 주 예수께서 이제 땅으로부터 하늘로 다시 받아들여 지셨다(행 3:21 참조).
말라기 4:2이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태양'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요한계시록 12:1과 시편 19:5, 6도 같은 사상을 지지한다.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내려지는 결론은 태양은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라는 점이다. 지금은 우리가 세상에 계신 그 분을 보는것 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 분을 본다. 우리를 위하여 그 분께서 하늘에 다시 오르셔서 지금 우리의 변호자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이 날의 작업은 그리스도께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그 분의 백성에 대해서도 말한다.
달은 교회의 한 모형이고, 별들은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한 백성을 당신의 이름으로 모으셨다. 그리해서 우리가 여기에서 달과 별들이 해와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달은 그 자체에 있어서 빛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할 뿐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세상에서 빛으로 여겨지며(빌 2:15), 이리하여 별들과 같다.
빛들로써 우리가 해야 할 임무는 두 국면을 갖는다.
첫째는 도덕적으로 어두운 이 세상의 밤에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일이며, 둘째는 우리의 '말'과 '행위'의 빛에 의하여 어두움의 세력들을 지배하는 일이다. 천년왕국에서 우리가 참으로 왕들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분의 지상사역을 끝 맺는다. 그 분의 승천은 그 분의 죽음과 부활에 기초되어 있다. 그것은 그 분께서 사단의 왕국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기셨음을 의미한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0, 21). 여기에 언급된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가 사단과 그의 종자들을 가리키는 것을 우리가 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분께 사단의 모든 능력보다 더 높은 지위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 분의 하늘의 위치는 사단에 대한 제압하는 지위이다. 사단은 이제 그 분의 발 아래 짓밟혀, 더 이상 그 분을 공격할 기회가 없다. 그 분께서 이제 주이시며 만물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승귀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단과 그의 악한 영들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지위를 얻으셨다. 그들마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요 왕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위는 너무 중대하여, 이 지위 없이는 지상에서 우리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가져오는 능력과 결과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영향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제 당신 자신의 백성을 당신과 함께 이 하늘의 지위를 얻도록 친히 이끄셔서 한편으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빛나게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기게 하신다. 이것은 에베소서 2:6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태양의 빛이 어두움을 이기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하늘의 지위가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긴다. 그리고 달과 별들이 하늘과 해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있다.
(5) 다섯째 날의 작업은 생명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바다의 많은 생물들과 공중의 새들을 창조하셨다(창 1:20~23). 사실상, 앞의 4일 동안의 모든 작업은 하늘과 땅을 이 생명들이 생존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하늘과 땅을 정비하는 준비에 불과했다. 그 후에야 이 생물들이 물에 뿐 아니라 공중에 나타났다. 셋째 날에 식물들은 있었으나, 동물이나 새들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물의 생물들은 하나님께서 물을 준비하신 후에야 물에 살 수 있었다. 공중의 생물들도 하나님께서 궁창을 준비하신 뒤에야 공중에 살 수 있었다. 물고기들과 새들은 비록 형체들은 달라도 다 같이 생명을 갖고 있다. 사람의 눈에, 새들은 그 다양성에 있어서 물고기들과 사뭇 다르다. 그렇지만 이 새들이 갖고 있는 생명은 같다. 그 차이란 외면적인 형태에 있지 그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 그 자체에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다섯째 날의 작업은 생명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생물들은 물에서 형성되는 한편 다른 생물들은 공중에서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다섯째 날의 작업은 생명을 주시는 주로서의 주 예수님의 모형이다.
생명 그 자체는 자존적 (自存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이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이시라는 것이다. 생명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 생명 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 가신 후에, 그 이후로 그 분의 사역은 사람들이 생명을 갖고 또 더 충만히 갖도록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이었다(요 10:10). 넷째 날의 작업으로 상징되는 그 분의 승천은 성도들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골로새서에서 볼 수 있다. 먼저 이 구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1). 이 구절은 부활과 승천에 관해서 말한다. 뒤따르는 구절이 이것이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골 3:3-4). 따라서 승천후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안에서 바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그것이다.
우리는 이미 새들과 물고기들이 사람들을 나타낸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제 그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생명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생명은, 우리가 앞에서 배운대로, 주 예수님께서 주신다. 그 분은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이제 그 분의 사역목표는 당신의 성도들로 하여금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재림때까지 실제적인 방식으로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몸이 없이는 생명이 지상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것을 경험할 수도 없다. 이런 몸을 갖고 있지 않으면 생명이 표현될 수 없다. 그리해서 “형성" (formation)이란 것이 생명의 표현에 필요하게 된다. 오늘날 주님께서 당신의 성도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받은 생명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생명을 이미 받았으며, 또한 하늘의 지위도 얻었다. 그들에게 이제 부족한 것은 주님의 생명을 표현할 수 있도록 형성되는(formed)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 사역의 의미요 목적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성도들이 형태(form)를 이루도록 그들을 훈육하시고 계신다. 새들과 물고기들이 몸들을 통하여 자기들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당신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분명한 형태를 갖게 되기를 주님께서 원하신다. 그 분은 당신께 속한 자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자기들의 몸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표현하기를 요구하신다. 각 신자가 자기의 개체적인 몸을 갖고 있을지라도, 생명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내적인 생명은 드러남(manifestation)이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모든 성도가 주 예수님으로부터 동일한 생명을 받는다. 그런데도 개성에 내재하는 다양성 때문에 같은 성도들이라 해도 주님의 생명을 각기 다르게 드러낸다. 이 진리가 씨 뿌리는 비유에 묘사되어 있다(마 13 장을 보라). 뿌려진 씨가 동일할지라도, 그리고 씨로부터 싹튼 생명 또한 동일하고, 밭도 동일할지라도, 수확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어떤 것은 30배, 어떤 것은 60배, 어떤 것은 100배였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동일한 생명을 받으나, “형태의 차이 때문에 생명이 차이 있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 다섯째 날의 사역에서, 주 예수님은 당신의 성도들이 자기들의 갖가지의 개성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표현하도록 그들을 지상에서의 실증적 생활로 부르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중생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주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우리가 있는 세상에서 실증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생명과 깊이 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이 그 몸을 갖고 있지 않다면 밖으로 드러날 수 없다. 속에 있는 새의 생명은 새의 몸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주님의 생명을 일단 받으면 그것을 지상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훈육이다. 새들과 물고기들이 생명을 경험하는 것은 그들의 생명이 그들의 몸을 입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 이후에 그들이 자기들에게 고유한 양식의 생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성도들의 훈육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주 예수님의 현재의 사역은 당신의 성도들을 생명을 표현하도록 훈육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훈육이 있기 전에 성도는 주님의 생명과의 연합이 먼저 있어야 한다.
(6) 여섯째 날의 사역은 주님의 재림과 왕위에서 등극을 상징한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그에게 부여하셨다(창 1:26~28). 앞의 5일 동안의 작업으로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사람의 먹을 것과 쉴 곳이 이제 모두 마련되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 창조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주 예수님은 둘째 사람일 뿐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시다. 첫 아담은 실제로 주 예수의 한 모형이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주님의 재림의 한 모형을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분의 몸이 (다시 말하면 그 분의 교회가) 완성되어 그분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요일3:2). 그 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에 그 분의 교회는 완전히 그 분과 같이 될 것이다. 첫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처럼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든 성도들도 그 분의 형상을 갖고 그 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스러운 몸으로 그 분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여섯째 날에, 하와가 지어져 아담의 아내가 되었다(창 1: 27;2:21, 22을 보라). 하와는 교회의 모형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주 예수님의 재림 때에 교회는 완전하게 되어 그리스도께 신부로서 드려질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화와가 여섯째 날에 만들어졌다. 교회의 완전은 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때에 교회가 그 분의 신부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는 여섯째 날의 작업은 주님의 재림에 관한 일들을 명백하게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는 직무를 그들에게 내리셨다(창 1:28). 온갖 권능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직접 다스리지 않으시고 이 권위를 아담에게 위임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여섯째 날 작업의 전반부(아담 창조)는 주님의 재림에 해당되며 그 후반부(세계를 다스리도록 아담을 지명함)는 주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에 해당된다. 천년왕국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셔서 그 분으로 하여금 다스리시게 하실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9).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에서 만유의 주가 되시도록 하나님께서 그 분께 권위를 주시는 사실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이 많다.
아담은 자기의 권위를 하와와 공유했다. 직접 세상을 다스리는 자는 아담이었으나 하와도 그의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성경은 자주 언급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에서 왕이 되실 때에 그리스도인들(주 예수님의 하와가 될)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며 그 분의 영광을 함께 나눌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다스리심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그 통치에 참여할 것이다. 다섯 고을과 열 고을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리라.
탄생,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일 등이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들이다. 그렇지만 그 분의 재림과 왕위등극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에서 단지 희생만을 붙잡고 있는 자들로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성도들은 오늘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장래에는 천국에서 축복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당한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써 왕국을 주신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야만 하신다. 이 세상에서 그 분이 수욕당하시고, 멸시, 핍박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다른 어떤 천계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또한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그래서 또한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왕이 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감격스러운 소망이 될 뿐 아니라 그 분의 성도에게도 그러하다.
더구나, 성도들이 영과 혼의 구원을 오늘 경험할지라도 그들의 몸의 속량은 미래에 놓여 있다(롬 8:23~25). 어떤 신자들은 이미 죽었다. 아직 그들은 부활한 몸을 받지 못했다. 어떤 신자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들도 변화된 몸을 얻지 못했다. 영과 혼은 구속을 받았으나 몸은 주님에 의해 변화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4).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이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가?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활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재림이 없다면 우리의 몸이 아직 구속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구원이 완전해질 수 없다. 오늘의 세상 형편을 관찰하여 감에 따라 우리는 그 날의 가까움을 확신하게 된다.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리자.
(7) 일곱째 날의 작업은 영원하신 주 예수님을 상징한다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을 우리가 본다(창 2:1~3). 발설하신 말씀도 작업하신 일도 없었다. 말씀들이 이미 나갔고 일들은 모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말씀하시거나 일하실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거룩한 만족을 누리시며, 6일 동안의 작업들을 굽어보시고, 그 좋은 모든 것을 음미하시는 것 뿐이었다. 하여야 할 일들이 모두 행해졌기 때문에 마음이 만족을 얻었다. 그리고 만족과 함께 안식이 왔다. 마음의 만족이 그 마음에 안식을 가져왔다. 마음의 안식은 자연히 전(全) 존재 (the whole being)의 안식과 평안을 가져왔다. 전에 말한 대로, 이 날은 저녁도 아침도 없기 때문에 지나간 여섯 개의 날들과 달랐다. 어두운 밤이 영원히 지나가버렸으며, 아침 또한 그러하였다. 이제 영원한 낮이었다.
천년왕국이 지나가고 영원한 안식이 다가왔다. 안식외에는 그 밖에 아무 것도 없다. 새하늘과 새땅과 새 예루살렘의 상태가 그러할 것이다. 어두움과 비참이 지나가버렸다. 지난 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아침이 대낮과 비교될 수 없음 같이, 이 안식 과는 비교될 수 없다. 그때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전히 이루어진다. 옛 것이 영원히 지나가버렸고, 영원이 앞에 놓여 있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그리스도)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물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4 28). 아멘!
<계속>
'창조의 신비'라는 책은 40년전에 출간된 책이라서,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 책을 무료로 공개한 곳이 있어 링크를 아래에 달아 봅니다.
'창조의 신비'라는 글은 '요한계시록 강해' 와 마찬가지로 '워치만 니'의 초기 저술로 남겨졌습니다.
따라서 문체는 때로 고풍스럽고 (한자--> 영어로) 번역은 어쩔 수 없이 어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밝혀진 진리와 해방된 생명을 통해 진리의 빛을 발하실 것을 믿습니다.
참고: https://bibleread.online/all-books-by-Watchman-Nee-and-Witness-Lee/
(1) 저자를 '워치만니'로 선택함
(클릭하면 워치만니의 모든 책들이 나열됨)
(2) 책명이 'C' 로 시작되는 '군'으로 들어가서...
(3) Set1, Vol. 03을 선택함.
위와 같은 화면이 나오면, 커서를 컴퓨터 화면 아무 곳에 올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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