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과 성령과 빛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들은 생명유지를 위하여서는 물과 공기가 필수적이다.
육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물과 공기라는 환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함과 같이 우리 영적 생명을 위하여서도 영적인 물과 공기가 필요하다. 물은 말씀을 그리고 공기는 성령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이 두 가지 원소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은 물(수면)위를 운행하시었다(창 1:2). 역사의 시작에서 물과 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음은 '루와흐'(Ruwach)로서 공기, 바람, 호흡, 영이라는 뜻을 갖고있다. 이와 같이 물과 공기는 우리의 육적생명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세계와도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셨다. 물과 성령의 만남이었다. 침례요한은 물로만 침례를 주었지만 물과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주님에 의하여 성령의 시대(여호수아의 인도로 시작된 약속의 땅에서의 시대는 그림자)가 시작되었다. 물과 성령의 만남에 대한 예를 하나 더 들고자 한다. 홍해에서 다시 물과 성령이 마주치는 역사가 있었다. 모세가 홍해바다 앞에 서서 지팡이를 들자 동풍이 불어 바다는 갈라지고 이스라엘인들은 물을 건너게 되었다. 출 14:21에서 사용한 동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창 1:2의 '하나님의 영'과 동일한 '루와흐'이었다. 즉 그 바람은 성령이었던 것이다.
창 1:3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을 어두움과 나누시었다. 이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두 광명(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번 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는데(창 1:18) 이 때의 빛은 자연의 빛이었다. 이와 같이 빛에는 영적인 빛과 자연의 빛이 있다. 물론 영적이 빛이 먼저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중요한 3 원소는 물과 영(루왁: 공기)과 빛임을 알게 되었다. 이 3 원소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3 원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 1:1).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요1:14).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6) 또한 빛이시다(요일 1:5).
물은 말씀을 의미한다(엡 5:26). 영적인 물(말씀)이 먼저이고 궁창의 물이 나중에 있었다. 성령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영이 먼저 있었고 그 후 공기가 있었다. 공기(영)는 물이 변형된 모습이다. 물과 공기가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또한 요일 1:5에서 하나님은 빛이심을 증거한다. 사탄도 빛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지만 그 빛은 가짜 빛이다(고후 11:14).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은 어두움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물과 공기 안에서 살고 있으며 또한 이 환경에서 밤과 낮이 연속된다. 빛과 어두움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명뿐만이 아니라 어두움까지도 창조하셨다(사 45:7).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모세라는 이름의 뜻처럼 물에서 나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다. 흙에서 나온 우리처럼 나무는 흙에서 나온다. 나무도 생명유지를 위하여서는 물과 공기와 빛을 필요로 한다. 에덴동산의 많은 나무들중 중앙에 서 있는 한 나무는 주변의 나무와 달랐다. 그 나무는 생명나무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 나무를 먹으면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창 3:22).
예수님은 진정한 생명나무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 첫 아담이 범죄함으로서 우리는 생명나무로부터 격리가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참 생명나무로 이끌어 주셨다.
참 생명나무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죽음을 통과한 아론의 지팡이처럼 싹이 나서 그 가지가 이방으로 뻗어 많은 열매를 맺었다. 십자가로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거져 주시는 생명수로 인하여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 잠11:30 에서 우리 또한 주변의 영혼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생명나무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생명의 실과를 맺기 위하여서는 깊은 뿌리로부터 물(말씀)을 올려야 하며 부단한 호흡(기도)을 통하여서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빛(계시)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러한 영적 광합성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실과를 맺게 된다(요 15:8). 그리고 나무는 크게 자라야 한다. 왜냐하면 큰 나무가 되어야만 그 나무는 자신이 지고갈 십자가의 목재로 사용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 하늘과 땅 중간에 서 있다. 2,000년 전 갈보리 산 위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분명 하늘과 땅 가운데 서서 중보의 역할을 다 하였던 것이다. 그 분은 그 나무 위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생명을 마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두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그 당시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의미를 제자들도 알 수가 없어 뿔뿔이 다 흩어졌던 것이다. 그 보혈은 영원한 언약을 위한 중보의 피(히 13:20)이었으며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언약의 피였던 것이다(마 26:28). 물로 우리의 더러워진 몸을 씻을 수가 있는 반면 우리는 주님의 피로써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옷을 하얗게 씻을 수 있다..
주님의 사역은 물과 함께 시작이 되었다. 그 분의 공생애는 요단강에서의 침례로 시작이 되었으며, 지상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이 홍해(침례)를 건넌 후 광야에서의 첫 번째 기적이었던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사건과 연결이 된다(출15:25). 그리고 주님의 첫 가르침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교리이었다. 이 교리는 실로 기독교의 수 많은 교리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가르침에 대하여 니고데모와 같이 혼동을 하고 있으니 매우 애석하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중요하듯이 모든 가르침의 기초가 되는 이 교리를 자세히 알아보자. 예수님께서 거듭남을 설명하셨을 때 모태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 비유는 거듭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의 역할을 한다. 아기의 생명은 모태에서 시작한다. 40주간의 태아기(광야에서 40년간 물의 기간)를 지난 후에 아기가 태어남으로 눈이 뜨여져 세상에 있는 사물을 보기 시작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그리고 이 영적인 생명도 모태의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이 기간은 물의 기간으로써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시기이다(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23>
즉 거듭남은 말씀으로 양육받음의 결과이고 거듭나는 시기는 물의 기간이 끝날 때이다.
예수님께서 거듭난 자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가 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셨다. 즉 물에서 거듭난 자는 눈이 열려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볼 수가 있으며, 성령으로 거듭나... 의와 거룩함의 열매를 맺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2. 홍해를 건넘으로 시작된 40년의 광야생활(물의 기간)
침례는 새로운 믿음의 삶을 시작한다는 믿음의 외적인 표시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구원 받았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의 티켓이고 침례는 그 티켓을 외적으로 보여줌과 같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널 때 모두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고전 10:1-2). 구름의 주성분은 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함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의 죽음과 연합하였음을 의미하고, 뭍으로 올라옴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되었음을 뜻한다. 뭍으로 올라 온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는 광야생활이 시작되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영적인 거듭남을 말씀하셨을 때 모태의 비유를 사용하시었다.
왜냐하면 육적생명의 성장과정은 영적생명의 성장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모태 안에서 물의 기간을 거쳐야 하며 또한 태어난 이후에 호흡은 시작된다. 물에서 살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은 큰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모태의 기간을 거치지 않은 아이는 있을 수가 없다. 아기는 모태에서 양육이 되어지며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준비가 다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셨던 바가 이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기 위하여서는 모태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내가 나이가 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 갔다가 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인 '모태'의 참 의미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물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크리스챤들도 니고데모와 같이 거듭남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다.
'물'이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기가 임산기 없이 태어나는 것(거듭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가르침들은 말씀으로 양육받는 물의 기간(임산기)을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르침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할 때에 우리가 거듭난다고 한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 5:17). 그러나 그 생명은 모태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곧바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말씀으로 양육되어지는 태아기를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아기의 태어남은 아기가 모태 안에서 양육되어짐의 결과이다.
영적인 거듭남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짐의 결과이다(벧전 1:23).
태어나면서 아기가 사는 환경은 물에서 공기로 바뀌게 되는 것과 같이 크리스챤들도 거듭나면서 그 환경이 물에서 성령으로 바뀌게 된다. 제 1세대 이스라엘인들은 홍해바다를 건널때 구원을 받았으며, 제 2세대 이스라엘인들이 요단강을 건널때 거듭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옆을 지나게 될때, 그들은 모두 여호와의 편에 서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디딜때... 요단강 물의 흐름은 그쳤다. 홍해를 건넘으로 시작된 물의 기간은 마침내 요단강에서 끝나게 되었다. 요단강을 지날때 그들은 단체로 (레위인처럼...) 여호와의 편에 서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들은 여호와의 소유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자대신 레위인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다(민 3:12). 그리고 금송아지 사건을 통하여서 레위인들 또한 하나님의 편을 선택함으로... 그들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민 8:14,18)가 되었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기업(신 10:9)이 되셨다.
<물로 거듭남>
다시 거듭 강조하지만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요3: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보아야 하는데, 이 보는 것이 먼저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을 한 후에는 담 넘어 피어 있는 꽃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나비로 태어난 후로는 이제 땅에 속한 채소나 나무의 잎을 먹기를 중단하고 하늘의 향기를 담은 꽃의 꿀을 먹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거듭나기 전에는 땅에 속한 것을(골3:2-5) 즐겼지만 거듭난 신자는 하늘나라를 보기 시작함으로 하늘의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꿀을 먹고 있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로부터 당연히 꽃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을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당신은 그리스도의 냄새가 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당신은 이미 거듭났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성령으로 거듭남>
디도서 3:5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라는 말씀이 있다. 중생의 씻음이란 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 다음 단계인 성령으로 새롭게 하심이란 무슨 뜻인가?
엡 4:22-24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영)으로 새롭게 되어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물에서 나온 자(거듭난 자)는 이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역사로 의와 거룩함을 입은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 아기는 태어난지 8일 후에 할례를 받아야 하였다.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그 아기는 그 때부터 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할례의 참 의미는 골 2: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바울사도는 다음 장에서 이를 다시 설명하였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골3:2-5) 할례를 받은 아기가 참 이스라엘인으로 인정되었듯이 우리도 육적인 정과 욕심에서 벗어나야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참 크리스챤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부모의 말에 순종하기를 원할 뿐이다. 이제는 딱딱한 식물도 소화해 낼 수 있다. 한 성숙한 크리스챤이 되기 위하여 이제부터 부딪히는 모든 환난과 시험을 싸워 이겨야 한다.
광야 이스라엘인들은 요단강을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마자 할례를 받았다.
이는 요단강을 건넘이 출산(거듭남)의 과정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바이다. 태어나지 아니한 엄마 뱃속안에 있는 아기는 할례를 받을 수가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는 할례를 받지 못함과 같이, 광야에 머무르던 제 1세대 이스라엘인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즉 거듭나지 아니한 크리스챤을 예표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을 갖고 출애굽을 하였건만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를 못하고 다 광야에서 패망하였다.
만약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을 하기 전 그들이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이집트에서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크리스챤들이 출애굽시의 이스라엘인들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지를 않으므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광야에서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는 자는 적으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무슬림과 같은 이교도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셨었다. 이 말씀은 또한 2,000년 전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3. 거듭남의 증거
우리는 종종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나는 몇 년, 언제 거듭났다"고 하는 간증을 듣곤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거듭난 자들에게는 거듭남의 증거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난 아기로부터 볼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공기를 들이 마시는 호흡이 있으며, 둘째로 무엇이든지 먹고자 하는 왕성한 식욕이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만나를 거저 쉽게 먹었으나, 태어나고 나서는 악을 써가며 먹을 음식을 찾는다.
즉 거듭난 자는 ① 영적 호흡(기도)을 시작하고, ② 영적인 음식에 배고픔을 느낀다.
만약 주변의 어떤 형제로부터 말씀을 갈급하는 식욕을 볼 수가 없다면 그는 아직 거듭나기 이전인 물의 기간에 속해 있던지 아니면 그가 거듭나긴 하였어도 병든 자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병에 걸려 있는 아기는 도무지 잘 먹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한 크리스챤 혹은 장성한 자는 더 많은 양의 음식과 여러 다양한 음식을 필요로 한다. 아기의 정상적인 성장을 위하여서 어느 때가 되면, 아기의 음식은 젖에서 단단한 식물로 바꾸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4.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나?
히12:14 에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하면 거룩함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티켓이기 때문에 그렇다. 딤전 4:5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하나님나라를 보기 시작한 후에는 거룩한 그 나라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하여야 한다. 한쪽 발만 사용하여 그 곳에 도착하기란 역부족이다. 마치 두 날개를 동시에 또 균형있게 사용하여야만 새가 날 수가 있음과 같이 두 발을 똑같이 사용할 때 우리는 걸을 뿐만이 아니라 뛰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왼쪽 발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오른 쪽 발이 기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두 발로 달려나감으로 거룩함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마음과 생각에 묻혀 있는 더러움을 발견할 수가 있고, 이 더러움을 회개의 눈물로 씻어 내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깨끗한 양심으로 나설 수가 있는 것이다(행24:15-16).
5.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영적성장(성화)의 견해
이스라엘인들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에 절을 한 적이 있었다.
모세는 이 사건이후 이스라엘인들 다 불러놓고, 하나님편에 설 자들은 모세 옆에 서라고 하였다. 그 때 레위인들만이 모세의 편에 서게 되었다. 12지파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레위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떠나 하나님 편에 선 자들이다. 즉 하나님만이 그들이 믿고 따를 주(Lord)가 되심을 알게된 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영적 눈에 시력을 얻어 자신이 서야할 곳을 볼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레위인들만 하나님 편에 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
레위인들은 거듭남으로 눈이 열려 하나님나라를 보게된 자들이다.
레위인들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거듭난 자를 예표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은 그들의 기업(신 10:9)이며 또한 레위인은 하나님의 소유(민 3:12)이다.
<신 10: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7-28 광야 이스라엘인의 4부류 및 이스라엘 진영밖의 연단장소, http://blog.daum.net/sylee560225/461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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