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한계시록

3-9 '음녀' 바벨론은 과연 누구인가?

요나한 2016. 6. 25. 23:49

17 1 :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대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음녀에 관해 보기로 하자.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언급된 음녀는 바벨론이다. 

그녀가 한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그녀의 길을 기뻐하지 않으셨는가? 바벨론이 대표한 것은 무엇인가? 바빌론의 원칙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계속 바벨론을 처리하고 계신가? 왜 바벨론이 심판을 받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어린양의 아내가 나왔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사 우리로 하여금 성경 안의 바벨론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보게 하시기 바란다.

 

'바벨론' 이라는 명사는 '바벨'에서 파생되었다

우리는 마땅히 성경 중에서 바벨탑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바벨탑의 원칙은 바로 땅에서 하늘까지 닿도록 건축하는 것이다. 이 때 사람들은 벽돌로 바벨탑을 쌓았다. 벽돌과 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돌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벽돌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벽돌은 사람이 발명한 것이며 사람의 산물이다. 바벨론의 의미는 사람이 자기의 방법을 사용해서 하늘과 직통하는 한 탑을 세우는 것이다. 바벨론이 대표하고 있는 바는 인간의 능력이다


바벨론은 거짓 기독교를 대표한다. 

거짓 기독교는 성령으로 권위를 갖도록 하지 않으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지도 않고 사람의 노력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한다. 모든 것이 사람이 구운 벽돌이고, 모든 것이 사람의 행위이다.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천연적인 재능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로 주님께, "주여, 당신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능력으로 영적인 일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땅에서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통하는 한 다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까지 직통하는 한 탑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없다. 어떤 이는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서 조금만 신학을 공부하면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벽돌이다. 어떤 사람은 매우 총명 하여 약간의 도움을 받고 약간의 지식을 축적하게 되면 즉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벽돌이다. 어떤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그를 청하여 교회에 사무를 보도록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벽돌이다. 사람의 능력으로 하늘까지 통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벽돌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사람을 위한 지위가 없다고 다시한번 강조해야 한다. 하늘에 속한 것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며, 땅위의 것은 결코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 사람의 문제는 바로 사람이 심판 아래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재와 같고 진흙과 같음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사람은 높이 세우려고 하지만, 하늘은 사람보다 훨씬 높다. 사람이 세운 탑이 아무리 높아도 사람은 여전히 하늘을 만질 수 없고, 하늘은 여전히 사람 위에 있다. 사람이 아무리 기어오르고, 아무리 높이 세운다 해도, 그리고 설령 그가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여전히 하늘을 만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계획을 파괴하신 것은 바로, 사람 자신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원칙은, 실지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고, 사람 앞에서 사람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그런 척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하나의 위험은 바로 외면적으로 신령한 모양을 가장하는 것이다. 수많은 영적인 태도들이 다 위선적이며 , 수많은 긴 기도들도 위선적이며, 수 많은 기도하는 듯한 목소리도 위선적인 것이다. 실지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외면적으로 그렇게 가장하는 이것이 바벨론의 원칙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을때,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원칙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들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위선을 행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신부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위선적인 일은 음부의 원칙에 따라서 한 것이지, 신부의 원칙에 따라서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 앞에서 외식하는 데에서 구원될 수 있다면, 이것은 위대한 일일 것이다. 바벨론의 원칙은 사람 앞에서 영광을 얻을려고 외식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 사람의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시날 산의 외투의 죄이고,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범한 죄이다. 거짓 헌신이 죄이고, 거짓된 신령함도 죄이다. 무릇 참된 예배는 영과 실재로 드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를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원한다.

 

계시록 18 7절에서는 바벨론의 또 하나의 상황을 말한다.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그녀는 왕후의 지위에 앉았으며 완전히 과부의 모습을 잃었고, 조금도 주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그녀는 정결함을 잃어버렸고 합당한 목표를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원칙이며, 이것이 바로 부패한 기독교인 것이다.

 

18장에서는 또한 바벨론에 그녀가 사치스러운 누림을 얻는 한 무더기의 물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을 깨워야 한다. 한 면으로 우리는 과학의 발명들을 신뢰한다. 우리는 필요할 때 많은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다. 마치 바울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전 7:31)."고 말했듯이 우리의 목적은 다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다. 그러나 모든 사치스러운 향락은 다른 문제이다. 모든 사치품들을 거절하고, 육체로 과도한 누림에 빠지게 하는 일체의 것들을 거절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우리는 물건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사치라는 것이다. 의복, 음식, 거처 등을 막론하고 과분하거나 필요를 초과한 것은 바로 바벨론의 원칙이다.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만, 필요 이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의 원칙에 따라서 생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욕에 따라서 생활한다면 바벨론의 원칙 아래 있게 되며,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미 바빌론의 원칙을 보았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함께 섞인 것이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위장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며, 사람의 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혼란한 기독교이자 또한 부패한 기독교이다. 우리는 바벨론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계시록 18 4절을 보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 6 17-18절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바벨론의 성질을 띤 어떤 일에도 참여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섞여 있는 것, 사람의 재능과 하나님의 일이 함께 섞여 있는 것, 사람의 의견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섞여 있는 모든 상황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바벨론의 성질을 띈 어떤 일에도 참여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의 영의 깊은 것들에서 그들 스스로를 바벨론과 분별시키고, 바벨론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바벨론과 함께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바벨론은 바벨탑에서 시작되었고, 나날이 그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최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계시록 19 1- 4: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 가더라. 24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하나님이 음녀를 심판하시고, 그녀의 모든 일과 그녀의 인격과 음녀의 원칙을 모두 산산이 흩어버리실 때에, 하늘에서는 할렐루야의 찬양이 터질 것이다. 만약 신약 안에서 오직 계시록에만 몇 번의 할렐루야가 있는데 ,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 바벨론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8 2절부터 8절까지의 한 단락에서는 바벨론의 멸망하고 심판받은 원인을 말한다. 즉 바벨론의 죄행과 그녀가 받은 심판의 결국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심판은 장래에 하나님이 집행하시겠지만, 영적인 심판은 오늘 우리가 집행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수많은 영적이지 않은 것들을 교회 안으로 가져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도 사랑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할렐루야라고 외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바벨론의 원칙은 혼란이요, 부정함이다. 그래서 음녀라고 부르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몇 군데 성경 구절을 사용해서 바벨론의 일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대단히 증오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18절에서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19 2절에서는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라고 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원칙을 대단히 증오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 존재 안에 절대적이지 않은 부분이 얼마나 많이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절대적이지 못하고, 어중간한 모든 부분이 다 바벨론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주사 우리로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절대적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심판할 수 있게 하시기 원한다. 우리가 이와같이 우리 자신을 심판할 때에, 바로 우리가 바벨론의 원칙을 증오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된다.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밖에서 영광을 구치 않고, 그리스도 밖에서 존귀를 구치 않게 하시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가 바벨론의 원칙 안에서 살지 않고, 절대적인 사람이 되고자 기뻐 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한마디로 음녀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대신, 땅에 속한 것으로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지려고 하는 모든 것이다. 

바벨론(음녀)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의 '돌' 대신 사람이 만든 인공적인 '벽돌'을 사용하여 하늘에 닿는 '바벨' 탑을 높이 세우려 하는 교만하고 타락한 교회이. 



[워치만니카페, 거룩한성 새예루살렘성(1) 글에서 부분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