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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흰 세마포'란 무엇인가?

요나한 2013. 11. 9. 16:43

흰 세마포란 무엇인가?

 

 

1. 옷 입음에 대하여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나이가 꽤 먹었던 바보 청년이 살고 있었는데, 이 청년은 가끔씩 옷을 다 벗어 버리고는 알몸으로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다. 그럴 적마다 청년 뒤에는 황급히 옷을 들고 쫓아가는 가련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었다.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벌거벗은 상태로 태어나 어느 기간까지는 그 벗음이 흉이 될 것이 없지만,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벗음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부모의 큰 고통이 될 것이다.

 

만약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옷을 입든지 아니면 벗고 지내든지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여럿이서 공동 생활을 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갖고있는 가치기준이 정상적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수치를 가려여만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피지의 '?_b9?'라는 섬은 티벳의 불교인 라마교가 깊게 뿌리가 내려져 그들은 '달라이라마'를 신으로 숭배하면서 산다고 한다. 영적으로 타락한 그들은 도덕적 가치기준마저도 부패하여 모두 벗고 산다고 한다. 마귀에 속아 이렇게까지 저속하게 타락한 부류들을 제외한 모든 자들은 타인 앞에 설 때 반드시 옷을 입어야 한다. 왜냐하면 옷은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원초적인 목적은 수치를 가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앞에 설 때에도 옷을 입어야만 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반드시 영적인 옷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 2 가지의 '' 2 가지의 ''

''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우리 '자신의 의'가 있다. 또한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두 종류의 옷을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옷은 주 예수그리스도 자신이다(13:14). 이는 예수의 보혈로 우리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자신이 벌거벗음을 부끄러워 몸을 숨기자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입혀 주셨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음을 예표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다행히 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입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롬13:14에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으로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어떻게 예수그리스도를 옷 입을 수가 있을까? '예수그리스도의 의' 우리가 입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고전1:30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우리의 '' 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예수의 피를 우리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다. 그 피가 우리의 영에 묻혀질 때 우리의 영은 살아나고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하겠다. 의사들은 수술할 때 투명한 고무장갑을 착용한다. 그가 아무리 유능한 의사일지라도 맨 손으로서는 수술을 받고자 하는 환자에게 나아갈 수는 없다. 또한 고무장갑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손 위에 고무장갑을 착용할 때 비로소 의사는 환자에게 나아가 수술을 시작할 수가 있다. 여기서 고무장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해당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을 때에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었지만 예수의 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다.

 

그러나 이 고무장갑을 낀채로 주님이 베푸시는 만찬(26:29)에 참석할 수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마시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수치를 가리는 예복(22:12)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더렵혀지는 수족을 매일 씻어 깨끗함을 유지하여야하며 그 이후 성도로 인정될 때(19:8)에 이 옷을 얻을 수 있다.

 

, 두 번째 옷은 '우리의 의' 옳은 행실로 입혀지는 옷이다.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이후부터 한 벌의 세마포 옷을 마련하기 위해 의로운 행실로 계속 수를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본래는 비어 있고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한바늘 한바늘 자신의 의로 부단히 수를 놓아 어느 날 한 벌의 옷이 완성될 때 그 빛나는 옷은 수놓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세워질 때에 우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어야 한다. 혼인예식에 참석하는 자와 어린양의 아내가 입게 될 깨끗한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19:7-8)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럼 무엇이 '자신의 의'로 계수될 것인가?

 

주님을 사랑하여 향유를 쏟아 부은 것도 의요, 주님을 사랑한 연고로 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물질적인 공급을 하였던 요한나의 행위(8:3)도 의요, 냉수 한 그릇을 어린아이에게 대접하였어도 ''로 여겨질 것이다. 즉 주를 사랑함으로서 비롯되어진 것은 다 ''로 계수된다.

 

이 옷은 우리 자신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이 옷을 만들어 낼 수는 없고 단지 재료를 하나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이 옷을 입은 자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음으로 보아, 이 옷을 입는 자는 주님과 특별한 교통을 누리게 됨을 알 수 있다.

 

이사야 61:10은 영적 단장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첫 번째 옷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입는 '구원의 옷'이며, 두번째 옷 '의의 겉옷'으로 그 위에 덧 입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 혼인 예식의 2 부류

계시록 19:7-9절의 말씀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는 1) 어린 양과 혼인하는 신부와 2) 단지 혼인 잔치에 초청(invited)을 받는 자들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는 이들도 예복을 입어야 함을 마22:1-14에서 강조하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이 혼인잔치에 청함(called)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chosen)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자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하얀 세마포로 영적인 단장을 하여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들은 적다는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와 혼인잔치에 초청 받는 이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21:9에서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이리라" 하시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을 보여 주셨다. 따라서 어린양의 아내는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자들로서 이들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계 21:27은 증거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성에는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지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37:26- 28)이다. 과거 광야장막시절 하나님은 지성소에 계셨으며, 지금은 땅의 장막(우리 몸)중 지성소에 해당하는 우리 영 안에 거하시고, 장차 영원한 지성소인 새 예루살렘성에 거하실 것이다. 광야시대의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새 예루살렘성의 입성에도 제한이 있어서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19:7에서는 그 아내가 예비되어 혼인예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혼인예식은 언제 있게될 것인가? 혼인예식은 새 예루살렘성에서 거행될 것임으로, 거룩한 성이 내려온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새 예루살렘성에 살 신부는 교회시대뿐만이 아니라 구약시대와 천년왕국 시대의 이기는 자들도 포함되어야 하며, 또한 혼인예식은 한번 치루는 것이 윤리적이므로 이 혼인예식은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모든 농사가 종결된 이후에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농사는 계14:6-7에서와 같이 '영원한 복음'이며 이 복음은 백보좌 심판의 때까지 전파될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전 베푸신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다.(26:29) 주님의 이 말씀은 이사야 25:6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베푸실 연회와 일치한다. 이 연회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이사야 25:8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가 되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시기(21:4)로서 백보좌 심판이후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어지는 시기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때 최초로 행하신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이었는데, 아마 새하늘 새땅이 창조되어진 이후 최초로 행하실 일도 혼인예식일 것 같다.    

 

이 때 동서고금의 모든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어린양의 신부로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예식에 단지 초청을 받게 되는 자들이 있는바 이들은 혼인예식이 끝나면 다시 성 밖으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 성은 단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21:27)들만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혼인예식에 초청을 받게 되는 자들은 복되다고 계19:9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성도들로서 그들의 옳은 행실로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된 자들로서(19:8),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백성(21:3)이 되는 복된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꼭 알아야 할 하나님의 귀한 계획 하나를 짚어보자.

당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을 향하여 큰 계획을 품으셨었다. 이 계획은 출 19:6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인 모두를 제사장으로 삼으려 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나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러나 이 계획은 이스라엘 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단체적으로 우상에 절함으로서 무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계획은 결코 포기된 것이 아니었다. 이 나라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장차 새하늘 새땅의 시기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이 나라에 대한 청사진은 베드로전서 2 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하며 소개되었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라는 단어이다. '왕과 같은'의 뜻은 비록 왕은 아니지만 왕의 신분과도 흡사한 이라는 뜻이며 '거룩한 나라' '거룩한'의 원 뜻은 히브리 음으로 '하기오스' (hagios) 로서 '성도의' 라는 뜻이다. 즉 이 나라는 '성도의 나라'인 것이다.

 

계시록 21:7의 이기는 자는 '내 아들' 즉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21:3에서의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복수로 표현되었음을 유의하자. 21:3의 이들은 벧전2:9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다니엘은 단7:18,22 에서 성도들이 얻을 거룩하고 영원한 나라를 설명하였고, 에스겔은 겔37:25-27에서 하나님께서 한 나라(37:22)를 세우실 것인데, "이 나라는 영원하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이 나라는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이 되었고, 이 나라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3:5)만이 들어간다고 증거하였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마5:20에서 너희의 ''(Righteousness)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음으로, 우리의 ''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티겟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계시록 19:8에서 흰 세마포는 성도의 '' (KJV영어성경은 Righteousness of saints) 라고 정의하였다. 즉 마 5:20은 우리는 ''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며, 19:8은 우리는 ''의 결과로 흰 세마포를 입는다고 하였으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바는 우리는 자신의 ''로 말미암아 흰 세마포를 입게 되며 또한 성도로 인정함을 받아 장차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 12:14에서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이 계신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다. 앞서 알아 본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마태복음 5:20에서는 '우리의 의', 또 히브리서 12:14에서는 '거룩함'이 필요하다고 강조가 되어 있다. 그럼 '' '거룩함'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도바울은 로마서 6:19에서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였다. 피값으로 산 바가 된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고전 6:19~20), 하나님이 원하시는 ''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지체를 통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 할 때 결국 우리의 거룩한 삶이 결과 되어져 거룩한 나라에 들어갈 티켓을 얻게 되는 것이다.

    

거룩한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다 흰 세마포 옷을 입은 제사장들이다.

15:3에는 "주 하나님... 만국의 왕이시여" 라는 구절이 있는데,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인 KJV 에는 "Lord God Almighty; ... thou King of saints", '만국의 왕'이 아니라 '성도들의 왕'이시여 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주님은 '만왕의 왕'(17:14)이시며 또한 '성도들의 왕' (KJV, 15:3)이 되실 것이며, 이기는 자들은 '만국을 다스리는 왕들'(2:16, 21:24, 22:5) 이 될 것이다.

(히브리 또는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원문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하여서는 KJV 영어성경을 사용할 것을 권고 함. 왜냐하면 KJV은 원문의 단어, 단어들을 영어단어들로 대치한 것뿐이어서 성경의 원 뜻에 가장 가깝다.)   

 

결론적으로 혼인예식의 두 부류는 신부(이기는 자)와 초청 받는 자(성도)들로 구분되어지며 이들 모두는 흰 세마포를 입고 있다. 또한 혼인예식 후 계속 새 예루살렘성에서 거주할 신부는 흰 세마포를 입고 있을뿐만이 아니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21:27)  신부는 성도들중 의롭고 의로운 자(Perfected saints: 8:30)로 인정받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는 단수로 표현된 한 단체(이기는 자)이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받는 이들은 복수로 표현된 '성도들'인 것이다.     

 

 

2. 계시록 3장에서 세마포와 관련된 구절

 

  .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 (3:4-5)

첫째,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가 몇 명이 있는데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기는 자들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요한은 그 당시 흰 옷 입은 자들을 셀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사람들의 영적상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둘째, 사데 교회에 "몇 명은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을 바꾸어 말하자면 "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옷을 더럽힌 상태로 있었던 자들의 수는 많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흰 옷을 입은 후에는 옷을 깨끗하게 유지함이 더욱 중요하며, 그 옷을 날마다 빨아 항상 빛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자들이 이기는 자들이라는 해석이다.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에 대하여 알아 보자.

첫째, 주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시면 영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로서 엘리사의 기도로서 사환 게하시의 영안이 열려져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였음을 보았다.(왕하 6:17)

둘째,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보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1),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2:29)

셋째, 마음의 눈(영적인 눈과 믿음의 눈)이 어두워져 여전히 볼 수가 없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시기도 한다. 즉 타락한 이방 선지자였던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자( 22:21-23)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열어(22:28) 나귀가 본 바를 말하게 하심으로 우둔한 발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다. 즉 제 3의 매개체를 사용하셔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뜻을 전하시는 것이다.

 

 

  .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 (3:17-18)

세상적인 물질과 교리적 지식으로 가득찬 자들은 종종 자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부요한 줄로 착각하나, 그러한 것들은 불로 소각될 세상의 썩어질 것에 불과하니 오직 하나님을 향한 금과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무장하며, 육신의 정과 욕심 또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몸의 수치를 회개로 씻고 의로운 삶의 결과인 흰 옷으로 가리며, 교만으로 인하여 멀었던 눈에는 겸손과 청결의 안약을 바름으로 영적인 세계를 보라는 권고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과 의로운 행실로 인하여 세마포 단장을 하고 영적인 눈이 띄어지면 비로서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 뜻을 볼 수가 있게된다. 이젠 주님을 볼 수가 있음으로 목자되신 어린 양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가 될 수가 있다.(14:4, 7:17)

 

 

3. 의복의 종류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예수의 피를 우리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씻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 자녀의 신분이 되지만 여전히 육체의 더러움(벧전 3:21)을 지니고 산다. 그러나 그 이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 '성령의 새롭게 하심'(3:5)을 거치며 ''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 (4:24)을 입게 된다. 세상 죄악으로 더렵혀 지는 우리의 수족을 물로 씻고 성령의 역사로 새사람으로 입을 때, 우리의 영혼은 희고 반짝이는 흰 세마포를 선물 받게된다. 이에 대한 예표로서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전 바깥마당 물두덩의 물로 수족을 씻고 반포 속옷(흰 세마포)을 입었었다.

 

시편 132:9, 16에서도 (사 61:10에서와 같이) 제사장이 입어야 할 두 가지 옷을 설명하였다

첫째는 '구원'을 입어야 하며(16), 둘째는 ''를 입어야 한다(9).

<시 132:9>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다음으로는 구약의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입었던 의복과 왕의 왕후(신부)가 입었던 옷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왜냐하면 이 옷들은 그림자이기에 이를 살펴봄으로 우리의 영적발전단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영적단장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였던 아론의 아들들이 입었던 의복(28:40)으로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하얀 세마포 속옷과 (3가지)이었으며, 대제사장(아론)의 의복은 여기에다가 푸른 겉옷(31)과 조끼인 에봇(6) 그리고 가슴에 붙이는 판결흉패(29)와 머리에 두르는 성패(36), 4가지가 더 추가되었다(28).

 

또한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부가 입는 옷은 신부측의 부와 명예 또 신부에 대한 가족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신부가 왕에게 시집을 오기 전 친족과 아비의 집을 잊어버려야 하며( 45:10), 왕으로 인도 되기 전 금 옷(Wrought, 금을 쳐서 늘려 가공함) 을 입고(13), 그 위에다 오색실로 수를 놓아(Needlework, 손으로 수놓음) 왕에게 이끌려 간다(14). 이제 '오빌'의 금으로 꾸민 왕후는 왕의 우편(9)에 서서 궁중의 모든 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   

 

 

4. 영적 성장과 영적 단장

  '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이솝 우화가 있다. 이 임금님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깨닫지를 못하여 온 세상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는 비록 세상의 왕으로서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자연인 한 사람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실패한 삶을 살았는지가 판가름 나게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함으로 얻게 되는 영적성장의 정도에 따라 하늘나라의 신분이 결정된다. 영적단장의 가장 기초가 되는 흰 세마포가 실제임을 깨닫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자신의 수치를 덮는 하얀 세마포 옷으로 단장한 후에는 날마다 회개와 선한 행실로 이 옷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삶(3:5)을 유지하는 한편 이후에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인 주님을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부단히 정진하여야 한다.

 

이러한 영적성장의 발전단계는 이제 하나님의 장막(8 페이지 참조)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음으로 더 자세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제단'에서 영원한 희생제물로 드려진 '예수의 피'를 우리 마음의 문설주에 바른 후에는 물두멍으로 나아가야 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온 몸(원죄)을 씻어( 1:5) 하나님께 나아가는 근거를 얻기 위한 것이었으며, 물두멍의 물은 우리의 수족을 씻기(40:30-32) 위한 것이다. 즉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더럽혀지는 손과 발 즉 마음에 축적되어지는 죄를 씻음을 의미한다. 디도서 3 5절에서와 같이 이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이 새롭게 하심의 과정이다. 이는 거듭나는 단계로 시작하며 또한 마음의 할례(2:11)를 거쳐 성령의 역사 안에서 '' '거룩함'을 입은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4:22-24)인 것이다. 

 

아론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의 물로 수족을 깨끗이 씻음으로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 30:17-20) 또한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룩한 옷을 입어야만 하였다. ( 40:12-13) 이는 그림자로서 우리가 장차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이 거룩한 옷(흰 세마포)을 입어야 함을 예시하고 있다.

 

 

5. 이스라엘 인들의 분류

이스라엘인 전체를 제사장으로 삼으려 하셨던 계획(19:6)은 출애굽시 금송아지 사건을 계기로 수정되어 하나님께서는 '모세'편에 선 레위인(32:26)들 만을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따라서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인들은 11개 지파와 레위지파로 나누어지고, 제사장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으로 구분되며 이들은 단지 레위지파에서만 선발되었다.

 

1)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던 모든 이스라엘 인들은 바깥마당의 제단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제사에 참관할 수가 있었다.

  이는 영원한 번제물로 드려진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의 문설주에 발라 구원함을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예표한다.   

 

2) 레위인들은 성막 외부의 일 즉 성막을 보호하며 봉사하는 일을 하였다. 한 가지 유의하여야 할 것은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소유(3:45)로서 레위인으로 계수된 자는 22,000 명이었다. (3:39) 그러나 그들이 다 성막의 일을 맡은 것이 아니라 8,580 명에게만 할 일과 멜 일이 맡겨졌다.( 4:48-49) 또한 이들은 성소를 외부에서는 볼 수가 있었으며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 만지며,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였지만, 성막 안에는 들어 갈 수도 또 볼 수도 없었다. (4:20,18:3) 하나님 성막의 일을 담당한 실질적 레위인은 전체의 약 1/3 8,580 명에 불과한 것(4:48)을 기억하자.

 

  22,000 명의 레위인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거듭난 신자를 의미한다. 또한 8,500 명의 레위인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참 크리스챤을 예표한다. 참 크리스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기업된다. (거듭난 자는 다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을 뿐이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즉 '' '거룩함'으로 지어진 새 사람만이 거룩한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3) 제사장들은 이 땅의 분깃은 받을 수는 없었지만(13:33) 하늘나라에서는 큰 기업을 받게된다.(45:3-4) 성소 바깥은 자연의 빛인 태양빛으로 비추어지지만 성소 안에는 등대가 빛을 비추인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과는 분리가 되어 자신의 성결함을 유지하여야만 하였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 몸을 씻고 순결함을 의미하는 흰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하였다. 또한 제사장들은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 날에 거룩한 떡인 진설병(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하늘의 힘(거룩함과 생명)을 공급 받았다.

 

거룩한 나라의 백성인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성도)들로서, 7:18과 벧전2:9에서와 같이 이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또한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들과 함께 거하시리라는 약속을 얻게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옳은 행실로 흰 세마포를 입고 있는 무리들이다.

 

제사장들이 흰 옷을 입고 들어가는 성소 안에는 태양의 빛은 들어올 수가 없었고 오직 등대의 빛만이 존재하였다. 흰 옷을 입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제부터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빛(세상적 진리)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진리이신 '주님의 빛'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4)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갈 수가 있었으며 언약궤 안 항아리에는 감추어진 만나가 들어 있었다. 감추어진 만나는 '버가모'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리라는 약속이 주어짐(2:17)을 보아, 대제사장은 이기는 자를 예표한다. 하늘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푸른 겉옷을 입은 대제사장들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항상 자신을 성별히 관리하여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다른 생명을 구원해 내고자 하셨으니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자리에 서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 분의 죽음을 통하여 온 인류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의 위치에 서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다.(14:27) 주님은 현재에도 특별한 소수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삶을 부탁하신다. 이기는 자는 이러한 주님의 부탁에 "주여 나는 당신을 위하여 서 있습니다. 어떤 것도 심지어는 내 생명까지도 당신을 위해 버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르는 자들인 것이다. 그 자리가 십자가의 형극일지라도 개의치 않으며 기쁨으로 십자가에 오르는 자들인 것이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 이들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새 예루살렘성에 거주하며,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얻게된다.(21:7)  아멘!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15:8)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12:1)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